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의 삶 (9)


하나님의 손을 보는 유학의 삶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 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17-19)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라는 제목으로 유학생의 삶에 대하여 글을 쓰기 시작한 지도 벌써 일년이 다 되어간다. 처음 시작할 때, 일년을 계획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이제는 마감을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매달 마감일에 쫓겨서 편집부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원고를 보냈는데, 이번 달에는 유난히 늦어졌다. 한국으로 여행을 한 이유도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 글을 마지막으로 쓴다는 생각이 정말로 나의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부담으로 작용했던 탓이다. 수도 없이 글을 썼다가 지우곤 하면서 이 글을 적는다. 정말로 나의 마음속에 나의 생각을 사로잡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아내와 함께 이민가방 7개에 짐을 싣고 매릴랜드에 와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것이 1992년 여름, 벌써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에, 나와 아내는 학위를 받고, 직장을 구하였고, 두 아들을 낳았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얼마 전에 부교수로 승진을 하면서 Chaired Professor의 자리를 받기도 하였다. 유학 와서 온 첫 주, 이곳으로 오기 일주일 전에 이태원 가게에서 산 신발을 신고, 학생 아파트로 가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지름길로 가려고 하다가 시궁창에 빠져서 새 신발이 엉망진창이 되었던 기억, 학생 아파트의 열쇠를 받아서 들어간 첫 날, 아내하고 둘이서 집안에 있는 유일한 등이었던 부엌의 등 밑에서 담요 두 장과 수건을 둘둘 말아서 잠을 청하였던 그 장소, 그곳에 도착한 이틀 째에 만난 지도교수가 만나자 마자 엄청난 양의 일을 넘겨줄 때 가졌던 황당한 부담감, 그렇게 열심히 도왔던 지도교수가 박사과정 일년차가 지날 무렵에 나를 쫓아내려고 한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았던 때, 일주일에 50불을 가지고 생활을 하기 위해서 먹어본 과일은 세일을 하는 사과와 바나나 외에는 없었던 박사과정 시절, 첫 째를 가진 아내가 좋아하는 사과를 잔뜩 담았다가, 가지고 갔던 돈이 모자라서 몽땅 그곳에 놓고 떠나야 했던 때의 아픔–그 아픔을 차마 나에게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공부를 모두 마치고 직장을 구한 다음에야 말을 해야 했던 아내의 고생, 난 지 이제 한 달이 된 아이를 한 손에 안고, 다른 한 손에 첼로를 들고 다니면서 공부를 해야 했던 아내의 모습 등등…


이런 삶의 과정 속에서 나의 마음을 지켜준 한 성경구절이 있다면, 바로 에베소서 1장 17-19절 말씀에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 나를 유학생으로 이곳에 부르셨다. 그리고 그분은 나에 대하여 소망을 품고 계시다. 그 소망 속에는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있다. 그리고, 그분은 그 모든 일에 엄청난 능력으로 나를 공급하신다는 바로 그 말씀이었다.


나의 고통에 의미가 있고 나의 연단에 소망이 있다는 그 약속이 나에게 힘이 되었다. 지금도 힘이 된다. 나를 내 보내려고 생각하는 지도교수에게 최선을 다해서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지도교수를 넘어서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사과정 2년차는 정말로 힘들었다. 지도교수가 나를 내 보냈기 때문에 학과에서는 나를 4명의 교수들에게 나누어서 시간을 배정했다. 모든 교수는 나를 full-time으로 이용하기를 원했다. 결국, 나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서 4배의 시간을 들여서 조교의 일을 해야 했었다. 그 중의 한 중국교수는 매주 수업시간에 강의를 하려고 학교에 올 때면, 나에게 학장실에 가서 임시 주차 증을 받아서 자기를 주차장에서 기다리도록 하였다. 날이 좋을 적은 상관이 없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들고 서서 그 교수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나의 모습이 한없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 때도 나의 연단에 소망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2년차 말에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나는 5년 동안 보장 되어있는 줄로 알았던 장학금이 2년 말로 없어지고, 그 이후는 지도교수가 알아서 해결해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눈앞이 막막했다. 나를 돌봐줘야 하는 지도교수는 나를 쫓아내었던 바로 그 사람인데, 나에게는 어떤 소망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나에게 힘을 준 말씀이 바로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라는 말씀이다. 그 힘은 바로 죽은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그 힘이라고 사도바울은 설명하고 있다. 그 힘은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보다 뛰어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었다. 그 힘이 내 속에 있는 힘이라는 것을 기도할 때 깨닫게 되었다. 내 속에서 역사하는 힘이 나의 지도교수보다 더 뛰어나다고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 믿음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하나님은 그 믿음에 한번도 실망을 시키신 적이 없었다. 나를 내 보려던 지도교수는 그 와중에서도 자신의 프로젝트에 최선을 다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나를 다시 받아들였고, 그 프로젝트로 인해서 그야말로 스타교수가 되었다. 곧 그는 학과 장이 되었고, 그는 나의 배후에서 나를 돕는 최고의 동역자가 되었다. 그 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다. 하나 하나 세심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유학생활 내내 나의 삶을 주장해 온 한 생각이 있다면, 바로 나를 부르신 그 하나님의 소망을 깨닫는 것이었다. 그 부르심의 소망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다. 그것이 나의 직장을 구하는 일에, 그 이후의 삶에, 그리고 각종 사역에 참여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1995년 가을 나는 박사과정 4년차였다. 논문은 거의 마감이 되었고, 아내는 둘째를 임신한 상태였다. 지도교수는 나에게 학교에 일년 더 있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했다. 일년동안 프로젝트를 더해서 논문을 몇 개 더 실으면 외국인으로서 미국대학에서 직장을 구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좋은 생각이기는 하지만 둘째를 곧 낳게 되는 데, 그러면 도저히 박사과정 월급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지도교수는 자신이 어떻게 해보겠다고 하면서 학장과 약속을 내 앞에서 하였다. 나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잘 안되면, 4년차 말에 job market으로 나가서 아무 학교나 직장을 잡겠다고 말하였다. 10월 31일이 그 날이었다. 내 생일이었기에 아직도 기억이 난다. 오후 3시에 학장실로 내려간 지도교수가 오후 5시 30분이 되어야 나타났다.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띄고는 “일년동안 Visiting Professor로 너를 쓰기로 했다. 월급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보다는 두 배 이상 되겠지” 하면서 “Happy birthday to you!”라고 했다.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했다. 이미 학교의 예산이 다 정해진 상태에서 학장이 자신의 비상예산에서 나를 고용했다고 했다. 솔직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visiting faculty가 필요한 상태도 아니었고, 설상 필요했다고 해도 나를 그 자리에서 쓸 이유가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는 듯했다. 일년동안 내가 그곳에 더 머무르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6년은 40일 연속 새벽기도와 아침 금식으로 시작하였다.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기드온의 이야기가 강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기드온 당시의 추수할 곡식이 바로 미국의 이민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한국 교회와 우리들의 1.5세 2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하나님이 쓰실 만 하니까, 사단이 그들을 빼앗아 간다는 말씀으로 기드온 시대의 이야기가 나에게 도전으로 다가왔다. 그 해 여름 JAMA에 참석을 하게 되었다. 셋째 날인가, Sammy Tippit이 인도하는 저녁 기도회였다. 미국의 지도를 보여주면서 미국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의 입 속에서 나도 모르게 “주님, 저 지도 속에 있는 캠퍼스로 나를 보내소서. 저곳에 있는 한국계 학생들에게 나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나왔다. 그 날 이후, 그 기도가 나의 삶의 방향을 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1997년 이곳 클리브랜드에 오자마자, 한국에서 모교를 비롯해서 많은 학교에서 귀국하라는 초청이 있었다. 어떤 때에는 정말로 한국에 귀국하고 싶었다. 기회도 무척 좋았고, 그때가 마지막 기회처럼 보이던 적도 있었다. 내가 지원하기만을 기다리는 그런 경우도 있었다. 나이가 드신 부모님들에게 귀국해서 하나뿐인 아들로 떳떳하게 아들노릇을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모교의 강단에 서서 후배들에게 강의를 하는 그런 꿈을 쉽게 버릴 수 도 없었다. 하나님께 사정도 해봤다. 그리고, 내가 귀국을 하면, 그 캠퍼스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교수가 되겠다고 기도도 해봤다. 그때 마다 하나님은 1996년 JAMA에서 기도하는 나의 모습을 다시 보여주시곤 했다. 아무 말씀 없이, 그 모습이 비디오처럼 나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이제까지 한번도 한국에서의 초청에 응답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아무런 미련 없이 모교의 자리에 지원하는 친구를 위해서 정말로 축복하면서 추천서를 써 줄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친구가 그 자리에 정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다. 아마도 앞으로 또 좋은 기회가 한국에서 생기면 마음이 싱숭생숭해 질 듯하다. 이번에도 한국에 짧게 방문하면서, 내가 한국에 가면 참 할 수 있는 일이 많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내가 그 일로 다시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아마도 또 똑같은 비디오를 내 마음속에 틀어보이실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 무슨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살고 있는지 묻고 싶다. 무엇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대답하여 보라. 유학생활을 향한 당신의 비전은 무엇인가? 아니, 당신을 유학생의 자리 (아니면 유학생 배우자의 자리)로 부른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에 대해서 당신은 궁금해 본 적이 있는가? 그 부르심 의 소망을 붙잡고 고민해 봤는가? 그 부르심의 소망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묵상해 보았는가? 그 능력의 지극히 크심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는가?


그 소망에 붙잡히라. 그 소망이 당신의 삶을 주관케 하라. 하나님의 생각이 당신의 생각을 주장하게 하라. 유학생의 자리가 바로 당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깨닫는 그 자리가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