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인만큼 공동체적인 민족이 있을까? 한국인은 홀로 있기를 두려워한다. 어떻게든 내편을 끌어들여서 우리를 만들고 만다. 우리 집, 우리 가족, 우리 남편, 우리 마누라, 우리 편, 우리 동네, 우리 가문, 우리 학교, 우리 지방, 우리민족, 우리나라, 우리 은행……. 그리고 마침내 <열린 우리당>이라는 희한한 이름의 정당까지 생겨났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너희”를 배제시키는 배타성을 지닌 “닫힌” 개념이다. 그런데 그것을 “열린” 우리당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논리적 모순이다. 비장한 각오가 느껴지는 희화적인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닫혀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토록 목숨걸고 우리를 만들고 나서, 그 속에서 박터지게 싸운다. 더 나은 우리를 만들기 위해서다. 우리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다. 우리는 우리의 우리가 단단하게 닫혀있을 때만이 심리적 안정감을 이룬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우리는 끝없이 깨지고 갈라진다. 그러나 갈라진 작은 우리 안에 들어가 있다보면 다시 불안해진다. 주변에 더 큰 우리들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는 더 큰 우리가 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 깃발을 흔들고 머리띠를 두른다. 그리고 뛰기 시작한다. 운동원이 되고 운동선수가 되고 조기축구회가 되고 응원단이 되고, 그러다가 공이 구르기 시작하면 함성을 지른다. 오 필승 코리아 그 함성이 광화문에서 시청앞으로,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강원도에서 제주도로 퍼져나간다. 아니 아예 전 세계에 퍼진 조선족들에게 파도처럼 전파된다. 그 함성이 “따당따 단딴“하는 민속 장단 안에서 어느 순간 붉은색으로 획일화 된다. 단일민족이 단색민족이 되는 것이다. 갑자기 그동안 기를 쓰고 만들었던 수많은 우리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하나로 뭉치기 시작한다.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시냇물을 이루고 시내가 합하여 강줄기를 이루고 강물이 합하여 바다를 이루듯, 폭포수처럼 노도처럼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온 나라가 하나가 되는 감격을 이루어낸다. 마침내 우리는 하나의 우리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함성이 지나가고 나면, 연극이 끝나고 나면, 촛불이 꺼지고 나면……. 서서히 우리는 다시 작은 우리들을 만드는 그 옛 자리로 되돌아간다. 국회가 다시 열리고, 싸움은 다시 시작된다.




(2)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사람은 관계와 관계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간다. 비록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관계가 아주 없는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는 것보다는 낫다. 절대적 무관심 속에 놓이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있을까? 이 광대한 무생물적 우주 안에 만일 나 홀로 존재한다면 그 얼마나 끔찍한 일일까?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도 프라이데이라는 대화 상대가 있었기에 생존을 위한 용기가 생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창조 시부터 더불어 대화하며 공존하도록 만들어졌다. 그것은 창조주의 속성에서 비롯된다. 우주 만물은 엘로힘(Elohim)으로 표현된 창세기 1장의 복수형 하나님이 합력하여 창조한 합작품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사람을 창조할 때에는 그 복수형 하나님이 서로 의논하며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분명한 설계자의 의도와 계획을 나타냈다. 그것은 인간 지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와 비교할 수조차 없는 지상 최대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의 기획자와 매니저와 실행자인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일한 팀 사역(team ministry)의 결과였다.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으로 표현된 인간의 속성 속에는 하나님의 인격성(personality)과 도덕성(morality) 뿐 아니라, 반드시 영육(靈肉)의 대화를 통해 교통하도록 설계된 영적인 속성(spirituality)이 들어 있었다.


사람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은 공동체적인 존재라는 뜻이다. 그것은 반드시 대화를 통해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獨處)하는 것을 좋게 보지 않으셨다.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다. 그 속에서 창조의 목적인 사랑을 이루게 하셨다. 사랑은 창조의 목적인 동시에 결과이기도 하다. 공동체는 사랑을 통해 유지될 뿐 아니라 재생산된다. 사랑은 창조의 시작이요 끝이다. 사랑은 공동체를 충만히 채우는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의 입김이요 숨결인 것이다. 그 속에서 공동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운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사랑도 함께 떠났다. 사랑은 본질상 믿음을 기초로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 이상 믿지 않았을 때, 그 사랑은 식기 시작했다. 사랑이 차갑게 식어가고 사라져 가자, 공동체는 서서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온갖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교만과 탐심과 배반과 폭력과 살인과 전쟁이 일어났다. 마침내 사랑이 깨지고 분리가 일어난 것이다. 죽음을 향한 긴 그림자가 공동체 안에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가정과 사회와 민족과 국가라는 인간이 속한 모든 공동체에 분리의 영이 활동하며 온갖 상처와 아픔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역사였다. 우리의 아픈 역사들 

그 공동체의 상처들을 치유하며 회복하기 위해 예수가 왔다. 예수는 갈라진 모든 관계들을 다시 회복시킨다. 십자가 안에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치유된다. 그리고 나면,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 나와 너 사이의 관계, 그리고 나와 우리들 사이의 관계들이 회복된다. 마침내 그 회복은 나와 그들 사이, 나와 원수 사이, 나와 모든 피조물 사이의 관계로까지 확대된다.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던 “나와 그것(I and it)” 사이의 관계가 “나와 너(I and You)”의 관계로 회복되면서 “우리”라는 공동체가 다시 형성되는 것이다.



(3)


갈라진 우리 민족, 남과 북, 남과 남, 조선족과 고려인, 재일동포와 사할린 동포, 재미 교포와 캐나다 교포……. 지난날의 뼈아픈 역사를 통해 우리는 산산이 부서졌다. 그 나뉨의 역사를 극복하고 하나됨의 새 역사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이곳에 왔다. 연변과기대 공동체는 13개국 이상에서 모여든 다민족 복합 공동체이다. 점심시간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보면, 한 테이블에서도 여기저기 중국어, 한국어, 영어, 독일어, 불어, 일어가 뒤섞이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그 뿐이랴?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이 함께 어울리고, 더러는 가정을 이루고 살아간다. 바벨탑에서 갈라진 언어와 민족이 성령 강림 시에 다시 하나로 합해지기 시작했다면, 그를 방불케하는 역동적 현장이 바로 연변과기대이다. 제각기 서로 다른 배경과 문화 그리고 소속 단체들을 통한 다양한 생각들이 모여 있는데, 어떻게 이렇듯 조화를 이루고 한 가지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 그저 기적이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한 마디로 연변과기대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교육의 산실이다. 그 속에서 우리 민족의 회복 뿐 아니라 중국을 너머 온 열방과 인류를 섬기고 감싸는 박애정신이 배출되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



그런 공동체라면……. 어쩌면 더 이상의 나뉨과 분열은 존재할 수 없을 것도 같은데? 과연 그럴까? 그들은 더 이상 갈등도 다툼도 없이 지내고 있을까? 천만에 말씀이다.

솔직히 현상 그대로를 들여다보자. 언어가 서로 다른데 왜 불편함이 없겠는가? 언어의 장벽에서 오는 오해와 실수들은 매일 지속되는 일상이다. 서로 다른 문화 배경에서 오는 갈등은 어떠한가? 서양과 동양의 문화차이에서 오는 몰이해는 심각한 오해를 낳기도 한다. 특별히 한국인 중심으로 진행되는 빨리 빨리 문화, 즉흥적인 감성중심의 의사 결정, 좌충우돌 하루가 멀게 달라지는 규정들, 하루 전에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쇼트 노티스(short notice)……. 이런 것들은 서양 사람들, 특히 합리적인 독일 사람들의 눈에는 기이하게 여겨질 뿐아니라 그들을 화나게 만든다. 음식 문화가 그렇게 다른데… 날마다 식당에서 2,000 여명의 학생과 교직원이 한 가지 식단으로 자신을 죽여야 하는 그 인내심에 오히려 탄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 차이에서 오는 갈등보다도 더 힘든 것은 역시 모든 사람들의 마음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에고(ego)의 부딪힘 들이다. 게다가 이곳까지 몰려든 사람들이란 대개 개성이 “개 같은 성질”을 나타내는 특별한 종자들이다. 좋게 말해서 개성이지 달리 표현하면 한 마디로 독종들이다. 독특한 종자들이란 말이다. 좋은 환경들을 스스로 버리고 일부러 고생을 찾아서 몰려든 족속들이니 보통 사람들은 아닌 셈이다. 이들이 200여명, 아니 가족까지 합하면 500명이 넘는 대 식구가 모여 있으니 문제가 없을 리 없다. 이런 종자들의 특징은 보통 양보할 줄을 잘 모른다는 점이다. 모두 자기가 제일 잘난 줄로 착각한다. 그러니 자기주장이 항상 옳을 수밖에 없다. 우월감이다. 더구나 현지인들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을 항상 안고 있으니 습관적 우월감을 나타낸다. 이런 우월감들이 부딪치기 시작하면 못 말린다.



그런데, 사실은 우월감이란 열등감의 적극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사실 본질적 열등감에 빠져있다. 실낙원의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그 영적 퇴화(degradation)가 발생한 그 순간부터 전 인류는 열등감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의 완전성을 경험한, 아니 하나님의 그 완전한 형상이 담겨 있던 그 추억 속에서 걸어 나와 이제 초라한 죄인의 타락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의 실존은 “열등감에 귀속된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따라서 학력이 높을수록, 외모가 좋을수록, 돈이 많을수록, 권세를 누릴수록 그들은 더 큰 열등감 속에서 신음한다. 끝없이 자신을 더 높은 자리와 비교하며 그 비교의식 속에서 눌려서 살아간다.

이론적으로 보면, 그런 죄인들이, 아니 중증의 환자들이 200여명 모여 있는 공동체니 얼마나 문제가 많으랴? 결국 문제는 비교의식이다. 헌신의 마음을 가지고 왔지만 눈앞의 현실 앞에서 고민한다. 사역지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외형적 차이와 직분들, 그리고 받은바 달란트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남과 비교하면 어쩐지 초라해 보이기도 하고 앞서서 나가는 동역자에 대한 공연한 질투심이 발동하여 힘들어지는 것이다. 온갖 석사, 박사들, 교수들이 모인 대학 공동체이니 잘난 사람이 좀 많겠는가? 거기다가 내놓고 드러내지 못하지만 M과 P의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 영적 우월감은 이건 세상적(?)인 우월감하고 또 다른 차원의 골치 아픈 문제다. 자기만의 도그마를 내세워 도무지 타협할 줄 모르는 족속들이 바로 이들 아닌가? 갈라지고 쪼개지는 데는 관록이 붙은 명수들이다. 그런 곳에서 훈련받은 정예부대들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나타나는 경쟁심리와 높아지려는 마음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 마음들을 다 내려놓고 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피상적인 착각일 뿐이다. 물질에 대한 욕심들을 뿌리치고 가난한 삶을 스스로 택한 것은 일단은 가상한 일이지만(이 문제조차 사실 완전히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고개를 넘고 나면 더 험준한 고개가 기다리고 있다. “먹음직한 유혹” 너머에는 “보암직한 유혹”이 기다리는 것이다. 명예심,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만민에게 자신을 보이고 싶은 우쭐대는 마음, 그것이 더 강한 집착으로 다가온다. 더 이상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면서 살리라 하는 결단과 다짐을 하고 건너온 곳이지만, 그 결심은 홍해바다를 건너며 은혜 받을 당시 잠시 뿐이었다. 광야 생활이 시작되면 곧 불평불만이 터져나오며 갈등이 시작된다. 과거 애굽 생활의 옛 습관들이 여지없이 나타나는 것이다.

미국서 건너왔던 한 동역자 부부가 2년의 사역을 마치고 다시 돌아갈 때, 그 자매가 아내에게 찾아와서 눈물로 고백한 일이 있다. 그동안 자신이 마음속으로 아내에게 너무 많은 죄를 짓고 떠난다는 것이다. 겉으로 화려해 보이고 음악을 통해 항상 앞자리에서 돋보일 수밖에 없는 아내의 모습이 그녀에게는 항상 걸림돌이 되었다. 떠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가까이 대화하는 가운데 아내에 대해 바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초창기부터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아내가 자신의 우상들을 내려놓고 헌신하게 되는 지난 10년의 과정을 지켜보았기에 아내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항상 사랑으로 격려해준다. 그러나 그 과정을 모르는 새로운 동역자들 가운데는 겉모습만 가지고 판단하며 더러는 질투심에 빠질 수도 있다. 마음속으로 아내를 정죄하며 지내었으니 그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연변과기대 교직원들의 영적 성장 곡선을 대략 시간대 별로 그려보면, 처음 도착할 시의 충만한 기쁨이 첫 1년을 지나면서 점차 하강한다. 예상치 못했던 공동체 내의 불합리한 모습과 동역자들의 단점이 보이면서 실망하는 과정이다. 그것이 더러는 강한 불만과 정죄로 표출되는 사람들도 있다. 2년을 넘기면서 그 실망은 최저로 하락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한 사람들은 사역지를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3년차에 이르면 점차 사역의 본질을 깨닫고 외적인 환경보다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새로운 사역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영적 상태가 상승하며 안정된 사역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한 마음으로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공동체를 이루어낸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연변과기대가 보여주고 있는 공동체적 연합은 다른 어떤 공동체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특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 기적의 비밀이 어디에 있을까?


광야 생활을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성막을 짓도록 명하고 그 속에서 여러 가지 제사를 드려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한다.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와 속죄제와 속건제… 수 많은 제사 중에서 특별히 공동체의 연합을 위해 드리는 제사가 소제(grain offering)이다.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다. 양과 소와 염소를 잡아 피를 흘려드리는 다른 제사와는 달리 소제는 곡식을 고운 가루로 갈아서 기름과 유황으로 반죽을 하여 화덕에 구어 무교병의 떡을 만들어 드린다. 소제야말로 딱딱한 곡식 알갱이와 같은 자아의 덩어리를 잘게 부수어 한 덩어리의 떡을 만들어 올리라는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요청이다. 곡식을 빻을 때, 외형적인 큰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좀처럼 알갱이가 부서지지 않는다. 맷돌로 갈든지 방아로 내리찧든지 큰 물리적 힘이 가해질 때 곡식 알갱이들은 서로서로의 어깨를 부딪치며 산산조각이 난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대학을 세우다보니 나타나는 여러 가지 외적 압력이 오히려 공동체를 잘게 부수고 가루로 만들어 연합하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함을 보게 된다. 그 속에서 곡식들끼리 서로 부딪쳐 가루가 되며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하나의 반죽을 이루게 한다. 그것을 뜨거운 화덕에 굽는 것이다. 광야생활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들의 감추어진 탐심과 교만을 드러내며 곧은 목을 연하게 하고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는 연단의 과정이었다면, 연변과기대 공동체의 사역 역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을 광야로 내몰아 그곳에서 연단시키며 변화시켜서 마침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에 적합한 사람들로 만들기 위한 성화과정임을 깨닫는다.

공동체의 떡을 만들 때,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 누룩과 꿀을 넣지 말도록 레위기는 기록하고 있다.(레 2:11-3) 누룩은 공동체를 부풀리는 교만이요, 꿀은 공동체를 유혹하는 탐심이다. 아울러 처음 익은 것으로는 드리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단에 올리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다. 연변과기대를 찾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처음 이 땅에 발을 내 딛을 당시의 깨끗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항상 일하라는 말이요, 자칫 매너리즘에 빠져서 스스로 선한 체 하며 외식과 위선으로 사역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반드시 소제물에는 언약의 소금을 치라고 명하고 있다. 소금처럼 변치 않는 십자가의 언약이 늘 공동체를 부패하지 않도록 지키는 방부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변과기대 공동체가 매주 드리는 예배는 대단히 특별한 감동을 가져다준다. 직접 체험해본 사람들이 아니면 도무지 알 수 없는 깊은 은혜가 예배의 시종을 통해 강물처럼 출렁임을 느끼게 된다. 예배를 통해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며 하나됨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소년에서 청장년과 노년층이 함께 드리며, 각종 배경이 다른 사역자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가 단일 예배를 통해 기쁨을 찾고 영적 만족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러나 그것을 정성드려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이미 성령의 하나됨이 나타난다. 헌신자들의 모임이기에 받을 수 있는 특권인지도 모르겠다. 외지에서 잠시 방문하는 분들도 여지없이 그 감동에 휩싸여 눈물을 흘릴 때가 많다. 찬양과 기도와 말씀과 봉헌이 함께 어울어진 하나됨의 제사, 어쩌면 그것이 연변과기대를 지난 10여 년 동안 지탱할 수 있도록 한 내면의 힘이요 원동력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예수는 제자들을 두고 떠나기 전에 최후의 만찬과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 공동체의 하나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반복해서 가르친다. 하나됨은 성삼위 하나님의 속성이기에,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됨 같이 제자들도 자신 안에서 하나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그것을 위해 중보한다. 자신이 가르친 제자도의 성패가 그들의 하나됨에서 좌우될 것임을 또한 예언한다. 세상 사람들은 제자들이 행한 일로 인해 그들을 인정하기 보다는 그들이 하나되어 서로 사랑할 때 비로소 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알아볼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될 때 비로소 낱알과 같이 흩어져 있던 제자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그들의 삶이 산제사로 드려지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다. 그 속에서 다른 동역자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서로 칭찬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잘난 큰 아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고 망가진 배고픈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산산이 찢기고 피 흘렸던 예수의 몸이 다시 회복되어 “새 한 몸”이 되는 것, 그것이 교회요 그것이 예배의 본질이다. 그것을 날마다 체험하기 위하여 예수를 기념하며 우리는 성찬(Eucharist)을 드린다. 멜기세덱의 제사를 통해 나타났던 떡과 포도주의 삶에 동참하는 것이다. 눈물의 성찬을 통해 우리의 죄악은 씻겨져가고, 낱알에서 가루로 고운 가루에서 다시 한 덩어리의 떡으로 드려지는 완전한 하나됨의 공동체 “우리 떡”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떡은 우리끼리 먹고 누리기 위해 만든 떡이 아니다. 우리에 들지 못한 수많은 다른 양들이 먹어야 하는 그런 떡이다. 따라서 “열린 우리 떡”이다. 그러하기에 연변과기대의 하나 된 “우리 떡”을 품고 저 북녘의 집나간 배고픈 동생들을 찾아 나서는 평양과기대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