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 1, 2002 | 삶과 신앙/이시훈의 살며 생각하며
이코스타 2002년 11월호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일컬어 ‘산파술’ 또는 ‘상기술’이라고 합니다. 제자들과 주고받는 문답식의 대화를 계속하다 보면 대부분의 제자들은 어떤 설명 없이도 스스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게 됩니다. 자신 안에 이미 있는 기억이나 지식, 지혜를 이끌어 내주는 것이 스승의 역할이며 교육인 것이지요. 즉 그 안에 있는 인식과 지적 능력을 스스로 이끌어 낼 수 있는 독특한 교육 방법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이지요. 이미 모든 답은 네 안에 있다. 우리 안에 이미 보편적인 진리에 대한 인식 능력이 있음을 확인하라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외침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무지함과 그릇됨에 대해 자각하라는 의미와 우리 안에 있는 위대한 속성을 발견하라는 두 의미가 동시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부정적인 의미로 적용되는 일이 대부분이라 안타깝습니다만…
저는 얼마 전에 책을 읽다가 티벳의 언어에는 ‘자기 혐오’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들이 그런 의미에 대해서 상당히 의아하게 생각한다는 글을 읽으며 약간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불성(佛性)이 내재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 존재를 혐오할 수 있냐는 설명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저는 자주 제 자신에 대해서, 인간의 속성에 대해서 실망을 하기도 하고 좌절과 분노를 느끼기도 합니다. 아마 드러내지는 않을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자의식을 느낀 경험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저는 제 믿음의 순전성을 스스로 점검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내가 믿는 것은 인간과 멀리 떨어진 초월의 존재인가, 인간 안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존재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진지한 반성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고 그들의 안에 성령이 함께 하는 것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믿고 있는가 반추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혐오나 자존심의 결여 상태에 빠진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삶에 대한 열정이나 의욕을 상실한 채 어둠 속을 헤매게 되는 것이지요. 자신의 부족하고 그릇된 모습에 대한 불만으로 추구해야할 무엇도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야말로 가장 불행한 삶의 자세일 것입니다. 내 안에는 아름다운 것이 아무 것도 없다라는 자의식은 자기를 스스로 발전시키고 성숙시키는 힘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론가들이 흔히 기독교는 죽음을 기다리게 하는 무력한 삶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천국관을 잘못 이해하여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체는 역사의 넓은 길목에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의 거대한 시체가 가로막혀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데아를 지향하는 철학관과 천국을 사모하는 기독교의 신앙이 삶을 의미 없는 허상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현상세계가 이데아의 거울이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천국을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려함이라는 의미를 다시 새겨보면 매우 다른 결론을 얻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신 것은 빛을 주러 오신 것입니다. 자기의 안을 비추고 밝게 바라볼 수 있는 빛을 주심으로서 내가 얼마나 아름답고 존귀한 존재인지, 삶이란 얼마나 축복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깨닫게 하여 주시는 것이지요. 나의 살아가는 모습이 비록 죄와 허물로 어리석은 말과 행위를 범하고 살지만 본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만들어진 존재라는 깨달음을 얻으면 모든 시각이 매우 긍정적이고 성실한 자세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위에서 이 순간 이루어지고 있는 천국의 실현에 동참하는 것은 죽음을 기다리게 하는 허무주의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강조한 아름다운 삶과 영혼의 정화는 철학을 통한 인식 행위에서 이루어지는 관념이지만,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펼쳐 주시는 세계는 매우 실천적이고 적극적인 현실세계인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바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열쇠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축복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극적이고 역동적인 삶의 모험이 충만한지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아름답고 정교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우주를 지배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받고도, 대우주의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손에 쥐고도, 내 주제는 얼마나 보잘 것 없고 형편없는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만이 유일한 소망이라는 나태에 빠질 수는 없지 않을까요? 이 땅에서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선한 삶을 살면서 매일 감격과 감사를 느끼는 삶은 무엇을 가졌는가와 비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이 비록 어렵고 힘들고 불우할 지라도, 내가 정말 형편없는 인격과 능력을 가졌다할지라도 나를 너무나 사랑하여 목숨을 주시는 그분을 통해 힘을 얻고 긍정적인 인생관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내가 힘없고 지혜도 없지만 내 안에 계신 분을 통해 세상 어떤 지식보다 더 큰 지혜를 얻게 되는 경험은 하나의 기적이고 비밀입니다. 현실에서 다 이루지 못한 삶이 천국에서 완성된다는 꿈마저 있으니 이것은 어리석고 가엾은 자의 허망한 도피의식이 아니라 약속에 대한 기쁨과 믿음인 것이지요.
저는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축복은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과 좌절하지 않는 꿈에 대한 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울하고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말을 걸곤 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 너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 천국의 열쇠를 가진 자, 내 안에 우주를 이미 품고 있는 자. 세상이 아주 다르게 보여지고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노래가 절로 나오는 순간입니다.
Nov 1, 2002 | 삶과 신앙/반영운의 환경이야기
이코스타 2002년 11월
지난 9월 초부터 한 달 동안 프로젝트 수행 차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를 방문했었다. 자카르타에서 머무는 동안 신문과 방송매체를 통해 깔리만딴의 열대림이 몇 주 동안 꺼지지 않고 불타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연기가 인근 말레이지아까지 덮여서 한 낮에도 햇빛이 비치지 않고 있으며 비가 오지 않으면 상당량의 열대림이 손실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벌써 깔리만딴의 열대림은 60-70% 정도 유실되고 있다고 보고 되고 있다. 이 현상은 브라질의 아마존 열대림 유실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전 지구적인 환경문제라 아니 할 수 없다.
열대림 화재는 벌채와 함께 흔히 rainforest deforestation (열대림 유실)의 주요한 이유들로 알려져 있다. 열대림 화재는 자연적인 현상에 의한 것과 인위적인 행위에 의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자연적인 현상은 거센 바람에 의해 나무들이 서로 부딪치거나 번개에 의해 발화되는 것을 말한다. 인위적인 현상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 방화하여서 화전을 일으키거나 방목을 하는 것을 말한다. 벌채는 상업적인 목적에 의한 합법적인 벌채와 불법적인 벌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합법적인 벌채는 그 용량을 정하여 한계에 맞게 벌채를 하는 반 면 불법적인 벌채는 아무러한 대책도 없이 시간과 장소에 국한하지 않고 나무를 베어서 파는 것을 말한다.
인도네시아의 열대림 유실은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 깔리만딴에서 불타고 있는 열대림은 단지 인도네시아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문제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깔리만딴의 원목은 벌써 오래 전부터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어서 아시아는 물론 유럽과 북남미에서 펄프나 가구용으로 수입하고 있다. 가난을 모면하기 위해 화전을 일으키는 것 또한 현재 인도네시아로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신 자유주의 경제 체제가 빚어낸 결과로서 아마존 열대림에서 보여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국적 기업들이 값싼 노동력과 원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제 3세계로 몰려들고 있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예를 들어 아마존 열대림에서 소를 방목하기 위해 벌채 또는 방화하여 없어지는 면적이 하루에 축구장 정도라고 한다. 거기서 생산된 소고기는 전세계 맥도날드와 같은 일품 음식점이나 식당과 식료품점에서 소비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아마존에서 사는 원주민들에게는 삶의 근거지인 열대림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으며, 전세계적으로는 열대림 화재로 인해서 지구 온실가스 중의 하나인 이산화탄소 량이 증가하고 산소 공급 및 생물 종의 다양성이 손실되고 있다.
일견 인도네시아의 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문제로 보여질 수 있으나 조금만 넓게 생각하면 이 문제는 우리 전 세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연루된 공동 범죄임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경제가 하나로 통합되어 가면서 지구 상의 어느 국가도 이 도도한 흐름에서 예외일 수 없게 되었다. 말 그대로 개인 간, 국가 간의 치열한 생존 경쟁이 빚어 낸 결과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국부적으로는 인도네시아의 공무원이 부패하고 화전민이나 소 방목업자나 벌채업자들과 서로 공모해서 생겨난 문제이지만,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보면 세계 경제의 흐름에 의해 생겨난 결과이다.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은 방화 당사자에게만 있지 않고 방화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세계 신 자유주의 경제와 그 경제 체제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다.
이 문제를 인식하고 UN을 비롯한 국제 기구에서는 열대림을 보호하기 위한 기금을 조성하거나 캠페인을 벌이고 있지만 실제적인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다. 일례로 전 지구적인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회의가 얼마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한네스버그에서 열렸다. 미래세대와 현세대의 필요를 충족하는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개발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열린 회의인데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아직 역부족인 듯 하다. 왜냐하면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면 각 국가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은 자유 경제 시스템의 도움으로 사실상 인도네시아와 같은 개발 도상국이 경제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치르는 엄청난 희생의 대가를 담보로 하여 현재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되었다. 그러한 대가 중에 개발도상국의 환경적인 희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근본적이고 치명적인 것이다. 단기적으로 얻는 경제적인 대가는 장기적으로 빚어지는 환경문제의 근본적인 폐해에 비하면 아주 적은 것인데도 늘 우선 순위에서 밀릴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챤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 제일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인식의 전환이다. 깔리만딴에서 타고 있는 열대림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지, 아니 정말 나의 일처럼 여겨져서 우리 집이 타고 있는 것 같은 아픔을 경험하고 있는 지 깊이 성찰해 볼 일이다. 우리가 이제껏 훈련 받아 온 영적인 일은 소위 의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것 정도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만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속에 하나님의 세심하신 인도하심을 보게 된다. 어떨 때는 우리도 이해 할 수 없을 만큼 역사의 중요한 순간 순간에 소위 비 그리스도인들을 사용하시고 계신 것도 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 크리스챤들은 영적인 일의 범위를 넓혀서 속칭 세상의 일 (모두 하나님의 일이지만)까지 우리의 섬김의 영역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하고 있는 학문 분야의 일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아무도 관심 쓰지 않는 영역의 일일 수 있다. 만인 제사장의 정신이 보다 충일해 질 때 각자의 소명에 대한 눈도 더욱 넓어 지리라 확신하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열대림 파괴에 우리 크리스챤의 자세와 행동강령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먼저 나무를 이용한 제품들을 사용하는 소비 주체로서 보다 건강하고 바른 소비행위를 해야 한다. 즉 필요하지 않은 제품을 사지 않아야 하며, 다시 쓸 수 있는 것은 다시 쓰고, 버릴 때는 보다 주의 깊은 고려가 필요하다. 특히나 열대림에서 나오는 소고기를 이용한 일품 요리를 먹는 것을 자제해야 할 것이다. 세계경제가 시장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사실이라면 더 더욱 열대림을 무분별하게 개발해야만 얻어지는 제품들을 소비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이러한 환경문제와 연결된 연구 주제를 찾아서 공동의 연대를 도모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물학, 동물학, 경제학, 생명공학, 환경학, 지리학, 국제 정치학 등 관련 분야의 통합적인 연구가 절실히 요청된다.
우리 크리스챤 개인은 연합을 통해 각 지역 단체의 Opinion Leader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즉 교회를 중심으로 또는 각 각의 관심분야를 중심으로 연합하여서 신앙적인 동지로서의 일도 할 뿐만 아니라 지역 환경문제에 대한 정부의 역할 등에 대한 의견을 개진 할 수 있다. 또한 국가 및 세계 환경문제에 대한 입장을 표명할 수 있다. 사회학적인 용어로 Social Capital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는 한 사회가 어느 정도의 자원적인 단체와 조직을 가지고 공동의 선을 위해 집단적으로 그에 참여하는가를 진단하여 한 사회의 신뢰수준을 평가한다. 사실상 우리 한국의 Social Capital은 매우 낮은 것 같다. 크리스챤들의 종교행사 참여를 Social Capital의 일부로 본다면 아마도 그 수준은 매우 높겠지만 우리 국민의 도덕성과 공동의 선을 위한 참여 수준으로 본다면 크리스챤들의 종교행사는 궤를 달리하는 면이 없지 않다.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안심입명적인 모습이 우리들에게 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챤들은 빌립보서 2장 5-9절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의 자세를 본받아야 한다. 십자가의 정신이 전도의 현장에 뿐만 아니라 세상의 일 하나하나에 구체적으로 들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노력에 있어서도 개인 뿐만 아니라 크리스챤들이 연합하여야 함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성경에서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한 것은 아마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이 세상의 풍속을 두고 한 것이지 물리적인 세상 자체를 무시한 데서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좋으셨다는 세상을 지키고 가꿀 책임을 인간에게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들에게는 어떤 책임을 주셨을까? 두 말할 나위 없이 창세기에서 인간에게 주셨던 동일한 책임과 권한을 주셨으리라 확신한다. 에덴을 돌보고 가꿀 책임을…
우주가 열려가고 인터넷을 통해 지구촌 구석구석이 실시간으로 연결되고 있는 이 시기를 살고 있는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크리챤들이 진정으로 가꾸고 돌보아야 할 에덴은 정말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