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진] 부활을 생각하며

유학생의 삶 (7)


부활을 생각하며



“More than that, I count all things to be loss in view of the surpassing value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who I have suffered the loss of all things, and count them but rubbish so that I may gain Christ … that I may know Him, and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and the fellowship of His sufferings, being confirmed to His death; in order that I may attain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빌립보서 3:8, 10-11)


오랜만에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학교로 출근을 하였다. 광현과 동현을 학교에 내려놓았다. 동현이는 언제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신없이 학교로 뛰어 들어갔다. 어제 새로 산 운동화를 신고서, 자랑을 하기 위해서 바지를 두 번 접어 입고는 학교로 갔다. 그 뒤를 광현이는 천천히 따라 걸어 들어간다. 나를 쳐다보고는 씩- 웃는다. 창문너머로 “I love you”라고 말해주고는 학교를 향해서 떠났다. 학교에 오니 봄방학이라 6층이 조용하다. 이번 방학에는 밀린 paper를 반드시 끝낼 결심을 하고는 office로 들어섰다. 얼마 전 새로 산 Power Book을 켜고, 커피를 옆에 놓고서, 브라암스의 음악을 켜놓고 부탁 받은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을 쓰는데, 선배교수 Fred가 들어와서 다음주에 같이 점심을 먹자고 약속한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오늘따라 유난히 눈이 부시도록 파랗다.


삶이 아름답다. 순간 순간 지나칠 적마다, 다시 보지 못할 찰라가 아쉽다. 사진에도 담아보고, 비디오도 찍어보고, 일기로도 적어보고, 마음속에 소중히 담아보기도 하지만, 너무나 빨리 달려만 가는 시간이 안타깝다. 요즘은 평균수명이 늘어서 80세까지 산다고 가정하고 계산을 해보면 평생에 가질 수 있는 주말의 숫자가 4160이다. 그 중에 이미 1800여 번을 사용하고 이제 약 2300여 번이 남았다. 아쉽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아쉬움은 더욱 커가겠지 하고 생각해 본다.


삶과 그 속의 만남과 경험이 소중한 만큼, 그리고 인생의 끝과 그로 인한 헤어짐이 아쉬운 만큼, 부활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커짐을 느낀다. 얼마 전 읽은 C. S. Lewis의 글이 생각난다. 죽음에 대한 철저한 경험과 인식이 없이는 부활의 감격과 감사를 느낄 수 없다고 했던 말.


2000년 전, 목숨을 걸고, 가족과 온 재산을 버리고 따르던 예수가 죽은 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난 사실을 본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부활의 사건은 현실이었다. 귀신들렸던 막달라 마리아, 그녀에게 부활한 예수는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오직 단 하나뿐인 희망이었다. 자신의 모든 credential을 버리고 예수를 전하기 위해서 평생을 투자한 바울에게, 예수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 오직 단 하나뿐인 유일한 삶의 목표였다. 자신들의 삶 가운데서 기대하고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마저 위협받으며 신앙생활을 하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사도 요한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였다. 그들의 눈앞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 그분의 부활은 그들에게 있어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 부활의 현실이 그들의 삶을 붙잡았다. 그 부활의 현실이 그들을 흥분케 했다. 그 부활의 현실이 이 땅 위에서의 기쁨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게 했다. 그 부활의 소망만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유일하고 가치 있는 투자의 대상이었다.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활을 해왔으나, 부활은 나에게서 관념적인 대상에 불과했다. 삶의 소중함을 깨닫지도 못했고, 죽음의 현실성을 피부로 느끼지도 못했으며, 그로 인한 나의 한계성을 철저히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부활의 약속은 그저 하나의 신학적인 관념에 불과했다. 부활은 나의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부활은 그저 부활절 설교와 성경공부의 주제에 불과했다. 천국과 영생의 소망보다는, 이 땅에서의 죄 사함과 축복 받고 능력 있는 삶의 약속이 나에게는 더 매력적인 약속으로 들렸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이 부활절뿐만 아니라 365일의 나의 생활 속에서 소망이 되고, 그 부활이 단지 신학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신학적인 관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구체적인 삶에 활력과 의미를 주는 현실이 되었다. 삶의 기쁨과 고통, 아름다움과 잊어버리고 싶은 모든 구석들이 부활이라고 하는 렌즈를 통해서 바라볼 때, 나의 이 땅위에서의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된다. 붙잡고만 싶었던 것들을 이제는 지나가는 흐름 안에서 아름답게 볼 수 있고, 피하고 싶었던 것들을 담담하게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이전에는 생각 없이 스치던 대상들이 부활의 렌즈를 통해서 볼 때, 새롭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단장을 하고 나에게 다가온다. 이제 어렴풋이 나마, 사도바울이 그토록 알기 원하고 동참하기를 원했던 예수님의 삶과 부활, 고통과 죽음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유학생활, 무척 바쁘다. 힘들고 정신이 없다. 당장 눈앞에 와 있는 시험과 논문, 세미나 발표와 교수와의 만남이 삶의 모든 것인 양 다가오기 쉽다. 내가 현재 하고있는 일이 나의 삶을 사로잡기 쉽다. 그럴 때, 부활의 예수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나보기 바란다. 전쟁의 소문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이 때에 부활절을 맞이하여 그 어느 때보다 주님이 주시는 소망의 메시지가 기다려진다.

[유영진] 성공한 소수 (小數)

유학생의 삶


성공한 소수 (小數)



예 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여 가니라. (막 10:17-22)


마 가는 자신이 적은 복음서 10장에 한 사람과 예수님의 만남에 관하여 적고 있다. 예수님께 찿아온 이 사람을 다른 복음서에는 부자 청년 관원이라고 했다. 그는 젊고, 관원이고, 부자이며, 종교적으로 열심이었으며, 또한 예수님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찾아왔다. 그 당시의 기준으로 그는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으로 생각이 되어진다. 그러나, 그의 배경을 조금 생각해 보면, 그는 모순 투성이의 인간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젊어서 부자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관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관원은 많은 돈을 벌기가 힘들다. 그러나 그는 젊어서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모든 율법을 지켰다고 한다. 당시의 율법을 지키던 많은 사람들은 로마에 대하여 저항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관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예수님께 찾아와서 영생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그당시, 율법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별로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달려와서 자신의 질문을 던지는데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자관원의 삶의 모습을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의 삶속의 모순은 바로 성공을 지향하는 그의 삶의 결과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공”을 목표로 살았던 사람이다. 세상 속에서는 로마의 관원으로, 그 동네에서는 부자청년으로, 회당에서는 율법을 잘 지키는 청년으로 살았다. 그러한 그에게 예수님은 또 다른 하나의 “성공”의 대상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예수님께도 인정을 받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물어본 영생에 관한 질문은 그가 진정으로 영생에 대하여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기 보다는 어쩌면 예수님께 칭찬을 받기위한 잘 준비된 질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청년의 모습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많은 크리스찬 유학생들의 모습을 또한 본다. 지극히 성공지향적이다. 어느 곳에서나 인정받기를 원하고 성공하기를 원하는 모습이다. 그곳이 학교이든 교회이든, 그곳에서 두각을 나타내서 인정받기를 원하는 그런 모습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나의 주변에 힘있는 자를 위해서 살았다. 세상적인 성공의 기준은 바로 나보다 힘있는 자들에게 인정받는 것이다. 내 주변에 있는 로마정부, 율법주의자, 사업가,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까지, 그들은 나에게 있어서 단지 내가 “인정받아야할 대상”이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교수님께 인정받아야 하고,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인정받아야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가장 인기있는 친구의 가장 친한 둘도 없는 단짝이 되어야 하고, 집에서는 부모님들께 가장 훌륭한 아들이 되어야 하고, 교회에서는 목사님 앞에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 모습이다. 그러다 보니, 나의 삶은 나보다 힘이 센 사람들을 위한 삶이 되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주변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한 삶이다. 나의 삶의 내면은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 마치 부자청년에게 로마정부와 율법주의자와 예수님이 각각 상충된 삶의 모습을 요구했었던 것 처럼, 나의 삶속에서 모순된 삶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성공에 대한 욕망이 그와 같은 모순을 덮어놓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그 렇게 성공한 젊은 청년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네게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성공을 추구하고, 강한 자들을 만족시키기만을 위하여 살아온 부자 청년 관원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은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것이다.


성 공한 자들의 주변에는 반드시 실패한 자들이 있기에 마련이다. 이세상의 법은 한사람의 최후 승리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패배자가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세상의 법은 그와 같은 생존경쟁을 통한 약육강식의 법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강한자는 약한자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부자 청년에게 혁명적인 권유를 하신다. 예수님은 그에게 자신의 성공을 가지고 그의 성공을 위해서 희생한 이웃을 섬기라는 것이다. 그때 그의 성공은 아름다운 성공의 모습을 가지게 된다.


유 학생들은 성공하려고 온 자들이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이미 성공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학의 소원은 품으나, 어떤 이유에서든, 유학을 오지 못하고 그 꿈을 접는 사람들이 많다. 일단 유학에 성공하면, 그 유학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성공이다. 우리과에서는 박사과정 신입생들을 매년 50%이상 걸러내곤 한다. 2년차로 진급하는 것이 성공이다. 그러나 그 성공의 뒤에는 실패한 자들의 아픔이 깔려있기에 마련이다. 학위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면 직장을 구해야 한다. 우리분야에서 교수 한명을 뽑는데 150명 정도의 지원자가 들어오는 것은 일반적인 예이다. 한 사람이 교수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149명의 실패자가 생겨야 한다. 학회지에 논문을 보내면 평균 선택율이 5%를 못미친다. 5편의 성공한 논문을 위해서 95편의 논문이 rejection의 통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치열한 경쟁의 환경속에서 살다보면,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마치 나의 삶의 DNA 속에 박혀있는 것 같은 느끼게 된다.


그 런 나에게 주님이 주신 말씀이 바로, 내가 그 부자 관원이라는 것이다. 너의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네 주변에 너의 성공을 위해서 희생한 자들을 섬기라는 것이 주님의 음성이다. 참으로 힘든 적이 많다. 그러나 주님이 그 부자관원을 보실적에 마음속에 사랑이 가득하셨다는 말씀이 힘이 된다. 그 말씀에 의지하여 나의 눈을 내가 자연적으로 보지 않는 곳으로 돌리는 훈련을 한다.


교 수라고 하는 직업은 참으로 묘한 자리이다. 주변의 모든 사람, 비서, 학생, 심지어 가족들까지, 자신이 하는 연구와 강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자리이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러한 기대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게 만든다. 내가 6년전 Case 대학에 가서, 처음으로 학회를 가려고 준비하는 때였다. 비행기표를 끊어야 하는데 비서가 물어본다. “Do you have any preference?” 그래서 아무자리나 괜챦다고 말했다. 그 비서가 웃으면서 하는말이, “Youngjin, you have a long way to go to become a faculty member. As a faculty member, you should say, ‘I will never fly unless I get seat number 4C on that flight.'” 물론 그때는 웃고 넘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 마음속에 그와 같은 대접을 기대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교수들의 삶은 deadline으로 이루어져 있다. Deadline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교수들 같다. 그래서 연구제안서나 강의안 제출 마감일이 되면 학교가 마치 동물원 같다. 마감 시간 직전까지 자신의 제안서를 붙잡고 이렇게 저렇게 고치다가, 마감 직전에 비서나 학생들이 기타 다른 모든 필요한 자료를 완벽하게 준비해 놨다가, 제출시간에 맞추어서 제출하기를 원한다. 모든 주변의 사람들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삶, 그것이 교수들의 삶의 모습이다.


학 교에서 하는 일이 많아지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받을수록, 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난다. 그럴수록 대접받기를 바라는 나의 욕망은 더욱 커져 간다. 그들이 나를 위해서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착오가 생기면 짜증이나고 분노가 생긴다. 그들이 나의 일을 잘 도와줬을 때에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넘어가게 된다. 내가 늦어서 일이 지연되는 것은 아무 일없는 것처럼 지나가게 된다. 나의 주변의 사람들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도구이상의 그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 때, 주님은 나에게 젊은 부자 관원을 기억나게 하신다. 너의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섬기기 위해서 나를 그곳으로 보내셨음을 주님은 다시 한번 기억나게 하신다.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내가 섬겨야 할 사람들임을 주님이 생각게 해 주신다. 그들은 더 이상 나를 위한 도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해야 할 나의 섬김의 대상임을 다시한번 기억케 해 주신다. 문득, 나의 비서의 책상에 붙어있는 그의 딸이 그린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한번도 보이지 않던 그림이 오늘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녀가 첫딸을 백혈병으로 잃은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다. 그 그림은 최근 자주 아픈 그의 둘째딸이 그린 토끼 가족 4마리의 그림이다. 그 그림을 이야기 하면서 그 딸의 건강을 물어보았다. 오랜만에 그녀와 이런 저런 말을 나누면서 웃어보았다.


학 교에서 있다가 저녁에 집에 도착하면 몹시 피곤하다. 저녁강의를 마치고 집에 간 날은 특히 더 피곤하다. 밤 늦도록 하루종일 아이들과 씨름하다가 저녁을 준비해놓고 졸린 눈으로 나를 기다리던 아내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한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얼른 허기를 채우고, TV를 켜고 CNN 뉴스를 보면서 강의하느라고 긴장해 있는 나의 태옆을 풀기를 원한다. 그때 주님이 다시 한번 나에게 부자 청년관원을 생각나게 하신다. 나는 나의 가족을 섬기기 위해서 이곳에 있음을 기억하게 하신다. 대부분의 유학생 배우자와 마찬가지로, 나의 아내는 나를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하였다. 너무나 많은 순간, 단순히 내가 남편이라는 이유하나로 나를 위한 아내의 희생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공부하는 남편 뒷바라지 해야지라고… 주님은 나에게 나의 아내는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주신다. 오히려, 내가 아내를 섬기기 위해서 존재함을 생각하게 하신다.


우 리집에는 두아들이 있다. 아내가 학교에서 첼로 레슨을 하는 목요일과 토요일은 이 두아이들이 내차지이다. 목요일은 저녁 6시경에 학교에 가서 after school care에서 두녀석을 pick-up해서 집에 온다. 집에 오면, 나도 배가 고프고 그 녀석들도 배가 고프고, 모두다 cranky해져 있기에 마련이다.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녀석들은 가방과 겉옷을 사방으로 집어 던지면서 저희 방으로 뛰어들어간다. 집에서 오후내 혼자있던 강아지 Freddie는 정신없이 날뛰면서 밖으로 자기를 데리고 나가서 오줌을 뉘여달라고 성화를 한다. 둘째놈은 배가 고파서 뛰어내려와 냉장고를 열고는 먹을 것을 찾는다. 학교에서 피곤한 미팅이라도 있던 날, 신경질부터 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문득 주님이 나는 그들을 섬기기 위해서 이곳에 있다는 것을 기억나게 해 주신다. 자녀들이 더 이상 집안에 TV 리모콘이 보이지 않을 때, 리모콘 대신 내가 원하는 채녈로 바꿔주는 “인간 리모콘”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나눠야 할 섬김의 대상임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자연스럽게 오는 생각은 아니다. 내속의 싸움이 있다. “나도 피곤한데…” 밥먹으로 식탁에 앉은 두 녁석에게 “Tonight, I am your servant. What can I do for you?”라고 물었다. 생각없는 둘째 동현이는 “Water, please!”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러자 마음 좋은 큰아들 광현이가 “I will do it.”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항상 이렇게 섬기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나의 생각에 떠오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그날은 평안한 저녁이었다.


섬 기는 삶. 나누는 삶. 나에게는 참으로 힘든 짐이 된다. 나 때문에 희생하고 나를 돕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훈련, 이것이 나에게는 자연스럽게 오지를 않는다. 나는 평생 나의 주변의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살아왔고 그렇게 훈련받아왔다. 내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오는 훈련을 하였다. 그런 나에게, 남을 돌아보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오는 마음이 아니다. 나는 그래서 자연스럽게 주변의 사람을 돕고 그들과 함께 아퍼하고, 그들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무척 부럽다. 그래서, 끊임없이 주님의 깨우치심이 필요하다. 성령님이 주시는 민감한 마음이 필요하다. 나의 성공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웃사람보다,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그사람들을 먼저 바라보는 훈련이 나에게는 필요하다. 부자관원처럼, 근심하고 떠나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능히 하실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위로가 된다.


주 변의 많은 유학생들에게서 나와 같은 모습들을 발견한다. 많은 부자관원들을 본다. 아니면 부자관원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을 본다. 그들에게 질문해 보고 싶다. 왜 성공하려고 하는가? 성공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그 성공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스스로를 부인하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는 훈련을 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인간의 역사의 발전은 소수의 천재들의 탁월한 능력과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능으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그 소수의 리더들이 자신을 죽이는 헌신과 섬김으로 주변을 사람들을 보다 낳게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성경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소수의 희생적 리더들을 찾고 계시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수많은 사사와 선지자, 그리고 왕들의 순교적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사회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보이시고, 그 계획을 이루어나가셨음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이 이와 같은 소수의 헌신적 섬김으로 역사를 이끌어가는 모습을 잘보여주고 있다.


한 민족, 한 국가, 한 사회, 한 교회, 그리고 한 가정을 발전시키고 변화시키는데에는 많은 사람들의 변화와 희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적은 수의 자들, 자신이 받은 복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는자, 자신의 성공을 사명으로 발견한 적은 수의 리더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계획을 이끌어나가고 계신다. 가지지 못한 자들이 가진 자들을 강제로 끌어내려서 평등을 이루는 혁명적인 방법이 아니라, 스스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자들이 그것을 사명으로 삼고, 주변의 자들을 섬길 때, 진정한 사회의 변화가 일어나리라고 믿는다. 오늘 한국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바로 성공한 소수이다. 자신의 성공으로 자신의 주변을 섬기는 소수가 필요하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그리고 국가에서, 부자관원을 찾고 계신 예수님의 찾음에 대답하고 나오는 자들이 필요한 때이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는 성공한 소수를 소망해 본다.

[유영진] 탁월함, 게으름, 그리고 신앙

유학생의 삶


탁월함, 게으름, 그리고 신앙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 없으므로 그들로 왕 앞에 모시게 하고,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 보다 십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단 1:19-20)


우리들의 인생의 가치와 질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자기 스스로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의해서 결정이 되어진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성도”라고 부른다. ‘구별되어진 자들’이라는 뜻이다. 성도들은 또한 “청지기”라고 불리운다. ‘무엇인가를 위탁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우리가 또한 “사도”로서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한다. 사도라함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대사”(Ambassdors for Christ)로서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묘사하는 많은 단어들 가운데 흐르는 공통점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뚜렷한 삶의 방향과 목적을 위탁받고, 그것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대표하여 세상 가운데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청지기로서의 삶은 타국에서 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는 내용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한 성도로서 타국으로 보내심을 받은 유학생의 삶의 가치와 질을 생각해 봐야 한다. 막연하게 아무런 생각이 없는 유학생으로의 삶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로서 삶이다. 이유없는 고국을 향한 향수와 이질적인 문화속에서의 갈등으로 인한 고독 속에 있는 삶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보내심”을 받은 그 학교, 그 지역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도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다니엘은 타의에 의해서 당시 최고의 국력을 자랑하는 바벨론에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간 인물이다. 다니엘서 전체에서 보여지는 그의 삶의 모습은 “보내심”을 받은 자로의 삶 그 자체이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나라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도교수(1장에 나오는 환관장) 밑에서 지도를 받으며 그의 유학의 생활을 보냈다. 그러한 그의 삶의 가치와 질은 “탁월함”이라는 단어로 요약이 되어진다. 성경은 그의 지혜와 총명이 다른 박수와 술객보다 십배가 더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섬겼던 느부갓네살왕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악한 왕이였던 것을 생각해 볼 때, 다니엘서 1장에 기록하고 있는 그의 탁월함은 어떤 종교적인 분야가 아님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아마도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다방면에 왕에게 남달리 탁월한 조언을 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의 탁월함은 “세상”과 “신앙”의 경계의 범주에 있지 않았다. 그의 탁월함은 그와 같은 이분론적인 세계관을 초월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탁월함이였다. 그의 “세상적”인 탁월함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식의 “신앙”의 결과도 아니요, 더더군다나 패배적인 타협의 결과도 아니다. 그의 탁월함은 바로 그의 신앙 그 자체였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탁월함은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자신에게 부여받은 모든 것을 100% 바쳐서 사는 삶을 말한다. 세상은 탁월함의 “결과”에 주목을 한다. 그러나, 성경은 탁월한 삶의 “과정”에 그 초점을 맞춘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적인 관점에서의 탁월함의 반대는 게으름이다. 게으른 사람은 결코 탁월한 삶을 살 수 없다. 게으른 사람은 “악한 사람”이다. 달란트 비유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본래 받은 달란트를 100% 활용한 두 종을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부르신다. 그 두 종은 바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탁월함의 모델이다. 그들은 탁월한 경영으로 배가 하는 성공적인 투자를 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칭찬의 초점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이 받은 달란트의 원래 양과 관계없이 그것을 100% 총 사용하는 삶인 것이다.


보내심을 받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탁월함을 요구하신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재능과 시간을 100% 활용하는 삶인 것이다. 그와 같은 탁월한 삶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하여, 내가 보내어진 그 삶의 터전에까지 적용이 되어진다. 다니엘의 삶은 바로 하나님과의 철저한 관계에서 시작하여, 그가 왜 그곳으로 보내심을 받았는지에 대한 깨닫음으로 연결되어지고, 그것이 바로 그가 보내심을 받은 삶의 영역에서의 탁월함으로 연장되어지는 모습을 보여 준다. 보내시는 자와의 관계가 없이는 결코 탁월한 삶을 살 수가 없다. 그리고 내가 왜 보내심을 받았는지를 깨닫지 않고는 결코 탁월한 삶을 살 수가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탁월함은 지극히 관계 중심적이다.


또한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탁월함은 결코 이원론적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내심을 받은 그곳에서 탁월하도록 기대되어지기 때문이다. 보내심을 받은 삶을 사는 유학생에게 있어서는 신앙과 학업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내가 진정으로 학문을 하도록 나의 전문영역에 보내심을 받았다면, 나는 그곳에서 탁월하여야 한다. 그것은 나의 학문에 100% 나의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그것의 결과는 주님이 책임지실 일이다.


오늘날 유학생들의 문화가운데 탁월함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다. 특별히 신앙이 좋다는 유학생들 가운데 탁월한 유학생이 부족함이 안타깝다. 많은 신앙이 좋은 유학생들이 자신의 학문의 길을 “대충”한다. 학문의 길이 마치 진정한 주님의 일을 위한 “필요악”인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실제로는 주의 종의 길을 가고 싶으나, “부르심”(calling)을 받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학문의 길을 가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한 주님의 일을 위해서 교회 안에서 제자 양육과 기도에 전념을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학의 학문의 길은 보다 많은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그렇지만 매우 불편한, 중간 단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음악을 하는 유학생들 가운데서도 이와 같은 갈등을 겪는 경우를 자주 봤다. 신앙에 대하여는 아무런 생각없이 유학을 왔는데, 막상 은혜를 받고 보니 자신의 달란트를 가지고 주님을 “찬양하는 데에만”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교수님이 주는 연습곡은 재미가 없고 지겹기만 하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은 교회에서 찬송가나 복음 성가를 연주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전문 목회자, 선교자로 혹은 전문 CCM 사역자로 부르신 형제, 자매가 그와 같은 고민을 가질 수 있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이른바 “평신도”로 평생을 살아갈 형제, 자매들이 이와 같은 갈등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갈등한다. “필요악”으로서의 직장과 “신앙”의 사이에서 고민한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유학생활에 성과가 더디게 된다. 그러다 보면 유학생활 속에서의 공부는 점점 더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탁월함의 원리는 이와 같은 갈등에 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당신이 진정으로 전문음악가로, 미술가로, 학자로, 경영인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그 일에 최선을 다하라. 그것이 탁월한 삶을 사는 신앙인의 모습이다. 따라서 탁월함과 소명의 발견은 결코 분리되어질 수 없다. 소명의 삶 가운데 있는 탁월함에는 더 이상 “신앙”과 “세상”의 갈등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평신도”가 될 수 없다. 모두가 자신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소명을 발견치 못한 이는 결코 탁월한 삶을 살 수가 없다.


게으름은 소명 의식의 결핍에서 나온다. 게으른 유학생들을 많이 봤다. 영적으로 게으르고, 생각이 게으르고, 삶이 게으르다. 그들은 자신이 왜 유학을 왔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살고 있다. 공부해야 하는 유학생들에게 생각의 게으름이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아이디어를 철저히 분석하고 준비하고 발전시키는 생각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생각이 게으르다. 치밀하게 생각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를 아직 느끼지 못해서 그렇다. 소명의 결핍은 게으름을 가져오고, 게으름은 탁월함의 반대임을 명심하자. 나는 보내심의 소명의식이 없는 유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하고 싶다. 결코 탁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단지 유학을 왔었다는 이유 하나로 그런 이들이 지도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탁월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 이들이 지도자가 되어 있는 것이 문제이다. 그와 같은 지도자들은 결코 탁월한 자들을 참고 용납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탁월한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 가운데 이와 같이 탁월한 지도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영적인 전쟁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한다. 금요일 철야기도에서 우리는 영적인 전쟁을 위한 중보기도를 많이 한다. 그러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삶은 그들의 삶 전체의 영역이 영적인 전쟁이다. 결코 그들의 영적 전쟁은 금요 철야기도에서 끝날 수가 없다. 연구실에서 컴퓨터를 켜고 연구 논문을 쓰고 제안서를 쓰는 과정이 치열한 영적인 전쟁의 과정이다. 그래서 게으를 수가 없다. 마귀는 우리가 대충 하기를 원한다. 마귀는 우리가 주어진 일을 하기 보다는 인터넷으로 한국 신문을 보면서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기를 원한다. 만일 C. S. Lewis가 그의 소설 작품을 대충 썼다면 오늘날의 C. S. Lewis가 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오늘날 모든 학문과 예술의 분야에 탁월한 기독교인들이 나오기를 바란다. 유학생들 가운데서 나오기를 바란다.


미국 CBS 방송에서 인기를 끌었던 “Touched by An Angel”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수년 동안 공전의 인기를 끌면서 많은 광고수익을 가져다 준 프로그램이었다. 이 작품의 제작진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든 작품 속에는 면면히 흐르는 성경적인 진리의 흐름이 있다. 매회 작품을 준비할 때 제작진이 기도로 준비했다고 한다. 그것을 아는 방송국에서는 여러번 그 프로그램을 없애려고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그 작품의 탁월함 때문이다. 악한 느부가넷살왕이 하나님을 섬기는 다니엘이 특별히 좋아서 옆에 데리고 있지는 않았었을 것이다. 그보다 나은 사람이 있었다면 언제라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의 탁월함은 다른 사람에 비해 십배가 능가했다고 한다. 방송국 측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성실한 삶은 탁월함을 가져온다. 그러한 거룩한 탁월함에는 세상이 범할 수 없는 힘이 있다. 나는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기독교 연구자들이 그들의 탁월함으로 무기로 하여 무신론과 진화론 숭상하는 자들이 운영하는 NIH나 NSF에서 연구프로젝트를 따오게 되길 기도한다. 창조과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분과를 만드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보내심을 받은 그곳에서 탁월함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우리 유학생들 가운데서 나오기를 소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진정한 영적인 전쟁은 우리들의 연구실에 치열하게 치뤄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 과학을 하는 유학생들로부터 무신론적인 관점에 바탕을 둔 지도교수와 학문의 조류가운데서 고민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보내심을 입은 자로서의 탁월함이 그 고민에 대한 대답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나는 장래의 사회 지도자로서의 삶을 준비하는 유학생들이 그들이 속한 지역교회에서 탁월함의 운동을 일으키기를 소원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는 “대충”(mediocrity)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예배도, 음악도, 교육도 대충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할 일은 많은데 자원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탁월하지 못할 바에 차라리 안 하는 용단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오히려 소수의 적은 프로그램에 최선의 준비를 하여 탁월함을 보여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많은 교회의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음악예배에 꼭 들어가는 것이 있다. 교회의 제직들 자녀들의 “누가 누가 잘하나” 프로그램이다. 물론 귀여운 모습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곳에는 탁월함이 없다. 그 누구도 그와 같은 수준의 프로그램을 세상의 권력자 앞에 올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 속에서는 이른바 “은혜”라는 이름으로 이것이 용납되어진다. 신앙서적 혹은 신앙영화를 보게 되면 그 질(quality)의 조악함에 실망을 하게 된다. 할리우드에서 만든 만화영화와 우리 아이들이 집에서 보는 크리스천 애니메이션을 보게 되면 그 수준의 차이가 많이 남을 볼 수 있다.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웹사이트와 그곳에 실리는 글들의 수준은 어떤 기업체의 웹사이트에서 공식적으로 용납하지 않을 수준인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탁월함을 추구하시는 하나님이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은 대충에 만족하지 않으셨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탁월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빌1:10).


교회 안에서 탁월함을 추구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것이 결코 비싼 것, 예쁜 것, 좋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교회안에 있을 때 취해야 하는 당연한 자세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그 시대의 학문, 문화, 과학을 주도해 왔다. 보내심을 입은 자들이 소명감을 가지고 살 때 일어나는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그 영향력을 상실했다. 교회의 문화 가운데 탁월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탁월함의 상실은 바로 우리의 자존감과 소명감의 상실에서 비롯한다. 나를 보내심을 받은 자로 보고 사는 자, 그래서 그 소명감 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사는 자의 삶 속에는 언제나 거룩한 탁월함이 있다. 그리고 그 탁월함 속에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유학생들의 문화 가운데 이와 같은 탁월함을 추구하고, 게으름을 배격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를 소원해 본다.


 

[유영진] 당신은 누구입니까

유학생의 삶


당신은 누구입니까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로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렘: 29:4-8, 10)


유학생의 삶을 흔히들 “광야”의 삶으로 표현한다. 아마도 힘들고 외로워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광야는 두려운 곳이다. 불확실하다. 위험하다. 나를 보호하고 있는 모든 보호의 장벽이 제거되어 있는 것 같은 곳이다. 내가 편안해 하고, 내가 익숙해 하던 모든 것들이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바로 광야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한세대가 통채로 죽임을 당한 곳이 바로 광야이다. 광야는 물이 없고, 음식이 없으며, 위험한 야생 짐승들이 나의 생명을 노리는 곳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광야는 또한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가깝게 느끼는 곳이 광야이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이 공급하는 만나와 생수를 마시며, 그분의 인도하심이 없이 생존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곳이 바로 광야이다. 광야는 그분이 나의 삶에 한 가운데 와 계신 곳이다. 모세가, 다윗이, 바울이 광야를 통해 그들의 삶을 준비했다. 예수님이 광야를 통해서 공생애를 준비하셨다. 그래서 광야는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그야말로 삶의 “위기”이다.


유학의 광야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유학생들이 이 유학의 광야에서 죽어가고, 아니면 겨우 겨우 삶을 연명하며 그것으로 자족해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고민한다. 열등감과 우월감의 미묘한 교차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기 위해 방황하며 갈등한다. 그러한 그들로 인하여 그들의 배우자와 가족이 고통하며, 함께 두려워 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유학의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살아계심을 체험한다.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발견하며, 고민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함을 듣는다. 지도교수의 질책으로 나의 자존심이 어그러질 때, “내가 너를 지었노라”는 약속을 발견하며, 나의 장점으로 나보다 못한 다른 이들을 섬기는 삶을 살아간다.


광야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광야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다. 내가 다니는 학교가 얼마나 좋은 학교인가가 문제가 아니며, 나의 지도교수가 문제가 아니다. 내가 현재 소속해 있는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내가 지금 그곳에서 무엇을, 왜, 그리고 어떻게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앞으로 이글을 통하여, 유학생으로 21세기의 미국에서 (아니면 그외의 다른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삶의 현실의 광야 속에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을 만나는 삶을 사느냐에 관하여 함께 생각하기를 원한다. “유학”과 “신앙”이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나에게 있어서는 “유학=신앙”이라는 것을 보기를 원한다. 유학의 삶에 대한 건전하고 건강한 성경적인 시각을 함께 나누고 싶다. 그래서 보다 많은 유학생들이 유학의 광야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기를 소원한다.


우리들의 삶의 방향과 행동의 내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나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나에 대한 자아상과 identity이다.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로 아무리 많은 부를 가지고 있어도 그 부를 누릴 주를 모르고 가난한 삶을 살게 된다. 스스로 노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황과 관계없이 노예의 모습을 가지고 그 삶을 살게 된다. 창세기 1장 28절에 하나님은 인간을 “이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부르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받은 우리들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며, 그분이 우리들에게 부여한 본연의 임무를 담당하며 살아가야할 책임과 권리가 있다. 그렇다면 과연, 외국땅에 나와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들은 어떤 identity를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권리와 책임을 누리며 살아야 할 것인가?


위의 본몬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70년 바벨론으로 “종살이”를 하러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정착하고 자리잡고, 평생 살 것처럼 살기를 원하신다. 집을 짓고, 직장을 구하고, 아들 낳고 딸 낳고 살으라고 명하신다. 더 나아가서, 그 땅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신다. 그 땅은 무슨 땅인가? 원수의 땅 바벨론이다. 그런데, 그 땅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10절에는 내가 너희를 70년 후에는 다시 귀환시키리라고 약속을 하신다.


이 말씀은 처음 얼핏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든 명령이다. 첫째, 7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떠날 그 땅에서 왜 정착을 하라는 것인가? 하나님의 70년의 기한은 상징적인 숫자도 아니고, 조건적인 약속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확한 그리고 일방적인 “선한 약속”의 선포이다. 이와 같은 귀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곳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그리고 주인처럼 살기를 원하신다. 인간적으로 생각을 하면, “바벨론에서는 70년이라는 한정적인 시간을 살꺼니까, 그곳에서 대충살아라”라고 충고할 것 같으다. 혹은 “그곳은 너희들이 영원히 살곳이 아니니까 정을 주지 말아라” 하고 말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충격적이다. 우리의 기대를 벗어난다. 그곳에서 터를 잡고 주인으로 살 것을 요구하신다. 그런데, 거기에 한 술 더해서, 이제는 “그땅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요구하신다. 단순히 그 땅에서 정착해서 그 나라가 제공하는 편의만을 누릴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리를 종으로 부려먹는 그 나라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5년 내지 6년의 유학생활이 지나면,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계획하고 소원하며 공부를 한다. 물론 그 자체가 잘못 된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것이 어쩌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약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그곳에서 사는 기간이 얼마이던 간에 그곳에서 영원히 살 주인처럼 유학생활을 하기를 요구하신다. 더 나아가서, 내가 공부하고 있는 그 나라, 그 도시, 그 학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요구하신다.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으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지 묻고 싶다. 주인으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종으로 살고 있는가? 내가 노예같은 유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나를 노예처럼 부리는 나의 지도교수의 잘못이 아니라, 나 스스로 “종”으로 아니면 “손님”으로 생각하고 있는 나의 생각의 잘못이다. 하나님은 내가 살고 있는 그 땅에서 주인으로 그리고 정복자로 살기를 원하신다. 아무리 우리가 그곳에 거주하는 기간이 짧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그곳에서 “복의 근원”으로 영향력을 끼치면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그 나라의 평안과 영적인 부흥을 위해서 기도해 보았는가? 그것은 어떤 특별한 사명을 받은 소수의 이민자들만이 감당할 부분이 아니라, 그땅을 잠시 지나가는 유학생들에게도 똑같이 요구되어지는 부분이다. 물론 두고 온 한국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그 땅을 위해서도 기도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땅을 알아야 하고, 그 땅을 사랑해야 하며, 그 땅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 땅의 주인이 되는 것은 그 땅에서 태어나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나의 선택이 나의 identity를 결정하고, 그것이 나의 삶의 모습과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조국을 버리고, 내가 살고 있는 땅만을 사랑하는 매국노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라는 말이다. 바벨론에 종으로 잡혀간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은 그 땅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하신다. 당신은 유학생으로 이땅에 오지 않았는가? 당신의 선택으로 이땅에 온 당신은 타의로 끌려온 종의 신세보다 훨씬 낳지 않은가? 만일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면, 미국을 위해서 기도하라. 호주에 있다면, 호주의 영적부흥과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라. 그 땅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 땅을 사랑하게 되고, 바로 그 때, 그 땅의 주인으로 정복자로 삶을 살게 된다.


내가 살고 있는 주와 도시를 위해서 기도했는가 묻고 싶다. 그곳의 주지사와 상원의원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보았는가?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영적,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놓고 기도해 보았는가? 내 주변에 살고 있는 이웃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 그들을 나의 “이웃”으로 생각하고 기도해 보았는가?


내가 공부하고 있는 학교와 학과를 위해서 기도해 보았는가? 그 곳의 총장과 학장에게 지헤를 달라고 기도해 보았는가? 학교의 영적인 부흥을 위해서 기도해 보았는가? 그 학교의 영적인 역사와 현재의 영적인 기상도를 그려보았는가? 그 곳에 와있는 다른 유학생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 보았는가? 아니면,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만 받고, 어떻게 하든 최소한으로 일하면서, 스스로 “이곳은 어차피 남의 나라, 남의 학교니까”라고 우리들의 책임을 피하고 있는가?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그곳의 “손님”으로 나가고 있는가? 많은 유학생들이 자신의 “본교회”는 한국에 있는 아무개 장로교회, 아무개 감리교회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내가 지금 나가고 있는 그 교회가 나의 본교회라고 말하신다.


너무나 많은 유학생들이 손님으로 종으로 유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본다. 스스로 정해놓은 시간표와 계획에 따라, 2년후 혹은 5년후 조국에 돌아갈 것을 기정사실화 할 뿐만 아니라, 그 것이 자신의 현재의 삶의 모습을 제한하는 모습을 많이 목격했다. 한국의 경제, 한국의 정치, 한국의 교회들, 한국의 직장들이 그들의 생각과 삶의 대부분을 지배한다. 물론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들은 유학생활 속에서 주인으로 그리고 정복자로의 삶을 살지 못한다. 그래서,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예측치 못한 풍성한 은혜를 맛보지 못한다.


이와 같은 자세는 유학생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 큰 영향력을 준다. 수많은 유학생들이 엄청난 시간을 인터넷을 통해서 한국소식을 찾아보는데 소비하는 모습을 봤다. 자신이 살고 있는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아니면 세계의 정치, 경제, 과학, 기술의 동향에 민감하기 보다는 한국의 정치와 교계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례한 소식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삶의 모습이 지속되면, 이땅에서 정복자의 삶은 커녕 그 사회에 불필요한 존재로 퇴보하게 된다. 지난 여름, 미국의 정치, 사회, 과학을 흔든 토론의 주제는 “Stem Cell”연구였다. 많은 미국 교회들도 이 토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를 했다. 우연한 기회에 생명과학과 관련된 분야에 공부를 하고 있는 형제가 있는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꺼냈다. 놀라운 것은, 그 형제는 그것이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올 봄에는 또한 회계학을 공부하고 있는 형제가 Enron 사태의 내막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모르고 있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몹시도 안타까운 모습이다.


또한, 미국에 유학을 온 많은 유학생들의 관심은 절대적으로 한국에 있는 직장에 있다. 97년 처음 Case Western 대학에 교수로 갔을 때 일이다. 이곳에 있는 MBA학생들 중에 한국에 돌아갈 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이곳에서의 공부보다는 골프와 교제에 중점을 두고, 한국의 직장에 “길을 잘 닦아놓는 데”에 모든 총력을 기울인 학생들이 있다. 그러던 중, IMF사태가 터지고, 갑자기 한국으로 귀국할 길이 막혔다. 그들 중에 몇 학생이 내가 전공하고 있는 경영정보시스템이 미국에서 취직이 잘 된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적이 있다. 불행하게도 내가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길은 거의 없었다. 한국 직장에 모든 전력을 기울인 터라, 이곳 학교에서 제공하는 여러 가지 취업의 기회를 대부분 놓쳤을 뿐만아니라, 이곳에서의 학업을 게을리해서 언어의 장애로 그들을 고용할 회사는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현실적인 눈으로 보아도 더 우월한 계획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한국의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생각해 보자. 2년 석사과정 내내 한국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느라고 미국의 사회, 경제, 언어, 역사를 전혀 공부하지 못한 후보자와, 미국에 평생 살 것처럼 전력을 다해서 미국을 공부하여 미국의 대기업들이 탐내는 또다른 후보자 사이에서, 과연 어떤 후보자를 한국의 대기업이 선호할 것인가? 그들이 만일 미국에서 경영학 석사를 한 후보자를 고용한다면, 그것은 차후에 미국의 기업들과의 관계에서, 자신들 한국 기업을 대표해서 미국회사를 주무를 그런 사람을 선호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땅에서 평생살 것처럼, 주인으로 정복자로 그 땅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가 이 세상의 기준으로도 더 매력적인 후보자가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사람이 고국에 돌아가서 고국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실질적인 몇가지 제안을 하고 이글을 마치고자 한다. 첫째, 당신의 살고 있는 그 지역에 대하여 알기위하여 노력하라. 그 지역의 역사를 공부하고, 경제와 사회에 관심을 자지고 그것을 기도제목으로 삼으라. 둘째, 당신이 공부하고 있는 그 나라의 교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라. 만일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면, 미국의 대표적인 교계 지도자들과 교회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라.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그곳을 방문해 보라. 중서부에 있는 많은 유학생들이 한국음식을 먹고 장을 보기위해 시카고를 방문한다. 그러나 그들 중에 미국의 대표적인 교회인 윌로우크릭 교회이나 무디교회를 방문해서 예배를 드린 형제들은 극히 제한된 숫자이다. 셋째,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우라. 스포츠를 통해서, 영화와 연극등을 통해서 그 나라의 흐름을 파악하라. 그 문화의 모임에 참여하라. 박물과, 미술관, 음악회에 가보라.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 가서 쇼핑만을 하고 올 것이 아니라, 그곳 브로드웨이에서 펼쳐지는 문화를 살펴보라. 넷째, 그 나라의 대표적인 신문이나 잡지를 구독하라. 뉴욕타임즈, 워싱톤포스트, 월스트리트 저널등과 같은 신문을 구독하라. 타임즈, 뉴스위크, 비즈니스 위크, 혹은 Fortune 같은 시사지를 읽어보라. 최소한 한국의 인터넷 신문을 보는 대신, 그들 신문들의 인터넷을 읽어보라. 그리고 그들의 시각과 그리고 그들의 탁월한 영어문장력을 익히라. 미국 보수와 자유주의의 논쟁속에서 하나님의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라. 다섯째, 그 나라의 언어를 익히라. 그것을 위해서 투자하라. 고급언어를 배우라. 그러기 위해서 정치 토론 프로그램을 시청하라. 학자들의 토론의 자리에 참여하여 그들의 영어를 익히라. (영어 청취력을 늘리는 방법을 한가지 소개한다. 많은 유학생들이 야구, 농구, 미식축구를 볼 때, TV소리를 줄이고 그림만 보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것을 거꾸로 하라. 스포츠 중계를 라디오로 들으면서, 머리속에 공이 어디 있는지를 그리도록 노력하라.) 마지막으로, 그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라. 정치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 그 도시를 위해서 기도하라. 막연한 기도가 아니라, 구체적인 안건을 놓고 기도하라. 학교를 놓고 기도하라. 그 학교가 나의 모교라는 마음이 드는 것을 느낄 것이다.


C.S. Lewis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시간속에서 두가지 초점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신다. 첫째는 영원이요 둘째는 현재이다.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는 현재 (Now)만이 영원히 존재한다. 유한한 우리들이 그 영원을 맛볼 수 있는 창문은 바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현재이다. 그러나, 미래는 우리들에게 두려움을 가져온다. 미래는 우리들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현재의 삶속에서 구체적으로 충성하게 만든다. 마귀는 우리에게 미래에 집착하고 그로 인해서 고민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영원의 소망가운데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원하신다 (잠 9:7-10).


유학생으로 살고 있는 당신에게 현재는 “유학생의 삶”이다. 그리고 그 삶의 현장은 한국이 아니고 그곳, 당신이 유학하고 있는 그 나라, 그 도시, 그 학교, 그리고 그 교회이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당신이 정복자로, 주인으로, 그리고 복의 근원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와 같은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한다.


[안종혁] 유학생의 경건의 연습과 약속 (1)

유학생의
경건의 연습과 약속 (1)
진리가 왜곡되는 시대

십여년 전 나는 유학생활을 시작한 지 몇 개월만에 내가 변화받아 섬기던 한인
이민교회가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았다. 그 후에도 수 많은 이민교회가 분쟁하고, 쪼개지는 아픔을 보았고, 또 겪었다. 그러고 보니
이민교회의 수 없는 분쟁과 아픔 속에서 내 믿음이 자란 셈이다. 지금도 도시 도시마다 한국 이민교회들은 서로의 문제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들 교회 속에서 섬기는 유학생들도 필연적으로 상처입을 수 밖에 없으며, 이런 현실 속에서 저들의 믿음은
넘어지며 또 성장하고 있다. 열악한 이민교회의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이 어떻게 신앙을 훈련하고
단련할 것인가에 대하여 본 칼럼에서 몇 회에 걸쳐 쓰고자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시골에서 드물게 만났던 크리스천은 시골에서 참 형편없이
인기없는 사람들이었으나, 그들의 신조를 믿는 우직함과 정직성과 신실성에서는 가장 신뢰받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크리스천은
말만 떠벌리는 허풍쟁이요, 기복주의에 탐닉하는 위선주의자로 사회에 비쳐지고 있다니 슬픈 소식이 아닌가? 또 이곳 한인 이민교회는
준비되고 훈련되지 못한 교회의 지도자들 때문에 얼마나 중병을 앓고 있는가? 모두가 예수님의 열 두 제자처럼 혹독하게 훈련받고,
교회의 지도자로 선택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세상의 잘못되고 왜곡된 신학과 변질된 가치기준으로 훈련 안 된 교회의 지도자를
‘서로 협력하여’ 세웠으니, 이 시대에 한국교회와 이민교회가 고통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최근 한국교회의 이러한 문제점을 분석하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나는 본질적인
문제는 첫째로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혼동한 데 있고, 둘째로는 훈련 안 된 사람을 무분별하게 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탓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준엄하신 공의는 동전의 양면같이 존재하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이 두 속성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우리를 사랑하사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사랑의
주님께서 선포하신 공생애의 첫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4:17)”였다. 결국 우리 죄의 회개함 없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리 주님의 사랑이 크다고 하실지라도, 죄의 회개함 없이 죄의 용서는 없다는
준엄함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겠는가? 죄가 있는 곳에는 “회개”의 선포가 있어야지, “사랑”이 선포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많은 현대의 크리스천들은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며, 사랑으로 죄를 감싸라고 요구하고 강요하고 있다. 물론
사랑은 우리의 허다한 허물을 덮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회개함 없이 사랑으로 덮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시대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세의 징조에 대해 이른 것 같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4:3-4)”한 그런 시대가 되었다. 목회자들이 죄있는 곳에 회개를 선포하면 교인들을 억압한다고 반발한다고 하니,
교인들은 자기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목사들만 찾게 되고, 또 양식있는 목자들도 그 풍조를 따라가게 되었다. 주님의 사랑 만을
이야기하면 너무도 감미롭고 달콤하며 듣기에도 좋다. 그래서 현대의 교회들은 세상의 많은 죄와 크리스천의 잘못된 죄악을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다 덮고 말았다. 결국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면 병들기 마련이다. “회개”를 선포해야 할 곳에서 사랑으로 죄를
덮었으니, 종래는 이것이 죄악으로 곪아서 냄새가 나고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어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복음을 우리는 “죄의
회개”의 선포없이 너무도 싼 값에 주어버리지 않았는지 돌이켜 볼 일이다. 죄의 회개를 말하면 모두 싫어하고,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와
이민교회가 병이 나고 있다.

내가 아는 많은 한국교회와 이민교회가 지금도 이 사랑과 공의를 바로 이해하고
적용하지 못하여 분쟁에 휘말려 있다. 사랑없는 하나님의 “공의”를 들이대면 구원받을 자가 누가 있겠으며, 용서받을 행위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여전히 “공의”는 하나님의 의요, 사랑이다.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이란 “죄의 회개함”이 있는 곳에 무조건적인
용서를 약속해 주신 것이다. 주님과 함께 골고다에 못박혔던 한 강도는 단순히 “죄를 회개함”으로 주님과 함께 낙원에 갈 수 있다는
무한하며 무조건적인 사랑의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고서 회개함이 없이 목매어 죽어 버린 가룟 유다를 연민으로
긍휼히 여길 수는 있으나, 사랑으로 그의 죄를 덮어 줄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 시대의 제일 큰 위기는 참된 진리와 가치를 분별하는 능력을
우리 모두가 잃어가고 있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급히 변화하는 가치와 문화는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 존재하는 선명한 기준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며, 시대에 따른 모호한 새로운 삶의 기준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다. 이 시대를 사는 모든 크리스천도 예외는
아니어서 하나님이 성경에 분명하게 말씀하신 진리도 왜곡하고 변질시켜서 우리에게 강요하는 변질된 신학과 거짓 선지자 및 크리스천
가치와 문화를 보면, 이 시대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기 원하는 크리스천들에게 위기의 시대임이 분명하다.

이미 미국에서는 한번 이혼한 경력이 있는 부부가 거의 50%가 넘는다고 하니,
이혼이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막10:2-9) 이제 교양없는 소치로 받아들여지며, 또 이혼에 대해 공개적인
견해를 밝히는 것은 이 사회의 금기사항이 되었다. 동성연애자가 너무 많아서 하나님이 금하신 동성연애(레20:13,롬1:24-27)를
합법화 해주고 있다. 미국에서 결혼하였느냐, 아이들이 몇이냐고 묻는 것은 큰 결례가 되는 질문이 되었다. 심지어 많은 크리스천
사이에서 조차도.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라는 베일 속에 준엄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묻어버리길 원하는 크리스천이 너무도 많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공의는 항상 동전의 양면처럼 병행하며 조화를 이루는 진리임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준엄하신 공의를 너무 쉽게 저버리고 있다.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조지 부시는 알 고어 전부통령과의 TV 공개토론회에서
동성연애의 합법성에 대하여 기자의 질문을 받자,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해야 되는 것으로 알고있다고 두번이나 확실하게 답변하였다.
미국의 혼탁한 현실을 고려할 때 대단히 용기있는 대답이었다. 최근에 접한 부시의 신앙고백을 읽으면서, 그가 신실한 크리스천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결코 여기서 이혼이나 동성연애문제 같은 뜨거운 감자를 갑론을박할 생각은 전혀 없다. 이혼한 사람이나 동성연애자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저들의 아픔을 나누며, 새로운 삶을 살도록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르지 않다고 하신 것을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옹호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전혀 없다.

분명 이 시대는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가 왜곡되는 시대이며, 이것을 너그럽게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수용하는, 불의와 야합된 크리스천이 난무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주님은 말세에 믿음 보겠느냐고 물으셨던
것일까? 이 시대가 이처럼 혼탁해진 것은 이 시대를 주도하는 세대를 하나님 말씀으로 훈련하고, 영적인 싸움을 위해 무장시키지
못한 탓이며, 다가올 세대의 혼탁함을 미리 예측하며 대비하지 못한 탓이다. 이래서 성도의 신앙의 바른 훈련과 경건의 연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나는 이런 관점에서 크리스천 유학생은 유학생활동안 부지런히 신앙과 학문을
겸비하여 훈련하고 배워야 된다고 생각한다. 미래의 크리스천 지도자가 될 유학생 크리스천의 신앙훈련은 너무도 중요하다고 믿는다.
물론 크리스천 유학생이 전공의 학문을 공부하면서 주님의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나, 지금은 도리어 신앙을
배우고, 훈련하고, 또 단련할 때라고 본다. 진정한 변화없이, 혹심한 훈련없이 진정한 섬김이 있을 수 없으며, 아직은 균형있고
충성스런 섬김을 이루기에는 좀 이르지 않나 생각해 본다. 졸업 후에 다가올 세대가 여러분의 능력있는 참 믿음을 요구하며 또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향방없는 섬김에 너무 열중하기 보다는 도리어 신앙을 갈고, 닦고, 훈련하고, 연단하기에 초점을 둠이 옳다고 본다.
신앙은 훈련이다. 주님은 훈련없이 사람을 들어 쓰신 적이 없다.

유학생에게 절대로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경건의 연습과 훈련이다.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맡아서 목양하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하였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딤전 4:7-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유학생들이 받을 만 한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유학생의 학업과 전문성 계발에 도움이
되고, 구원에 이르는 약속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건의 혹독한 연습과 훈련이 있어야만, 흔들리는 이 시대에 사랑을 공의와 함께
말할 수 있고, 공의를 사랑과 함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진정한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

경건의 혹독한 연습없이 허탄한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것처럼 무섭고 망령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된 나의 경건의 연습이 나로 하여금 유학생들에게 권면하는 글쓰기를 두렵게 한다. 다음
칼럼에서 만날 것을 다시 기대하며 나는 오늘도 주님께 기도한다. 주님의 마음을 주십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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