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은] 톰 라이트 – 1

서평 Part 1
<그리스도인의 미덕 > 톰 라이트 
<After You Believe: Why Christian Character Matters>  N. T. Wright

서평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부끄러운 사실을 자백해야 겠다. 우선,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배경지식으로서 톰 라이트의 신학사상에 대하여 무척 무지한 상황에서,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고민과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질문과의 우연한 일치에 힘입어 이 책을 만나고 읽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톰 라이트의 심중을 깊이있게 이해하고 있는 독자라면 나의 책읽기가 그가 제시하는 큰 그림의 핵심을 용케 비껴가고 나의 개인적인 관심사에 근거하여 편식하고 있음에 불편해할 수도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내 수준에서 쉽게, 바로 적용가능한 단답형으로 찾아내는데 몰입되어있는 것은 순전히 나의 미성숙의 소치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집중력이 없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르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이처럼, 쓸 자격이 없는 자가 용감하게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냉면 요리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맛난 냉면 한 그릇의 행복을 나눌 수있지 않을까라는 소박한 마음에서임을 양해해 주시기를.
  

문제 제기 – James의 고민 
James는 20대의 청년이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갔고, ‘요한복음3장16절’의 역사가 그에게 일어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 그리스도의 놀라운 십자가 희생과 사랑, 그리고 천국에서의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의 약속에 대해서 배웠다. 기도와 예배의 생활을 하며 성경을 읽는다. 이전의 나쁜 습관을 버리고, 잘 하지는 못하고 어색하기 그지 없지만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한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이 그를 괴롭혔다. 
What am I here for now? What happens after I believe?
이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답변 – 즉  전임목회자, 선교사, 교사나 의사와 같이 특정한 Christian service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 은 그에게 만족스러운 해답이 되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James는 computer science의 박사과정을 마무리하는 중이고 앞으로의 진로 또한 전도유망하지만, 위에 나열된 career는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도대체, after we believe 와 before we finally die and go to heaven사이의 시간동안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그저 시간을 보내며 “죽어서 천국에 가는 날”을 기다릴 뿐인가? 컴퓨터 공학자로서 James의 지식과 삶의 기회들은 이러한 “영적인” 문제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인가? 도대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What being a Christian is all about?)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고 저자는 1장에서 밝히고 있다.
James의 질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있는가라는 질문으로 rephrase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겪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후자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우리는 어떻게 알 수있는가?  
 
Christian Character, the Transformation
Faith와 final salvation사이의 bridge, 그리스도인됨(being a Christian)의 의미를 규명해줄 이 bridge를 저자는 character라고 제시한다. Christian character를 핵심개념으로 붙잡고 character란 무엇이며, 어떻게 character가 형성되는가에 대한 논의를 Aristotle의 접근법과 비교대조하면서 저자는 논증을 진행해나간다.  Aristotle이 인간의 character의 이상, 목표와 구현에 대해서 무엇을 설파했는지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이 틀을 이해하는데에 약간의 노동이 필요했고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마저 불가능하다. 그러나, Aristotle의 철학에 대한 내용을 건너뛰어도 저자의 메시지를 파악하는데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So, let’s continue.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어떻게 do와 don’t를 분별할 수있는지에 대한 기준으로 우리는 통상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하나는 도덕률(rules)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spontaneous self-discovery)이다. 전자는 말 그대로  일련의 규칙들을 지키는 것이고, 후자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 마음을 만족케 하는 것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규칙들은 우리가 속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회가 부여하는 규칙들에 각자의 신앙과 가정배경, 개인의 양심에 따라 더하거나 감해지는 과정을 통해 구성된다. 하지만, 이 규칙들은 많은 부분 context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시공간과 개인의 uniqueness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후자의 ‘True to yourself’식의 접근법이 우리 시대에 매우 호소력있게 다가오는 것 같다. 자기 마음에 원하고 좋으면 그것이 옳은 것이 되는 이 자기 중심적 사고는, 사회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잠식되고 객체화되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개인의 선택과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는 자못 바람직한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로 인해 삶의  guidelines이 없이 제 멋대로 사는 방종마저 허용되는 문화와 체계를 형성하는게 기여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도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지 않았는데 자신에게 부여된 마음에 내키지 않는 어떤 rules를 지키도록 권면을 받는 일에 불편해한다. 구약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내쳐두고, 예수님의 새 계명을 붙잡고 간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 새 계명에 따라 산다는 것이 율법을 지켜서 의를 이루어가는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이며, 어떻게 이 새 계명을 지키면서 살 수있는지를 잘 모르는 무지함 가운데 있는 것이 솔직한 진단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위의 두 가지 접근법의 한계를 뛰어넘으면서 동시에 통합 완성하는 새로운 차원의 길을 제시해주는데, 그것이 바로 Christian virtues(그리스도인의 미덕)를 습득함을 통한 the transformation of character(인격의 변화)인 것이다. 
 
저자는 “믿은 이후after you believe” 그리스도인의 최종목표는,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의 인격(character)에 회복reflect하고 worship과 mission을 감당하는 authentic/genuine한 인간이 되는 것이며, 이 과정의 핵심은 the transformation of character라고 말한다. 죄로 물든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으로 새롭게 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인의 미덕이 의식적이고 반복적인 선택과 연습/훈련practice을 통해서 우리의 second nature로 자리잡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골프선수에게는 골프근육이 발달하고, violinist는 악기연주를 위한 최적의 체형을 갖추게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Christian virtues가 편안하게 자신 안에서 발현되도록 지속적인 옳은 선택의 훈련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용서하고 사랑하고 인내하는 일이 무척 ‘부자연’스럽고 ‘나답지’않게 느껴지지만, 이러한 연습이 반복되다보면 이러한 미덕이 ‘나의 일부처럼 편안하게’ 자리잡게 될 것이다. 이동원 목사님께서 쓰신,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이라는 책 제목이 떠오른다. 철야기도와 오랜 고민과 이를 악무는 결단이 없이도 새 계명에 합한 선택과 행동을 하고, 겸손과 온유, 평강과 희락, 자비과 긍휼, 오래 참음과 절제, 충성이 죄된 품성을 밀어내고 대신 나의 character가  되는 일, 그것이 being a Christian의 의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감의 의미인 것이다. 
 
Anticipating the Kingdom of God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Christian character를 develop한다는 것은, 이미 임했고 곧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기대anticipate”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language와 그 백성으로서의 삶의 방식을 미리 배우고 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anticipate”이란,  일어날 일에 대하여 단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해서 지금 무언가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외야수가 공이 어디로 날아올 지를 “예상”하고 공이 떨어질 장소에 “미리 가있는 것”처럼 말이다. 외야수의 예상은 틀릴 수 있다. 공이 다른 곳에 떨어질 수도 있고 본인이 잡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anticipate”하는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임하고 반드시 우리에게 임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고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 백성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한 분명한 증거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은 “천국이 가까왔다”로 시작하여 “나를 따르라”로 귀결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바로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자들이 서 있어야 할 자리인 것이다. (chapter 2)
 
A Royal Priesthood, rulers and priests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 우리가 서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우리가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저자의 관점, 즉 already but not yet의 개념으로 조명해볼 때 단순히 개인적인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차원을 뛰어넘는 역사적이고 공동체적인 소명을 내포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receiver에 그치지 않고 agent로 부르심을 받았다. 저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방식을 창조세계와의 관계가운데서 “a royal priesthood”로 정의한다. 하나님 나라된 백성의 vocation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영광과 통치를 모든 창조세계에 exercise/reflect하고(“rulers”),  온 창조세계의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priests”) 것이다. 저자는 worship과 stewardship을,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의 소명으로 요약한 뒤,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이 소명의 현재적인 구현은 거룩holiness과 기도prayer라고 제시한다. (chapter 3)
 
Jesus’s Call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현재적 삶을 풀어내어도, 여전히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의 질문이 남는다. 저자는 일관되게 그 답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강조하고 있다. How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follow me였으며, 그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을 이해하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있는가에 대한 시작이요 완성이면서 또한 확증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율법대신 다른 어떤 계명을 우리에게 얹어주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과 완전한 인간 존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moral example이 되신다고 하면, 통상적으로 이해하듯 타이거 우즈의 스윙 비디오를 보고 초보자도 그렇게 따라할 수있다는 의미이기 보다는, 새로운 morality를 제시해주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fullness of human life는 그 전까지의 율법과 도덕의 세계에서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새로운 경지였다. 결국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new creation을 개시하심으로써 인간이 본래의 창조의 모습, 즉 완전하고 충만한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창조세계 가운데 royal priesthood로서의 인간이 어떤 것인지를 그의 존재와 삶과 사역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다. 즉, 우리가 Christian virtue를 practice함을 통해서 우리의 second nature로 만들어나갈 때 우리가 궁극적으로 다다르게 될 지향점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chapter 4).  
 
저자는 바울의 서신서들을 통찰하면서 이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moral effort를 필요로 하는 일임을 강조해준다. 즉, 옷장에서 적절한 옷을 골라서 입는 일이 mind를 통한 “through thinking”에 의한 것인 것처럼 (옷이 저절로 옷장에서 튀어나와 내 몸에 입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sinful character를 벗고(put off), Christian character를 입는(put on)하는 것은 생각없이 충동적으로 혹은 자동반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변화를 받음”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것인 반면, 구원 이후의 삶, 예수 그리스도같은 완전한 존재로 지어져가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책임이요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현재화하는 소명적 여정인 것이다. (chapter 5)
 
소결
완성될 그리고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격을 오늘 연습하고 나의 second nature로 빚어가는 moral effort가,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님께서 그의 사심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져오신 새 창조 새 언약, 새 생명의 증거sign라는 관점은, 은혜로 얻은 구원 이후 그리스도인의 미덕이, “reward나 payment”를 받으려고 우리가 해야 할 일 즉 “rules of conduct”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줌으로,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겪는 혼란, 결국 예수님의 새 계명은 또다른 율법이 아닌가라는 부담,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거룩함사이의 도덕적 긴장을 해소해주었다.  
이제, 보다 실제적인 연관 질문들을 고민할 차례다. 이와 같이 Christian virtue를 생각함에 있어서 ‘성령의 열매’ 혹은 ‘gifts of Spirit’의 자리는 무엇일까? 또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연습/획득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는 context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일까? 바울은 왜 수많은 미덕중에서 ‘믿음, 소망, 사랑’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저자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미덕이 나의 인격이 될 수있는가라는 점에 있어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러한 존재라는 점과, 성령님의 역할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6장부터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서평 Part 2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