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표] 왜 나를 여기로 보내셨습니까

이코스타 2004년 4월호

1996년부터 2002년까지 블루밍턴에 있는 인디애나 주립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과정을 밟고 2002년 5월에 가족이 있는 북버지니아로 왔습니다. 그해 7월부터 시작되는 직장생활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사회생활을 처음 하게 될 나를 보면서 긴장감도 없잖아 있었습니다.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 제 마음은 감사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감사함은 조만간 불평으로 바뀌었습니다. 출퇴근이 너무 오래 걸렸고, 일 하는 나의 노력에 비해서 월급은 너무 조금 나왔고, 특히 나의 동료들의 95%가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이 저에게는 가장 큰 부담으로, 불평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부담은 이어 심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평상시 2세 교포 친구들과 주고 받는 농담을 던졌더라면 크게 상처받을 제 동료를 생각하면서, 저는 말 하기를 꺼려 했습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내 뱉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그런 부담감은 3개월이 지난 후에는 나의 일상 생활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그 부담감에 잘 적응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부담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매년 9월에 저희 회사에서 주최하는 4000 명이 넘게 오는 컨퍼런스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애나하임에서 열려서 기대에 찬 마음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어떤 남자 직장 동료가 저에게 다가 와서는 제가 그의 직장동료가 아니었다면 저와 사귀자고 물어봤을 것이라며, 제가 어떤 방에서 묵고있는지, 그날 밤에 뭘 하는지 저에게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그날 저녁에 제 방으로 놀거리를 보내겠노라 하며 노골적으로 말을 했습니다. 저는 눈치가 그리 빠르지는 않지만, 제 동료는 절대 농담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해 본 적이 없는 저는 무서웠고, 두려웠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필요했던건 나의 심정을 들어 줄 수있는 친구였고, 감사하게도 애나하임 부근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를 그 날 저녁에 만났습니다. 나에게 일어났던 일을 나누고 기도 부탁을 하고, 또 위로를 얻을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이런 일이 매달 일어나지는 않지만, 저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나를 위축시키고 나에게 두려움을 준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 물어 온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왜 나를 여기로 보내셨습니까’ 입니다. 회의적인 질문도, 반항적인 질문도 아닙니다. 단지 제가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해서 내뱉는 나의 솔직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아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저를 왜 이 직장으로 보내셨는지 이유가 명백해 질 것이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게 주시는 마음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로 하여금 내 이웃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산 지가 벌써 13년째 되어 갑니다. 저는 한 인종을 또는 한 그룹을 더 선호하거나 혐오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한다면, 이 직장에서 일하면서 느낀건, 제가 게이나 레스비언에 대한 편견이 – 심한 편견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으로 손수 빚어 만드셨습니다. 사람들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든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모든 영혼을 사랑해 줄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리라 확신합니다. 나의 편견을 넘어, 하나님의 피조물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동성연애가 막중한 죄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의 피조물을 미워하고 편견의 안목으로 본다면,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들을 향하신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할 것이고, 더 나아가 그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삶을 통해 명백히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제가 지난 2년간 격어온 갈등, 부담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마음을 여러분과 나누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분, 그리고 비슷한 경험을 체험한 분도 있으리라 믿습니다. 예수님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시고 십자가에 박히셨습니다. 한 마디의 대꾸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요 18). 순종하는 모습을, 죽임에까지도 순종하는 모습을 저희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는 여러분께 조심스레 질문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첫째로 여호와를 사랑하고, 둘째로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 하시겠습니까? 죽임을 당하면서 까지도 새계명을 순종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가려고 노력하는 저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될 듯 싶어서 이 모든 것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에서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김하나] 광야에서 만들어지는 하나님의 사람들

이코스타 2004년 3월호


코스타와 인연을 맺은지도 어느덧 7년이 되었습니다. 12년의 유학생활동안 신앙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코스타가 제겐 얼마나 감사함으로 늘 고백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열심으로 코스타를 쫒아다니는 제 모습을 보며 이유를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제 대답은 코스타 현장에 직접가면 알수 있다는 대답밖에 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코스타를 통해 확실한건 새로운 삶의 목적과 방향성을 계속 찾아가고 있고 지금까지도 변화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코스타를 통해 변해가고 있는 저의 작은 삶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자아회복


첫번째로 코스타를 통해 저는 제 자신의 자아와 자존감을 회복 했습니다. 십이년전 중학교때 ‘조기 유학’의 섭인관이라는 부담감을 안고 잘못된 길로 가지 않을려고 제 자신과 싸우며 제 자신을 지키는 훈련을 해야만 했습니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대학에 입학할때쯤 제 자신이 어디에 속한지 몰라 고민이 되어 늘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달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이민 사회와 교회에 섞여 제 자신의 정체와 유학의 목표를 잊고 살가갈때쯤 하나님께서 1998년 코스타로 불러주셨습니다. 코스타에서 새롭게 만난 하나님께 다시한번 구원의 확신을 고백하며 내 자신조차도 몰랐던 유학생활의 아픔과 상처들이 발견되고 그 고통을 치유해주시며 새로운 자아상과 내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유학이 특권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특권이 사명감으로 새롭게 다가오고 제가 할 공부와 신앙을 어떻게 연결 시켜야 하는지 가치관을 확실하게 정할수 있었습니다.


비전


두번째로 코스타를 통해 저의 시야가 넓어져 세계를 바라보고 제 가슴에 품을수 있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선교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처음엔 선교는 저 같은 사람은 할수 없다며 늘 고개만 절레 흔들며 멀게도 어렵게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망의 골짜기 속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관심과 아픔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고 지역을 생각하게 되었고 나라와 세계를 바라 볼줄 아는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 삶에 선교의 비전과 소망들이 자리잡아 가게 되었습니다. 3년을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는 그 때에 저의 삶을 다 바치겠다고 결단하고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유다 백성의 죄악으로 인하여 그들의 국가가 멸망하고 포로된 자들이 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회복하시겠다는 언약을 잊지 않으심을 기억합니다.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나라를 보며 그 나라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내가 과연 무엇을 준비해야하며 나의 역활은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코스타가 아니였더라면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제 자신밖에 바라보지 못할뻔 한 삶인데, 코스타 덕분에 많은 세계구경을 하고 간접적인 체험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의 삶


마지막으로 코스타에서 조장으로써 섬김을 통해 제자의 삶에 대한 이해와 실천에 들어갈수 있었습니다. 코스타의 또 다른 매력 JJkosta 수양회로 영혼을 사랑하며 주님의 마음으로 섬길수 있도록 성령님의 힘을 얻는 방법을 깨닫고 경험하게 해주었습니다. 제가 속한 6지역의 코디님과 환경을 극복하며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시작했던 원투원으로 말씀과 씨름하며 말씀에 인도되어지는 삶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제가 작년부터 원투원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싶어도 어떻게 무엇부터 시작할지 몰랐고, 때로는 부끄러워서 생각처럼 행하지 못할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능력으로는 부족하지만, 시간이 흘르수록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 마음들이 기쁨으로 자리잡아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서 있는 이 곳은 영적으로 훈련받고 성장하기 어려운 환경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제 맘속엔 하나님의 사람들은 광야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광야에서의 외로움도 제게는 홀로있는 훈련이자 하나님을 가장 많이 만날수 있었음을 경험했고, 하나님께서 언제나 내 말에 귀 기울이시고 함께하시는 시간들이 외로움이 아닌 하나님과 교제의 시간과장소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고국을 떠나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이 우리 코스탄들의 믿음이 연단되어 지는 값진 시간들임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많은 시험을 받았듯이, 많은 유혹과 영적 위기에 빠지기 쉽지만 동시에 영적인 축복의 기회임을 확신합니다.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사32:15)


아픔도 많고 시련과 좌절도 많은 광야같은 우리 삶의 현장들이 아름다운 동산이 되길 소망합니다. 광야를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코스타를 통해 광야가 고난의 모습을 가장한 축복의 장소임을 저에 부족하고 모자란 삶가운데 깨닫게 해준 최대의 선물이자 은혜임을 마지막으로 고백드립니다.

[정도일] Urbana03을 마치고

이코스타 2004년 2월호


코스타의 모체가 되는 제 20회 Urbana집회가 지난 2003년 12월 27일부터 31일까지 미국 일리노이주에 있는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에서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이라는 주제로 열렸습니다. 미국 전역과 93개국(미국에 있는 각나라 유학생들)에서 온 20.000명의 크리스챤들이 모인 이번 집회에서 제가 느끼고 경험했던 하나님의 기적들을 이곳 eKOSTA에서 여러 코스탄들과 같이 나눠보고자 합니다.


1946년 부터 3년에 한번씩 열렸던 Urbana집회는 우리나라에선 IVF(대학생 선교회)로 많이 알려져있는 InterVersity Christian Fellowship에서 후원하는 Student Mission Convention입니다. 현재 미국의 거의 모든 Community College 부터 사립,주립대학까지 거미줄처럼 퍼져있는 이 크리스챤 단체는 “대학생 복음화”라는 큰 미션을 가지고 자본주의와 유물론으로 병들어 가고 있는 대학교 캠퍼스 복음화 사역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IVCF는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 각 지역에도 퍼져 있어 Urbana 집회를 마친 선교에 열정있는 대학생들의 단기 선교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선교대회인 만큼 대학생들에게 선교의 비젼을 강하게 심어주는 집회입니다.


코스타와 마찬가지로 Urbana03도 4박5일의 일정중에 3일째 되는 날 점심 금식을 하면서 세계를 품에 안고 기도했습니다. UIUC Assembly Hall에 모인 20,000명의 학생들과 선교사들, 사역자들은 대형 스크린에 표시된 세계 지도안에 구체적인 나라들(크리스챤들이 가장 심하게 박해를 받고 있는 나라들, 기아와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들, 내란으로 평화가 없는 나라들…)을 놓고 그 나라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가며 기도했습니다. 또한 그 시간에 기도 뿐만이 아닌 실제적인 우리의 헌신을 표현하는 차원에서 선교 헌금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다음날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1.1million이라는 엄청난 헌금이 모인것입니다. 여기에서 스토리는 끝난것이 아닙니다. 다음날 저녁, InterVersity에서 엄선하고 또 엄선한 세계 각 지역에 가장 효율적으로 Impact를 줄 수 있는 선교단체의 Director들이 집회 무대 위에 모였습니다. 어림잡아 20여개 단체 정도 되었던것 같습니다. Urbana03 Director 였던 Jim Tebbe는 그 자리에서 1.1million의 선교자금을 20,000명의 학생들 앞에서 각 선교단체 장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중에 자랑스럽게도 Mission Korea가 껴있었습니다. 다시한번 우리나라에 그 분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심을 감사드렸습니다.


수련회 은혜를 더 많이 받는 비결, 또 받은 은헤를 생활과 학교에서 유지해 나가는 비결


코스타2003 찬양팀과 함께 “Roman 16:19 says” 를 부르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주님안에서 한없이 기뻐하던 때가 어그제 같은데 벌써 몇개월 후면 코스타2004가 등록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다시한번 시간은 화살같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코스타 2004를 6개월 앞두고 작년 코스타에서 만났던 조원들, 조장들과 이메일이나 전화로 나누는 얘기들 중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다음 코스타에선 어떻게 하면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작년 코스타때 받은 은혜들을 지금 나의 삶에 적용하며 유지 할 수 있을까?” 위의 두 질문들은 아마도 모든 코스탄들이 받는 도전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아니 큰 집회 혹은 지교회 수련회를 준비하거나 그 후에 은혜를 받았던 모든 크리스챤들의 공통적인 도전과제 임에 틀림없습니다.


6년간의 미국 유학생활동안 많은 큰 집회들을 다니며 겪었던 제 경험으로 부족하지만 집회 준비와 그 후에 받았던 은혜를 유지하기 위해 제가 시도했던 여러가지 방법들과 그 비결들을 이곳에서 여러 코스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1999년 SDSU에서 열렸던 JAMA99’(Jesus Awakening Movement of America)를 시작으로 코스타2002, 코스타2003, 일본코스타 2003, 바로 2주전에 막을 내린 Urbana03까지 제가 참석 했던 이 큰 집회들 프로그램에 흐르고 있는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많은 공통점들이 있겠지만 3가지로 압축해본다면, 첫째, 영접의 시간(재헌신의 시간), 둘째, 선교에 대한 비젼을 심어주는 시간(선교헌신의 시간), 셋째, 세미나를 통한 전공(혹은 흥미분야)과 선교와의 접목의 시간 입니다. 이 세가지의 큰 흐름을 우리 영혼 깊은곳으로 흐르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몇가지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큰 집회나 수련회때 은혜를 더욱 더 많이 받기 위해 준비해야 할 3가지에 대해 나눠 보고자 합니다.


집회나 수련회 준비기간에 해야할 일 3가지


첫째는 새벽기도 제단을 쌓는 일 입니다. 새벽 기도 시간에 집회나 수련회를 통해 변화 받아야 하는 자기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놓고 기도 합니다. 새벽기도의 힘은 물론 그 시간에 받는 말씀의 도전도 중요하지만, 매일 아침 새벽에 단잠을 깨운다는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자기 부인” 이라는 큰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횟수나 기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번을 가더라도 그 새벽에 자기의 모든 죄악된 마음을 주님께 쏟아놓는게 중요하죠. 주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더 없는 큰 축복을 부어 주십니다. 저는 항상 새벽에 잠을 깨우는 저만의 비결 한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크리스챤 라디오 스테이션에 알람을 맞추어 놓죠. 잠결에 들리는 워십송은 하루종일 저의 머리에서 맴돌곤 합니다. 캠퍼스에서 그 잠결에 들었던 워십송을 흥얼거리기도 하죠. 말 그대로 Walking Q.T. 인 셈이죠. 또 하나 제가 잘 사용하는 방법은 새벽에 일어나기 정말 싫을 때 제가 외우는 자기 주문이 있습니다. “30분후에 일어나도 똑같은 기분일꺼야. 그렇다면 지금 일어나자 ” 기억하세요. 새벽에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새벽 미명에 일어나 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우리 코스탄도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는 집회나 수련회때 목사님이나 강사님들을 통해 선포될 말씀들을 먼저 읽어보는 것입니다. 저는 2003 코스타 조장과 Urbana03 small group leader 로 섬기면서 “집회때 선포될 말씀을 먼저 읽어 보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준비된 영혼을 기뻐하십니다. 집회때 말씀을 먼저 읽고 그 집회에 참석한다면 우선 말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집회때 더욱 풍성한 은혜와 말씀안에 숨겨진 보물을 찾게 됩니다. 사실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바로 한번 읽어서는 깊은 이해와 그 속에 숨겨진 본뜻을 이해하기 어려움을 자주 느끼곤 합니다. 특히 전도서나 로마서와 같은 파워풀한 서신들은 같은 구절을 두세번 읽어야만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집회에 오셔서 그 말씀들을 예습하겠다는 생각은 미리 포기하세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코스타 스케줄이 얼마나 빡빡합니까? 안그래요?


셋째는 세미나를 고르는 일입니다. 제가 이번에 Urbana03에 가서 절실히 깨닫게 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세미나가 큰 집회들의 Core란 사실입니다. 코스탄 들은 흔히 아침, 저녁의 다같이 모이는 session에 비중을 두곤 하죠. 하지만, 집회가 끝난 이후에 받은 은혜를 일상 생활과 자기 학교 생활에 가장 잘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세미나란 사실, 잊지 마세요. 또한 세미나의 제목만 보고 그 세미나를 선택하는것은 좋은 선택방법이 아니라는 사실도 같이 알려드립니다. 강사님들의 스타일을 보세요.(모르시면 주변에 작년에 코스타를 갔다 오셨던 분들이나 JJKOSTA에 문의 하셔두 됩니다.) 물론 모든 세미나 강사님은 미국과 한국에서 검증되고 엄선된 분들이시지만, 각기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들과 Talent를 가지고 계시니깐 세미나 후에 이메일 받아 놓으시는 것두 잊지 마시길!


지금까지는 집회와 수련회때 은혜를 듬뿍 듬뿍 받기 위해 준비해야할 사항들을 같이 나눠봤구요. 이제부터는 집회후에 받은 은혜를 유지하는 비결 3가지에 대해 같이 나눠보고자 합니다.


큰 집회나 수련회 이후에 받은 은혜를 유지하는 비결 3가지


코스탄들 사이에서 오가는 속설이 있습니다. “코스타 약발은 오래 가면 6개월 간다더라 ” 하지만, 모르시는 말씀, 영원을 얘기하고, 천국을 얘기하는 우리들이 6개월이라니요? 여기 은혜를 유지하는 비결 3가지가 있습니다.이 방법들은 제가 길게는 6개월 짧게는 3개월이상 시도해본 방법들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시도해 보시길.


첫째, 세미나 테입을 정기적으로 듣는것을 추천합니다. 물론 지금 이글을 보시는 분들중(많이 찔리실 테지만), 코스타에서는 정말 앞을 다투어서 세미나와 집회 테입을 사셨던 분들, 오늘 밤, 아니 이번주 안에 책장과 서랍에 먼지 부옇게 쌓여 있는 테입을 꼭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코스타의 감동이 새록 새록 다가옵니다.


둘째는 코스탄들과 삶을 나누는 것을 적극 추천합니다. KOSTA USA는 끝남과 동시에 1달이상의 여름방학 기간이 있잖아요. 제가 작년에 갔던 일본 코스타는 8월 중순에 시작하기때문에, 끝나자 마자 학교 일에 너무 바뿝니다. 보통 조는 가까운 지역 사람들이나 같은 주에 있는 사람들로 많이 구성됩니다. (늦게 등록하신 분을 제외하고). 저는 저희 1지역 코디님과 저번 학기에 만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물론 학교 생활이 눈코뜰새 없이 바뿌긴 했지만, 주말을 이용해서 3시간이나 떨어진 그 코디님 집에 가서 같이 잠도 자고, 밥도 같이 먹고 코스타때 감동도 나누며 서로 은혜를 받았던 너무나도 축복된 시간이었습니다. 코스타의 감동, 코스탄끼리 나눌때 더욱 더 풍성해 진다는 사실, 제가 깨달았던 중요한 진리중 하나였습니다.


셋째는 자기 삶에 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회나 수련회 이후에도 이전의 삶과 별반 차이가 없다면 그건 분명 그 집회나 수련회는 자기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2003년 일본 코스타때 이찬수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코스타가 끝나고 은혜 받았다는 얘기는 절대로 하지말라. 그 은혜 받음은 주변사람들과 가족들이 평가해줄 것이다.” 저는 이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은혜를 받고 안받고는 자기가 평가하는 것보다 주변 사람들의 평가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는 자기 자신에 너무나도 많이 익숙해져있기때문에 말로는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자기 생활은 집회 이전이나 이후 별반 달라진것이 없음을 느끼곤 합니다. 저두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었구요. Blessing=Life Changing 이라는 사실,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주일에 저는 저희 교회 목사님으로 부터 조금은 특별한 설교을 들었습니다. 기도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너무나도 귀가 닳도록 듯는 기도, 기도, 기도… 하지만, 오늘은 그 기도가 단지 기도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활에 비교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그 활을 의미하고, 화살은 그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약속, 활을 당기는 힘은 믿음이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기도는 코스타의 은혜를 유지하는 가장 큰 비결이 됩니다. 금년 코스타에선 더욱 더 많은 유학생들이 주님께 재헌신하며 세계를 향한 큰 비젼을 품길 기도합니다.


작년 코스타가 끝난 직후 한 형제가 쓴 글이 생각이 납니다. 제목은 “고민… 기도…”였습니다.


영적 Power가 현실의 삶 가운데 잘 드러날때 비로서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하나님의 기대에 부합한 삶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또다른고민이 생겼습니다. 과연 이러한 하나님의 기대들이 나의 주어진 현실의삶 속으로 얼마나 영향력 있게 적용이 될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입니다. 일주일의 꿈과도 같았던 시간을 뒤로한 채 현실로 돌아와보니, 역시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적어도 나는 변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기도해 봅니다. 바로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이 부흥이 필요한 곳이라고, 그리고 땀을 흘리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도 얻을 수 없다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시고 세우시는 목적은 나로 수고하기를 원하신다고..

[이정희] 바쁜 유학생의 여유로운 취미 생활

이코스타 2004년 1월호


즐거운 일과 행복한 쉼


유학생활을 시작한 지 2년 지난 그동안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그중 중요한 깨달음은 휴식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매우 긴장하여 숨차게 앞만 보고 달려갔지만 장기적으로 도달해야할 목표지는 재충전없이 단번에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일과 쉼의 조화가 적당히 이루어져야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음을 더 깊이 느낀 시간들이었다. 먼 이국까지 올 수 있었고 공부할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즐겁게 공부하는 한편 안식은 안식으로서 잘 쉬는 것이 하나님의 설계가 아니가 생각이 든다. 이런 점에서 일년 반의 유학기간 동안 생활 방식을 적극적으로 바꾼 부분이 있다면 바로 취미생활일 것이다. 유학생활에 공부하기도 바쁜데 웬 취미까지야 하며 의아해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이전까지의 시간에서는 아직 진로가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서지 못하였고 소비적인 문화가 체질적으로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에 소시민적인 취미 생활을 하찮게 보아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흐릿한 정신으로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도 의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잠시 머리를 식히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이곳 생활에 적응하면서 안식의 활동이 원래의 삶을 더 충실하게 만들어줄 수있는 좋은 취미가 발견되었다. 하나는 직접 체험하기 어려운 실생활의 대화를 많이 보여주는 영화를 보는 것, 둘은 달리기, 셋은 인터넷으로 수필을 읽는 것이다. 영화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여러가지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달리기는 나의 몸을 이해시켜주었으며 감동을 주는 글들은 나의 정신세계를 살찌워주었다.


영화로 세상보기


처음 영화를 보기로 시작한 이유는 영어 공부를 위해서였다. 누가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면 간단한 생활표현을 익히는데 좋을 것이라고 하는 말에 얇은 귀가 혹해서 한두개 사서 보는데 정신연령이 낮아서 그런지 혼자 낄낄대며 보곤 했다. 그런데 기왕이면 영화를 보면서 뭔가 더 생각할 수 있는 주제에 자연스레 손이가게 되었다.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의 다양한 모습으로서 가족사를 그린 작품, 인종갈등 문제을 제기한 작품, 도시민의 소외를 그린 작품, 미국의 잘 보이지 않는 문제를 다루는 것들이 더 의미있었다. 감명깊게 본 영화로는 Malcom X, Ali, Ali documentary, Do the Right Thing, Jungle Fever, Glory, Color Purple 등이다. 내가 미국의 흑백갈등문제에 관련된 작품에 손대게 된 이유는 몇 가지 체험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게 소외되고 있는 흑인들에 대해 주류사회의 문제의식은 미국 사회의 다른 문제와 흡사하게 공동체적으로 정책적으로 이 문제를 이렇게 풀자 하는 논의는 거의 없는 것같다. 사회의 유기적 구성원으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문화적, 정서적, 경제적 역량을 길러주는 교육에 참여하지 못함으로 발생하는 사회 부적응 현상은 개선되어야 할 사회문제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건전한 시민을 양성하는 교육 시스템의 약화가 흑인문제의 핵심이 아닐까 직관적으로 생각해본다. 뭐 이건 남의 나라 일만이 아니긴 하다. 한편 기독교적 시각으로 인생을 잔잔하게 그린 A river runs through it, 장애인의 시각에서 부녀간의 사랑을 그린 I am Sam, 형제애를 보여주는 The eighth, The rain man, 주어진 인생에 최선을 다할 것을 말하는 Forrest Gump 등은 단순하면서도 정갈한 대사로 주제를 잘 전달하고 있다. 단정한 노목사님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은(We can love completely without complete understanding) 쉽게 잊혀지지 않는 울림으로 강하게 자리잡는다. 지식이 지나친 세상에서 단순하고 어린아이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정신장애인(Sam)은 성경이 말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 한다. 그의 말대로 사랑이란 일관성이며 듣는 것이며 그냥 있어주는 것이다. (Love is constancy, listening and just being there beside them). 사람들은 그들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거라고 말하지만 Forrest Gump의 변함없는 사랑은 이 세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언어를 넘어선 감동은 삶의 또다른 즐거움이기도 하다.


몸이 가르쳐주는 지혜


두번째는 달리기. 문약한 서생이지만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머리도 둔해지는데 체력까지 무너지면 안된다는 위기의식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겨울 방학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한 달리기의 목표는 3.5마일 30분 주파. 처음에는 5분 시속 7마일로 달리는 것부터 시작하여 하루에 2분 30초씩 추가하니 대략 일주일 정도부터는 상당한 거리를 달리게 된다. 인터벌에 다리 근육 강화 운동을 하여 몸 전체를 일사분란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신기한 것은 처음에는 10분 달리기가 거의 죽을 맛인데, 하루 지나고 나서 다시 그 거리를 뛰어보면 그리 힘들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 머리 속으로 더 높은 목표를 설정했고 몸이 적응했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 속으로 그 옛날 군화 신고 뛰어다니며 부르던 군가를 부르며, 2분 남으면 애국가를 일절부터 사절까지 외치며 오늘도 해냈다는 자신감으로 힘차게 발을 내딛는다. 달리기를 하다보면 몸에 붙어 있는 살들이 얼마나 거추장스러운지 불필요한 것들은 당장이라도 떼내고 싶다. 목표치가 가까와오면 숨가빠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단순하고 순박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싶다. 앞으로 나가기 위해 버려야 한다.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나의 욕심이다. 또 몸은 가르쳐준다. 나는 살아있고 자라고 있다고. 사춘기 시절 급박한 몸의 변화를 보며 나 자신도 신기해하던 생각이 떠오른다. 오직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일, 내 안에 있는 생명의 활력을 다시금 느껴본다. 나의 몸은 나의 것이 아니고 오늘도 내게 생명력을 불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함부로 대하지 말고 관리해야 함을 깨닫는다. 지속적으로 달리다보면 체중은 비슷한데 몸이 하나로 뭉쳐짐을 느낄 수 있다. 팔도 다리도 앞으로 나가는데 적당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호흡과 맥박도 고르게 맞추어진다. 교회가 하나가 될 때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움직임보다 전신의 나아감에 힘을 더하고 서로에게 힘을 더해주는 상승의 관계를 갖게 된다. 하나가 된 공동체는 공동의 선을 향해서 서로를 사랑하고 격려하며 힘이 되어주는 떼낼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인터넷에서 보석 캐내기


세번째는 인터넷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의 자취가 남겨진 글들을 읽어보는 것이다. 이코스타를 비롯하여 수필닷컴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환경에서 얻는 간접체험은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언젠가 ‘자식에게 주는 아버지의 글’에서 ‘좋은 글이 있으면 다른 사람과 나누어라’라는 충고가 있었는데 좋은 글을 찾아 나의 생각을 덧붙여 다른 사람과 나누면 그 가치가 더욱 커질 것같다. 내가 발견한 좋은 글과 내의 단편적인 상념의 글과 내가 읽고 싶은 책과 내가 읽고 싶은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의 생각을 하나하나 따라가다보면 나를 지탱해주고 있는 이상과 희망을 되새길 수 있는 나와의 소통이 이루어진다. 이런 글들을 다음(Daum)카페에 하나씩 올려놓으면 보이지 않는 나의 생각의 단초들은 하나의 나무로 성장한다. 다른 이들의 고민과 나눔의 양분을 받은 나의 정신은 성장을 멈추지 않고 자라난다. 가끔은 소재를 잡아 글을 써보기도 한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산고 속에서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런 저런 상념을 끄적거리는 것이 무슨 효용이 있겠는가 반문을 해보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나의 분신을 남기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살아가는 즐거움, 자라나는 기쁨


Have you gazed out on the ocean Seen the breaching of a whale? Have you watched the dolphins frolic in the foam? Have you heard the song the humpback hears five hundred miles away Telling tales of ancient history of passages and home?


I want to live I want to grow I want to see I want to know I want to share what I can give I want to be I want to live


-  John Denver, I want to live 중에서


유학생활이라고 해서 공부만 하라는 법은 없다. 틈틈히 남는 시간은 그냥 보내기 아까운 귀한 하늘의 선물이다. 이곳에서 경험하는 공부와 취미생활 우리들에게 자라가는 기쁨을 선사해준다. 생명을 소유하여 조금씩 성장하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까? 삶이 고통이라지만 문득문득 느끼는 살아가는 즐거움은 하나님이 주신 보상인 듯싶다. 성실한 노동 뒤의 달콤한 휴식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안식일 것이다. 세상은 넓고 내가 공부하고 있는 주제는 세상의 단한면이므로 곳곳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려면 세상을 보아야 할 것이다. 자연을 관찰하고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던 성프란채스코처럼 영화를 보고 몸을 움직이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다면 과장일까? 안식과 일 모두 주님의 손에 달린 것이며 그 과정을 통해 살아가는 즐거움, 성장하는 기쁨을 주신 주께 감사드리며 주님의 풍요가 넘치는 삶을 위해 오늘도 정진한다. 또 다른 배움을 기대하며.

[유영진] 하나님의 손을 보는 유학의 삶

유학생의 삶 (9)


하나님의 손을 보는 유학의 삶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 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17-19)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라는 제목으로 유학생의 삶에 대하여 글을 쓰기 시작한 지도 벌써 일년이 다 되어간다. 처음 시작할 때, 일년을 계획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이제는 마감을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매달 마감일에 쫓겨서 편집부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원고를 보냈는데, 이번 달에는 유난히 늦어졌다. 한국으로 여행을 한 이유도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 글을 마지막으로 쓴다는 생각이 정말로 나의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부담으로 작용했던 탓이다. 수도 없이 글을 썼다가 지우곤 하면서 이 글을 적는다. 정말로 나의 마음속에 나의 생각을 사로잡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아내와 함께 이민가방 7개에 짐을 싣고 매릴랜드에 와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것이 1992년 여름, 벌써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에, 나와 아내는 학위를 받고, 직장을 구하였고, 두 아들을 낳았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얼마 전에 부교수로 승진을 하면서 Chaired Professor의 자리를 받기도 하였다. 유학 와서 온 첫 주, 이곳으로 오기 일주일 전에 이태원 가게에서 산 신발을 신고, 학생 아파트로 가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지름길로 가려고 하다가 시궁창에 빠져서 새 신발이 엉망진창이 되었던 기억, 학생 아파트의 열쇠를 받아서 들어간 첫 날, 아내하고 둘이서 집안에 있는 유일한 등이었던 부엌의 등 밑에서 담요 두 장과 수건을 둘둘 말아서 잠을 청하였던 그 장소, 그곳에 도착한 이틀 째에 만난 지도교수가 만나자 마자 엄청난 양의 일을 넘겨줄 때 가졌던 황당한 부담감, 그렇게 열심히 도왔던 지도교수가 박사과정 일년차가 지날 무렵에 나를 쫓아내려고 한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았던 때, 일주일에 50불을 가지고 생활을 하기 위해서 먹어본 과일은 세일을 하는 사과와 바나나 외에는 없었던 박사과정 시절, 첫 째를 가진 아내가 좋아하는 사과를 잔뜩 담았다가, 가지고 갔던 돈이 모자라서 몽땅 그곳에 놓고 떠나야 했던 때의 아픔–그 아픔을 차마 나에게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공부를 모두 마치고 직장을 구한 다음에야 말을 해야 했던 아내의 고생, 난 지 이제 한 달이 된 아이를 한 손에 안고, 다른 한 손에 첼로를 들고 다니면서 공부를 해야 했던 아내의 모습 등등…


이런 삶의 과정 속에서 나의 마음을 지켜준 한 성경구절이 있다면, 바로 에베소서 1장 17-19절 말씀에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 나를 유학생으로 이곳에 부르셨다. 그리고 그분은 나에 대하여 소망을 품고 계시다. 그 소망 속에는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있다. 그리고, 그분은 그 모든 일에 엄청난 능력으로 나를 공급하신다는 바로 그 말씀이었다.


나의 고통에 의미가 있고 나의 연단에 소망이 있다는 그 약속이 나에게 힘이 되었다. 지금도 힘이 된다. 나를 내 보내려고 생각하는 지도교수에게 최선을 다해서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지도교수를 넘어서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사과정 2년차는 정말로 힘들었다. 지도교수가 나를 내 보냈기 때문에 학과에서는 나를 4명의 교수들에게 나누어서 시간을 배정했다. 모든 교수는 나를 full-time으로 이용하기를 원했다. 결국, 나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서 4배의 시간을 들여서 조교의 일을 해야 했었다. 그 중의 한 중국교수는 매주 수업시간에 강의를 하려고 학교에 올 때면, 나에게 학장실에 가서 임시 주차 증을 받아서 자기를 주차장에서 기다리도록 하였다. 날이 좋을 적은 상관이 없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들고 서서 그 교수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나의 모습이 한없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 때도 나의 연단에 소망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2년차 말에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나는 5년 동안 보장 되어있는 줄로 알았던 장학금이 2년 말로 없어지고, 그 이후는 지도교수가 알아서 해결해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눈앞이 막막했다. 나를 돌봐줘야 하는 지도교수는 나를 쫓아내었던 바로 그 사람인데, 나에게는 어떤 소망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나에게 힘을 준 말씀이 바로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라는 말씀이다. 그 힘은 바로 죽은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그 힘이라고 사도바울은 설명하고 있다. 그 힘은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보다 뛰어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었다. 그 힘이 내 속에 있는 힘이라는 것을 기도할 때 깨닫게 되었다. 내 속에서 역사하는 힘이 나의 지도교수보다 더 뛰어나다고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 믿음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하나님은 그 믿음에 한번도 실망을 시키신 적이 없었다. 나를 내 보려던 지도교수는 그 와중에서도 자신의 프로젝트에 최선을 다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나를 다시 받아들였고, 그 프로젝트로 인해서 그야말로 스타교수가 되었다. 곧 그는 학과 장이 되었고, 그는 나의 배후에서 나를 돕는 최고의 동역자가 되었다. 그 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다. 하나 하나 세심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유학생활 내내 나의 삶을 주장해 온 한 생각이 있다면, 바로 나를 부르신 그 하나님의 소망을 깨닫는 것이었다. 그 부르심의 소망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다. 그것이 나의 직장을 구하는 일에, 그 이후의 삶에, 그리고 각종 사역에 참여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1995년 가을 나는 박사과정 4년차였다. 논문은 거의 마감이 되었고, 아내는 둘째를 임신한 상태였다. 지도교수는 나에게 학교에 일년 더 있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했다. 일년동안 프로젝트를 더해서 논문을 몇 개 더 실으면 외국인으로서 미국대학에서 직장을 구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좋은 생각이기는 하지만 둘째를 곧 낳게 되는 데, 그러면 도저히 박사과정 월급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지도교수는 자신이 어떻게 해보겠다고 하면서 학장과 약속을 내 앞에서 하였다. 나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잘 안되면, 4년차 말에 job market으로 나가서 아무 학교나 직장을 잡겠다고 말하였다. 10월 31일이 그 날이었다. 내 생일이었기에 아직도 기억이 난다. 오후 3시에 학장실로 내려간 지도교수가 오후 5시 30분이 되어야 나타났다.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띄고는 “일년동안 Visiting Professor로 너를 쓰기로 했다. 월급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보다는 두 배 이상 되겠지” 하면서 “Happy birthday to you!”라고 했다.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했다. 이미 학교의 예산이 다 정해진 상태에서 학장이 자신의 비상예산에서 나를 고용했다고 했다. 솔직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visiting faculty가 필요한 상태도 아니었고, 설상 필요했다고 해도 나를 그 자리에서 쓸 이유가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는 듯했다. 일년동안 내가 그곳에 더 머무르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6년은 40일 연속 새벽기도와 아침 금식으로 시작하였다.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기드온의 이야기가 강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기드온 당시의 추수할 곡식이 바로 미국의 이민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한국 교회와 우리들의 1.5세 2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하나님이 쓰실 만 하니까, 사단이 그들을 빼앗아 간다는 말씀으로 기드온 시대의 이야기가 나에게 도전으로 다가왔다. 그 해 여름 JAMA에 참석을 하게 되었다. 셋째 날인가, Sammy Tippit이 인도하는 저녁 기도회였다. 미국의 지도를 보여주면서 미국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의 입 속에서 나도 모르게 “주님, 저 지도 속에 있는 캠퍼스로 나를 보내소서. 저곳에 있는 한국계 학생들에게 나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나왔다. 그 날 이후, 그 기도가 나의 삶의 방향을 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1997년 이곳 클리브랜드에 오자마자, 한국에서 모교를 비롯해서 많은 학교에서 귀국하라는 초청이 있었다. 어떤 때에는 정말로 한국에 귀국하고 싶었다. 기회도 무척 좋았고, 그때가 마지막 기회처럼 보이던 적도 있었다. 내가 지원하기만을 기다리는 그런 경우도 있었다. 나이가 드신 부모님들에게 귀국해서 하나뿐인 아들로 떳떳하게 아들노릇을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모교의 강단에 서서 후배들에게 강의를 하는 그런 꿈을 쉽게 버릴 수 도 없었다. 하나님께 사정도 해봤다. 그리고, 내가 귀국을 하면, 그 캠퍼스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교수가 되겠다고 기도도 해봤다. 그때 마다 하나님은 1996년 JAMA에서 기도하는 나의 모습을 다시 보여주시곤 했다. 아무 말씀 없이, 그 모습이 비디오처럼 나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이제까지 한번도 한국에서의 초청에 응답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아무런 미련 없이 모교의 자리에 지원하는 친구를 위해서 정말로 축복하면서 추천서를 써 줄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친구가 그 자리에 정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다. 아마도 앞으로 또 좋은 기회가 한국에서 생기면 마음이 싱숭생숭해 질 듯하다. 이번에도 한국에 짧게 방문하면서, 내가 한국에 가면 참 할 수 있는 일이 많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내가 그 일로 다시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아마도 또 똑같은 비디오를 내 마음속에 틀어보이실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 무슨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살고 있는지 묻고 싶다. 무엇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대답하여 보라. 유학생활을 향한 당신의 비전은 무엇인가? 아니, 당신을 유학생의 자리 (아니면 유학생 배우자의 자리)로 부른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에 대해서 당신은 궁금해 본 적이 있는가? 그 부르심 의 소망을 붙잡고 고민해 봤는가? 그 부르심의 소망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묵상해 보았는가? 그 능력의 지극히 크심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는가?


그 소망에 붙잡히라. 그 소망이 당신의 삶을 주관케 하라. 하나님의 생각이 당신의 생각을 주장하게 하라. 유학생의 자리가 바로 당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깨닫는 그 자리가 되기를 기도한다.

[유영진] 하나님의 손을 보는 유학의 삶

유학생의 삶 (9)


하나님의 손을 보는 유학의 삶



이 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중에 무릇 그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대하 36:21-23)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장 11장을 시작하면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11:3) 이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땅의 물리적인 세계에서도 눈에 보이는 것은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는다. 눈에 보이는 날씨의 변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대기권의 변화로 인함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히터와 전등도 결국은 눈에 보이지는 않는 전자력의 영향이다. 온 우주가 유지되는 것도 온갖 힘의 작용이다. 사회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경제학이든, 사회학이든, 경영학이든, 눈에 보이는 사회현상은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변수들의 상호역학작용에 의한 것임을 우리는 배워서 알고 있다. 시장에서의 가격이라고 하는 눈에 보이는 변수는 결국 수요와 공급이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고 배웠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혜로운 자와 지혜롭지 못한 자들의 차이는 바로 이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배후의 힘의 역학을 이해하는냐 하지 못하는 냐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결국은 모든 학문의 궁극적인 종착점이라고 하겠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도 결국은 개인의 삶, 한국가와 사회의 변화를 보면서, 그 역사의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을 바라보는 시각을 얻기 위함이다. 따라서 역사를 공부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한 개인과 국가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리더들을 가까이서 만나면 남들에게서 만날 수 없는 묘한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한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그 시각의 매력이다. 얼마전 일본에서 한 때 가장 빠르게 성장한 회사였던 DoCoMo의 회장으로부터 직접 그의 경영관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21세기의 지식경제 시대의 일본사회경제를 놀라운 역사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바라보는 그의 혜안에 큰 감동을 받았다. Cisco의 회장 John Chamber도 그와 같은 인물이다. 시대의 경제, 사회, 기술의 흐름을 꿰뚫고 있는데에서 나오는 탁월한 시각이 있다.


개인이건 국가이건, 역사의 맥을 보지 못하고 사는 삶은 그 quality가 역사의 맥을 보고 사는 삶에 비하여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은 삶은 계속해서 반복되어지는 삶의 패턴을 보면서도 그것에 대한 거시적인 반응을 하지 못하는 삶이다. 그때 그때 삶에 사건이 터질 적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에 바쁜 삶이다. 이번주는 시험으로, 다음주는 가족일로, 그 다음주는 교수와 세미나준비로 정신없이 끌려가면서 사는 삶이 바로 그런 삶이다. 그런 삶은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잃고 사는 삶이다. 그래서 그곳에 내가 왜 있는지, 뭘하면서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삶이다. 어제 동료교수가 집에 가다가, 자신의 수첩에 그다음날 아침 8:30분에 약속이 잡혀있는 것을 보면서 비서에게 “What am I doing here at 8:30 tomorrow morning?”이라고 말하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That’s what happen, when you let others control your life”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불행이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맥을 보지 못하고 삶을 영위해 간다. 많은 기도를 한다. 병이 나면, 병을 고쳐달라고, 돈이 떨어지면 돈을 채워달라고, 직장이 없어지면 직장을 구해달라고, 마음이 불안하면 평안을 달라고, 교회가 어지러우면 교회가 평안하게 해달라고, 많은 기도를 한다. 그러나, 그 인생의 나가는 방향은 마치 안개속을 달리는 자동차와 같다. 두렵고, 답답하다.


역사의 맥을 잡는 것이 중요한 만큼, 어떤 시각에 역사를 보는가 하는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님의 시각에서 역사를 보아야 한다. 나는 유학생들이 역대상하서를 읽으면서 자신의 개인의 역사와 그 속해있는 국가의 역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는 훈련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열왕기서가 솔로몬왕 때부터 이스라엘과 유대왕조의 멸망의 시점까지를 기록한 책인데 반하여, 역대상과 역대하는 정통 유대왕조를 중심으로 창세기부터 시드기야왕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때까지를 왕실에 있던 기록을 중심으로 적은 책이다. 열왕기가 왕들의 치적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사건들,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동, 그 당시 백성들의 고통받은 장면이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역대기는 매우 담담한 어투로 유대 왕들의 치적을 중심으로 기록을 하고 있다. 역대상은 성경책을 창세기부터 다시 시작해서, 그 지루한 족보를 줄줄이 엮어가고 있다. 왜 하나님은 역대상과 역대하를 쓰게 하셨을까? 그리고 왜 구약성경 한 가운데 그 책들을 넣도록 하셨을까? 이미 다른 성경책에 모두 기록된 이야기인 이스라엘과 인류의 역사를 왜 두 권의 책에 다시금 기록하게 하셨을까?


일반적으로 역대기는 에스라에 의해서 포로귀환시기에 쓰여졌다고 믿어지고 있다. 에스라는 고레스왕의 칙명으로 인하여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의 성전이 다시 건축되어지는 상황에서 이 책들을 쓴 것으로 알려진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참으로 참담한 지경이었다. 국가는 없어지고, 왕실은 산산이 분해되었으며, 그들이 믿던 하나님의 성전은 돌부리하나 남지 않고 부숴졌다. 찬란했던 솔로몬의 궁전은 시랑의 굴혈이 되고 잡초가 무성한 황무지로 변해버렸다. 영화를 누리던 그들의 왕은 눈알이 뽑혀서 적들의 손에 끌려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고, 그들 백성은 포로로 끌려가 이름도 알지 못하는 이방 신들을 섬기며 다른 민족의 종노릇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라는 역대기를 통해서, 이제까지 놀랍게 자신들의 민족을 축복해 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일깨워 준다. 그들은 선택받은 다윗의 후손이며,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 놀랍게 축복하여주었던 것을 일깨워 준다. 그는 눈에 보이는 환경의 지배를 받으면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준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오늘 바로 이와 같은 황무지의 돌무더기 가운에서도 우리에게 유효하며 우리 조상을 지켜주셨던 하나님은 바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이 역대기의 주제이다. 우리에게는 다윗과 같이 용맹한 왕도, 솔로몬과 같이 지혜로운 왕도 없고, 오히려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다윗과 솔로몬에게 하셨던 그 약속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하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그는 역대하 마지막에 고레스왕의 성전재건축 명령이 오히려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였다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시고 단 하나의 실수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역대기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도하신 하나님의 손길로 우리들의 눈을 돌려준다. 그리고 역대기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역사를 볼 것을 우리들에게 권면한다.


역대기를 읽고 나서 이후의 예언서를 읽으면 하나님의 이스라엘 사랑하는 마음을 생각하며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줄을 잇는다. 오늘 역대기를 읽으면서 그리고 그 이후에 계속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나의 삶, 조국 한국, 그리고 이 땅 썩어져가는 미국을 생각해 본다.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힘든 상황, 한계적인 상황 앞에서 좌절하고 낙심한다. 더 이상은 어떻게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썩어 들어가는 환부를 보고 포기를 선언하며 환자의 상처부위를 덮어버리는 외과의사처럼,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고 이 사회를 포기하고나 있지는 않은가? 이제까지 나를 지키고, 축복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그 손길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그분과의 약속을 잃어버리고 일방적으로 파기하였는지 모르나, 그분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은 신다는 것을 잊고 있지는 않았는가? 당신의 유학의 삶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라. 지금 성공하고 있는가? 이스라엘민족의 고난은 가장 영화스러웠던 솔로몬왕의 시대때 이미 시작되었음을 잃어버리지 말라. 아니면 지금 고통당하고 있는가? 예루살렘의 멸망도 결국은 하나님의 예정안에서 그분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기억하자. 더 이상, 그때 그때 임시방편으로 살지 말자. 비롯 유학을 오는 결정은 기회가 있어서, 남들이 다와서, 직장이 지겨워져서, 아무 생각없이 왔다 할 지언정, 앞으로의 남은 유학의 삶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살아보도록 몸부림쳐보라. 이제까지 나를 위해서 살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눈을 위해서 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마음을 채워드리기 위해서 한번 살아보자. 당신을 이곳을 끌고 오신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자. 만일 당신이 당신의 삶을 놓고 역대기를 쓴다면 당신은 당신의 삶을 뭐라고 기록하겠는가?


한국의 사회와 교계의 모습을 보면서, 정치인과 경제인을 욕하기 전에, 반미 혹은 친미를 논하기 전에, 북한의 핵위협을 논하기 전에, 그 뒤에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자. 전세계에 가장 큰 교회가 있는 나라, 가장 많은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했다고 자랑하는 나라, 가장 뜨겁게 기도하는 전통이 있는 나라라고 자랑하기 전에, 썩어가는 한국의 교계와 정치와 문화를 바라보고 계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보자. 하나님의 손이 무엇을 어떻게 움직이시는 지를 주목하여 살펴보자.


미국을 생각할 때, 이락과의 전쟁이 옳고 그르고를 논하기 전에, 부시의 외교정책의 옳고 그름을 논하기 전에, 미국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보도록 하자. 역사상 유례없는 군사, 정치, 경제, 문화, 학문의 초강국이 된 미국, 신앙의 자유를 찾아온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신앙과 자유를 바탕으로 한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6개월을 토론하며서 세운 나라 미국, 그 미국의 역사 뒤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마음을 읽어보려고 노력하여 보자. 그 마음을 품으려고 몸부림쳐 보자. 인류역사상 유례없이 청교도의 신앙의 고백을 근거로 세워지고, 그들의 지폐에 “In God We Trust”라고 쓰는 나라인 미국.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무엇을 원하냐고 물어보는 뉴스위크 기자에게 한 이라크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민주주의, 위스키, 섹스!” 전세계의 포르노 수출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만들어지고, 타락과 향락의 상징이 되어버린 할리우드가 문화의 대명사가 되어버리고, 하루에 3000명이 넘는 unborn child가 낙태로 살인되어지는 이땅 미국을 하나님의 심장으로 한번 바라보기를 바란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말씀이 바로 오늘 미국에게 하고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90년대의 유례없는 경제 호황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으나, 하루아침에 그 부는 다시 천문학적인 숫자의 재정적자로 돌아섰고, 그 엄청난 부를 통해서 복음의 말씀의 도구로 사용하기 보다는,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국을 바라보면서, 가슴을 찟는 회개의 눈물이 있기를 바란다. 미국이 좋아서, 친미를 하기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자. 만일 당신이 오늘 미국의 역사를 가지고 역대기를 기록한다면 무슨 말을 기록할 것인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대기를 읽으면서, 내 자신의 역대기를 생각해본다. 한국과 미국 교회의 역대기를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