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저는 개신교를 믿다가 천주교로 개종한 한 여학생을 만났습니다. 그 여학생은 다른 청년들도 들어보라는 말투로 “나는 개신교 예배가 너무 시끄럽고 경박스러워서 영적 무게가 느껴지는 천주교 예배에 참석한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물론 저는 그 여학생이 진정으로 거듭났는지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도 없었고, 개신교에 계속 남아 있으라고 설득할 면목도 없었지만 개신교를 포기해야만 했던 이유만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개신교 영성이 너무 천박해졌기 때문에 떠난다는 것입니다.
일전에 양양의 모 귀부인이 주선해서 만난 한 도사님은 알고 보니 과거에 장로교 안수 집사였습니다. 그 분은 여러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교회를 떠난 이유를 말하기를, “교회에서는 진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떤 진리를 찾았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찾은 진리는 삼라만상의 근본 진리인데 일정 기간의 훈련 코스를 밟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체험적 진리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교회를 떠난 이유는 기독교 교리를 이론적으로 배우긴 했지만 영적 체험이 동반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천주교에서 불교로 개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버드에서 화계사로]란 책을 쓴 현각 스님(폴 뮌젠)은 “자신의 오래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주교를 믿는 가정과 학교에서 영성에 눈을 뜨고 예일대를 졸업하고 하버드 신학대학원을 다니면서까지 진리를 찾았던 정직한 구도자였는데, ‘인간의 고통과 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교회에서 그에게 들려 준 대답은 고작“병도 악도 다 하나님의 뜻이다.”고 하는 신정론(神正論)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영성과 진리를 찾는 구도자였다는 것은 존경할 만 합니다. 또한 그는 미국에 흔해빠진 마약이나 섹스에도 빠지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했고 특히 인간의 본질적인 고통과 악의 문제를 안고 오랫동안 씨름한 보기 드문 지성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감행한 ‘지적 자살(intellectual suicide)’은 매우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는 하버드 교수님들로부터는 들을 수 없는 대답을 숭산 스님에게 배웠습니다.
뮌젠:“내가 누구입니까?”
숭산:“아직 모르는 게 좋습니다. 자꾸 머리로 따지지 마세요.”
뮌젠:“인생이 무엇입니까?”
숭산:“차나 한 잔 마시세요.”
비록 이런 어처구니없는 화두로 그가 지적 자살을 감행했다고 하지만 사실 현각은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과 진리에 대해 정직한 질문을 가진 구도자였습니다. 그는 화석화된 기독교가 주는 대답은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비합리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이 시대의 깨어있는 종교인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세상에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았던 참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대답에 불시착한 것은 실수였습니다.
첫째, 숭산 스님이 준‘무심(無心)’, 즉 ‘모르는 마음(don’t know mind)’은 그의 심오한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이 아니라 질문 자체를 버리도록 만들었을 뿐입니다. ‘무심’은 참 편리한 도구입니다. 그가 어릴 때부터 한 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신과 진리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꼭 찾아야 하겠다.”는 마음 자체가 ‘아집과 집착’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태워버리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대답을 주기 보다는 질문 자체를 포기하게 함으로 문제를 해결 받았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논리적 비약인데도 불가에서는 이것을 석가가 깨달은 “무아(無我, 자기를 버리다, anatman)의 각성”이라고 하거나, “열반(涅槃, 번뇌를 꺼버리다, nirvana)”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보기에 현각의 정직한 질문은 여전히 대답을 기다리며 미궁 속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둘째, 현각 스님이 깨달은 대각(大覺)이라고 하는 것의 내용을 알고 보면 “신과 진리가 자기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가 말했듯이, “어릴 때부터 한 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신과 진리라는 정직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자신의 존재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내재 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예일과 하버드에서 그가 오랫동안 추구하던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인식 방법론에 일대 혁명을 가져 온 것입니다. 두 가지 혁명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지금까지 그는 신과 진리는 “자기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었으나 이제 신과 진리는 “자기 속에 주관적으로 존재한다.”믿게 된 것입니다. 둘째는 지금까지 그는 신과 진리를 아는 방법도 지성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이 최선이었으나 이제는 심미적이고 실존적인 방법보다 실체에 접근하는 가장 용이한 방법이라는 새로운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예상치 않는 개종이 일어날까요? 가슴 아픈 현실이지만, 요즘 타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보다 기독교에서 타종교로 개종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타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여기에서 논외로 하고, 기독교에서 타종교로 개종하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주된 이유만 몇 가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요즘 많은 지식인들이 시대의 흐름에 편승해서 종교 다원주의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성인’의 표시 중에 하나가 “종교는 다 같은 거야.” 혹은“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종교 다원주의 사상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현대 지성인 사회에 불문율이 하나 있다면 “종교 간에 우열을 논하거나 배타적인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여학생도, 현각도, 도사도 대부분의 현대 지성인들이 걸어가는 다원주의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나는 부처님을 믿지만 예수님도 존경한다.”는 식입니다.
둘째, 사실과 내용보다는 체험과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서양 철학과 신학의 인식론적 결론은 비합리주의 혹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신앙의 비약”입니다. 그런데 그 본질을 따져보면 동양적인 인식론인 “직관”이나 “무심”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요즘 동서양의 인식론이 상대주의적이고 의미론적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현각의 경우에도 종교 간의 교리적 내용보다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와 같은 실존적 체험을 중시하는 하버드의 신학을 따른 것이며, 그렇다면 불교나 동양 종교를 받아들이는 데도 신앙적으로나 지성적으로나 갈등이 그리 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틀릴 수 있는데, 단지 그의 마음을 책으로만 읽었기 때문이고 또한 개종의 변이나 장황설도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짐작할 따름입니다.
셋째, 기독교가 매력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나 개신교나 기독교의 매력을 크게 세 가지만 말한다면 하나님과 갖는 신앙적인 실체와 지성적인 교리 체계 그리고 공동체의 아름다운 교제 등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이런 독특한 본질적인 매력들이 급속도로 상실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종교와의 차별성이 부각되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교회 공동체가 세상에 모범이 되기보다 욕이나 얻어먹고 있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있는 것에 크게 실망하고 있습니다. 매력 상실이라는 것이 여학생에게는 개신교의 영성에 실망했다는 것이고, 현각은 대답에 실망했다는 것이고, 도사님은 체험이 없는 깡마른 교리 공부에 진력이 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실체와 매력을 둘 다 상실해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넷째, 이것이 제일 큰 문제인데, 정직한 구도자라고 하더라도 분명한 진리를 판별하는 기준, 즉 ‘크라이테리아(criteria)’가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도를 위해 신발과 배낭이 다 헤어지도록 오늘은 세상 이쪽을 뒤지고 내일은 세상 저쪽을 헤매면서도 구도의 기준, 즉 진리를 판별하는 기준이 없이 다니고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기준이 없으면 아무 것이나 받아들이게 됩니다. 보통 비행기는 정해진 활주로에 안전 착륙을 하지만 폭풍우를 만나면 아무데나 비상착륙(非常着陸)을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기준도 없이 구도의 길에 나섰다가 다행히 진리를 만나 안전 착륙을 하게 되면 생명을 얻지만, 급하면 비진리에 비상착륙 할 수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불시착도 언제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진리의 기준을 제시하기를, “어떠한 이론이 진리가 되려면 그 이론의 내적인 정합성이 있어야 하고(Coherency), 그 이론이 인간의 내, 외적인 경험과 부합해야 하며(Relevancy), 인간이 그 이론을 가지고 실제로 살 수 있어야 한다(Practicality).”고 했습니다.
그 여학생이나 뮌젠이나 도사님이 불시착하게 된 것은 이런 간단한 수준의 진리의 기준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래 기준이 없으면 ‘자기’가 기준이 되든지, ‘재미’가 기준이 되든지, 아니면 ‘여론’이 기준이 됩니다. 여러분도 이상의 여러 가지 이유로 비 진리에 불시착한 것은 아닙니까? 아니라면 여러분은 어떤 진리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까? 요즘 청년들의 기준은 첫째도 재미, 둘째도 재미, 셋째도 재미라고 합니다. “재미있으면 최고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찾는 정직한 구도자라면 누구나 ‘어떤 세계관과 종교가 참 진리인가’를 평가하는 기준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 기준에 의해 새로운 진리를 판별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까지는 교회 앞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뒷문으로 빠져 나가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어도 별 표시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앞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데 뒷문으로 빠져 나가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교회가 비게 됩니다. 더구나 교회를 떠나서 무신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타종교로 개종하는 것은 기독교의 수치입니다. 대체로 교회를 떠나기 전에 사람에 따라 몇 달 혹은 몇 년씩 고민을 합니다. 그 기간에 붙잡지 못하면 놓칩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습니까? 더 늦기 전에 진리를 만나게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