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원] 유진 피터슨 읽기 (2) – 유진 피터슨과 영성

이 글은 지난 6월에 청어람에서 했던 유진 피터슨 읽기에 대한 강의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저는 14년째 기독교 서적을 전문으로 번역하고 있는 번역가 양혜원입니다. 제가 번역한 유진 피터슨의 책은 공역을 포함해서 총 8권입니다. 나열해 보면, 「교회에 첫발을 디딘 내 친구에게」(The Wisdom of Each Other), 「거북한 십대 거룩한 십대」(Like Dew Your Youth-Growing up with your Teenager), 「현실, 하나님의 세계」(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공역), 「이 책을 먹으라」(Eat This Book), 「그 길을 걸으라」(The Jesus Way), 「비유로 말하라」(Tell It Slant), 「부활을 살라」(Practise Resurrection)(공역), 그리고 가장 최근작으로 「유진 피터슨: 부르심을 따라 걸어온 나의 순례길」(The Pastor: A Memoir)입니다. 저는 학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그냥 번역가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한 저자의 글을 자신의 모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각하게 되는 몇 가지의 것들을 번역가 입장에서 다루어 본 것입니다.

2. 유진 피터슨과 영성
 
지난 번 글에서도 말했지만,피터슨이라는 작가 앞에 따라붙는 수식어는‘깊은 영성의 소유자’ 혹은 ‘영성의 대가’입니다. 그렇다면 피터슨이 말하는 영성은 무엇일까요? 우선 영성이라는 용어부터 좀 살펴보면, 영어로 ‘spirituality’는 기독교만의 용어가 아닙니다. 삶의 의미를 찾고, 자기를 넘어서는 어떤 대상을 찾는 모든 탐색과 추구와 과정들을 다 영성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한국어로 ‘영성’이라는 단어는 주로 기독교 계통에서 씁니다. 불교에서는 영성이 깊은 사람을 ‘불심’(佛心)이 깊다고 하지 영성이 깊다고 하지는 않으니까요. 아마 영어로 하면 ‘불심’도 Buddhist ‘spirituality’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미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영성에 대한 관심을 피터슨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인간에겐 영속적이고 영원한 것에 대한 갈증과 갈망이 있다는 사실이 널리 인정받고 있고 공공연히 표현되고 있다. 자신의 삶이 직업 역할과 시험 등수로 축소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태도가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맞는 영성을 스스로 만들어낼 것을 권유받고 있다는 점이다.”(「현실, 하나님의 세계」, 25쪽)

‘자신에게 맞는 영성을 스스로 만들어’내다보니 필연적으로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그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피터슨은 곰돌이 푸우의 이야기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북극(North Pole)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북극을 찾아 나선 곰돌이 푸우와 그 일당들. 그들은 한참을 우왕좌왕하다가 푸우가 들고 있는 막대기(pole)를 보고 드디어 북극을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리더 격인 크리스토퍼 로빈이 선언합니다. “이제 탐험은 끝났어. 네가 북극을 찾을 거야!” 피터슨은 이 이야기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내가 ‘보았던’ 것은 모호하게 정의된 영성(북극)을 찾아다니는 매력적인 인물들이 살고 있는,내가 속한 문화였다.이따금씩 그러한 인물들 중 한 사람이 무엇인가를 집어 들면 누군가가 그것을 보고 ‘바로 저거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정말로 ‘저것’처럼 보인다. 그러고는 누군가가,대개는 영적 권위를 가진 어떤 인물(크리스토퍼 로빈)이 거기에다가 팻말을 단다. ‘영성’. 그리고 그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다음 탐험이 제안될 때까지.”(「그 길을 걸으라」, 343쪽)

이러한 문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피터슨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영성 신학’을 제안합니다. “문화에 의해 규정된 역할이나 기능을 넘어서는 삶을 살려는 열의가 널리 퍼져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그러나 이러한 열의는 결국,문화가 정해놓은 한계들에 갇힌 영성을 낳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 때가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산 경험과, 우리 믿음의 조상들의 풍부한 이해와 실천을 다루려는 뚜렷한 기독교적 시도를 일컫는 말로서 ‘영성 신학’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현대 세계의 초점 없이 산만한 ‘의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속에서 뚜렷한 기독교적 경험을 일컫는 말로서 말다.”(「현실, 하나님의 세계」, 25-26쪽)

그는 이어서 ‘영성’과 ‘신학’이라는 단어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학’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울이는 주의,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알고자 우리가 기울이는 노력을 가리킨다. ‘영성’은, 하나님이 자신과 자신의 일에 대해 계시하시는 모든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가정과 일터에서 살아낼 수 있는 것들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영성’은 ‘신학’이 하나님과 멀찍이 거리를 둔 채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것으로 타락하지 않게끔 해준다. ‘신학’은 ‘영성’이 그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것이 되지 않게끔 해준다.이 두 단어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현실, 하나님의 세계」, 26쪽)

이러한 영성 신학이 삶에서 나타나면 어떤 모습일까요? 저는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형용사로, ‘seamless’를 꼽습니다. 피터슨은 자기 아내의 부모님, 즉 장인 장모를 묘사할 때 이 단어를 씁니다. “그분들의 기독교 신앙은 삶에 철저하게 통합되어 있었다.…어쩌면 기독교 신앙이 그분들의 삶에 통합된 것이 아니라 그분들의 삶이 철저하게 기독교 신앙에 통합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분들의 삶과 신앙은 서로 단절 없이 이어져(seamless) 그분들의 존재에 진정성을 더했다.”(「유진 피터슨」, 308쪽)
‘seam’은 아시다시피 솔기입니다. 우리가 입는 옷에는 솔기가 있습니다. 옷의 앞판, 뒤판, 소매를 이은 자리입니다.솔기는 도로의 과속방지턱처럼 거치적거리는 부분입니다.매끄럽지가 않습니다.단절이 느껴집니다.그런데 그러한 솔기가 없는 매끄러운 옷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자신이 믿는 바와 아는 바가 하나 된 모습,존재와 행함에 아무런 경계가 느껴지지 않는 자연스러움.피터슨이「현실,하나님의 세계」에서 제러드 맨리 홉킨스의 시를 빌어 말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표정으로, 사지의 움직임으로, 아름답게 나타나시는데, 그게 인위적이지 않고, 그 시에 등장한 물총새와 잠자리와 돌과 현악기와 종처럼,자신이 하는 일이 곧 자신인,그런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피터슨은 그러한 일치의 삶이 바로 우리가 예수를 믿으
면서 살고자 하는 삶의 모습이고,우리의 목적지라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