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은] KOSTA의 노령화, new vision to serve or challenge to overcome?
미국내 한인 유학생 통계에 따르면 학부생의 비율이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Institute of International Education는, 전체 한인 유학생 중 학부생이 69.4%, 대학원생은 15.0%인 것으로 보고하고 있습니다(2008/9학년도 기준)
반면, 미국 코스타에 참가한 코스탄의 구성에서는 평균 연령의 증가, 기혼참석자 비율의 증가 (50% 상회, 2010 Chicago Conference), 그리고 직장인/일반 참석자 비율 증가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eKOSTA에서는 이와 같은 현상이 한인 청년학생운동을 지향하는 KOSTA와, 넓게는 청년학생운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도전을 주는지 고민해보고자 하며, 여러분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아래와 같이 의견을 주실 분들은 eKOSTA@kostausa.org로 메일을 주시기 바랍니다.
(eKOSTA 편집부)
올해로 KOSTA 25주년을 맞이하였다. 25년동안 KOSTA의 섬김의 대상은 KOrean STudents in America(북미 유학생) 에서KOrean STudents Abroad로, 이제는KOrean STudents All nations으로 확장되어왔고, 대학원 유학생중심에서 1.5세를 포괄하는 학부와 청소년 사역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조국과 민족을 향한 복음적 소명의 영역을 모든 나라와 족속을 향한 한인 디아스포라의 선교적 사명으로 발전시키기에 이르렀다. 복음주의 청년학생운동으로서의 KOSTA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 역사와 하나님 나라 확장에 대한 기대는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뜨거운 열정가운데 살게 한다.
이러한 일련의 발전과 변화가운데에서도 한가지 변화되지 않은 KOTSA의 핵심가치는, 바로 KOSTA는 한인 “청년학생” 운동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학생”는 현재 학생인 사람들에 국한 하지않고, “학생”일 때에 KOSTA에 동참했던 사람들, 졸업을 하고 사회인으로서 KOSTA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구체적인 사역의 영역에서도 이들 KOSTA “선배”들의 지속적인 헌신과 섬김 – 멘토와 강사님들의 background를 주목해보자 – 을 통해서 후배 “학생” KOSTA가 가능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전 “청년학생”일 때 KOSTA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멘토, 간사, 강사, 교사등의 한정된 영역이외에 KOSTA에 설 자리는 어디인지, 그들에게 KOSTA는 무엇을 기대하고 또 제시하는가. 일보 확장해서, “청년학생”의 때에 KOSTA를 만나지 못하고 “청년 이후 사회인”의 시기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KOSTA가 reach out할 수있는 가능성은 없는가, 복음주의 청년 학생운동으로 태동되고 발전해온 KOSTA에게 복음주의 “청년 이후” “부부-부모” “사회인” 운동의 역할까지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일까.
위의 질문들은, KOSTA의 미래에 대한 추상적이고 거시적인 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솔직히 그럴 여유도 자격도 없다), 다분히 개인적인 고민과 갈증, 경험과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1998년, 유학생으로서의 힘겨운 첫 1년을 마치고 처음 KOSTA 시카고 conference에 참석했을 때, 나는 누가 뭐래도 “청년학생”, 한인 유학생이었다. 2002년 결혼을 한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학생”이었고, 서른이 채 못 된 나이었기에 아직은 “청년”이라고 불리울 수 있었다. 그러나 2008년, 직장인이며 두 아이의 엄마로 서른 중반이 된 시점에 다시 KOSTA의 문을 두드렸을 때, 그리고 나와 비슷한 인구학적/사회경제적 조건을 가진 사람들과 조별모임을 하면서, ‘펄펄 뛰면서 부르는 엇박자의 찬양’을 잘 따라가기 어려운 부모된 우리들은 KOSTA의 중심에서 다소 벗어나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이제 ‘학생’ 아니고, 또 ‘청년’의 일반적인 특징들이 많이 희석되어있어서, 진정한 “청년학생”들을 위한 자리에 minority로 우리 자신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조별모임의 귀한 것과, 오전 QT의 풍성함을 우리가 왜 모르겠는가. 부부가 함께 하는 말씀 묵상의 그 깊음과 아름다움을 왜 우리가 사모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졸리고 배고프고 떠들고 우는 아이들이 있다면 앞서 열거한 것들을 부부 중 한 사람, 혹은 한 가정으로서의 부부는 포기하게 된다. 아이들이나 배우자의 희생이 없이는 온전히 감당하기 어렵고, 또 KOSTA가 기대하는 분량의 섬김을 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수있는 여러 변수때문에 기혼 참석자들은 조장 지원에 주저하게 된다. KOSTA의 통계에는 이 현상이 ‘기혼조 조장 부족’으로 잡힌다. KOSTA의 사역가운데서 발견되는 기혼부부의 非청년적 특징은 어린 자녀가 있을 때 발현되기는 하지만, 자녀가 아직 없는 젊은 부부에게서도 “청년”적인 역동성의 저하가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어느 정도 발생, 진행되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작년에도 올해에도 KOSTA 연차 수양회에 당당하게(?) 참석하였다. 그리고 40대의 동료 기혼가정 참석자들과 교제하였다. 우리들 “청년 이후”세대에게 KOSTA는 무엇일까? 영적 재충전, 지역교회에서 공급받지 못했던 좋은 말씀들을 통한 도전, 비젼의 (재)발견, 관계의 회복, 그리고 좋은 그리스도인들과의 만남. 혹자는 이것을 family retreat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KOSTA에서 제공하는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면서 프로그램을 초월(?)하는 가족 휴가를 보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것이 과연 KOSTA가 해야될 역할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가득담고서.
현상에 대한 description을 잠시 뒤고 하고, 보다 실질적인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이제 마흔이 그리 멀리 보이지만은 않는 이 시점에 나는 복음주의 “청년”학생운동이라는 KOSTA를 “졸업”해야 하는 것인가? 만약 “졸업”한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KOSTA는 집회나 조직이 아니고 ‘운동’이기에, “졸업”이라는 개념자체가 성립할 수없지만, KOSTA의 모든 사역과 집회에 참여하는, 혹은 그러한 사역과 집회가 초점을 두고 있는 대상자라는 협의에서 생각해볼 때, 더욱 좁게는 매년 연차수양회에서 제공되는 세미나의 주제들을 접할 때마다, 장성한 분량으로 가지 못하고 KOSTA가 떠먹여주는 이유식에 매달려 있는 영적 어른 아이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KOSTA의 “청년”정신을 노쇠 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두렵고 죄스러운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솔직히, KOSTA같은 곳을 원하는 우리들, 非청년 부부 사회인에게는 KOSTA외에 갈 곳이 없다!!
대부분의 한인 유학생들이 학업을 마치고 사회인이 되면 조국으로 돌아가던 때와 달리, 최근에는 많은 유학생들이 학업을 마친 후에 결혼을 통해서, 취업을 통해서 미국에 정착을 한다. 이러한 추세는, KOSTA시카고 conference의 참석자 통계에 분명하게 반영되고 있으며, 확장일로에 있는 kids KOSTA, youth KOSTA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KOSTA의 영역이 학부생과 조기유학생 혹은 1.5세 학생으로 확대되는 것은 “청년학생”운동이라는 이름에 맞는 방향성이다. 그러나, “청년학생” 이후에 대하여 KOSTA는 어떤 방향성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다. 참석자의 연령분포와 미혼-기혼비율변화가 KOSTA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이며, KOSTA는 이 현상을 새로운 vision으로 바라보는가, 아니면 위기적인 현상으로 해석하는가.
매년 더 많은 아이들과 기혼 가정이 참석함으로 인해서 운영상의 어려움이나 더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없다. 자봉은 부족하고 기혼 조의 조별모임은 ‘아빠’모임 혹은 ‘아무나 한 사람’모임이 되버리기도 한다. 아이들과 관련된 안전사고와 식단 문제, 숙소의 확보 및 배정 문제, kids KOSTA와 youth KOSTA 의 부담이 더욱 커진다. 프로그램에 있어서도, 부부상담이나 자녀 교육과 같은 가정사역 영역에서 확장되고 있는 현상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내 안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고민하는 소즉적인 접근을 뛰어넘어 세상을 향하여 힘차게 치고 나가는 “청년학생”운동으로의 KOSTA의 방향성에 맞지 않다는것이다. KOSTA가 “청년학생”운동이라는 점에서 위의 현상들은 희망적이고 이상적이기보다는 ‘위기’라는 말로 요약될 만 하다. 그렇다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할 차례이다. ‘위기’를 ‘기회opportunity to explore’로 볼 것인가, 아니면 ‘도전challenge to fight’로 볼 것 인가가 key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따라, 모든 사람은 “청년학생”의 때를 거쳐서 “청년 이후”의 삶을 맞이하게 된다. “학생”이었던 사람은 “직장인”이 될 것이며, 그저 한 사람의 독립된 “adult”이었던 사람은 “부부”가 또 “parent”가 된다. 이 시기를 지나가는 혹을 맞이하게 될 모든 KOSTAN들에게 KOSTA는 무엇인가? “청년”이후의 삶을 준비시켜주는 운동인가? “청년”의 때에 KOSTA에 동참하고 도전받고 헌신한 후에는 당당히 KOSTAN의 삶, 즉 “복음을 선포하고 성경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살아야 하며, 이것은 KOSTAN 스스로가 지어야 할 짐이며 소명이다라고 나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KOSTA 를 “졸업”해야만 한다. 그러나, “청년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KOSTA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이에 대한 KOSTA의 책임과 비젼은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해주기를 원한다. 만약 “청년 이후”의 삶이 “청년”때 KOSTA를 통해서 훈련되고 도전받고 헌신한 바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면, 이는 “청년학생”운동의 한계인가, 아니면 “청년학생” 자신의 문제인가?
다시 부끄러운 나의 경험과 나의 동료 젊은 부부들의 삶에 대한 간접 경험으로 돌아가본다면, “청년”의 때를 KOSTA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 (각자 나름대로) 뜨겁게 보냈던 두 사람이 만나서 이룬 우리 가정이 “청년 이후”의 삶, 하나된 두 사람의 삶, 두 아이를 책임지는 부모의 삶, 그리고 사회인으로의 삶을 살면서, “청년학생”때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들과 도전에 대하여 전적 무지함과 지혜없음의 상태에 있으며 따라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더욱 답답한 것은, 이 문제들에 대하여 무언가 분명하게 대답해 줄 수있는 어떤 source도 없으며 모두가 그저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는, 후배 “청년학생”들에게 제시해줄 무언가를 배워가고 있기는 한 것인가 좌절하는 한편, 지금의 “청년학생”들은 하나님의 축복의 섭리를 따라 곧 맞이하게 될 “청년 이후”의 삶에 대하여 잘 준비되고 있는지, 과연 “청년 이후”의 나는 무엇을 miss해왔고 이제 무엇을 pursue해야 되는지 의문에 의문을 더해갈 뿐이다.
미혼 청년학생(99-01), 기혼 청년학생(02-04), 그리고 기혼 非청년非학생(?)(08-10)으로 KOSTA와 함께 하면서, 나는 “청년”의 때에 도전받고 헌신했던 열정을 실제의 삶으로 지속적으로 구현해야 하는 기본명제의 굳건함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실천양식에 있어서 “청년”의 때에는 고려할 필요 없었던 새로운 조건들이 개입되는 것을 실감하였다. 바울과 같이 자신의 소명을 위해서 미혼으로 남기를 선택하는 것이 귀한 부르심인 것을 사실이지만, 결혼과 가정, 그리고 자녀라는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고안하신 틀이며 축복이다. 하지만 헌신된 미혼 청년일 수록, 헌신된 청년 부부일수록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부모의 자리에 설 때에 자신이 얼마나 준비되지 못했는지를 깨달으며, 자신이 소망하고 계획했던 모든 사역을 이전과 같은 우선순위와 효율성으로 감당하지 못하게 됨에서 오는 좌절과 답답함을 절실히 경험하게 되고 이것이 부부관계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마저 발생한다. 또한 “청년학생”의 시절의 순수함을 마음이 품고 세상가운데 하나님 백성으로 살고자 할 때, 직장인으로서 사회인으로서 부딪히게 되는 현실은 캠퍼스안에서 경험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더욱 치열하고 더욱 거센 물결로 우리를 압도함을 경험하게 된다.
어린 자녀를 양육하는, 아주 헌신되고 열정적인 “청년”의 때를 지냈던30-40대 가정들의 “영적인 끼인 상태”는 비단 KOSTA내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아니다. 아이들 때문에, 아직은 불안정하기만 한 사회생활가운데 struggle해야만 하는 이 시기의 성도들에게 신앙생활은 종종 현상유지이상이 되기 어렵다. 대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자모실에서 아이들의 울음소리과 가운데 예배를 드려야 하는 아내를 혼자 두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봉사와 섬김을 감당할 수있는 – 마치 “청년”처럼 – 남편은 많지 않다. 마음껏 찬양하고 기도하며 부부가 함께 손 잡고 중보할 수있었던, 그리고 하나님앞에서의 비젼과 결단을 밤새 이야기 나누었던 그 시간은, 종종 10분도 넘기기 어려운 주1회의 약식 가정예배로 대체되어버린다. 부부가 나란히 차를 나누며 각자의 비젼과 소명을 나눈 때가 언제인지를 회상하는 현상을, 정기적금과 선교헌금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뜨거운 “청년”의 때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헌신된 마음이 없기 때문에라고 결론내리는 것은 너무 섵부르지 않을까.
복음주의 운동에 동참한 “청년학생”에게 적용되는 성경적 원칙은 “청년 이후”의 세대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따라서 만약 한 사람이 “청년학생”으로서 이러한 성경적 원칙위에 잘 서 있고 훈련되어 있고 헌신되어 있다면 그가 “청년 이후”의 시기를 지날 때에도 그 삶에서 실현되어야 할 본질적인 가치는 동일하다. 그러나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앞에 두고 이 가치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하는 부분에서 “청년학생”이 내놓게 될 해법과 “청년 이후”의 해법에는 차이가 있을 수있다. “미혼 청년 학생”이 자신의 젊음과 자신의 career를 헌신하는 것과, “청년 이후 기혼 사회인”이 동일한 헌신을 하는 것은 “청년학생”의 그것을 단순연장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차원에서의 접근을 요구한다.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녀사이에는 삶의 목적과 방향과 방식에 있어서 존중과 침범의 tension이 존재한다. 이로 인한 갈등과 오해는 신실하게 “청년학생”때에 복음안에서 구축한 원칙대로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 남편 혹은 아내일 수록, 부모일 수록 오히려 더 처절하게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이 되기도 한다.
가난했던 “청년학생”의 때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던 재정관리, 이제 부부이므로 또 부모이므로 새롭게 발견하게 된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인격의 문제,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에 따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문제, 성실하고 productive한 employee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직장생활과 복잡해진 인간관계, 자녀양육과 가사 때문에 좌절된 career등은, “청년학생”의 단계에서 획득한 복음적 원칙으로 쉽게 그 답이 찾아지지 않으며 또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하나의 답을 찾기 어려운 여러가지 삶의 도전들중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이와 같은 고민들이 모든 “청년 이후” 사람들에게 해당되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을 만한 정도의 사람들에게 절박하고 절실한 삶과 신앙의 문제로 다가오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부부관계의 문제도, 자녀 양육의 문제도 모두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지만 ‘시간’이 과연 최선의 해결책일까. 이 ‘시간’동안 긴장감없이 “청년 직후”의 시기를 보내는 사이, 나와 우리 가정 그리고 우리 자녀들이 무방비상태로 세상의 가치에 물들어 간다는 것이며, 그래서 정말 “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그 “청년학생”의 길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점이다. 아무도 우리가 “청년학생”의 때에 KOSTAN이었음을 절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런 형태의 삶에 고착되는 것이다. 과연 “청년학생”의 때를 이제 막 지나온 “젊은 부부”는 기다림 혹은 일시적 쉼의 시기를 지나야만 하는 것일까? 부부이기 때문에 부모이기 때문에 사회인이기 때문에 “청년학생”보다 더 역동적이고 더 powerful하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세상속으로 나아가고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우주적인 사역에 더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는 없을까?
여기서 나는 부부관계 상담, 내적 치유, 부모학교, 자녀 양육과 같은 전통적인 가정사역의 틀을 뛰어넘는, 북음주의 운동으로서의 “젊은 부부 KOSTA”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다. “젊은 부부”에의 reach out은 청년학생 사역에 비해서 더 많은 인적 물리적 투자를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생업과 양육에 잠식되어 있는 “젊은 부부”들의 정신과 마음을 새롭게 일깨우고 일어나서 뛰게 만들 수 있다면, “청년학생”때의 향수에 의지않고 오늘 세상속 한가운데서 하나님 백성으로 구별되게 살아갈 수있도록 empower할 수 있다면, “청년학생”운동을 뛰어넘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을 기대할 수있다. 왜냐면, “청년학생”때의 헌신과 서원이 실질적으로 삶에서 세상가운데서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roll model이 없다고 탄식하기를 멈추고 수많은 roll model들이 사회 각 영역에서 배출되도록 과감히 투자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나이를 먹고 사회인이 되고 부모가 되면 세상의 가치와 타협한다, 헌신이 사라진다라고 어떤 “청년학생”이 꾸짖는다면, 나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그“청년학생”앞에 사죄할 것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사회인이 되고 부모가 된다고 해서 저절로 더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않으며, 어느 누구도 과거의 열정과 헌신에만 의존해서 오늘의 영적전투를 감당할 수는 없다는 일반론적인 진실을 이해해주기를, 그리고 피를 토하며 기도하는 “청년학생”들 앞에 떳떳한 “청년 이후”의 그리스도인으로 우뚝 서서 그들이 맞이하게 될, 우리가 지나왔던 그 길을 함께 손잡고 힘을 보태줄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선배, “청년 이후”들을 위해 지원사격해주기를 간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