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동국] 정연희 전작 장편소설

eKOSTA 서평


정연희 전작 장편소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많은 사람들이 지난 9월 11일의 대 테러사건을 두고 도데체 왜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알기를 원하거나, 하나님은 왜 그런 끔찍한 일들을 허락하셨는지 의문을 갖게 되었을 줄 안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으로 과연 예수님이 지금 이 시대에 살아 계신다면,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을 어떻게 바라 보실까 하는 질문을 했었다. 그런데 바로 성경에 그 답이 있지 않은가? 누가복음 13장 1절에서 5절까지 보면 몇몇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희생 제물을 바치려던 사람들이 빌라도에 의해 학살을 당했다는 얘기를 하는데, 그에 대한 답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다.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치여 죽은 열 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눅13:4,5 표준새번역). 예수님은 분명 그 시대 당시의 질문하던 사람들, 혹은 나를 비롯한 이 시대의 사람들이 원하는 “왜?”라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으셨다. 대신에 도무지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비극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늘 있다는 것과, 그렇기에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와 궁극적인 우리의 운명을 이야기하심으로 답을 주시는 것 같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달의 양서로 선정한 책 ‘내잔이 넘치나이다’가 결국은 같은 문제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고난을 어떻게 바라 보아야 되고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 문제를 이 책에서는 한 사람의 무명 크리스천의 고난의 인생을 통해서 풀어 나가고 있다. 우리 민족의 대 비극인 육이오 시대를 살면서 고난을 통해 아름답게 피어난 우리의 믿음의 선배에 대한 책인 것이다. 시대적으로 고난과 비극의 시대인 일제시대 말기에 태어나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1952년까지 겨우 26년 8개월을 살았던 한 젊은이의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읽어 가면서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경륜과 뜻을 발견하게 된다. 매서운 북풍한설을 지나고 피어나는 한 송이 매화에 비교될 수 있는 인생, 모래 조각으로 인한 살을 째는 아픔을 감싸 생성되는 진주 같은 인생, 그리고 욥과 같은 고난의 삶을 살았던 현대 우리 민족의 욥에 비유될 수 있는 인생, 맹의순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우리도 함께 아파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맹의순 선생의 제자 중 하나인 박용기처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없어 보이는 그 절망감 속에서도 조금도 요동하지 않는 신앙을 보면서 분노하게 될지도 모른다.


일제시대에 평양의 비교적 부유하고 유복한 가정에서 장로의 아들로 태어난 맹의순은 민족의 식민 상황이라는 아픔 외에는 아무 어려움 없이 자라나는 한 젊은 청년이었다. 중학교 졸업할 무렵 그렇게도 사랑했던 누님의 죽음, 그리고 채 석 달이 되지 않아서 학도병으로 끌려갔던 형님의 전사 소식, 그리고 해방 이후 이북에 세워지는 공산정권으로 인해서 남하하던 나머지 가족은 모든 재산을 사기 당하고 빈털터리로 목숨만 건져 이남으로 내려오게 된다. 연이어 곧 뇌졸중으로 쓰러져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님과 이유 없이 죽어버린 여동생,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그의 어이 없는 삶의 여정, 육이오 전쟁 속에서 남쪽으로 남하하던 중, 공산군 첩자로 오해를 받아 포로 수용소에 갇히게 되는 비극의 삶으로 점철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몇 몇 친구들의 수고 끝에 석방될 기회를 가졌음에도 그는 그것을 거절하고, 그 곳을 하나님이 주신 최상의 사역지로 생각하고, 포로 수용소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중공군 포로 병동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살신성인의 본을 좇아 환자들을 돌보는 것을 소명으로 생각하며 무리해서 사역하던 중, 시편 23편의 ‘내 잔이 넘치나이다’를 암송하면서 쓰러져 20대 후반의 꽃같은 나이에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는 그의 삶을 읽으면서 우리도 함께 아파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큰 소리로 울기도 경박해 보인다. 우리 가슴을 짓이기는 듯하고 우리 몸 전체가 눌린 듯 압박감을 느끼게도 하는 그 고난의 무게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에 그 오묘하신 하나님의 경륜과 인도하심과 그 삶을 통해 피어나는 참된 신앙과 복음의 힘과 능력을 깨닫게 되고 우리 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믿음의 선배를 통한 도전과 그러한 삶으로 인도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될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소설이지만 전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맹의순의 편지를 비롯한 그를 아는 사람들과의 인터뷰 자료가 어느 정도 뒷받침되어 있기도 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역사의 위대한 인물이나 거물은 아니지만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살아갔던 우리의 신앙 선배들 중 한 사람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우리 민족에게 이러한 무명의 신앙 선배들이 수 없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참으로 자랑스럽다. 우리 이코스타 독자 여러분들도 함께 이 책을 읽으면서 민족의 비극을 통해 피어나는 아름다운 삶, 고난을 뚫고 우뚝 선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그리고 고난을 통해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 신앙과 복음의 능력을 더 깊이 체험하기를 바란다.


더불어 이 달에 추수 감사절이 있는데, 진실로 감사의 마음을 회복하고 싶은 사람들 역시 이 책을 읽는다면 참 감사가 무엇인지, 상황과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 그 자체로 인해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회복할 것이다. 이 책은 소설이기에 매우 재미있고, 사건의 전개가 아주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어 한 번 손에 잡으면 쉽게 놓지 못할 것이다. 내가 처음 접한 책은 여원에서 나온 책으로 ‘여원이 만든 베스트셀러 정연희의 장편소설’ 이라는 문구가 책 제목 앞에 붙어 있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지난 호에 유학생 배우자의 소고가 있었는데, 이 책을 선정한 이유 중 하나가 유학생 배우자에 대한 배려에서라는 사실이다. 사실 많은 배우자들이 좋은 학력과 경력, 그리고 능력 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실 제한된 법과 상황 속에서 그냥 ‘아줌마'(또 아주 소수지만 그냥 ‘아저씨’)로 살아 가면서 많은 서러움과 아픔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이코스타에서 지면이 할애되어 소외되어 있는 잠재적인 유학생 배우자를 위한 장이 마련된 것을 환영하면서, 이 서평 코너에서도 더 많은 유학생 배우자들의 참여를 권장하고 싶다. 사실 유학생들은 시간도 문제지만 심리적 압박 가운데, 신앙 양서를 많이 읽지 못할 것으로 생각된다. 많은 배우자들도 집안 일 하랴, 남편과 아이들 돌보랴, 바쁘기는 매 한가지이겠지만 그래도 심리적 압박을 덜 받을 수 있는 입장에서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하여 신앙 양서를 읽어 나간다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새로운 삶의 동기 부여와 도전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결국에는 가족과 자녀들의 신앙과 삶에 영향을 미치며, 더 나아가 같은 아픔과 고민을 가지고 있는 이웃에게 주의 빛을 발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유학생 배우자들이 이 미국 땅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국력 낭비(?) – 질적으로 양적으로 굉장한 코스타 강사들을 두고 하는 말에 빗대어, 수 많은 능력 있는 유학생 배우자를 두고 하는 말 – 일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주 유용한 일꾼들이 양육되고 훈련되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래서 이번 11월의 양서를 비교적 여성들이 접하기 쉬운 소설, 그렇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우리의 삶에 큰 감동과 도전과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책, ‘내 잔이 넘치나이다’로 선정했다. 이를 시발점으로 계속해서 양서를 함께 읽고, 그 양서들을 통해 받은 은혜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거나 이웃과 나누는 일들, 그리고 독후감이나 좋은 서평들을 투고하는데 유학생 배우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장평훈]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기쁨과 소망

eKOSTA 성경강해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기쁨과 소망
빌립보서 3:1-4:1



편집 주
지난 8월호부터 3회에 걸쳐 빌립보서 강해를 연재하고 있다. 성경 본문을 가지고 특강을 한다고 하면 딱딱한 음식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갖기가 쉬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집중해서 말씀을 대한다면 그만큼 풍성한 것을 맛볼 수 있고 우리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성경강해는 지난 KOSTA/USA-2001의 주제 성경강해를 재 구성한 것이다.


빌립보서 1장 읽기
빌립보서 2장 읽기
빌립보서 3장 읽기
빌립보서 4장 읽기


여는 말


한강에 국회의원과 수녀가 빠졌는데 119구조대원이 오더니 국회의원만 건져내더란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니, 거기 수녀님도 빠졌는데 어떻게 국회의원만 건져냅니까?” 하고 물었더니 구조대원은 “국회의원을 그대로 놔 두면 한강 물이 오염되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정치인들은 그렇다고 치고, 그러면 사회 전반에서 국민으로부터 그 인격을 존경받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우리 시대에 사표(師表)가 드물다는 현실을 절감하게 된다. 좀더 기대를 가지고 기독교계를 보면 어떨까? 애석하게도, 스캔들은 무성하지만 참된 귀감이 되는 지도자들이 너무 드문 현실이다.


나는 우리의 죄성과 부패한 심성을 보면서, 이제는 좀 더 현실적으로 사람들을 보게 된 결과, 사람들을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를 하게 되었다. ‘위를 향해 꾸준히 나아지는 사람들’과 ‘밑으로 향해 점점 더 나빠지는 사람들’이 바로 그것이다. 어떻게 하면 위로 향해 가는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장기적으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우리는 빌립보서 3장 말씀에서 그 방법론을 찾을 수 있다.


지난 2개월에 걸쳐 우리가 나눈 말씀을 종합해 보면, 바울은 자기가 당한 세 가지 어려움을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실천해 보인 다음(1장),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하나됨과 겸손에 대한 권면의 말씀(2장)을 전하였다. 이제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신앙 인격의 성장에 대한 권면을 하고 있다.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내가 받는 느낌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바울 서신 중에 자기 내면을 가장 적나라하게 공개하는 본문이라는 점인데, 그는 자기 속을 완전히 내어놓고 자기의 믿음의 여정을 공개하고 있다. 또 하나는, 바울이 자기의 애끓는 간절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뜨거운 사랑과 그를 알고 싶어하는 간절한 소원, 그리고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열정과 집념이 물씬 풍겨 나오는 곳이 바로 3장의 본문인 것이다.


본문의 구조


이 본문의 뼈대를 알기 위해서 먼저 3장 1절과 4장 1절을 주목하자. 3장 1절에서 바울은 “끝으로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주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라며 먼저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때 ‘주 안에서’란 말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와 같이 ‘주님과 한 몸이 된 관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주님과 한 몸이 된 관계에서, 그분이 나의 주인되신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라는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요, 역동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빌립보서 1장에서 세 가지 어려움을 당하여 바울이 보였던 태도가 바로 주 안에서 기뻐하는 태도인 것이다.


4장 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라고 빌립보 교인들을 부른 다음, “이와 같이 주님 안에서 든든히 서십시오”(That is how you should stand firm in the Lord) 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때 ‘이와 같이’는 앞의 3장에서 한 말을 받고 있다. 따라서 3장에서 바울이 말한 내용은 ‘주 안에서 든든히 서는 방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주 안에 서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주님과의 한 몸된 관계를 기반으로 든든히 서라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주님과 한 몸이 된 관계에서 ‘역동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라면,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과 ‘주 안에 든든히 서라’는 말은 동의어가 된다. 결국 빌립보서 3장은 어떻게 하면 주 안에서 든든히 설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바울은 (1) 단기적으로는 살아있어 역동적인 신앙 생활을 위한 방법론과 (2) 장기적으로 신앙 인격을 성숙시키기 위한 방법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빌립보서 3장 1절부터 4장 1절까지의 구조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를 좀더 시각적으로 표현해 보자. 아이들이 좋아하는 오레오(Oreo) 쿠키를 보면 앞뒤에 샌드위치처럼 있는 까만 쿠키는 서로 구별이 없고 가운데에 하얀 크림이 들어 있다. 곧, 앞뒤의 쿠키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 주 안에서 든든히 서라’는 권면이고 가운데의 크림이 바로 ‘굳게 서는 방법, 주 안에서 인격이 성장하는 방법’인 것이다.


물론 주 안에서 기뻐하고, 주 안에서 굳게 서는 데는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항상 존재하게 마련이다. 포도나무를 괴롭히는 병충들은 항상 있다. 열매가 맺을 때 쯤, 강한 바람이 몰아칠 수도 있다. 빌립보 교회에도 그런 장애 요인들이 있었다. 2절에서 나타나는 할례주의자와 18절-19절에 나타나는 세속주의자들이 바로 그런 훼방꾼들이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이 두 부류의 역풍과 걸림돌이 있는 상황에서 빌립보 교인들이 어떻게 하면 영적인 활력을 가지고, 신앙 인격을 성장시킬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영적인 활력과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바울은 다음의 세 가지 자세를 취할 것을 제안한다. 첫째가 빌 게이츠(Bill Gates) 같은 장사꾼 혹은 사업가(businessman)로서의 자세요, 둘째는 이봉주씨 같은 마라토너로서의 자세이며, 셋째가 여러분과 같은 유학생으로서의 자세이다. 이러한 자세를 자세히 소개하기 전에 먼저 약간의 배경을 살펴 보기로 하겠다.


바울의 배경


빌립보서 3장 2절을 보면,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악한 일꾼들을 조심하십시오.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라는 거친 말이 바울의 입에서 나온다. 마치 우아하고 품위 그 자체로 보이는 여인의 입에서 갑자기 육두문자가 튀어 나오면 당황스럽듯이, 이 구절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사실 ‘개’라는 단어는 유대인들이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써 왔던 표현이었지만,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강한 분노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여러분은 기억할 것이다. 1장에서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것을 악용해서 그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들에게조차 화를 내지 않았다는 것을. 바울은 자기가 받는 피해에 대해서는 원칙과 관대함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왜 그렇게 분노하고 있는가?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대로 두면, 그들이 자기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생명력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빨아먹을 위험성을 봤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사도로서의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딸 가진 부모들이 인신매매단에 대해서 가지는 분노와 비슷할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엄청난 영적인 피해를 끼치는가? 2절과 3절을 종합해 보면, 유대주의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지만 할례도 받아야 한다든지, 율법을 지켜야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등의 억지 주장을 하면서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훼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말 시시한 것을 내세워서 진짜 중요한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지면상 자세한 분석은 생략하도록 하고, 나중에 7-9절을 보면서 다시 한번 이 point를 되짚어 보도록 하자.


그러면서, 바울은 4절에서 “하기야, 나는 육체에도 신뢰를 둘 만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체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라고 이야기한다. “너희들이 그 할례 받은 육체에 대해서 자랑을 한다고? 율법 좀 지킨 것 가지고 자랑하고 있다고? 그러면 정말 자랑할 만한 것 한 번 보여 줄까?” 라고 맞받아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기의 영적 이력서(spiritual resume)를 공개한다.


5절과 6절을 같이 보자. “나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나도 할례를 받았다. 7일도 아니고 9일도 아닌 정확하게 8일 만에 할례를 받았던 몸이다.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나는 이스라엘 사람일 뿐 아니라 그 중에서도 베냐민 지파이다.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가장 명망있는(prestigious) 지파로 사람들이 서슴지 않고 선택하는 베냐민 지파인 것이다. 내가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내가 베냐민 지파에 속했다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알겠느냐?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내 부모 양쪽이 모두 유대인이다. 그냥 유대인이 아니라 경건한 유대인, 이것이 바로 나 바울이 타고난 신분인 것이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TK니 PK, 진골이니 성골이니 했던 적이 있었다. 유대인 사이에 이 정도면 바울의 타고난 신분은 진골 정도가 아니라 성골에 해당되는 것이다.


다음에는 이러한 신분 뿐 아니라, 그의 열심과 성취 수준을 보여주는 이력이 나온다.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우리는 흔히 바리새인하면 ‘독사의 자식’, ‘외식하는 자’를 연상한다. 이렇게 전반적으로 좋지 않은 인상이지만, 실제로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믿음의 순수성과 열심을 가졌던 영적인 엘리트(elite) 그룹이었으며, 특히 바울은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의 제자였다.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하였고.” 유대교의 입장에서 보면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은 소위 신흥 이단종교였는데, 바울은 그 세력을 비판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씨를 말리겠다고 나섰던 열성분자였다.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율법에서 요구하는 각종 규칙과 규례들을 흠없이 지켰다고 말하고 있다. 한 마디로 바울의 신분은 최고 중의 최고(The best of best)였던 것이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할아버지는 순교하셨고 아버지는 장로요 어머니는 권사이며, 어려서부터 주일학교에서 착실하게 신앙 생활을 해 왔고 그 동안 청년부와 성가대에서 봉사했다. 이제까지 드렸던 각종 헌금을 잘 펴가지고 차곡 차곡 쌓으면, 아마 바닥에서 천장까지 닿을 것이다. 십년 경력의 성경 공부에, 일대일 양육과 전도 폭발, 프리셉트 교사까지 맡아하고 있다. 뭐,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런데 바울은 바로 7절에서 그 화려한 배경도 그 무엇에 비교하면, 비교조차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장사꾼같은 집념으로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나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What was to my profit, I now consider loss)”(7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가 그렇게 자랑과 영광으로 여기던 것들이 완전히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마치 증권하는 사람들의 주식이 회사가 부도 나면 휴지 조각으로 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9절에서는, 더 나아가 이를 오물로 여긴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개의 비교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는 할례주의자들의 경력과 바울의 화려한 경력을 저울에 다루면서 비교하는 것으로, 이는 마치 반딧불빛과 달빛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 또 하나는 바울의 그 경력과 예수 그리스도의 무게를 비교하고 있는데, 마치 달빛과 햇빛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 반딧불과 달, 달과 태양. 바울은 이 두번의 저울질을 통하여, 할례주의자들의 자랑이 그리스도만을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에 비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2절에서 바울이 분노했던 이유가 더 분명해질 것이다. 저들이 화장실에 가서 뭘 한 덩어리 가져다 그걸 잘 포장해서 그럴 듯하게 속이는 것만으로도 괘씸한데,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이 귀한 지식을 가로막고 있으니 정말 분개가 되는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유익'(profit)이나 ‘해'(loss)라는 단어는 ‘이문이 남는다’, ‘손해를 봤다’고 할 때 쓰는 장사 용어이다. 여기서 바울은 명백하게 빌 게이츠같은 사업가의 비유를 들고 있는 것이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밑지고 판다’고 할 때 이 말을 믿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익을 남기는 데 있어서는 악착같은 사람들이 바로 사업하는 사람들이다. 바로 그 ‘장사꾼같은’ 무서운 집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을 원해야 하는가? 8절-11절을 읽어 보자.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은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서 오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를 가지려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3:8-11)


이 본문의 주제어(keyword)들은 ‘지식’과 ‘얻는다'(8절), ‘안다’와 ‘본받는다'(10절)는 네 단어이다. 그 중 핵심은 ‘안다’인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의미한다. 여기서 ‘안다’고 할 때, 이는 머리로 아는 지식만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아는 지식까지 포함하는 말로, 그리스도와 ‘가장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것을 가리킨다.


나는 아내와 26년째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아내는 내가 이것 저것 막 칭찬을 하면, “당신, 시방 나를 우롱하는거냐”고 말하곤 한다. 아내를 잘 모를 때는 ‘무슨 이런 여자가 있나’ 라고 속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 말이 “칭찬하다니 참 기특도 해라. 또 해 주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란 것을 안다. 내가 이렇게 체험을 통해서 아내를 알 듯이, 가장 친밀한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으면 하는 것이 바울의 간절한 바램이었던 것이다.


그가 주님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했던 것 세 가지가 10절과 11절에 잘 나타있다. 첫째로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고 싶었다. 주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과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발 아래 둔 능력(빌2:9-11), 그 능력을 자기 삶 속에 강하게 체험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둘째는, 바로 그 능력으로 자기도 주님이 받으셨던 ‘고난’을 받고 싶어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를 원했다. 그리고 셋째로 바울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자기 몸으로 직접 체험하기 원하고 있었다.


빌립보서 2장 5절-1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 되시는 우리 주 예수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을 말했었다(9월호) . 그런데 이제 바울은 자기도 고난을 받고 자기도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삶이 보여 주는 특징이다. 이런 소원이 (지난 8월호의) 빌립보서 1장에서 봤듯이 환경의 문제와 인간 관계의 문제, 그리고 삶과 죽음 앞에서 그가 취했던 태도와, (사도행전 16장의) 빌립보 감옥에서 한밤중에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바울의 내면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도 바울과 같이 주님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을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갈망하며 살고 있는가? 우리가 평소에 갈망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우리가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난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 여러분의 기준은 무엇인가?


나는 이제 믿는 신랑감을 소개해 달라고 하는 부탁은 가려서 듣기로 했다. 누군가가 내게 말하기를, 장로님 딸이 있는데 잘 믿는 신랑감을 찾는다고, 그러니 신앙이 좋아야 한다고 몇 번씩 다짐을 했다. 나는 그 말을 순진하게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정말 잘 믿는 학생을 찾아서 한 번 만나볼 것을 권유했다. 그랬더니 조금 있다가 전화가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키는 얼마나 되느냐고. 한 165(cm) 정도 된다고 하니까, 그 다음부터 다시는 전화가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사실 약과가 아닌가? 키 뿐 아니라, 학벌에다 경제력과 집안까지 요구하는 크리스천이 얼마나 많은가! 심지어는 사주까지 보는 해괴한 모습을 보곤 한다. 이 정도면 ‘그 밖의 모든 것’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중 어떤 것이 오물 취급을 받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찾아야 할 배우자는 어떤 배우자여야 할까? 나와 함께 매일 매일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예수님의 고난을 함께 체험할 배우자여야 하지 않을까? 너무 거창한가? 그렇지만 여러분의 격에 맞는 배우자는 그런 높은 수준의 사람들임을 알아야 한다.


장사하는 사람이 이문을 추구하듯 이렇게 악착같이 주님 알기를 추구하고 주님을 알아 가는 것. 바로 주 안에서 기뻐하고 주 안에서 든든히 서는 첫 번째 방법이다.


달려가는 것


우리가 주 안에서 기뻐하고 주 안에서 든든히 서는 두 번째 방법은 빌립보서 3장 12절-14절에 나타난다 –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 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봉주 선수가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했던 감격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예수님을 더 알아가고 더 닮아 가는 일을 바울은 마라톤 경주에 비유하고 있다. 사실 사도 바울은 건강에 관한 한 별로 할 말이 없었던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 당시 인기 스포츠였던 마라톤만큼은 좋아했고, 또 잘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마라톤 주자의 심리까지도 제대로 이해했던 것 같다.


바울은 12절에서 이미 한 번 한 말을 13절과 14절에서 다시 반복하면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 두 문장을 잘 살펴 보면 신앙 경주의 중요한 태도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자기의 부족함을 정직하게 보는 자세’, 곧 ‘자기 분수를 아는 태도’이다 –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12절).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 “형제 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13절). 사람들은 믿음의 수준을 비교할 때 항상 자기보다 약간 모자란 사람과 비교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사실 바울 정도라면, 자랑할 만한 위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도취하지 않은 자세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정확하게 자기를 보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정확한 센서(sensor)를 가졌다는 말이다.


둘째는 ‘뚜렷한 목표 의식’이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12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14절). 이 두 구절은 모두 목표에 관한 말인데, 그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이미 앞에서 여러 번 이야기한 바 있다. 사도 바울이 추구했던 목표란 오로지 예수님을 더 잘 아는 일, 우리 주님을 더 닮아가는 일,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 곧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일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분명히 보고, 자기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오는 태도가 바로 ‘흔들리지 않은 집중력’과 ‘일사불란함’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태도’이다 – “내가 하는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13절). 사실 마라톤으로 말한다면, 바울은 42Km를 거의 다 달리고 지금은 이미 주경기장(stadium)으로 들어와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지만 거의 다 왔다는 안이함을 버리고, 한 발 한 발에 전(全)생명이 걸린 것처럼 마지막 역주(spurt)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영광을 잊고 과거의 실패를 넘어서, 바울은 앞만 보고 달리고 있다.


1970년대, 펜실베니아 대학(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열린 육상 대회에 당시 모든 사람의 기대와 촉망을 받던 주자가 참가했다. 그 이전까지 깨지지 않았던 기록을 바로 그곳에서 그가 깨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한 전망이었다. 그래서 도처에서 이 역사적인 장면을 취재하려고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단 영점 영 몇(0.0*)초 차이로 그는 기록 경신에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어떤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는지’ 궁금해하며 경주 모습를 담은 필름을 살폈는데, 자신의 모습이 카메라의 앵글(angle)에 좀 더 잘 잡히도록 코너를 돌 때마다 몇 발짝씩 멀리 도는 주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트랙의 중앙에서 바깥으로 떨어진 몇 발짝. 그것이 쌓여서 그런 결과를 가지고 온 것이었다. 그 많은 세월 우리가 보였던 태도와 얼마나 비슷한가!


믿음의 목표를 선명하게 바라보고 자만함 없이 최선을 다하여 뛰는 태도. 이것이 바로 주 안에서 기뻐하고 주 안에서 든든히 서는 두 번째 방법이다.


천국 시민으로서 기다리는 것


이제 주 안에서 기뻐하고 주 안에서 든든히 서게 하는 세 번째 방법이 나온다. 15절-17절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도 자기처럼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하는 자세, 그리고 경주자로서 목표를 향해 달리는 자세를 가지라고 촉구한다 –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3:15-17).


그러면서 바울은 그렇게 살지 않는 한 부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18절).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원수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빌립보 교회에 있었던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투로 봐서 아마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이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좀 더 자세한 것이 19절에 나타난다 –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神)은 배(belly)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shame)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들은 바로 먹고 마시는 일이 삶의 목적이었던 향락주의자였으며, 세상의 가치(=땅의 일)에만 마음이 가 있던 세속주의자였던 것이다.


이들은 바로 내가 맨 처음에서 말한, ‘밑으로 향해 더 나빠지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와는 거리가 먼 것 같은가? 교회 권사님이 옷 로비한 사건은 이제 진부한 것 같아서 그만 하겠다. 직장에서만 해도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세속적인지! 이해 관계가 오가는 회의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조금도 양보가 없다. QT 하는 사람이나 안 하는 사람이나 똑같은 것 같다. 승진에 관한 화제만 나오면 주체할 수 없는 관심과 집착을 드러내고, 누가 몇 억 짜리 프로젝트(project)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부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자기도 그런 것 한 번 해 보겠다고,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줄이나 대 보려고 골프장에 왔다 갔다 하거나 여기 저기 쫓아다니고는 한다. 남의 말 할 것이 아니다. 나도 조금만 방심하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순식간이다.


여러분이 앞으로 일생의 직업(career)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 동기는 무엇인가? 열심히 공부해서 전공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쌓아, 보수도 괜찮고 사회적으로 대접도 받는 직장을 얻고 싶은가? 이런 것도 물론 다 중요하다. 그러나 전공 분야나 사회적인 위치나 봉급 수준에만 집착하여 욕심을 낸다면, 위에서 보았던 그런 모습이 바로 여러분의 모습이 될 것이다. 향락을 추구하며 세상 가치에 휘둘리는 그런 모습이 바로 가까운 미래에 보이게 될 여러분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두렵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여기서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고, 주 안에 굳게 설 수 있는 세 번째 방법이 나온다. 바로 여러분들, 유학생들과 같은 자세를 갖는 것이다 –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20절). 우리는 한국 유학생들로서 미국에 살고는 있지만, 여권은 초록색이다. (물론 이곳에 남게 될 분들도 계시지만) 언젠가는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 갈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시민권이 또 하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의 시민권’이다.


나는 바로 이렇게 천국 시민된 권리를 잘 이해하고 있는 쪽지를 한 장 받았다. 2001년 코스타의 둘째날 저녁, 예수님을 새로 영접하게 된 어떤 형제가 내게 전해 준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님, 그제는 제 25번째 생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내 생일이었습니다. 오늘 주님의 아들로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는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 끝에 나를 버리고 하늘나라 시민됨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 영혼의 생일입니다. 하나님 감사 드립니다. 2001년 7월 3일.”


이것이 우리가 시민되었다는 말의 의미이다. 우리는 언젠가 그곳으로 돌아 갈 사람들이며, 거기서 만날 분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그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얼굴을 마주하고 그 분을 뵙는 것도 마음이 두근거리는데, 그 분은 더 기막힌 일을 준비하고 계신다고 말한다. 우리의 썩을 몸을 그 분의 영광의 몸으로 바꾸어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돌아 갈 날을 선명하게 바라보고 우리 주님 만날 것을 기다리는 마음. 이것이야말로 죽음 앞에서의 바울이 보였던 참된 능력의 원천인 것이다(1장). 그리고 그 기다림은 우리에게도 큰 능력의 원천이 된다. 하늘나라의 시민권자된 우리들이 주님 만날 날을, 죽음을 기다리는 마음. 바로 주 안에서 든든히 서는 세 번째 방법이다. 중요한 이해 관계가 걸린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항상 기도하는 것이 있다. 나로 하여금 이 땅에 속한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게 해 달라고. 나는 내일이라도 주님이 부르시면,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주님 앞으로 갈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해달라고.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놀랍게 응답하시는 주님을 체험한다.


빌립보서 특강을 맺으며


지금까지 우리는 주 안에서 굳게 서서 주님만을 기뻐하는 방법들을 살펴 봤다. 먼저 우리는 장사꾼이, 사업가가 집요하게 이윤을 추구하듯이 주님을 알고 닮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이것은 바울이 다메섹에서 처음 주님을 알았을 때부터,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며 가졌던 마음이었다. 즉, 이런 마음은 뒤에서 앞으로 우리를 밀어주는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주님을 다시 만날 것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데, 이것은 현재의 나를 앞으로 끌어 당겨주는 미래로부터의 힘이 된다. 이처럼 뒤로부터 밀리고 앞으로부터 당겨지며 열심히 뛰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인데, 바로 목표를 향해서 마지막 역주를 하는 경주자의 자세를 가지고 우리는 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영적 생명력의 비밀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매일 매일 영적으로 힘 있는 삶을 살게 할 뿐 아니라, 세월이 지나가면서 더욱 예수님 닮은 인격으로 자라가는 성경적인 방법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하나 하나가 이런 자세를 가질 때, 한국 교회는 다시 소금과 빛의 직분을 회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빌립보서를 마치면서, 마음에 바라는 간절한 소원이 있다. 한국 교회가 고난을 너무 모르는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다. 손양원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을 비롯한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갔던 그 길을 상실하고 있는 것 같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예수님의 이름과 그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생겨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나와 여러분이 모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 따라 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그리고, 주님 십자가 외에는 자랑치 않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제 곧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날이 올 것이다. 아마 우리 세대가 먼저 가고, 곧 여러분들이 따라 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서는 날, 영광의 면류관을 함께 받는 기쁨을 누려보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빌립보서 특강을 맺는다.

[팽동국] 오스왈드 스미스의

eKOSTA 서평


오스왈드 스미스의 <구령의 열정>


8월과 9월에 걸쳐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믿음의 참 의미를 깨닫고 영적으로 성장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두 권의 책, 존 스토트 목사의 <기독교의 기본 진리>와 박영선 목사의 <구원 그 이후>를 소개했었다. 이번 10월에는 이미 신앙 생활을 해 오시던 분들을 염두에 두고 책 선정을 해 보았다. 그러나 처음 믿은 사람들에게도 역시 신앙의 영적 성장 측면에서 이 책이 자신의 회심과 복음의 이해,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새롭게 알 수 있는 귀한 책이 될 것을 확신한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어 처음으로 미국에 유학 온 한국 학생들과 외국 유학생들이 주위에 많을 것이고 이제는 그들과도 어느 정도 인사하고 서로 안면을 익혔을 이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뜨거운 심장으로 그 영혼들을 바라보고 그 죽어져 가는 영혼들을 위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열정과 긍휼하심으로 우리의 마음들이 불이 타서 전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령으로 바뀌기를 바라며 원래 이 책을 10월의 양서로 선정했었다. 그런데 다 아시다시피 우리들(미국 유학생들)이 살고 있는 이 미국 대륙에 9월 11일에 있었던 역사상 전무후무한 미국의 동시다발 테러 사건을 겪으며, 이러한 시기에 합당한 고통이나 고난, 혹은 악의 본질이나 조금 시사적인 책은 어떤 것이 있으며 그러한 책으로 바꿔서 양서를 선정할 것을 고민도 해 보았는데, 어쩌면 이 <구령의 열정>이 그 무엇보다 가장 합당한 책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테러 사건이 있은 후 첫 금요일인 9월 14일에 부시 대통령은 그 날을 국가 기도와 추모일 (National Day of Prayer and Remembrance)로 정하고, 지미 카터와 빌 클린턴 등 여러 전 대통령들이 참석한 가운데 와싱턴의 성당(National Cathedral) 에서 예배를 드렸고, 그 때 고령의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셨다. 다른 부분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중에서 이 사건을 통해서 영혼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참된 각성과 부흥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는 소망을 언급하는 내용은 나에게 많은 생각과 공감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 면에서 이 책 <구령의 열정>은, 이렇게 불안하고 참된 안정과 안전의 근거를 찾을 수 없으며 방향을 잃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 세계를 다니며 전도 집회를 하는 가운데 몇 번의 부흥을 직접 경험하신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가 이 시대를 휩쓸 만한 부흥과 이 시대의 유일한 소망이 될 수 있는 대 각성의 시대를 기대하고 갈망하면서 우리의 영혼이 그러한 소망과 기대로 불이 타오르게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쓴 이 책은 이러한 어수선한 시기에 참된 소망과 우리가 바라볼 궁극적인 목표와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양서를 소개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그 책의 무게나 내용이 심오하고 깊을 때인데, 그 주된 이유는 책 내용의 무게와 깊이가 소개하는 사람의 경박함과 천박함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가리워질까 하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좋은 책을 미리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과 인격이 전과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거나, 먼저 이 책을 읽었던 자로서 지금의 삶이, 이 책을 읽었던 사람답게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부끄러움이 있을 때이다. 이 책 <구령의 열정>은 바로 그러한 부담을 주는 책 중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내 심령에 부흥에 대한 소망을 강하게 심어 주신 1993년 이후로, 나는 부흥에 대한 책들과 부흥의 시기에 사용되었던 영적 거성들의 책을 구해서 읽고 있는데, 나 개인적으로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부흥>과 더불어 이 책이 부흥에 대해 가장 심오하며 정확하고 균형잡힌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고 감히 말씀해 드리고 싶다. 특별히 이 <구령의 열정>은 부흥을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역할이나 참여에 대해서 치우침 없이 잘 다루고 있다. 자칫하다 보면 한 쪽으로 치우쳐 다른 한 쪽을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하기 쉬운데,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전혀 손상없이 부흥에 있어서 사람의 역할을 제 위상에 올려놓음으로 사람들이 기도와 기대와 갈망으로 부흥을 준비할 필요와 동기를 부여한 것은 특히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그렇기에 책을 읽다보면 부흥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전도에 대해서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으며, 그 어느 책에서보다도 전도와 부흥의 차이를 아주 명쾌하게 구분했을 뿐만 아니라 그 두 가지의 중요성을 잘 접목시켜 놓은 균형 잡힌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참된 부흥에 대한 영광스러운 기대를 전도집회 수준으로 낮추지도 않으면서도 동시에 전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부흥의 특수성과 차별성도 간과하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저자가 1900년대 전반기에 토론토의 People’s Church 의 목사로서 또한 세계 곳곳을 여행했던 전도자로서 그러한 전도 집회 중 몇 번의 부흥을 경험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와 내용에 대해서 나의 추천의 말보다는 권위 있는 두 추천인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되어 이곳에 옮긴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한 세대에 한 번 정도만 그렇게 많은 달란트와 은사를 지닌 사람을 세우시는 것같이 보인다”고 했고, 또 다른 추천자인 조나단 고포드는 “<구령의 열정>은 본인이 읽었던 책 가운데 부흥을 위한 가장 강력한 탄원이다”라며 “나에게 수 백만 달러가 있다면 이 <구령의 열정>을 대량으로 출판하여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에 배포해 주고, 세상을 휩쓸 거대한 부흥을 기다릴 것이다”라고 추천서에서 밝히고 있다. 나에게 이 책을 소개시켜 준 한 목사는 “전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도 집회를 열되, 모든 성도들이 이 <구령의 열정>을 함께 읽으면서 기도하는 것이다”고 말씀하였고 실제로 그대로 실천해서 여름철 해변에서의 한 번 집회로 200명의 결신자를 얻었다고 하였다.


이제 새 학기가 시작된지 한 달 정도 지났고 신입생들이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와서, 눈을 들기만 하면 추수할 들판이 보이는 이 때에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도 그 죽어져 가는 영혼들에 대해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께서 가졌던 부담과 비전, 그리고 불타는 열정이 생기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그 영혼들을 위한 울부짖음과 부흥에 대한 소망이 나를 비롯한 우리 이코스타 독자들의 심령 가운데 가득하되, 먼저 우리 가운데 “죄를 지식적으로 이해하고 인정하며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실과 효율성을 (지적으로) 동의한 후에 얻는 평안 정도의 얄팍하고 거짓된 회심” 수준을 뛰어넘는 “깊은 죄의 깨달음과 회개”를 경험하는 성령의 역사하심과 참된 부흥을 통한 교회의 영광스러움이 회복되기를 기도한다. 더불어 죄악이 관영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해 헤매고 있는 이 참담한 미국 땅에, 그리고 태평양을 넘어 분단된 한반도의 산하와 우리 조국 교회 위에 거룩한 주님이 임재하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바다에 물이 가득한 것처럼 차고 넘치고, 흰옷을 입은 새벽 이슬 같은 청년들이 자진해서 헌신할 그 영광스러운 부흥의 날들이 속히 오길 기대한다.

[함철훈] 느림

[함철훈] 느림

eKOSTA 갤러리


느림

World Vision의 사진작가로 지뢰 피해가 심한 내전 중인 캄보디아를 취재할 때입니다.
서로 다른 쪽을 겨냥해 매몰 시켜 놓은 지뢰였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파내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프놈펜에서 앙코르와트로 갈 수 있는 육로가 막혔기 때문에 메콩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수로가 있었습니다.


세시간을 전속력으로 달린 보트가 메콩강 상류의 마지막 고비를 넘자 하늘과 물의 경계가 아스라한 호수 퐁네샾에 닿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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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보트 안에서의 긴장과는 다른 평안함이 하늘과 물위에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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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새들이 천천히 날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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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기울자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일자 무언가 무거운 것으로 지붕을 짓쳐 놓으려 집집마다 배 지붕 위로 올라갑니다. 어른들을 쫓아 올라간 여자아이들은 춤을 추듯 사뿐 사뿐 바람을 맞으며 두 팔을 들어올린 아이들의 겨드랑이 사이로 옷깃이 날릴 때 그 아이들은 눈을 감고 바람을 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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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기계도 없고 전기도 없이 느리고 작게 살고 있는 퐁네샾 사람들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김동호 목사와의 대담

eKOSTA 인터뷰


김동호 목사와의 대담


eKOSTA 김동호 목사님, 거의 매년 이렇게 코스타에 참석하시는데, 코스타 첫 참석의 계기와 당시의 느낌을 말씀해 주십시오.


김동호 제가 89년도에 한국에서 학원 복음화 협회를 만드는데 참여했었어요. 홍정길 목사님과 함께 참여했었는데, 89년말 첫 집회에서 그 당시 워싱턴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님이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처음으로 식사하면서 코스타 얘기를 들었어요. 그때까지는 저는 구제같은 것에만 목회의 관심이 많았었는데 그때 당시 드는 생각이 구제만 해서는 안 되겠구나, 사람을 키워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실제로 목회를 할 때에 구제하는 만큼 사람 키우는 예산을 세우게 되었지요. 그래서 89년도에 코스타에 대해 처음으로 듣고 92년도부터 코스타에 참석하게 되었어요. 92년도 워싱턴하고 LA에서 할 때인데, 와서 보고 이것은 평생을 바쳐서 할 만한 사역이다 하고 생각하고, 그러니까 첫번에서부터 올해로 꼭 10년인데, 한번도 빠지지 않았어요. 제가 목회하는 목사로서 참 시간내기 어려운데, 당회에서 장로님들에게 일년에 한 달은 코스타를 위해서 쓰겠다고 해서 허락을 받았어요. 그래서 원칙적으로는 일년에 한달 정도는 코스타를 섬기고 있죠.


eKOSTA 목사님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이 옳다고 느끼기만 하시면 곧바로 순종하시고 그 간증들은 정말로 늘 들어도 감동적인 것 같습니다. 두번째 드리고 싶은 질문은 코스타에서 늘 만남의 축복을 얘기하는데, 목사님도 다른 강사님들이나, 혹은 학생들과의 만남 중에서 특별한 기억이 될 만한 것이 있는지요.


김동호 아무래도 이동원 목사님, 홍정길 목사님 만난 것을 저는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10년을 같이 다녀보지만, 그분들이 어떻게 보면 이 코스타 창립자이시잖아요. 그런데 그분들 자신이 그 의식이 없어요. ‘내가 이런 것을 만들었는데’ 하는 오너쉽(Ownership)이 없어요. 그러니까 참 좋지요. 이동원 목사님 가만히 보니까 그 분 설교도 안 하시더라구요. 그냥 뒤에서만 다니시는 것을 보고 참 훌륭하시구나 하고 생각하지요. 홍목사님도 이제는 여기 오시지도 않는데, 남이 얘기하기는 쉽지만 그렇게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구요. 그런 만남 참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여기 좋은 강사들이 많잖아요. 내가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고 그래서 참 좋습니다. 학생들은 아무래도 개인적으로는 관계가 유지되지는 않고, 가끔 한국에 가면, 제가 코스타에 참석했었습니다 하는 사람이 많고, 이번 캐나다 코스타에 갔었는데, 어떤 학생 부부가 ‘저희가 8년 전에 코스타에서 목사님 설교 듣고 예수님 영접해서 이렇게 예수 믿습니다’ 하더라구요.


eKOSTA 그럴 때 가장 기쁘시지요? 이제 코스타를 10년 동안 참석하셨는데요, 코스타에도 변화와 흐름이 있어 왔고, 이제 홍정길 목사님과 이동원 목사님도 오시지 않고 하는데, 앞으로 코스타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되는지, 그리고 어떤 리더쉽이 요구되어지는지 김동호 목사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김동호 코스타는 어디를 가던지 코스타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요. 참 감사한 것이지요. 코스타의 기본 정신과 밑바탕이 있어서 두 목사님이 손을 떼시는데도 크게 흔들림이 없잖아요? 교회 같으면 담임목사가 빠지면 흔들리는데, 코스타는 그렇지 않아서 참 감사하게 생각하고 제가 이제 인간이기 때문에 우려하고 기대하는 것이 있어요. 뭐냐하면 전에는 코스타가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어요. 인간적으로 볼 때 말이지요. 그럴 때는 강사들이 많이 오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제는 코스타 강사로 오는 일이 이제는 자기 경력에 들어갈 정도로 유명해졌어요. 이것은 위험한 때에요. 코스타에 한번 강사로 가는 것이 어떤 이력서에 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다음에는 순수해지지 않을 수도 있단 얘깁니다. 그렇다고 코스타를 없앨 수도 줄일 수도 없고, 코스타는 계속 성장하면서도 어떻게 초기의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가 큰 숙제인데, 아직까지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아요. 그러나 조심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KOSTA 제 개인적으로는 작년 코스타와 올해 코스타가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느꼈는데요. 좀 더 학생들이 많이 강단에 서기도 하며 좀더 순수해졌다고 해야하나요? 어쨌든 방향을 조금 바꾸는 것도 쉽지 않은데, 간사들과 강사들이 많이 수고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코스타가 16회가 되었습니다. 코스타에서는 목사님 말씀처럼 기독 지성인들을 대상으로 고지를 점령하라는 고지론도 있었는데요, 코스타가 지금까지 한국 교회와 사회에 미친 영향을 목사님은 어떻게 평가하고 계신지요. 그리고 앞으로의 가능성은 얼마나 되고, 아쉽거나 아직 부족한 부분은 어떤 부분인지요.


김동호 지금 우리가 아직 추적해 보지는 않았지만, 혹시 홍목사님이 더 잘 아실텐데요. 코스타 출신들이 정부 계통이나 학교 계통에 꽤 많이 퍼져 있어서 영향력을 꽤 끼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연변 과기대, 참 귀한 사역이잖아요. 교수들 중 많은 분들이 코스타 출신입니다. 또 한국의 한동대학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세워진 학교인데, 학교가 좋다는 것은 학생이 좋고 교수가 좋다는 뜻인데, 한동대 자랑은 교수가 좋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도 코스타 출신들이 참 많습니다. 제가 한동대에서 한 일년 정도 학생들에게 강의를 했는데, 코스타 출신 교수들이 한 10명 정도 학생들과 함께 제 강의를 들었어요. 그런 학교가 어디에 있어요. 교수가 학생들과 함께 강의를 듣는 학교가 말이예요. 그런 영향력들은 신선한 충격이고, 이제는 한국에 코스타 본부가 생겼고 그래서 코스타 출신들을 네트워킹(networking)을 좀 할려고 그래요. 그렇게 되면 점점 구체화 되겠지요. 우리는 그것을 확인하려고 들지 않았기에 그냥 자연스럽게 있었지요. 세력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일년에 한 번 정도 모여서 옛날 코스타를 기억하고 되새기면서 다시 헌신하고 다짐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eKOSTA 최근에 일년에 한 번 하는 일회적이거나 단회적 부흥회적 성격을 극복하고자 작년부터 티엠코스타나 이코스타를 시작해서 하고 있는데, 그 방향성과 자리 매김을 좀 해 주시고 전반적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고는 있지만 부족한 점이나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는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김동호 글쎄, 하나님이 주신 참 좋은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힘을 규합하기 위해서 이런 것을 하고 있는데 이제는 이것만을 위한 풀타임(Full time) 전임 사역자가 나와야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일을 하면 인간적이 되어, 하나의 세력이 되고 또 어떤 특별한 권력이 생기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코스타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지요. 규합하기만 하면 힘이 엄청나요. 우리가 세속화되거나 타락하는 것을 막기만 하면 말이지요. 그렇다고 힘을 규합 안 할 수도 없고 말이지요. 조심하면서 해야지요.


eKOSTA 이제는 코스타의 전반적인 방향에 대한 것은 여기서 마치고, 목사님 사역과 하시는 부분들에 대해 몇 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한국에서 교회 개혁하면 이제는 김동호 목사님을 연상하게 됩니다. <생사를 건 교회 개혁> 책을 보면서 참 좋은 교회인 동안 교회에서도 ‘생사를 건’이란 말을 써 가면서 교회 개혁을 했어야만 했구나 하고 생각하며 좀 충격적이었었는데요, 현재의 교회 세습이나 교회의 타락을 보면 많이 안타깝습니다.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한국 교회, 교회 개혁에 있어서의 문제점과 극복할 수 있는 방법과 더불어 전망을 좀 말씀해 주시지요.


김동호 똑같은 얘기인데, 힘이 생길 때 문제가 되기 쉬운데, 한국 교회는 지금 너무 부해지고 강해졌다는데 있습니다. 옛날에 가난할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이제는 교회 안에 권력이 생기고 그 권력이 엄청나게 되고 돈이 많아지고 그러니까 이제 세습 문제까지 나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을 개혁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이나 개인에게서 권력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바로 개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기득권 층이랑 마찰이 생기게 되는데, 나는 그런 경우 싸워야 된다고 생각해요. 싸우지 않고는 절대 공짜로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싸움을 회피했기 때문에 40년 걸렸거든요? 나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싸움을 요구하시지, 싸움이 없는 거짓된 평화를 요구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내가 너희들에게 화평을 주러 왔는 줄 아느냐? 검을 주러 왔다고 하셨죠. 정말 참 평안을 얻으려면 검이 있어야 되요. 그래서 나는 편안한 교회는 좋은 교회가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 있죠.


사람이 사는 곳에는 갈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득권이 있기 때문에 싸우게 됩니다. 그런데 싸움을 시작하고 보니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요. ‘생사를 건’ 바로 그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내가 사탄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괜히 겁을 주는 거예요.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건데요. 조금 용기를 갖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고, 그런 것이 교회 안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는 뭐든지 은혜 은혜 하면서 거짓된 화평을 은혜라고 하는데, 그것은 거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해 보니까 절망스러운 것도 많지만 희망이 많아요. 장로님들에게 몇 년 동안 수 천명, 많게는 만 명 가까이 제가 강의를 했거든요. 근데 장로님들이 받아줘요. 아직은 가야할 길이 멀지만 실제로 그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상당히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저는 교회 개혁도 한국 교회가 잘 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제일 희망을 갖는 것은 청년들이에요. 청년들이 한국처럼 모이는 나라가 어디에 있겠어요. 이 코스타 모이는 것을 봐도 그렇구요. 몇일 전에 우리 한국 복음화 협회하고 부흥 컨써트팀 하고 함께 주최한 경희대학교의 집회에서 3만명이 모였어요. 그날 청년들을 보고 흥분되더라구요. 망할 나라가 아니구나. 정치, 경제, 교회 등을 보면 참 답답하고 곧 망할 나라 같지만, 이렇게 청년들이 모이는 것을 보면 망할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한국 교회에 대해서 굉장히 희망을 가져요.


eKOSTA 덧붙여서 질문하고 싶은 것은 목사님께서 코스타에서 말씀하신 ‘고지론’에 관련해서 여쭙고 싶습니다. 목사님의 고지론이 몇 년 동안 코스타를 대표하는 표어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최근에 많은 사람이 엘리트 주의가 아닌가 하며, 또한 저지론과 미답지론도 나오며 비판되고 있는데,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고지론은 무엇이며, 또 한국 기독 지성인 혹은 엘리트들이 한국 교회와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들의 한계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죠.


김동호 오래 주제가 ‘낮아지신 그리스도, 섬기는 그리스도인’인데, 제 설교가 고지를 점령하라는 그 설교에요. 그런데, 왜 내가 그걸 주장하냐 하면 – 이제는 고지론이라는 말이 생기기까지 했는데, 섬기기 위해서는 높아져야 한다는 거에요. 낮은 자는 낮은 자를 섬길 수 없어요. 예수님이 낮아지셨다고 하는데, 낮아지신 것과 낮은 예수는 다른 거예요. 실력이 없으면 낮은 예수 그리스도이고요, ‘낮아지신’이라는 말은 무얼 포함하고 있느냐 하면, 하늘에서 땅으로 낮아지신 거예요. 그렇다면 땅으로 낮아지신 근거는 하늘에 있는 거예요. 하늘에 있는 사람만이 내려올 수 있어요. 땅에 있는 사람은 내려올 수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궁극적인 기독교는 섬김의 종교이지요. 종이지요. 낮아지기 위해서 실력은 높아야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엘리트 주의가 아니에요. 엘리트 주의는 높은데서 내려오지 않는 거예요. 엘리트가 되어서 내려올 때 힘이 생기지 않느냐? 그렇다면 섬김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전제가 높아짐이예요. 실력을 갖추어야 됩니다. 늘 얘기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이 낮아지라고 하신 것이 자세지 실력이 아니지 않아요? 근데 사람들이 실력을 얻으려면 고생과 희생이 있어요. 그렇게 힘들면 나태해져서 낮아져요. 그걸 겸손이라고 합리화하려고 하는 본능이 있어요. 그러면 안돼요.


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책임은 낮아지기 위해서 높아져야 된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고지론은 내려오기 위한 거에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변화산으로 데려가셨어요. 거기서 신비한 체험을 했어요. 그것은 하늘에 올라간 거에요. 얼마나 좋았던지 세상의 왕궁보다 거기에 천막 치고 사는 것이 좋겠다 한 것이 그게 하늘에 올라간 거에요. 그런데 그게 필요해요. 그리고는 예수님이 내려가자고 했어요. 내려 갈거면 무엇하러 올라가냐고 할 수 있지만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과 밑에서 낮아진 것과는 다른 거에요. 그래서 기독교인은 변화산에 올라가야 된다고 생각해요. 하늘을 봐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이제 고지론이에요. 근데 고지론은 수단이고 목적은 낮아짐이에요. 섬김을 위한 거지요. 그런데 그것이 잘못되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엘리트 주의가 되는 것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지요. 거기에 대해서 비판적인 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소리를 우리는 들어야 돼요. 말인즉슨 낮아지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올라갔을 때 안 내려올 수 있는 가능성이 많으니까 나는 그런 비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내가 얘기하는데서 비판받을 것은 없어요. 그러나 조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eKOSTA 유학생들이 학위를 가지고 한국으로 가니까 지위가 있고 그렇게 되면 기득권 세력으로 들어가는데, 실력은 높지만 태도는 낮아져서 섬겨야 되는데, 태도까지 높아지고 자세까지 높아지고 그러니까 경계해야 된다는 말씀이군요.


김동호 고지론이 엘리트 주의는 아닌데, 고지론의 약점이 엘리트 주의로 갈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은 경계해야 되지요.


eKOSTA 최근에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이 동안교회 사임하는 문제에 관심이 많은데,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하니까 그 이유와 과정을 좀 설명해 주시고, 더불어 어려웠던 점을 좀 말씀해 주세요.


김동호 첫째는 교회가 너무 커지기 시작했어요. 우리 교회 건물지은 지가 얼마 안 되고 꽤 큰 건물을 지었는데, 이제 그것이 부족해서 건물을 확장해야 되고 또 땅을 사야 될 처지가 되었어요. 그럴 바에야 교회를 분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했어요. 출석 교인이 5천명 넘어가면 분립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몇 년 걸릴 줄 알았더니 올해 그것이 되게 생겼어요. 그래서 그것이 첫째 원인이고, 그 다음에 교회가 성장하는 일이 모든 사람들에게 분담된 역할에 의해 건강하게 성장하면, 난 만 명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아니고, 한 사람의 영향력에 의해서 커지는 것이 많다면, 물론 꼭 그것만은 아니겠지만, 주된 원인이 어떤 특별한 한 사람에 의해서라면 그것은 건강한 것이 아니예요. 동안교회가 그런 면에서 건강치 않은 성장이 시작되었다고 판단이 되어졌어요. 여러 가지 동안교회 약점이 있는데, 밖에는 좋은 점만 나타나기 시작했고, 현재는 출석 교인들이 천명씩 느는 일이 이년째 계속되고 있거든요. 그러면 이것이 가속이 붙게 되고 그렇다면 만 명 되는 것이 금방이지요. 그렇게 되면 위험하다고 생각했어요. 보니까 교역자들도 나태해지기 시작했어요. 가만히 있으면 되니까. 장로님들도 긴장 안하고, 교인들도 가만히 있고 기도 안 해도, 노력 안 해도 된다는 것이 좀 위험하다고 생각했어요. 또 좀전에도 말한 것처럼 동안교회는 생사를 걸었다고 했는데, 정말로 10년을 하루 같이 싸웠어요. 갈등하면서 말이지요. 나는 그것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그 싸움이 어느 정도 끝났어요. 인간적으로 보면 내가 승자에요. 가만히 앉아 있으면 승자가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을 갖춘 것이지요. 근데 내 나이가 자리에 앉아서 영감 노릇 할 나이는 아니다. 그래서 한번 더 일을 해야 되지 않나 하는 것이 떠나는 이유에요.


그리고 아까 청년들 3만명 모였다고 했을 때 무엇을 생각했냐 하면 지금 청년들이 모일 수 있는 나라가 많지 않아요. 무슨 생각을 하냐 하면 교회 할 사람은 많지 않나? 그런데 청년들을 보니까, 그때 부흥 콘서트 팀을 보니까, 나는 처음 알았는데, 한국 찬양 사역 중 최고인 것 같아요. 영적으로나 실력으로나, 그런데 그분 들이 다 마누라 덕에 사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생활이 되지 않잖아요. 완전히 목사나 똑같이 사역자인데, 저 사람들 생활을 하게 해 주어서 그것만 헌신하게 하면서 crusade를 조직하면, 설교하는 사람과 팀을 짜서 믿는 아이들 모아서 부흥 집회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청소년들을 모을 수 있는 전도 집회를 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고 싶은 것이 그거에요. 내가 나가서 목회를 하면 나는 담임 목사는 더 이상 안 할 거예요. 목회는 설교하는 것만 빼고는 당회장이나 담임 목사를 세우고 이제 헌법으로 하면 나는 부목사 하는 수 밖에 없겠지요. 부목사가 되어도 좋으니까 나는 설교하고 주로 선교 사역하고, 그 생각을 실현해 보고 싶어서 그만 둔 거예요.


eKOSTA 목사님 창립 주일 사임 표명 하신 설교도 읽고, 뉴스앤죠이에서도 목사님의 글을 읽었는데, 오른손과 왼손의 비유를 들어서 늘 갈등을 건전하게 보시던데요. 한국교회에서는 특별히 저희 같은 평신도들이 무슨 얘기를 하면 건전한 것임에도 비판하지 말라고 하기에 토론의 문화가 형성되어 있지 않고, 그러다 보니까 교회 세습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성도들이 세습을 더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평신도로서 건전한 건의와 비판을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목사님처럼 늘 포용하셔서 건전하고 좋다고 하시는 분들이 참 적습니다. 목사님은 이런 부분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동호 아까도 얘기했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맞다고 생각해요. 내가 화평을 주러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는 말씀 말이에요. 그 검을 통해서 생기는 것이 진짜 화평이거든요. 지금 한국 교회에 있는 화평은 거짓된 화평이에요. 거짓된 은혜, 그러니까 한국교회에서 은혜롭게 하자는 것은 적당히 하자는 거에요. 대충 대충 하자는 거에요. 그리고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는 것은 우민화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집권층들, 권력자들, 목사와 장로가 권력자들이지요. 자기들의 자리나 일을 편안하게 하려는 우민화이거든요. 그것이 교회처럼 많은 데도 없어요. 그렇게 되면 부패해요. 청년들이 웃기기 위해 하는 이야기지만, 김일성과 재벌총수와 대형교회 담임목사가 똑 닮았다고 하는 것이 그냥 우스운 소리가 아니예요. 사실이거든요.


또 사람은 언제나 한쪽으로 치우쳐요. 오른손 잡이가 있으면 왼손 잡이가 있어요. 오른손은 오른손이지 바른손이 아니에요. 그런데도 바른손이라고 하거든요. 그럼 왼손은 틀린 손인가요? 그건 아니거든요. 왼손은 왼손이고 그것을 인정해 줘야 돼요. 그래야 건전하게 나아갈 수 있어요. 얼마 전에 외국인 노동자가 신문에 건의했는데, 살색이라는 것을 가지고 건의했어요. 우리는 이것(얼굴을 가르키며)을 살색이라고 하는데, 그럼 자기는 뭐냐는 거에요. 자기 주관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살색이라는 말을 쓰면 안 되는 거에요. 그래야 건전하고…. 제가 이제 철학책, 역사책을 공부하면서 한 가지 배웠어요. 역사는 좌로 치고, 우로 치면서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나는 한쪽만 보기 때문에 늘 널뛰기를 하는구나. 그래서 제일 좋아하는 말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에요. 균형 감각, 내가 바라보지 못하는 것을 얘기해 주면 내가 균형을 잡게 되잖아요. 내가 제일 듣고 싶어하는 말, 균형 감각. 그렇게 하려면 비판을 받고 수용을 해야 균형을 잡지요.


eKOSTA 목사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복잡한 것을 아주 단순화시켜서, 특별히 복음을 단순하게 공식화 시켜서 잘 설명하시는데, 그 비결이라도 있으신가요?


김동호 저 같은 경우 교육 전도사가 되었을 때,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설교를 했어야 되었어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말이죠. 설교를 해서 아이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되겠는데, 그게 거의 불가능해 보이더라구요. 기도 많이 했어요. 1학년 아이들도 은혜받게 해 달라구요. 밤낮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면 저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한번도 놓치지 않고 했던 씨름이었어요. 그러니까 애 쓰니까 되더라구요. 그런 전달 방법이 하도 애를 쓰니까 꿈에 생각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메모지를 머리맡에 두고 자기도 했어요. 꿈에 생각나면 쓰려구요. 그렇게 꿈에서 생각난 것을 써서 설교를 하니까 1학년 아이들이 알아듣고 은혜를 받더란 말이죠. 그러니까 내 말은 쉽지요. 나는 십자가가 어떻게 구원하는가를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어른들은 얼마나 더 잘 알아 들어요? 초등학교 아이들도 잘 알아 들으니까 말이지요. 난 정말 기도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안 되면, 울고 소리 지르고 기도 하고 그랬으니까요. 몇 년 그러니까 되더라구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헨리 포드가 그랬다 그러더라구요. 그 사람은 그림을 그려야 되니까, 손전등을 놓고 잤다고 하지만, 나는 손전등 필요 없이 글이니까 몇 자 적을 수 있는 연필과 메모지만 필요했지요. 어떤 사람들은 신비롭거나 영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현실에 집착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eKOSTA 그 외에 존경하는 분이나 목사님께서 영향력을 많이 받은 분을 좀 소개해 주시죠.


김동호 제가 자라나던 교회의 목사님한테 영향을 많이 받았고, 학교 다닐 때 교수님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받았지요. 여러분 계시지만 주선애 교수님 같은 분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eKOSTA 그리고 목사님께서 영향력을 많이 받은 책은 어떤 책들이 있는지요?


김동호 저는 그렇게 책을 많이 읽지 않았어요. 저는 지금도 다독하려고 하지 않고 정독하려고 하고 있지요. 제가 역사책, 철학책 많이 읽었어요. 저는 기독교 교육을 공부했지만, 공부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를 들면 기독교 교육을 공부한다면 기독교 교육사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역사를 잘 알아야 됩니다. 철학을 하면 철학사를 잘 알아야 되지요. 신학을 할려면 교리사같이 말이죠. 그런 식의 책들을 잘 알아야지요. 모든 것을 공부할 때에 역사를 공부하여 이것이 어디로 흘러가나, 어째서 그렇게 흘러가나 하는 흐름의 방향을 잘 알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도덕경 열심히 읽었어요. 논어같은 것도 읽었지만 나는 도덕경을 참 좋아했어요.


eKOSTA 참 의외입니다. 목사님이 도덕경을 좋아하신다는 사실이요.


김동호 그것이 서양 철학보다 깊어요. 동양 사상이 치우침이 없는 것이지요. 즉 중용을 강조하죠. 나한테는 더 맞고 좋아해요. 도덕경은 참 절묘해요. 균형 감각에 참 좋아요.


eKOSTA 끝으로 이코스타 독자가 주로 유학생인데, 이코스타 독자들에게 조언을 좀 해 주시죠.


김동호 제가 사탄에게 두 번 속으면 망한다고 늘 하는데, 사탄은 공부할 때 일하라고 하고 일할 때 공부하라고 해요. 두 번 속으면 인생 망해요. 그래서 공부할 때가 있고 일할 때가 있거든요. 나는 청년 때 한번 속았어요. 공부할 때 일하라는 속임에 속았어요. 그래서 나는 일은 참 잘하고 빨리 했어요. 공부할 때 일을 했기 때문에 막상 일할 때 힘들어지는 거에요. 공부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교회 봉사도 참 중요하지만 봉사로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어요. 전공으로 이루는 거예요. 나는 월급 받고 일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거든요. 그래서 교회 봉사, 교회 봉사 하는데 봉사는 그냥 봉사에요. 봉사로 헌신하는게 아니에요. 전공으로 헌신하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공부 열심히 하라고 권합니다. 내가 한동대 가서 가르칠 때 너희들 공부하다 죽으면 순교다 했어요. 농담이 아니거든요? 하나님 위해 공부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공부할 때 딴 핑계 대지 말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하나님이 마음껏 쓰시게 공부 열심히 하세요.


eKOSTA 저 개인적으로는 봉사를 안 하거나 교제나 예배를 하지 않으면 답답함을 많이 느끼거든요.


김동호 물론 그렇지요. 봉사를 전혀 안 하면 죽죠. 그렇지만 청년 때는 봉사가 지나쳐요. 보람이 있고 그래서 그러는데, 봉사하는데 절제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걸 무시하면 안 돼요. 봉사 안 하면 사람이 죽지요. 그러나 우선 순위가 늘 공부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요. 봉사가 지나쳐서 봉사하고 남은 시간에 공부하거든요. 그러면 공부가 안 되잖아요. 유학 생활이라는 것이 만만한게 아닌데. 다른 이야기긴 하지만, 장로님 한 분이 “목사님은 월급 받고 봉사하고 우리들은 아무 것도 못 받고 봉사하니 우리가 더 순수한 것 아닙니까?” 하더라구요. 그래서 “장로님은 아마추어이고 나는 프로에요” 라고 맞받아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봉사할 때, 진정한 봉사는 전공으로 봉사하는 거에요. 월급 받으면서 말이지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프로라는 말이에요. 나는 목회에서 프로거든요. 목회는 누구한테 양보하거나 해서는 안 되고 내가 제일 잘 해야 돼요. 의사는 수술을 잘 해야 돼요. 그런데 의사가 수술을 잘 못 하고 교회 봉사만 열심히 하면 그것은 조연을 잘 하는 거에요. 주연 노릇을 잘 해야지요. 청년때 그것을 잘 깨달아야 되요. 청년 때는 봉사가 지나칠 때가 많아요. 또 교회가 그것을 요구하구요. 나는 그래서 청년들한테 무리하게 요구 안 해요.


eKOSTA 예, 이코스타 독자들이 학문과 신앙 사이에서 그리고 진로 문제 등에서 고민이 많은데 그런점에서도 도움이 많이 되었을 줄 압니다. 바쁘신 중에서도 이렇게 장시간을 내어 인터뷰 해 주신 것 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