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호] 제 13 떡 – 내 잔을 마시려느냐? (Can you drink My cup?)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Now Jesus, going up to Jerusalem, took the twelve disciples aside on the road and said to them,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Behold, we are going up to Jerusalem, and the Son of Man will be betrayed to the chief priests and to the scribes; and they will condemn Him to death,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and deliver Him to the Gentiles to mock and to scourge and to crucify.
And the third day He will rise again.”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Then the mother of Zebedee’s sons came to Him with her sons, kneeling down and asking something from Him.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And He said to her, “What do you wish?”
She said to Him, “Grant that these two sons of mine may sit, one on Your right hand and the other on the left, in Your kingdom.”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But Jesus answered and said, “You do not know what you ask. Are you able to drink the cup that I am about to drink, and be baptized with the baptism that I am baptized with?” They said to Him, “We are able.
”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So He said to them, “You will indeed drink My cup, and be baptized with the baptism that I am baptized with; but to sit on My right hand and on My left is not Mine to give, but it is for those for whom it is prepared by My Father.”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And when the ten heard it, they were greatly displeased with the two brothers.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But Jesus called them to Himself and said, “You know that the rulers of the Gentiles lord it over them, and those who are great exercise authority over them.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Yet it shall not be so among you; but whoever desires to become great among you, let him be your servant.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And whoever desires to be first among you, let him be your slave–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just as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 ransom for many.” (마태복음 20장 17-28절)


인간의 탄생은 고귀하고 기쁜 일입니다. 그 중에서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탄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그래서 온 세계가 그를 기념하고 함께 기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탄생은 기쁜 일인 동시에 슬픔과 고통을 함께 배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죄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의 앳된 울음 속에도 그의 인생 앞에 닥쳐올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길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역설이요 이중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셨지만 또한 완전한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던 분이기에 죽음을 앞둔 한 사람으로 세상을 사셨습니다.


2004년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책, <다빈치코드>라는 베스트셀러가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을 주제로 그 속에서 <聖杯>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공상 스릴러 소설입니다. 예수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 시에 사용했던 잔을 성배라고 부릅니다. 역사 속에서 이 성배에 관한 수많은 추측과 거짓된 소문들이 난무했습니다. 이 소설 역시 다빈치의 그림을 소재로 예수의 신성을 파괴하는 내용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를 포함하여 르네상스 시대의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랬듯이, 레오나르도 역시 인본주의와 고대 그리스의 헤르메스 주의라는 신비적 인간 숭배 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비록 그 당시의 많은 작품이 성경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할지라도 그들의 작품 속에서 이교도적인 내용이 발견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근거로 성경을 부인하고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자 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일입니다.


아무튼 오늘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잔(cup), 성배입니다.
예수의 일생은 떡의 인생이라고 지난번에 말씀을 나눈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인생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한 잔입니다. 구약시대 예수님의 현현이라고 알려진 창세기 14장의 멜기세덱 역시 처음부터 떡과 포도주를 양손에 들고 나타납니다. 떡과 잔, BREAD AND CUP 이것이 바로 예수 인생의 키워드(key word)였던 것입니다.


떡과 포도주는 잔치에서 빠질 수 없는 풍요와 기쁨의 상징입니다. 예수는 우리를 에덴의 풍요로 다시 초청하여 천국 잔치로 인도하는 생명의 떡과 잔입니다. 그러나 떡이 십자가에서 찢기신 예수의 몸으로서 고난과 희생을 상징한다면, 잔(cup) 역시 성경의 많은 곳에서 오히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등장합니다.(예레미아 25장 15절, 에스겔 23장 33절, 요한계시록 16장) 이것이 예수의 인생이 지닌 이중성입니다. 잔칫집과 초상집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따라가는 제자들인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크리스천의 인생은 기쁨과 고난이 함께 가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의 마지막 기도에서 그 진노와 심판의 잔을 자신에게서 옮겨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에게 조차 잔은 정말 피하고 싶은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진정 두려워했던 것은 단순히 십자가에서 당할 능욕과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한번도 아버지의 곁을 떠난 일이 없던 순종의 아들이 우리의 죄 때문에 심판과 진노의 잔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했기 때문입니다. 즉, 아버지와의 영원한 분리와 유기를 당하는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에 대한 영적 두려움이 더 컸던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완전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실제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버림받는 척 하고 연극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가 받아야할 그 고통, 그 형벌, 그 진노의 잔을 그는 실제로 받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예수는 그 잔에 대하여 깊이 묵상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피 흘림의 의미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입니다.


잔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왜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다 흘려야만 했습니까?


우리가 받을 진노의 심판을 대신 받기 위해서?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예수의 십자가로 이미 종결된 것이요, 더 이상 우리에게는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향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를 위해 전토와 소유물은 물론이요 부모, 형제, 아내와 자식마저 버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는 과연 무엇일까요?


십자가의 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죄사함의 언약에 관한 구약의 제사입니다. 이 언약은 히브리서에서 밝히 언급한 것처럼 예수의 십자가로 충분히, 일회적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양의 제물로 피를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둘째로, 십자가의 피는 죄사함을 받은 성도들에게 던져지는 새 언약(New covenant)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미리 잔을 나누며, 그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24)”라고 그냥 언약이라고만 쓰고 있지만, 한글성경과 NIV를 제외한 영어 성경 또는 원전의 마태, 마가, 누가의 공관복음에는 모두 “새 언약”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가 믿는 신약 곧 New testament입니다. 이 새 언약은 요한복음에는 새 계명(new commandment)으로 나타납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벌어지는 제자들의 다툼과 시기 질투를 바라보던 예수께서는 저들의 발을 씻어 종의 본을 보여주신 후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줍니다. 이른바 그 유명한 아가페(Agape) 명령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본질인 새 언약이요 새 계명인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 32-5)”


이웃 사랑, 서로 사랑, 형제 사랑에 대한 이 명령,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할 이 계명, 이것이 바로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우리에게 가르치고 떠난 약속 있는 새 계명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채워야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죄사함의 구원을 위한 언약이었다면, 신약의 제사는 아가페 사랑의 완성을 위한 새 언약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져야할 산제사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도무지 형제를 서로 사랑할만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웃을 내 몸같이 결단코 사랑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예수는 피 흘려야 했습니다.


죽음을 앞둔 스승 앞에서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는 제자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조차 누가 크냐하며 다투는 제자들(눅 22:24)을 바라보며 예수는 자신이 피 흘려 죽지 아니하면 안 되는 이유를 절감했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를 죽인 자들은 로마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말을 쓰고 글을 쓰던 유대인들, 가장 가까운 친족들 때문에, 예수를 따른다고 좇아가던 제자들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이라고 일컫던 바리새인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시기 질투에 의해 참소당하여 십자가로 끌려간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의 이름을 훼방하는 가장 큰 원흉은 이방인들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몰려드는 무리들 때문에, 교회에서 큰소리치는 집사 장로들 때문에, 예수를 가르치고 전하겠다고 나선 목사요 선교사들 때문에 예수의 이름이 짓밟힙니다. 바로 옆의 한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여 절망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서로 높아지려고 시기 질투하고 다투는 자들입니다. 예수를 죽인 자들은 우리들입니다. 예수는 바로 우리 때문에 피 흘려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기 직전, 그를 따르던 12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십자가를 직접 언급하며 자신의 고난에 대한 분명한 통지를 하고 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상징적으로 또한 직설적으로 자신이 받을 고난에 대하여 이야기한 일은 있었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을 직접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가 보인 영적 권위와 말씀의 능력 그리고 기적들을 체험하면서 예수에 대한 나름대로의 환상과 기대를 키워왔습니다. 자신이 따르고 있는 스승 예수야말로 로마의 압제로부터 유대민족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경제적 배부름을 가져다 줄 정치가로서 혹은 민족 지도자로서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을 향한 마지막 입성은 결전을 앞둔 비장함이 흐르는 그런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마가복음10장에 보면 저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며 주를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세베데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고 간청하는 뜻밖의 장면이 나타납니다. 자신의 두 아들을 예수께서 주의 나라를 얻으신 후 권좌의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청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아들을 위한 치맛바람이 등장한 셈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이 장면을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예수께 간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들들이 어미를 앞세워 온 것인지 어미가 아들들을 위해 강제로 데리고 나타난 것인지는 모르되 분명한 것은 이들은 예수께서 조만간 왕위에 오를 것이며 그 이후의 권력 배분에 대하여 벌써 관심을 가지고 자리다툼에 들어가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대하여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가 말한 십자가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든지, 단순히 비유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여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난다는 그 말 속에서 희망을 걸고 초반의 어려움을 겪지만 극적인 반전을 통해 결국 메시아가 승리할 것이라는 그런 상상을 하고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아무튼 이 황당한 요청을 듣고 예수는 그들을 묵묵히 바라봅니다. 어쩌면 속으로 절망에 가까운 슬픔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삼 년 간이나 데리고 다니며 직접 가르친 제자들이 겨우 이 수준이라니….. 항상 자신의 먹을 떡만 챙기던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 둔하냐? 하며 호되게 질책하던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지… 이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화가 나다가도 나중에는 측은한 심정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저들의 눈을 번갈아 바라보며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가 지금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너희가 진정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그들은 여전히 큰 소리로 답합니다.
“마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죽기까지 당신을 따라 충성할 것입니다.”
예수는 그들의 대답에 수긍하며 예언적인 말을 다시 던집니다.
“그렇구나. 과연 너희가 장차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좌우편에 누가 앉게 될는지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예비한 자가 앉을 것이니 너희는 상관마라.”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나머지 열 제자가 이 두 형제에 대하여 분을 터뜨립니다. 안 그래도 예수님이 베드로와 더불어 세베대의 아들들을 특별대우 하는 바람에 마음에 가시처럼 느끼고 있던 그들은 참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들의 다툼을 듣고 있던 예수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어서 제자들을 특별히 불러다 앉히고 일장 훈계를 시작합니다. 이른바 십자가의 정신에 대한, 종의 의미에 대한 강화가 시작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의 핵심은 세상의 집권자들이 권세를 부리는 원리와는 전혀 다르다. “너희가 크고자 하느냐?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 너희가 으뜸이 되고자 하느냐? 먼저 종이 되어라.” 하며 종의 제자도에 대하여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는 섬기는 종이 되기 위함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니 너희도 서로 종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느냐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종이 무엇입니까?
흔히 주의 종, 주의 종 하는데……. 과연 누가 주의 종입니까?
종은 주인을 의식하고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헤아리고 주인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자입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모두 주의 종입니다. 특별한 직분을 가진 목사나 선교사만 주의 종이 아닙니다. 종은 주인 앞에 항상 나아가는 자입니다. 주인이 부르면 항상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가 시키는 일을 마땅히 행합니다. 따라서 종은 곧 예배자를 의미합니다. 예배는 주인의 음성을 듣고 달려가서 그의 뜻을 순종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 예배의 본질에 대하여 살펴본 바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선행과 행위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은 인본주의적 종교 행위에 불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서 그의 마음을 움직여 상급을 받아내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는 말이죠. 예배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그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이요 그 음성에 화답하여 우리가 그의 앞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n-턴이 아니라 u-턴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로 선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방향성을 완전히 180도로 뒤바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나아가는 것,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거기서 모든 것이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의 역할이, 예배자의 삶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다음 단계가 남아 있습니다.


종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로 요약 됩니다.
종은 첫째 섬기는 자입니다. 낮은 곳에 임하라는 것이요, 겸손히 행하는 종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섬김은 주인을 바라보는 자세입니다.
둘째, 종은 순종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종이 지녀야할 정신을 의미합니다.
종은 자기 생각을 행하는 자가 아니요, 주인이 명하는 것을 행하는 자를 뜻합니다. 주인이 원하는 것이라면 죽기까지라도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종입니다.
셋째, 종은 일하는 자입니다. 충성된 종은 주인의 명한 것을 행하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닙니다. 주인이 보든 안보든 최선을 다해 그 일을 완수합니다. 이것이 종의 바른 행위입니다.


벤쿠버에 있는 리전트 칼리지(Regent College)에 폴 스티븐스(Paul Stevens)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저서 즉 <나머지 6일>이라는 책 속에서 진정한 예배는 주일 하루만 치루는 행사가 아니라 크리스천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통전적인 산제사(living sacrifice)가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심지어 그는, 마르틴 루터에 의해 촉발되었던 과거의 종교개혁은 구원론의 관점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교회론의 관점에서는 절반의 개혁밖에는 하지 못하였다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우리가 종의 삶을 통해 진정한 예배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의 종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이웃을 향한 종의 모습으로 다시 내려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림에서 나타낸 것처럼 U턴에서 P턴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크리스천의 능력이 세상에 나타납니다.


낮아짐의 능력!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학생들에게도 반드시 가르쳐서 내보내야할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만일 U턴에서 그친다면 어쩌면 한국 교회의 수많은 나약한 크리스천들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선데이 크리스천만 양산할 수도 있습니다.


P턴을 통해 이웃에게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교회는 예배 처소나 크리스천들의 공동체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친히 우리에게 본을 보인 것처럼 세상 속의 영적 전투장에서 피를 흘리며 십자가를 지는 종을 통해 비로소 탄생한다는 것이죠. 십자가상에서 예수가 로마 군병의 창에 옆구리를 찔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아내는 그 순간 신랑 예수의 신부된 교회가 탄생한 것처럼 말입니다. 아담이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진 그 순간 하나님의 손이 그의 옆구리에서 피 흘려 하와를 끄집어낸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는 피 흘림의 현장 속에서 세워집니다. 산제사는 U턴에서 P턴으로 다시 내려갈 때 이루어집니다. 그때 비로소 십자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1)
21장에서부터의 내용은 예루살렘 입성 이후 고난을 향한 급박한 전개가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내용이 <종의 제자도>를 가르친 예수의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었던 십자가와 <잔(cup)>의 의미에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의 모습과 불순종하고 교만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지도자들의 모습 속에 나타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깊은 묵상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죽어야 하는 이유가 높아진 인간들의 교만 때문임을 자각하고 계셨습니다.


1)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겸손한 종의 모습)
2) 성전 청결(성전 회복을 위한 자신의 사역을 천명, 자신을 성전으로 드리려는 상징)
3) 열매맺지 못한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저주(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 임박한 저주를 예언)
4) 바리새인과 서기관 무리들과의 격돌

-  권위에 대한 도전
-  두 아들의 비유, 불의한 농부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
-  예수를 시험하는 바리새인들(납세 문제, 부활의 문제,
-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악독을 질타함(위선자, 높아지려는 자, 외식하 자, 소경된 인도자, 거짓맹세하는 자, 탐욕과 방탕하는자, 회칠한 무덤들, 선자자를 죽이는 자…) 5)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탄식
6) 종말과 재림의 때에 대한 예언들
7) 종말론적 비유 세 가지(열처녀의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8) 마리아의 향유 옥합 헌신: 장사지냄을 예비하심
9) 최후의 만찬 : 떡과 잔을 나눔
10) 겟세마네의 기도


예수의 사역의 본질은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예배당 안의 교회가 아니라 치열한 전쟁터에서 순교자의 피의 터전 위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자기 자신이 성전이셨던 그분이 피 흘려 세운 그 교회 위에 이제 우리 자신의 몸을 드려 또 다른 교회들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곳 연길에 와서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대학을 세우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사역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그제 우리가 만일 한국이나 미국에 있었다면 우아한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며 교회 안에서 시간을 주로 보냈겠지요. 그러나 이곳 전투장에 나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포기하고 강의와 회의로 뛰어다녔으며, 소외된 학생들을 집에 초대하였고, 혹은 고아원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섬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 일은 예배가 아닙니까? 예배입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진정으로 원하셨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 예배,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권하였던 우리들의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요 교회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평양에 가서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대학을 세우는 일입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교회를 세우는 일이요, 무너져 내린 성전을 회복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 회복의 현장에는 반드시 희생과 피 흘림이 뒤따릅니다.


예수는 그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모함하는데 온 정신이 팔린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을 향해 질타하며, 과거에 그들이 시기 질투하여 죽인 선지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순교자의 역사를 들추어냅니다. 마태복음 24장 35절을 보면,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고 부르짖으며 자기 동족 이스라엘에게 임할 저주를 예언하며 통곡합니다. 마치 주기철 목사님이 하나님의 신이 떠나는 평양성을 향해 통곡했던 그 음성으로 말입니다.


이때 예수께서 언급하신 선지자 사가랴가 바로 스룹바벨 성전을 세울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스갸랴 선지자입니다. 성경에는 무려 30명에 가까운 스가랴가 등장하지만 예수가 언급한 이 스가랴가 바로 스룹바벨 성전을 짓다가 죽임을 당한 순교자 스가랴입니다. 아버지 바라갸의 이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슥 1:1) 땅의 선지자 학개와 더불어 하늘의 선지자라 불리며 온갖 정치 경제적인 난관을 뚫고 스룹바벨 성전을 쌓는 그 일에 헌신하였다가 죽임을 당한 선지자 스갸랴를 묵상하며 예수는 자신에게 임할 피 흘림과 잔의 의미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몸으로 드릴 그 성전 회복의 역사를 묵상하며 스가랴처럼 그렇게 피흘리지 않으면 결단코 세워지지 못할 교회의 다가올 앞길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동족을 향한, 이웃을 향한, 형제를 향한 사랑보다는 질투심에 불타오르는 저들 카인의 후예들을 위해 자신이 피 흘려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에게는 자신이 그 당시 구했던 그 잔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자식들의 출세를 위해 예수께 나아와 특별히 간청했던 살로메에게는 자신의 그 말을 되새기며 뼈아픈 통곡을 하여야 할 날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비교적 잘 알려진 부유한 어부 세베대의 아내로서 두 아들을 키우며 그들이 아비의 기업을 이어가기를 기대하였던 어머니, 그러나 어느 날 메시아를 만났다며 생업과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게 된 두 아들을 위해 함께 예수를 따라다니며 봉양했던 살로메에게는 예수는 자식들의 출세를 위한 든든한 발판으로서 여겨지던 정치가요 실력자로 보였습니다. 그토록 믿었던 예수가 마침내 허망하게 십자가상에서 매달려 죽어버리는 것을 살로메는 바로 옆에서 목도하게 됩니다. (마 27:56, 막 15:40) 그녀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던 좌절과 절망은 처음에 제자들이 품었던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살로메는 예수의 부활로 인해 새롭게 희망을 품게 됩니다. 아마도 마가의 다락방에 함께 모여 성령 세례를 받게 되었으며 초대 교회에서 열심히 공궤하던 권사님(?) 중에 한 사람으로 변모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중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나타난 것처럼 그토록 기대하고 아끼던 장남 야고보가 사도들 가운데 첫 순교자로 헤롯의 칼에 어이없이 살해되고만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3대 수제자 그룹에 있었던 야고보가 제대로 역할 한번 해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어버린 것입니다. 아들을 우상으로 살아가던 살로메가 받았던 그 아픔과 충격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장남의 시신을 끌어 앉고 통곡하며 오열하던 살로메는 언젠가 자신이 예수를 찾아가 간청하던 그때의 일이 떠오릅니다. 너희가 내 잔을 마시려느냐고 예수가 던졌던 그 말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잔을 받을 수 있다고 큰 소리쳤던 지난 날 자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예수가 받았던 이 십자가의 잔,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져야만 했던 그 순교의 잔을 자신의 아들이 가장 먼저 받게 될 줄이야…. 그리고 그 의미도 모르면서 그것을 위해 간청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생각하며 가슴을 쳤을지도 모릅니다. 살로메의 간구는 받아들여졌습니다. 야고보는 가장 먼저 예수의 왼편 자리에 가서 앉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천국에서 예수의 왼편에 앉아있을 장남 야고보를 떠올리며 살로메는 자신의 간구대로 들어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를 절절하게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요즘 저는 셔우드 홀 선교사가 쓴 조선회상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양화진에 묻혀있는 수많은 개신교 선교사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지난날 흑암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던 참담하고 어두운 기억 속의 우리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목숨을 마다않고 찾아왔던 그들의 십자가, 그 속에 담긴 떡과 잔의 의미를 다시금 반추해 봅니다.


27살의 젊은 나이에 대동강 변에 뿌려진 토마스 선교사의 피와 순교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던져줍니까? 토마스의 기념 교회가 있던 그 순교의 터 위에 세워지는 평양과학기술대학… 그래서 우리는 그 일을 <스룹바벨 프로젝트>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로부터 성경을 전해 받은 자들을 통해 세워졌던 평양의 널다리골 교회, 장대재 교회, 장대현 교회와 그 부흥의 역사를 기억합니다. 무너져내린 그 도성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던 예수님의 무겁고 쓰라린 마음을 떠올립니다. 오늘도 그 제단 위에 뿌려질 스가랴의 피와 또 다른 토마스의 피를 묵상합니다.


예수께서는 오늘날도 한국 교회 지도자들을 향해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게 하시며 그들의 위선을 그들의 탐욕을 지적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도무지 깨우치지 못하고 자신의 영욕에 매달려 떡을 움켜쥐느라 바쁜 이 시대의 교회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질타합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를 따르겠다고 좇아 온 우리들을 향해서도 그의 피 묻은 눈길을 보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사역지에서조차 서로 비방하며 싸우며 시기 질투하고 높아지기를 원하는 한심한 우리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내 잔을 마시려느냐?


너희가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 욕심과 명예를 위함이 아니더냐? 민족심 때문이냐? 너희가 과연 자신을 욕하고 비방하며 죽이려 덤비는 저들을 향해 피를 흘리는 이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느냐? 너희가 내가 피 흘려 산 교회와 성전을 짓는 그 일에 스가랴처럼 순교의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느냐? 아니 네 옆에 있는 한 형제를 용서할 수 있겠느냐? 너희가 진정 죽고자 하느냐? 성배를 찾아 나서는 이 모험에 네 인생을 걸 수 있겠느냐?


진정코 너희가 내 잔을 마시려느냐?





(1) 21장에서부터의 내용은 예루살렘 입성 이후 고난을 향한 급박한 전개가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내용이 <종의 제자도>를 가르친 예수의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었던 십자가와 <잔(cup)>의 의미에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의 모습과 불순종하고 교만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지도자들의 모습 속에 나타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깊은 묵상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죽어야 하는 이유가 높아진 인간들의 교만 때문임을 자각하고 계셨습니다.

1)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겸손한 종의 모습)
2) 성전 청결(성전 회복을 위한 자신의 사역을 천명, 자신을 성전으로 드리려는 상징)
3) 열매맺지 못한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저주(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 임박한 저주를 예언)
4) 바리새인과 서기관 무리들과의 격돌

-  권위에 대한 도전
-  두 아들의 비유, 불의한 농부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
-  예수를 시험하는 바리새인들(납세 문제, 부활의 문제,
-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악독을 질타함(위선자, 높아지려는 자, 외식하는자, 소경된 인도자, 거짓맹세하는 자, 탐욕과 방탕하는자, 회칠한 무덤들, 선자자를 죽이는 자…) 5)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탄식
6) 종말과 재림의 때에 대한 예언들
7) 종말론적 비유 세 가지(열처녀의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8) 마리아의 향유 옥합 헌신: 장사지냄을 예비하심
9) 최후의 만찬 : 떡과 잔을 나눔
10) 겟세마네의 기도

[정진호] 제 12 떡 – 최후의 만찬 – 천국 쿠데타

 

(1)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밀실에서 만찬 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권총으로 살해했다. 이로써 18년간 지속되던 박정희 군사 정권과 유신 독재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 총성은 한국 정치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알리는 대단히 중요한 순간이었고 한국은 걷잡을 수 없는 정치폭풍 회오리에 다시 한번 휘말리면서 민주화라는 새로운 파도를 타고 1980년대의 격동기를 맞이하게 된다.


<군주론>에서 부하를 다스리는 냉혹한 권력 세계의 법칙과 기술을 군주에게 가르쳤던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평론>에서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들은 목숨이 위태로우면 먼저 군주를 타도하도록 쿠데타를 종용한다.(1) 군주는 승리한 장군을 두려워하여 세력이 커지기 전에 종종 제거하기 때문이다. 죽느냐 죽이느냐? 그것이 바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피의 역사였다.


쿠데타(Coup d’etat)는 정권 찬탈을 위해 부하가 무력으로 집권자를 제압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하극상(下剋上)의 반란을 의미한다. 수많은 독재자가 만찬석상에서 하극상 쿠데타를 당해 그의 측근인 부하에 의해 갑작스런 배반과 살해를 당함으로써 역사의 뒷문으로 사라져갔다. 타락한 인간이 지닌 집요한 권력에의 의지는 모든 친밀했던 관계를 깨뜨린다. 절친한 친구 사이나 주인과 종, 아버지와 아들, 주군과 신하 등 충성과 복종으로 이루어진 어떤 밀월 관계도 권력을 향한 야심이 들어가는 순간 배반과 살인의 피흘림의 현장으로 돌변하게 된다. 시저와 부르투스가 그랬고 고려 우왕과 이성계가 그랬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크로노스는 아버지 우라노스를 살해하고 권좌를 찬탈하지만 결국 그의 아들 제우스에게 또 그 자리를 빼앗긴다. 친부(親父) 살해를 통해서라도 권좌를 빼앗고자 하는 권력 세계의 비정함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동양 신화도 마찬가지다. 신농(神農)이라 불리던 농업의 신 염제(炎帝)를 남방으로 몰아내고 중국의 중원을 차지한 황제(黃帝)와 그에게 다시 도전하였다가 죽임을 당한 동방의 신 치우(蚩尤)사이의 치열한 권력 다툼이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동양 신화 속에 감추어진 이런 이야기들은 고대 동아시아의 각 민족 간에 패권 쟁탈을 위한 수많은 피흘림의 역사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2)


그 쿠데타의 현장마다… 감추어진 살의(殺意)와 음모, 위장된 거짓 웃음을 띤 최후의 협상안들이 오간다. 만찬의 풍성한 음식과 화려한 가무(歌舞) 뒤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감춰져 있고 배반자는 시시탐탐 칼을 뽑을 결정적인 기회를 엿보고 있다. 마침내 협상은 결렬되고 배반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권력자에게 다가가 최후의 키스를 던진다. 추종자의 충성의 눈길에 만족하며 권력자가 돌아설 때 배반자는 소리 없이 등 뒤에서 칼을 뽑아드는 것이다. 가장 부드럽게 웃으며 그러나 가장 잔인하게 칼을 꼽는 것, 그것이 배반의 미학이다. 그 같은 배반의 총칼에 맞아 쓰러질 때, 배신자를 확인한 후 놀라고 당황하여 그리고 분노에 치를 떨고 이를 갈며 죽어간 수많은 권력자들이 있었다. 그것이 쿠데타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 역사상 가장 이상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한 쿠데타가 있었다. 그 쿠데타에 의해 역사상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당한 한 사람, 그 분을 소개한다.


온 천하의 권세를 한 몸에 지닌 지상 최대의 권력자로 세상에 나타나실 수도 있었던 분, 그러나 그 권세를 스스로 버리고 가장 낮고 비천한 구유에서 태어나셨던 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나며 순종으로 가족을 섬기셨던 분, 겸손히 무릎 꿇어 세례 받으실 때 하늘 문이 열리며 축복받으셨던 분, 광야에서 시험받으며 사탄의 떡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셨던 분, 성전 꼭대기에 올라설 수 있었던 명예욕을 뿌리치셨던 분, 천하만국의 영광과 권세를 주겠다는 사탄의 유혹을 말씀으로 제압하신 분, 그러나 그 말씀의 권세로 세상의 수많은 권력자들을 놀라게 하셨던 분, 사랑의 권능으로 기적을 일으키며 가난한 자들을 배불리 먹이신 분, 소경된 자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신 분, 성전을 청소하시며 불의한 장사치들을 쫓아내신 분, 세상의 권력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으셨던 분, 그러나 세상의 불의와 위선에 대해 추상같이 질타하며 꾸짖으신 분, 수많은 무리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자신을 높이지 않으신 분…….


자신을 따르던 추종자들의 손을 피해 스스로 왕위를 뿌리친 분, 자신의 몸을 생명의 떡으로 제자들에게 먹이신 분, 제자들을 사랑하여 종의 모습으로 낮아져서 그들의 발을 씻기신 분, 자신을 배반할 제자를 알고도 끝까지 사랑하여 모른 체하신 분, 자신이 배반당하여 체포될 것을 알면서도 도망가지 않으신 분, 사랑하는 제자들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갈 것을 미리 알고 알려주신 분, 자신의 몸이 찢기고 피가 흐를 것을 알고 두려웠지만 그 잔을 피하지 않으신 분, 배반의 현장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고 반항하지 않으신 분, 대항하는 제자들을 오히려 꾸짖어 칼을 버리도록 명하신 분, 붙잡혀 갈 때도 마치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온순하게 끌려가신 분, 법정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입을 열어 변명치 않으신 분, 온갖 모욕과 치욕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인내와 순종으로 참으신 분,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 받을 때도 자신을 못 박은 원수들을 위해 사랑하며 기도하신 분, 마지막 순간까지 아버지와 떨어지기 싫어하셨던 분,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사명을 완수하고 숨을 거두신 분, 예수.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을 눈앞에 앞두고, 쿠데타를 기다리던 그 만찬석상에서 떡을 떼어 손에 쥐고 축사한 후 제자들에게 주며 말한다.
“받아먹어라.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다시 잔을 들고 하늘에 감사한 후 제자들에게 주며 말한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릴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다.



(2)


권력,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과연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다. 지식은 힘을 낳고 권력을 창출하는 화약과도 같다. 이성은 그 권력을 운반하는 총신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형상 가운데 담겨 있었던 이성을 우리의 영혼 속에 심어 놓으시고 그 속에 지식과 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연을 다스리고 타인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경배토록 하는 일에 사용하기를 원하셨다. 그 지식은 창조적이며 생산적이며 이타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될 수 있었던 도구였다. 다시 말해 힘을 사용하는 총구의 방향이 제한적으로 주어졌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스스로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을 먹어버린 타락한 인간에게 더 이상 지식은 안전한 도구가 될 수 없었다. 지식은 힘을 창출하며 곧바로 이기적인 총부리를 타인을 향해 겨냥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탐심을 채우기 위해 타인을 억압하고 배척하며 위협하고 이용하고 갈취하고 유린하고 감금하고 때리고 고문하고 그리고 죽였다. 아주 잔인하게.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역사였다.


현대사회가 지닌 특징은 지식-권력의 연계성이다. 근대 사회에서 지식의 폭발을 야기하며 본격적인 권력의 사회구조화를 일으킨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6, 17세기 서구에서 발생하였던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코페르니쿠스-케플러-갈릴레이-뉴턴으로 이어진 이 혁명은 단순한 과학적 발견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서구인들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사상혁명이었다. 뉴턴 역학에 의해 밝혀진 거대한 지식체계가 땅과 하늘의 모든 운동을 뭉뚱그려 합리적인 과학적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음을 알게 된 서구인들은 경이를 너머서 신세계를 향한 허황된 꿈을 꾸게 되었다. 과학 혁명에 의해 형성된 기계론적 세계관이 인간의 이성을 신봉하는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진보주의(progressivism)라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변하게 되었다. 인간의 머리로 무엇이든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의 손으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자만심이 서구 지성인들을 사로잡게 되었다. 그와 같은 시대사조를 등에 없고 19세기 중엽 찰스 다윈에 의해 조심스럽게 제기되었던 진화론은 전 세계를 뒤덮는 혁명적 풍조가 되었고 진화 사상이 되어 나타났다. 그리고 마침내 전 인류가 과학기술의 무한 발전에 의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환상에 빠지게 된 것이다.


서구 열강이 제국주의 식민지 영역으로 패권 쟁탈을 하며, 그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전 세계가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으로 첨예하게 나뉘는 과정 속에서도, 양 진영 모두 마침내 인류는 20세기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게 되리라는 신념만은 서로 공유하고 있었다. 과학기술은 이상사회를 꿈꾸는 자들에게 지식의 권력화를 이루어내기 위한 도구였다. 그와 같은 신념 틀 속에서 교육을 받아오던 사람들이 점차 그 꿈속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그리고 마침내 인류가 이룩해낸 과학기술의 열매가 핵폭탄이라는 엄청난 살상 무기로 등장하면서 온 인류를 핵전쟁의 위협 속으로 몰아넣기 시작한 그 무렵이었다. 한국 전쟁과 월남전의 참상, 끝없이 이어지는 냉전 상황 속에서 서구의 지성은 자신들이 가졌던 진보 이데올로기가 어쩌면 신기루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였다. 인간 이성에 대한 회의적 질문이 제기되자 그와 함께 소위 탈현대, 즉 포스트모던 논쟁이 시작되었다. 뒤엉키기 시작한 20세기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 속에서 고민하며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시도했던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철학자 중에서 푸코와 하버마스가 있다.


미셸 푸코는 지식과 권력이 불가분적 관계에 놓여있음에 천착한 사회철학자이다. 그는 인간이 이성과 비이성을 분리함으로써 얻어진 지식을 타인을 억압하고 배척하는 도구적 권력으로 사용하여 왔음을 지적한다. <지식의 고고학>, <광기와 문명>, <성의 역사>, <감시와 처벌>과 같은 그의 대표적인 저작을 통해 병, 범죄, 광기, 성, 정치 등의 역사성을 고고학적 방법론으로 파헤친다. 권력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규범과 규율과 감시 기능을 통해 사회의 비합리적 요소를 통제하고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 온 지식체계임을 분석한다. 그 속에서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적 병리현상과 난제를 인정하고 해명하고자 노력한다. 그는 현대사회를 엉망으로 뒤엉키게 한 주범으로서 근대적 이성에 주목한다. 계몽주의 시대의 산물인 인간의 보편적 이성에 대한 신뢰가 교조적으로 유포된 것에 반발하며 이성과 합리성의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려는 것이 그의 작업의 본질이다. 그러나 자신의 해체적 분석에 의해 재구성된 지식-권력의 신 계보학이 인간의 권력을 창조적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또 다른 규범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점에 있어서 여전히 그는 인본주의적 이성주의자의 범주를 넘지 못하고 있다.


그에 비해 하버마스는 문제 해결 방식을 인식론에 기초한 비판적 해석학을 통해 접근한다. 합리적 이성에 장애를 일으킨 요인을 의사소통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의사소통의 규범화를 통해 합리적 이성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낙관론에 기초하고 있다. 언어의 혼란을 통해 바벨탑의 역사가 중단되었으니 이제 그 언어를 합리적으로 통일시켜서 다시 그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관계성에 주목하고 있다. 흉측하게 얽히고설킨 거대한 퍼즐을 맞추고 있는 현대인들을 바라보며 푸코가 잘못된 퍼즐을 모두 해체하여 다시 시작하자고 주장한다면, 하버마스는 의사소통만 잘 할 수 있다면 헝클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퍼즐 맞추기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성은 타락한 이성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성을 담는 그릇인 언어 역시 타락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매일매일 나의 세 치 혀조차도 제어하기 힘들어 온전한 관계형성에 실패하고 있는 타락한 존재일 뿐이다. 권력을 창출하는 지식의 통로가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어져 있을 때만이 온전한 권력이 배출된다. 결국 권력이란 관계성의 산물이다. 모든 관계의 시작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것이 단절되는 순간 인간은 깨어진 존재가 된다. 불완전한 관계는 불완전한 권력을 창출한다. 또한 불완전하고 악한 권력은 다시금 인간사회의 관계성을 깨뜨린다. 악의 확대 재생산을 일으키는 이 같은 파괴적 연쇄반응에 의해 사회는 급격히 타락한다. 그것이 역사다. 인간의 힘으로 그 폭발적인 악의 연쇄반응을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푸코와 하버마스……. 한 마디로 하마가 코푸는 소리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이 세상은 악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다. 그 사실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그것을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표현하며 열거하고 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국가에서 그리고 국가 간에도 악한 권세는 영향은 치밀하고도 포괄적으로 퍼져있다. 끔찍한 가정 폭력과 직장에서의 수탈과 억압,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소외 및 범죄 행위들, 국가 공권력에 의한 감금과 압제, 더러는 독재자의 횡포에 의한 정치적 탄압과 고문을 통한 비인간화, 나아가서는 전쟁터와 수용소 군도, 아우슈비츠 같은 곳에서 벌어진 그리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탈인간적 만행에 이르기까지…….


독일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일컬어지는 괴테의 <파우스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미망(迷妄)에서 빠져나와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결국 독일 계몽주의 정신을 화려한 문학적 언어로 구현한 거짓 복음에 불과하다. 이 시대에 교묘하게 위장하여 다가오며 영적인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 이 악의 권세에 대하여 리차드 포스터는 특별히 일곱 가지를 경계하고 있다. 돈, 성, 종교와 율법, 기술문명, 자기도취, 군국주의, 절대적 회의주의가 그것이다. 변신의 명수인 사단은 우리를 영적으로 현혹하며 끊임없이 속이고 미혹하는 거짓의 아비이다. 어떻게든 하나님 위에 올라설 수 있는 거짓 우상을 만들어 우리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우리를 지극히 높은 산 위로 데려가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내게 엎드려 경배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하며 유혹한다. 세상의 권세에 대한 그 유혹은 너무나도 매혹적인 것이어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았던 파우스트 박사의 전철을 밟고 마는 것이다. <파우스트>를 르네상스 인본주의를 꽃피운 독일 정신의 극치라고 표현하며 자만심에 가득했던 독일인들……. 그 파우스트 박사의 말로는 아우슈비츠로 끝을 맺는다.



(3)


예수가 나무에 매달려 못 박힌 순간, 그 십자가의 현장에서, 흐르는 강물처럼 쉼 없이 흘러가던 죄의 역사는 잠시 숨죽이고 멈추어 섰다. 도도히 흐르는 오만한 역사(chronos)의 물줄기 속에서 온갖 피비린내를 부르며 약탈하고 빼앗고 억누르고 때리고 죽이던 그 권력의 횡포는 하나님이 정하신 역사(kairos)의 정점에서 마침내 삼라만상의 주인이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그 외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인류가 과거 역사 속에서 범했던 모든 무자비한 권력의 잔혹성과, 진리를 향해 침 뱉고 뺨을 때리며 모욕하던 로마 군병의 포악함과, 장차 수많은 독재자의 횡포 속에서 극악한 고문으로 비참하게 죽어가야 할 수많은 정치범 수용소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그 순간 십자가 세 개의 못 자국 소리를 향해 모두 빨려 들어갔다.


쾅 쾅 쾅 


제 3 시의 적막이 이어졌다.


온 우주가 그 순간 경악하였다. 하늘의 해와 별과 달이 파랗게 질렸고 창백하게 빛을 잃었다. 땅의 산천초목이 몸을 떨었고 강과 바다가 놀라 흔들리고 갈라졌다. 시공간을 창조하셨던 최초의 그 말씀이 숨을 거두는 그 순간 시간과 공간이 휘청거리며 일순간 흔들렸다. 죽었던 자들이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났으며 성전 휘장이 갈라졌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던 사단의 그 야욕이 마침내 성취된 것만 같았다. 세상 풍속을 휘어잡고 사람들을 미혹하던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승리감에 도취되어 잔인하게 웃으며 그 장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포도원 주인이 보낸 상속자 아들을 죽이고 무자비한 폭도들이 포도원의 경영권을 찬탈한 것이었다. 천국 쿠데타가 일어난 순간이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 많은 생각들은 무엇이었을까?


제 3 시의 침묵, 두려움과 고통의 시간에 예수는 조용히 매달려 있었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저항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이 그의 온 몸을 제압하고 있었다. 간간히 나지막한 신음 소리만 배어나왔다. 십자가 주변에 몰려든 군중들이 조롱하며 내뱉는 말들이 들려왔다.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겠다더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렇다면 어찌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느냐? 서기관과 장로들이 대꾸한다. 저가 남은 구원하면서 자신은 구원치 못하는구나. 어서 내려와 보아라. 네가 진정 이스라엘의 왕이냐? 예수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본다. 자신에게 헌화하며 환호하던 군중들이 어느새 권력자의 편에 서서 이제는 자신을 손가락질 하고 조롱하며 고개를 흔드는 그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을 못 박은 후 옷을 빼앗으려고 서로 싸우는 포악한 로마 군병들도 눈에 띈다. 피에 물든 그 옷을 차지하려고 제비뽑기를 하며 다투는 탐욕스런 저들에게도 과연 구원이 임할 수 있을까? 아버지……. 정말 약속하신대로 이 십자가가 저들마저 구원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지금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못 박힌 상처에서 전율하는 고통이 온 몸을 쥐어짜고 전파된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 때에 옆에 매달린 한 강도가 고통 중에 쥐어짜며 예수에게 욕을 퍼부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더냐? 너와 우리를 왜 구원하지 못하느냐? 그러자 두 강도들이 서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중 하나가 욕하는 다른 강도를 꾸짖어 나무라기 시작했다. 네가 아직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우리 죄로 말미암아 벌을 받는 것이니 당연하거늘, 이 죄 없고 의로운 사람에게 네가 어찌 욕을 하느냐? 그가 갑자기 간절한 목소리로 예수를 불렀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고개를 비틀어 간신히 그를 바라보았다.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간절함이 뒤섞인 그의 눈길이 들어왔다. 갑자기 그가 가련하고 불쌍했다. 작은 미소를 그에게 보내며 말했다. 그래, 걱정마라.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듣자 그의 얼굴에서도 실오라기 같은 희망이 서서히 번지더니 마침내 얼굴이 환해졌다.


태양이 눈부시다. 덥다. 유다는 지금 어디 있을까? 사랑하던 제자 유다의 배신을 생각하자 고통이 가중되었다. 발을 씻겨줄 때 당혹감에 젖어 눈길을 피하던 그의 모습이 생각났다. 겟세마네에서 겁에 질려 자신에게 키스하던 유다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아버지 저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 고통의 순간에 괴로움을 함께 지고 있을 그 소외된 영혼을 예수는 찾아 나서고 싶었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던 목자처럼,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던 여인처럼……. 유다에게 쏟아질 역사의 손가락질을 생각하며……. 너무 불쌍해서 예수는 눈물지었다. 베드로가 떠올랐다. 열심이 있는 만큼이나 실수투성이였던 제자 베드로. 대제사장의 집안 뜰에서 멀찌감치 겁에 질려 따라오던 베드로, 자신을 부인한 후 돌이켜 눈이 마주치자 뒷걸음질 쳐 도망가던 그가 생각났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는 베드로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 예수는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였다. 주여 사단이 저를 삼키지 못하게 하소서. 아끼던 제자 요한과 그를 따르던 많은 여인들의 슬픔어린 모습을 굽어다 보았다. 긍휼한 마음이 솟아났다. 막달라 마리아와 살로메, 글로바의 아내……. 그 속에 섞여 오열하는 어머니 마리아가 있었다. 마리아는 거의 실신한 듯 부축을 받아 기대어 있었다. 어머니의 품속에서 행복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아픔만을 안겨주었던 장남……. 동생들을 앞세우고 자신을 찾아 나섰던 어머니를 내치며 그녀의 가슴에 못을 박았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여자여……. 이후로 요한을 아들로 여기소서. 사랑하는 요한아, 이제 네 어머니로 모셔다오.


한바탕 아픔이 몰려가자 다시금 몽롱한 기억의 조각들이 고개를 쳐든다. 간신히 얼굴을 들어 주변을 바라보니 드문드문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칼을 찬 백부장의 모습과 밤중에 자신을 몰래 찾아왔던 니고데모와 부자 관원 아리마대 요셉의 모습이 눈에 뜨인다. 악의 권세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나서지 못하는 자신들에 대한 자괴감으로 괴로워하는 흔적이 엿보인다. 공포의 십자가 앞에서 형언할 수 없는 경외감에 떨며 기이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저들……. 아버지 저들에게 믿음을 주소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허락하소서. 자신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왔던 구레네 사람 시몬의 겁에 질린 얼굴도 얼핏 보였다. 두려움에 떨며 숨어있을 다른 제자들의 얼굴도 하나씩 떠올랐다. 마지막 만찬을 하며 떡을 떼어주던 그들, 두려움에 휩싸여 근심어린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던 그 제자들. 아버지 저들의 인생을 축복하소서. 저들이 장차 떡의 인생을 살아가며 자신을 내어줄 때 다시는 근심과 두려움에 싸이지 않게 하시고,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사 저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소서.


해가 중천에 떴다. 온 몸에서 피와 물이 모두 빠져나가 버린 것만 같았다. 극도의 갈증이 그의 혓바닥을 늘어뜨리며 식도를 강제로 잡아 빼는 듯한 고통을 가져왔다. 숨이 가빠왔다. 아버지 어째서 이 고통을 제게 주십니까?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저를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어째서 이 고통을… 곧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면 나는 어찌되는 거지? 갑자기 공포가 몰려왔다. 내가 이 모든 이들의 죄 짐을 지고 이제 죽어버린다면? 지옥으로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아니야. 이 순간을 위해서 지금까지 달려오지 않았던가? 그래 이것이 아버지가 내게 맡긴 사명이었지. 그런데 왜 이렇게 두려운 거지? 인간들이 만들어낸 온갖 가증스런 죄의 굴레가 그의 머리에 가시면류관으로 씌워진 것만 같았다. 아버지를 떠나서 한시도 존재해 본 일이 없는데……. 이 죄의 삯을 내가 혼자 다 질 수 있을까? 아버지의 사랑에서 영원히 멀어지는 것인가? 더 이상 아버지가 나를 돌아보지 않으실까? 아니야. 그럴 순 없어. 아버지 정말 나를 버리실 겁니까? 무섭다. 내가 그토록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도록 간구했건만……. 아버지 원망스럽습니다.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눈물이 쏟아졌다. 그때 갑자기 해가 빛을 잃으며 어두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정오 육시에서 구시에 이르는 사이에 어두움이 임하여 십자가 주변을 감쌌다. 예수는 고개를 숙이고 마치 죽은 것처럼 가만히 늘어져 있었다. 십자가 주변에 몰려 있던 군중들도 이제 구경거리가 끝난 듯 하나씩 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하였다. 로마 군병은 십자가 밑에 창을 세워놓고 자기들끼리 둘러 앉아 노닥거리고 있었다. 가족들과 여자들만이 여전히 흐느끼며 간간이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지루한 적막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죽은 듯이 잠잠하던 예수가 고개를 천천히 들더니 하늘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것은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아들의 처절한 고통의 외침이었다. 그리고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목마르다. 그 소리를 듣자 병정 중 하나가 서서히 일어나 옆에 있던 해융을 포도주 그릇에 담그더니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가로 가져갔다. 예수는 그것을 맛보고 고개를 돌려 피하였다. 그리고 안간힘을 쓰듯 고개를 들어 앞을 향해 뚫어지게 응시하였다. 그의 피멍 들린 입술이 떨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 이루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 그리곤 고개를 떨어뜨려 숨을 거두었다. 그때 천둥소리와 함께 사나운 소낙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로마 군병이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찔러 마지막 남은 피와 물을 다 쏟아내었다. 그 빗물에 젖어 십자가의 피가 땅으로 스며들었다. 아벨의 피를 받았던 그 저주받은 땅에 예수의 피가 촉촉이 스며들어 흐르기 시작했다.


쿠데타는 끝났다. 그는 죽었다. 그러나 그의 피는 강을 따라 바다를 건너 오대양 육대주를 감싸고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사는 다시 시작되었다. 억압에서 자유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전쟁에서 평화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굶주림에서 배부름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그리고 죽음의 떡에서 생명의 떡으로.





(1) 마키아벨리, <군주론>, <로마사 평론>을 참조하라.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 치우가 산동성을 중심으로 한 동이(東夷)계 민족이 숭배하던 신이었던 점과 치우가 거느리던 풍백(風伯) 우사(雨師)와 같은 장수가 단군 신화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치우를 섬기던 한민족의 조상이 황제와의 패권쟁탈전에 져서 중원에서 한반도로 밀려났을 가능성도 엿보인다.

[정진호] 제 11 떡 – 거룩한 자랑 – 진설병

 

(1)


학생들과 선악과 문제를 공부하며 항상 던지는 질문이 있다.
우리 일생을 두고 따라다니는 세 가지 유혹 (물질, 명예, 권력) 중에서 너희는 어느 것에 가장 취약하다고 생각하는가? 이 질문을 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 자신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져보곤 한다. 물론 세 가지가 서로 연관을 맺고 있기도 하고, 그 어느 하나도 만만한 것은 없지만 역시 나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 내가 걸려 넘어지기 쉬운 유혹은 명예의 문제인 것 같다.


물질은 한번 건너뛴 경험이 있기에 – 비록 여전히 잔 펀치로 괴롭힘을 당하고는 있지만 –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놓을 수 있겠다는 신심(信心)이 있다. 또한 권력의 문제는 아직 내가 심각한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간 경험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나를 잡아끄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문제는 명예심, 다시 말해 내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다.


명예심을 어떻게 정의할까?
생각나는 대로 브레인스토밍을 해보자.


보암직한 것, 보이고 싶은 마음?
프라이드, 프라우드한 마음?
뻥 튀기를 하고 싶은 마음?
실제보다 더 크게 더 잘나게 보이고 싶은 마음?
노출증, 귀걸이, 화장, 섹스어필?
허영심, 명품, 안목의 정욕?
좋은 집, 멋진 자동차?
성적, 일류 대학, 박사학위, 허탄한 자랑?
논문, 집필, 연주, 그림, 공연?
설교, 영적 교만, 성전 꼭대기?


어쨌든 보는 것과 관련되어 있음에 분명하니 우리의 눈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다.
그렇다면, 만일 소경 아니 시각장애인들은 안목의 정욕이 없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 하다. TV 토크쇼에 나온 시각장애인이 화장을 하고 목걸이 귀걸이를 하고 나온 것을 본 일이 있다. 뿐만 아니라 좀 더 추상적인 명예욕은 시각과는 무관하게 나타나는 일반 현상인 것 같다. 명예심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 심층부에 도사리고 있는 본질적인 죄성의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너구리 때려잡기 게임처럼 하나를 집어넣으면 다른 것이 튀어나오고 그것을 잡으려하면 또 다른 녀석이 고개를 내미는 게릴라성 욕구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멋진 글을 통해 내 자신을 내세우고 싶은 출렁이는 욕망의 파도 언저리에 노출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코스타 집회에 가서 간증설교나 세미나를 할 때에도 종종 이것이 내 자신을 내세우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두려움에 싸이기도 한다. 다른 강사들과 비교하여 더 잘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도 하고, 집회 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은혜를 받았다고 인사를 하면 내면의 파도가 더욱 거세어진다. (물론 감사하게도 그 욕망의 파도 뒤에 따라오는 은혜의 더 큰 파도가 있기에 이글을 계속 쓸 수 있으며 코스타에도 계속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글을 쓰는 일이나, 학문을 연구하는 일, 설교를 하는 일, 연주를 하는 예술 활동 등의 본원적 가치를 무시하고 모두 명예욕을 위한 것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여인의 아름다움 자체를 문제시 하는 것도 아니며 화장하는 여인들을 무조건 비판하는 꽉 막힌 사람도 아니다. 그 행위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의 영적인 상태에 의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단장한 여인의 순결한 모습 淡【?하나님이 허락하신 돕는 배필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낄 수도 있다. 하나님의 강권하심의 은혜에 사로잡혀 눈물을 흘리며 글을 쓸 때도 있고, 학문의 깊은 경지에 도달하여 자연 세계에 편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기뻐할 때도 있으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나타나는 비전의 통로가 되는 설교가 있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영성 깊은 연주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수시로 명예욕이라는 뿌리치기 힘든 함정에 쉽사리 빠져든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2)


명예심(Pride), 자랑(boast)은 스스로의 우월감을 남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은 욕망을 뜻한다. 그것이 심중에 있건 입이나 행동으로 표출되건 간에 인간은 그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악한 죄의 유혹에 빠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선악과로 우리를 유혹하던 사단의 말은 궁극적으로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창 3:5)”는 것이었고 우리는 그 함정에 깊이 빠져버렸다.


결국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둘이 되실 수 없는 분이기에 가짜는 죽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죽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꿈틀대는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죄의 본성은 끊임없이 우리를 죽음 언저리로 몰고 간다. 그것을 우리는 교만이라고 부른다. 교만은 곧 죽음의 씨앗인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는 속담이 있다.
사람만이 자기 이름을 가진 존재이다. 종족의 이름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이름을 가진 존재는 사람밖에 없다. 그것은 사람만이 인격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름은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었을 때 비로소 발생하게 된다. 세계에 60억의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할지라도 그들은 모두 이름을 지니고 있다. 그 이름과 더불어 인생을 살아간다. 그리고 죽어서도 그 이름을 후손에게 남기는 것이다. 이름을 기억하고자 많은 민족이 조상의 묘소를 만들고 비석을 세우고 또한 족보를 통해 그 이름을 보존하기도 한다.


대학교 1학년 때 함께 다니던 동급생이 갑자기 죽은 일이 있었다. 출석을 부르던 교수가 그 학생의 사망 소식을 듣더니 무심하게 출석표에 자를 대고 그 이름을 두 줄로 지워버렸던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우리 가운데 없었으며 곧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만큼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 자체이기도 하다. 인격체인 사람에게는 이름이 곧 자신이다. 이름이 사라지면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 이름이 올라가면 그 자신이 올라가는 것이요 이름에 먹칠이 가해지면 그 사람의 존재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애완견을 키우는 사람이 개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그저 유사 인격성을 부여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개가 사람처럼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존재와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어떤 동물도 죽은 이후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사람만이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는 노력을 한다. 


남들 앞에 화려한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들을 많이 하는지? 명예욕에 휩싸인 인간들에 의해 수없이 발생하는 허위적인 행동들을 생각해보라. 명분과 이름을 중시하는 유교문화권의 영향으로 한국 사회는 더더욱 이 병이 깊다. 양반과 가문을 따지던 옛 습관이 요즈음은 뿌리 깊은 학벌사회로 변질되었고,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는 말 뜻 그대로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직업을 택하기 위해 가진 노력을 다한다. 마치 과거에 장원급제하던 시절처럼 사법고시에 청춘과 전 인생을 거는 법학도들, 학문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박사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서 안간 힘을 쓰는 그들이 법관이 되고 교수가 되었으니 사회가 온전할 리가 없다. 온갖 타이틀을 명함에 새기고 이력서에 한 줄 더 넣기 위해서 기를 쓰다보니 가짜 박사요 가짜 자격증이 난무한다.


이 현상은 크리스천 사회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어쩌면 한 수 더 뜬다고 해야 옳지 않을지? 유교적 계급의식에 물든 한국인들에게 집사요 장로요 권사요 하는 타이틀 보다 매력적인 것은 없다. 그것을 자신의 이름 위에 붙여지는 타이틀이나 계급장으로 인식하여 사회적 존경이 뒤따라온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어릴 때 동네 골목에서 사카린을 녹여 만들어 먹던 뽑기와 같이 그것은 잠시 입안에서 달지라도 금세 부서지고 녹아 없어질 사이비 명예요 가짜 계급장일 뿐이다. 그 같은 명예욕의 연장선상에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된 사람은 없을까? 교회 안에서도 높아지려는 경쟁심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일부 교회와 교단에서 장로를 돈으로 사고 총회장 선거에 온갖 부정부패와 금품이 오간다는 것은 오히려 상식이 되어있다. 영적인 명예심은 세상적인 명예심보다 더 집요하고 끈질기다. 그것은 마귀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어떤 모습이든 우리를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뛰어내려 이목 집중을 받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자신의 명예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 결코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마귀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온갖 감언이설로 우리를 성전 꼭대기로 몰고 간다. 뿐만 아니라 옆집 성전과 높이를 견주어보게 한다. 경쟁심을 부추겨 끝없는 질투심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이다. 


사촌이 밭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속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즘 시대 같으면 완전 핵가족 시대가 되어서 도시화된 사회 속에서 사촌과 마주칠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생길만큼 사촌은 가까운 이웃만도 못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옛날 농경 사회와 씨족 사회에서의 사촌의 의미는 가장 가까운 가족은 아닐지라도 적당히 가까운 그래서 매일 얼굴을 부딪치며 살 수 밖에 없는 오늘날의 이웃이나 직장 동료의 의미와도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잘 되는 것을 도무지 우리는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후배가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할지라도 만일 그의 전문성이나 실력이 객관적으로 인정이 된다면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서구사회와는 달리, 동료나 후배가 먼저 승진하면 옷을 벗고 나갈 수밖에 없는 일부 직업의 이상한 풍토는 우리 사회만이 지닌 악습 중 하나이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멀리 있는 원수 국가의 국민들도 아니요 잔인무도한 테러리스트도 아니다. 일상 속에서 매일 부딪히는 동역자가 우리를 괴롭힌다. 그것도 한 부서나 한 팀에 속한 사람들, 그리고 바로 업무적으로 교통할 수밖에 없는 상사나 직속 부하가 가장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그 부딪힘 속에서 감추어져 있던 온갖 죄성이 다 튕겨져 나온다. 교만한 사람이 상사가 되면 온갖 비열한 방법으로 부하 직원을 착취하고 억누르려 한다. 그러나 설사 그렇지 않은 경우라 할지라도 이 싸움은 그치지 않는다. 상사가 호락호락해 보이면 상사의 권위를 도무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랫사람들의 교만이 이제 고개를 쳐든다. 상사의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온갖 덜미를 잡아 비판하지만 사실상 그들이 같은 위치에 오르면 한 수 더 뜨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그 같은 속성의 정체는 자신이 더 높아지기를 원하는 마음, 즉 사단이 넣어준 하나님이 되기까지는 쉼이 없는 교만이 그 본질인 것이다.


<디어 헌터>나 <하얀 전쟁>과 같은 전쟁 영화를 보면 전쟁터에서 진정한 인간성의 본질이 드러나며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상태에 있는지 깨닫는다. 그 같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의 감추어진 연약한 죄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직장은 떡을 사이에 둔 전쟁터요 직장 동료들은 전우들이요 더러는 적군들이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떡 앞에서 완전히 노출되어 벌거벗은 자신을 발견한다.


더러는 뭔가 큰일을 이루었다 싶은 사람이 나타나면 마귀는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칭찬하고 추켜세움으로써 내심 자신에 대한 우월감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그리고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려 마침내는 왕을 삼으려 한다. 세상의 왕이 되고 싶은 욕망은 도무지 뿌리치기 힘든 것임을 마귀는 잘 알고 있다. 대형 교회나 큰 선교 프로젝트를 통해 널리 알려지고 성공한 크리스천 리더 가운데 결국 이 유혹에 넘어가 말년에 실패하고 오명을 남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 경우 처음부터 자신이 왕으로 등극하려고 마음먹는 사람은 드물다. 처음에는 나폴레옹이나 박정희처럼 모두 자신에게 맡겨진 혁명과업만 완수하면 정권 이양을 하겠다고 약속을 한다. 실지로 그런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높아지려는 본성을 죄의 뿌리로 지닌 인간들에게 마귀는 달콤하게 집요하게 속삭인다. “너 아니면 이 일을 할 사람이 없어. 그냥 못이긴 체하고 그들의 말에 맡기라고.” 이런 상황에서 예수의 전술은 정말 단순하였다. 뿌리치고 달아난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도한 무리들이 몰려들어 예수를 왕 삼으려 했을 때 예수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글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라고 말하든지, “아마도 나 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있을 겁니다. 사정이 급하시다면 적임자가 나타날 때까지만 제가…” 라고 한 다리를 걸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쏜살같이 달아난 것이다. 왕이 되고 싶은 욕망, 이 유혹은 예수가 달아나야할 정도로 심각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3)


A.W. 토저가 쓴 <예배인가 쇼인가!> 라는 책이 있다.(1) 그 책에서 토저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조차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쇼로 전락할 수 있음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사람의 창조 목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들이기 위함임을 설파하며 참 예배의 본질을 되찾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배를 드리는 강단에서조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을 위해 각색되는 온갖 문양(紋樣)들이 있다. 믿음 없이 드리는 카인의 예배와 모르는 것을 예배하는 사마리아인의 예배는 차치하더라도, 진정 알고 믿는다는 공동체에서 조차 온갖 부수적인 치장들이 십자가를 가려서 도무지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영광 받기에는 여유가 없는 교회가 대다수이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헌금, 자신을 나타내기위한 성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한 설교, 교회의 이름을 내세우기 위한 선교와 구제……. 모든 것이 사람들의 이름을 내고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 신경과 에너지가 집중된 교회에서 어떻게 참 예배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일찍이 자신의 백성을 광야로 이끌어내신 이후, 참 예배의 본질을 알려주시기 위해 성막을 짓도록 명하셨다. 성막은 장차 오실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나타내는 모형이요 대속의 피로 구원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함축적 가시적으로 담고 있는 신비의 구조물이었다. 성막 안에서 제사장에 의해 행해졌던 제사 행위는 그와 같은 구속의 원리를 반복적으로 깨우치기 위해 주어진 사랑과 교훈의 리허설이었다. 단번에 완전한 구원을 이루신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성막과 제사의 형식은 폐하여졌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과 의미는 여전히 살아있다.


성막 문을 들어서면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피의 제단(alter)이 먼저 눈앞을 가로막는다. 제사장들은 몸을 씻고 옷과 성막의 모든 기구에 관유(anointing oil)를 뿌려 성결케 한 후 희생될 번제물을 안수하여 제단 앞에서 잡아 그 피를 단 사면에 바르고 나머지를 단 밑에 쏟은 후 단 위에서 불살랐다. 성막 안뜰을 오가며 더럽혀진 수족을 물두멍(laver)에서 깨끗이 씻은 후 비로소 성소(holy place)로 들어간다. 성소 안은 왼쪽에 놓인일곱 갈래의 금 촛대에서 나오는 휘황찬란한 빛에 의해 온통 황금으로 빛나고 있다. 바로 오른쪽에 놓인 상에는 열 두 조각의 떡이 여섯 개씩 두 줄로 나란히 놓여 있다. 이것이 진설병(showbread)이다. 이 떡을 먹은 후라야 비로소 지성소(the most holy place)의 휘장 바로 앞에 놓인 향단(alter of incense)에서 분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수많은 제사는 여기서 멈추게 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분향하는 것으로 상징되는 예배 행위, 그것을 위해 거쳐야할 단계 중에서 마지막 관문이 성소 안에 있는 진설병을 먹는 것이었다. 구약의 제사장은 이 진설병을 먹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성도들인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참 예배자로 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소 안의 진설병을 맛보아야만 한다. 과연 진설병이란 어떤 떡인가?


진설병, SHOWBREAD!
이 무슨 희한한 이름의 떡인가?
나는 무심코 영어 성경을 보다가 진설병이라는 단어가 showbread(2)라고 번역되어 있는 것에 착안하여 깊이 묵상하게 되었다.


보이기 위한 떡? 자랑하기 위한 떡?
도대체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떡이며 누구에게 자랑하기 위한 떡이란 말인가?


남을 의식하며, 사람들을 의식하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자신의 이름을 자랑하기에 급급하여 살아가던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서 가까이 나아갈 때, 하나님은 진설병을 먹으라고 명하신다. 이름하여 “자랑의 떡”이다.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리석은 일이요 아무런 매력도 느낄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이방신의 신전이 어마어마하고 화려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하여 성막의 안뜰은 너저분한 흙바닥으로 노출되어 있어서 제사장은 날마다 물두멍에서 더럽혀진 자신의 수족을 씻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떡의 전쟁터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더럽히게 되는 그 상황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의 상징인 피의 제단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하며 그것을 통과한 이후 성소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성막의 성소를 만든 재료는 외피가 붉은 물을 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되어있으며 그것을 우중충한 해달의 가죽으로 덧씌우고 있다.(3) 마치 겉으로는 아무런 흠모할 만한 점도 없이 세상 속에서 버린바 되었던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성막 안은 온통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어 휘장을 젖히고 들어가는 사람마다 황금 촛대에서 비추이는 황금빛 물결에 압도당하고 만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으로 상징되는 진설병을 먹으라는 것이다.


예수와 만나는 장소, 성소! 그곳은 세상의 어떤 자랑도 소용이 없고 빛을 잃어버리는 곳이다. 오직 예수만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 곳, 내 인생과 목숨과 모든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예수, 그 예수를 자랑하는 그 떡을 그곳에서 먹으라는 것이다. 그곳에서 어떻게 내 행위와 내 이름과 내 학벌과 내 직위와 내 믿음과 내 신학과 내 거룩함을 내세울 수 있단 말인가? “자랑의 떡 진설병을 먹으며 너희는 내 앞에서 한번 자랑해 보아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위해 내어준 내 아들 예수의 살을 먹는 너희들아! 진정 너희가 내 앞에서 자랑할 것이 있단 말이냐?” 그 자랑의 떡을 먹는 사람마다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자신의 자랑거리를 내던지며 통곡하고 오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소리쳐 고백할 것이다. 예수 주여, 당신만이 내 인생의 자랑거리입니다. 나는 오직 당신만을 자랑합니다. 그 뜨거운 고백이 있은 후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를 성소 안에서 그렇게 뜨겁게 만나기를 원한다. 미지근한 신앙, 자기 자랑에 급급하고 세상의 휘장으로 십자가를 가려버린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힘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며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 19)” 그리고 성전된 우리 마음의 성소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4)


예수와 더불어 먹는 떡, 진설병. 그 떡이야 말로 우리 인생의 자랑의 시작이요 끝이 되어야 한다.


세계 도처의 공동묘지에는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비석이 세워져있다. 그들이 살아있을 때 어떤 삶을 살았든지 그들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화려한 비석으로 치장한 사람이건 명성도 빛도 없이 무명으로 살다가 사라진 사람이건 사람은 비석에 이름을 남긴다. 그러나 비석에 남겨진 이름에는 아무런 자랑도 의미가 없다. 더 이상 그것은 죽은 자의 자랑이 될 수 없다. 우리 이름이 기록되어 영원히 남게 될 자랑거리는 생명책에 적혀진 이름과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이 예수와 더불어 진설병을 나누었는가 하는 그 행위가 적힌 그 이름이 될 것이다.(계 21:12)





(1) A. W. Tozer, 예배인가 쇼인가, 규장, 2004
(2) KJV, NKJV 및 ASV 등 여러 성경 번역에서 진설병을 showbread로 번역하고 있다.
(3) M. R 디한은 그의 저서 <성막(tabernacle)>에서 성막의 신비한 구조와 상징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4) 이 말씀은 본질적으로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성도들을 향하여 주신 말씀으로 보는 것이 바른 해석이다.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아직 예수를 영접치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들어가시기를 원하여 문을 두드리는 장면이 아니다.

[정진호] 제 10 떡 – 갈멜산의 한 판 승부 – 같은 성정 다른 능력

 

(1)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선지자들…….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 사무엘과 다윗과 엘리야와 이사야, 그리고 세례 요한과 사도 바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삶을 살펴볼 때, 우리는 일종의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불가능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꿈과 환상을 좇아 순종하였을 뿐 아니라 환란에 빠진 자기 민족을 기근과 속박과 전쟁에서 구해낸다. 거짓 선지자와 우상 앞에서 담대히 맞닥뜨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싸워 이기는 용기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순교의 피를 뿌리는 그들의 믿음에 감탄을 금할 길 없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은 우리와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믿음을 가진 존재들이라는 생각 때문에 우리 자신이 왜소해지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항상 그들을 특별한 존재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다.


과연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이었을까?


그러나 조금만 더 성경을 들여다보면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요 동일한 성정을 지닌 존재들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 역시 목숨의 위협을 느낄 때 두려움으로 위축되어 거짓말을 하였고, 자신의 혈기를 이기지 못하여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기도 하고, 물질과 성의 유혹에 넘어가 불륜을 鄕嗤8? 자녀교육의 한계에 부딪혀 실패하기도 하였으며, 옥에 갇혀 절망하며 의심하기도 하였고, 사역에 대한 갈등과 욕심으로 동역자와 다투어 갈라서기도 했던 사람들이었다. 성경 기록의 진실성은 성경 속에 등장하는 위인들의 삶의 모습을 전혀 과장하지 않을 뿐아니라 그들의 인간적인 한계를 가감없이 여과없이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는 데에서 나타난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는 한결같은 죄인이요 부족한 인간들임을 오히려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지닌 인간적인 성정에 의해 그들이 어떻게 실패하였으며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그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달랐다. 그들의 삶에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왔을까? 그들 역시 떡의 전쟁 속에 휘말려서 고민하고 몸부림치며 살았던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그 전쟁의 승리자들이 되었다. 그 비결을 알고 싶은 것이다.



(2)


구약시대의 선지자 중 단 한 사람을 꼽으라면 엘리야를 택해야 하지 않을까? 그만큼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명사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구약의 선지자 가운데 에녹과 더불어 죽음을 보지 않고 바로 하늘로 승천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었으며, 예수님이 변화산상에 올라가신 순간 모세와 함께 나타났던 두 사람 중 다른 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만큼 하나님께 특별대우(?)를 받은 사람이 있을까? 예수가 세례요한을 가리켜 구약의 선지자와 율법을 통해 “오리라 한 엘리야가 바로 이 사람이다.(마 11:14)”라고 밝힌 것과, 예수의 놀라운 기적을 목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러 엘리야가 다시 나타났다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마 16:14)을 미루어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뇌리에 엘리야는 그 누구보다도 뚜렷한 인상을 남긴 대 선지자임에 분명했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세례요한-예수 사이에는 일관된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의식주를 초월하여 가난하고 검소하게 살며 가난한 자들의 벗이 되어 불의한 부자와 권세자들에 대해 맞서 개혁의 목소리를 높였다는 데에 있다. 엘리야……. 그는 물질적 풍요와 권세를 누렸던 구약시대의 대부분의 선지자들과는 달리 광야 생활을 하며 떡과의 전쟁에 대해 최초로 공개적인 선전포고를 하고 정면 승부를 걸었던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선지자 엘리야가 후세에 남긴 이미지는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의 왕과 제사장과 백성들을 신랄하게 공격하고 준엄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개혁자의 모습이다. 엘리야의 인생을 통 털어 가장 클라이맥스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두말할 여지없이 갈멜산에서의 대 접전, 떡과의 전쟁 사상 최대의 승리를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 바알(Baal)신과 여호와의 한 판 승부를 이끌어내어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숭배하던 거짓 선지자 팔백오십인을 죽인 사건이었다. 이 전투를 통해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잊을 수 없는 불후의 명성을 남기게 된 것이다.


우리는 갈멜산의 전투를 전후한 역사적 배경과 사건 상황들을 자세히 미루어 살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엘리야가 전투를 벌였던 바알신과 아세라신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을 육체의 떡으로 미혹하여 여호와를 버리고 떠나도록 하던 물신(物神)의 전형이었기 때문이다.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거리는 백성들을 질타하며 그 바알신을 추종하던 거짓 선지자들을 한꺼번에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엘리야…. 그 승리의 비결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편, 물신 바알을 물리치고 엄청난 승리를 거둔 엘리야의 사역이 어째서 갑자기 위축되었으며, 결국 아합왕과 이세벨 왕후에 의해 이스라엘 역사 속에 본격적인 바알 숭배와 사유재산제도가 도입되고 말았는가 하는 이유 또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장차 천국에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제시하여 깨닫게 하기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토에서 하나님의 주권 즉 그 거룩한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나라다. 다시 말해 국가의 3요소인 주권-백성-영토가 모두 하나님께 귀속된 나라이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통치되는 나라. 모든 풍요와 배부름과 생명이 넘치는 나라. 에덴동산에서 잠시 선을 보였으나 곧 상실해 버린 나라. 그리고 우리가 가야할 천국에서 마침내 완성될 나라. 그 사이를 걸어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그 나라의 모습을 여러 가지 모형으로 보여주신다. 가정을 통해,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 말씀을 통해, 선지자를 통해, 그리고 예수님의 성육신하신 모습을 통해, 성도들의 삶을 통해 그리고 교회를 통해.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의 역사다. 그러나 그 땅이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주권으로 다스려지는 나라가 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구약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아가는가 아니면 그 땅의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가는가 하는 선택의 역사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가나안을 지배하고 있던 물신 바알은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하나님의 주권을 찬탈하려고 내세운 사단의 군대장관이었다. 가나안은 떡의 전쟁을 치루기 위한 전쟁터였고 그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삶의 양식, 존재 양식을 지배할 신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호와냐? 바알이냐?” 하는 이 선택은 떡의 전쟁을 치르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선택이기도 하다.


바알신은 가나안 지방의 생산신(生産神)으로 농경 사회의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주는 신으로서 믿어지고 있었다. 더구나 바알의 배우신(配偶神)으로 함께 숭배되던 아스다롯(더러는 아세라라고 불려짐)역시 다산과 생산의 신으로 성적인 해방과 쾌락을 추구하며 바알과의 성적 교접에 의해 풍요를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바알과 아스다롯을 숭배하는 산당에서는 풍요를 기원하는 행위로서 창기들과 미동들에 의한 문란한 성적인 행위가 주술적으로 함께 행해지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경문화를 받아들일 때 팔레스타인 지방의 타락한 바알 숭배를 함께 받아들임으로써 여호와 신앙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것은 물질 우상 숭배와 성적인 타락을 동시에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로 인해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대 왕들은 깊은 우상 숭배와 음행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조상들이 믿어왔던 여호와 신앙을 전부 저버린 것은 아니었으나 대부분 여호와와 바알을 동시에 숭배하는 혼합주에 빠져있었다. 아무튼 바알 숭배 사상은 물질과 성을 사유화하여 마음대로 소유하겠다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만들어낸 악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끌어내신 후 40년간 광야생활을 통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한 훈련을 시킨다. 뿐만 아니라 모세의 계명과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경제법칙을 상세하게 충분히 제시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경륜 가운데 다스려지는 청지기 경제(oikonomia)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통치 방식은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며 그 나라의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신정정치였다. 신정정치와 청지기 경제의 핵심은 모든 정치적 권력과 물질적 재부의 소유는 창조주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인간은 그것을 위임받아 다스리는 청지기로서 살아갈 것에 대한 요청이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타락한 죄성으로 인한 권력의 불평등과 부의 불균형이 발생할 것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기에 그것을 조정하여 다시 재분배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장치와 제도를 마련해 두었다.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십일조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 명령과 안식일과 안식년 제도를 통한 절제와 희년 제도들은 물질의 재분배를 통해 영구적인 빈부의 격차가 확대재생산 되는 것을 억제하는 제도적 장치였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기업(inheritance)은 토지였다. 12지파를 통해 각 가족 단위로 분배된 토지는 대대로 후손에게 물려줄 기업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존권 확보를 위한 경제적 기초였다. 따라서 토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해 놓은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본권이었다. 인간 사회의 타락한 본성에 의해 토지의 사용권이 매매되고 토지의 주인이 노예로 팔려감으로 정치 경제적인 불균형이 발생할지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 희년(the year of Jubilee)이 돌아오면 노예는 해방되고 토지는 다시 원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토지 되무르기를 통한 경제 정의의 회복이었으며, 성경전체를 통해 흐르는 구속 사상(redemtion)의 현세적 실천이었다.(레 25 : 10, 24) 즉 해방의 나팔소리(yobel)와 함께 50년 마다 임하는 희년은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고편이요 예행연습이었던 것이다.


누가복음 4장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될 때 이 희년 사상이 선포된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수는 가난한 자들에게 주의 은혜의 해 즉 희년을 선포함으로써 그의 사역을 시작했던 것이다.(눅 4:18-9) 그리스도의 초림은 죄에 빠져 육체적 영적 가난에 허덕이는 웅크린 자들을 십자가의 피로 다시 사서 해방시키는 구속(redemption) 사역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신분 해방과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기업의 회복이기도 하다. 따라서 구약 시대 희년 되무르기의 핵심 내용이었던 노예 해방은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는 영적 해방으로, 토지 되무르기는 경제 정의를 위한 기업의 회복으로 확대되었다. 그것은 각 사람에게 주어진 소명과 부르심을 통한 직업(calling)에서의 청지기 직분을 감당하는 새로운 삶으로의 거듭남으로 확대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경제 활동의 기초는 땅에 있다. 토지의 사유화가 유지되는 한 경제적 불평등과 빈부의 격차는 심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희년 제도를 통해 토지 되무르기를 실시하도록 명한 이유이며, 이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도 여전히 유효한 경제 개념이다. 사회적 경제 정의의 회복을 위해서는 토지의 사유화를 막고 토지의 공개념을 실시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토지 사유화를 통한 사유재산제도의 뿌리 깊은 권력 구조가 거대한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이를 되무르기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해서 공산주의 체제가 그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지난 세기의 사회주의 국가를 통한 실험을 통해 엄청난 피의 댓가를 치르고 입증된 바 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의해 다스려지는 어떤 사회 체제도 가난의 확대 재생산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개인에게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체제나 국가에게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사회주의 체제 모두가 결국은 사유재산제도(chrema- tistike)의 변형된 형태일 뿐이다. 오히려 거대한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집단주의적 통제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여 가난의 균등 분배만을 낳았던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희년 제도가 실시되며 경제적 신정정치를 이루었던 기간을 600-700년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가나안 정복 이후, 사사시대의 신정정치가 왕정으로 바뀐 후에도, 비록 혼합주의에 의한 바알 숭배가 부분적으로 진행되기는 하였지만, 토지의 기업 사상이 이어지고 되무르기가 실시되었던 흔적과 기록이 남아있다. 열왕기상 21장에서 아합왕이 농부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었을 때, 나봇이 담대하게 여호와가 주신 기업을 왕에게 줄 수 없다고 저항한 것으로 보아 왕권을 초월한 신정정치의 기업사상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깨어지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 본격적인 바알 사상 즉 사유재산제도가 국가적으로 유입된 것이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이세벨 왕후의 시대였던 것이다. 시돈왕 엣바알의 딸로서 이스라엘의 왕비가 된 이세벨은 열열한 바알숭배자로서 사마리아에 바알 신당을 짓고 아세라 목상을 세웠으며(왕상 16:31-2) 여호와를 따르던 많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탄압하였다(왕상 18:4). 그때 그것을 목숨을 걸고 반대하여 대항하였던 선지자가 바로 엘리야였던 것이다. 따라서 엘리야의 갈멜산 전투는 여호와냐 바알이냐를 선택하는 한 판 승부였고, 타락한 떡의 유혹에 대항하여 생명의 떡을 선택하는 치열한 전쟁 마당이었던 것이다.



(3)


하나님이 선지자를 택하실 때에 처음부터 준비된 사람을 택하시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모두가 부족하고 겁이 많은 사람들을 선택하여 자신의 무능함을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적 삶을 체험케 한 연후에 점차 훈련과정을 통해 그의 믿음을 강화시키고 마침내 전투장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야는 느닷없이 막강한 권력자 아합왕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징벌을 선포하는 역할을 명받는다. 엘리야 자신의 말이 다시 있기 전에는 이스라엘에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당돌한 예언을 한 이후에 그는 그릿 시냇가로 도망간다. 그리고 삼년 반 동안의 광야 생활이 시작된다. 그릿 시냇물을 마시며 까마귀가 가져다주는 떡과 고기를 먹으며 살아간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그릿 시냇가로 몸을 피할 때 느닷없이 까마귀를 통해 내가 너를 먹이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듣고, 엘리야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지속되는 가뭄 속에서 아합왕은 군사들을 풀어 엘리야를 잡기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마실 그릿 시냇물조차 말라가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비가 내리지 않기를 간구해야 했던 엘리야의 처절한 심리 상태가 어떠했을지 우리는 짐작키 힘들다.


왜 하필 까마귀인가? 까마귀는 성경에서 항상 불결하고 불길하며 은혜를 모르는 새로 인식되어 왔다. 노아가 방주에서 물이 빠진 상태를 알고자 하여 먼저 까마귀를 날려 보냈을 때 까마귀는 은혜를 저버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자고로 까마귀를 길조로 숭상하는 민족과 흉조로 생각하는 민족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노아의 홍수 사건과 거의 유사한 홍수 기사를 다루는 수메르의 점토판에는 까마귀를 오히려 길조로 취급하고 있다. 아무튼 죽은 시체를 향해 몰려드는 불결하고 부정한 새 까마귀를 통해 먹일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아마도 엘리야는 절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엘리야가 깨달아야 했던 것은 가장 천한 짐승 까마귀를 통해 연명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능한 실존의 체득이었으며, 까마귀까지도 복종시키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었을 것이다.


시냇물이 마르자 하나님은 다시 엘리아를 시돈의 사르밧 과부에게 보낸다. 그것도 바알 숭배가 극심한 시돈 땅의 가장 가난한 과부에게로 보내는 것이다. 그 과부는 가뭄과 기근으로 인한 가난 속에서 절망하여 이제 막 죽기로 작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자신과 아들을 위해 떡을 해 먹고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세상과 결별하려고 불을 지필 나뭇가지를 모으던 중이었다. 하필 그런 과부에게 엘리야를 보내어 그에게 떡을 구하도록 하는 것이다. 마지막 떡을 먼저 바치라는 엘리야의 명령을 순종해야 했던 과부의 심정은 또한 어떠했을까? 그러나 거기서 엘리야는 다시 절망 중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다. 통의 가루와 기름이 마르지 아니하는 신기한 기적을 통해 자신과 과부의 집이 다시 소생하는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또한 과부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한 생명을 위해 부르짖는 기도를 배우게 하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철저하게 깨닫게 된다. 마침내 엘리아는 이방 여인의 입에서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을 아노라(왕상 17:24).”는 유명한 고백을 듣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갈멜산의 전투에 임하는 것이다. 갈멜산의 승리는 이 광야 생활에서 준비된 것에 불과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체험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앞서 행하는 선지자에게 한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아무리 거대한 영적 프로젝트를 행하는 사람일지라도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생명의 가치를 먼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 가족이 연변에 오기 전에 받았던 삼년 반의 포항 생활을 통해 체득했던 가장 중요한 훈련은 결국 돌이켜 보니 한 생명을 귀하게 생각하는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까마귀를 통해서라도 우리를 먹이신다는 일상적 떡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의 탈피였다. 일상적 삶과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이 단순한 믿음을 이론으로부터 실천으로 받아들이기가 그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평양과기대를 준비하는 가운데, 2003년은 정치 경제적인 최악의 상황으로 몰리고 있었다. 미국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 조치와 한국내 정치경제 상황의 동결로 인해 아무도 귀 기울여 들으려 하지 않는 그 프로젝트를 위해 물질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자금이 없어 더 이상 평양 현장에서 건설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 중요한 영적 프로젝트를 위해 자신의 떡을 떼어 도울만한 크리스천들이 그렇게 없단 말인가 하는 원망도 생겼다. 그러던 가운데 부활절을 앞두고 어느 날 새벽에 평양과기대를 위한 물질 후원자를 붙여주시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를 하던 중, 느닷없이 마음속으로부터 “네가 먼저 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후원을 받아 살아가는 우리 같은 사람들의 처지를 뻔히 아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슨 돈이 있다고 먼저 물질을 내라는 것인지……. 바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단호했고 다음 순간 내가 한국의 어머니께 맡겨두었던 통장이 떠올랐다. 중국 오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통장이요,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을 받아 넣었던 통장이었다. 장남을 떠나보내는 아쉬움으로 눈물짓는 어머니께 무언가 마음의 위로가 되도록 연결고리의 역할로 맡겨두고 떠났던 통장이었다. 그 속에서 어머니 생활비와 용돈도 조금씩 드리며 어머니께는 아들의 통장을 관리하는 것 자체가 애틋한 그 통장이 생각난 것이다.


어머니께 E-MAIL을 드렸다. 그 통장에서 돈을 찾아 부활절 헌금으로 평양과기대를 위해 서울 후원회에 입금시키도록 부탁을 드렸다. 아내에게도 힘들게 동의를 구하고 마음을 정하고 나니 기쁨이 있었다. 이미 칠순이 넘으신 어머니……. 장남과 맏며느리를 갑자기 중국으로 보내놓고 상실감에 빠져 있던 중 어떻게든 대화할 길을 찾으시던 어머니는 뒤늦게 E-MAIL을 배우셔서 자식들에게 넋두리 겸 종종 편지를 보내시곤 하였다. 바쁘다는 핑계로 제때 답장도 못하였지만 내가 편지를 드리면 곧바로 답장을 해주시던 어머니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상하게 일주일이 다 되도록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메일을 미처 못 열어 보셨나? 궁금해 하던 중 마침내 답장이 왔다. 그것을 읽자마자 나는 가슴이 아프고 쓰려 한동안 눈을 감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도무지 너희들의 믿음을 이해할 수가 없구나. 아무런 장래 대책도 없이 살아가면서 아들은 덜컹 토론토로 유학을 보내놓고 등록금은 어찌하려고 이제 남은 이 돈을 헌금을 한단 말이냐? 네가 부탁하니 어쩔 수 없이 보내기는 보냈다마는 어제 밤 이 애미는 한숨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 돈은 어쩌면 어머니에게는 마지막 남은 통 속의 밀가루와 같은 그런 돈이었을 것이다. 아들을 위해 마지막 떡을 해 먹일 그런 돈, 그것을 바치라니……. 그 돈을 찾아 후원회에 입금시키기 위해 은행 창구에서 아픈 가슴을 무릅쓰고 전표를 쓰셨을 어머니를 생각하며 나는 또 한번의 씻을 수 없는 불효를 한 것임을 순간 깨달았다. 그리고 그날 밤 나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한국의 국제 코스타 본부에서 코스타 리더쉽 포럼에 와서 간증을 하라는 초청이 왔다. 코스타의 주요 책임 목사님들과 간사님들 앞에서 간증을 하는데……. 갑자기 성령께서 이 간증을 하도록 강하게 요청함을 느꼈다. 자신의 치부를 또 드러내는 것 같아 좀처럼 하기 싫은 마음이 있었으나, 결국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게 되었다. 간증이 끝난 직후 많은 분들이 감동을 받으신 듯 했다. 특별히 K목사님께서 다가오시더니 큰 감동을 받으신 듯 앞으로 큰아들 다니엘의 학비를 당신이 책임지시겠노라고 장학금을 주실 것을 제안하셨다. 그리고 그 이후,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 그 통장 안에 돈이 입금되기 시작했다. 더러는 보낸 분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는 돈도 입금되어 있는 경우가 있었다. 정말 밀가루가 마르지 않는 기적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건은 사르밧 과부의 심정이었던 연약한 믿음의 어머니께도 큰 체험과 용기를 주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손자를 직접 먹이시고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되신 것이다. 요즈음 그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평양과기대 건설 현장에서 건물들이 올라가는 장면들을 바라보며, 어쩌면 그 돈이 씨앗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갈멜산에서의 위대한 승리를 이끌어낸 엘리야, 기도로 삼년 반 동안 비를 그치게 하고 또 간구로 다시 비를 내리게까지 했던 대 선지자 엘리야를 생각할 때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 엄청난 승리를 거둔 직후에, 한 여자 이세벨의 협박을 받고 도망가며 광야의 로뎀나무 아래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청하는 나약한 모습이 갑자기 어떻게 튀어나왔을까? 자신이 열조보다 못함을 고하는 엘리야는 완전히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기까지 하다. 그 엘리야를 위로하며 하나님은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어 위로하시고 떡과 물을 먹이신다. 사십일간의 광야길을 행해 다시 호렙산의 굴 속에 숨어있던 엘리야에게 다시 하나님의 실존적 질문이 임한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던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가 어찌하여 굴속에 숨어 있느냐 하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연거푸 두 번의 이어지는 동일한 질문에 대해 엘리야의 대답은 여전히 두려움과 불평에 싸인 대답이었다. 내가 여호와를 위해 열심이 특심이었으나 이제 그들이 선지자들을 죽이고 나만 홀로 남았으며 저희가 내 생명마저 취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과의 이 대화를 기점으로 엘리야의 역할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쇄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엘리야의 대답을 지켜보던 하나님은 엘리야를 대신할 후계자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을 것을 명한다. 엘리야는 오해했다. 그 전투 이후로 자기만 홀로 남았다고 오해했다. 위대한 승리를 거두는 순간 자아 도취감에 빠져 그는 그 일이 자신이 직접 행한 것으로 착각을 했다. 그러자 곧 하나님 중심 사고에서 자기중심적 사고로 전환이 되었으며 여호와를 의지하던 그 믿음은 흔들리고 사라지게 되었다. 이세벨의 손이 자신의 생명을 빼앗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자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튀어나오게 된다. 그리고 자기가 홀로 남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입을 맞추지 않은 사람이 엘리야 외에도 칠천 명이나 남아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광야 생활에서 엘리야를 지켜주었고 아합왕 앞에서 여호와의 권능을 펄럭이며 달려가던 그 능력의 겉옷이 엘리사에게로 넘어가고 만다.(왕상 19:19) 많은 경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빠지는 함정과 오해가 여기에 있다. 위대한 일, 큰일을 행한 직후, 자신이 그 일을 행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위기가 닥친다. 그리고 이전의 그 놀라운 믿음은 어디로 갔는지 순식간에 사라지고 깊은 회의와 패배감이 몰아닥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듯이 엘리야 역시 동일한 성정을 가진 약한 존재였다.(약 5:17)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갈멜산의 위대한 승리를 일구어낸 사람이기도 했다. 하나님의 엘리야를 향한 사랑은 그야말로 특별했다. 엘리야가 지치고 힘든 상태로 빠져들자 그를 위로하여 먹이면서 곧 그의 후계자를 세우고 마침내 그를 신속히 하늘로 불러올리기까지 했다.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신 것도 역시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었다. 가나안의 모세는 망령된 행동으로 그 이전에 행한 업적들조차 까먹게 될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특별히 열심이 특심인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순교자로 미리 데려가신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자신이 퇴진할 때를 찾지 못하여 결국 역사의 오점으로 남게 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더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도록 명하신 일들의 경계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갈멜산의 전투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바알신의 허망함을 만 천하에 나타내고 여호와만이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임을 선언하는 큰 이정표로 남게 되었다.(왕상 18장) 그러나 그 같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아합과 이세벨에 의해 여호와 신앙을 빼앗기고 그 땅에는 바알신앙과 사유재산제도가 정착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았다.(왕상 21장) 엘리야의 움츠려든 태도와 비겁한 퇴각이 부른 결과인지 우리는 판단하기 어려우나 그 모든 일 가운데 여전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있음을 믿는다. 비록 국지전에서 졌다고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며 장렬한 갈멜산 전투에서의 승리가 무의미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지자의 역할은 부분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만, 십자가에서 모든 구속(redemption)의 역사를 단번에 다 이루신 예수의 승리는 완전하다. 우리는 그것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누가 선지자인가? 홍수를 미리 알고 예언했던 에녹이 최초의 선지자인가? 하나님께서 친히 선지자라고 인준하셨던 아브라함이 더 큰 선지자인가?(창 20:7) 아니면 갈멜산에서 팔백오십인의 거짓 선지자를 죽인 엘리야가 가장 큰 선지자인가?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 보다 더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 11:11)” 구약의 선지자들은 여전히 예수의 희미한 그림자를 기대하고 살았다. 그러나 이미 십자가의 구속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천국에 속한 자요, 그중에 가장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이 예수에 대해 알았던 것 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더 큰 선지자들인 셈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쓰임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성정이 성경에 나타난 선지자들보다 연약해서가 아니다. 같은 성정을 가진 그들이 남다른 능력을 나타낸 것은 바로 그 당시 그의 믿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의존적으로 열려 있었기 때문이요, 다음 순간 그들이 실패했던 것은 그 믿음이 닫혔기 때문이었다.


평양과기대가 과연 세워질 것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기에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어쩌면 우리의 믿음에 의해 그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평양과기대가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세워진다면 그곳은 갈멜산의 전투만큼이나 치열한 떡의 전쟁을 벌이게 될 전쟁터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더 큰 관심사는 대학이 세워지느냐 하는 것 보다 이 모든 구속의 역사 가운데 뛰어들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들의 그 믿음 속에 나타나는 생명을 살리는 과정들일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정진호] 제 9 떡 – 천국 지혜 –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1)


가난과 부요에 대한 떡의 논리를 이제 정리해 보자. 그 속에 나타난 청지기의 윤리는 무엇인가?


물질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요, 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들에게 물질은 이미 우상이 되었다. 물질에 눈이 어두운 인간들은 물질의 노예가 된지 오래다. 모든 우상이 그러하듯이 이미 주종관계가 바뀌어버린 것이다. 물질 자체가 사람을 조종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에 단순히 가치중립적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물질은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으니 물질을 (많이) 소유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는 말은 다분히 문제가 있다. 이 말 속에는 물질을 향한 끊을 수 없는 인간의 열망과 탐심을 교묘히 감추어 위장하려는 미련이 숨어있다. 부자들을 위한 면죄부를 손쉽게 발급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물질은 이미 영적인 능력을 휘두르는 맘몬 신이 되어 있다. 이미 불의를 품고 있으며, 사악한 인격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브를 유혹했던 뱀의 속삭임이 여전히 우리 귓가를 맴돌고 있다. 그 사악함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아 끝없는 탐심과 교만으로 이끌어가며 사회적 불평등과 가난을 확대 재생산한다. 물질로 인해 발생한 궁핍과 억압 상태는 인간의 역사를 전쟁과 기근과 폭력으로 점철된 불행으로 수놓았다. 하루하루 시시각각 발생하는 부정적인 국내외 뉴스들은 거의 모두가 물질을 서로 갈취하기 위해 벌이는 떡의 전쟁, 그 전쟁터의 전황들이다.


이 전쟁을 피할 수는 없을까?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간다면? 그러나 우리는 물질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떡은 우리의 존재양식이다. 그래서 물질을 무시할 수도 없다. 더구나 물질을 초월하여 나 혼자 고요한 삶을 살아가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나 가난하다. 그 속에서 쓰러져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처음부터 이 세상을 다스리고 지키도록 명하셨다. 이른바 청지기의 직책을 준 것이다. 우리가 돌보아야할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가난한 이 세상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회 그리고 가난한 생태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그 명령을 피하는 것은 직무유기가 된다. 따라서 청지기의 윤리의식이 문제시된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주인이 기뻐하는 삶이 될까?



(2)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법은 가난해지는 방법밖에 없다. 가난해지는 길은 자신이 가진 재물을 나누어주는 것이다. 결론은 분명하고 간단하다. 네가 가진 것을 주라(Give!)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복음서에서 가르친 재물관이다. 이 가르침은 너무나 명확해서 우리들이 좀처럼 받아들이기가 힘들 정도다. 그래서 이 말은 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뒷걸음질쳐서 예수에게서 달아났다.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고 살아가던 종교지도자들도 많았다. 그들은 예수의 그 말을 비웃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이 위험인물에 대해 핍박을 가했다. 이 같은 현상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특히 사회적 복음과 물질관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는 누가복음에는 부자와 물질적 부요에 대한 수많은 경고들이 등장한다. 의사였던 누가가 예수의 제자가 된 이후 물질에 대해 가장 강경한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이 흥미롭다. 오늘날의 의사라면 가장 부유한 계층에 속한 사람들인데, 그가 오히려 공산주의자에 가까운 급진적 분배주의자가 된 것이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부자에 대한 수많은 경고, 혁명적 메시지 중에서도 가장 우리를 놀라게 하고 또 난처하게 만드는 내용이 16장에 등장한다. 이른바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이다. 참 난해한 이야기가 되어서 역사 속에서 수많은 논쟁거리가 되어왔고 신학자들의 연구 과제로 등장했다. 그토록 곱씹은 이야기를 또다시 거론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섣불리 건드려서 제대로 된 결론이나 낼 수 있을지……. 하는 염려도 생긴다. 그러나 떡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 부분을 슬쩍 뛰어넘는 것은 마치 격전지에서 도망치는 비겁한 병사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부딪혀야 할 전투라면 과감히 돌진하고자 하는 심정으로 칼을 빼 든다.


<부자 주인과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


주인의 소유를 맡았으나 그것을 허비한 청지기……. 그는 자신의 잘못된 일이 주인의 귀에 들려 주인이 곧 들이 닥치고 하던 일을 빼앗기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인과 계수할 날이 다가오자 그가 취한 행동은 자신이 관리하던 채무자들을 불러 그들의 빚을 탕감해주는 일이었다. 주인의 재산을 더욱 감소시키는 일이었지만 그로인해 채무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실직이후의 자신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런데 이 옳지 않은 행동을 한 청지기가 지혜롭다고 주인에게 칭찬을 받는다. 이 같은 행동을 한 청지기를 빗대어 이 세대의 아들이 오히려 자기 세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주인은 자신의 재산이 불법적으로 줄어든 데에는 큰 관심이 없는 통 큰 주인임에 틀림없다. 이 부자 주인은 누구인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모든 부요의 원천이신 하나님이다.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지혜롭다고 칭찬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그는 자신의 죄를 신속히 인정하였다. 자신이 주인의 재물을 맡은 청지기로서 제대로 직분을 감당하지 못했음을 알고 그것을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끝없는 자기 합리화와 책임 회피에 빠지는 대다수의 사람들에 비해 그는 확실히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둘째, 그는 주인이 곧 들이닥칠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 자신의 행한 일들, 곧 지나간 삶에 대한 계수가 시작되고 자신은 청지기 직에서 쫓겨날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이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을 직시하는 종말론적 인식이기도 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 앞에 임박한 최후의 순간을 깨닫지 못한 채 어리석은 삶을 끝없이 경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이는 지극히 지혜로운 판단이었다. 셋째, 그는 자기에게 남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은혜를 베풀었다. 그동안 자신이 아끼던 재물을 사용하여 자신과 관계를 맺던 채무자들, 곧 빚에 허덕이며 살아가던 가난한 자들에게 물질적 혜택을 베풂으로서 자신의 실직 이후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이는 윤리적으로 보면 반드시 옳은 행동은 아니었다. 주인의 채무를 자신의 장래 이득을 챙기기 위해 임의로 탕감해주는 일은 결코 바른 행동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같은 행동은 타락한 세상, 곧 이 세대에 있어서는 있음직한 일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청지기의 약삭빠른 행동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주인이 지적한 점은 바로 이점이었다. 이 세대의 옳지 못한 청지기도 깨닫는 지혜를 소위 영생을 소유했다고 하는 빛의 아들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질책이기도 하다. 이 옳지 못한 청지기가 깨달았던 세 가지 지혜를 보고 배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인은 놀라운 주문을 우리에게 한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이 말씀을 바로 깨닫기 위해 좀 더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이 비유에 등장한 옳지 않은 청지기는 과연 누구인가? 이는 단순히 이 세대를 살아가는 윤리적으로 타락한 경영인 또는 부도가 임박한 사업가인가? 우리와는 무관한 사람인가? 크리스천인 우리, 거룩한 빛의 아들로 자처하는 우리들은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를 국외자의 신분으로 그저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옳지 않은 청지기, 그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옳지 않은 청지기들이다. 에덴동산에서 위임되었던 청지기 직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위대한 자연(nature)세계를 맡아 그것을 경작(cultivate)하여 아름다운 문화(culture)로 만들어 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다스리며 지키도록 맡겨두신 하나님의 소유물, 물질세계를 우리는 바로 지키지 못하고 사단에게 내어주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에 손길을 내밀었던 그 순간 전 인류가 함께 욕망의 손을 뻗혔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어 범죄한 그 순간 우리도 그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어느 신학자의 통찰력은 과연 옳다. 우리는 함께 범죄한 자요 청지기의 권력을 남용한 자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많은 물질들을 지금도 계속해서 허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보고는 영적인 인테넷 사이트(www.heaven.God/behavior)를 통해 속속 실시간으로 하나님께 들어가고 있으며 행위를 적은 책에 빠짐없이 기록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옳지 않은 청지기가 깨달았던 세 가지 지혜에 대해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주인의 재물을 끝없이 낭비하는 죄를 짓고 사는 옳지 않은 청지기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과 그 사실이 드러날 마지막 순간 임박했다는 종말론적 인식과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이야기이다.


제자들의 윤리적 판단을 유도하기 위한 주님의 요청,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은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취했던 그 행동을 하라는 것이었다. 네가 가진 재물을 나누어서 빚진 자들을 탕감해 주라는 것이다. 타락한 세상에서 어차피 재물은 불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의 탐심이 물질을 우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재물에는 이미 불의한 영이 깃들어 있다. 아무리 너희가 깨끗하려고 해도 너희는 물질에 대한 우상 숭배를 멈출 수 없고,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청지기직을 감당할 수는 없다. 끝없이 무질서를 창출하는 열역학 제 2 법칙의 무서운 심연과도 같이, 타락한 이 세상에서는 너는 결코 의로운 청지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네가 영원한 처소로 들어가 큰일을 맡을 때까지는 말이다. 어차피 나는 너에게 작은 것을 기대하고 있다. 네가 맡은 내 소유를 허비하지 않을 수는 없을지라도 비록 불의한 그 재물을 사용하여 내가 원하는 일을 해라. 네 주변의 너보다 더 많은 빚을 지고 허덕이며 살아가는 채무자들에게 그 빚을 탕감해 주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세상에서 너에게 기대하고 있는 청지기로서의 지극히 작은 일이다. 만일 네가 이 작은 명령하나도 충성되게 이행치 못한다면 나중에 천국에서 어떻게 더 큰 일을 맡을 수 있겠는가? 네가 남의 것을 관리하는 것조차 제대로 못해낸다면 어떻게 네 스스로 네 소유를 관리토록 큰일을 맡겠는가? (천국에서의 소유는 청지기 소유가 아니라 자기 소유임을 암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 열 고을 차지할 권세를 주겠다 하는 누가복음 19장의 약속이나 열 달란트 남긴 종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고 하는 마태복음 25장의 비유를 통해 천국에서는 상급과 함께 해야 할 일들이 주어질 것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러나 그 일은 타락한 인간이 행하는 고통스런 노동(labor)이 아니라 주인의 즐거움에 함께 참예하는 기쁨의 일(creative work)이요 예수와 더불어 왕 노릇 하는 특권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 너희의 재물에 대한 우상 숭배를 버리고 청지기의 본분으로 돌아가라. 청지기는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네 주인이 누구냐? 재물이냐 아니면 하나님이냐? 하인이 결코 두 주인을 함께 섬기지 못하나니 이제 너는 네 주인을 결정하라.


이 말을 엿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곧 그 화살이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을 직감했다. 그들은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부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돈이 많았을 뿐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곧바로 자기 방어에 들어갔으며 예수를 비웃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더구나 그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라는 예수의 말을 비웃었던 또 다른 근거는 구약에 나타난 선지자들이 대부분 부유한 삶을 살았던 지배계층이었고, 물질적 부가 곧 하나님으로부터 온 축복의 증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그들 나름대로의 지배논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강령을 가르치고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옳게 보이는 행동들을 하고 있었으나 예수는 그들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썩은 무덤과 같은 탐욕과 교만을 지적하며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이미 알고 계심을 질타한다. 그리고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 즉 구약의 가르침으로 하나님 나라가 지탱되어오던 이스라엘의 역사가 세례 요한을 마지막으로 종말을 고하고 이제 새로운 전환기가 도래했음을 천명한다. 이스라엘의 족장과 선지자, 왕과 율법사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끌려오던, 상대적으로 부유한 지배계층에 의한 집단적이고 국가적인 개념의 하나님 나라의 윤리가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철저히 개인적이고 피지배계층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 선포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구약의 율법이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의 복음을 통해 감추어졌던 것이 완전하게 드러나고 완성될 뿐이다. “너희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틈새를 만들어 교묘히 범하는 간음죄가 그 실례이다. 너희가 아내와 이혼할 때 이혼증서를 내주라는 율법을 이용하여 음행한 연고도 없는 아내를 버리기 위해 이혼증서를 주어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재혼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너희는 율법을 이용하여 너희 배를 채우고 자신의 악행을 감추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가증이 여기시는 것일 뿐이다.” 바리새인들을 응대하는 예수의 논리에는 빈틈이 없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결정타를 날린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한 부자가 있다. 날마다 값비싼 옷으로 치장하고 호화로운 음식으로 연회를 베풀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 집 문 앞에 누워 있는 헌데를 앓는 병자 거지 나사로를 그는 매일 오가며 바라본다.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로 연명하는 비참한 신세의 사람이다. 심지어는 개들조차 나사로를 위로하여 아픈 곳을 핥아주나 부자는 무관심했다.


마침내 나사로는 죽어 천국에 올라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이 대목을 주의하라.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긍지로 삼는 바리새인들을 다분히 의식한 표현이다.) 부자도 죽어서도 화려한 장례식을 치렀다. 그러나 부자는 음부에 들어가 고통을 받게 된다. 음부의 화염과 불꽃 가운데 극심한 갈증으로 신음하던 그는 아브라함과 그 품에 안긴 나사로를 보게 된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한다. 나사로를 보내어 자신의 혀끝에 물 한 모금을 적셔달라는 것이다. 여전히 이 부자는 교만하다. 자기 집 문 앞에 누워있던 나사로를 응당 자신을 위해 기꺼이 음부까지 심부름을 할 정도의 하인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대답은 냉정하다. 그 부자가 받는 고통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서 받는 위로와 대비된다. 가난한 자에게 들어간 복음으로 인해 천국이 나사로의 소유가 된 것처럼 부자인 너는 너의 교만으로 인해 세상에서 온갖 연락을 즐기면서도 네 문 앞에 누워있던 거지 한 사람에게도 은혜를 베풀 줄 몰랐으니 네가 지금 받는 그 고통을 감수하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 음부와 천국 사이는 더 이상 서로 건널 수 없는 큰 심연이 가로막혀 있음으로 가고자 해도 갈 방도가 없음을 냉철히 알려준다.


그러자 이 부자는 두 번째 간청을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이 고통을 감수할지라도 아직도 죽음 후에 닥칠 음부의 고통을 모르고 나와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 내 다섯 형제들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그 사실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이 간청은 부자가 음부에서 겪고 있는 고통의 크기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더욱 실감케 한다. 그러나 이 부탁 역시 아브라함은 거절한다. 왜냐하면 이미 음부의 고통에 대해 부자와 그 형제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와 증거하면 그들이 들을 것이라는 부자의 간절한 요청도 거절당하고 만다. 왜냐하면 교만한 자들에게는 죽은 자의 부활로도 그 마음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사건이나 예수의 부활 역시 바리새인들의 교만한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부자는 이름이 없다. 왜냐하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의 이름은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질 의미 없는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족보에 올라가고 더러는 화강암 비석위에 새겨지며 혹은 인간의 역사 속에 아무리 화려하게 남아있을지라도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는 순간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으로 되고 만다. 음부에는 이름이 없다.


부자는 기회를 상실했다. 그는 자신의 재물로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은혜를 더하셔서 그에게 그것을 날마다 기억할 수 있도록 그의 대문 앞에 거지 나사로를 배치해 두었다. 부자는 마땅히 나사로에게 선처를 베풀어야만 했다. 그의 고통을 한 인간으로써 함께 아파하고 위로하며 상처를 싸매어줄 수 있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는 선처를 베풀기에 충분한 재물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선한 양심을 우리 모두에게 이미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겨 두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청지기가 마땅히 행해야할 직분이었다.


부자는 착각했다. 그 소유가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했다. 뿐만 아니라 그 소유가 마치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그렇게 날마다 살았다. 그 속에서 그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해 무관심했고 냉정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음부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곳은 하나님으로부터 무관심과 냉정함을 받는 곳이다. 아니 하나님의 관심이 사라진 영역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바로 부자들이 가야할 종착역인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를 통해 문득 떠오르는 의문은 마치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것이 가난한 자를 돕는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오해되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렇다. 우리의 포도원 주인은 우리가 행한 바 일의 크기에 의해 우리를 천국에 들여놓지 않는다. 그것은 마태복음 20장의 데나리온의 비유에서 밝히 설명했듯이 오직 전적인 포도원 주인의 주권에서 나오는 은혜의 약속이요 선물이다. 천국의 조건은 오직 예수요 오직 믿음뿐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히려 구원의 조건에 다른 어떤 행위를 추가하려는 모든 노력들이 이단 사상으로 끝을 맺고 있음에 대해 우리는 각별히 주의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는 행위의 문제가 존재 근거를 상실하게 되는가? 기독교에서 윤리적 행위가 설 땅은 어디인가?


우리는 두 가지 방정식을 이해해야만 한다. 첫 번째 방정식은 우리를 미혹하는 가짜 구원의 방정식이다.

믿음(faith) + 행위(work) → 구원(salvation)


이와 같이 주장하고 말하는 모든 종교나 사상은 기독교와 무관한 이단 사상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도 반드시 크리스천의 선한 행위와 윤리적 삶에 대해 가르친다. 아니 그 어떤 종교보다도 윤리적 실천성이 강한 종교가 기독교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기 몸을 던져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며 사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행위는 어디서 나타나는가? 그것을 바른 방정식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믿음(faith) → 구원(salvation) + 행위(work)


만일 온전한 크리스천이 예수를 믿는 바른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렀다면 그는 반드시 선한 행위로 자신을 던져 이웃을 위해 살아가게 되어있다. 그렇지 못한 크리스천이 있다면 어쩌면 그의 믿음을 의심해야 한다. 그가 지닌 믿음은 예수를 주로 믿고 시인하며 고백하는 순전한 믿음이 아니라 회칠한 무덤처럼 외식하며 살아가던 바리새인의 가짜 믿음, 강도만난 이웃의 고통을 보면서도 외면하고 지나가는 레위인과 제사장의 자기를 위한 종교적 행위에 불과할지 모른다. 거지 나사로를 외면했던 이 부자가 음부에 들어가야 했던 것은 그의 믿음이 가짜였기 때문이다.

(3)


우리 시대의 거지 나사로는 누구인가? 내 대문 앞에 누워 있는 거지. 바로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고통 받는 이웃. 굶주림과 상처에 신음하는 북한에 있는 내 형제들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나사로를 도울 수 있는 충분한 기회와 시간을 주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를 도울만한 충분한 물질적 축복을 주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물질로 날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호화스런 음식으로 내 배를 채우면서도 그들을 돕는 데는 인색하다. 그 인색함은 믿지 않는 자들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믿는 크리스천들의 인색함이 더 완고하다. 그들은 그 무명의 부자처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스스로 믿고 행동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예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외면하고 비웃었던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이다.


가난한 사회를 회생시키기 위해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길은 교육의 길이다. 우리 스스로가 개화기에 그와 같은 혜택과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이다. 수많은 외국 선교사들의 헌신을 통해 연세대학, 이화대학, 숭실대학과 같은 교육 기관이 세워져서 지난 세기 얼마나 많은 인재들을 배양했는가? 아무 희망 없이 완고히 닫혀있던 조선 반도가 마침내 문이 열리고 새로운 지식과 문물을 받아들이고 교육의 열기가 일어나며, 그 저력을 바탕으로 경제성장의 기틀을 마련하여 결국 오늘의 풍요로운 물질을 누리게 된 것도 모두 그 은혜를 입은 결과들이다. 자신들이 가진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기 위해 머나먼 태평양을 건너 우리를 찾아왔던 그들처럼, 이제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부요를 나누어야 한다.


평양과기대를 통해 청년들을 가르침으로 북한의 형제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경제적 회생의 길을 주고자 하는데 그것을 위해 믿는 자들의 마음을 호소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다. 얼마 전 평양과기대 프로젝트를 설명하기 위해 한국으로 출장을 다니며 여러 교회를 순방했다.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데도 작고 가난한 교회들은 큰 감동을 받으며 어떻게든 돕고자 하는데, 오히려 마음이 부요한 대형 교회는 그렇지 않다. 서울의 한 대형 교회의 당회에서 수십 명의 장로들 앞에서 평양과기대 프로젝트를 설명하다가 채 말도 꺼내기 전에 큰 반발과 비웃음을 받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북한은 우리의 주적인데, 왜 그들을 도와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보수적 질문 앞에서 애써 답변을 하다가 마치 예수님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받아야했던 비웃음과 핍박이 떠올랐다.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에게는 이미 충분한 가르침이 있다. 율법과 선지자가 있을 뿐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위해 우리를 찾아와서 모든 것을 가르치신 예수의 복음이 있다.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이미 우리의 행할 바를 명확하게 가르치신 예수의 말씀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것을 통하여 귀 있는 자들은 천국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모두 옳지 않은 청지기이며 한편 부자이기도 하다. 우리가 나누어야 할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떡들이다. 그것을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이다. 천국이 임박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네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눅 16:9)”


그러나 더러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않는 무리들도 있으리라. 이 또한 주의 말씀이요, 부자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정진호] 제 8 떡 – 공동체의 제사 – “열린 우리 떡”

 

(1)


한국인만큼 공동체적인 민족이 있을까? 한국인은 홀로 있기를 두려워한다. 어떻게든 내편을 끌어들여서 우리를 만들고 만다. 우리 집, 우리 가족, 우리 남편, 우리 마누라, 우리 편, 우리 동네, 우리 가문, 우리 학교, 우리 지방, 우리민족, 우리나라, 우리 은행……. 그리고 마침내 <열린 우리당>이라는 희한한 이름의 정당까지 생겨났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너희”를 배제시키는 배타성을 지닌 “닫힌” 개념이다. 그런데 그것을 “열린” 우리당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논리적 모순이다. 비장한 각오가 느껴지는 희화적인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닫혀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토록 목숨걸고 우리를 만들고 나서, 그 속에서 박터지게 싸운다. 더 나은 우리를 만들기 위해서다. 우리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다. 우리는 우리의 우리가 단단하게 닫혀있을 때만이 심리적 안정감을 이룬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우리는 끝없이 깨지고 갈라진다. 그러나 갈라진 작은 우리 안에 들어가 있다보면 다시 불안해진다. 주변에 더 큰 우리들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는 더 큰 우리가 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 깃발을 흔들고 머리띠를 두른다. 그리고 뛰기 시작한다. 운동원이 되고 운동선수가 되고 조기축구회가 되고 응원단이 되고, 그러다가 공이 구르기 시작하면 함성을 지른다. 오 필승 코리아 그 함성이 광화문에서 시청앞으로,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강원도에서 제주도로 퍼져나간다. 아니 아예 전 세계에 퍼진 조선족들에게 파도처럼 전파된다. 그 함성이 “따당따 단딴“하는 민속 장단 안에서 어느 순간 붉은색으로 획일화 된다. 단일민족이 단색민족이 되는 것이다. 갑자기 그동안 기를 쓰고 만들었던 수많은 우리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하나로 뭉치기 시작한다.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시냇물을 이루고 시내가 합하여 강줄기를 이루고 강물이 합하여 바다를 이루듯, 폭포수처럼 노도처럼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온 나라가 하나가 되는 감격을 이루어낸다. 마침내 우리는 하나의 우리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함성이 지나가고 나면, 연극이 끝나고 나면, 촛불이 꺼지고 나면……. 서서히 우리는 다시 작은 우리들을 만드는 그 옛 자리로 되돌아간다. 국회가 다시 열리고, 싸움은 다시 시작된다.




(2)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사람은 관계와 관계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간다. 비록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관계가 아주 없는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는 것보다는 낫다. 절대적 무관심 속에 놓이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있을까? 이 광대한 무생물적 우주 안에 만일 나 홀로 존재한다면 그 얼마나 끔찍한 일일까?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도 프라이데이라는 대화 상대가 있었기에 생존을 위한 용기가 생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창조 시부터 더불어 대화하며 공존하도록 만들어졌다. 그것은 창조주의 속성에서 비롯된다. 우주 만물은 엘로힘(Elohim)으로 표현된 창세기 1장의 복수형 하나님이 합력하여 창조한 합작품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사람을 창조할 때에는 그 복수형 하나님이 서로 의논하며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분명한 설계자의 의도와 계획을 나타냈다. 그것은 인간 지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와 비교할 수조차 없는 지상 최대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의 기획자와 매니저와 실행자인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일한 팀 사역(team ministry)의 결과였다.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으로 표현된 인간의 속성 속에는 하나님의 인격성(personality)과 도덕성(morality) 뿐 아니라, 반드시 영육(靈肉)의 대화를 통해 교통하도록 설계된 영적인 속성(spirituality)이 들어 있었다.


사람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은 공동체적인 존재라는 뜻이다. 그것은 반드시 대화를 통해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獨處)하는 것을 좋게 보지 않으셨다.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다. 그 속에서 창조의 목적인 사랑을 이루게 하셨다. 사랑은 창조의 목적인 동시에 결과이기도 하다. 공동체는 사랑을 통해 유지될 뿐 아니라 재생산된다. 사랑은 창조의 시작이요 끝이다. 사랑은 공동체를 충만히 채우는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의 입김이요 숨결인 것이다. 그 속에서 공동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운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사랑도 함께 떠났다. 사랑은 본질상 믿음을 기초로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 이상 믿지 않았을 때, 그 사랑은 식기 시작했다. 사랑이 차갑게 식어가고 사라져 가자, 공동체는 서서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온갖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교만과 탐심과 배반과 폭력과 살인과 전쟁이 일어났다. 마침내 사랑이 깨지고 분리가 일어난 것이다. 죽음을 향한 긴 그림자가 공동체 안에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가정과 사회와 민족과 국가라는 인간이 속한 모든 공동체에 분리의 영이 활동하며 온갖 상처와 아픔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역사였다. 우리의 아픈 역사들 

그 공동체의 상처들을 치유하며 회복하기 위해 예수가 왔다. 예수는 갈라진 모든 관계들을 다시 회복시킨다. 십자가 안에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치유된다. 그리고 나면,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 나와 너 사이의 관계, 그리고 나와 우리들 사이의 관계들이 회복된다. 마침내 그 회복은 나와 그들 사이, 나와 원수 사이, 나와 모든 피조물 사이의 관계로까지 확대된다.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던 “나와 그것(I and it)” 사이의 관계가 “나와 너(I and You)”의 관계로 회복되면서 “우리”라는 공동체가 다시 형성되는 것이다.



(3)


갈라진 우리 민족, 남과 북, 남과 남, 조선족과 고려인, 재일동포와 사할린 동포, 재미 교포와 캐나다 교포……. 지난날의 뼈아픈 역사를 통해 우리는 산산이 부서졌다. 그 나뉨의 역사를 극복하고 하나됨의 새 역사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이곳에 왔다. 연변과기대 공동체는 13개국 이상에서 모여든 다민족 복합 공동체이다. 점심시간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보면, 한 테이블에서도 여기저기 중국어, 한국어, 영어, 독일어, 불어, 일어가 뒤섞이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그 뿐이랴?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이 함께 어울리고, 더러는 가정을 이루고 살아간다. 바벨탑에서 갈라진 언어와 민족이 성령 강림 시에 다시 하나로 합해지기 시작했다면, 그를 방불케하는 역동적 현장이 바로 연변과기대이다. 제각기 서로 다른 배경과 문화 그리고 소속 단체들을 통한 다양한 생각들이 모여 있는데, 어떻게 이렇듯 조화를 이루고 한 가지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 그저 기적이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한 마디로 연변과기대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교육의 산실이다. 그 속에서 우리 민족의 회복 뿐 아니라 중국을 너머 온 열방과 인류를 섬기고 감싸는 박애정신이 배출되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



그런 공동체라면……. 어쩌면 더 이상의 나뉨과 분열은 존재할 수 없을 것도 같은데? 과연 그럴까? 그들은 더 이상 갈등도 다툼도 없이 지내고 있을까? 천만에 말씀이다.

솔직히 현상 그대로를 들여다보자. 언어가 서로 다른데 왜 불편함이 없겠는가? 언어의 장벽에서 오는 오해와 실수들은 매일 지속되는 일상이다. 서로 다른 문화 배경에서 오는 갈등은 어떠한가? 서양과 동양의 문화차이에서 오는 몰이해는 심각한 오해를 낳기도 한다. 특별히 한국인 중심으로 진행되는 빨리 빨리 문화, 즉흥적인 감성중심의 의사 결정, 좌충우돌 하루가 멀게 달라지는 규정들, 하루 전에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쇼트 노티스(short notice)……. 이런 것들은 서양 사람들, 특히 합리적인 독일 사람들의 눈에는 기이하게 여겨질 뿐아니라 그들을 화나게 만든다. 음식 문화가 그렇게 다른데… 날마다 식당에서 2,000 여명의 학생과 교직원이 한 가지 식단으로 자신을 죽여야 하는 그 인내심에 오히려 탄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 차이에서 오는 갈등보다도 더 힘든 것은 역시 모든 사람들의 마음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에고(ego)의 부딪힘 들이다. 게다가 이곳까지 몰려든 사람들이란 대개 개성이 “개 같은 성질”을 나타내는 특별한 종자들이다. 좋게 말해서 개성이지 달리 표현하면 한 마디로 독종들이다. 독특한 종자들이란 말이다. 좋은 환경들을 스스로 버리고 일부러 고생을 찾아서 몰려든 족속들이니 보통 사람들은 아닌 셈이다. 이들이 200여명, 아니 가족까지 합하면 500명이 넘는 대 식구가 모여 있으니 문제가 없을 리 없다. 이런 종자들의 특징은 보통 양보할 줄을 잘 모른다는 점이다. 모두 자기가 제일 잘난 줄로 착각한다. 그러니 자기주장이 항상 옳을 수밖에 없다. 우월감이다. 더구나 현지인들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을 항상 안고 있으니 습관적 우월감을 나타낸다. 이런 우월감들이 부딪치기 시작하면 못 말린다.



그런데, 사실은 우월감이란 열등감의 적극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사실 본질적 열등감에 빠져있다. 실낙원의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그 영적 퇴화(degradation)가 발생한 그 순간부터 전 인류는 열등감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의 완전성을 경험한, 아니 하나님의 그 완전한 형상이 담겨 있던 그 추억 속에서 걸어 나와 이제 초라한 죄인의 타락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의 실존은 “열등감에 귀속된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따라서 학력이 높을수록, 외모가 좋을수록, 돈이 많을수록, 권세를 누릴수록 그들은 더 큰 열등감 속에서 신음한다. 끝없이 자신을 더 높은 자리와 비교하며 그 비교의식 속에서 눌려서 살아간다.

이론적으로 보면, 그런 죄인들이, 아니 중증의 환자들이 200여명 모여 있는 공동체니 얼마나 문제가 많으랴? 결국 문제는 비교의식이다. 헌신의 마음을 가지고 왔지만 눈앞의 현실 앞에서 고민한다. 사역지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외형적 차이와 직분들, 그리고 받은바 달란트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남과 비교하면 어쩐지 초라해 보이기도 하고 앞서서 나가는 동역자에 대한 공연한 질투심이 발동하여 힘들어지는 것이다. 온갖 석사, 박사들, 교수들이 모인 대학 공동체이니 잘난 사람이 좀 많겠는가? 거기다가 내놓고 드러내지 못하지만 M과 P의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 영적 우월감은 이건 세상적(?)인 우월감하고 또 다른 차원의 골치 아픈 문제다. 자기만의 도그마를 내세워 도무지 타협할 줄 모르는 족속들이 바로 이들 아닌가? 갈라지고 쪼개지는 데는 관록이 붙은 명수들이다. 그런 곳에서 훈련받은 정예부대들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나타나는 경쟁심리와 높아지려는 마음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 마음들을 다 내려놓고 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피상적인 착각일 뿐이다. 물질에 대한 욕심들을 뿌리치고 가난한 삶을 스스로 택한 것은 일단은 가상한 일이지만(이 문제조차 사실 완전히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고개를 넘고 나면 더 험준한 고개가 기다리고 있다. “먹음직한 유혹” 너머에는 “보암직한 유혹”이 기다리는 것이다. 명예심,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만민에게 자신을 보이고 싶은 우쭐대는 마음, 그것이 더 강한 집착으로 다가온다. 더 이상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면서 살리라 하는 결단과 다짐을 하고 건너온 곳이지만, 그 결심은 홍해바다를 건너며 은혜 받을 당시 잠시 뿐이었다. 광야 생활이 시작되면 곧 불평불만이 터져나오며 갈등이 시작된다. 과거 애굽 생활의 옛 습관들이 여지없이 나타나는 것이다.

미국서 건너왔던 한 동역자 부부가 2년의 사역을 마치고 다시 돌아갈 때, 그 자매가 아내에게 찾아와서 눈물로 고백한 일이 있다. 그동안 자신이 마음속으로 아내에게 너무 많은 죄를 짓고 떠난다는 것이다. 겉으로 화려해 보이고 음악을 통해 항상 앞자리에서 돋보일 수밖에 없는 아내의 모습이 그녀에게는 항상 걸림돌이 되었다. 떠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가까이 대화하는 가운데 아내에 대해 바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초창기부터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아내가 자신의 우상들을 내려놓고 헌신하게 되는 지난 10년의 과정을 지켜보았기에 아내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항상 사랑으로 격려해준다. 그러나 그 과정을 모르는 새로운 동역자들 가운데는 겉모습만 가지고 판단하며 더러는 질투심에 빠질 수도 있다. 마음속으로 아내를 정죄하며 지내었으니 그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연변과기대 교직원들의 영적 성장 곡선을 대략 시간대 별로 그려보면, 처음 도착할 시의 충만한 기쁨이 첫 1년을 지나면서 점차 하강한다. 예상치 못했던 공동체 내의 불합리한 모습과 동역자들의 단점이 보이면서 실망하는 과정이다. 그것이 더러는 강한 불만과 정죄로 표출되는 사람들도 있다. 2년을 넘기면서 그 실망은 최저로 하락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한 사람들은 사역지를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3년차에 이르면 점차 사역의 본질을 깨닫고 외적인 환경보다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새로운 사역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영적 상태가 상승하며 안정된 사역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한 마음으로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공동체를 이루어낸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연변과기대가 보여주고 있는 공동체적 연합은 다른 어떤 공동체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특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 기적의 비밀이 어디에 있을까?


광야 생활을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성막을 짓도록 명하고 그 속에서 여러 가지 제사를 드려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한다.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와 속죄제와 속건제… 수 많은 제사 중에서 특별히 공동체의 연합을 위해 드리는 제사가 소제(grain offering)이다.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다. 양과 소와 염소를 잡아 피를 흘려드리는 다른 제사와는 달리 소제는 곡식을 고운 가루로 갈아서 기름과 유황으로 반죽을 하여 화덕에 구어 무교병의 떡을 만들어 드린다. 소제야말로 딱딱한 곡식 알갱이와 같은 자아의 덩어리를 잘게 부수어 한 덩어리의 떡을 만들어 올리라는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요청이다. 곡식을 빻을 때, 외형적인 큰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좀처럼 알갱이가 부서지지 않는다. 맷돌로 갈든지 방아로 내리찧든지 큰 물리적 힘이 가해질 때 곡식 알갱이들은 서로서로의 어깨를 부딪치며 산산조각이 난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대학을 세우다보니 나타나는 여러 가지 외적 압력이 오히려 공동체를 잘게 부수고 가루로 만들어 연합하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함을 보게 된다. 그 속에서 곡식들끼리 서로 부딪쳐 가루가 되며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하나의 반죽을 이루게 한다. 그것을 뜨거운 화덕에 굽는 것이다. 광야생활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들의 감추어진 탐심과 교만을 드러내며 곧은 목을 연하게 하고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는 연단의 과정이었다면, 연변과기대 공동체의 사역 역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을 광야로 내몰아 그곳에서 연단시키며 변화시켜서 마침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에 적합한 사람들로 만들기 위한 성화과정임을 깨닫는다.

공동체의 떡을 만들 때,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 누룩과 꿀을 넣지 말도록 레위기는 기록하고 있다.(레 2:11-3) 누룩은 공동체를 부풀리는 교만이요, 꿀은 공동체를 유혹하는 탐심이다. 아울러 처음 익은 것으로는 드리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단에 올리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다. 연변과기대를 찾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처음 이 땅에 발을 내 딛을 당시의 깨끗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항상 일하라는 말이요, 자칫 매너리즘에 빠져서 스스로 선한 체 하며 외식과 위선으로 사역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반드시 소제물에는 언약의 소금을 치라고 명하고 있다. 소금처럼 변치 않는 십자가의 언약이 늘 공동체를 부패하지 않도록 지키는 방부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변과기대 공동체가 매주 드리는 예배는 대단히 특별한 감동을 가져다준다. 직접 체험해본 사람들이 아니면 도무지 알 수 없는 깊은 은혜가 예배의 시종을 통해 강물처럼 출렁임을 느끼게 된다. 예배를 통해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며 하나됨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소년에서 청장년과 노년층이 함께 드리며, 각종 배경이 다른 사역자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가 단일 예배를 통해 기쁨을 찾고 영적 만족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러나 그것을 정성드려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이미 성령의 하나됨이 나타난다. 헌신자들의 모임이기에 받을 수 있는 특권인지도 모르겠다. 외지에서 잠시 방문하는 분들도 여지없이 그 감동에 휩싸여 눈물을 흘릴 때가 많다. 찬양과 기도와 말씀과 봉헌이 함께 어울어진 하나됨의 제사, 어쩌면 그것이 연변과기대를 지난 10여 년 동안 지탱할 수 있도록 한 내면의 힘이요 원동력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예수는 제자들을 두고 떠나기 전에 최후의 만찬과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 공동체의 하나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반복해서 가르친다. 하나됨은 성삼위 하나님의 속성이기에,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됨 같이 제자들도 자신 안에서 하나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그것을 위해 중보한다. 자신이 가르친 제자도의 성패가 그들의 하나됨에서 좌우될 것임을 또한 예언한다. 세상 사람들은 제자들이 행한 일로 인해 그들을 인정하기 보다는 그들이 하나되어 서로 사랑할 때 비로소 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알아볼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될 때 비로소 낱알과 같이 흩어져 있던 제자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그들의 삶이 산제사로 드려지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다. 그 속에서 다른 동역자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서로 칭찬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잘난 큰 아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고 망가진 배고픈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산산이 찢기고 피 흘렸던 예수의 몸이 다시 회복되어 “새 한 몸”이 되는 것, 그것이 교회요 그것이 예배의 본질이다. 그것을 날마다 체험하기 위하여 예수를 기념하며 우리는 성찬(Eucharist)을 드린다. 멜기세덱의 제사를 통해 나타났던 떡과 포도주의 삶에 동참하는 것이다. 눈물의 성찬을 통해 우리의 죄악은 씻겨져가고, 낱알에서 가루로 고운 가루에서 다시 한 덩어리의 떡으로 드려지는 완전한 하나됨의 공동체 “우리 떡”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떡은 우리끼리 먹고 누리기 위해 만든 떡이 아니다. 우리에 들지 못한 수많은 다른 양들이 먹어야 하는 그런 떡이다. 따라서 “열린 우리 떡”이다. 그러하기에 연변과기대의 하나 된 “우리 떡”을 품고 저 북녘의 집나간 배고픈 동생들을 찾아 나서는 평양과기대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