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 6, 2010 | 코스타 사역/tmKOSTA
KOSTA/USA-2010 Chicago 컨퍼런스에서 있었던 tmKOSTA 세미나 중 의료분야 리포트 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영혼구원과 제자양육 (Discipleship)
마지막으로, 진정한 의료선교사이기 위해서는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땅 끝까지 증인이 되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며,
당신의 양을 쳐야 한다.
물론 착한 행실로,
실력과 정성으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게 해야 한다.
하지만 함께 직접 좋은 소식,
즉 복음을 전하기에 힘써야 한다.
우리의 모든 행실로 막연히 ‘크리스천들에게 무언가 있나 보다’로 그치게
할 것이 아니라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해주는 기쁨’을 선사할
의무가 우리 의료선교사들에게 있다.
우리는 우리의 내성적인 성격상 이 의무가 우리의 목사님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우리는 아직 훈련을 덜 받아서 그냥 우리의 의료실력으로 우리의 신앙을 대변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성령께서 분명 말씀하신다. 뿌리는 자가 있고 거두는
자가 있는데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구원 사역은 우리 주님이
친히 하신다.
우리는 다만 기회가 오든지 오지 않든지 씨를 뿌리거나,
거두기만 하면 된단다.
기회는 기도만 하면 언제든지 주신다.
나의 경우, 병원에서 환자를 보면서, 환자를
위해 기도를 했을 때 주님께서 씨를 뿌리거나 거둘 수 있는 기회를 종종 주셨다.
내 다발성 골수암
(multiple myeloma) 환자가 심정맥 혈전증 (deep vein
thrombosis)이 의심되어 초음파 검사실에 내려가야 할 일이 있었다.
간호사의 일손이 부족해 당시 인턴이었던 내가 심장 모니터를 단 내 환자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서 검사실 앞에서 한참 같이 기다렸던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주님께서 내가 환자를 위해 기도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을 느꼈다. 환자에게 기도에 대해 승낙을
얻은 후 꽤 오랜 시간 처음에는 영어로,
나중에는 막 한국어로도 환자의 회복과 구원을 위해 기도했던 기억이 있다.
환자의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던 색다른 경험이었다.
또 한번은 위에서 언급한
심내막염 환자가 호스피스로 퇴원해야 하는데,
거의 일주일이 다 지나도록 호스피스 자리가 나지 않아서 계속 병실에 있어야 했던 적이 있었다. 내 병동 스케쥴이 끝나는 바로 그날까지 그 환자를 내가 돌보게 되었고,
내가 휴가를 떠난 다음날 환자는 호스피스로 퇴원하였다.
내가 병동을 떠나기 전 마지막 날 그 환자와 나는,
환자에서 MRSA라는 균이 검출되었기에 배정된 격리 핼액 투석실에서,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간호사는 잠시 자리를 비우고,
내 인턴은 호출을 받고 사라졌다.
그 순간,
나는 하나님이 이 환자를 너무 사랑하셔서 나를 통해서라도 기도를 받기를 원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난 환자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지금 정말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싶다고 했다.
오늘이 내가 병동에서 환자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고 말씀 드렸다. 환자도 괜찮다고 했다. 난 하나님이 환자 분을 너무 사랑하신다고 말했고,
환자분을 알게 되고 환자 분을 위해 이렇게 기도할 수 있게 되어 내가 오히려 감사하다고 했다.
지금은 주께서 허락하신 육체의 고난으로 어려운 점이 많지만,
오직 예수님의 사랑과 평강으로 승리하길 소원한다고 말했다.
나중에 다 같이 이 일시적인 육체를 벗고 새 육체로 천국에서 함께 예수님 안에서 함께 멋지게 만나자고 이야기했다.
그 기도를 드리면서 나도 울고 환자도 울었다.
참 불평도 많고 힘들어했던 환자였는데, 그의 두 눈에 고인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주님의 마음이 내게 부어졌다.
내가 오늘 너의 기도를,
내 사랑하는 자의 기도를 기다렸다고.
어떤 날은 내 환자도
아니었는데,
자기 남편을 수술장에 보내고 남편이 없는 병실에서 혼자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한국 할머니를 만난 적도 있다.
할머니가 영어를 못하니까 한 간호사가 지나가는 나를 알아보고 할머니께 할아버지가 지금 수술장에 내려갔다고 말 좀 전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사실 그냥 할머니께 위로라도 좀 해드리려고 했는데,
할머니가 너무 불안해 하셔서 내뱉은 말이 “할머니 기도해드릴까요?”였다. 할머니께서 고맙죠 하시길래,
할머니 손을 꼭 붙잡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런데 기도를 시작하면서,
‘우리 하나님’하는데
그 때부터 내 목이 메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강하게 임했다.
한 참 동안 목이 메어서 말을 못했다.
사실 처음 보는 할머니 앞에서 우는 내 모습에 내가 많이 당황했다.
그 때 할머니도 같이 우셨는데,
그 때 내가 기도하면서 나온 말이,
‘우리 하나님이 할머니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지나가던 나를 불러 쓰셔서 당신의 기도를 드리게 하십니까’
였다. 할머니께 주님의 사랑과 위로,
그리고 평강이 임하길,
할아버지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간절히 구했다. 기도란 언제나 나에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는 중요한 열쇠였다.
환자뿐 만이 아니라 동료 의료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한 마음 역시 소중하다.
의료 현장은 언제나 팀 사역이다.
팀원 끼리 같은 영적인 호흡을 맞출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며느리 마음은 며느리가 안다고,
의사 마음은 의사가 잘 알고,
간호사 마음은 간호사가 잘 안다.
같은 의료인들끼리 현장에서 삶으로, 섬김으로 복음을 공유하는 축복을 유통시켜보자.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동료들을 마음으로 품고 꾸준히 기도만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열정을 부어주시고 기회도 만들어 주신다. 나의 경우 한 선배의사를 위해 꾸준히 기도하고 있던 와중 신기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
그 선배와 전화 통화를 마치자 마자,
내가 바닥에 엎드려 한참을 흐느껴 울기 시작한 것이다.
내 안에 성령님이 그 선배의사의 영혼을 향해 깊이 애통하시는 것 같았다.
그 후로도 그 분을 위해 잊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 최근에는 인도와 대만에서 온 동료 의사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하나님 이야기를 할 기회들을 여러 번 만들어주셨다.
결론
결론은 이것이다.
의료인으로서 실력과 윤리의식은 기본이다.
환자를 대할 때 주께 하듯 하는 섬김을 소명으로,
사명으로 인식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비로소 진정한 크리스천 의료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 복음으로 거듭나고 기도와 섬김으로 주님의 손과 발이 되며 의료 현장에서도 제자 만들기에 힘쓰는 복음의 군사로 白衣從軍할 때, 우리는 참된 ‘의료선교사’가 될 수 있다. 그 때 비로소
이 글의 주제처럼
Healthcare가
Mission이 된다.
의료가 우리의 사명이 되고,
의료현장이 우리의 선교지가 된다.
하나님이 이 때를 위해 나를 쓰심 (God-given opportunity)
에스더 4장
14절에서 모르드개가 딸처럼 기른 자신의 사촌 에스더 왕후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네가 왕후의 位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이에 에스더는
16절에서 ‘죽으면 죽으리로다’로 답한다. 사람이
죽다가 살아난 경우만이 기적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내가 살아 숨쉬고 있음 역시 기적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의료인이 된 것은 하나님의 정말 특정한 한 때를 위함일 수도 있지만,
우리 일터의 작은 만남 하나 하나를 위함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두신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환자에게 나를 생애 마지막 문턱에서 만나는 크리스천 의료인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속마음을 읽어야 한다.
한번은 응급실에서 두 명의 환자를
내과로 입원시키고 있는데,
두 환자 모두 김씨 성을 가진 한국인이었고,
환자와 보호자 모두 영어를 잘 하지 못했다.
그 때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나님이 이 분들을 참 사랑하시는구나.’
‘나에게 미국의사고시 시험을 보게 하시고 어쩌면 이 미국 땅 필라델피아로 부르셔서 이 분들을 모국어로 돌볼 수 있게끔 나를 사용하시는구나.’
나는 내가 되기 원하는 의사상을 그리며 정진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우리 주님이 나를 들어 쓰심은 이 때를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오히려 생각이 참 단순해졌다.
‘주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제 인생이 아무리 화려해도 주님께 쓰임 받지 못하면 제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오직 바라옵기는 오직 한가지 우리 주님께 쓰임 받는 것뿐입니다.’
매일매일을 주께서 ‘나를 이 때를 위해 쓰심이
아닐까’
하는 설레는 기대감으로 산다면,
‘크리스천 의료인’에서 ‘의료 선교사’로 거듭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멋진 순간들이,
섬김과 전도의 기회들(God-given
opportunity)이 우리들 삶에 넘쳐나길 간절히 기도한다.
Sep 7, 2010 | 코스타 사역/tmKOSTA
KOSTA/USA-2010 Chicago 컨퍼런스에서 있었던 tmKOSTA 세미나 중 의료분야 리포트 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의료 선교사 되기
이제 ‘크리스천 의료인’으로 사고하기를 거부하자. 당당히 ‘의료 선교사’가 되자. 의료를 평생 선교지로 삼고 ‘사명 의식(Mission mind)’으로 살아가는 ‘의료 선교사’가 되자. 엄밀한 의미로 우리가 매일 만나는 환자는 우리의 ‘땅끝’이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다. 예루살렘이 우리의 가족이고 유대가 우리의 친척과 친지라면 사마리아는 한 때 우리의 일부였던 우리의 원수이다. 하지만 땅끝은 정말 땅끝이다. 우리와 아무 관련이 없는 곳이 땅끝이다. 가지 않으면 평생 모르고 죽을 곳이 땅끝이다. 우리의 의료 현장에서 우리가 현장에 나아가지 않으면 평생 우리와 아무 상관 없을 사람들이 우리의 환자들이며 보호자들이다. 그런 의미에 우리의선교지, 의료 현장은 분명 우리의 땅끝이다. 당당히 스스로 ‘의료 선교사’임을 선포하자. 그리고 그 직함에 걸맞게 치열하게 살아가자. 그러한 삶의 실천적 지침으로서 아래의 세 가지를 제안한다.
복음과 회개 (Christ-centeredness)
진정한 의료선교사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우리는 우리의 교만을 회개해야 한다. 환자보다 보호자보다 의학적으로 우월하다는 지적 교만, 공포와 근심에 사로잡힌 환자나 보호자와는 다르다는 감정적 교만을 회개해야 한다. 내가 주님의 은혜의 혈관이어야 하는데, 나 스스로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다분히 시혜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지 않은지, 환자와 보호자의 모든 칭찬과 칭송을 스스로 다 받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C.S. Lewis는 그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교만이야 말로 고린도전서13장에 나오는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수 있는 어떠한 선행도 가능케 하는 가장 큰 죄악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돌아온 탕자가 되어야지, 탕자의 형이 되어서는 안된다.
다음으로 우리의 분노를 회개해야 한다. 의료 현장에서 사실 화가 나지 않을 상황을 찾기가 더 힘든 것이 사실이다. 의분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분노는 사단에게 멋지게 이용 당한다. 의사와 환자 사이의 신뢰를 깨고, 동료 의료진 사이에 두터운 불신의 벽을 쌓는데 이용당한다. 우리는 일곱 번씩 일곱 번,즉 49번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무엇보다 분노를 회개하고 긍휼히 여김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에 분노가 있을 때, 주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겠다고 하셨다. 깨끗한 그릇만이 주님의 축복을 담을 수 있고, 깨끗한 혈관만이 주님의 은혜를 흘려 보낼 수 있음을 기억하자.
마지막으로 우리의 自己愛를 회개해야 한다. 의료인들은 많은 시간을 자기 경력을 쌓고 관리하는데 투자했다. 엄청난 시간과 돈을 학업에 투자해 오늘날 자신의 이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일정 수준의 전문인이 된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의 손길로 인도함을 받은 ‘神手成家’가 아닌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룩한 ‘自手成家’형 인간이 된다. 후자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할 수 있는 위험이 크다. 혹 남이 나를 조금이라도 무시하면, 이처럼 대단한 내가 무시당했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다. 혹 내가 실패하게 되면, 이만큼 이룩한 것이 아까워서 깊은 우울의 늪에 빠진다. 이 모든 과정에 처음부터 주님이 없었다.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삶이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내가 내 삶의 모든 초점이 되면 우리 주님이 거하실 곳이 없다. I-centeredness에서 Christ-centeredness로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문해보아야 한다. “Is it all about me?” 우리 삶의 초점이 ‘내’가 의료진으로서 얼마나 고생했고, ‘내’가 환자나 병원으로부터 얼마나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내’가 의료진으로 일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는지에서, ‘하나님’이 아무 것도 아닌 내 삶에 정말 얼마나 많은 것들을 공급해주셨고’, ‘하나님’이 나에게 얼마나 멋진 새 소망을 품게 해주셨으며,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용하고 계시는지’로 옮겨져야 한다.
自己愛, 자기연민에 대한 회개가 그 무엇보다 절실하다.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우리 삶에 회복해야 한다. 결국 복음이 해답인 것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인되면, 난 더 이상 아파할 수 없다. 시체는 아플 수 없다. 성경이 분명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고, 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한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갈라디아서2장 20절에서 선포하고 있다.
기도와 섬김 (Servantship)
진정한 의료선교사이기위해 우리는 복음에 빚진 주의 종(servant)으로서 기도와 섬김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하는 모든 격려의 말이 하나님 앞에 기도가 되게 하자. 미국에서는 문화적으로 아직까지 ‘God bless you’라는 말이 종종 쓰인다. 나는 환자를 진료하고 나서 마지막 인사로 항상 ‘God bless you’라고 말한다. 이 말을 할 때마다, 다니엘처럼 정말로 잠깐이지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주께서 정말로 이 환자분을 축복해주시라고. 대부분의 환자는 이 축복의 말을 들으면 나에게 ‘God bless you, too’라고 화답해준다.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 그것도 가장 몸이 아픈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가장 많은 축복을 받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또 하나 내가 쓰는 말은 ‘I will pray for you’ 또는 ‘I will remember you in my prayers’, 즉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말이다. 사실 종교를 떠나 이 말을 싫어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실제로 진료실을, 병실을 나설 때마다 나는 기도한다. 주께서 환자 분의 힘이 되어 달라고. 만약 환자가 정말 힘들어 할 때는 기도해주어도 괜찮을까요하고 물은 후 괜찮다고 하면 환자의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도 중 내가 눈물이 나서 당황했던 적도 있다. 실제로 많은 환자들이 같이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고, 감사하게도 예수님 영접기도까지 같이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의료인으로서의 섬김에는 최선의 진료, 돌봄을 제공하는 것 외에 환자의 손을 잡아주고, 경청해주고, 함께 울고 웃어주는 것, 그리고 좋은 책이나 음악을 선물해주는 것 등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퇴원 후에도 전화해주고 지속적으로 격려해주는 것도 훌륭한 섬김의 방법이다. 사실 그 날 그 날 업무를 처리하는 것만 해도 하루가 고되다. 하지만 잊지 말자. 우리 주님은 우리 의료선교사들의 이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 말씀이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
故 안수현 선생님은 그를 추모하여 나온, ‘그 청년 바보의사’라는 책에서 진정한 의료선교사의 삶이 어떤 것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계신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많은 이들이 이 책을 필히 읽어볼 것을 권한다. 안수현 선생님은 안목 있는 책과 음악 선물을 통해 많은 환자와 보호자, 동료 의료인들의 인생에 필요한 복음적인 메시지들을 전하셨는데, 다음은 그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죽음과 싸우고 있던 백혈병환자에게 창세기 강해설교 5권인 ‘죽음의 한계를 넘어선 신앙’을 선물했다. 책을 전하면서 그 환자에게 말했다. “선생님의 병을 낫게 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기도하는 것은 병이 낫는 것보다 선생님이 주어진 곡을 최선을 다해 연주하고 나서, 성도들과 천사들의 우레와 같은 갈채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 환자는 나의 마음을 이해하고 지금까지 강건하게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Aug 3, 2010 | 코스타 사역/tmKOSTA
KOSTA/USA-2010 Chicago 컨퍼런스에서 있었던 tmKOSTA 세미나 중 의료분야 리포트 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크리스천 의료인과 세상의 기대
이제, 현실적으로 세상에서 크리스천 의료인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세상은 크리스천 의료인에게 늘 하나님을 묵상하고 기도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세상이 원하는 것은 단순하다.
실력 있고 인간다운 의료인을 원한다.
다시 말해,
전문적인 지식과 실력,
그리고 고도의 직업 윤리 의식을 갖춘 사람이 바로 이상적인 의료인상이다. 실력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들 크리스천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믿음은 좋지만 수술 못하는 외과의사보다 믿음은 부족해도 수술 잘 하는 외과의사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의료인의 직업윤리를
Medical Professionalism이라고 한다. 미국 내과의사 협회 (American
College of Physicians)에서 지적한 Medical Professionalism의 덕목은
겸손
(Humility), 정직
(Honesty), 이타성
(Altruism), 공감능력
(Compassion), 그리고 예의 바름
(Courtesy)이다. 의료인이 이 사회 배출되는 데 있어서,
사회는 우리에게 사회가 의탁한 면세 교육 기관을 제공했다.
예비 의료인은 사회의 공인 하에 시체를 해부할 수 있다.
환자는 의료인과 교육 중인 예비 의료인에게 자신의 치부를 노출시키며 자신의 비밀과 걱정을 떨어놓는다. 그리고 환자는 의료인의 선한 의도를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는 의료인의 행위를 평가하거나 판단할 수 있는 의학적 지식이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은 왜 의료현장에 고도의 윤리성이 요구되는지 말해준다.
EBM이라는 말이 유행한다. Evidence-based
Medicine 근거 중심 의학을 주로 지칭하지만,
Etiquette-based Medicine을 칭하기도 한다. 후자는 2008년 Dr. Kahn이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NEJM)이라는
저널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아무리 최신 의학정보를 바탕으로 진료를 한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예의가 사라진 오늘날의 의료 현장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에티켓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입원환자를 진료할 경우,
최소한 노크부터 하고,
들어가도 되는지 묻고,
웃는 얼굴로 자기 이름을 소개하며 악수를 청하는 의료진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세상은 이런 기본적인 에티켓을 잃지 않는 의료인을 원한다.
나아가 우는 환자에게 휴지를 손에 쥐어주며 등을 토닥여 줄 알며,
환자가 누워서 잃어나 앉을 수 없다면 무릎을 꿇어 환자의 눈높이에서 대화를 할 줄 아는 그런 의료인을 원한다.
크리스천 의료인과 하나님의 기대
사실 세상의 기대에 부응하는 의료인으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내심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기대는 더 크시다.
먼저, 하나님은 실력을 넘어 정성을 요구하신다.
마태복음 5장 16절은 우리 착한 행실을
사람들이 보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한다.
골로새서 3장 23절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참으로 엄청난 권면이다.
또한, 마태복음 10장 42절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주는 자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으며,
나아가 25장 40절에서는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 자신께 한 것이라고 하셨다.
같은 맥락으로 마태복음
25장 35절 역시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그리고 옥에 갇혔을 때 우리가 이웃을 돌본 것이 곧 주님을 돌본 것이라고 말씀한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발언인가?
이런 의미에서 우리 크리스천 의료인은 의료현장에서 환자를 섬긴다기 보다 예수님을 섬긴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성경적일 수 있다.
설대위 (David
Seel) 전 예수병원 원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과연 나는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환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내게 환자로 오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을까?”
다음으로 하나님은 직업 윤리의식을 말씀하시지 않고,
우리의 소명과 사명을 말씀하신다. 우리는직업(occupation)이 아닌 소명(vocation)으로 우리 의료인을 부르신 하나님을 묵상해야 한다. 에베소서 2장 10절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하신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선포한다.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주님은 의료를 우리의 생계 유지 수단이 아니라,
당신께서 예비하신 우리 각자의 십자가로 보길 원하신다.
십자가란 쉽게 말해,
‘자원해서 감당하는고난’이다. 따라서 의료란 우리가
자원하여 감당하는 사명이자 자발적인 섬김이어야 한다.
우리가 마지막 때에 주님 앞에 섰을 때 주께서
물으실 것은,
의료인으로서 우리의 십자가를 얼마나 충실히 감당했는가 일 것이다.
내 문제가 아닌 우리 이웃의 문제,
우리들의 환자,
보호자, 동료 의료인들의 문제를 얼마나 성실히 풀다가 왔는지 주님이 제일 먼저 물으실 것이다.
우리가 ‘의료계’라는 선교지의 ‘중보기도자’로서 얼마나
신실하게 우리의 환자와 보호자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왔는지 주님은 알고 계신다.
과연 우리가 가슴으로 품고 기도하는 환자와 동료 의료인의 수가 몇 명이나 될까?
내외적 장애물 극복하기
크리스천 의료인을 향한 세상의
기대, 나아가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열심으로 살아보지만 현실은 참 만만치 않다.
여러 가지 장애물이 말 그대로 산 너머 산이다.
외적으로 불합리한 의료 제도,
부족한 의료 자원,
힘든 근무 시간,
종교 다원주의 등의 장애물이 있다면,
내적으로는 의료인의 태만,
권태감, 자조감, 그리고
명예와 권력에 대한 탐욕 등의 장애물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서론에서 제시한
것처럼,
환자가 인격체로 보이지 않고 일의 하나로만 보이는 경우이다.
환자나 보호자가 대화하기 어려운 상대인 경우,
환자나 보호자는 의료인들 사이에서 소위 서로 ‘씹는’
‘가십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믿기지 않겠지만,
의료인들의 대표적인 대화 주제는 누가 더 ‘짱돌 환자’를 많이 보게 되어 누가 더 ‘재수가
없는가’
이다. 스스로
냉소적이고 자조적인 대화를 통해 자기 연민을 충족하는 과정에서,
환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보다 내가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더 힘들어졌는지가 관심의 초점이 된다. 슬프게도, 어떤 의료인들에게 환자는
자기 논문을 위한 케이스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기도 한다.
또 어떤 의료인들에게는 환자 한 명을 더 보는 것은 더 많은 금액의 리베이트를 위해 머리 수를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참으로 어려운 현실이다. 크리스천 의료인으로서 다시 한번 이러한 장애물을 뛰어넘을 능력을 구해야 한다.
Jul 27, 2010 | 코스타 사역/tmKOSTA
KOSTA/USA-2010 Chicago 컨퍼런스에서 있었던 tmKOSTA 세미나 중 의료분야 리포트 입니다. 앞으로 4회에 걸쳐서 리포트를 실고자 합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초록
의료 분야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주님이 하셨듯이 병든 자들을 치료함은분명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의료 사역의 본질이다. 의료 공급자로서의 실력을 갖춘다면 이 사역은어렵지 않게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육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사역은 힘들다. 눈물의 기도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환자들 한 명 한 명을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에서 ‘영육 통합적’인 의료 사역은시작된다. 세상의 의료 공급자와 Christian 의료 공급자의 차이가 무엇인가 생각해볼 때이다. 우리는 의료 분야에서 어떻게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의료를 단순한 ‘직업’이 아닌 ‘사역’으로 업그레이드시킬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나는 한국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섬에서
3년간 공중보건의사로 일했다.
아내의 도움으로 선데이 크리스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기 일 년 전 하나님께서 새벽기도와 소그룹 공동체 속의 나눔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셨다.
미국 볼티모어 존스홉킨스 대학교
(Johns Hopkins University) 에서 공중보건학, 의료경영학, 기초의학(종양학) 등을 연구하다가 지금은
필라델피아 알버트 아인쉬타인 병원
(Albert Einstein Medical Center) 내과 전공의로 일하고
있다. 내년에는 암 전공 전임의로 휴스톤의 엠디 엔더슨 암센터
(MD Anderson Cancer Center)에서 근무하게 될 예정이다. 매일매일 환자와 보호자,
동료 의사들,
간호사들과 만나면서 어떻게 하면 좋은 크리스천 의료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크리스천 의료인이란
크리스천 의료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환자를
돌봄에 있어서 비크리스천 의료인과 어떤 점이 본질적으로 다를까?
경과에 차도가 없는 한 중환자와 그 보호자와의 대화를 통해 궁극적인 치료 방침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신앙의 유무가 치료의 경과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환자를 단지 잘못된 의료 전달 체계의 희생양으로 볼지,
보호자를 가망 없는 몰상식한 사람들로 몰아세울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상황을 파악하는 의료인의 눈이다.
소위 ‘짱돌’
보호자 때문에 응급심폐소생술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할 수 없이 계속 해야 하는 피곤한 상황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도 의료인 의 가치관이다.
신앙은 의료인에게 있어서 ‘모든 상황을
정의하는 렌즈이자 프리즘’이다. 모든 상황에서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고백할 수 있는 능력이다.
또한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고자 하는 소망이다.
‘이 환자는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라고 생각하기에 앞서서,
‘이 환자는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힘이다.
‘보호자가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기 전에 ‘보호자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마지막으로 신앙은 내가 처한 ‘피곤한
상황’을 묵상하기보다, ‘나는 환자와
보호자를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해하고 품으려 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이 상황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나길 원하는가?’
묵상하는 지혜이다.
이러한 신앙을 가진 크리스천 의료인에게는 세상의 의료인에게는 없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지금의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그리고 나의 숨은 동기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그리고 인내와 착한 행실을 통해 영광 돌리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에 대한 초점을 잃지 않는다.
또 하나는 모든 중요한 일을 기도로써 시작한다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우리 일에 개입시키는 것이 가장 훌륭한 해법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생리식염수 (Normal Saline
Solution)
생리식염수는 크리스천 의료인을 잘 상징한다. 멸균 생리식염수는 우리 혈관에
직접 주입 가능하다.
물론 먹을 수도 있고,
소금의 원래 특성인 맛과 부패 방지 기능이 있다.
수액이므로 갈증을 해소하고 탈수를 방지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물 속에 녹아 없어진 소금이 ‘삼투압’현상 (Osmotic
Phenomenon)을 통해 혈관 내에서 그 부피를 그대로 유지하여서 출혈이나 패혈성 쇼크로 혈압이 떨어지는 위급한 상황에서 혈압을 다시 올려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리 식염수
공급은 의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소생술
(volume resuscitation) 중 하나이다. 보이지 않는 영적 탈수로
우리 삶의 혈압이 급강하할 때,
크리스천 의료인은 생명을 살리는 생리식염수가 되어야 한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지 않고 우리가 곧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소금이라면,
썩어 없어진 밀알이 생명의 싹을 만들어 내듯이,
수액에 녹아 없어진 소금으로 삼투압의 에너지를 창출해내어 생명을 살려야 한다.
소금이 소금으로 존재하지 않고 녹아 없어질
때 에너지가 창출됨은 의미심장하다.
과학의 법칙 모두 우리 주님의 작품임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이는 빛의 물리학을 상기시킨다.
더 높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외곽을 도는 전자가 안쪽 궤도의 낮은 에너지를 갖는 위치로 떨어질 때 빛이라는 형태의 에너지가 방출된다. 가장 높은 하나님의 우편 보좌를 버리고 가장 낮은 골고다 언덕 저주의 십자가로 친히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우리는 세상이 보지 못하는 가장 강력한 구원의 빛을 본다.
자신의 육체를 썩어지는 밀알처럼 십자가에,
로마 군병의 창칼에 내어 친히 사망의 상태에 내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소금이 생명을 살려내는 기적을 우리는 목격한다.
은혜의 혈관
(Vessel of Grace)
크리스천 의료인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환자, 보호자, 동료 의료인들에게 모두 전달하는 ‘은혜의 혈관’이다. 요한복음 15장 5절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를 의학적으로 의역하면 주님은 골수요,
혈액이요, 심장이며, 우리는
혈관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크리스천 의료인들을 통해 역사한다.
피가 많이 역동적으로 흐를수록 혈관이 튼튼하듯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우리를 통해 넘치도록 흐를 때 우리 역시 건강할 수 있다.
더 많이 베풀고 나눌 때 생명의 피,
보혈의 피가 환자,
보호자, 동료에게 전해질 것이다.
혈류가 멈추면,
그 혈관은 퇴화되어 더 이상 생명이 전해지지 않는다.
고혈압, 당뇨, 콜레스테롤의 침착,
혈관 석회화 진행으로 혈관이 망가지듯이, 영적 노폐물이 우리들
혈관에 축적될 때 더 이상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들 혈관에 흐를 수 없게 된다.
혈관은 막히고 우리 스스로 영적으로 사망에 이를 뿐 아니라,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할 수많은 환자,
보호자, 동료 의료인들에게도 동일한 영적 사망을 전염시키게 된다.
최근 내가 입원시킨 환자 중에 심내막염 환자가 다시 중풍으로 내원했다.
패혈성 색전증(septic
embolism)이 중풍의 원인임이 밝혀졌다.
심장 판막에 있던 박테리아가 뇌혈관 곳곳으로 날아가 혈관을 막아 중풍을 일으킨 것이다.
우리가 심장 판막에 박테리아를 키우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로 인해 오히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심각한 영적 색전증으로 주님으로부터 더 멀어져 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혈관은 영어로 vessel인데 성경에서 그릇 역시
vessel로 번역되어 사용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볼 때,
금그릇, 은그릇, 질그릇으로 보시지 않고 깨끗한 그릇,
더러운 그릇으로만 보신다.
더러운 그릇은 사용하시지 않으신다.
마찬가지로 혈관이 얼마나 깨끗한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깨끗한 혈관이면,
주님은 자신의 생명의 보혈을 우리 크리스천 의료인 혈관을 통해 마음껏 흘려 보내실 것이다. 그것이 우리 자신이
퇴화되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흔적만 있는 퇴화된 혈관,
‘배꼽 동맥’처럼 ‘무늬만
크리스천 의료인’으로 전혀 은혜의
혈관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지 못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Jul 18, 2010 | 기독교적 세계관/이인엽의 예수의 국제정치학
(3) 율법의 정신을 대표하는 희년 제도
지난번 글에서 설명했듯이, 성경은 ‘혈연’이 아닌 ‘언약의 준수’가 하나님의 백성인지의 여부를 결정했으며, 언약의 땅에서의 생존과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결정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제시하신 언약의 내용은 무엇이었고 그분은 이스라엘이 어떠한 사회가 되길 원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율법과 언약을 통해 자신이 원하시는 사회의 모습을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의 영역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뜻 – 공평과 정의와 자비가 –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2:3]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여 주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아라.
[예레미야 33:15] 그 때 그 시각이 되면, 한 의로운 가지를 다윗에게서 돋아나게 할 것이니, 그가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모세오경에 나타난 구약의 율법은 제사법, 십일조법 등 종교적인 법 뿐 아니라, 정결법, 도덕법, 희년법 등 삶의 모든 영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레위기 25장의 희년법은 공평과 정의의 원칙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레위기25:8-10] 안식년을 일곱 번 세어라. 칠 년이 일곱 번이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사십구 년이 끝난다.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뿔나팔을 크게 불어라. 나팔을 불어, 너희가 사는 온 땅에 울려 퍼지게 하여라. 너희는 오십 년이 시작되는 이 해를 거룩한 해로 정하고, 전국의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누릴 해이다. 이 해는 너희가 유산, 곧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는 해이며, 저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해이다.
칠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에 땅을 쉬게 해야 했고, 칠년이 일곱 번째 돌아오는 해의 다음해인 오십년 째 해가 종이 해방되고 팔려간 땅이 원주인에게 돌아가는 희년입니다. 가나안 입성 시 땅은 지파와 가족 별로 공정히 분배되었는데, 이스라엘은 이방과 달리 땅을 영구히 팔 수 없었고, 팔았더라도 오십년 째 해는 원 주인에게 돌아가야 했습니다. 땅은 인간이 생산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주신 것이며, 그 땅의 분배가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요소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희년법은 미국의 경제학자였던 헨리 조지에 의해 토지경제학으로 연구되었는데, 그는 자본주의 하에서 경제가 발전함에도 빈부격차가 더욱 심화되는 현상과 이 레위기 말씀을 연구하면서, 땅값의 상승이 이자나 임금의 상승보다 언제나 빠르고, 경제발전으로 창출되는 부가 대부분 지주에게로 흘러가게 된다는 것을 관찰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토지에 대한 세금을 강화함으로서, 과거 레위기에 나타난 희년의 정신을 구현하고, 경제 문제를 상당부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고 대천덕 신부님이나 성경적 토지정의를 위한 모임 등의 활동으로 많이 알려진 바 있는데, 더 관심이 있는 분들은 다음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비봉출판사; 대천덕, 대천덕 신부가 말하는 토지와 경제정의, 홍성사; 성경적토지정의를 위한 모임: www.landliberty.org)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과 언약 속에서, 공평과 정의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존엄성과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살기 원하셨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생산수단, 생존의 기반을 가지고 있어야 했고 그것이 바로 땅이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정치적 자유나 인간의 존엄성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정의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땅을 영구히 잃어버리거나, 땅이 일부 부유층에 독점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회의 빈부격차가 지속적으로 확장되어서, 생산수단과 생존의 기반을 영구히 잃어버린 백성의 일부는 경제적, 정치적 노예가 되고, 막대한 부를 소유하게된 소수의 부유층은 다른 인간들을 지배하는 비극적 상황을 방지하는 시스템인 것입니다. 이러한 희년의 정신은 신약에 들어와, 흔히 예수님의 취임사로 불리는 누가복음 4:18-19에서 ‘은혜의 해’로 언급되고 있고, 예수님 승천 후 성령의 강림을 통한 자원의 희년을 통해 계승됩니다(이 부분은 다음에 올릴 글들을 통해 더 자세히 다뤄질 예정입니다). 다음의 말씀들은 이러한 희년의 원리가 실천 될 때 나타나는 평화와 축복을 보여줍니다.
[열왕기상4:24-25] 솔로몬은 유프라테스 강 이쪽에 있는 모든 지역, 곧 딥사에서부터 가사에 이르기까지, 유프라테스 강 서쪽의 모든 왕을 다스리며, 주위의 모든 민족과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솔로몬의 일생 동안에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유다와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았다.
[미가 4:4]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전도서 9:7-9] 지금은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을 좋게 보아 주시니, 너는 가서 즐거이 음식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셔라. 너는 언제나 옷을 깨끗하게 입고,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라. 너의 헛된 모든 날, 하나님이 세상에서 너에게 주신 덧없는 모든 날에 너는 너의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려라. 그것은 네가 사는 동안에, 세상에서 애쓴 수고로 받는 몫이다.
성경에서 ‘평화’를 상징하는 표현 중 하나가 바로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산다’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단순히 외적의 침략이 없는 것뿐 아니라, 사회 내에서도 경제적 정의와 공평이 이루어져, 구성원들이 자기의 생산 기반을 가지고 안정적 생활과 만족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희년의 정신이 구현된 사회입니다. 극도의 빈곤을 방지하고, 또한 극도의 탐욕을 방지하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필요가 채워지고 그분이 재어주신 구역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상태, 인간답고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강력한 설계도를 우리는 율법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희년의 정신을 구현하는데 실패합니다.
[신명기 27:17] ‘이웃의 땅 경계석을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면, 모든 백성은 ‘아멘‘ 하여라.
[이사야 5:8]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 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
[열왕기상21:17-19] 주께서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러 내려가거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그 곳으로 내려갔다. 너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네가 살인을 하고, 또 빼앗기까지 하였느냐? 또 나 주가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바로 그 곳에서, 그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위의 말씀들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의 극심한 타락기에는, 사회 구성원들이 최소한의 경제적 안전장치 없이 노예로 팔리게 되는 악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양극화, 백성의 노예화, 성의 상품화는 토지제도의 문란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예나 오늘이나 기득권층들과 부유층은, 더 많은 부를 갈망했고, 욕심으로 인하여 희년을 지키기 싫어했으며, 오십년이 되어도 점차 땅을 돌려주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의 증대를 통해 정치적 사법적 권력까지 갖게된 이들은 더 큰 욕망을 위해 자신들의 힘으로 공평과 정의를 보장하는 하나님의 언약을 무너뜨려 버린 것입니다. 이는 부의 집중과, 권력의 부패와 타락, 백성들의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구약을 보면, 왜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끊임 없이 반복했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우상숭배가 단순히 돌에 절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상을 통해 제시되는 이방의 사회, 경제적 문화와 체제를 받아들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바알 숭배 사상은 대토지소유와 부에 대한 끝없는 탐욕을, 그리고 아세라 숭배는 끝없는 성적 욕망을 합리화 해주는 것이었습니다(참고도서: 하웃즈바르트, 현대 우상 이데올로기, IVP).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이 줄로 재어주신 구역에서 살기 원하셨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통해 만족을 누리고, 하나님이 주신 배우자와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것에 만족치 않고, 더 많은 소유와 토지, 쾌락을 원하였기에 지속적으로 우상숭배와 이방의 시스템을 도입했던 것입니다. 이방의 공주로 시집온 이세벨에 의해 나봇의 포도원이 강탈당하는 사건은, 이스라엘 사회의 타락과 율법의 파괴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법과 공평을 집행해야 할 정치권력이, 오히려 자신의 욕망과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해 하나님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희년의 정신, 공평과 정의를 구현하는데 철저하게 실패할 뿐 아니라, 이방을 본받아 극도로 양극화 되어 백성의 일부가 노예화 되고 인권이 무시되며, 개인윤리, 경제적 정의, 사법적 정의, 정치적 정의가 모두 무너지는 타락한 사회로 전락했습니다. 언약을 저버린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땅에서 뽑아내시며, 땅은 그들을 토하여 냅니다. 아브라함의 혈연적 후손이라는 것으로 언약의 땅에서 그들의 생존이 보장 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막지 못했습니다. 언약을 무시하고 공평과 정의를 짓밟은 이스라엘이 땅에서 뽑히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였던 것입니다.
[열왕기상 9:6-7]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이사야 1:21-23] 그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녀가 되었습니까? 그 안에 정의가 충만하고, 공의가 가득하더니, 이제는 살인자들이 판을 칩니다. 네가 만든 은은 불순물의 찌꺼기뿐이고, 네가 만든 가장 좋은 포도주에는 물이 섞여 있구나. 너의 지도자들은 주께 반역하는 자들이요, 도둑의 짝이다. 모두들 뇌물이나 좋아하고, 보수나 계산하면서 쫓아다니고,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지 않고, 과부의 하소연쯤은 귓전으로 흘리는구나. 그러므로 주, 곧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나의 대적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겠다. 내가 나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여 한을 풀겠다.
하나님은 망국이 임박한 상태에서도 안식년과 희년을 지키지 않고 종 된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는 권력층과 가진자들의 악을 질타하십니다(예레미야 34장).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한 이스라엘에게 처절한 심판이 임합니다. 이스라엘이 벌인 강포와 패역이 심판으로 그치게 되고 그들이 포로가 되어 끌려가자, 비로서 그들이 지키지 않았던 희년과 땅의 안식이 이루어 집니다 (역대하 36:2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포로기 칠십년 이후 그 땅을 회복 시키시고 이스라엘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실 것을, 예레미야가 밭을 사는 행위를 통해 계시 하십니다. (32장)
[예레미야 34:13-17]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 조상을 이집트 땅 곧 그들이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나올 때에, 그들과 언약을 세우며,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너에게 팔려 온 지 칠 년째가 되거든, 그를 풀어 주어라. 그가 육 년 동안 너를 섬기면, 그 다음 해에는 네가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 주어서, 너에게서 떠나게 하여라.’ 그러나 너희 조상은 나의 말을 듣지도 않았으며,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야 너희가 비로소 마음을 돌이켜서, 각자 동족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줌으로써, 내가 보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다. 그것도 나를 섬기는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서 언약까지 맺으며 한 것이었다. 그러나 너희가 또 돌아서서 내 이름을 더럽혀 놓았다. 너희가 각자의 남종과 여종들을 풀어 주어, 그들이 마음대로 자유인이 되게 하였으나, 너희는 다시 그들을 데려다가, 너희의 남종과 여종으로 부리고 있다. 그러므로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모두 너희의 친척, 너희의 동포에게 자유를 선언하라는 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러므로 보아라, 나도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가 전쟁과 염병과 기근으로 죽게 할 것이니, 세상의 모든 민족이 이것을 보고 무서워 떨 것이다. 나 주가 하는 말이다.
[역대하 36:21]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예레미야32:14-15]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 증서들, 곧 봉인된 매매계약서와 봉인되지 않은 계약서를 받아서, 옹기그릇에 담아 여러 날 동안 보관하여라. 참으로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다시 집과 밭과 포도원을 살 것이다.”
예로 부터 새로운 왕조나 정부는 언제나 토지개혁을 가장 먼저 실시했고, 정권이 망할 때에 이르면, 토지제도가 지극히 문란해져, 소수 귀족층이 땅을 독식하고 대부분의 백성들이 소작인, 노예, 유랑민으로 전락했음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양극화와 백성의 노예화가 극단화 되면, 민란, 혁명, 전쟁등이 일어나 정권의 교체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타락한 사회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자, 하나님의 심판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힘과 재물이 그 사회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 속에서 공평과 정의를 이룰 때 찾아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많은 경우 사회의 붕괴와 외적의 침입은, 그 사회 내부에서 공평과 정의를 이루는데 실패한 결과입니다. 안보의 문제에 대해, 세상의 권력은 그것이 오직 힘과 재물로 이루어 질 것으로 생각하고, 안보를 위한 안보를 추구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회의 안정과 생존은 언약의 순종 –즉, 공평과 정의가 구현된 사회를 만드는가– 에 달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진정 나라를 생각한다면 외부의 위협을 부풀리고, 안보와 번영를 위해 공평과 정의를 희생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속에서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여,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사회를 만들고,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가 우리 사회 속에 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22:3-5]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여 주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아라. 너희가 이 명령을 철저히 실천하면, 다윗의 보좌에 앉는 왕들이 병거와 군마를 타고, 신하와 백성을 거느리고, 이 왕궁의 대문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맹세하지만, 너희가 이 명에 순종하지 않으면, 바로 이 왕궁은 폐허가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토지정의, 경제정의의 문제는 우리 삶과 신앙에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헨리조지가 관찰했듯이 지대가 오르는 속도는 언제나 임금이나 이자의 상승 속도보다 빠르기에, 한국 사회에서 돈을 번 사람들 상당수가 부동산을 통해 불로소득을 쌓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IMF 이후 이러한 경제적 양극화는 더 심화되고 있는데, 2006년 행정 자치부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상위 1% 인구가 전체 토지 57%를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심각한 일입니다. 2009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비정규직이 33.4%에 이르고 실제 비율은 더 높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또한 최근의 신문보도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약 54만가구가 월 20만원도 못 벌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의 편중과 중산층의 몰락,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하게 만들고 그에 대한 견제장치를 약화시켜 부의 양극화를 가속시키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소위 ‘카지노 캐피탈리즘’이라고 하는 투기형 자본주의가 판을 치면 정당한 방법으로 일해서 돈 버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지고 경제활동 전반이 투기화 되어 돈이 돈을 벌고 빈익빈 부익부가 가속화 됩니다. 현대에는 노예제가 없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양극화가 진행되면, 하위계층은 낮은 임금으로 뼈빠지게 일해도 가난과 빚을 벗어날 수 없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사채업자나 포주들이 피해자를 빚으로 얽어매어 노예처럼 부리는 것처럼, 개인의 기본적 생존수단이 보장되지 않으면 정치적 자유나 인권이 껍데기만 남아 무의미 해 집니다.
2009년의 용산참사나 쌍용자동차 사태를 보면 한국 사회에서 약자의 경제권과 인권이 얼마나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임대인이나 피고용인의 권리 뿐 아니라, 토지소유자, 고용인의 권리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약자의 입장을 강조하십니다. 왜냐하면 법과 공권력은 언제나 가진자의 편이 되기 쉽고, 갈등이 있을 경우 강자에게는 그것이 ‘이익과 손실’의 문제인 반면, 약자에게는 그것이 ‘삶과 죽음의 문제’일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치는 이들을 사지로 내몰고, 공권력으로 무참히 진압하는 사회는 이미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저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사회도 희년의 정신에 나타난 기본적 경제권이 무시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관심있는 분은 마이클 무어의 영화 ‘식코’나 ‘자본주의: 러브스토리’를 한번 보시길 추천합니다). 미국 의료보험 시스템의 심각성은 잘 알려져 있어서 메디케어나 메디케이드의 수혜를 받지 못하는 중하위 계층에서 의료비용으로 고통받거나 파산하는 사람의 숫자가 엄청나고, 최근의 경제위기로 집을 차압 당하고 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단지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비극을 합리화하기 전에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공평과 정의라는 차원에서 현실을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이클 무어는 자신의 영화 ‘자본주의: 러브스토리’에서 루즈벨트의 ‘제2권리장전’을 언급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꼽히는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4년 연두교서 연설에서 제2 권리장전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미국 헌법과 권리장전에 명시된 ‘정치적 권리’가 모든 국민의 평등과 행복을 보장하지 못하였음을 지적하면서 아래에서 언급되고 있는 ‘경제적 권리’의 이행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특정한 경제적 진실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에, 제2 권리장전 아래 새로운 안전과 번영의 토대가 신분과 인종과 종교에 관계없이 마련될 것입니다. 그것은 합당한 임금의 일자리를 가질 권리, 적절한 음식과 의복과 즐거움을 누릴 권리, 모든 농민이 작물을 기르고 팔아 그와 가족이 걸맞게 생활을 영위할 권리, 모든 기업인이 사업을 함에 있어 불공정 경쟁과 국내외 독점체제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모든 가정이 적절한 주거를 누릴 권리, 적절한 의료보호와 좋은 건강을 누릴 권리, 노령, 질병, 사고, 실업 등의 경제적 공포로부터 적절히 보호받을 권리, 훌륭한 수준의 교육을 받을 권리, 이 모든 권리들이 말하는 건 사회보장입니다. 우리는 이들 권리의 이행을 통하여 인류 행복의 새로운 목표에 정진해야 합니다.. 자국에서 사회보장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세계 평화도 지속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루즈벨트는 경제적 권리가 보장되지 않고는 정치적 권리가 무의미해지기 쉽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희년의 정신에 상당히 부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루스벨트는 1945년 4월 네 번째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2차대전의 종전을 앞둔채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경제적 권리를 법제화하려던 그의 계획은 실패합니다. 이후 특히 레이건 대통령 시기를 거치며 진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미국 사회의 경제권과 약자에 대한 보호는 더욱 더 약화되고, 감세정책으로 대변되는 가진자의 이익에 대한 철저한 옹호가 미국의 정책과 법률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미국이나 한국의 보수 기독교회가 공평과 정의의 원칙 보다는, 현대의 지배적인 신자유주의 질서를 옹호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번째로 복음을 개인적 내세적 의미로 축소하고, 하나님 나라를 오늘 이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아닌 죽은 후 가게될 천국으로만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안에 자본주의 정신과 반공주의(엄밀히 말해 약자에 대한 배려와 정의에 대한 주장을 무조건 좌파로 매도하는 매카시즘)가 복음보다도 핵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공평과 정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철저한 무지와, 강자의 횡포로 인한 약자의 고통을 향한 하나님의 애통함과 분노를 듣지 못하고 있는 사실 때문입니다.
[시편14: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한 자냐? 그들이 밥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나 주를 부르지 않는구나.
[예레미야 5:26-29] “나의 백성 가운데는 흉악한 사람들이 있어서, 마치 새 잡는 사냥꾼처럼, 허리를 굽히고 숨어 엎드리고, 수많은 곳에 덫을 놓아, 사람을 잡는다. 조롱에 새를 가득히 잡아넣듯이, 그들은 남을 속여서 빼앗은 재물로 자기들의 집을 가득 채워 놓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세도를 부리고,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찌고, 살에서 윤기가 돈다. 악한 짓은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고, 자기들의 잇속만 채운다. 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 주는 공정한 판결도 하지 않는다. 이런 일들을 내가 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러한 백성에게 내가 보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미가3:1-3] 그 때에 내가 말하였다. 야곱의 우두머리들아, 이스라엘 집의 지도자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정의에 관심을 가져야 할 너희가, 선한 것을 미워하고, 악한 것을 사랑한다. 너희는 내 백성을 산 채로 그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뜯어낸다. 너희는 내 백성을 잡아 먹는다. 가죽을 벗기고, 뼈를 산산조각 바수고, 고기를 삶듯이, 내 백성을 가마솥에 넣고 삶는다. 살려 달라고 주께 부르짖을 날이 그들에게 온다. 그러나 주께서 그들의 호소를 들은 체도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이 그렇듯 악을 저질렀으니, 주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실 것이다.
[아모스 2:6-8] “나 주가 선고한다. 이스라엘이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힘없는 사람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 처넣어서 짓밟고, 힘 약한 사람들의 길을 굽게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여자에게 드나들며,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 그들은 전당으로 잡은 옷을 모든 제단 옆에 펴 놓고는, 그 위에 눕고, 저희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벌금으로 거두어들인 포도주를 마시곤 하였다.
[에스겔 22:29-31] 이 땅 백성은 포악하고 강탈을 일삼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하였으므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결국 이 시대의 지배적인 우상은 맘몬으로 상징되는 물신주의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우상을 분별하고 비판하는데 실패하고 오히려 맘몬의 포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이 사회에 구현하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우리 사회의 약자들)를 도우라는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물신주의 숭배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거짓된 복음을 이야기 하고, 교회가 땅을 사고 건물을 짓는데에만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혈연이 아닌 언약의 준수가 이스라엘 백성의 여부를 결정했듯이, 오늘날도, 기독인의 숫자나 교회의 숫자가 이 사회를 기독교 사회라고 보장해 주지 못하며, 공평과 정의가 깨어진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방지해 주지 못합니다. 기독인과 교회의 숫자가 많다고 기독교 국가가 된다거나 하나님께서 어떤 나라를 축복하신다는 생각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또 하나의 ‘선민의식’에 불과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가 억압과 고통을 받을 때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의 권리를 지켜 줄 이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그리스도인이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기독인들과 교회는 바른 사회 윤리를 외치고, 불의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희년의 원리를 살펴볼 때에, 우리에게는 ‘자선과 구제’를 통해 약자를 도와야 할 책임과 더불어,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 제도’를 만들고 집행하도록 해야할 책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의 룻기는 다윗과 예수님의 족보에 관련된 이야기이고, 룻과 보아스의 사랑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자발적인 ‘자선과 구제’, 그리고 구조적인 ‘희년제도와 기업무름제도’가 어떻게 남편을 잃은 과부라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구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다음의 말씀들은 먼저 자선과 구제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대변합니다.
레위기19:9-10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어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포도를 딸 때에도 모조리 따서는 안 된다.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주워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신명기24:19-22 너희가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고 왔거든,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가지 말아라. 그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돌아갈 몫이다. 그래야만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너희는 올리브 나무 열매를 딴 뒤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아라. 그 남은 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것이다. 너희는 포도를 딸 때에도 따고 난 뒤에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아라. 그 남은 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것이다. 너희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때를 기억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이런 명령을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신명기23:24-25 너희가 이웃 사람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먹을 만큼 실컷 따먹는 것은 괜찮지만, 그릇에 담아가면 안 된다. 너희가 이웃 사람의 곡식밭에 들어가 이삭을 손으로 잘라서 먹는 것은 괜찮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면 안 된다.”
신명기14:28-29 너희는 매 삼 년 끝에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모아서 성 안에 저장하여 두었다가, 너희가 사는 성 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 그러면 주 너희의 하나님은 너희가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출애굽기23:10-11 “너희는 여섯 해 동안은 밭에 씨를 뿌려서, 그 소출을 거두어들이고, 일곱째 해에는, 땅을 놀리고 묵혀서 거기서 자라는 것은 무엇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먹게 하고, 그렇게 하고도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게 해야 한다. 너희의 포도밭과 올리브 밭도 그렇게 해야 한다.
위의 레위기19:9-10과 신명기24:19-22에 따르면, 추수할 때 지나치게 철저히 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의도적으로 조금씩 남겨두어야 했는데, 이는 어느때나 가난하고 굶주린 자가 도둑으로 정죄당하지 않으면서 당장의 허기를 채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신명기 14:28에 따르면, 매 삼년 째에는 십일조를 모아 사회적 약자들 – 다른 직업이 없는 성직자, 외국인, 과부, 고아들–이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출애굽기23:10-11에 따르면 7년마다 휴경하는 것에는, 가난한 자들과 들짐승들이 거기서 자라난 것을 먹을 수 있도록 하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룻기 2장을 보면, 보아스가 가난한 자들에게 남은 곡식을 줍게함으로서, 이러한 자선과 구제의 원리를 삶에서 실천하고 있음을 보게됩니다. 또한 4장을 보면 희년의 원칙에 따라 기업무름(가난한게 된 사람의 땅이나 자식없이 죽은 사람의 아내를 가까운 친척이 취해서 그 사람의 이름과 유업이 끊어지지 않고 가족들이 빈곤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제도)을 실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오미와 롯은, 자신의 게으름이 아닌, 자연재해와 남편의 죽음이라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자칫하면 빈민이나 노예로 전락할 수 있었습니다. 외국인이자 여성, 그리고 과부로서, 다중적 약자였던 롯이라는 한 여성이,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실천되고 있었던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자선과 구제‘, 그리고 사회적, 제도적인 희년제도에 의해서, 보호받고 구제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 우리 사회속에서도, 기독인들이 개인적으로는 적극적인 자선과 구제, 그리고 사회적으로 복지제도와 경제정의, 토지공개념 등의 확립을 통해, 사회안전망을 형성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정의롭고 공평하며 인애가 넘치는 사회를 만들 것을 촉구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이 실천된다면, 보다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이고, 우리 사회의 고통과 악이 상당부분 덜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들을 명하시는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며, 정의와 공평과 인애가 넘치시는 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부디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과 정신을 성경에서 배우고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