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떠올릴 때 빠지지 않는 이미지가 있다. 부정적인 것 중의
하나가 말이 많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결벽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결벽증세는 세상의 것에 대한 구별짓기를 넘어서
그것을 정죄하거나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 대해 못마땅해 하다 못해 그를 불결히
여기는 것이다. 은연중 죄인취급하는 까닭에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괜스레 자신이 큰 죄를 짓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고 오히려
그런 그리스도인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곤 한다. 세상 것에 대한 거리두기의 근거로 흔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는 말씀이 거론되곤
한다. 그래서인지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을 강조하다 못해 누가 술을 먹으면 사탄의 자식이라고 윽박지르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악한 정도를 지나쳐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에 그리스도인의 마음이나 행위가짐이 더욱 구별되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짓기는 자칫 기독신앙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스스로도 경직된 사고를 갖는 작용을 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성결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그들의 특정행위를 근거로 삼거나 나아가서는 그러한 구분법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재화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누가 담배를 피우는 것만으로도 ‘그는 안된다’고 선뜻 고개를 흔드는 것이 그 예이다. 사회에서는
얼마든지 보편화되어 있는 행위가 기독인들 사이에서 지나치리만치 엄격하게 규제될 때, 믿지 않는 사람들 간에는 뭐 별일 아닌 것
가지고 유난을 떤다는 볼멘 소리도 들려 온다.
이렇듯 엄격한 교회의 관행에 익숙한 사람들은 세상 근처에만 가도 오염될까봐
두려워 한다. 그러다 보니 좋은(?) 그리스도인일수록 세상과는 절연하고 교회 안에서만 거룩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삶의 목적도
다르고 인생관도 다르고 사는 방식도 다르니 자연 같은 세상에는 살지만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나서 보니 나
자신도 그러한 사고와 문화에 참으로 익숙해져 있었다. 문제많은 세상문화에 가까이 가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덧 ‘예수쟁이’
10여년을 지내면서 그동안 세상에 대해 너무 많은 담을 쌓고 있는 것이 아닌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원칙은 옳았는지 모르지만
방법이 서툴러 잃어버린 것이 많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술이 싫어서 술자리를 피하다보니 사람을 피하게 되어 버렸고 나아가서는
그러한 모임이나 사람들을 은연중 백안시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화두로 삼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이다. 우리의 교회문화를
이야기 할 때 해답을 선뜻 찾지 못하는 가장 큰 까닭은 교회가 인식하는 세상과 실제 우리네 삶의 간격이 너무 큰 데서 찾을 수
있다. 지금의 교회문화로는 수용이 어려운 일들을 겪고 사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언제나 먼 종교적인 세계로 남아있다. 술을 마실
수 밖에 없는 영업사원, 술자리에 동석해야 하는 신입사원, 술로 통과의례를 치루는 대학 신입생환영회 등. 술 하나만 예를 들더라도
교회가 용납하지 않는 현실은 우리 주위에 널려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의 선택은 피하거나 얼버무리는 등 그 행위가 옹색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인지 세상문화와 교회문화와의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기독교학교나 기독교회사를 선택함으로 고민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러한 현상의 밑바탕에는 세상의 보편문화를 허용하지 않는 교회의 원칙과 율법이
깔려 있다. 덧붙여 ‘교역자들의 제한된 경험’이 세상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를 편협하게 구속한 탓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성도들의 경우 자신의 생활에 대한 죄책감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나 고민에 대해 입을 다물게 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세상문화에
대한 담쌓기는 우리의 생활을 단속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상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나거나 급기야는 사회생활과 신앙생활을
적당히 병행하는 이중의 사고와 생활을 내면화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언젠가 음악을 전공하는 자매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음악을 통해 세상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 자신의 오랜 소원이라고 했다. 그런데 마침 기회가 왔지만 포기해야 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모 방송사 드라마의
음악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공교롭게도 교회성가대의 반주를 맡고 있어서 시간적으로 도저히 두가지 일을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르바이트로 잠깐 일해 본 방송사의 분위기는 크리스천으로서 도저히 적응이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에 갈등이 커서 금식기도를 하고 있지만 분명한 확신도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세속적인 일보다는
성가대 일에 봉사하기를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것 같고 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희생해야 그분이 기뻐하실 것 같아 방송사 일을
포기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물론 마음 한구석에 감출 수 없는 욕심은 방송 일이었지만 애써 그녀는 그 속내를 누르고
있었다. 난 그녀에게 방송일을 단지 세상일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좋은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도전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말해주었다. 성가대 일도 중요하지만 크리스천으로서 방송음악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한번 도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건넨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의 이야기에 그녀는 대뜸 커다란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아무도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내가 처음으로 자신의 소망에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다는 것이다.
난 지금도 그 광경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일과
교회일을 나누어 놓고 고민하고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세상일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가 판단을 그르치고
있는지 걱정도 된다. 창세기 1장을 굳이 근거로 내세우지 않더라도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세상 가운데 어떤 일도 그가
주관치 않는 것이 없다. 교회일만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방송사 일도 그분이 간섭하신다는 것이다. 때문에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고 나는 믿는다. 덧붙여 사람사는 일에 대해서 미리부터 거부감을 갖고 피하는 것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세상의 것에 대해 배우고 스스로 평가하기 전에 먼저 판단과 경멸을
배우는 것 같다. 사람에 대해서도 그의 성품과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로 먼저 그들의 능력이나 성품을
판단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성실하고 뛰어나도 그가 기독인이 아닌 이상, 기독인의 서클에는 들어설 수가 없다. 반대로
아무리 무능하고 불성실해도 기독교인이면 괜찮다는 주장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끼리 나누고 우리끼리만 보듬는 배타적 분위기가
교회를 지배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예수님의 사람사랑을 보면 그는 행동으로 사람을 판단치 않으셨다. 그는 사람의
중심을 보셨다. 그에게 비기독교인은 ‘전도의 대상’이었지 회피나 경멸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바울에게도 이방인은 판단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에게 다른 사람은 오히려 소망을 이루게 하는 기도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고린도전서 9장 22절-23절은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 쓰고 있다.
우리의 사람사랑도 그들의 행위에 기준이 있어서는 안된다. 예수를 안 믿기에
그들의 가치관이나 행동가짐이 뒤틀려 있고 거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결코 이들의 가치관이나 행동을 판단하여
정죄의 수단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중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를 두고 판단할 때, 우리는 쉽게 정죄의 관행에
익숙해진다. 성경은 원칙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 원칙은 행동과 가치의 기준을 말하지 그것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율법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원칙은 ‘나’의 행위규범이지 타인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어서도 안된다. 원칙을 나를 돌보는데
두지않고 타인의 행위나 가치의 판단척도로 사용할 때 그것은 율법이 된다.
때로 나는 내가 율법적이 아닌가 반성해 본다. 기독교적 윤리관에 익숙해 있어
사람들의 행위를 판단하는 내 모습을 종종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나의 가치관으로 인해 나 자신 스스로도 힘들고 타인에게도
다가서기 어려운 사람은 아닌지 불안해지기도 한다. 어쩌면 인간적인 매력보다 거리감이나 두려움, 나아가 차가운 느낌을 주는 그리스도인이
아닌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지나치게 윤리기준이 높거나 정죄의 칼날을 숨기고 있는 사람은 따뜻할 수 없다. 그런 사람에게 속내를
열고 마음을 나누기는 더욱 어려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요즘 청소년문제를 보면서 우리의 아이들은 과연 그들의 고민을 교회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들은 누구에게 도움을 구하고 누구에게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자신의 고민이나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건강한 공동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나치게 성결하거나 완벽해 보이는 사람에게 선뜻 자신의
치부와 죄를 이야기 할 수 없듯, 우리의 공동체도 그렇게 닫힌 분위기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교회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이
수평적으로는 닫혀있고 열린 커뮤니케이션은 모두 하늘로만 향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각자의 기도를 챙기시느라 바쁘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너희가 서로 짐을 덜어주면 좋으련만…” 그것이 그분의 안타까움일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