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경]구도의 철학: 진리가 가슴에 사무칠 때까지

오늘도 배낭 한 개만 달랑 매고 심산유곡을 헤매거나 유명하다고 하는 사찰이나 공동체를 순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유(LIBERTAS)’와 ‘진리(VERITAS)’를 찾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길을 떠난 사람은 많으나 자유와 진리를 찾은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 대부분은 길을 잘못 접어들었거나 가던 길을 멈추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오늘, 구도의 길에 오른 모든 순례자들을 위해 남겨놓으신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것은“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는 말씀이며, 저는 이 말씀의 함축적 의미를 세 가지만 풀어보겠습니다.


첫째, 사람은 누구나 진리를 알기 전에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마음껏 추상적 세계를 날아다니지만 자기 논리와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있습니다. 유명하다는 종교인들은 과거의 짐은 훌훌 벗어 던졌는지 모르지만 아직도 관습과 전통의 쇠사슬에 꽁꽁 얽매여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진리가 없어도 자유롭다.”고 자신만만하게 외치지만 진리없는 자유가 얼마나 참혹한가를 아직 깨닫?못하고 있습니다. 탈 현대주의湄湧?“진리는 일종의 장난이야.”라고 냉소를 보내지만 게임이나 장난 같은 세상에서는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맛볼 수 없어 어둠 속에서 절규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자유라는 것은 인간에게 필수적입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라는 의미에서는 매일 먹어야 하는 밥만큼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도스토에프스키는 그의 [카라마조프 형제]에서 “우리를 마음대로 일 시켜도 좋소. 그러나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오.”라고 호소한 적이 있습니다.


철학적, 정치적 부자유(不自由)는 논외로 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모든 인간은 세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인간은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에 매몰되어 시류대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온갖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도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올가미와 같은 법의 멍에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법이 있는 한 불법과 형벌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또한 육체로부터의 자유도 없습니다. 아무도 육신의 정욕과 질병,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유를 찾다가 종종 깊은 함정에 빠지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유를 찾아 세상을 정처 없이 유랑해 보기도 하고, 자유를 찾아 결혼을 안 하거나 늦게 해 보기도 하며, 자유를 찾아 세상을 멀리하고 염세적으로 살아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유를 찾아 “될 대로 되라.”며 세상의 법을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보거나 제멋대로 신나게 초법적으로 살아봅니다. 어떤 사람은 자유를 찾아 엄동설한에 거죽 떼기 하나만 걸치고 움막 속에서 몸을 학대하며 금욕적으로 살아봅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자유를 향한 다양한 몸부림들입니다.


오늘날 영성이 뛰어나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유가 수도사적인 고행에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쾌락을 단절하고 자기 몸을 학대해 보기도 합니다. 그것은 마치 옛 영지주의자들처럼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Do not handle! Do not taste! Do not touch!).”는 모토를 외치며 사는 것과 같은 금욕주의입니다. 요즘 이런 자유를 향한 몸부림은 불교의 수행 방법이나 요가, 단학 등과 맞아 떨어져서 신비주의로 통하는 첩경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그런 방법으로는 죄를 어느 정도 억누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죄를 이기지는 못하며, 오히려 자기숭배의 교만에 빠져 자학적이고 비인간적인 삶으로 떨어지기 쉽습니다.(골로새서 2:16-22) 잘못된 자유, 가짜 자유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참된 자유는 ‘진리’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자유의 출처는 진리이며, 자유의 독특한 성격이 있다면 그것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자유는 수행이나 일탈이나 금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서 오는 것이며, 그것은 공짜로 그저 주어지는 선물이지 노력이나 수행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크테투스(Epictetus, 스토아철학자)가 “제우스가 나를 자유케 했다.”라고 한 말을 인용했거나 변형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셨다고 치더라도 그가 말한 ‘진리’라는 것은 ‘관념적인 진리’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지나친 상상이고 억설입니다.


여기의 “진리(αληθεια, veritas)”는 문자적으로는 ‘믿을만함’, ‘신뢰할 수 있음’, ‘진실’, ‘참됨’ 등을 의미하지만, 본문이 있는 요한복음에서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그리스인들이 그토록 찾고 찾던 “로고스(λογο??, 말씀)”로서의 예수님입니다. 그 분은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신 은혜와 진리가 되신 분입니다.(“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14:6) 2)그 분의 계시, 즉 예수님을 통해 나타내 보이신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7:17)


어느 것을 의미하던, 예수님 자신이 참 진리이시며 그 분의 계시 말씀이 진리입니다. 참 진리는 관념적인데 머물지 않습니다. 참 진리는 상대적이지도 않습니다. 참 진리는 인격적이며 절대적입니다. 그러므로 참 자유를 얻는 길은 육체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진리와 권력을 해체하거나 진리를 일종의 게임으로 치부하는 일탈 행위도 결코 아닙니다. 참 자유의 출처는 오직 성경 계시의 핵심이시고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그 자유는 투쟁의 산물이 아니라 거저 주시는 일방적인 선물이며,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며,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이런 진리는 세상을 다 뒤져도 찾을 수 없는 참 진리요 자유요 생명입니다. 자유와 진리를 찾아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구도자들이 발을 멈추어 서야 하는 곳이 바로 예수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 진리를 “안다.”고 하는 것은 인격적으로 진리를 깨닫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의 “안다(Υνωσεσθε)”는 것은 경험적이고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서로 사랑하는 처녀 총각이 아무리 서로를 잘 안다고 하더라도 결혼해서 성생활도 하고 자식을 키우면서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 “안다”는 것은 부부간에 서로를 전인격적으로 깊이 아는 그런 앎을 말합니다.


이런 앎은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이성에 의한 궁극적 실체에 대한 관념적 발견 정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앎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의 경지 혹은 대각(大覺)이나 신유학에서 말하는 마음을 비우므로 깨닫는 것과도 다릅니다. 그리고 이런 앎은 느낌과 감정에 사로잡히거나 경험적으로만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앎은 합리적으로 진리의 내용과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인격적으로 믿고 감정적인 결단과 행동이 동반되는 앎을 의미합니다. 즉 진리를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계시의 말씀을 지성적으로 이해하고 그 분과 그 분의 말씀을 전 인격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진리는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 진리는 지적 자살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참 진리는 대부분 듣고 배우고 생각하고 하는 중에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때로는 토론과 논쟁 중에 깨달아지기도 합니다. 혹은 직장이나 부엌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도 진리는 깨달아집니다.


그러나 한 번 진리가 깨달아질 때는 마치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이 꼬였던 모든 문제들이 술술 풀리는 전 인격적인 변화의 경험이 있습니다. 이런 앎은, 부처님이 열반 한 후에 도를 깨닫고 오도송(悟道頌)으로 불렀던 [마하박가]에서 “나는 모든 것을 이겼고 모든 것을 알았다.”고 외친 것과 다릅니다. 이런 앎은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부력’을 발견하고는 “휴레카((ευρηκα, 찾았다, 이거다)”라고 함성을 질렀던 것보다 더 감격적이고 가슴에 사무치는 변화입니다.


이런 앎은 옛날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가에서 빛 가운데서 들려오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인생을 바꾼 바울과 예수님의 전인격적인 만남이며, 빌립보 성의 루디아가 전도자 바울의 말을 듣고 “마음이 열려”, 즉 세계관이 바뀌어 인생의 참 주인을 만난 참된 앎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 안팎에서 진리를 아는 것보다 느끼는 것을 더 중시하는 실존주의적이고 탈현대적인 경향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데 그 위험이 우려할 만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이 “내가 느끼는 것이 곧 진리이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물론 신앙은 지성이면서도 동시에 체험적이기 때문에 실존적인 느낌을 도외시해서는 곤란합니다. 기독교는 지성적이며 동시에 체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어느 날 우연히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에 대한 신앙이 진리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무엇인지 찾고 두드리다가 그것이 진리의 기준에 맞고 사실이라고 판단되면 인격적으로 믿고 맡겨야 합니다. 믿되 단지 지식적으로나 감정적으로만 신뢰할 것이 아니라 전 인격적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고통을 다 아시는 인격적인 분이시므로 당신이 전 인격적으로 반응하시기를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인경] 지성이 신앙에 미치는 영향

가끔 예수님을 잘 믿던 학생들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이제는 더 이상 기독교를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성경의 이적 기사들은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역사 속에 꾸준히 제기되었던 종교와 과학, 신비와 지성, 그리고 계시와 철학이라는 두 개념 사이의 갈등과 의심입니다. 이것을 보통 ‘신앙과 이성의 문제’ 혹은 ‘믿음과 지성의 문제’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기독 지성인들과 구도자들에게 중요한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기독교에 지성을 무시하자니 신앙이 맹신으로 전락할 것 같고, 신비를 무시하자니 사색이 신앙으로 둔갑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 사이의 관계와 긴장은 진리를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테마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는 지성이 왜 신앙에 중요한지 그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지성은 성도의 성화에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로마서 12:2)고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은 예수님을 믿으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개혁해야, 즉 기존의 세계관을 뒤집고 새로운 세계관을 가져야 가능합니다. 기존의 신념과 의식의 변화가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신념과 의식의 변화는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성령 안에서 의지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에게 단회적인 혁명이 아니라 지속적인 변화를 촉구 했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4:23-24)


그리고 ‘성도(聖徒)’가 된다거나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지난날의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지식’으로 거룩한 생활을 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말하기 때문에 지성의 변화는 매우 중요합니다.(골로새서 3:10) ‘회개 한다’는 것은 단지 죄를 몇 마디 뉘우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하여 생각한바 실재의 본질, 인간의 본질과 그의 반역 그리고 역사 속의 하나님의 목적 등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머레이(J. Murrey)가 이점에 대해 잘 지적했습니다. “성화(그리스도인의 삶)는 인간 의식의 중심, 즉 사고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혁명적인 변화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의식과 사고가 바뀌지 않고는 성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우리는 종종 예수를 오래 믿어도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데, 혹시 사고와 신념 그리고 의식의 변화는 하나도 없는 거짓 성화를 좇고 있는 것 때문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둘째, 신앙과 지성이 통합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노력하지 않으면 신앙과 지성이 따로 놀기 쉽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앞의 학생과 같은 지적 의심에 노출된 에베소 교회 교인들을 생각하고, “믿는 것과 아는 것을 하나 되게 하라”(에베소서 4:13)고 부탁했는데, 여기의 ‘하나 되게(unifying)’란 말은 1)부부가 한 몸이 되듯이 2)그리스도와 성도가 하나로 연합하듯이 우리의 신앙과 지성도 주님의 말씀 위에서 통합하라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된 사람을 두고, 비록 그 사람이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더라도, “장성한 사람” 즉 성숙한 신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 믿은 지가 오래 되었다고 하더라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따로 노는 사람을 “어린아이 같은 사람”, 즉 미성숙 신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세상 풍조에 이리저리 요동하고 흔들거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지성이 하나가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지성은 의심의 파도를 이기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의심의 파도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주로 기독교의 신비성(神秘性)이 합리성(合理性)과 대립된다거나, 기독교의 초월성이 과학적 사고와 충돌한다고 생각하거나, 신앙에는 완벽한 합리적 증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내적인 영적 전쟁에 휘말린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꼬인 문제를 지적으로 이해하고 납득하기 전에는 파도타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런 의심의 파도를 타는 사람들이나 그런 사람들을 돕는 지도자들은 제일 먼저 합리성의 반대 개념은 비합리성이지 신비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기독교의 신비성은 이성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성에 반대되거나 거스르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기독교는 합리성과 신비성이 공존하는 진리인데 그것은 기독교 복음 자체가 지성적이며 동시에 체험적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17; 사도행전 26:15) 바울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단지 표적이나 능력 때문도 아니요 지혜나 지식 때문도 아니라 표적과 지혜, 능력과 지식 그 둘이 다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하되,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전합니다. 이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린도전서 1:22-25, 표준새번역)


물론 여기에는 신앙과 지성 사이의 선행(先行) 문제, 즉 어느 것이 앞서느냐 하는 것은 토론의 여지로 남아 있습니다. 아마 어떤 사람은 “믿음이 지식에 선행한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고(요한복음 6:69), 또 어떤 사람은 “지식이 믿음에 선행한다.”고 말할 것입니다.(요한복음 16:30; 18:8) 프란시스 쉐퍼는 “구원론적으로 볼 때 지식이 신앙에 선행한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없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비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인경]개종 신드롬: 기독교에서 타종교로


몇 년 전에 저는 개신교를 믿다가 천주교로 개종한 한 여학생을 만났습니다. 그 여학생은 다른 청년들도 들어보라는 말투로 “나는 개신교 예배가 너무 시끄럽고 경박스러워서 영적 무게가 느껴지는 천주교 예배에 참석한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물론 저는 그 여학생이 진정으로 거듭났는지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도 없었고, 개신교에 계속 남아 있으라고 설득할 면목도 없었지만 개신교를 포기해야만 했던 이유만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개신교 영성이 너무 천박해졌기 때문에 떠난다는 것입니다.


일전에 양양의 모 귀부인이 주선해서 만난 한 도사님은 알고 보니 과거에 장로교 안수 집사였습니다. 그 분은 여러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교회를 떠난 이유를 말하기를, “교회에서는 진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떤 진리를 찾았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찾은 진리는 삼라만상의 근본 진리인데 일정 기간의 훈련 코스를 밟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체험적 진리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교회를 떠난 이유는 기독교 교리를 이론적으로 배우긴 했지만 영적 체험이 동반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천주교에서 불교로 개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버드에서 화계사로]란 책을 쓴 현각 스님(폴 뮌젠)은 “자신의 오래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주교를 믿는 가정과 학교에서 영성에 눈을 뜨고 예일대를 졸업하고 하버드 신학대학원을 다니면서까지 진리를 찾았던 정직한 구도자였는데, ‘인간의 고통과 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교회에서 그에게 들려 준 대답은 고작“병도 악도 다 하나님의 뜻이다.”고 하는 신정론(神正論)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영성과 진리를 찾는 구도자였다는 것은 존경할 만 합니다. 또한 그는 미국에 흔해빠진 마약이나 섹스에도 빠지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했고 특히 인간의 본질적인 고통과 악의 문제를 안고 오랫동안 씨름한 보기 드문 지성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감행한 ‘지적 자살(intellectual suicide)’은 매우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는 하버드 교수님들로부터는 들을 수 없는 대답을 숭산 스님에게 배웠습니다.


-  뮌젠:“내가 누구입니까?”
-  숭산:“아직 모르는 게 좋습니다. 자꾸 머리로 따지지 마세요.”
-  뮌젠:“인생이 무엇입니까?”
-  숭산:“차나 한 잔 마시세요.”


비록 이런 어처구니없는 화두로 그가 지적 자살을 감행했다고 하지만 사실 현각은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과 진리에 대해 정직한 질문을 가진 구도자였습니다. 그는 화석화된 기독교가 주는 대답은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비합리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이 시대의 깨어있는 종교인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세상에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았던 참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대답에 불시착한 것은 실수였습니다.


첫째, 숭산 스님이 준‘무심(無心)’, 즉 ‘모르는 마음(don’t know mind)’은 그의 심오한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이 아니라 질문 자체를 버리도록 만들었을 뿐입니다. ‘무심’은 참 편리한 도구입니다. 그가 어릴 때부터 한 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신과 진리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꼭 찾아야 하겠다.”는 마음 자체가 ‘아집과 집착’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태워버리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대답을 주기 보다는 질문 자체를 포기하게 함으로 문제를 해결 받았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논리적 비약인데도 불가에서는 이것을 석가가 깨달은 “무아(無我, 자기를 버리다, anatman)의 각성”이라고 하거나, “열반(涅槃, 번뇌를 꺼버리다, nirvana)”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보기에 현각의 정직한 질문은 여전히 대답을 기다리며 미궁 속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둘째, 현각 스님이 깨달은 대각(大覺)이라고 하는 것의 내용을 알고 보면 “신과 진리가 자기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가 말했듯이, “어릴 때부터 한 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신과 진리라는 정직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자신의 존재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내재 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예일과 하버드에서 그가 오랫동안 추구하던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인식 방법론에 일대 혁명을 가져 온 것입니다. 두 가지 혁명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지금까지 그는 신과 진리는 “자기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었으나 이제 신과 진리는 “자기 속에 주관적으로 존재한다.”믿게 된 것입니다. 둘째는 지금까지 그는 신과 진리를 아는 방법도 지성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이 최선이었으나 이제는 심미적이고 실존적인 방법보다 실체에 접근하는 가장 용이한 방법이라는 새로운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예상치 않는 개종이 일어날까요? 가슴 아픈 현실이지만, 요즘 타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보다 기독교에서 타종교로 개종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타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여기에서 논외로 하고, 기독교에서 타종교로 개종하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주된 이유만 몇 가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요즘 많은 지식인들이 시대의 흐름에 편승해서 종교 다원주의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성인’의 표시 중에 하나가 “종교는 다 같은 거야.” 혹은“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종교 다원주의 사상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현대 지성인 사회에 불문율이 하나 있다면 “종교 간에 우열을 논하거나 배타적인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여학생도, 현각도, 도사도 대부분의 현대 지성인들이 걸어가는 다원주의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나는 부처님을 믿지만 예수님도 존경한다.”는 식입니다.


둘째, 사실과 내용보다는 체험과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서양 철학과 신학의 인식론적 결론은 비합리주의 혹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신앙의 비약”입니다. 그런데 그 본질을 따져보면 동양적인 인식론인 “직관”이나 “무심”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요즘 동서양의 인식론이 상대주의적이고 의미론적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현각의 경우에도 종교 간의 교리적 내용보다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와 같은 실존적 체험을 중시하는 하버드의 신학을 따른 것이며, 그렇다면 불교나 동양 종교를 받아들이는 데도 신앙적으로나 지성적으로나 갈등이 그리 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틀릴 수 있는데, 단지 그의 마음을 책으로만 읽었기 때문이고 또한 개종의 변이나 장황설도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짐작할 따름입니다.


셋째, 기독교가 매력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나 개신교나 기독교의 매력을 크게 세 가지만 말한다면 하나님과 갖는 신앙적인 실체와 지성적인 교리 체계 그리고 공동체의 아름다운 교제 등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이런 독특한 본질적인 매력들이 급속도로 상실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종교와의 차별성이 부각되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교회 공동체가 세상에 모범이 되기보다 욕이나 얻어먹고 있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있는 것에 크게 실망하고 있습니다. 매력 상실이라는 것이 여학생에게는 개신교의 영성에 실망했다는 것이고, 현각은 대답에 실망했다는 것이고, 도사님은 체험이 없는 깡마른 교리 공부에 진력이 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실체와 매력을 둘 다 상실해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넷째, 이것이 제일 큰 문제인데, 정직한 구도자라고 하더라도 분명한 진리를 판별하는 기준, 즉 ‘크라이테리아(criteria)’가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도를 위해 신발과 배낭이 다 헤어지도록 오늘은 세상 이쪽을 뒤지고 내일은 세상 저쪽을 헤매면서도 구도의 기준, 즉 진리를 판별하는 기준이 없이 다니고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기준이 없으면 아무 것이나 받아들이게 됩니다. 보통 비행기는 정해진 활주로에 안전 착륙을 하지만 폭풍우를 만나면 아무데나 비상착륙(非常着陸)을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기준도 없이 구도의 길에 나섰다가 다행히 진리를 만나 안전 착륙을 하게 되면 생명을 얻지만, 급하면 비진리에 비상착륙 할 수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불시착도 언제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진리의 기준을 제시하기를, “어떠한 이론이 진리가 되려면 그 이론의 내적인 정합성이 있어야 하고(Coherency), 그 이론이 인간의 내, 외적인 경험과 부합해야 하며(Relevancy), 인간이 그 이론을 가지고 실제로 살 수 있어야 한다(Practicality).”고 했습니다.


그 여학생이나 뮌젠이나 도사님이 불시착하게 된 것은 이런 간단한 수준의 진리의 기준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래 기준이 없으면 ‘자기’가 기준이 되든지, ‘재미’가 기준이 되든지, 아니면 ‘여론’이 기준이 됩니다. 여러분도 이상의 여러 가지 이유로 비 진리에 불시착한 것은 아닙니까? 아니라면 여러분은 어떤 진리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까? 요즘 청년들의 기준은 첫째도 재미, 둘째도 재미, 셋째도 재미라고 합니다. “재미있으면 최고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찾는 정직한 구도자라면 누구나 ‘어떤 세계관과 종교가 참 진리인가’를 평가하는 기준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 기준에 의해 새로운 진리를 판별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까지는 교회 앞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뒷문으로 빠져 나가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어도 별 표시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앞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데 뒷문으로 빠져 나가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교회가 비게 됩니다. 더구나 교회를 떠나서 무신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타종교로 개종하는 것은 기독교의 수치입니다. 대체로 교회를 떠나기 전에 사람에 따라 몇 달 혹은 몇 년씩 고민을 합니다. 그 기간에 붙잡지 못하면 놓칩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습니까? 더 늦기 전에 진리를 만나게 합시다.

[성인경] 종교 다원주의를 조심하자

얼마 전에 라브리에 찾아온 한 학생은 종교다원주의에 심하게 노출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법당에도 들랑거리고 도교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종교를 마치 ‘자동차 보험’처럼 ‘영혼보험’을 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될 수 있으면 여러 개의 종교를 믿어두는 것이 내세에 대한 확실한 투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기독교의 위기는 현대인들이 너도 나도 다원주의의 독주에 취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종교다원주의’의 술통에 빠지는 것입니다. 아침에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이 오후에는 법당에도 기웃거리고 조상 제사에도 참여합니다. 그리고 아침에는 향교에서 제를 올리던 사람들이 오후에는 성찬식에도 참석하고, 아침에는 요가 수련을 정진하던 사람들이 오후에는 교회에 와서 예배도 드리고 갑니다. “종교는 다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세계적인 종교 지도자나 석학들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앞 다투어 종교 간의 대화를 한다며,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약 2년 전쯤에, 세계적인 종교 지도자로 알려진 달라이라마와 특별 면담을 가진 한국인이 있었습니다. 철학자이며 한의사이기도 하고, 현재는 교수로 일하고 있는 석학 도올 김용옥 박사였습니다. 그 두 사람이 만나서 의기투합한 것은 “기독교가 종교 간의 대화에 가장 비협조적인 종교다.”고 한 것입니다.


달라이라마는 기독교와 대화하기 힘든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문제는 신(神)에 대한 해석입니다. 불교처럼 신(神)을 추상적인 진리체계로 말하면 대화가 쉬워지는데 기독교는 하나님을 인격적 존재로 주장하기 때문에 내가 건드릴 수 없는 영역으로 건너가 버립니다.” 김용옥은 기독교의 역사성이 불편하다는 것을 감추지 않았으며, 하물며 불교에서도 구원을 기대하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인류의 모든 고전을 탐색하고, 모든 종교의 성전을 이해하려는 뜻은, 바로 경전의 진정한 이해를 통하여 인간이 경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신념에 있는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은 “종교 간의 대화를 하려면 신의 인격성이나 역사성을 논하기보다는 진리체계나 영성훈련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이야기까지 나누었습니다. “불교는 창조주도 구세주도 초월자도 없습니다. 무신론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신이 없어도 인간에게 무한한 영성을 줍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유지하면서 단지 영성의 개발이나 제고를 위하여 불교를 수용할 수가 있습니다. 불도(佛徒)들도 자신들의 신앙을 버리지 않고도 기독교의 영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날 종교다원주의는 겉으로는 “자기 종교의 고유한 신앙을 지키면서도 서로 배울 수 있다.”고 말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어디에도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가 있다고 말하면 배타적이라고 몰아붙입니다.


둘째, 구원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종교마다 구원에 이르는 각기 다른 길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구원의 유일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기독교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셋째, 종교는 단지 과학이거나 철학이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마음의 과학’, 즉 심리학이며, 기독교는 ‘서양 철학의 산물’ 즉 그리스 신화와 같은 것이며 예수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종교다원주의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일부 지식인들 중에 종교의 배타성을 극복해 보고자 하는 뜻에서 주장하는 단원적 다원주의(monistic pluralism)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종교는 달라도 결국 신은 같은 것이라고 하는 ‘산에 오르는 길은 달라도 정상은 하나뿐이다.’는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다원주의자는 여기에 속합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는 개인성, 다원성을 자랑으로 여기는 현대인들이 주장하는 다원적 다원주의(pluralistic pluralism)가 번창하고 있는데, 종교마다 신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산에 오르는 길도 여러 가지이고 정상도 여러 가지이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합니까?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앞의 두 입장과는 다르게 길도 하나이고 정상도 하나뿐이라고 하는 절대주의, 즉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구원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믿습니까?


그러면 절대주의를 믿으면서도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든 사랑으로 양보하고 넓은 마음으로 대화하고 관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안별로 정책 연합도 하고 사회 활동도 같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를 양보하거나 타협하면서까지 타 종교와의 대화를 시도하거나 연합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바울사도가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어느 때보다도 진리를 지키되 사랑으로 지켜나가는 지혜, 즉 바른 기독교 세계관이 필요한 때입니다.


여러분은 다원주의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