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은] 나는 그녀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그녀는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제게는 북녘에서 온 친구가 있습니다. 그녀는 저와 동갑내기 친구이며 중국 주재 한국영사관내 보호시설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벌써 6년이라는 세월 동안 서로를 친구로, 선생님으로 부르며 지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다르게 생각하면서 부릅니다. 그녀는 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꼭 부릅니다. 제가 그녀에게 이름을 불러도 된다고 했지만, 어떻게 그러냐며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1주일에 한번씩은 꼭 만나 편안하게 밥을 먹으면서 학교생활에 대한 어려움, 한국에서 살면서 겪는 스트레스를 수다로 풀어냅니다. 
그녀와의 만남은 정말 특이했습니다. 제가 탈북민 상담을 10년 동안 하면서 이런 만남은 손에 꼽을 만 합니다. 그녀는 활동성 결핵으로 중국 주재 탈북민 보호기관에서 거의 1여 년 동안 독방에서 생활했습니다. 배달되는 음식을 혼자 먹으면서 혼자 생각하고 책보고 기도하고 성경을 보면서 다른 탈북민 또는 사람들의 왕래 없이 외롭게 지냈습니다. 제가 그곳 기관에 상담심리사로 파견 되었을 때 직원들은 그녀를 내담자 명단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저 또한 그녀의 병명을 듣고 상담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1주일 동안 기관에 체류하면서 계획된 상담을 모두 마친 후 자투리 시간을 잠시 내어 몇 권의 책을 들고 그녀를 방문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책만 전해주고 빨리 나오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제가 상상했던 환자의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이 그 당사자라고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1년 동안 활동성 결핵으로 1평 남짓 되는 공간에서 말상대도 없이 오락거리도 없이 누워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병자 특유의 절망감도 없었고, 외로운 기색도 없었으며 오히려 영사관의 다른 탈북민들과 비교할 수 없는 자유자의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그녀에게 책을 건네 주며 ‘힘내세요, 쾌차하세요.’라고 말하는 제가 어색할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멀리 서울에서 저희를 위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결핵이라서 안됐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녀와 함께 잠시 기도만 하고 방을 나와 담당직원에게 물었습니다. ‘정말 활동성 결핵이 맞느냐? 굉장히 밝더라.’고 말입니다. 제 경험으로 보호기관에서 오랫동안 격리생활을 하는 탈북민들은 대부분 신경이 예민하고 우울하며 불안하며 타인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특히, 몸이 아픈 탈북민의 경우,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줄 것과 조속한 한국 송환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녀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 어떻게 환하게 웃을 수 있는지, 평안할 수 있는지 저는 의아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저는 일상생활로 인해 그녀는 차츰 흐릿해졌습니다. 1년이 채 되지 않는 어느 늦은 가을 날, 저는 충남 공주의 기독학생회 수련회에 우연히 가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가게 된 길이기 때문에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낯익은 얼굴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저는 용기를 내어 ‘혹시 저를 아세요? 낯이 익네요.’라고 하자 ‘처음 뵙는데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또 다시 ‘혹시 탈북민 아니세요? 어디서 뵌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중국 보호시설에서 잠시 만난 그녀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늘 그랬듯이 낯이 익은 탈북민과 인사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놀란 그녀는 중국 보호시설에서 저를 만났으며 제가 도착하기 전날 저에 대한 간증을 했다고 하며 반겨주었습니다. 저 또한 그 사실에 놀라며 그녀와의 재회를 기뻐했습니다. 보호시설에서 그녀는 병든 몸으로 낯선 남한 땅에서 적응할 수 있을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너무나 선명한 꿈을 꾸었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꿈을 도대체 해몽할 수 없어 또 다시 꿈을 해석해 달라고 기도하던 참에 저에게 책을 받았고 그 책 표지의 그림이 꿈에서 본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 책을 단번에 읽었으며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계획하신 한국 땅에서의 삶과 길을 열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후 몇 개월이 흘러 학교에서 그녀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저는 제가 다니고 있는 학교여서 더욱 놀랐습니다. 실례되는 말이지만, 나이 많은 그녀가 우리 대학에 입학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인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받으며 기뻐하는 모습은 저를 두 번 아니 세 번 놀라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학생회관에서 많은 젋은 신입생들 틈에서 그녀를 발견했다는 놀라움과 또 동문으로 만났다는 것… 사실 우리는 중국 보호시설이나 공주의 수련회 장소에서 서로의 연락처를 나누지 않았고 그저 만나고 헤어졌을 뿐이며 다시 만나자는 인사는 했지만 이렇게 절묘하게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맺어준 인연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약속을 하던 우연찮게 만나던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꼭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역사와 세계사를 아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 36세의 나이에 Y대학 역사학부에 입학했습니다. 그녀와 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북한을 떠날 당시의 이야기, 한국 생활의 어려움, 학교 생활의 어려움, 경제적인 어려움, 언어의 어려움 등…
그녀는 북한 두만강을 넘어오면서 함께 강을 넘던 어머니를 그 강에서 잃었으며 중국에서 10여 년 동안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중국에 거주하는 이모님 댁을 찾아 왔으나 어머니께서 자기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죄책감에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중국에서 의지하고 마음을 기댈 곳은 아무 곳도 없었으며 오로지 새로 알게 된 하나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누구도 반겨주는 이 없을 때, 안전한 다른 곳으로 숨어야 할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오직 하나님만이 그녀의 피난처요 등불이요 안식처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낯선 한국 땅에서 독신으로 살면서 공부하고 일하며 봉사하며 하루에 서너 시간의 쪽 잠을 자면서도 그 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감당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린 학생들과 학교생활을 하다 보면 교우라기 보다는 이모뻘이 되는 자신이 때로는 어이없고 낙심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또한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다른 사람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돈도 없고 나이 든 자신의 현실을 바라볼 때 지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1년에 한 번씩 고향의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보내주고, 주위 어려운 친구들에게 학비의 일부를 남 몰래 후원하고, 아르바이트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가며 다시 웃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 꿈을 기억하고 약속하셨다는 그 믿음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 그녀는 Y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함께 입학했던 남한 친구들과 졸업가운을 입고 졸업식을 대하는 그녀의 감회는 어떨까요? 졸업식을 축하해줄 부모님, 형제들은 없지만 그녀와 늘 함께 하신 하나님의 기쁨은 얼마나 크실까요? 상상만 해도 뿌듯하고 대견하고 그런 친구가 제 친구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그 친구는 저를 선생님으로 만났기 때문에 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 친구야 말로 제 선생님입니다. 힘든 상처가 있어 아프다고 힘들다고 넋두리를 할만한 그녀지만 ‘그래도 감사하다.’라고 웃으며 말하는 그 친구야 말로 제 선생님입니다. 
“친구야 난 네가 내 친구라서 정말 고맙고 좋다. 우리 진짜 친구하자, 딱친구!.”
주) 딱친구는 북한 말로 서로 속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를 뜻합니다.  

[조윤이] 정의라는 이름의 사랑 (1): 사랑의 스펠링은 J.U.S.T.I.C.E. 입니다!

미국 어느 신학교의 제자훈련관련 세미나에서 일어난 일이다.
학생들은 제자훈련을 하면서 겪는 다양한 고민들을 교수에게 질문하고 있었는데 한 학생의 질문이 다음과 같았다.
“제가 제자훈련을 해주고 있는 학생이 있는데, 이 친구가 마약중독이 있고 열네살 소녀에게 마약을 팔고 있다는 것을 고백했어요. 저는 이 청년을 정말로 사랑하는데 제가 한번 더 기다려 주어야 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는가? 만약 이 학생이 열네살짜리 소녀를 성폭행 했다는 고백을 했다면 또 어떻게 하겠는가?

 

정의라는 단어는 너무나 버겁고,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면 안된다는 묘한 합리화 뒤에 혹은 자비와 사랑이라는 아주 그럴싸한 명분뒤에 숨거나, 종종 나나 잘하고 살자라는 자조섞인 비관에 머물고 마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 결국 하나님의 정의도 사라지고 사랑도 희미해진다.
 
신학교 교수의 답은 의외로 간결했다. “경찰에 전화하세요. 그게 열네살 소녀를 사랑하고 그 청년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공원에서 당신이 가족들과 피크닉을 하고 있다고 가정을 해보라. 일단의 깡패들이 와서 당신의 아내와 자녀들을 괴롭히고 있다. 당신은 자비롭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정의는 어쩌면 이렇게 간단한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이들이 상처받도록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싸우는것처럼 말이다.
세상에는 “정의(Justice)”에 대한 많은 정의(definition)가 존재한다. 굳이 마이클 샌델의 강의를 찾아 듣지 않더라도 단어만 떠올려도 이미 머리가 복잡해 지는게 사실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정의는 의외로 참 간단해 보인다. 많은 이들의 죄를 한사람이 대신 짊어지는 것,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그들을 신원하여 주는 것, 힘이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되어주는 것,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이고 사랑인 것 같다. 혹은 하나님에게 있어 정의는 사랑의 또다른 이름은 아닐지.
 
유다의 번영과 평안 가운데 그 죄악이 하늘을 찌르고 이로인한 하나님의 심판이 눈앞에 다가왔을때, 하나님은 그분의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셔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사1:16-17]
 
스스로 씻으며 깨끗이 하라고 하시면서 실천해야 하는 항목들을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여 주라는 것이다.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정의에 대해서 너무나 어렵게만 생각하며 살아가는건 아닐까? 사랑에 대해 너무 감상적으로만 생각하는건 아닐까?
 
필자는 현대판 노예제라 불리는 인신매매 성매매 폐지를 위해 헌신되어져 있는 한 선교단체에서 사소한 일들을 돕고 있다. 5년전 단체의 대표가 노예제의 피해자 여성들을 위해 중보하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큰 부담을 주셨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단체를 만들게 되었다. 그저 한 젊은 중보자였던 이분은 간단한 관련 비디오를 만들어서 세상에 알려야 되겠다는 마음의 부담으로 이 사역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프로젝트가 4년여를 걸쳐 전세계를 다니며 실태조사로 이어졌고 이제 그것이 “네파리어스: 영혼의 상인(Nefarious: Merchant of souls) ” 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세상에 그 빛을 보게 되었다.
 
영화의 말미에 어떤 매춘현장에서 여성들을 관리(?)하는 포주였던 한 남성의 인터뷰가 나온다.
 
“제가 했던일들을 후회합니다. 제 스스로를 정말 인간이라고 부를 수도 없지요. 그 여성들은 포로가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저 또한 어떤것에 포로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또 한가지 깨달았던 것은 하나님은 내 죄악보다 훨씬 크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무엇에 포로가 되어있었던 걸까? 이 남성은 정말 가해자이기만 했을까?
현재 이 남성은 결혼을 했고, 청소년들이 성매매에 팔려가지 않도록 보호하고 돕는 사역을 하고 있다. 
 
필자는  이 공간을 통하여 의외로 우리 주변에 흔히(!) 일어나고 있는 인신매매 성매매라는 불의를 코스탄과 함께  들여다 보고자 한다. 정의라는 커다란 주제를 다룰 철학적 통찰도 없고, 쌈박한 신학적 지식도 없지만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만은 없는 이러한 숨겨진 불의를 들여다 보고 피해자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며 우리가 함께 기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오늘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면서 말이다.
 
하나님의 정의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풀어지기를 갈망하며-
 
조윤이
Eunice Cho
eunicecho@exoduscry.com
 
엑소더스 크라이
현대판 노예제 폐지를 위한 기도운동
Exodus Cry
A Prayer Movement to End Modern Slavery
www.exodusc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