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정] 거룩한 영적 낭비

2006년
코스타에서 자주 들었던 문구 중 하나가 ‘영적 낭비’이다. 30명이나 되는 많은 강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영적 포텐셜에 비해 일주일
동안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주강의 한번, 또는 강의 몇 번에 상담이 전부라는 것이다. 그것도 사례를 받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통비, 가족
등록비까지 책임지고 자비량으로 섬기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일리가 있는 말로 들린다. 실제로 한국, 연변,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오신 강사들의
경우는 거의 10일 정도가 강의 몇 번을 위해 낭비(?)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은 이것을 낭비가 아닌 거룩한 투자로 본다.

사도행전
8:26이하를 보면 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이상한 명령을 내리신다. 명령의 내용은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가는 사막 길로 무작정 떠나라는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고 있었고, 사도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전 지역으로 흩어졌고, 아직 회심 이전의 사울은
보이는 교회마다 파괴하고 성도들을 붙잡아 감옥에 넘기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제자들의 복음전도 사역은 점점 확장되고 있었으나,
핍박받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최대의 위기였다. 그런
긴급한 상황에서 아무도 보이지 않는 사막 길로 무작정 떠나는 것은 시간낭비는 물론, 뻔뻔스러운 도피로 보일 수도 있다. 태풍으로 교회가 침수되어
정신없을 때 교회의 지도자가 갑자기 성령께서 지시하신다고 먼 시골로 떠나는 것과 진배없다. 그러나 빌립은 성령의 음성에 순종했다. 사막 길에서
당시 에티오피아 여왕 밑에서 재정을 담당하는 큰 권세를 지닌 내시를 만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침례까지 주게 된다. 이 내시는 분명
에티오피아에 복음을 전하는 평신도 선교사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빌립도 나타나, 카이사랴에 이르는 모든 고을에서 선교활동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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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에 못 미친다. 이사야 55:8,9에서 하나님은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고 했다. 코스타에서는 4번의 저녁집회가 있다. 미주에서 경험하기
힘든 천여 명의 예배자들이 드리는 감격적인 예배의 향연이 매일 저녁 드려진다. 1,000여명이 뛰면서 드리는 열정적인 찬양과 선포되는 복음의
메시지를 상상해보라. 그 안에는 20대에서 50대에 이르기까지 직업과 소명, 평신도와 목회자, 교파와 교회, 세대와 문화를 초월한 진정한 찬양과
예배의 축제가 드려진다. 진정 천국의 모형 아닌가? 이 예배를 통해 올해도 100여명이 예수님을 영접했고, 200명 넘게 2년 이상 단기선교에
헌신했다. 그뿐이 아니다. 성인 참석자 반이나 되는 500여명의 학생들이 강사들과의 일대일 상담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는 최고의 상담실이
코스타 내내 운영된다. 우리 인간 편의 ‘낭비’가 하나님 편에서는 엄청난 ‘결실’로 바뀌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
유학생들의
영적
부흥을
위해
이처럼
1
세대가
자신의
재정과
시간을
낭비하는
나라가
있었는가?
눈물과
땀과
사랑을
투자하는
나라가
있었는가?

결과,
자신의
편의와
안락을
포기하고,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미지의
땅을
향해
회중의
5
분의
1

자리를
박차고
무대
위로

나아가는

장엄한
광경을
상상해보았는가?
2006

현재

세계

16

지역
,
남미,
러시아,
남유럽,
북유럽,
토론토,
밴쿠버, 시카고
,
인디아나
폴리스,
북경,
상해,
동북차이나,
일본,
대만,
뉴질랜드,
호주,
필리핀에서

거룩한
영적
낭비’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
23

,
이처럼
말도

되는

영적
낭비’를
감히
꿈꾸고
이를
실행에
옮겼던
우리의
1
세대
영적
선배들이
없었더라면
이런
영적
축제는
지금까지

땅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
그분들에게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존경심을
표하고
싶다.

 

이유정
목사

한빛지구촌교회
예배디렉터, 좋은씨앗(CCM)

[신선묵] 영적 지도자와 순종 (Obedience)

 

 

어렸을 적에 교회에서 배운 말씀들이 참 중요한 것 같다. 나는 교회 안에서 자라면서 어렸을 적부터 많은 설교들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중에 아직도 눈에 선하게 남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목요일 저녁 어린이 예배 시간이었는데 지금 한국에서 목회하시는 김원교 목사님이라는 분이 그때 우리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는데 그림을 잘 그려오셔서 설교를 해주시고는 하였다. 그 날도 도화지에 색 연필로 두 장의 그림을 가져오셔서 설교를 해 주셨는데 그 그림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바위 위에 지은 집이었다. 예수님의 산상 수훈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비유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설교의 주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어릴 때 보았던 그림이 아직까지도 눈에 선한 것은 왠일일까?

 

달라스 월라드 교수는 하나님의 모략이라는 책에서 바로 이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바위 위에 지은 집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일상적인 순종과 실천이 산상 강화의 마지막 주제이다. 그 분이 최선의 길을 아시고 일러주신 일들을 한사코 행하지 않기 위해 상상 가능한 모든 일들이 시도 되리라는 것을 그분은 분명 미리 내다 보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고도 순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의 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얼마 전에 스타트 목사님의 The Living Church라는 책을 읽었다. 책의 내용이 많은 도전과 확신을 주었다. 특히 책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부록으로 목사님이 80 생신 때에 나눈 말씀이 있는데 도전이 되었다. 그의 사역 가운데서 가지 중요한 것을 나누었는데 중에 하나가 순종에 관한 것이었다. 요한 복음 14: 21 (나의 계명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이고 나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내가 그에게 나타내리라) 에서 있듯이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라고 하시면서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말을 목사님은 이렇게 표현하셨다. 사랑의 진정한 시험은 순종입니다. 진정한 사랑에 대한 보상은 그리스도가 자기를 나타내심입니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순종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마음에 다았다. 우리가 말로 백번 사랑한다고 해도 순종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예수님이 멀리 계시고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아마 순종하지 못할 , 혹은 순종하기를 주저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순종은 예수님과 친밀한 동행을 위한 열쇄이다.

 

내려놓음으로 많은 관심을 끌고있는 이용규 박사가 북경코스타에서 강의를 마치고 한 자매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살 수 있지요?” 라고 질문하였을 때에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길 원하세요. 그러나 우리가 가진 안테나가 너무 약하기 때문에 들을 수 없는 거죠. 안테나를 세우는 한 가지 방법을 말씀드린다면 주님, 제가 말씀해 주세요. 제가 듣고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님의 말씀에 100%순종하겠다는 결단 없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백지 수표를 주님께 온전히 넘겨 드리기 전까지는 주님의 뜻을 듣고 순종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순종을 강조한 말씀이다.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로 안수받고 특히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하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많아지고 남들에게 가르치는 것도 조금씩 잘 해가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말씀을 아는 것 뿐만 아니라 또 잘 가르칠 뿐만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그 분야는 여전히 어렵고 남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잘 가르치지만 나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는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말로는 쉬운데 행동으로는 여전히 어렵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산상 수훈에서 하나님 나라의 귀한 진리들을 가르치시고 나서 제일 마지막으로 이 비유의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가 좋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 말씀이 머리의 지식으로 끝이 나고 행동으로는 다르게 행동하게 될까봐서 마지막에 강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영적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가 영적 지도자로서 많은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주님께 지도자 자신이 순종하는 것이다. 월라드 교수는 말하기를 그 분을 라고 부르거나 심지어 그분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을 행해도 그것이 순종을 대신할 수는 없다.”  특별히 나의 경우에 선생된 자로써 무거운 책무를 느낀다. 알지나 못하고 또 남에게 가르치지나 않았으면 좋으련만 머리로는 잘 알고 남에게는 잘 가르치면서도 실제 나의 삶 속에서는 그 진리의 말씀 대로 살지 못하여 그 참된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에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심판 받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는 야고보의 권면이 생각난다.

우리 삶에 구현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 – 신선묵교수


저는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코스타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내용을 말씀해달라고 부탁받게 되어 강의를 맡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개념적인 정의를 내릴 있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어떤 것을 정의하는 문제를 얘기해보겠습니다. 어떤 것을 정의할  “A A이다.”라고 수도 있지만 “A B 아니다.”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같습니다. 

제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를 고민하면서 LA에서 이곳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고 왔습니다. 여러분 나이쯤 되는 여학생이 바로 옆에 앉아 있었고 그다음 자리는 비어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직전에도 자리가 비어 있어서 속으로 여학생이 그리로 가길 바랐습니다. 그러면 편하게 가겠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뜨기 직전에 어떤 아주머니가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자리를 지나쳐 가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다시 빈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한 후에 각자 책을 보면서 가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아가씨에게 뭐라고 하는데 아가씨가 아줌마에게 쏘아붙였습니다.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할까하는 생각을 했는데, 아주머니 또한 정신이 없어 보였습니다. 저는 불을 켜고 책을 보고 있는데 아주머니는 제가 아래서 책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분은 모녀지간이었고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만, 갈등이 있었습니다. 딸은 어머니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고 어머니는 딸에게 어떻게든 얘기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갈등과 마디 마디를 보면서 어떤 마음을 느꼈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도와주고 싶은데 도와줄 수가 없었고, 상담할 수도 없었고, 아픔만을 내가 느끼면서 너무 아프겠다, 힘들겠다하는 생각을 하며 왔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 모습들이 우리의 삶에도 우리의 관계에도 있고, 제가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반대에는 사단의 나라가 있고 사단의 나라는 바로 저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이 사단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도 피해자입니다.
인간관계와 모든 속에서 사단은 어떻게든지 사람들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고, 죄의식을 일으킵니다.
그것 때문에 바른 사랑을 못하게 하고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사랑이 죄로 물들어 있기에 남에게 아픔을 주고, 아픔을 받으면 내가 밀쳐내고 더한 아픔을 줌으로써 자기가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런 아픔과 힘듦과 갈등이 사단의 나라가 아닌가 합니다. 원래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획하신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정말로 사랑과 화평과 기쁨과 평안함이 있는 나라였는데 어느새 사단이 인간의 태초인 아담으로부터 인간의 삶에 들어오고, 인간의 삶에서 자신이 노릇하고, 인간의 삶을 다스리면서 사단의 인도함을 받게 하고, 사단의 원칙을 따르게 하였습니다. 결과로 많은 고통을 가지고 살게 것이 사단의 나라의 모습이고 그런 것이 인간  삶의 현재 조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제가 구약에서 다니엘서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얘기하는데 오늘은 얘기는 하지 않고 넘어가겠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데 사단이 인간의 삶을 조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훈련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회복하도록 계획 하시고, 추진하신 것이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들입니다. 다니엘서를 간단히 설명 드리면 다니엘서는 하나님이 왕이시다, 주권자이시다는 주제를 가지고 쓰인 책입니다. 책을 보면 다니엘과 다니엘의 삶에서 하나님이 왕이심을 보여주고, 다니엘의 친구, 신앙의 공동체에서 하나님이 왕이심을 보여주고 있으며, 하나님이 세상의 왕이신 것이 세상으로 대변되는 느부갓네살왕을 통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당시 무엇이든지 있는 왕에게 정신병이 들게 하고, 왕은 동안 들판에 나가서 잠을 자고 풀을 뜯어 먹으며 지내다가 하나님이 정신을 회복해 주셨습니다. 경험을 통해서 느부갓네살왕은 내가 왕이 아니고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기독교 공동체만을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었는데 꿈을 다니엘이 해석해 주었습니다. , , , , 흙으로 동상이 뜨인 돌에 의해서 부서지고 가루가 되는 꿈이었습니다. 이들은 바빌론과  페르시아 그리고 로마, 인간의 왕국을 상징합니다. 예언을 푸는 사람들은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인지 풀려고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기 보다는 중요한 것은 인간의 왕국이 계속 바뀌며 지속하는 가운데 언젠가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임해서 모든 인간의 왕국을 폐하고,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예언이 가르치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왕들이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여 다른 왕국을 멸하고 새로운 왕국을 세우고, 자신이 왕이 되는 그런 역사가 계속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방향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서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삶의 왕이시고, 신앙 공동체와 세상의 왕이십니다.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 고백하지 못하지만,
속에서 하나님은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도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다니엘서에서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왕국이 계속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예언대로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임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땅에 가져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성육신을 통해서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와 고난을 통해서 죄의 값을 지불해 주시고, 부활을 통해서 생명을 처음으로 가지시고 오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래 계획하셨던 평화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죄의 해결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했다고 선포하시고, 우리가 이러한 선물들을 구원자 예수님 안에서 받고 누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것입니다. 원래 계획하셨던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삶의 모습들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이뤄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해결되고, 마음속에 평안함이 생기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뿐만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로서 예수님의 고난과 낮아짐과 섬김의 삶을 살도록 명하셨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배우면서 부분을 많이 강조하였습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야 합니다. 얼마 전에 학생과 식사를 함께 했는데 학생이 자신은 고난을 선택해서 있는 용기가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마음에 부담이 있었나 봅니다. 구주로 예수님을 받아 드렸지만,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담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받아 누리기를 꺼리는 마음이 있습니다.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임하셔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평안을 주시고, 예수님을 우리가 구세주로 영접함을 통해서 자녀의 관계가 회복되었는데, 그다음으로 우리에게 낮아지는 , 섬김의 , 희생의 삶을 살라고 예수님께서 삶과 말씀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우리가 살려고 하면,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라면 굉장히 부담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이 벽을 넘지 못하고 갈등 속에 있습니다.

전에 제가 LA에서 목회하시는 미국 목사님 스웬들이라는 유명한 목사님이계시는데, 그분의 설교집을 읽으면서 맞는 얘기구나 생각했던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LA에서 뉴욕을 가려고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계를 가져오지 않아서 옆에 시계를 사람에게 지금이 시인지 물었습니다. 사람은 뉴욕의 시간뿐 아니라,  온도와 기상 상태까지 말해주었습니다.
사람이 궁금한 것을 시계를 보면서 얘기해 주었습니다. 사람이 시계에 웬만한 정보가 있다는 것에 감동해서 시계 주인에게 시계를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원한다면 드리죠. 오천 불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사람은 비록 값이 비싸지만 원하는 정보들을 얻을 있다면 얼마나 좋은 시계인가 하는 생각에 오천불을 주고 시계를 샀습니다. 시계를 받고 떠나려는 시계를 사람이 잠깐만요하고 부르더니, 시계를 쓰기 위해 필요하다고 개의 이민용 가방을 주었습니다. 컴퓨터가 작동하려면 이것을 들고 다녀야 하고 시계만 가지고는 동작이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경우에 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이런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기독교로 들어오면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이 자녀 삼아 주시고 모든 것이 은혜로운 것으로 인식됩니다. 예수님을 믿기로 하고 교회에 갔더니 매일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시계를 가지려 했더니 이민 가방 개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시계를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구원의 부분은 좋은데 Lordship
부분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있어서 매일 같이 주저함이 있는 것이며, 그런 갈등 속에 코스타에서 가야 한다고 하니 것이고 집회 동안 고난의 , 십자가의 길을 가야지 하고 결심했다가 집에 돌아가면 결심은 단지 은혜 충만할 것이고, 그렇게 없다고 돌아서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의 성격에 대해서 얘기해 보고 싶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lordship 짐이라고 생각하는 구원이 선물인 만큼 lordship 선물입니다. 사실 구원도 선물이지만 십자가의 삶은 선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것을 가르쳐주시면서 높아지는 삶보다는 낮아지는 , 지배하는 삶보다는 섬기는 , 받는 삶보다는 주는 , 원수를 갚는 삶보다는 용서하는 삶을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들입니다. 원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되지만,
안의 원리들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역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역설(paradox)입니다. 파라독스가 무슨 뜻입니까?  파라독스는 언뜻 보면 모순이고 말이 되지만 거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높아지기 보다는 낮아지는 , 지배하기보다는 섬기는 , 받기보다는 주는 , 이것을 처음 보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선물을 주신다면서 어떻게 이것이 길입니까. 말이 안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것이 행복에 이르는 바른길입니다. 우리가 높아지면 행복해질 같지만, 사실 행복은 높은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배하면 좋을 같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지배자는 사람들을 섬기는 지도자입니다. 원리들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길을 가라고 하신 것은, 내가 좋은 선물을 주었으니 이제 힘든 길을 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통해서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행복한 삶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진리를 주신 것입니다. 진리는 언뜻 보기에는 말이 되지 않지만 진정한 의미의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은 역설의 삶입니다. 우리가 건강하고자 운동을 많이 하는데, 운동 자체는 힘이 들고, 시간도 많이 듭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운동을 합니까? 고난을 거친 후에 건강한 때문에 힘든 운동을 기꺼이 하는 것입니다. 운동을 선택하는 자체만 보았을 때는 말이 되지만 그것이 건강한 삶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고, 기쁜 마음으로 돈을 내면서도 합니다.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가끔 있고, 공부가 가끔은 재미있지만, 기본적으로 공부는 힘들고, 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필요가 없는데도 공부를 선택한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Lord라는 것이 우리가 무조건 명령에 순종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이 (lord)라는 사실이 진정한 행복과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나라, 구원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나라, 정말로 깊은 의미의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한다. 아까 말씀드린 비행기의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 많은 갈등과 아픔이 있는데 중에 누군가가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원리대로 살아간다면 아마도 그들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딸이 엄마가 나를 불행하게 한다는 이유로 엄마를 원망하거나, 혹은 엄마가 딸의 삶을 계속 조정하려고 하는 것은 사탄이 원하는 삶의 원리이다. 그런 사탄이 원하는 삶의 원리들을 따라서 산다면 어떻게 보면 제가 보았던 둘의 반응이 자연스러운 것일지 모르지만, 삶에는 계속 사탄이 일으키는 아픔과 상처가 계속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원리대로 딸이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엄마를 용서하기로 선택할 있다면 그런 선택이 당장에는 말이 되어도 그런 용서를 통해서 둘의 관계가 회복되고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관계 속에서 가정 속에서 임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래서 낮아지고 섬기는 삶이 우리에게 도전되고 힘이 들지만, 예수님께서 이러한 삶의 원리를 주신 것은 우리를 괴롭게 하려는 것이나, 좋은 것을 주었으니 정도는 해야지 하는 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정말 깊은 하나님 나라의 축복과 은혜를 경험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진리입니다. 명령으로가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원리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난을 선택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약속된 축복이 있기에 기쁨으로 선택하는 것이며 죽지 못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고난을 선택하려 하지 마십시오. 작은 고난, 작은 낮아짐, 작은 양보로부터 그런 삶의 맛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이렇게 실제적이구나 하는 느끼십시오. 그러면 그런 가운데 신앙이 성숙해지는 것을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질문 있으신 계십니까?

질문: 사탄이 생겼고, 하나님이 사탄의 행동을 저지하시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모두 궁금해하지만, 정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 같습니다. 굉장히 신학적인 질문인데,
하나님이 사탄을 허용했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택하는 사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사단의 유혹을 선택했습니다.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아닙니다. 가장 신학적인 질문이지만 아무도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님의 삶의 모범과 말씀과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임했고, 우리가 구원자로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사함을 받고, 양자 됨을 가지고 살아가고, 때로는 주저하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삶의 원리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성숙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사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 안에서 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으로 사단의 권세가 멸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의 삶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영향력은 아직 세상에 남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가 땅에 임한 것을 모르고 의식하지 못하며 사탄이 조정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크리스천들의 선교적인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교적 사명은 성경의 요나서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심판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요나에게 느니웨는 비유로 말하자면 한국사람에게 일본과 같았습니다. 이스라엘을 박해하는 원수와 같은 나라였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빨리 멸망 받아서 자신의 나라가 행복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니 요나가 가기 싫어했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갔습니다.
그때 요나는 풍랑을 만나서 바다로 던져졌고 고래 배속에 들어갔는데 고래가 요나를  니느웨에 토해 놓습니다. 요나는 없이 다시스 사람들에게 심판의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요나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심판하는 것을 즐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요나서의 진정한 교훈은 4장에 있습니다. 많이 얘기되지 않는 주제가 4장에 있습니다. 요나는  짜증이 났습니다. “그것 봐요. 하나님,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고 용서해 아니었습니까?” 요나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에게 화가 있다가  담벼락 아래서 잠을 자기 시작했습니다. 호박 덩굴이 위에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벌레를 보내서 덩굴의 줄기를 먹어서 마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늘이 없어졌습니다. 이미 화가 났던 요나는 하나님,
잠도 자게 합니까? 나를 괴롭히십니까? 내게 그늘을 주는 덩굴은 없애십니까?” 하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있는 수십만의 사람들과 수만 마리의 소와 양을 바라보시며 자신의 소유인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사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앞뒤를 분간 하며 사탄의 저주에 이끌려 사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너는 호박 덩굴 하나에 분노하고 안타까워하는데,
많은 사람과 양과 소를 향한 나의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하니?”하고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지만 세상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왕이시고, 세상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귀한 자식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탄의 조정을 받는 삶을 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먼저 부르시고, 모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회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신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 생각하며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요나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이 나의 창조물인데 나의 안타까움을 몰라 주느냐? 너희를 부른 이유가 무엇이냐? 내가 너희를 먼저 사랑해주고, 다른 사람들을 향한 나의 사랑을 확신시켜주기 위함인데 그것을 모르느냐?” 이것은 이슬라엘에게 주어진 음성이며 오늘날 교회에 주어진 음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삶이 주는 축복과 하나님 나라의 깊은 의미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선교를 향한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 안에서 세상에 임했는데 아직도 사탄의 조정 속에서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도 사단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어려움을 당합니다. 번째 어려움은 위협입니다. “네가 하나님 나라의 원리로 산다고? 세상에서 너의 삶이 한심해지고 비참해지고 거야!” 파라독스의 삶은 역설이기에 당장에는 말이 되고 세상의 기준으로도 설명이 됩니다. 그러므로 길을 살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복으로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믿음인데 사탄이 여러 가지 경로로 우리를 위협합니다. 위협이 아니면 유혹을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사탄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씁니다. 이것이 신앙인들이 당면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때로 넘어집니다. 그러한 삶을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서 땅에 온전히 성취하게 된다고 했고, 다니엘서에는 인간의 나라가 교체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임했다고 말하고 있고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중적으로 임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것과 신약에서 말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우리가 예배 드리는 본당을 때에 다니엘은 본당은 여기 있습니다.”라고 얘기한 것입니다. 우리가 본당에 가서 앞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본당의 뒷문은 다른 쪽에 있습니다. 들어오는 문과 나가는 문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멀리서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가 것이라고 얘기했는데,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에는 앞문과 뒷문이 있습니다. 시작이 있고, 나라의 완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곳에서 살고 있지만, 그것의 완성을 바라보고 기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번째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도 하나님의 주권으로 임했듯이두 번째 하나님 나라의 완성 또한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해야 한다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지 자신이 없습니다. 우리의 유혹과 고난을 때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이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우리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져오시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과 소망으로 오늘을 살아갈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지만, 넘어지고, 유혹에 빠지고, 때로는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것으로인해서 하나님 나라가 우리 삶에서 약해질 , 사탄의 원리가 우리 삶을 지배할 우리는 삶의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 속에 살아야 함을 다짐하며 고난의 순간마다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게 됩니다. 고난이 없을 때에는 세상에 만족하며 삶에 안주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고난과 인간관계의 갈등을 통해서 만족은 삶에 없는 것을 깨달으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소망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소망함으로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른 질문 있으십니까?

질문: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되고,
재림으로 완성된다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의 원리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