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밟기’는 샤머니즘을 기독교로 포장한 것에 불과”

뉴스앤조이(http://www.newsnjoy.co.kr/)에 게재된 기사를 허락하에 올립니다.

김세윤 박사 기고, “‘영적 전쟁’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

한국에서 ‘영적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땅밟기 선교’를 행하는데,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영적 전쟁’이 아니다. ‘영적 전쟁’은 사단의 나라에 맞서는 것이다. 우리가 가치 판단과 윤리적 선택을 하는 순간마다, 맘몬이라는 우상을 미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단의 통치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 통치를 받는 것이 바로 ‘영적 전쟁’이다. 그것이 예수께서 가르치고, 사도들이 가르친 ‘ 영적 전쟁’이다. 

신약 어디에 이교도의 신전을 뱅뱅 도는 방법으로 ‘영적 전쟁’ 하라는 가르침이 있는가. 흔히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돌며 ‘땅밟기’ 했다고 하는데, 그런 해석을 따르는 것은 원시적인 신학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계시 신약을 두고 왜 구약의 예비 계시로 돌아가서, 특히 여호수아 이야기를 ‘영적 전쟁’의 준거로 삼는가? 왜 그렇게 구약의 이야기 하나에 몰두하는가? 그것도 신학적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문자주의에 얽매여서 말이다. 여호수아 식으로 ‘영적 전쟁’ 하고 선교한다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교도들 다 죽였듯이 우리도 불신자들을 칼로 다 죽여야 할까? 그것은 과격파 이슬람이 이어받은 “성전’, ‘지하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계시가 가르치는 ‘영적 전쟁’은 전혀 그런 게 아니다. 

에베소서가 말하는 ‘영적 전쟁’

‘영적 전쟁’ 따위의 미신이 한국교회에 퍼져 도리어 교회의 건강과 선교를 해치고, 전도의 길을 막고 있다. ‘축사'(요사스러운 기운이나 귀신을 물리쳐 내쫓음)나 ‘땅밟기’ 같은 방식으로 ‘영적 전쟁’ 한다는 사람들에게 왜 그런 식으로 선교하느냐 물으면, 그들은 에베소서 6장 12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를 언급하며 ‘영적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에베소서에서 ‘영적 전쟁’을 어떤 방식으로 하라고 가르치느냐 물으면 그들은 대개 묵묵부답이다. 6장 13절 이하를 읽지 않았거나,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기 때문인 것 같다. 

‘영적 전쟁’은 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심각한 ‘영적 전쟁’의 전장에 서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 매일 대항해야 한다. 그렇다면 ‘땅밟기’ 같은 방식이 에베소서가 말하는 ‘영적 전쟁’일까. 에베소서에는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4~17)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로마 병정의 무장 상태를 묘사하여 설명함으로써 ‘영적 전쟁’의 심각성을 일깨우고 있다. 하지만 허리띠·호심경·군화·방패·검·투구 등 로마 병정의 무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ㅇㅇ의’가 중요한 것이다. 여기 ‘성령의 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풀어 주지 않았는가. 즉 우리가 진리를 굳게 지키고, 의를 행하며, 열심히 돌아다니며 화평의 복음을 전하여 죄인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이웃과 이웃을 화해시키며, 핍박을 믿음으로 이겨 내는 것이 에베소서에서 가르치는 ‘영적 전쟁’이다. 

에베소서는 에베소의 교회에 보내진 서신으로 이해된다. 에베소서 수신인란에 일부 유력한 사본들이 에베소라는 지명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에베소에는 고대 ‘세계의 일곱 불가사의들’ 중 하나라는 아르테미스(디아나) 여신의 신전이 있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그 신전을 돌며 ‘땅밟기’ 또는 ‘축사’ 하여 ‘영적 전쟁’ 하라는 가르침이 있는가? 

한국에 엄청난(선한?) 영향을 끼친 미국의 한 유명 선교학 교수가 10여 년 전 한국의 한 대형 교회 목사의 도움으로 양국의 그리스도인 다수를 동원하여 에베소의 아르테미스(디아나) 여신 신전 폐허를 밟는 ‘영적 전쟁’을 하였다 한다. 이런 뉴에이지 소설 같은 ‘영적 전쟁’의 결과는 무엇인가? 그래서 터키와 이웃 무슬림 나라들에 복음의 역사가 활발하게 되었는가? 세상에 자유·정의·평화가 증진되었는가? 그러기는커녕 그 직후 저 과격파 무슬림들이 그들식 ‘영적 전쟁'(지하드) 을 벌여 온 세계(특히 서방 기독교 세계)가 전쟁과 테러 공포에 휘말리고, 종교 전쟁, 문명 충돌의 커다란 위기를 맞게 하지 않았는가? 이런 결과를 거액을 들여 그런 ‘영적 전쟁’을 감행한 사람들의 논리에 맞추어 해석하면 우리 하나님이 아르테미스(디아나) 여신에게 패배했다는 것인가? 에베소서는 우리에게 이런 이교도적이고 미신적인 ‘영적 전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가르친 진정한 ‘영적 전쟁’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곧 믿음 안에 굳건히 서서, 진리를 고수하고, 사랑과 의를 행하고, 성령의 도움으로 화평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 맞서 싸우라는 것이다. 

희생당한 어린양의 방법

신약의 모든 책들이 다 이러한 ‘영적 전쟁’을 가르친다고 할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전쟁 언어를 가장 절실하게 사용하며 ‘영적 전쟁’을 말하는 책은 요한계시록이다. 그 책은 교회를 유다의 사자 다윗적 메시아 예수가 소집한 12사단 14만 4,000의 군대라 한다. 그리하여 용·짐승·거짓 선지자라는 사단의 삼위일체에 맞서 거룩한 전쟁을 처참히 치르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 책은 사단의 나라에 대항해서 하나님나라가 어떻게 승리하는가, 교회가 그리스도의 군대로 그 전쟁에 어떻게 참여해서 하나님나라의 승리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아시아 일곱 교회들에 보내진 하나의 순회 서신이다.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전이 있는 에베소 교회에도 보냈고, 사단의 왕좌가 있는 버가모 교회에도 보냈다. 하지만 그 책 어디에도 그 신전들 주위를 ‘땅밟기’ 하고 ‘축사’하는 식으로 ‘영적 전쟁’ 하여 승리하라는 말은 없다. 도리어 요한계시록은 “희생당한 어린양”의 방법으로, 즉 순교를 무릅쓴 자기희생의 정신으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여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이기라고 가르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는 로마 황제 체제로 현신화하여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거짓 복음으로 열방을 미혹하는 사단의 나라에 맞서 여러 도시에 세워진 황제 숭배의 신전을 ‘땅밟기’ 하여 ‘영적 전쟁’ 하라는 가르침은 일언반구도 없다. 그 책은 도리어 강요되는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팍스 로마나의 유혹에 도취되지 말고, 창조주 하나님만 진정한 왕이시니 그의 통치 아래서만 진정한 의와 평화와 구원이 있다는 진리를 선포하여 사단의 거짓 왕국을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사단은 ‘짐승’으로 무력과 압제와 수탈 등의 방법으로 세계를 지배하지만 교회는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고 그의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천하는 삶으로써, 즉 사랑과 자기희생과 진리 증거로 ‘영적 전쟁’을 하여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극복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희생당한 어린양’의 방법이고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다. 예수와 사도 바울 그리고 계시록은 교회로 하여금 사랑으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되,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써 신실하게 선포하여, 사단의 죄와 죽음을 극복하라고 일관되게 가르친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영적 전쟁’이다. 

‘영적 전쟁’의 전쟁터는 우리 실존의 삶이다. 날마다 가치 판단과 윤리적 선택이라는 갈림길에서 사단의 통치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 ‘영적 전쟁’이다. 그런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통치는 구체적으로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천하라는 요구로 온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께서는 모든 계명을 ‘이중 사랑 계명’으로 요약하셨는데 (막 12:28~34), 사도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법’ 또는 ‘그리스도의 법’이라 했다 (고전 9:21, 갈 6:2). 하나님 사랑의 반대말은 우상 숭배이다. 예수께서 가장 경계한 우상은 불상도, 아르테미스 신상도, 버가모의 사단상도, 신격화된 황제상도 아니라 바로 맘몬이다 (마 6:24, 눅 16:13). 모든 우상 숭배는 파괴력이 있다. 그러나 가장 큰 파괴력을 가진 우상 숭배의 형태는 바로 돈 또는 재물에 대한 우상 숭배이기 때문이다. 맘몬·재물이 우리의 안녕과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우상 숭배가 부자간 형제간도 갈라 원수가 되게 하고, 사회 계층 간의 불의·불평등·갈등을 낳고, 나라 간 전쟁도 일으키며, 전반적으로 인간성을 황폐화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그 우상 숭배를 가장 심각히 경고하신 것이다. 오늘날 사단은 우리 육신을 자극하여 맘몬이라는 우상을 숭배하게 한다. 돈이 우리에게 안녕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니 돈을 많이 벌기 위해 거짓말도 하고, 사기도 치고, 바가지도 씌우고, 유해 식품 등 가짜 물건도 팔고, 부실 공사도 하고, 뇌물을 주고받기도 하고, 힘으로 남을 억압하라고도 한다. 이런 사단의 통치에 맞서 있는 우리에게 날마다 성령이 상기시키는 것은 사단의 그러한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라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하나님나라를 그리스도의 재림 시 오는 것으로만 가르쳐 먼 미래로 연기해 버리든가, 죽음 뒤 우리의 영혼이 가는 저 위 하늘 어딘가로 밀어 올려 버려, 많은 성도로 하여금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통하여 이미 출범한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셨다. 사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하나님의 통치를 지금 대행하심을, 즉 그의 성령을 그의 교회에 퍼부어 주시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의 통치의 일꾼 또는 군사가 되어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실현해 가도록 하신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기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통치는 오늘 우리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맘몬 우상 숭배 대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착취 대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나라)의 법’ 또는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라는 요구로 오는 것이다. 물신주의적 탐욕을 배제하고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자세로,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에 피는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의 ‘아빠’ 노릇 해 주심을 믿고, 그의 뜻에 순종하며 살라는 요구로 오는 것이다.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이웃을 억압하고 착취할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요구로 오는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가치 판단과 윤리적 선택의 순간에 성령은 맘몬 우상 숭배와 이웃 착취를 조장하는 사단의 통치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통치의 갈림길을 밝히 보여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사단의 통치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의 일깨워 주심, 인도하심, 그리고 믿음 주심에 힘입어 우리가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천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단의 통치를 극복하고 ‘성령의 열매들’ (갈 5:22~23 – 사랑, 화평, 관용,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 등 도덕적 가치들!), 곧 ‘의의 열매들’을 맺는 것이다. (빌 1:11; 마 7:15~23) 이것이 진정한 ‘영적 전쟁’ – 성령에 힘입어 악령과 싸움 – 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가정 안에서도 서로 사랑함으로써, 직장이나 사업장에서도 정당한 이익만 얻으며 나의 상품이나 서비스로 이웃의 삶을 안전하고 풍요롭게 하며, 우리 사회 또는 환경 전반에서도 자유·정의·화평·건강이 증진되도록 노력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고,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 맞서는 ‘영적 전쟁’을 치루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진정한 ‘영적 전쟁’을 한다면, 우리나라에는 하나님나라의 샬롬이 얼마나 크게 실현될 것인가? 그것은 또 전 세계에 얼마나 큰 선교의 효과가 있을 것인가? (마 5:13~16, 벧전 2:9) 


‘땅밟기’는 샤머니즘을 기독교로 포장한 것에 불과 

봉은사나 카자흐스탄, 또는 예루살렘에 가서 ‘땅밟기’ 하는 것은 ‘영적 전쟁’이 아니다. 미신, 즉 샤머니즘의 발로다. 그리스도인들이 무리지어 세를 과시하면서 무슨 도시를 하나님께 바친다고 외쳐 대거나, 무슨 우범 지대 또는 퇴폐 지역을 ‘땅밟기’ 한다고 해서 그 도시, 그 지역이 ‘성시화’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그릇된 ‘영적 전쟁’의 폐해는 중세 십자군 전쟁이 우리에게 충분한 교훈을 남겼다. 십자군 전쟁이 지금까지도 교회의 이슬람 세계에 대한 선교를 가로막고 있다는 현실을 똑바로 보라. 11세기 초 부터 200~300년간 서양의 기독교 국가들이 십자가 기를 높이 들고 몇 십만의 군대를 동원해 성지를 중심으로 근동 지역을 ‘땅밟기’ 했다. 그 땅 이곳저곳에 십자가의 기를 꽂고 주께 바친다고 난리를 피운 결과가 무엇인가. 그렇게 해서 성지와 중동 세계의 귀신들을 몰아내고, 이슬람을 박멸하고, 주 예수의 이름만을 부르는 교회로 가득 찼는가. 괜히 기독교 국가였던 비잔틴 제국만 멸망시켰고, 이슬람 터키 제국이 들어서게 했으며, 고대 기독교가 왕성했던 아시아와 북부 아프리카 지역이 다 이슬람 땅이 되게 하지 않았는가? 지금까지도 무슬림은 기독교에 대해 극렬히 적대하고, 교회의 선교를 막고, 기독교 세력이 무엇만 하려 하면 즉각 ‘십자군’ 이름을 대며 저항하지 않는가. 십자군 ‘땅밟기’가 중동 전체를 이슬람화하는데 공헌했다는 역설적 결과를 낳은 것이다. 

많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샤머니즘을 극복하지 못하고, 복음이 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도 못하고, 신학적으로 사고하는 능력도 갖추지 못한 채, 이른바 선교 열정만으로 무슨 무슨 ‘스탄’이라는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땅밟기’하는 선교의 결과를 보라. 중세의 십자군이 일으킨 역효과가 그대로 나타고 있지 않은가. 봉은사 ‘땅밟기’도 그런 결과를 낳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너희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모욕을 당한다”라고 사도 바울이 자기 백성 유대인들에게 한 절규(롬 2:24, 사 52:5)가 오늘 한국교회에도 하는 절규가 아닌가? 그런데도 한국의 선교 지도자들은 선교 전략으로 ‘땅밟기’를 주장한다. 몇 년 전 미국 시카고 휘튼대학에서 열린 한인 세계 선교 대회에서도 ‘땅밟기’를 중심으로 한 선교 전략을 짰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런 중요한 대회에 모인 신학자·선교학자·교회 지도자·선교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그런 선교 ‘전략’을 짰다면, 그것은 놀랍고 슬픈 일이다. 

한국 교회는 급격히 쇠락하고 있다. 일대 위기를 맞은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군 운동의 정신과 승리주의(Triumphalism)에 빠져 있는 듯하다. 몇몇 소수의 힘없는 그리스도인이나 단체들을 제외하고는 진정한 회개와 갱신의 기미를 보여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많은 교회의 구원론은 사실상 구원파 또는 고대의 영지주의의 구원론에다가 중세 가톨릭교회의 공로-상급 신학을 합성하여 놓은 것이고, 그들의 윤리는 세 가지(주일 성수, 헌금, 전도) 하기와 세 가지(술, 담배, 제사) 안 하기로 축약된 바리새적 경건주의요, 그들의 성경 해석은 성경의 ‘정확 무오’ 교리만 앞세우며 문자주의와 율법주의를 주입하는 것이어서, 성도들을 성경의 이곳저곳 본문들을 들이대며 접근하는 갖가지 이단 사설들(예: 여호수아 6장을 들이대는 ‘땅밟기’식 ‘영적 전쟁’, 출 20:4을 들이대는 ‘가계 저주론’)의 쉬운 제물이 되게 하는 것이며, 그들의 영성은 다분히 샤머니즘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다. 

‘땅밟기’ 선교는 우리 조상들이 정월 대보름에 지신밟기 하던 샤머니즘을 기독교로 포장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교회일수록 진정한 ‘영적 전쟁’은 등한시하면서 예수께서 가장 엄중히 경고한 맘몬 우상 숭배를 조장하는 기복 신앙을 열심히 북돋아 많은 성도들을 사실상 사단의 나라 속으로 계속 밀어 넣는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이 기복 신앙의 ‘가짜 복음’을 선포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 많이 벌기를 염원하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 때마다, 사실상 그들로 하여금 사단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통치에 대적하게 하는 것이다. 즉 사단의 나라 군사로서 하나님나라에 대항해 ‘영적 전쟁’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 역설이 벌어지는 곳이 지금 ‘영적 전쟁’ 한다는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다. 그래서 한국 교회 안에 “믿음 좋다”는 그리스도인 사기꾼들이 그렇게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해야 할 진정한 ‘영적 전쟁’의 제일 전선은 우리 자신의 삶의 현장이요, 제이 전선은 우리 자신의 교회 안인 것이다. (아니, 제일 전선은 우리의 교회 안이고, 제이 전선이 우리의 삶의 현장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겠다) 그리고 제삼 전선은 사단의 나라의 거짓·불의·억압·갈등에 맞서 하나님나라의 진리·공의·자유·화평을 확대해야 하는 한국 사회인 것이다. 한국 교회의 신학적 성숙 없이 어떻게 이런 진정한 ‘영적 전쟁’을 치룰 수 있을까? 한국 교회가 얼마나 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어 얼마나 더 쇠락해야, 회개와 영적 갱신 그리고 신학적 성숙의 운동이 일어날까? 

김세윤 / 풀러신학교 신약학 교수

(이 글은 <뉴스앤조이>의 유연석 기자가 10월 28일 김세윤 교수와 전화 인터뷰하고 녹취한 것을 김 교수가 보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