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종] ‘테러리즘’ 다시 보기

김연종 교수의 문화 탐구


‘테러리즘’ 다시 보기

오늘 텔레비전 뉴스는 뉴욕 세계무역센터(WTC) 빌딩 붕괴 현장에서 열린 ‘9.11 테러’희생자 추도식을 보여 주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슬픔을 가누지 못했고 그 장면을 보는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제는 빌딩 피폭시 현장에 출동했던 911 소방대원의 생전의 모습들이 하나씩 소개되고 있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 그것도 예고 없이 죽는다는 것은 가족은 물론 그를 알았던 주위 사람들을 참으로 황망하게 한다. 911 테러로 죽은 사람들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슴 아픈 사연을 가졌을까 생각하면 다시금 가슴이 아려온다. 그런데 오늘 텔레비전을 보다가 나는 아프가니스탄의 파괴 현장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가슴 아픈 사연들이 있겠다 싶어졌다. 그러다가 미국 사람의 슬픔은 크고 애절한 반면, 사막의 한가운데서 먼지더미에 파묻혀 버린 가난한 사람들의 슬픔에는 무감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내게 미국인은 나와 같은 사람 같고 그래서 그들의 슬픔은 쉽게 동감이 되면서도, 왜 아프간이나 아랍 사람들의 슬픔은 가슴에 와 닿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가 세상을 미국의 눈으로 보고 미국의 입장에서 보아 온 것은 자그마치 50여 년에 이른다. 그 동안 미국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혈맹이어서 그들의 이야기는 어떤 의심조차 없이 당연히 받아들여 온 것 같다. 더구나 세계인의 눈과 귀가 되는 언론의 대부분을 미국인이 차지하고 있어 미국의 눈과 입이 우리의 눈과 귀가 되어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911 사태만 하더라도 우리는 미국의 CNN을 통해 테러의 잔인함에 분노하고 슬퍼했으며 아랍인에 대한 맹목적 적개심을 키워왔던 것 같다. 왜 테러가 일어났는지, 아랍인들은 왜 그토록 미국에 분노하는지를 냉철하게 따져볼 겨를도 없이 그저 흥분만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우리는 다른 세계, 다른 시각을 만날 수 있다. 주지하듯 테러리즘은 폭탄을 지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무모한 살상행위 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이즘’, 즉 ‘주의’이다. 가령 우리가 맑시즘이나, 휴머니즘, 시오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테러리즘은 양심이나 신념에 기초하여 나름 대로의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무슬림들이 선택한 삶과 저항의 방식인 것이다.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테러리즘은 이슬람이란 종교와 자기 희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정신은 오히려 성결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왜 아랍인들은 테러리즘을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되었을까. 그것은 서구 세계에 의한 오랜 식민의 경험과 최근 한 세기 동안의 미국에 대한 적대감의 누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아랍계 내부의 경제적 빈곤과 좌절도 커다란 몫을 했다. 유럽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는 이슬람인을 동물 취급하며 적대적으로 대했으며 미국은 자신의 이익 때문에 아랍을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여기지만 이슬람 종교와 문화, 사람은 존중하지 않았다. 미국은 자유와 인권을 내걸었지만 중동의 부패한 독재 정권을 지지하고 민중을 외면했으며,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부패한 정권을 지지하고 군대까지 보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에서 미국은 항상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의 편을 들었으며 아랍의 이익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미국이 테러리즘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이다. 미국은 자꾸만 테러리즘을 문화적 충돌이나 종교적 전쟁이 아니라 빈 라덴 등 극소수 테러 조직의 무력 행위로 축소시키려 하지만 실제 전쟁은 이슬람과의 전쟁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그것은 테러리즘의 근본을 애써 주목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성전(지하드)을 준비하고 전사를 모으는 일에는 수 백 수 천의 젊은이들이 줄을 선다고 한다. 어제는 1만 여 명의 파키스탄 의용군이 소총과 흉기를 들고 아프간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형제 자매가 죽어가는데 우리가 몰라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테러리즘의 실체가 있다.

신앙과 민족과 적개심에 뿌리를 둔 테러리즘을 군사적 보복 공격으로 근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빈 라덴이 사라진다 해도 그와 같은 극단주의자들이 끝도 없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이 행사하고 있는 또 다른 폭력은 테러를 더욱 부추길 뿐이다. 테러리즘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배양한 문제 상황을 어떻게든지 개선해야 한다. 911 사태는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를 통해 미국에 보낸 경고의 메시지이다. 거대한 제국, 미국이 제3세계 민족들의 권리와 생명을 함부로 유린해온 폭력과 억압의 체제를 청산하라는 것이다. 911 사태를 통해서도 그 메시지가 아직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테러가 계속될지 모른다. 테러리즘은 단순히 누구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테러 행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테러리즘의 배후에는 이슬람 민중의 절박한 생존 현실이 놓여 있는 것이다. 자살 테러를 재미 삼아 하는 사람은 결코 없다. 하긴 누가 전쟁을 원하며 죽음를 바라겠는가. 살고 싶은 욕망, 가족과 평화롭게 지내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근본 의식이 아닌가.

지금 세계는 전쟁 중이지만 우리조차 전쟁을 바라 보거나 즐기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 나의 일이 아니라고,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고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텔레비전을 보고 있지는 않는지. 파괴의 현장에서 불안에 떨고 굶주리며 스러져 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가 귀한 생명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기독교인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아랍인을 적대시하고 미국을 편들고 이스라엘을 지지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진정한 사랑은 어떤 종교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를 받아 들이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미국과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바로 이러한 ‘공존’의 방법이다. 전쟁이 신념을 포기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김연종] 공주와 왕자

김연종 교수의 문화 탐구


공주와 왕자

요즘 젊은이들의 이미지는 당당하고 자신있고 개성있다는 것이다. 과거 세대와 달리 주눅들지 않고 제 할말하고 산다고 한다. 하긴 TV에 나오는 여자아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이쁘다’는 것을 부끄러움없이 말한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마음껏 속내를 비추이는 그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문화가 참 많이 바뀌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하지만 요즘 이토록 당당한 ‘공주’와 ‘왕자’가 많은 이유는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기 때문이라는 비판에 이르면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소위 가상청중(imaginary audience)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과대망상적 착각 징후군’은 자신이 마치 무대 위의 배우나 공주가 되는 것 같이 살지만 실제는 오히려 타인중심으로 사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당당한 왕자와 공주는 별로 없고 오히려 자신의 존재 가치조차 확신이 없는 허약한 세대가 바로 젊은이들이라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실체일까.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약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학생들은 별다른 망설임 없이 대답들을 내어놓았다. 게으르다, 끈기가 부족하다, 낯가림이 심한 편이다, 유머감각이 부족하다… 등등. 다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이나 약점에 대해서 상당히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또 다른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럼 자신의 장점, 아니 내가 생각하는 나의 좋은 점은 무엇인가?” 흥미롭게도 이번엔 대다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스스로의 장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여태껏 한번도 자신의 장점에 대해서는 깊이있게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우리도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장점은 무엇인지? 아니면, 좀더 단순하게 “나는 나를 좋아하는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이 질문에 자신있게 “물론”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자신에 대한 존중감 (self-esteem)이 상당히 높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존중감이 높은 사람은 대부분 건강한 자아상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의 장점보다는 약점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만족스러운 측면보다는 고쳐야 할 측면에 대해 더 민감한 편이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이러한 태도가 겸손이라고 명명되기도 하지만 실상은 자신에 대한 낮은 자존감의 표현인 경우가 많다 (미국사회에서의 침묵은 결코 겸손이 아님을 독자들은 알고있으리라). 겸손에 가리워진 낮은 자존감, 이것은 심하면 “나는 내가 싫다”라는 극단적인 감정의 간접표현일 수도 있다.

파멜라 버틀러 (Pamela Butler)라는 심리학자는 사람들이 낮은 자존감을 갖는 것은 일반적으로 ‘자기파괴적 믿음 (self-destructive beliefs)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자기파괴적 믿음은 우리의 생각 속에 만연해있는 몇 가지 강박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 강박관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완벽하고자하는 강박’이다. 일이든, 학업이든, 신앙이든, 운동이든, 외모든 사람들은 가능하면 완벽을 추구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능력 이상의 수준을 기대하게 되고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늘 닥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각종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성공한 사람들, 최고 수준의 사람들이 자신의 기대치가 되고 당연히 나는 늘 불완전한 인간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엄격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란 말처럼 난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만족치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두 번째는 ‘빨리 이루고자 하는 강박’이다. 주어진 시간보다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이루려는 욕심은 느리게만 보이는 나 자신을 게으르다고 타박하게 되고 더욱 초조함에 빠져들게 만든다. 이러한 강박은 때로 정해진 시간의 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두려움이 되어 자신을 책망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 4년, 석사 2년, 박사 3년 등으로 시간표를 정하고 이를 맞추지 못하면 무능하거나 큰일이 날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그러나 시간은 빠르다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알맞은 때가 중요한 법이다.

세 번째로 ‘강하고자 하는 강박’을 들 수 있다. 약한 것은 부끄러움이고 강한 것은 아름답다는 잘못된 신념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스스로 학대하게 했는지. 난 남자이기 때문에 강해야 한다고 배웠고 그러한 강박에 때로 과장된 행동은 물론 가식된 행위를 해야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넷째는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한 경향이 있다. 그대의 기쁨을 위해 나의 기쁨을 희생한다는 것이다. 부모님은 물론 특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경우 주님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때로 자신을 옭아매는 덫이 되는 경우를 보게된다. 하지만 이것이 곧 나의 존재의 가치나 의미, 리듬을 파괴하는데 까지 이르게 되면 그건 이미 정도를 지나쳐 위험한 지경이 된다.

다섯째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이다. 단 한번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최선을 만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잘못된 결과를 얻게되었을 때, 내가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자책한다. 가령 밤을 새운다고 하고 한두 시간을 자게될 때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 등이다. 결코 잠을 자지 않았어야 했고 나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극단의 기대로 자신을 채찍질하다 보면 나의 발걸음은 언제나 느리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모든 이의 소원이 최선을 다해보고 싶다는 것일까.

자기존재가치에 대한 잘못된 신념들은 우리가 넘어야 할 벽이다. 실수없이, 빨리, 최선을 다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용서도하고 여유도 부리고 한순간 한순간을 감사하며 즐기면서 살 필요가 있는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의외로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나란 사람은 타인에 비해 모자란 것도 많고 부족한 것도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때문에 늘 피곤하고 자기 외에 주변의 사람들조차 숨막히게 하는 경우가 많음을 보게된다. 자기 존재에 대해 만족이 없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못하게되는 것은 물론 주변의 사람들조차 사랑할 수 없다. 자기 자신에게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 존재에 대한 만족이 없을 때 사람들은 자신을 학대하거나 다른 것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 한다.

하지만 나의 존재가치는 이미 지불한 예수님의 몸값을 말하고, 나의 존재의미는 나의 기쁨이 곧 그분의 기쁨이라는 사실에 있다. 다시 말해 예수님 만큼 나의 존재가 가치있다는 것이고 내 삶에 대한 내 스스로의 만족이 그분의 기쁨이라는 것이다. 자기 존재에 대한 불만족을 넘어 부정에 이르는 많은 젊은이를 보면서 그리고 이를 부추기는 수많은 문화상품들을 보면서 이 사회에 사랑이 있을까 자문하게 된다.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적 사고가 없는 사람에게서 남을 사랑하고 사회를 밝히 비추는 일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긍정적 자아상을 갖는 일은 한 사람의 삶을 바꾸는 일일 뿐 아니라 그의 이웃을 바꾸고 이 사회를 바꾸는 근간이 되는 일임을 다시금 새겨볼 필요가 있다.

[김연종] 사람분류법

김연종 교수의 문화 탐구


사람분류법

고등학교 때부터 이과생에 대해서 이유없는 거리감이 있었다. 문과와 이과로 나뉘고 난 뒤 난 인문계와 자연계는 타고난 적성은 물론 인생의 목표도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이과생은 자기만 혼자 잘 살겠다고 편한 삶을 찾은 사람이고 문과생은 민족과 사회를 위해 큰길을 택한 사람이라는 말도 안되는 자부심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이과생은 어쩐지 쪼잔해 보이고 소심하다는 이미지도 만들어 냈다. 심지어는 수학과 물리는 이과 과목이고 국어, 영어는 문과 과목이라고 생각했다. 막연한 이유에서 비롯한 나의 편견과 오만은 결국 문과생과 이과생은 물과 기름, 또는 상이한 궤도를 달리는 기차처럼 영원히 다른 사람이라는 고정된 이미지로 자리잡아 버렸다.

문과 교수와 이과 교수가 한데 어울려 생활하면서 난 가끔 이 보이지 않는 벽이 아직도 내 안에 있음에 놀라곤 한다. 이과생을 만나면 우선 부수기 어려운 벽과 건너기 힘든 강이 있으리라 짐작을 해버린다. 어떤 문제를 두고 토론하고 해결을 도모하다가도 말이 통하지 않을 거란 결론을 전제하고 있어 길고 깊은 대화를 시도하기 보다는 쉽게 포기하고 체념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몇 년 전 일이다. 입시 면접 시험에 어떤 문제를 내는 게 좋을까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그 당시 세상을 한참 시끄럽게 하던 고교생들의 비디오 <빨간 마후라> 같은 시사문제를 내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를 했었다. 어느 한 분이 대뜸 “장동휘, 박노식이 나오는 그런 영화를 요즘 아이들이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했고, 난 어이가 없어 신문도 안보느냐고 웃어 버린 기억이 있다. 다음 해에 다른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작년의 <빨간 마후라>를 예로 들면서 교수들이 시사에 민감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 자리의 분위기는 참으로 썰렁했고, 그 분들 중 누구도 두 <빨간 마후라>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이들이 이과생이기 때문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실 이 문제는 문과와 이과의 차이라기보다 뉴스를 본 사람과 안 본 사람의 차이였을 뿐이다.

한번 길들여진 분류법은 좀체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정보조차도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기존의 생각을 강화하는 것이 보통이다. 분명한 이유도 없이 자리잡은 사유체계는 그로부터 세상을 분류하고 사람을 구분하는 법이 되어 버린다. 하여 사람들은 의례 자기 식으로 생각하고 자기 시야만큼 보며 자기 그릇 크기만큼 세상을 퍼낸다.

세상과 사람을 구분하는 법 가운데서도 이분법은 가장 쉽고 편한 방법이다. 세상과 사람을 둘로 나누어서 간단히 정리해 버리기 때문이다. 어릴 적 영화를 볼 때면 나는 어느 나라가 좋은 나라고 어느 편이 나쁜 나라냐고 묻곤 했다. 하지만 이분법은 분류의 편이성은 있지만 무차별적으로 속성을 나누어버린다는 측면에서 문제점이 한둘이 아니다. 우리가 배운 학습체계가 이분법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학교는 물론 교회의 가르침도 이분법적인 체계를 따르는 경향이 많다. 선과 악, 남과 북,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 세상과 교회,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등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와 완전히 속성이 구분되는 것처럼 나뉘어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렇게 간단히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이 참으로 많다. 더군다나 그것이 사람을 대상으로 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문과와 이과의 경우에서처럼 물론 타고난 속성이 어느 한 성향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는 쉽게 무엇을 규정하고 오랜 시간동안 그것을 정당화하여 당연시한 우리의 안이함과 무감각이 더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요즘은 인간의 심성과 성격유형 등을 이리저리 나누는게 유행한다. 사주, 관상 등의 관심이 시들지 않는 한편으로 별점이니 혈액형이니 MBTI니 하는 것들이 사람을 규정한다. 그리하여 사람을 만나 그를 하나하나 경험하기 전에 그에게 붙여진 성격유형으로 그 사람을 규정해 버린다. 문제는 이러한 규정이 남에게 적용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규정해 버린다는데 있다. 성격 유형 검사를 끝내고 나면 학생들은 나의 직업은 무엇이고 내게 적합한 사람은 어떤 타입이라고 정한 해답을 들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어떤 운명론적 예감을 추종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그 정도는 더 심각하다. 이 방법을 따르게 될 때 가령 내성적인 사람은 결코 자신의 성격을 바꾸려 하지 않거나 타인과의 교류가 필수적인 사회생활조차 기피하는 경우까지 있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을 성향별로 나누고 분류하고 그에 따라 인생을 설계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이러한 경향이 예언기도에 까지 이르면 그 정도는 매우 심각해진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태중에서 부터 정하셨다는 굳은 믿음이 때로는 우매한 자기 미신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실이 어렵다고 미래에 꿈을 두는 것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지나치게 추종하여 현실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자기 기만이다. 나의 인생을 결정하지 말자. 규정하지도 말고 한정하지도 말자. 나는 어떤 사람이니까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도 하지 말자. 지금 열심히 살고 그 결과는 주님께 맡기는 것 그것이 바른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김연종]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김연종 교수의 문화 탐구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언어의 의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명시적이고 표피적인 외형적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함축적이고 개인적인 내포적 의미이다. 가령 ‘개’라고 말할 때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개는 네 다리가 달린 짐승을 말하지만 개인에게 새겨지는 의미는 ‘냠냠’에서부터 ‘자식’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경험이나 이해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그리하여 앞의 의미를 객관적인 의미, 뒤의 것을 주관적인 의미라고 한다. 뉴스나 영화를 보면서도 여러 사람이 각자의 생각이나 가치관에 비추어 의미를 달리 새기게 되는 것은 바로 언어가 지닌 이중성을 말하는 것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언어의 의미를 따져보게 되는 까닭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는데 있다. 신문에 난 기사도 믿을 수 없고, 사람들이 하는 말도 다시 한 번 새기게 되다 보니 정말로 나의 사고나 판단조차도 사실에 기반한 것인지 헤아려 보게 된다. 언론사 세무조사 발표가 있고 난 뒤, 조선일보 같은 신문은 아예 정부에 대한 저항을 선언하고, 언론탄압 음모에 맞서 의연히 싸울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부가 얼마나 계획적으로 이번 일을 저질렀으며 조선일보는 얼마나 억울한 지를 여러 기사를 통해 말하고 있다. 반면 언론개혁에 초지일관 앞장 서 온 한겨레신문은 이러한 조선의 행위를 부끄러움도 잊은 후안무치적 행위라고 비난한다. 한 사건을 두고도 이토록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은 언론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식 대로 편집하고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언론이 자기 식으로 세상을 조립하는 방법은 대개 뉴스 거리의 선택, 축소 또는 확대, 그리고 재구성을 통해서이다. 즉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선택하거나, 확대하고, 불리한 정보는 축소함으로써 사건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보도하는 것이다.

조선과 한겨레 두 개 신문을 보고 있으면 세상에 어느 것이 진실인지, 어느 것이 왜곡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지루한 싸움이 언제 어떻게 끝을 맺을지도 궁금해진다. 언론사 세무조사에 정부의 의도와 계획이 없었을 리 없고, 반대로 언론사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제멋대로 행사한 것도 사실이고 보면 언론개혁이 필요한 것은 사실인데 정부의 조처가 합당했느냐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하지만 요즘 언론의 자사 이기주의는 해도 너무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어찌 국민을 담보로 신문을 사유화하고 지면을 제 멋대로 자사의 이해를 위해서 함부로 도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언론이 보여주는 폭력적 행태를 보면 권력의 전횡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 글에서의 주제는 언론의 전횡이 아니다. 요점은 이러한 전쟁이 어떻게 결론을 내릴 것인가 이다. 내년이면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정부는 언론의 영향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어쨌든 여론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유포되는 길목에서 언론의 역할은 생각보다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기적인 이유로 나는 언론개혁이 정말 순수하게 언론개혁으로 마무리될 것이냐는 의문을 갖고 있다. 우리의 역사에 정말로 순수한 개혁이 있었으며 그것이 성실하게 매듭 지어졌는지, 이에 대한 기억 조차 없다는 것도 나의 생각을 뒷받침 한다. 짐작컨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언론과 정부는 어떤 식으로든 손을 잡게 될 지 모른다. 서로의 이해를 위해서 지금도 어는 곳에선가 물밑 회동이 이루어지고 있을 지도 모르겠고. 화가 나는 것은 내가 이러한 기만 행위에 속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신문기사 한 토막에 흥분하고 분노하며 안위하는 내 스스로가 웃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그 동안 모르면서 흥분하고 모르면서 분노하고 모르면서 절규한 일이 얼마나 되었을까. 정치도, 사회도, 학교도, 교회도 고개 들어 어느 곳 하나 기댈 데가 없다는 사실이 나를 절망케 한다. 이번 언론사 세무조사도 언론이 궁극적으로 개혁되는 데까지 이르지 못 할 것이라는 점에 더 답답함이 있고 절망이 있다.

돌아보면 지금도 우리의 눈을 가린 채 권력의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야합과 담합과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을까. 언론은 민중의 편이며 검찰은 과연 중립이며, 판사는 과연 법의 공정한 심판자일까. 의사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답게 아픈 자를 돌보고 죽어가는 자의 곁을 지키는 인류의 선행자일까. 교수는 정말로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평생을 바치며 헌신할까.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 대로 바로 서 있으며 목사는 과연 그 삶이 우리의 생각 만큼 투명하고 맑을까. 혹 교회에도 내가 모르는 일이 목사님들이나, 교회 간이나, 총회 간에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을까. 담합이 판을 만들고, 자신의 이해를 위해 모든 것이 조작되는 한, 오늘 세상을 사는 일은 정신 차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눈을 부라려도 알 수 있게 되어있지 않다. 정보는 흐르는 길이 따로 있고, 그것에 소외되면 끝 없이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 어떤 일에도 수 많은 루머와 가십과 뒷 이야기가 많은 걸 보면 우리가 보고 있는 사실이 사실이 아닐 수 있고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근거로 그토록 용감하며 그토록 자신이 있을까.

불신이 싹트는 사회에서는 말을 믿을 수 없게 된다. 교사의 말에 신빙성이 없으면 교육이 불가능하다. 목사님이 불신을 받으면 말씀에도 신뢰성이 떨어진다. 신뢰를 잃으면 결국은 인간 관계도 깨어지게 되어있다. 이 사회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말의 번지르르 함에 하나를 보태는 일이 아니라 적어도 내가 하는 말이라도 상대방이 믿을 수 있게 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작은 말부터 행동하고 믿게 하는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바라건대 나는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들을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남의 말을 다시 한 번 곰씹어 보고 뒤집어 보고 상상력을 동원하고 그래도 믿을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들어 버리고 싶지 않다. 분명한 건 사람은 각자가 영민해서 누군가 자기를 속이려 하면 자신도 머리를 쓰게 된다는 점이다. 머리 쓰지 말고 말하고 머리 쓰지 말고 믿어 보자. 지금 우리가 이 사회를, 이러한 인간 관계를 치유하지 못 한다면 어떻게 이 세상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겠는가.

[김연종] 따뜻한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따뜻한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떠올릴 때 빠지지 않는 이미지가 있다. 부정적인 것 중의
하나가 말이 많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결벽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결벽증세는 세상의 것에 대한 구별짓기를 넘어서
그것을 정죄하거나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 대해 못마땅해 하다 못해 그를 불결히
여기는 것이다. 은연중 죄인취급하는 까닭에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괜스레 자신이 큰 죄를 짓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고 오히려
그런 그리스도인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곤 한다. 세상 것에 대한 거리두기의 근거로 흔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는 말씀이 거론되곤
한다. 그래서인지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을 강조하다 못해 누가 술을 먹으면 사탄의 자식이라고 윽박지르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악한 정도를 지나쳐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에 그리스도인의 마음이나 행위가짐이 더욱 구별되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짓기는 자칫 기독신앙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스스로도 경직된 사고를 갖는 작용을 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성결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그들의 특정행위를 근거로 삼거나 나아가서는 그러한 구분법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재화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누가 담배를 피우는 것만으로도 ‘그는 안된다’고 선뜻 고개를 흔드는 것이 그 예이다. 사회에서는
얼마든지 보편화되어 있는 행위가 기독인들 사이에서 지나치리만치 엄격하게 규제될 때, 믿지 않는 사람들 간에는 뭐 별일 아닌 것
가지고 유난을 떤다는 볼멘 소리도 들려 온다.

이렇듯 엄격한 교회의 관행에 익숙한 사람들은 세상 근처에만 가도 오염될까봐
두려워 한다. 그러다 보니 좋은(?) 그리스도인일수록 세상과는 절연하고 교회 안에서만 거룩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삶의 목적도
다르고 인생관도 다르고 사는 방식도 다르니 자연 같은 세상에는 살지만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나서 보니 나
자신도 그러한 사고와 문화에 참으로 익숙해져 있었다. 문제많은 세상문화에 가까이 가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덧 ‘예수쟁이’
10여년을 지내면서 그동안 세상에 대해 너무 많은 담을 쌓고 있는 것이 아닌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원칙은 옳았는지 모르지만
방법이 서툴러 잃어버린 것이 많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술이 싫어서 술자리를 피하다보니 사람을 피하게 되어 버렸고 나아가서는
그러한 모임이나 사람들을 은연중 백안시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화두로 삼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이다. 우리의 교회문화를
이야기 할 때 해답을 선뜻 찾지 못하는 가장 큰 까닭은 교회가 인식하는 세상과 실제 우리네 삶의 간격이 너무 큰 데서 찾을 수
있다. 지금의 교회문화로는 수용이 어려운 일들을 겪고 사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언제나 먼 종교적인 세계로 남아있다. 술을 마실
수 밖에 없는 영업사원, 술자리에 동석해야 하는 신입사원, 술로 통과의례를 치루는 대학 신입생환영회 등. 술 하나만 예를 들더라도
교회가 용납하지 않는 현실은 우리 주위에 널려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의 선택은 피하거나 얼버무리는 등 그 행위가 옹색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인지 세상문화와 교회문화와의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기독교학교나 기독교회사를 선택함으로 고민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러한 현상의 밑바탕에는 세상의 보편문화를 허용하지 않는 교회의 원칙과 율법이
깔려 있다. 덧붙여 ‘교역자들의 제한된 경험’이 세상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를 편협하게 구속한 탓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성도들의 경우 자신의 생활에 대한 죄책감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나 고민에 대해 입을 다물게 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세상문화에
대한 담쌓기는 우리의 생활을 단속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상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나거나 급기야는 사회생활과 신앙생활을
적당히 병행하는 이중의 사고와 생활을 내면화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언젠가 음악을 전공하는 자매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음악을 통해 세상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 자신의 오랜 소원이라고 했다. 그런데 마침 기회가 왔지만 포기해야 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모 방송사 드라마의
음악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공교롭게도 교회성가대의 반주를 맡고 있어서 시간적으로 도저히 두가지 일을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르바이트로 잠깐 일해 본 방송사의 분위기는 크리스천으로서 도저히 적응이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에 갈등이 커서 금식기도를 하고 있지만 분명한 확신도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세속적인 일보다는
성가대 일에 봉사하기를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것 같고 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희생해야 그분이 기뻐하실 것 같아 방송사 일을
포기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물론 마음 한구석에 감출 수 없는 욕심은 방송 일이었지만 애써 그녀는 그 속내를 누르고
있었다. 난 그녀에게 방송일을 단지 세상일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좋은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도전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말해주었다. 성가대 일도 중요하지만 크리스천으로서 방송음악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한번 도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건넨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의 이야기에 그녀는 대뜸 커다란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아무도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내가 처음으로 자신의 소망에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다는 것이다.

난 지금도 그 광경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일과
교회일을 나누어 놓고 고민하고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세상일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가 판단을 그르치고
있는지 걱정도 된다. 창세기 1장을 굳이 근거로 내세우지 않더라도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세상 가운데 어떤 일도 그가
주관치 않는 것이 없다. 교회일만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방송사 일도 그분이 간섭하신다는 것이다. 때문에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고 나는 믿는다. 덧붙여 사람사는 일에 대해서 미리부터 거부감을 갖고 피하는 것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세상의 것에 대해 배우고 스스로 평가하기 전에 먼저 판단과 경멸을
배우는 것 같다. 사람에 대해서도 그의 성품과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로 먼저 그들의 능력이나 성품을
판단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성실하고 뛰어나도 그가 기독인이 아닌 이상, 기독인의 서클에는 들어설 수가 없다. 반대로
아무리 무능하고 불성실해도 기독교인이면 괜찮다는 주장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끼리 나누고 우리끼리만 보듬는 배타적 분위기가
교회를 지배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예수님의 사람사랑을 보면 그는 행동으로 사람을 판단치 않으셨다. 그는 사람의
중심을 보셨다. 그에게 비기독교인은 ‘전도의 대상’이었지 회피나 경멸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바울에게도 이방인은 판단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에게 다른 사람은 오히려 소망을 이루게 하는 기도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고린도전서 9장 22절-23절은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 쓰고 있다.

우리의 사람사랑도 그들의 행위에 기준이 있어서는 안된다. 예수를 안 믿기에
그들의 가치관이나 행동가짐이 뒤틀려 있고 거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결코 이들의 가치관이나 행동을 판단하여
정죄의 수단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중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를 두고 판단할 때, 우리는 쉽게 정죄의 관행에
익숙해진다. 성경은 원칙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 원칙은 행동과 가치의 기준을 말하지 그것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율법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원칙은 ‘나’의 행위규범이지 타인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어서도 안된다. 원칙을 나를 돌보는데
두지않고 타인의 행위나 가치의 판단척도로 사용할 때 그것은 율법이 된다.

때로 나는 내가 율법적이 아닌가 반성해 본다. 기독교적 윤리관에 익숙해 있어
사람들의 행위를 판단하는 내 모습을 종종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나의 가치관으로 인해 나 자신 스스로도 힘들고 타인에게도
다가서기 어려운 사람은 아닌지 불안해지기도 한다. 어쩌면 인간적인 매력보다 거리감이나 두려움, 나아가 차가운 느낌을 주는 그리스도인이
아닌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지나치게 윤리기준이 높거나 정죄의 칼날을 숨기고 있는 사람은 따뜻할 수 없다. 그런 사람에게 속내를
열고 마음을 나누기는 더욱 어려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요즘 청소년문제를 보면서 우리의 아이들은 과연 그들의 고민을 교회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들은 누구에게 도움을 구하고 누구에게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자신의 고민이나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건강한 공동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나치게 성결하거나 완벽해 보이는 사람에게 선뜻 자신의
치부와 죄를 이야기 할 수 없듯, 우리의 공동체도 그렇게 닫힌 분위기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교회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이
수평적으로는 닫혀있고 열린 커뮤니케이션은 모두 하늘로만 향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각자의 기도를 챙기시느라 바쁘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너희가 서로 짐을 덜어주면 좋으련만…” 그것이 그분의 안타까움일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