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생들과 선악과 문제를 공부하며 항상 던지는 질문이 있다.
우리 일생을 두고 따라다니는 세 가지 유혹 (물질, 명예, 권력) 중에서 너희는 어느 것에 가장 취약하다고 생각하는가? 이 질문을 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 자신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져보곤 한다. 물론 세 가지가 서로 연관을 맺고 있기도 하고, 그 어느 하나도 만만한 것은 없지만 역시 나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 내가 걸려 넘어지기 쉬운 유혹은 명예의 문제인 것 같다.


물질은 한번 건너뛴 경험이 있기에 – 비록 여전히 잔 펀치로 괴롭힘을 당하고는 있지만 –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놓을 수 있겠다는 신심(信心)이 있다. 또한 권력의 문제는 아직 내가 심각한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간 경험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나를 잡아끄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문제는 명예심, 다시 말해 내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다.


명예심을 어떻게 정의할까?
생각나는 대로 브레인스토밍을 해보자.


보암직한 것, 보이고 싶은 마음?
프라이드, 프라우드한 마음?
뻥 튀기를 하고 싶은 마음?
실제보다 더 크게 더 잘나게 보이고 싶은 마음?
노출증, 귀걸이, 화장, 섹스어필?
허영심, 명품, 안목의 정욕?
좋은 집, 멋진 자동차?
성적, 일류 대학, 박사학위, 허탄한 자랑?
논문, 집필, 연주, 그림, 공연?
설교, 영적 교만, 성전 꼭대기?


어쨌든 보는 것과 관련되어 있음에 분명하니 우리의 눈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다.
그렇다면, 만일 소경 아니 시각장애인들은 안목의 정욕이 없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 하다. TV 토크쇼에 나온 시각장애인이 화장을 하고 목걸이 귀걸이를 하고 나온 것을 본 일이 있다. 뿐만 아니라 좀 더 추상적인 명예욕은 시각과는 무관하게 나타나는 일반 현상인 것 같다. 명예심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 심층부에 도사리고 있는 본질적인 죄성의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너구리 때려잡기 게임처럼 하나를 집어넣으면 다른 것이 튀어나오고 그것을 잡으려하면 또 다른 녀석이 고개를 내미는 게릴라성 욕구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멋진 글을 통해 내 자신을 내세우고 싶은 출렁이는 욕망의 파도 언저리에 노출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코스타 집회에 가서 간증설교나 세미나를 할 때에도 종종 이것이 내 자신을 내세우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두려움에 싸이기도 한다. 다른 강사들과 비교하여 더 잘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도 하고, 집회 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은혜를 받았다고 인사를 하면 내면의 파도가 더욱 거세어진다. (물론 감사하게도 그 욕망의 파도 뒤에 따라오는 은혜의 더 큰 파도가 있기에 이글을 계속 쓸 수 있으며 코스타에도 계속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글을 쓰는 일이나, 학문을 연구하는 일, 설교를 하는 일, 연주를 하는 예술 활동 등의 본원적 가치를 무시하고 모두 명예욕을 위한 것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여인의 아름다움 자체를 문제시 하는 것도 아니며 화장하는 여인들을 무조건 비판하는 꽉 막힌 사람도 아니다. 그 행위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의 영적인 상태에 의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단장한 여인의 순결한 모습 淡【?하나님이 허락하신 돕는 배필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낄 수도 있다. 하나님의 강권하심의 은혜에 사로잡혀 눈물을 흘리며 글을 쓸 때도 있고, 학문의 깊은 경지에 도달하여 자연 세계에 편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기뻐할 때도 있으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나타나는 비전의 통로가 되는 설교가 있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영성 깊은 연주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수시로 명예욕이라는 뿌리치기 힘든 함정에 쉽사리 빠져든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2)


명예심(Pride), 자랑(boast)은 스스로의 우월감을 남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은 욕망을 뜻한다. 그것이 심중에 있건 입이나 행동으로 표출되건 간에 인간은 그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악한 죄의 유혹에 빠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선악과로 우리를 유혹하던 사단의 말은 궁극적으로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창 3:5)”는 것이었고 우리는 그 함정에 깊이 빠져버렸다.


결국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둘이 되실 수 없는 분이기에 가짜는 죽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죽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꿈틀대는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죄의 본성은 끊임없이 우리를 죽음 언저리로 몰고 간다. 그것을 우리는 교만이라고 부른다. 교만은 곧 죽음의 씨앗인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는 속담이 있다.
사람만이 자기 이름을 가진 존재이다. 종족의 이름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이름을 가진 존재는 사람밖에 없다. 그것은 사람만이 인격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름은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었을 때 비로소 발생하게 된다. 세계에 60억의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할지라도 그들은 모두 이름을 지니고 있다. 그 이름과 더불어 인생을 살아간다. 그리고 죽어서도 그 이름을 후손에게 남기는 것이다. 이름을 기억하고자 많은 민족이 조상의 묘소를 만들고 비석을 세우고 또한 족보를 통해 그 이름을 보존하기도 한다.


대학교 1학년 때 함께 다니던 동급생이 갑자기 죽은 일이 있었다. 출석을 부르던 교수가 그 학생의 사망 소식을 듣더니 무심하게 출석표에 자를 대고 그 이름을 두 줄로 지워버렸던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우리 가운데 없었으며 곧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만큼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 자체이기도 하다. 인격체인 사람에게는 이름이 곧 자신이다. 이름이 사라지면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 이름이 올라가면 그 자신이 올라가는 것이요 이름에 먹칠이 가해지면 그 사람의 존재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애완견을 키우는 사람이 개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그저 유사 인격성을 부여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개가 사람처럼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존재와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어떤 동물도 죽은 이후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사람만이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는 노력을 한다. 


남들 앞에 화려한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들을 많이 하는지? 명예욕에 휩싸인 인간들에 의해 수없이 발생하는 허위적인 행동들을 생각해보라. 명분과 이름을 중시하는 유교문화권의 영향으로 한국 사회는 더더욱 이 병이 깊다. 양반과 가문을 따지던 옛 습관이 요즈음은 뿌리 깊은 학벌사회로 변질되었고,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는 말 뜻 그대로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직업을 택하기 위해 가진 노력을 다한다. 마치 과거에 장원급제하던 시절처럼 사법고시에 청춘과 전 인생을 거는 법학도들, 학문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박사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서 안간 힘을 쓰는 그들이 법관이 되고 교수가 되었으니 사회가 온전할 리가 없다. 온갖 타이틀을 명함에 새기고 이력서에 한 줄 더 넣기 위해서 기를 쓰다보니 가짜 박사요 가짜 자격증이 난무한다.


이 현상은 크리스천 사회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어쩌면 한 수 더 뜬다고 해야 옳지 않을지? 유교적 계급의식에 물든 한국인들에게 집사요 장로요 권사요 하는 타이틀 보다 매력적인 것은 없다. 그것을 자신의 이름 위에 붙여지는 타이틀이나 계급장으로 인식하여 사회적 존경이 뒤따라온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어릴 때 동네 골목에서 사카린을 녹여 만들어 먹던 뽑기와 같이 그것은 잠시 입안에서 달지라도 금세 부서지고 녹아 없어질 사이비 명예요 가짜 계급장일 뿐이다. 그 같은 명예욕의 연장선상에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된 사람은 없을까? 교회 안에서도 높아지려는 경쟁심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일부 교회와 교단에서 장로를 돈으로 사고 총회장 선거에 온갖 부정부패와 금품이 오간다는 것은 오히려 상식이 되어있다. 영적인 명예심은 세상적인 명예심보다 더 집요하고 끈질기다. 그것은 마귀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어떤 모습이든 우리를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뛰어내려 이목 집중을 받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자신의 명예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 결코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마귀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온갖 감언이설로 우리를 성전 꼭대기로 몰고 간다. 뿐만 아니라 옆집 성전과 높이를 견주어보게 한다. 경쟁심을 부추겨 끝없는 질투심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이다. 


사촌이 밭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속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즘 시대 같으면 완전 핵가족 시대가 되어서 도시화된 사회 속에서 사촌과 마주칠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생길만큼 사촌은 가까운 이웃만도 못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옛날 농경 사회와 씨족 사회에서의 사촌의 의미는 가장 가까운 가족은 아닐지라도 적당히 가까운 그래서 매일 얼굴을 부딪치며 살 수 밖에 없는 오늘날의 이웃이나 직장 동료의 의미와도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잘 되는 것을 도무지 우리는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후배가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할지라도 만일 그의 전문성이나 실력이 객관적으로 인정이 된다면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서구사회와는 달리, 동료나 후배가 먼저 승진하면 옷을 벗고 나갈 수밖에 없는 일부 직업의 이상한 풍토는 우리 사회만이 지닌 악습 중 하나이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멀리 있는 원수 국가의 국민들도 아니요 잔인무도한 테러리스트도 아니다. 일상 속에서 매일 부딪히는 동역자가 우리를 괴롭힌다. 그것도 한 부서나 한 팀에 속한 사람들, 그리고 바로 업무적으로 교통할 수밖에 없는 상사나 직속 부하가 가장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그 부딪힘 속에서 감추어져 있던 온갖 죄성이 다 튕겨져 나온다. 교만한 사람이 상사가 되면 온갖 비열한 방법으로 부하 직원을 착취하고 억누르려 한다. 그러나 설사 그렇지 않은 경우라 할지라도 이 싸움은 그치지 않는다. 상사가 호락호락해 보이면 상사의 권위를 도무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랫사람들의 교만이 이제 고개를 쳐든다. 상사의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온갖 덜미를 잡아 비판하지만 사실상 그들이 같은 위치에 오르면 한 수 더 뜨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그 같은 속성의 정체는 자신이 더 높아지기를 원하는 마음, 즉 사단이 넣어준 하나님이 되기까지는 쉼이 없는 교만이 그 본질인 것이다.


<디어 헌터>나 <하얀 전쟁>과 같은 전쟁 영화를 보면 전쟁터에서 진정한 인간성의 본질이 드러나며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상태에 있는지 깨닫는다. 그 같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의 감추어진 연약한 죄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직장은 떡을 사이에 둔 전쟁터요 직장 동료들은 전우들이요 더러는 적군들이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떡 앞에서 완전히 노출되어 벌거벗은 자신을 발견한다.


더러는 뭔가 큰일을 이루었다 싶은 사람이 나타나면 마귀는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칭찬하고 추켜세움으로써 내심 자신에 대한 우월감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그리고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려 마침내는 왕을 삼으려 한다. 세상의 왕이 되고 싶은 욕망은 도무지 뿌리치기 힘든 것임을 마귀는 잘 알고 있다. 대형 교회나 큰 선교 프로젝트를 통해 널리 알려지고 성공한 크리스천 리더 가운데 결국 이 유혹에 넘어가 말년에 실패하고 오명을 남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 경우 처음부터 자신이 왕으로 등극하려고 마음먹는 사람은 드물다. 처음에는 나폴레옹이나 박정희처럼 모두 자신에게 맡겨진 혁명과업만 완수하면 정권 이양을 하겠다고 약속을 한다. 실지로 그런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높아지려는 본성을 죄의 뿌리로 지닌 인간들에게 마귀는 달콤하게 집요하게 속삭인다. “너 아니면 이 일을 할 사람이 없어. 그냥 못이긴 체하고 그들의 말에 맡기라고.” 이런 상황에서 예수의 전술은 정말 단순하였다. 뿌리치고 달아난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도한 무리들이 몰려들어 예수를 왕 삼으려 했을 때 예수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글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라고 말하든지, “아마도 나 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있을 겁니다. 사정이 급하시다면 적임자가 나타날 때까지만 제가…” 라고 한 다리를 걸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쏜살같이 달아난 것이다. 왕이 되고 싶은 욕망, 이 유혹은 예수가 달아나야할 정도로 심각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3)


A.W. 토저가 쓴 <예배인가 쇼인가!> 라는 책이 있다.(1) 그 책에서 토저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조차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쇼로 전락할 수 있음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사람의 창조 목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들이기 위함임을 설파하며 참 예배의 본질을 되찾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배를 드리는 강단에서조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을 위해 각색되는 온갖 문양(紋樣)들이 있다. 믿음 없이 드리는 카인의 예배와 모르는 것을 예배하는 사마리아인의 예배는 차치하더라도, 진정 알고 믿는다는 공동체에서 조차 온갖 부수적인 치장들이 십자가를 가려서 도무지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영광 받기에는 여유가 없는 교회가 대다수이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헌금, 자신을 나타내기위한 성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한 설교, 교회의 이름을 내세우기 위한 선교와 구제……. 모든 것이 사람들의 이름을 내고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 신경과 에너지가 집중된 교회에서 어떻게 참 예배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일찍이 자신의 백성을 광야로 이끌어내신 이후, 참 예배의 본질을 알려주시기 위해 성막을 짓도록 명하셨다. 성막은 장차 오실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나타내는 모형이요 대속의 피로 구원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함축적 가시적으로 담고 있는 신비의 구조물이었다. 성막 안에서 제사장에 의해 행해졌던 제사 행위는 그와 같은 구속의 원리를 반복적으로 깨우치기 위해 주어진 사랑과 교훈의 리허설이었다. 단번에 완전한 구원을 이루신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성막과 제사의 형식은 폐하여졌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과 의미는 여전히 살아있다.


성막 문을 들어서면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피의 제단(alter)이 먼저 눈앞을 가로막는다. 제사장들은 몸을 씻고 옷과 성막의 모든 기구에 관유(anointing oil)를 뿌려 성결케 한 후 희생될 번제물을 안수하여 제단 앞에서 잡아 그 피를 단 사면에 바르고 나머지를 단 밑에 쏟은 후 단 위에서 불살랐다. 성막 안뜰을 오가며 더럽혀진 수족을 물두멍(laver)에서 깨끗이 씻은 후 비로소 성소(holy place)로 들어간다. 성소 안은 왼쪽에 놓인일곱 갈래의 금 촛대에서 나오는 휘황찬란한 빛에 의해 온통 황금으로 빛나고 있다. 바로 오른쪽에 놓인 상에는 열 두 조각의 떡이 여섯 개씩 두 줄로 나란히 놓여 있다. 이것이 진설병(showbread)이다. 이 떡을 먹은 후라야 비로소 지성소(the most holy place)의 휘장 바로 앞에 놓인 향단(alter of incense)에서 분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수많은 제사는 여기서 멈추게 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분향하는 것으로 상징되는 예배 행위, 그것을 위해 거쳐야할 단계 중에서 마지막 관문이 성소 안에 있는 진설병을 먹는 것이었다. 구약의 제사장은 이 진설병을 먹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성도들인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참 예배자로 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소 안의 진설병을 맛보아야만 한다. 과연 진설병이란 어떤 떡인가?


진설병, SHOWBREAD!
이 무슨 희한한 이름의 떡인가?
나는 무심코 영어 성경을 보다가 진설병이라는 단어가 showbread(2)라고 번역되어 있는 것에 착안하여 깊이 묵상하게 되었다.


보이기 위한 떡? 자랑하기 위한 떡?
도대체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떡이며 누구에게 자랑하기 위한 떡이란 말인가?


남을 의식하며, 사람들을 의식하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자신의 이름을 자랑하기에 급급하여 살아가던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서 가까이 나아갈 때, 하나님은 진설병을 먹으라고 명하신다. 이름하여 “자랑의 떡”이다.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리석은 일이요 아무런 매력도 느낄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이방신의 신전이 어마어마하고 화려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하여 성막의 안뜰은 너저분한 흙바닥으로 노출되어 있어서 제사장은 날마다 물두멍에서 더럽혀진 자신의 수족을 씻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떡의 전쟁터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더럽히게 되는 그 상황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의 상징인 피의 제단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하며 그것을 통과한 이후 성소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성막의 성소를 만든 재료는 외피가 붉은 물을 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되어있으며 그것을 우중충한 해달의 가죽으로 덧씌우고 있다.(3) 마치 겉으로는 아무런 흠모할 만한 점도 없이 세상 속에서 버린바 되었던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성막 안은 온통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어 휘장을 젖히고 들어가는 사람마다 황금 촛대에서 비추이는 황금빛 물결에 압도당하고 만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으로 상징되는 진설병을 먹으라는 것이다.


예수와 만나는 장소, 성소! 그곳은 세상의 어떤 자랑도 소용이 없고 빛을 잃어버리는 곳이다. 오직 예수만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 곳, 내 인생과 목숨과 모든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예수, 그 예수를 자랑하는 그 떡을 그곳에서 먹으라는 것이다. 그곳에서 어떻게 내 행위와 내 이름과 내 학벌과 내 직위와 내 믿음과 내 신학과 내 거룩함을 내세울 수 있단 말인가? “자랑의 떡 진설병을 먹으며 너희는 내 앞에서 한번 자랑해 보아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위해 내어준 내 아들 예수의 살을 먹는 너희들아! 진정 너희가 내 앞에서 자랑할 것이 있단 말이냐?” 그 자랑의 떡을 먹는 사람마다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자신의 자랑거리를 내던지며 통곡하고 오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소리쳐 고백할 것이다. 예수 주여, 당신만이 내 인생의 자랑거리입니다. 나는 오직 당신만을 자랑합니다. 그 뜨거운 고백이 있은 후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를 성소 안에서 그렇게 뜨겁게 만나기를 원한다. 미지근한 신앙, 자기 자랑에 급급하고 세상의 휘장으로 십자가를 가려버린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힘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며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 19)” 그리고 성전된 우리 마음의 성소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4)


예수와 더불어 먹는 떡, 진설병. 그 떡이야 말로 우리 인생의 자랑의 시작이요 끝이 되어야 한다.


세계 도처의 공동묘지에는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비석이 세워져있다. 그들이 살아있을 때 어떤 삶을 살았든지 그들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화려한 비석으로 치장한 사람이건 명성도 빛도 없이 무명으로 살다가 사라진 사람이건 사람은 비석에 이름을 남긴다. 그러나 비석에 남겨진 이름에는 아무런 자랑도 의미가 없다. 더 이상 그것은 죽은 자의 자랑이 될 수 없다. 우리 이름이 기록되어 영원히 남게 될 자랑거리는 생명책에 적혀진 이름과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이 예수와 더불어 진설병을 나누었는가 하는 그 행위가 적힌 그 이름이 될 것이다.(계 21:12)





(1) A. W. Tozer, 예배인가 쇼인가, 규장, 2004
(2) KJV, NKJV 및 ASV 등 여러 성경 번역에서 진설병을 showbread로 번역하고 있다.
(3) M. R 디한은 그의 저서 <성막(tabernacle)>에서 성막의 신비한 구조와 상징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4) 이 말씀은 본질적으로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성도들을 향하여 주신 말씀으로 보는 것이 바른 해석이다.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아직 예수를 영접치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들어가시기를 원하여 문을 두드리는 장면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