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의 삶


당신은 누구입니까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로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렘: 29:4-8, 10)


유학생의 삶을 흔히들 “광야”의 삶으로 표현한다. 아마도 힘들고 외로워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광야는 두려운 곳이다. 불확실하다. 위험하다. 나를 보호하고 있는 모든 보호의 장벽이 제거되어 있는 것 같은 곳이다. 내가 편안해 하고, 내가 익숙해 하던 모든 것들이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바로 광야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한세대가 통채로 죽임을 당한 곳이 바로 광야이다. 광야는 물이 없고, 음식이 없으며, 위험한 야생 짐승들이 나의 생명을 노리는 곳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광야는 또한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가깝게 느끼는 곳이 광야이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이 공급하는 만나와 생수를 마시며, 그분의 인도하심이 없이 생존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곳이 바로 광야이다. 광야는 그분이 나의 삶에 한 가운데 와 계신 곳이다. 모세가, 다윗이, 바울이 광야를 통해 그들의 삶을 준비했다. 예수님이 광야를 통해서 공생애를 준비하셨다. 그래서 광야는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그야말로 삶의 “위기”이다.


유학의 광야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유학생들이 이 유학의 광야에서 죽어가고, 아니면 겨우 겨우 삶을 연명하며 그것으로 자족해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고민한다. 열등감과 우월감의 미묘한 교차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기 위해 방황하며 갈등한다. 그러한 그들로 인하여 그들의 배우자와 가족이 고통하며, 함께 두려워 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유학의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살아계심을 체험한다.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발견하며, 고민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함을 듣는다. 지도교수의 질책으로 나의 자존심이 어그러질 때, “내가 너를 지었노라”는 약속을 발견하며, 나의 장점으로 나보다 못한 다른 이들을 섬기는 삶을 살아간다.


광야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광야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다. 내가 다니는 학교가 얼마나 좋은 학교인가가 문제가 아니며, 나의 지도교수가 문제가 아니다. 내가 현재 소속해 있는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내가 지금 그곳에서 무엇을, 왜, 그리고 어떻게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앞으로 이글을 통하여, 유학생으로 21세기의 미국에서 (아니면 그외의 다른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삶의 현실의 광야 속에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을 만나는 삶을 사느냐에 관하여 함께 생각하기를 원한다. “유학”과 “신앙”이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나에게 있어서는 “유학=신앙”이라는 것을 보기를 원한다. 유학의 삶에 대한 건전하고 건강한 성경적인 시각을 함께 나누고 싶다. 그래서 보다 많은 유학생들이 유학의 광야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기를 소원한다.


우리들의 삶의 방향과 행동의 내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나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나에 대한 자아상과 identity이다.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로 아무리 많은 부를 가지고 있어도 그 부를 누릴 주를 모르고 가난한 삶을 살게 된다. 스스로 노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황과 관계없이 노예의 모습을 가지고 그 삶을 살게 된다. 창세기 1장 28절에 하나님은 인간을 “이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부르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받은 우리들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며, 그분이 우리들에게 부여한 본연의 임무를 담당하며 살아가야할 책임과 권리가 있다. 그렇다면 과연, 외국땅에 나와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들은 어떤 identity를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권리와 책임을 누리며 살아야 할 것인가?


위의 본몬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70년 바벨론으로 “종살이”를 하러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정착하고 자리잡고, 평생 살 것처럼 살기를 원하신다. 집을 짓고, 직장을 구하고, 아들 낳고 딸 낳고 살으라고 명하신다. 더 나아가서, 그 땅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신다. 그 땅은 무슨 땅인가? 원수의 땅 바벨론이다. 그런데, 그 땅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10절에는 내가 너희를 70년 후에는 다시 귀환시키리라고 약속을 하신다.


이 말씀은 처음 얼핏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든 명령이다. 첫째, 7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떠날 그 땅에서 왜 정착을 하라는 것인가? 하나님의 70년의 기한은 상징적인 숫자도 아니고, 조건적인 약속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확한 그리고 일방적인 “선한 약속”의 선포이다. 이와 같은 귀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곳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그리고 주인처럼 살기를 원하신다. 인간적으로 생각을 하면, “바벨론에서는 70년이라는 한정적인 시간을 살꺼니까, 그곳에서 대충살아라”라고 충고할 것 같으다. 혹은 “그곳은 너희들이 영원히 살곳이 아니니까 정을 주지 말아라” 하고 말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충격적이다. 우리의 기대를 벗어난다. 그곳에서 터를 잡고 주인으로 살 것을 요구하신다. 그런데, 거기에 한 술 더해서, 이제는 “그땅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요구하신다. 단순히 그 땅에서 정착해서 그 나라가 제공하는 편의만을 누릴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리를 종으로 부려먹는 그 나라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5년 내지 6년의 유학생활이 지나면,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계획하고 소원하며 공부를 한다. 물론 그 자체가 잘못 된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것이 어쩌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약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그곳에서 사는 기간이 얼마이던 간에 그곳에서 영원히 살 주인처럼 유학생활을 하기를 요구하신다. 더 나아가서, 내가 공부하고 있는 그 나라, 그 도시, 그 학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요구하신다.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으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지 묻고 싶다. 주인으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종으로 살고 있는가? 내가 노예같은 유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나를 노예처럼 부리는 나의 지도교수의 잘못이 아니라, 나 스스로 “종”으로 아니면 “손님”으로 생각하고 있는 나의 생각의 잘못이다. 하나님은 내가 살고 있는 그 땅에서 주인으로 그리고 정복자로 살기를 원하신다. 아무리 우리가 그곳에 거주하는 기간이 짧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그곳에서 “복의 근원”으로 영향력을 끼치면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그 나라의 평안과 영적인 부흥을 위해서 기도해 보았는가? 그것은 어떤 특별한 사명을 받은 소수의 이민자들만이 감당할 부분이 아니라, 그땅을 잠시 지나가는 유학생들에게도 똑같이 요구되어지는 부분이다. 물론 두고 온 한국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그 땅을 위해서도 기도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땅을 알아야 하고, 그 땅을 사랑해야 하며, 그 땅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 땅의 주인이 되는 것은 그 땅에서 태어나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나의 선택이 나의 identity를 결정하고, 그것이 나의 삶의 모습과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조국을 버리고, 내가 살고 있는 땅만을 사랑하는 매국노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라는 말이다. 바벨론에 종으로 잡혀간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은 그 땅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하신다. 당신은 유학생으로 이땅에 오지 않았는가? 당신의 선택으로 이땅에 온 당신은 타의로 끌려온 종의 신세보다 훨씬 낳지 않은가? 만일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면, 미국을 위해서 기도하라. 호주에 있다면, 호주의 영적부흥과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라. 그 땅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 땅을 사랑하게 되고, 바로 그 때, 그 땅의 주인으로 정복자로 삶을 살게 된다.


내가 살고 있는 주와 도시를 위해서 기도했는가 묻고 싶다. 그곳의 주지사와 상원의원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보았는가?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영적,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놓고 기도해 보았는가? 내 주변에 살고 있는 이웃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 그들을 나의 “이웃”으로 생각하고 기도해 보았는가?


내가 공부하고 있는 학교와 학과를 위해서 기도해 보았는가? 그 곳의 총장과 학장에게 지헤를 달라고 기도해 보았는가? 학교의 영적인 부흥을 위해서 기도해 보았는가? 그 학교의 영적인 역사와 현재의 영적인 기상도를 그려보았는가? 그 곳에 와있는 다른 유학생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 보았는가? 아니면,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만 받고, 어떻게 하든 최소한으로 일하면서, 스스로 “이곳은 어차피 남의 나라, 남의 학교니까”라고 우리들의 책임을 피하고 있는가?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그곳의 “손님”으로 나가고 있는가? 많은 유학생들이 자신의 “본교회”는 한국에 있는 아무개 장로교회, 아무개 감리교회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내가 지금 나가고 있는 그 교회가 나의 본교회라고 말하신다.


너무나 많은 유학생들이 손님으로 종으로 유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본다. 스스로 정해놓은 시간표와 계획에 따라, 2년후 혹은 5년후 조국에 돌아갈 것을 기정사실화 할 뿐만 아니라, 그 것이 자신의 현재의 삶의 모습을 제한하는 모습을 많이 목격했다. 한국의 경제, 한국의 정치, 한국의 교회들, 한국의 직장들이 그들의 생각과 삶의 대부분을 지배한다. 물론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들은 유학생활 속에서 주인으로 그리고 정복자로의 삶을 살지 못한다. 그래서,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예측치 못한 풍성한 은혜를 맛보지 못한다.


이와 같은 자세는 유학생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 큰 영향력을 준다. 수많은 유학생들이 엄청난 시간을 인터넷을 통해서 한국소식을 찾아보는데 소비하는 모습을 봤다. 자신이 살고 있는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아니면 세계의 정치, 경제, 과학, 기술의 동향에 민감하기 보다는 한국의 정치와 교계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례한 소식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삶의 모습이 지속되면, 이땅에서 정복자의 삶은 커녕 그 사회에 불필요한 존재로 퇴보하게 된다. 지난 여름, 미국의 정치, 사회, 과학을 흔든 토론의 주제는 “Stem Cell”연구였다. 많은 미국 교회들도 이 토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를 했다. 우연한 기회에 생명과학과 관련된 분야에 공부를 하고 있는 형제가 있는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꺼냈다. 놀라운 것은, 그 형제는 그것이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올 봄에는 또한 회계학을 공부하고 있는 형제가 Enron 사태의 내막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모르고 있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몹시도 안타까운 모습이다.


또한, 미국에 유학을 온 많은 유학생들의 관심은 절대적으로 한국에 있는 직장에 있다. 97년 처음 Case Western 대학에 교수로 갔을 때 일이다. 이곳에 있는 MBA학생들 중에 한국에 돌아갈 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이곳에서의 공부보다는 골프와 교제에 중점을 두고, 한국의 직장에 “길을 잘 닦아놓는 데”에 모든 총력을 기울인 학생들이 있다. 그러던 중, IMF사태가 터지고, 갑자기 한국으로 귀국할 길이 막혔다. 그들 중에 몇 학생이 내가 전공하고 있는 경영정보시스템이 미국에서 취직이 잘 된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적이 있다. 불행하게도 내가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길은 거의 없었다. 한국 직장에 모든 전력을 기울인 터라, 이곳 학교에서 제공하는 여러 가지 취업의 기회를 대부분 놓쳤을 뿐만아니라, 이곳에서의 학업을 게을리해서 언어의 장애로 그들을 고용할 회사는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현실적인 눈으로 보아도 더 우월한 계획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한국의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생각해 보자. 2년 석사과정 내내 한국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느라고 미국의 사회, 경제, 언어, 역사를 전혀 공부하지 못한 후보자와, 미국에 평생 살 것처럼 전력을 다해서 미국을 공부하여 미국의 대기업들이 탐내는 또다른 후보자 사이에서, 과연 어떤 후보자를 한국의 대기업이 선호할 것인가? 그들이 만일 미국에서 경영학 석사를 한 후보자를 고용한다면, 그것은 차후에 미국의 기업들과의 관계에서, 자신들 한국 기업을 대표해서 미국회사를 주무를 그런 사람을 선호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땅에서 평생살 것처럼, 주인으로 정복자로 그 땅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가 이 세상의 기준으로도 더 매력적인 후보자가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사람이 고국에 돌아가서 고국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실질적인 몇가지 제안을 하고 이글을 마치고자 한다. 첫째, 당신의 살고 있는 그 지역에 대하여 알기위하여 노력하라. 그 지역의 역사를 공부하고, 경제와 사회에 관심을 자지고 그것을 기도제목으로 삼으라. 둘째, 당신이 공부하고 있는 그 나라의 교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라. 만일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면, 미국의 대표적인 교계 지도자들과 교회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라.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그곳을 방문해 보라. 중서부에 있는 많은 유학생들이 한국음식을 먹고 장을 보기위해 시카고를 방문한다. 그러나 그들 중에 미국의 대표적인 교회인 윌로우크릭 교회이나 무디교회를 방문해서 예배를 드린 형제들은 극히 제한된 숫자이다. 셋째,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우라. 스포츠를 통해서, 영화와 연극등을 통해서 그 나라의 흐름을 파악하라. 그 문화의 모임에 참여하라. 박물과, 미술관, 음악회에 가보라.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 가서 쇼핑만을 하고 올 것이 아니라, 그곳 브로드웨이에서 펼쳐지는 문화를 살펴보라. 넷째, 그 나라의 대표적인 신문이나 잡지를 구독하라. 뉴욕타임즈, 워싱톤포스트, 월스트리트 저널등과 같은 신문을 구독하라. 타임즈, 뉴스위크, 비즈니스 위크, 혹은 Fortune 같은 시사지를 읽어보라. 최소한 한국의 인터넷 신문을 보는 대신, 그들 신문들의 인터넷을 읽어보라. 그리고 그들의 시각과 그리고 그들의 탁월한 영어문장력을 익히라. 미국 보수와 자유주의의 논쟁속에서 하나님의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라. 다섯째, 그 나라의 언어를 익히라. 그것을 위해서 투자하라. 고급언어를 배우라. 그러기 위해서 정치 토론 프로그램을 시청하라. 학자들의 토론의 자리에 참여하여 그들의 영어를 익히라. (영어 청취력을 늘리는 방법을 한가지 소개한다. 많은 유학생들이 야구, 농구, 미식축구를 볼 때, TV소리를 줄이고 그림만 보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것을 거꾸로 하라. 스포츠 중계를 라디오로 들으면서, 머리속에 공이 어디 있는지를 그리도록 노력하라.) 마지막으로, 그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라. 정치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 그 도시를 위해서 기도하라. 막연한 기도가 아니라, 구체적인 안건을 놓고 기도하라. 학교를 놓고 기도하라. 그 학교가 나의 모교라는 마음이 드는 것을 느낄 것이다.


C.S. Lewis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시간속에서 두가지 초점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신다. 첫째는 영원이요 둘째는 현재이다.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는 현재 (Now)만이 영원히 존재한다. 유한한 우리들이 그 영원을 맛볼 수 있는 창문은 바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현재이다. 그러나, 미래는 우리들에게 두려움을 가져온다. 미래는 우리들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현재의 삶속에서 구체적으로 충성하게 만든다. 마귀는 우리에게 미래에 집착하고 그로 인해서 고민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영원의 소망가운데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원하신다 (잠 9:7-10).


유학생으로 살고 있는 당신에게 현재는 “유학생의 삶”이다. 그리고 그 삶의 현장은 한국이 아니고 그곳, 당신이 유학하고 있는 그 나라, 그 도시, 그 학교, 그리고 그 교회이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당신이 정복자로, 주인으로, 그리고 복의 근원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와 같은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