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Now Jesus, going up to Jerusalem, took the twelve disciples aside on the road and said to them,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Behold, we are going up to Jerusalem, and the Son of Man will be betrayed to the chief priests and to the scribes; and they will condemn Him to death,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and deliver Him to the Gentiles to mock and to scourge and to crucify.
And the third day He will rise again.”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Then the mother of Zebedee’s sons came to Him with her sons, kneeling down and asking something from Him.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And He said to her, “What do you wish?”
She said to Him, “Grant that these two sons of mine may sit, one on Your right hand and the other on the left, in Your kingdom.”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But Jesus answered and said, “You do not know what you ask. Are you able to drink the cup that I am about to drink, and be baptized with the baptism that I am baptized with?” They said to Him, “We are able.
”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So He said to them, “You will indeed drink My cup, and be baptized with the baptism that I am baptized with; but to sit on My right hand and on My left is not Mine to give, but it is for those for whom it is prepared by My Father.”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And when the ten heard it, they were greatly displeased with the two brothers.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But Jesus called them to Himself and said, “You know that the rulers of the Gentiles lord it over them, and those who are great exercise authority over them.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Yet it shall not be so among you; but whoever desires to become great among you, let him be your servant.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And whoever desires to be first among you, let him be your slave–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just as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 ransom for many.” (마태복음 20장 17-28절)


인간의 탄생은 고귀하고 기쁜 일입니다. 그 중에서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탄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그래서 온 세계가 그를 기념하고 함께 기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탄생은 기쁜 일인 동시에 슬픔과 고통을 함께 배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죄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의 앳된 울음 속에도 그의 인생 앞에 닥쳐올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길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역설이요 이중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셨지만 또한 완전한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던 분이기에 죽음을 앞둔 한 사람으로 세상을 사셨습니다.


2004년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책, <다빈치코드>라는 베스트셀러가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을 주제로 그 속에서 <聖杯>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공상 스릴러 소설입니다. 예수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 시에 사용했던 잔을 성배라고 부릅니다. 역사 속에서 이 성배에 관한 수많은 추측과 거짓된 소문들이 난무했습니다. 이 소설 역시 다빈치의 그림을 소재로 예수의 신성을 파괴하는 내용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를 포함하여 르네상스 시대의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랬듯이, 레오나르도 역시 인본주의와 고대 그리스의 헤르메스 주의라는 신비적 인간 숭배 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비록 그 당시의 많은 작품이 성경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할지라도 그들의 작품 속에서 이교도적인 내용이 발견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근거로 성경을 부인하고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자 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일입니다.


아무튼 오늘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잔(cup), 성배입니다.
예수의 일생은 떡의 인생이라고 지난번에 말씀을 나눈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인생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한 잔입니다. 구약시대 예수님의 현현이라고 알려진 창세기 14장의 멜기세덱 역시 처음부터 떡과 포도주를 양손에 들고 나타납니다. 떡과 잔, BREAD AND CUP 이것이 바로 예수 인생의 키워드(key word)였던 것입니다.


떡과 포도주는 잔치에서 빠질 수 없는 풍요와 기쁨의 상징입니다. 예수는 우리를 에덴의 풍요로 다시 초청하여 천국 잔치로 인도하는 생명의 떡과 잔입니다. 그러나 떡이 십자가에서 찢기신 예수의 몸으로서 고난과 희생을 상징한다면, 잔(cup) 역시 성경의 많은 곳에서 오히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등장합니다.(예레미아 25장 15절, 에스겔 23장 33절, 요한계시록 16장) 이것이 예수의 인생이 지닌 이중성입니다. 잔칫집과 초상집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따라가는 제자들인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크리스천의 인생은 기쁨과 고난이 함께 가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의 마지막 기도에서 그 진노와 심판의 잔을 자신에게서 옮겨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에게 조차 잔은 정말 피하고 싶은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진정 두려워했던 것은 단순히 십자가에서 당할 능욕과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한번도 아버지의 곁을 떠난 일이 없던 순종의 아들이 우리의 죄 때문에 심판과 진노의 잔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했기 때문입니다. 즉, 아버지와의 영원한 분리와 유기를 당하는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에 대한 영적 두려움이 더 컸던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완전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실제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버림받는 척 하고 연극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가 받아야할 그 고통, 그 형벌, 그 진노의 잔을 그는 실제로 받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예수는 그 잔에 대하여 깊이 묵상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피 흘림의 의미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입니다.


잔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왜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다 흘려야만 했습니까?


우리가 받을 진노의 심판을 대신 받기 위해서?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예수의 십자가로 이미 종결된 것이요, 더 이상 우리에게는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향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를 위해 전토와 소유물은 물론이요 부모, 형제, 아내와 자식마저 버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는 과연 무엇일까요?


십자가의 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죄사함의 언약에 관한 구약의 제사입니다. 이 언약은 히브리서에서 밝히 언급한 것처럼 예수의 십자가로 충분히, 일회적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양의 제물로 피를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둘째로, 십자가의 피는 죄사함을 받은 성도들에게 던져지는 새 언약(New covenant)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미리 잔을 나누며, 그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24)”라고 그냥 언약이라고만 쓰고 있지만, 한글성경과 NIV를 제외한 영어 성경 또는 원전의 마태, 마가, 누가의 공관복음에는 모두 “새 언약”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가 믿는 신약 곧 New testament입니다. 이 새 언약은 요한복음에는 새 계명(new commandment)으로 나타납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벌어지는 제자들의 다툼과 시기 질투를 바라보던 예수께서는 저들의 발을 씻어 종의 본을 보여주신 후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줍니다. 이른바 그 유명한 아가페(Agape) 명령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본질인 새 언약이요 새 계명인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 32-5)”


이웃 사랑, 서로 사랑, 형제 사랑에 대한 이 명령,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할 이 계명, 이것이 바로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우리에게 가르치고 떠난 약속 있는 새 계명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채워야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죄사함의 구원을 위한 언약이었다면, 신약의 제사는 아가페 사랑의 완성을 위한 새 언약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져야할 산제사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도무지 형제를 서로 사랑할만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웃을 내 몸같이 결단코 사랑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예수는 피 흘려야 했습니다.


죽음을 앞둔 스승 앞에서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는 제자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조차 누가 크냐하며 다투는 제자들(눅 22:24)을 바라보며 예수는 자신이 피 흘려 죽지 아니하면 안 되는 이유를 절감했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를 죽인 자들은 로마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말을 쓰고 글을 쓰던 유대인들, 가장 가까운 친족들 때문에, 예수를 따른다고 좇아가던 제자들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이라고 일컫던 바리새인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시기 질투에 의해 참소당하여 십자가로 끌려간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의 이름을 훼방하는 가장 큰 원흉은 이방인들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몰려드는 무리들 때문에, 교회에서 큰소리치는 집사 장로들 때문에, 예수를 가르치고 전하겠다고 나선 목사요 선교사들 때문에 예수의 이름이 짓밟힙니다. 바로 옆의 한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여 절망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서로 높아지려고 시기 질투하고 다투는 자들입니다. 예수를 죽인 자들은 우리들입니다. 예수는 바로 우리 때문에 피 흘려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기 직전, 그를 따르던 12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십자가를 직접 언급하며 자신의 고난에 대한 분명한 통지를 하고 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상징적으로 또한 직설적으로 자신이 받을 고난에 대하여 이야기한 일은 있었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을 직접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가 보인 영적 권위와 말씀의 능력 그리고 기적들을 체험하면서 예수에 대한 나름대로의 환상과 기대를 키워왔습니다. 자신이 따르고 있는 스승 예수야말로 로마의 압제로부터 유대민족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경제적 배부름을 가져다 줄 정치가로서 혹은 민족 지도자로서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을 향한 마지막 입성은 결전을 앞둔 비장함이 흐르는 그런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마가복음10장에 보면 저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며 주를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세베데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고 간청하는 뜻밖의 장면이 나타납니다. 자신의 두 아들을 예수께서 주의 나라를 얻으신 후 권좌의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청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아들을 위한 치맛바람이 등장한 셈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이 장면을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예수께 간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들들이 어미를 앞세워 온 것인지 어미가 아들들을 위해 강제로 데리고 나타난 것인지는 모르되 분명한 것은 이들은 예수께서 조만간 왕위에 오를 것이며 그 이후의 권력 배분에 대하여 벌써 관심을 가지고 자리다툼에 들어가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대하여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가 말한 십자가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든지, 단순히 비유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여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난다는 그 말 속에서 희망을 걸고 초반의 어려움을 겪지만 극적인 반전을 통해 결국 메시아가 승리할 것이라는 그런 상상을 하고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아무튼 이 황당한 요청을 듣고 예수는 그들을 묵묵히 바라봅니다. 어쩌면 속으로 절망에 가까운 슬픔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삼 년 간이나 데리고 다니며 직접 가르친 제자들이 겨우 이 수준이라니….. 항상 자신의 먹을 떡만 챙기던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 둔하냐? 하며 호되게 질책하던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지… 이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화가 나다가도 나중에는 측은한 심정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저들의 눈을 번갈아 바라보며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가 지금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너희가 진정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그들은 여전히 큰 소리로 답합니다.
“마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죽기까지 당신을 따라 충성할 것입니다.”
예수는 그들의 대답에 수긍하며 예언적인 말을 다시 던집니다.
“그렇구나. 과연 너희가 장차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좌우편에 누가 앉게 될는지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예비한 자가 앉을 것이니 너희는 상관마라.”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나머지 열 제자가 이 두 형제에 대하여 분을 터뜨립니다. 안 그래도 예수님이 베드로와 더불어 세베대의 아들들을 특별대우 하는 바람에 마음에 가시처럼 느끼고 있던 그들은 참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들의 다툼을 듣고 있던 예수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어서 제자들을 특별히 불러다 앉히고 일장 훈계를 시작합니다. 이른바 십자가의 정신에 대한, 종의 의미에 대한 강화가 시작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의 핵심은 세상의 집권자들이 권세를 부리는 원리와는 전혀 다르다. “너희가 크고자 하느냐?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 너희가 으뜸이 되고자 하느냐? 먼저 종이 되어라.” 하며 종의 제자도에 대하여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는 섬기는 종이 되기 위함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니 너희도 서로 종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느냐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종이 무엇입니까?
흔히 주의 종, 주의 종 하는데……. 과연 누가 주의 종입니까?
종은 주인을 의식하고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헤아리고 주인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자입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모두 주의 종입니다. 특별한 직분을 가진 목사나 선교사만 주의 종이 아닙니다. 종은 주인 앞에 항상 나아가는 자입니다. 주인이 부르면 항상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가 시키는 일을 마땅히 행합니다. 따라서 종은 곧 예배자를 의미합니다. 예배는 주인의 음성을 듣고 달려가서 그의 뜻을 순종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 예배의 본질에 대하여 살펴본 바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선행과 행위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은 인본주의적 종교 행위에 불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서 그의 마음을 움직여 상급을 받아내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는 말이죠. 예배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그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이요 그 음성에 화답하여 우리가 그의 앞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n-턴이 아니라 u-턴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로 선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방향성을 완전히 180도로 뒤바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나아가는 것,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거기서 모든 것이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의 역할이, 예배자의 삶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다음 단계가 남아 있습니다.


종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로 요약 됩니다.
종은 첫째 섬기는 자입니다. 낮은 곳에 임하라는 것이요, 겸손히 행하는 종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섬김은 주인을 바라보는 자세입니다.
둘째, 종은 순종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종이 지녀야할 정신을 의미합니다.
종은 자기 생각을 행하는 자가 아니요, 주인이 명하는 것을 행하는 자를 뜻합니다. 주인이 원하는 것이라면 죽기까지라도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종입니다.
셋째, 종은 일하는 자입니다. 충성된 종은 주인의 명한 것을 행하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닙니다. 주인이 보든 안보든 최선을 다해 그 일을 완수합니다. 이것이 종의 바른 행위입니다.


벤쿠버에 있는 리전트 칼리지(Regent College)에 폴 스티븐스(Paul Stevens)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저서 즉 <나머지 6일>이라는 책 속에서 진정한 예배는 주일 하루만 치루는 행사가 아니라 크리스천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통전적인 산제사(living sacrifice)가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심지어 그는, 마르틴 루터에 의해 촉발되었던 과거의 종교개혁은 구원론의 관점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교회론의 관점에서는 절반의 개혁밖에는 하지 못하였다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우리가 종의 삶을 통해 진정한 예배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의 종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이웃을 향한 종의 모습으로 다시 내려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림에서 나타낸 것처럼 U턴에서 P턴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크리스천의 능력이 세상에 나타납니다.


낮아짐의 능력!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학생들에게도 반드시 가르쳐서 내보내야할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만일 U턴에서 그친다면 어쩌면 한국 교회의 수많은 나약한 크리스천들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선데이 크리스천만 양산할 수도 있습니다.


P턴을 통해 이웃에게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교회는 예배 처소나 크리스천들의 공동체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친히 우리에게 본을 보인 것처럼 세상 속의 영적 전투장에서 피를 흘리며 십자가를 지는 종을 통해 비로소 탄생한다는 것이죠. 십자가상에서 예수가 로마 군병의 창에 옆구리를 찔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아내는 그 순간 신랑 예수의 신부된 교회가 탄생한 것처럼 말입니다. 아담이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진 그 순간 하나님의 손이 그의 옆구리에서 피 흘려 하와를 끄집어낸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는 피 흘림의 현장 속에서 세워집니다. 산제사는 U턴에서 P턴으로 다시 내려갈 때 이루어집니다. 그때 비로소 십자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1)
21장에서부터의 내용은 예루살렘 입성 이후 고난을 향한 급박한 전개가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내용이 <종의 제자도>를 가르친 예수의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었던 십자가와 <잔(cup)>의 의미에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의 모습과 불순종하고 교만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지도자들의 모습 속에 나타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깊은 묵상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죽어야 하는 이유가 높아진 인간들의 교만 때문임을 자각하고 계셨습니다.


1)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겸손한 종의 모습)
2) 성전 청결(성전 회복을 위한 자신의 사역을 천명, 자신을 성전으로 드리려는 상징)
3) 열매맺지 못한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저주(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 임박한 저주를 예언)
4) 바리새인과 서기관 무리들과의 격돌

-  권위에 대한 도전
-  두 아들의 비유, 불의한 농부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
-  예수를 시험하는 바리새인들(납세 문제, 부활의 문제,
-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악독을 질타함(위선자, 높아지려는 자, 외식하 자, 소경된 인도자, 거짓맹세하는 자, 탐욕과 방탕하는자, 회칠한 무덤들, 선자자를 죽이는 자…) 5)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탄식
6) 종말과 재림의 때에 대한 예언들
7) 종말론적 비유 세 가지(열처녀의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8) 마리아의 향유 옥합 헌신: 장사지냄을 예비하심
9) 최후의 만찬 : 떡과 잔을 나눔
10) 겟세마네의 기도


예수의 사역의 본질은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예배당 안의 교회가 아니라 치열한 전쟁터에서 순교자의 피의 터전 위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자기 자신이 성전이셨던 그분이 피 흘려 세운 그 교회 위에 이제 우리 자신의 몸을 드려 또 다른 교회들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곳 연길에 와서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대학을 세우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사역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그제 우리가 만일 한국이나 미국에 있었다면 우아한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며 교회 안에서 시간을 주로 보냈겠지요. 그러나 이곳 전투장에 나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포기하고 강의와 회의로 뛰어다녔으며, 소외된 학생들을 집에 초대하였고, 혹은 고아원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섬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 일은 예배가 아닙니까? 예배입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진정으로 원하셨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 예배,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권하였던 우리들의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요 교회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평양에 가서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대학을 세우는 일입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교회를 세우는 일이요, 무너져 내린 성전을 회복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 회복의 현장에는 반드시 희생과 피 흘림이 뒤따릅니다.


예수는 그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모함하는데 온 정신이 팔린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을 향해 질타하며, 과거에 그들이 시기 질투하여 죽인 선지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순교자의 역사를 들추어냅니다. 마태복음 24장 35절을 보면,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고 부르짖으며 자기 동족 이스라엘에게 임할 저주를 예언하며 통곡합니다. 마치 주기철 목사님이 하나님의 신이 떠나는 평양성을 향해 통곡했던 그 음성으로 말입니다.


이때 예수께서 언급하신 선지자 사가랴가 바로 스룹바벨 성전을 세울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스갸랴 선지자입니다. 성경에는 무려 30명에 가까운 스가랴가 등장하지만 예수가 언급한 이 스가랴가 바로 스룹바벨 성전을 짓다가 죽임을 당한 순교자 스가랴입니다. 아버지 바라갸의 이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슥 1:1) 땅의 선지자 학개와 더불어 하늘의 선지자라 불리며 온갖 정치 경제적인 난관을 뚫고 스룹바벨 성전을 쌓는 그 일에 헌신하였다가 죽임을 당한 선지자 스갸랴를 묵상하며 예수는 자신에게 임할 피 흘림과 잔의 의미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몸으로 드릴 그 성전 회복의 역사를 묵상하며 스가랴처럼 그렇게 피흘리지 않으면 결단코 세워지지 못할 교회의 다가올 앞길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동족을 향한, 이웃을 향한, 형제를 향한 사랑보다는 질투심에 불타오르는 저들 카인의 후예들을 위해 자신이 피 흘려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에게는 자신이 그 당시 구했던 그 잔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자식들의 출세를 위해 예수께 나아와 특별히 간청했던 살로메에게는 자신의 그 말을 되새기며 뼈아픈 통곡을 하여야 할 날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비교적 잘 알려진 부유한 어부 세베대의 아내로서 두 아들을 키우며 그들이 아비의 기업을 이어가기를 기대하였던 어머니, 그러나 어느 날 메시아를 만났다며 생업과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게 된 두 아들을 위해 함께 예수를 따라다니며 봉양했던 살로메에게는 예수는 자식들의 출세를 위한 든든한 발판으로서 여겨지던 정치가요 실력자로 보였습니다. 그토록 믿었던 예수가 마침내 허망하게 십자가상에서 매달려 죽어버리는 것을 살로메는 바로 옆에서 목도하게 됩니다. (마 27:56, 막 15:40) 그녀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던 좌절과 절망은 처음에 제자들이 품었던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살로메는 예수의 부활로 인해 새롭게 희망을 품게 됩니다. 아마도 마가의 다락방에 함께 모여 성령 세례를 받게 되었으며 초대 교회에서 열심히 공궤하던 권사님(?) 중에 한 사람으로 변모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중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나타난 것처럼 그토록 기대하고 아끼던 장남 야고보가 사도들 가운데 첫 순교자로 헤롯의 칼에 어이없이 살해되고만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3대 수제자 그룹에 있었던 야고보가 제대로 역할 한번 해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어버린 것입니다. 아들을 우상으로 살아가던 살로메가 받았던 그 아픔과 충격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장남의 시신을 끌어 앉고 통곡하며 오열하던 살로메는 언젠가 자신이 예수를 찾아가 간청하던 그때의 일이 떠오릅니다. 너희가 내 잔을 마시려느냐고 예수가 던졌던 그 말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잔을 받을 수 있다고 큰 소리쳤던 지난 날 자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예수가 받았던 이 십자가의 잔,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져야만 했던 그 순교의 잔을 자신의 아들이 가장 먼저 받게 될 줄이야…. 그리고 그 의미도 모르면서 그것을 위해 간청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생각하며 가슴을 쳤을지도 모릅니다. 살로메의 간구는 받아들여졌습니다. 야고보는 가장 먼저 예수의 왼편 자리에 가서 앉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천국에서 예수의 왼편에 앉아있을 장남 야고보를 떠올리며 살로메는 자신의 간구대로 들어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를 절절하게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요즘 저는 셔우드 홀 선교사가 쓴 조선회상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양화진에 묻혀있는 수많은 개신교 선교사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지난날 흑암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던 참담하고 어두운 기억 속의 우리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목숨을 마다않고 찾아왔던 그들의 십자가, 그 속에 담긴 떡과 잔의 의미를 다시금 반추해 봅니다.


27살의 젊은 나이에 대동강 변에 뿌려진 토마스 선교사의 피와 순교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던져줍니까? 토마스의 기념 교회가 있던 그 순교의 터 위에 세워지는 평양과학기술대학… 그래서 우리는 그 일을 <스룹바벨 프로젝트>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로부터 성경을 전해 받은 자들을 통해 세워졌던 평양의 널다리골 교회, 장대재 교회, 장대현 교회와 그 부흥의 역사를 기억합니다. 무너져내린 그 도성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던 예수님의 무겁고 쓰라린 마음을 떠올립니다. 오늘도 그 제단 위에 뿌려질 스가랴의 피와 또 다른 토마스의 피를 묵상합니다.


예수께서는 오늘날도 한국 교회 지도자들을 향해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게 하시며 그들의 위선을 그들의 탐욕을 지적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도무지 깨우치지 못하고 자신의 영욕에 매달려 떡을 움켜쥐느라 바쁜 이 시대의 교회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질타합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를 따르겠다고 좇아 온 우리들을 향해서도 그의 피 묻은 눈길을 보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사역지에서조차 서로 비방하며 싸우며 시기 질투하고 높아지기를 원하는 한심한 우리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내 잔을 마시려느냐?


너희가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 욕심과 명예를 위함이 아니더냐? 민족심 때문이냐? 너희가 과연 자신을 욕하고 비방하며 죽이려 덤비는 저들을 향해 피를 흘리는 이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느냐? 너희가 내가 피 흘려 산 교회와 성전을 짓는 그 일에 스가랴처럼 순교의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느냐? 아니 네 옆에 있는 한 형제를 용서할 수 있겠느냐? 너희가 진정 죽고자 하느냐? 성배를 찾아 나서는 이 모험에 네 인생을 걸 수 있겠느냐?


진정코 너희가 내 잔을 마시려느냐?





(1) 21장에서부터의 내용은 예루살렘 입성 이후 고난을 향한 급박한 전개가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내용이 <종의 제자도>를 가르친 예수의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었던 십자가와 <잔(cup)>의 의미에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의 모습과 불순종하고 교만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지도자들의 모습 속에 나타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깊은 묵상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죽어야 하는 이유가 높아진 인간들의 교만 때문임을 자각하고 계셨습니다.

1)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겸손한 종의 모습)
2) 성전 청결(성전 회복을 위한 자신의 사역을 천명, 자신을 성전으로 드리려는 상징)
3) 열매맺지 못한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저주(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 임박한 저주를 예언)
4) 바리새인과 서기관 무리들과의 격돌

-  권위에 대한 도전
-  두 아들의 비유, 불의한 농부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
-  예수를 시험하는 바리새인들(납세 문제, 부활의 문제,
-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악독을 질타함(위선자, 높아지려는 자, 외식하는자, 소경된 인도자, 거짓맹세하는 자, 탐욕과 방탕하는자, 회칠한 무덤들, 선자자를 죽이는 자…) 5)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탄식
6) 종말과 재림의 때에 대한 예언들
7) 종말론적 비유 세 가지(열처녀의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8) 마리아의 향유 옥합 헌신: 장사지냄을 예비하심
9) 최후의 만찬 : 떡과 잔을 나눔
10) 겟세마네의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