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혁] 주님! 한국입니까, 미국입니까?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
주님! 한국입니까, 미국입니까?
들어가는 말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라는 본 칼럼의 제목은 장래 진로로 고민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의 마음을 사실대로 표현한 것이다. 한국에 가고 싶으나 마땅한 직장이 없다. 별수 없이 미국에 남아서 살고 싶기도 하지만, 미국 이민 생활에 자신이 없고 두렵다. 결국 IMF 경제한파가 유학생들의 진로 결정에 진퇴양난을 몰고 온 셈이다. 이미 이러한 상황을 일찍이 예고하고, 나는 KOSTA 2000에서 “미국을 점령하는 유학 생활”이라는 다소 이상한 세미나 제목으로, IMF 경제 한파 뒤에 유학생들이 진로 결정을 하게 될 때 예견되는 혼란에 대해 그들을 준비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본 칼럼에서는 “미국을 점령하는 유학 생활”에서 내가 주장하였던 논제의 근본을 유지하며, 이를 다시 글로 써서 진로 문제로 고민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다.
물론 나는 여기서 크리스천의 직업관 같은 신학적인 관점을 논할 의사는 전혀 없다. 이미 크리스천 직업관에 관하여서는 이코스타의 여러 필진에 의해 충분히 논의되었다고 본다. 또한 내가 한국을 떠나 온 지가 거의 15년이 지났으니, 한국에서 취업을 어떻게 하고 또 어떤 방법을 써야 되며,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지는 유학생들이 나보다 더 밝은 편이다. 따라서, “한국은 좁고”의 논제는 유학생 여러분에게 맡겨두는 편이 더욱 좋다고 생각되며, 도리어 내가 좀더 경험했고 또 자신있는 “미국은 두렵다”의 논제에 주요 관점을 두고 본 칼럼을 쓰고자 한다. 아니 차라리 “미국에서 직장을 얻으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되나요?” 또는 “미국 생활에서 겪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어떻게 두려움 없이 극복하며 살 수 있나요?” 라는, 수 많은 크리스천 유학생들의 질문에 나의 경험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대답하고 싶다.
K형제의 고민
지금 학위취득을 앞에 둔 유학생 K형제의 고민을 들어보자.
“최근 한국의 어려운 경제 상황은 학위 논문 심사를 몇 달 앞에 남겨 둔 K형제의 (학위 취득 후) 취업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수년 동안의 힘든 학위 과정을 이제 거의 마쳐가고 있지만, 앞으로의 취업과 진로 문제를 생각하면, 학위 취득의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형편이다. IMF 경제 한파 이후에 고국에서 보내 주시던 향토 장학금이 급격히 줄어드는 바람에, 생활고에 지친 아내의 불평을 감내하는데도 이제 힘에 겨워지고 있다. 최근 학위 취득 후에 취업이 늦어지면서, 유학생 부부들의 가정 불화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통계는 여간 불안한 소식이 아니다. 이에 더하여, 최근에 실직하신 부모님께서는 학위 취득 후 빨리 한국에 돌아와 직장을 얻어서, 부족한 가계를 좀 도와주셨으면 하는 눈치이시다.
게다가 최근에 공부를 마친 선배들이 고국에서 직장 찾기에 고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취업의 문이 참 좁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다행히 미국이 경제의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직장을 얻기에는 한국보다는 나은 형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직장을 얻기가 쉽지도 않지만, 또 얻는다 해도 어떻게 미국에서 계속 살아 남을 수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려우니,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겠다. 자신감이 없다. 날마다 주님께 기도하며, 어디로 가야할 지 여쭈어 보지만, 주님의 응답은 더디기만 한 것 같다. ‘주님, 한국입니까, 아니면 미국입니까? 제발 말씀 좀 해 주세요.’ K형제는 요사이 주님께서 한국에 살아야 하는지 아니면, 미국에 살아야 하는지 그것만이라도 말씀해 주시면 참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K형제의 고민은 현재 거의 모든 크리스천 유학생들의 공통된 고민이요, 또 기도의 제목이라고 볼 수 있겠다. 현재의 상황과는 다소 다르다고 할 수 있으나, 10여 년 전에 유학생들 대부분이 한국으로 돌아갈 때에, 미국에 남게 된 나의 경험담은 여러분의 진로 결정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학위를 마칠 때까지 꿈 속에서조차도 생각지 않았던 나의 미국 이민 생활 이야기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꿈도 꾸지 않았던 미국 이민 생활
내가 학위를 취득하던 90년대 초만해도 미국의 경제는 극히 나쁜 상황이었다. 일본의 경제력이 너무 막강하여서 미국이 이제 망해가고 있다는 패배감이 팽배할 때였다. 따라서 거의 모든 유학생들이 선택의 여지 없이 학위 취득 후에 한국에 돌아가길 원했다. 또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에 돌아가면, 직장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시절이라서, 나의 유학 동료 대부분이 한국으로 돌아갔다. 나도 물론 학위 취득이 가까워지자, 한국의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하여 몇몇 대학에 지원하였으나, 결과는 별로 고무적이지 못하였다. 특히 서른이 훨씬 넘어 늦게 유학을 와서, 동료들 보다 학위 취득에 시간이 더 많이 걸렸고, 나이가 마흔이 가까워서 학위를 취득하게 된 탓도 있었다.
그런데 학위를 마쳐 갈 즈음에 크리스천으로서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줄 만한 도전이 있었다. 유학 생활 동안 나의 믿음의 본이 되었으며, 또 믿음의 동역자로 같은 교회에서 유학생을 섬겼던 믿음의 동지인 P형제가 학위 취득 후에 가족과 함께 M국에 선교사로 자원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함께 섬기던 교회에서 P형제를 M국 선교사로 파송할 때, 나는 그 교회에 선교부장으로 섬기고 있었다. 그 당시는 M국의 선교의 문이 열리지 않았고, 대단히 위험한 시기였다. 그때 주님은 나에게 M국에 나간 P선교사의 사역을 지원할 독립적인 선교회를 미국에 세울 것을 요구하셨다. 하지만 나는 주님이 어찌 말씀하시든지 한국에 돌아가고만 싶었다. 그래서 서둘러 국제 바울선교회(PIM)를 조직하고, 미국 정부에 비영리 선교회로 등록까지 마쳤다. 나는 총무 간사로서 M국 선교 지원의 확장을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사실 나는 속히 한국에 돌아가기 위하여 가능하면 빨리 국제 바울 선교회의 재정적인 자립을 이루고, 또 장기적인 P선교사의 선교 지원 교두보를 미국에 확보해 두고 싶었다. 그렇게 임무를 완수한 후에 나는 귀향하는 군인처럼, 선교 사역의 부담을 던져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계속 내 마음에 부담을 주시며, 미국에 남아서 국제 바울 선교회를 섬기며 M국 선교를 지원할 것을 요구하셨다.
어찌할 것인가? 나는 그때까지 학위 취득 후에 미국에 남아서 직장을 잡고 살겠다고 생각해 본적이 꿈에서 조차 없던 터였다. 물론 수년 동안 주님께 한국에 돌아가서 대학 교수로 젊은이들을 섬기게 해 달라고 기도해 오고는 있었다. 나는 두려웠다. 그저 유학 생활이 끝나면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미국 생활의 압박을 다시 감내해야 한단 말인가? 자신 없는 영어 실력을 가지고 미국사회에서 전문 직업인으로 살아 남을 수 있을까에 도통 자신이 없었다. 이때에 주님은 몇 년 전 내가 유학 생활이 힘들어 눈물 흘릴 때에 그 눈물을 닦아주시던 주님의 은혜에 너무도 감사하여, 주님께 드린 나의 신앙 고백을 생각나게 하셨다 – “주님! 저의 모든 삶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언제나 순종하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나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로 하고, 말씀의 약속에 의지하여 미국에 남기로 작정하였다. 내가 미국에 남기로 결정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수 많은 기존연 구원들을 계속 해고하고 있던 IBM Watson 연구소에서 나를 박사후 연구원으로 채용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주님의 섬세하신 인도하심 가운데 꿈도 꾸지 않았던 나의 미국 생활(이민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미국에 남기로 한 후에 가장 먼저 나를 괴롭게 한 것은 한국 유학생으로서 미국에 온 나의 정체성(Identity)이었다. 미국에 사는 나는 한국 사람인가? 미국 사람인가? 나는 어차피 두 문화에 접하고 살 수 밖에 없는 이민 1세이지만, 나의 자녀와 후손들은 어떤 정체성을 가질 것인가? 결국 내 후손들의 피부는 나와 같이 계속 동양인의 모습일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인종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갈 것인가? 꼬리를 무는 수 없는 질문들로 날을 지새웠다. 아마 지금도 미국에 남아 살기로 작정한 유학생들이 이와 같은 정체성 문제에 고민하고 있을 것이 틀림 없다.
재미있는 미국 생활
내가 지금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 초임 조교수로 부임해 온지도 이제 7년이 되었다. 새로운 대학의 문화와 환경 속에서 숨가쁘게 바쁜 나날들이었다. 열심히 연구하고, 또 가르쳤다. 또한 주님의 사역 때문에 대학에서 일하는 만큼의 또 다른 바쁜 스케줄 속에 보낸 날들이었다. 나는 지금도 총무 간사로서 바울 국제 선교회를 섬기고 있다. 주님은 바울 국제 선교회를 축복하셨고, 본 선교회를 통하여 M국 선교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셨다. 바울 국제 선교회는 작은 사람들이 섬기는 구멍 가게 같은 선교회지만, 결코 작은 선교회가 아니다.
주님의 도우심 가운데 나의 연구 프로그램은 이미 대학 내에서 뿐만 아니라 내 연구의 전문 분야에서도 영향을 크게 끼치는 프로그램으로 성장하였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세계 각국에서 내 연구실을 견학하고자 하는 방문객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의 대학에서 견학오신 교수들을 만나게 되면, 거의 어김 없이 언제쯤 한국 대학으로 들어올 계획이냐고 묻는다. 아마 그분들이 보시기에는 한국 대학의 교수로 들어가기 위하여 지금 내가 근무하는 미국 대학에서 훈련을 잘 받고 있다고 생각되시는 모양이다. 또 실제로 한국의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하여 미국 대학에서 잠시 가르치는 젊은 교수들도 있기는 하다. 그런데 이 질문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이상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마치 백인 미국 교수에게 가서 한국 대학으로 언제 들어올 거냐고 물을 때, 백인 미국 교수가 느끼는 당혹스런 감정과 내가 느끼는 감정이 거의 비슷한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브라함처럼 주님께서 명하시고, 허락하신 땅이면 내가 살 땅이라고 믿고 산다. 그래서 나는 한국은 고국으로 믿고 살고, 미국은 내 땅이라고 믿고 산다.
요사이 미국에서는 이민 신학이라는 분야의 연구가 활발하다. 하나님이 명하시고 허락하신 땅이면, 내가 살 땅이라는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이 이민 신학에 근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은 저들의 조상이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던 이방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명하시니,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을 점령하였고, 또 그들의 자손이 거기서 대대로 살아오고 있다. 물론 나는 지금도 미국의 문화와 관습을 배우며 산다. 또 내 평생에 고칠 가망이 전혀 없는 영어의 엑센트를 여전히 유창하게 쓰면서, 오늘도 자유롭게 미국 땅을 누비고 다닌다. 다민족이 어울려 살면서도 서로를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며 사는 미국 생활이 나는 참 재미있다. 내가 미국에 살기 때문에 감당할 수 있는 수 많은 주님의 사역에 참여해 오면서, 왜 주님이 나를 미국에 남겨 두시기를 원하셨는지 이제 조금 이해할 것 같다.
한때는 나도 K형제처럼 “주님! 한국입니까, 미국입니까?”라고 두려움 가운데서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 이민 생활이 자유로워져서 “한국 대학의 교수로 언제 들어올 계획입니까?”라는 질문이 이상한 질문으로 들린다. 그래도 나는 언제고 주님이 말씀하시면 어느 곳으로든지 이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움직이는 이민 생활의 참 자유를 맛보고 있다. 결국 한국입니까, 미국입니까를 주위 사람들에게 묻고 고민하기 전에, 먼저 주님께 물어야 한다. 주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크리스천은 결코 진로를 결정하는데 향방 없이 나아가지 않는다.
다음 회에서는 미국에서 전문직을 가지고 이민 생활을 시작하고자 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을 위하여, 세계 속에서의 한국인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이민 크리스천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