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란 무엇인가?-양희송
(이 글은 2004년 KOSTA/USA에서 양희송 실장의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세미나를 편집부에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 복음주의 개관
(1) 복음주의 용어정리
흔히 사용되는 복음주의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부터 정리해 보자. 우선 evangelicalism과 evangelism의 사용이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각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자. ‘복음을 전하다’는 의미 evangelize에는 두 가지 명사형이 있는데, 각각을 살펴보면,
Evangelism : 이것은 ‘주의(-ism)’이라가 보다는 그냥 evangelize(복음을 전하다)의 명사형이다.
Evangelization: 복음화. 단순한 개인전도의 의미를 넘어서 복음의 영향력을 미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 두 단어의 구분은 74년도 로잔언약에서 구체적으로 사용되었는데, John Stott는 로잔대회 기조연설에서 “Mission에는 evangelism(개인전도)과 sociopolitical engagement(사회참여)가 있다.”라는 말로 두 단어를 분리해서 사용하였다. 또한 evangelize의 형용사형에도 두 가지가 있다.
Evangelical: 복음주의적
Evangelistic: 복음 전도적 (개인전도에 관련되어서)
예를 들어, evangelistic preaching은 전도설교라 할 수 있고, evangelical preaching은 복음주의에 근거한 설교를 뜻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복음주의를 evangelism으로 오해하면, 그저 ‘전도하자’는 정도로 오해할 수 있는데, 사실 복음주의는 evangelicalism으로 그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것이다.
(2)역사적 기원
복음주의라는 말은, 70 80년대의 Billy Graham과 Christian Today라는 잡지의 등장, 그리고 미국 Jimmy Carter 대통령이 자신이 스스로 거듭난 기독교인임을 공공연히 드러냄으로써 보편화되었다. 복음주의는 미국적인 특수한 상황을 지칭하는 것이며, 또한 20세기 초반의 Christian fundamentalism과 구별되는 어떤 것이다라고 일반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복음주의는 7 80년대의 미국적 상황을 포함하지만 그 이상의 것임을 인지해야만 한다.
복음주의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1. 지리적 분포: 복음주의는 영어권 지역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비영어권에서는 복음주의라는 말이 전혀 사용되지 않거나,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독일에서 사용되는 evangelish라는 용어는 루터로 대표되는 종교개혁자를 지칭한다. 즉 독일에서 복음주의하면 ‘개신교’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에 루터교도 점차 자유주의로 흐르게 되면서, evangelical이라는 용어가 영어에서 역수입되어 사용되게 되었고, 결국 개신교를 전체적으로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한편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evangelical이라고 하면, 카리스마틱 교회를 지칭한다. 또한 영국에서 evangelical이라고 하면, ‘나는 카리스마틱이 아니고, 또한 자유주의도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복음주의라는 말은 일관성 있게 전세계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아니라, 영어권 기독교를 주 배경으로 하고 사용되는 용어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물론 유럽의 영어권과 북미의 영어권에서 사용되는 복음주의라는 의미도 조금 다르기도 하지만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한국에 알려진 복음주의가 미국을 중심으로 들어온 것이기에, 유일한 복음주의라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각 나라마다 그 특성에 맞게 복음주의를 받아들였듯이 한국도 우리의 정황에 맞추어 받아 들여야 한다.
2. 현상적 특징: 영국의 데이빗 베딩턴이라는 역사학자가 언급한 복음주의의 특징을 크게 4가지로 요약했다.
Activisim: 전체적으로 활동적으로 움직인다.
Biblicalism: 성경을 강조
Conversionism: 교회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회심해야 한다.
Cross-centralism: 십자가를 강조
또한 영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자인 John Stott는 복음주의자들의 특징으로 ”Bible people and gospel People”이라는 두 가지로 설명했다. 또 영국의 Allister McGrath는 복음주의를 ”성경의 권위, 하나님의 주권, 그리스도의 십자가, 성령, 공동체, 복음전도”라는 크게 6가지 중요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이러한 복음주의에 대한 언급들은 특성을 묘사한 것 뿐이지, 본질을 묘사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최근에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이 바로 “복음주의가 운동인가 신학인가?” 하는 부분인데, 점은 John Stott의 ‘복음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언급되고 있다. 즉, 내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과 그것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런 현상에서 ‘무엇을 믿는가’하는 신학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다. 유명한 복음주의 학자인 버나드 램이 스위스에 있는 칼 바르트의 밑에 있으면서, ‘나는 복음주의의 겉만 만졌던 것이지 실제적인 내용을 채우지 못했다’고 고백한 일이 있다. 그러면서 복음주의가 전략과 운동은 있지만 신학이 부재하다고 통탄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복음주의를 신학적으로 정리할 필요들이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2. 역사 속에 살펴본 복음주의
복음주의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 다시 베딩턴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자. 복음주의의 특성을 activism, biblicalism, conversionism, cross-centralism으로 크게 볼 수 있다면, 복음주의를1970 80년대의 미국적 상황으로 국한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일 복음주의가 20세기의 일이 아니라면, 보통 18C 부흥운동이나 16C 종교개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John Stott는 복음주의의 근원을 초대교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4세기의 니케아신조에서 이야기하는 삼위일체를 믿는 믿음이 바로 복음주의 전통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기독교되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는 삼위일체의 신앙으로 부터 시작한다. 사실 니케아 신조가 처음 만들어 질 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나누어 졌다. 동방교회는 세 분 하나님을 강조하면서 성령님을 더욱 강조했고, 반면 서방교회는 하나되시는 하나님에 대해 강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도 성령에 대한 좋은 연구들이 동방교회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4세기에 “그리스도 중심적 (cross-centalism)” 이라는 개념이 정리된다는 면에서 복음주의의 뿌리를 거기서 찾는다.
종교개혁의 흐름에 “성경중심 (biblicalism)”의 사상이 나타났고, 더불어 루터가 벼락 맞아 죽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로마서를 통해 회심하는 과정을 거치는 중에 “회심 (conversionism)”에 대한 강조가 나타났다. 이런 복음주의의 흐름은 18 19세기의 영미의 부흥운동으로 이어진다. 영국의 잔 웨슬리, 조지 휫필드나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로 대표되는데, 그 특징 중의 하나가 “회심운동”이다. 예를 들어, 웨슬리같은 경우 옥스포드에서 방법주의(Methodist)라고 불리 울 만큼 경건 훈련을 강조하는 Holy club에 열심이었지만, 구원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중, 그 Holy club에서 아메리칸 인디안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 되어 미국으로 가던 배 안에서 폭풍을 만나게 되었다. 웨슬리 자신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던 반면, 모라비안들은 놀랄 만큼 침착하게 대처하는 것을 보고는 적잖은 충격을 받게 된다. 그 후 웨슬리는 미국에서의 선교에 실패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모라비안과의 교제를 가지게 되는데, 그 때 모라비안의 한 집회에 참석해서 로마서 강의를 듣는 중에 회심을 체험하게 된다. 그의 일기를 보면, ‘나의 마음이 이상스레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더불어서, 부흥운동에서는 “행동주의 (activism)”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자리에 앉아서 책만 쓰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웨슬리같은 경우는 1년에 1000번, 즉 적어도 하루에 3번 이상씩 설교를 할 만큼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사람이었다. 웨슬리와 휫필드가 주로 했던 사역방법은 순회전도였다. 웨슬리의 경우 말 안장 위에서 주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순회전도를 다녔다. 이런 일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상당히 획기적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영국 성공회의 경우 목사들이 담당 지역의 교구를 맡아서 정착 사역을 했었지만, 웨슬리와 휫필드는 광부들을 좇아 다니며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선교에 대한 강조를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윌리암 케리, 허드슨 테일러, 캠브리지 세븐, 건초더미 기도회, 학생자원자 운동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그들이 강조한 것 역시 회심중심, 십자가중심, 성경중심이며 상당히 활동적이라는 점에서, 그들에게도 복음주의의 흐름이 존재했슴을 알 수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로 넘어 오면서, 복음주의는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된다. 19세기 말부터 유럽에서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이 발달하게 되고, 그에 대항해서 근본주의가 나타나게 된다. 사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미국적인 현상이었지만, 자유주의 신학의 분리주의적이고 상호 비판적인 문제점에 반대해서 복음주의(Evangelicalism)이 등장하게 된다. 반면 영국에서는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모습으로 복음주의를 준비해 오게 된다. 신정통주의는 칼 바르트의 신학을 말하는데, 그는 정통적인 신학의 모습을 많이 회복시키기는 하지만 방법론은 성경 비판 등에 열려 있어서 신정통주의 (Neo-Orthodoxy)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는 미국에서는 배척을 받지만, 유럽에서는 학생 운동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존 스토트, 마틴 로이드 존스, 제임스 패거, 마이클 그린 등이었다. 그 당시 자유주의자들은 복음주의자들을 지적이지 못하다고 비아냥거리고 있었는데, 위에 언급한 복음주의자들이 그들을 잠잠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대학에서 교육 받은 지성인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영국 복음주의의 흐름이다. 특히 마이클 그린의 경우는 옥스포드와 캠브리지에서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했었는데, 그의 전도를 받았던 사람 중에 현재 영국 복음주의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알리스터 맥글래스와 같은 사람이 있다. 맥글래스는 한 때 막스즘에 심취해 있던 사람이었다.
반면, 미국의 복음주의는 빌리그래함과 크리스챤 투데이, 그리고 풀러신학교로 대표된다고 하겠다. 이런 흐름 가운데, 늘 소수에 머물렀던 복음주의가 7 80년대에 이르러 기독교의 주류가 되고, 다수파가 되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이를 두고 복음주의 르네상스라고도 부른다.
20세기의 복음주의는 이렇게 진행되어 왔다면, 앞으로 21세기 복음주의는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이제는 수적으로도 많아졌고, 훌륭한 학자도 가지게 되었으며, 재정적으로도 풍부해서 해외에 선교사도 파송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복음주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런 맥락에 관해 현재 복음주의권에서 크게 이슈가 되는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복음주의 통합?
복음주의는 계속 통합되어 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작은 카테고리로 나누어져 갈 것인가?
(2) 복음주의의 성공 이후에 생기게 된 파생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예를 들면 영국에서는 Post-evangelicalism이라는 흐름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복음주의를 계승하면서도 단절하는 행태로 나타나는데, 그들이 주로 복음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은 보면, 복음주의가 물량주의적이고, 대사회적으로 소극적이며,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 비일관적이라는 점을 비난한다. 한편 미국의 impowered evangelical은 post-evangelical과 같은 복음주의에 대항하는 흐름은 아니지만, 비슷한 성향을 띤다고 할 수 있겠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미국의 Vineyard church를 들 수 있는데, 그들은 일반적으로 제삼의 성령운동으로 불린다. 첫번째 성령운동은 오순절 운동으로 ‘방언은 곧 구원이며 구원 받으려면 자신에게 와야 한다’는 분리적 성향이 강했다. 두번째 성령운동인 카리스마틱 운동은 분리주의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뚜렷한 신학 없이 성령을 많이 강조했다. 그에 반해서 Vineyard 교회를 중심으로 한 제3의 성령운동은 그 신학적 기반을 복음주의에 두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카리스마틱에 반하는 개념으로 impowered evangelical이라고 부른다. 흥미로운 점은 Vineyard church에서 impowered evangelical에 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제임스 패커가 그 서문을 썼다는 것이다.
(3) 복음주의 신학의 구도
미국의 복음주의자들 중에서 경계 밖으로 나가려는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중심 지향적 접근), 다른 사람들은 복음주의의 중심을 두고 가지가 뻗어 나가는 것은 허용해야 한다(경계지향적 접근)는 두 가지 흐름이 존재하고 있다.
3. 복음주의권의 쟁점들
(1) 성경관:
“성경의 무오성 vs. 성경의 권위”.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강조하는 반면,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성경 말씀을 삶의 최종권위를 더 강조한다.
(2) 성경해석의 방법론과 전제:
“성서비평을 수용하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성경해석이 최종적(final)인 것이냐 아니면 잠정적(provisional) 것이냐에 대한 논쟁도 있다. 이런 문제는 동성애와 같은 윤리적인 문제를 해석하는데 많은 논쟁의 여지를 남긴다.
(3) 복음전도와 사회개혁: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사회참여와 개인구원이라는 낭만적인 대립구도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19 20세기에 유행했던 고전적인 의미의 자유주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복음주의를 고전적인 자유주의의 반대하는 모습으로 연상하는 것은 시대 착오적이라 할 수 있겠다. 사회참여와 복음전도를 더 이상 대립구조로 보지는 않는다. 당연히 사회참여와 복음전도는 함께 가야하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이 구조에 대해 지나친 논쟁을 겪어 오지 않女?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4) 신학적 방법론과 전제들:
기존의 전통적인 복음주의적 고백과 이해들에 대해 수정을 가하는 입장들이 많이 나왔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지옥관 – 다시 말해 영혼 멸절설에 대해 John Stott같은 학자는 지옥이 영원히 불타는 곳에서 영원히 형벌 받는 곳이 아닐 수 있다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또 하나의 예는 예정론이다. 우리가 예전부터 알고 있던 ‘하나님은 다 아신다’라는 입장에 대해, ‘하나님 스스로도 미래에 대해 열어 놓으셨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또 하나는 신정론 –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 는 점인데, 만일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다스리시는 분 이시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불의와 고통의 궁극적인 책임도 하나님께 있다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고통 받지 않으신다’는 기존에 입장에 대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자신도 고통 받으셨다’는 이론들이 소개되고 있다.
토대주의(foundationalism): 사실(fact)이 있고 그에 대응해서 가치가 창출되는 것이 전통적인 입장이라면, 한 부류의 사람들에 의해 포스트 모더니즘에 근거해서 복음주의적 신학을 해보려는 시도들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실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우리는 상징들을 가지고 말할 수 있고 가치를 창출해 내면서, 실제의 유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라는 포스트 모던니즘에 기초해서 복음주의 신학을 해보려는 흐름들이 있다. 그들은 복음주의 좌파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4.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한국 복음주의는 이런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문제 제기와 고민을 스스로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 기독교의 진보와 보수의 갈등을 살펴보면, 사실 서로가 잘 알지 못해서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실상, 전체적인 신학적인 스펙트럼으로 보자면, 한국의 진보적인 기독교는 보수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1990년대에 들어서 민중신학 자체가 사라졌슴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 민중교회에는 신학자만 있고, 실제 민중은 존재하지 않게 된 현실이다. 또한 사회 부패에 대해 대항하던 세력들이 이제는 정부로 대거 들어가 있을 뿐 아니라, 캠퍼스의 진보운동도 거의 사그러지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은, 이제 한국 기독교에는 사회참여를 등한시했던 보수적인 세력만이 남게 되어서, 복음 전도를 주장하는 사람들만의 모임으로 비춰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남아 있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사회 참여적 혹은 대사회적인 임무에 대해 등한시하게 되다면, 한국 기독교는 사회에 무관심한 세력으로 취급되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살펴보면, “경제적으로는 중산층, 문화적으로는 보수적이며, 정치적으로는 우파”이다. 그런데 이런 가치는 한국사회가 청산하고자 하는 바로 그 가치라는데 아이러니가 있다. 만일 한국교회가 2 3년 내에 의미 있는 몸짓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이런 청산의 흐름에 휩쓸려서 아무도 관심도 없고 기대도 하지 않는 입장에 놓이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낀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한국교회는 목회자들은 상당히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반면, 실제 한국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과 청년들은 그와는 사뭇 다른 성향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 기독교를 대표해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의견이 실제적인 교인들이 가진 생각과 많이 다르기 때문에, 교회 구성원들은 심한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
이제 복음주의에 대한 많은 자원들을 모아서, 누군가는 모든 기독교가 현재 사회에서 비판 받은 바로 그 모습만은 아님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런 노력들이 건강한 복음주의권에 있는 사람들이 애써야 할 부분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