윤교수님께서는 12년동안 직접 그곳에서 살면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셨습니다. “은혜란 버티는 것입니다. 정말 포기하고 싶을 때는 환경이 안 좋을 떄가 아니라, 하고있는 일에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입니다.” 12년을 버티면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에 눈시울을 적시는 시간이었습니다.
찬양이 뜨겁습니다.
화종부 목사님께서 누가복음 10:25-37 말씀을 가지고 “은혜의 혁명, 희생하며 사랑하기”라는 제목으로 설교해 주셨습니다. 설교 일부를 아래에 올립니다.
어제 우리는 은혜의 새로운 질서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은혜받은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단순히 겸손하게 살고 낮아지며 훗날의 영광을 기대하는 것은 세상의 질서를 따른 삶일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그저 그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사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고 잊으라는 뜻입니다. 오직 그분만 아시면 되기에 우리가 한 것을 기억할 필요는 없습니다.
은혜의 질서를 살아내는 다양한 방법 중 대표적인 하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은혜 안에서, 주인의 큰 희생으로 인한 사랑을 바라보기에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많이 희생하사, 은혜의 새로운 질서를 우리에게 허락하심 그 속에 진짜 사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단순히 감정적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구주는 사랑은 ‘여기있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은, 어떤 공로나 자격에 의한 조건적인 것이 아닌, 나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참 사랑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을 하는 삶이 은혜 안에서 사는 대표적인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배우지 않고서는 사랑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말씀에서 율법교사는 두가지의 질문을 합니다. 그의 어떻게 영생을 얻느냐는 첫번째 질문에 예수님은 ‘사랑하라’고 대답하십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억지로 하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 그 사랑을 배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훈련함을 의미합니다. 이 것은 은혜의 질서를 따르는 중요한 삶의 방식입니다.
율법교사의 그렇다면 “내 이웃”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예수님은 예화 하나를 들어주십니다. 이 예화에는 훌륭한 종교인 두사람과 평신도 한 명이 등장하는데 평신도는 유대인이 아닌, 철천지 원수 격인 사마리아 인이 등장합니다. 이 세명의 공통행동은 강도당한 자를 일단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 그냥 피하여 지나간 종교인 둘과는 달리, 평신도 사마리아인은 다른 행동을 보여줍니다. 보고, 불쌍히 여겨-가까이 가서-응급처치를 한 후-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가- 넘치는 공급과 긍휼을 베풀어 주게 됩니다. 이 비유 후에 예수님은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십니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인가”
여기서 우리는 두 질문의 차이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율법 교사의 관심은 “나의 이웃”이 누구인가 라는 내가 사랑”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면,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하는 예수님의 타인 중심적 질문은 이웃의 초점은 “나”에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내가” 사랑해야하는 “내 이웃” 그전에, 자기중심성을 깨뜨리고 타인 중심, 그렇게 다른 사람이 내 삶에 들어오는 것이 사랑의 첫 걸음입니다. 여기서 죄인의 가장 큰 본성인 자기중심성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깊게 뿌리내린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 율법교사의 모습은 결국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죄인인 우리에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끊임없는 나의 자기중심성과 이기적인 본성을 마주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 자기중심성이 깨뜨려지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진짜 사랑이 가능해집니다.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는 과정은 나의 한계, 밑바닥을 보는 과정. 즉, 똘똘 뭉쳐있는 나의 죄성과 마주함에서 사랑을 배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스스로는 사랑할 수 없는 나의 자기중심성을 내가 먼저 마주해야 합니다.
다음, 사마리아인이 등장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웃의 범위를 제한하고 있는 율법교사의 오류를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이웃에 경계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성소를 무너뜨리 실 때, 인간을 구별 짓던 모든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이웃에 경계의 짓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많이 보입니다. 좀 눈에 튀는 특이한 사람들이야 말로 가장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선을 긋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대상을 가리면 은혜가 열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가서 행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랑은 세상이 말하듯 좋은 핑크빛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오히려 많은 대가와 자기부정, 자기를 깨뜨리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속 제사장처럼, 레위사람처럼 많은 사랑의 대상들에게서 피해가며 나의 자아를 깨뜨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은혜를 받은 것 같긴 하지만 그 은혜의 바다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나의 본성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나의 그 담벼락을 무너뜨려 보면 하나님은 더 가까이에서 자격없는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영생의 치명적 약점은 얕게 믿으며, 남이야 어떻든 나는 좋고 쉬운 길, 편한 길로 가고싶어 하는 것, 예수가 가장 수고함으로 우리를 살리신 것을 잊어감에 있습니다. 우리에겐 가장 많이 손해보신 우리 구주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하나님 나라 은혜의 질서를 따라 나를 깨뜨려 은혜에 바다에 들어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신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로 하님께, 찬양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