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진] 탁월함, 게으름, 그리고 신앙

유학생의 삶


탁월함, 게으름, 그리고 신앙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 없으므로 그들로 왕 앞에 모시게 하고,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 보다 십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단 1:19-20)


우리들의 인생의 가치와 질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자기 스스로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의해서 결정이 되어진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성도”라고 부른다. ‘구별되어진 자들’이라는 뜻이다. 성도들은 또한 “청지기”라고 불리운다. ‘무엇인가를 위탁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우리가 또한 “사도”로서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한다. 사도라함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대사”(Ambassdors for Christ)로서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묘사하는 많은 단어들 가운데 흐르는 공통점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뚜렷한 삶의 방향과 목적을 위탁받고, 그것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대표하여 세상 가운데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청지기로서의 삶은 타국에서 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는 내용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한 성도로서 타국으로 보내심을 받은 유학생의 삶의 가치와 질을 생각해 봐야 한다. 막연하게 아무런 생각이 없는 유학생으로의 삶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로서 삶이다. 이유없는 고국을 향한 향수와 이질적인 문화속에서의 갈등으로 인한 고독 속에 있는 삶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보내심”을 받은 그 학교, 그 지역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도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다니엘은 타의에 의해서 당시 최고의 국력을 자랑하는 바벨론에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간 인물이다. 다니엘서 전체에서 보여지는 그의 삶의 모습은 “보내심”을 받은 자로의 삶 그 자체이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나라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도교수(1장에 나오는 환관장) 밑에서 지도를 받으며 그의 유학의 생활을 보냈다. 그러한 그의 삶의 가치와 질은 “탁월함”이라는 단어로 요약이 되어진다. 성경은 그의 지혜와 총명이 다른 박수와 술객보다 십배가 더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섬겼던 느부갓네살왕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악한 왕이였던 것을 생각해 볼 때, 다니엘서 1장에 기록하고 있는 그의 탁월함은 어떤 종교적인 분야가 아님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아마도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다방면에 왕에게 남달리 탁월한 조언을 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의 탁월함은 “세상”과 “신앙”의 경계의 범주에 있지 않았다. 그의 탁월함은 그와 같은 이분론적인 세계관을 초월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탁월함이였다. 그의 “세상적”인 탁월함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식의 “신앙”의 결과도 아니요, 더더군다나 패배적인 타협의 결과도 아니다. 그의 탁월함은 바로 그의 신앙 그 자체였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탁월함은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자신에게 부여받은 모든 것을 100% 바쳐서 사는 삶을 말한다. 세상은 탁월함의 “결과”에 주목을 한다. 그러나, 성경은 탁월한 삶의 “과정”에 그 초점을 맞춘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적인 관점에서의 탁월함의 반대는 게으름이다. 게으른 사람은 결코 탁월한 삶을 살 수 없다. 게으른 사람은 “악한 사람”이다. 달란트 비유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본래 받은 달란트를 100% 활용한 두 종을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부르신다. 그 두 종은 바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탁월함의 모델이다. 그들은 탁월한 경영으로 배가 하는 성공적인 투자를 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칭찬의 초점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이 받은 달란트의 원래 양과 관계없이 그것을 100% 총 사용하는 삶인 것이다.


보내심을 받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탁월함을 요구하신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재능과 시간을 100% 활용하는 삶인 것이다. 그와 같은 탁월한 삶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하여, 내가 보내어진 그 삶의 터전에까지 적용이 되어진다. 다니엘의 삶은 바로 하나님과의 철저한 관계에서 시작하여, 그가 왜 그곳으로 보내심을 받았는지에 대한 깨닫음으로 연결되어지고, 그것이 바로 그가 보내심을 받은 삶의 영역에서의 탁월함으로 연장되어지는 모습을 보여 준다. 보내시는 자와의 관계가 없이는 결코 탁월한 삶을 살 수가 없다. 그리고 내가 왜 보내심을 받았는지를 깨닫지 않고는 결코 탁월한 삶을 살 수가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탁월함은 지극히 관계 중심적이다.


또한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탁월함은 결코 이원론적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내심을 받은 그곳에서 탁월하도록 기대되어지기 때문이다. 보내심을 받은 삶을 사는 유학생에게 있어서는 신앙과 학업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내가 진정으로 학문을 하도록 나의 전문영역에 보내심을 받았다면, 나는 그곳에서 탁월하여야 한다. 그것은 나의 학문에 100% 나의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그것의 결과는 주님이 책임지실 일이다.


오늘날 유학생들의 문화가운데 탁월함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다. 특별히 신앙이 좋다는 유학생들 가운데 탁월한 유학생이 부족함이 안타깝다. 많은 신앙이 좋은 유학생들이 자신의 학문의 길을 “대충”한다. 학문의 길이 마치 진정한 주님의 일을 위한 “필요악”인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실제로는 주의 종의 길을 가고 싶으나, “부르심”(calling)을 받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학문의 길을 가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한 주님의 일을 위해서 교회 안에서 제자 양육과 기도에 전념을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학의 학문의 길은 보다 많은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그렇지만 매우 불편한, 중간 단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음악을 하는 유학생들 가운데서도 이와 같은 갈등을 겪는 경우를 자주 봤다. 신앙에 대하여는 아무런 생각없이 유학을 왔는데, 막상 은혜를 받고 보니 자신의 달란트를 가지고 주님을 “찬양하는 데에만”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교수님이 주는 연습곡은 재미가 없고 지겹기만 하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은 교회에서 찬송가나 복음 성가를 연주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전문 목회자, 선교자로 혹은 전문 CCM 사역자로 부르신 형제, 자매가 그와 같은 고민을 가질 수 있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이른바 “평신도”로 평생을 살아갈 형제, 자매들이 이와 같은 갈등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갈등한다. “필요악”으로서의 직장과 “신앙”의 사이에서 고민한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유학생활에 성과가 더디게 된다. 그러다 보면 유학생활 속에서의 공부는 점점 더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탁월함의 원리는 이와 같은 갈등에 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당신이 진정으로 전문음악가로, 미술가로, 학자로, 경영인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그 일에 최선을 다하라. 그것이 탁월한 삶을 사는 신앙인의 모습이다. 따라서 탁월함과 소명의 발견은 결코 분리되어질 수 없다. 소명의 삶 가운데 있는 탁월함에는 더 이상 “신앙”과 “세상”의 갈등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평신도”가 될 수 없다. 모두가 자신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소명을 발견치 못한 이는 결코 탁월한 삶을 살 수가 없다.


게으름은 소명 의식의 결핍에서 나온다. 게으른 유학생들을 많이 봤다. 영적으로 게으르고, 생각이 게으르고, 삶이 게으르다. 그들은 자신이 왜 유학을 왔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살고 있다. 공부해야 하는 유학생들에게 생각의 게으름이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아이디어를 철저히 분석하고 준비하고 발전시키는 생각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생각이 게으르다. 치밀하게 생각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를 아직 느끼지 못해서 그렇다. 소명의 결핍은 게으름을 가져오고, 게으름은 탁월함의 반대임을 명심하자. 나는 보내심의 소명의식이 없는 유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하고 싶다. 결코 탁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단지 유학을 왔었다는 이유 하나로 그런 이들이 지도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탁월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 이들이 지도자가 되어 있는 것이 문제이다. 그와 같은 지도자들은 결코 탁월한 자들을 참고 용납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탁월한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 가운데 이와 같이 탁월한 지도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영적인 전쟁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한다. 금요일 철야기도에서 우리는 영적인 전쟁을 위한 중보기도를 많이 한다. 그러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삶은 그들의 삶 전체의 영역이 영적인 전쟁이다. 결코 그들의 영적 전쟁은 금요 철야기도에서 끝날 수가 없다. 연구실에서 컴퓨터를 켜고 연구 논문을 쓰고 제안서를 쓰는 과정이 치열한 영적인 전쟁의 과정이다. 그래서 게으를 수가 없다. 마귀는 우리가 대충 하기를 원한다. 마귀는 우리가 주어진 일을 하기 보다는 인터넷으로 한국 신문을 보면서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기를 원한다. 만일 C. S. Lewis가 그의 소설 작품을 대충 썼다면 오늘날의 C. S. Lewis가 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오늘날 모든 학문과 예술의 분야에 탁월한 기독교인들이 나오기를 바란다. 유학생들 가운데서 나오기를 바란다.


미국 CBS 방송에서 인기를 끌었던 “Touched by An Angel”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수년 동안 공전의 인기를 끌면서 많은 광고수익을 가져다 준 프로그램이었다. 이 작품의 제작진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든 작품 속에는 면면히 흐르는 성경적인 진리의 흐름이 있다. 매회 작품을 준비할 때 제작진이 기도로 준비했다고 한다. 그것을 아는 방송국에서는 여러번 그 프로그램을 없애려고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그 작품의 탁월함 때문이다. 악한 느부가넷살왕이 하나님을 섬기는 다니엘이 특별히 좋아서 옆에 데리고 있지는 않았었을 것이다. 그보다 나은 사람이 있었다면 언제라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의 탁월함은 다른 사람에 비해 십배가 능가했다고 한다. 방송국 측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성실한 삶은 탁월함을 가져온다. 그러한 거룩한 탁월함에는 세상이 범할 수 없는 힘이 있다. 나는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기독교 연구자들이 그들의 탁월함으로 무기로 하여 무신론과 진화론 숭상하는 자들이 운영하는 NIH나 NSF에서 연구프로젝트를 따오게 되길 기도한다. 창조과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분과를 만드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보내심을 받은 그곳에서 탁월함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우리 유학생들 가운데서 나오기를 소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진정한 영적인 전쟁은 우리들의 연구실에 치열하게 치뤄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 과학을 하는 유학생들로부터 무신론적인 관점에 바탕을 둔 지도교수와 학문의 조류가운데서 고민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보내심을 입은 자로서의 탁월함이 그 고민에 대한 대답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나는 장래의 사회 지도자로서의 삶을 준비하는 유학생들이 그들이 속한 지역교회에서 탁월함의 운동을 일으키기를 소원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는 “대충”(mediocrity)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예배도, 음악도, 교육도 대충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할 일은 많은데 자원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탁월하지 못할 바에 차라리 안 하는 용단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오히려 소수의 적은 프로그램에 최선의 준비를 하여 탁월함을 보여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많은 교회의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음악예배에 꼭 들어가는 것이 있다. 교회의 제직들 자녀들의 “누가 누가 잘하나” 프로그램이다. 물론 귀여운 모습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곳에는 탁월함이 없다. 그 누구도 그와 같은 수준의 프로그램을 세상의 권력자 앞에 올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 속에서는 이른바 “은혜”라는 이름으로 이것이 용납되어진다. 신앙서적 혹은 신앙영화를 보게 되면 그 질(quality)의 조악함에 실망을 하게 된다. 할리우드에서 만든 만화영화와 우리 아이들이 집에서 보는 크리스천 애니메이션을 보게 되면 그 수준의 차이가 많이 남을 볼 수 있다.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웹사이트와 그곳에 실리는 글들의 수준은 어떤 기업체의 웹사이트에서 공식적으로 용납하지 않을 수준인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탁월함을 추구하시는 하나님이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은 대충에 만족하지 않으셨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탁월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빌1:10).


교회 안에서 탁월함을 추구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것이 결코 비싼 것, 예쁜 것, 좋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교회안에 있을 때 취해야 하는 당연한 자세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그 시대의 학문, 문화, 과학을 주도해 왔다. 보내심을 입은 자들이 소명감을 가지고 살 때 일어나는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그 영향력을 상실했다. 교회의 문화 가운데 탁월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탁월함의 상실은 바로 우리의 자존감과 소명감의 상실에서 비롯한다. 나를 보내심을 받은 자로 보고 사는 자, 그래서 그 소명감 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사는 자의 삶 속에는 언제나 거룩한 탁월함이 있다. 그리고 그 탁월함 속에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유학생들의 문화 가운데 이와 같은 탁월함을 추구하고, 게으름을 배격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를 소원해 본다.


 

No comments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