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난과 부요에 대한 떡의 논리를 이제 정리해 보자. 그 속에 나타난 청지기의 윤리는 무엇인가?
물질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요, 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들에게 물질은 이미 우상이 되었다. 물질에 눈이 어두운 인간들은 물질의 노예가 된지 오래다. 모든 우상이 그러하듯이 이미 주종관계가 바뀌어버린 것이다. 물질 자체가 사람을 조종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에 단순히 가치중립적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물질은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으니 물질을 (많이) 소유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는 말은 다분히 문제가 있다. 이 말 속에는 물질을 향한 끊을 수 없는 인간의 열망과 탐심을 교묘히 감추어 위장하려는 미련이 숨어있다. 부자들을 위한 면죄부를 손쉽게 발급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물질은 이미 영적인 능력을 휘두르는 맘몬 신이 되어 있다. 이미 불의를 품고 있으며, 사악한 인격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브를 유혹했던 뱀의 속삭임이 여전히 우리 귓가를 맴돌고 있다. 그 사악함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아 끝없는 탐심과 교만으로 이끌어가며 사회적 불평등과 가난을 확대 재생산한다. 물질로 인해 발생한 궁핍과 억압 상태는 인간의 역사를 전쟁과 기근과 폭력으로 점철된 불행으로 수놓았다. 하루하루 시시각각 발생하는 부정적인 국내외 뉴스들은 거의 모두가 물질을 서로 갈취하기 위해 벌이는 떡의 전쟁, 그 전쟁터의 전황들이다.
이 전쟁을 피할 수는 없을까?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간다면? 그러나 우리는 물질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떡은 우리의 존재양식이다. 그래서 물질을 무시할 수도 없다. 더구나 물질을 초월하여 나 혼자 고요한 삶을 살아가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나 가난하다. 그 속에서 쓰러져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처음부터 이 세상을 다스리고 지키도록 명하셨다. 이른바 청지기의 직책을 준 것이다. 우리가 돌보아야할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가난한 이 세상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회 그리고 가난한 생태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그 명령을 피하는 것은 직무유기가 된다. 따라서 청지기의 윤리의식이 문제시된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주인이 기뻐하는 삶이 될까?
(2)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법은 가난해지는 방법밖에 없다. 가난해지는 길은 자신이 가진 재물을 나누어주는 것이다. 결론은 분명하고 간단하다. 네가 가진 것을 주라(Give!)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복음서에서 가르친 재물관이다. 이 가르침은 너무나 명확해서 우리들이 좀처럼 받아들이기가 힘들 정도다. 그래서 이 말은 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뒷걸음질쳐서 예수에게서 달아났다.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고 살아가던 종교지도자들도 많았다. 그들은 예수의 그 말을 비웃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이 위험인물에 대해 핍박을 가했다. 이 같은 현상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특히 사회적 복음과 물질관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는 누가복음에는 부자와 물질적 부요에 대한 수많은 경고들이 등장한다. 의사였던 누가가 예수의 제자가 된 이후 물질에 대해 가장 강경한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이 흥미롭다. 오늘날의 의사라면 가장 부유한 계층에 속한 사람들인데, 그가 오히려 공산주의자에 가까운 급진적 분배주의자가 된 것이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부자에 대한 수많은 경고, 혁명적 메시지 중에서도 가장 우리를 놀라게 하고 또 난처하게 만드는 내용이 16장에 등장한다. 이른바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이다. 참 난해한 이야기가 되어서 역사 속에서 수많은 논쟁거리가 되어왔고 신학자들의 연구 과제로 등장했다. 그토록 곱씹은 이야기를 또다시 거론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섣불리 건드려서 제대로 된 결론이나 낼 수 있을지……. 하는 염려도 생긴다. 그러나 떡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 부분을 슬쩍 뛰어넘는 것은 마치 격전지에서 도망치는 비겁한 병사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부딪혀야 할 전투라면 과감히 돌진하고자 하는 심정으로 칼을 빼 든다.
<부자 주인과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
주인의 소유를 맡았으나 그것을 허비한 청지기……. 그는 자신의 잘못된 일이 주인의 귀에 들려 주인이 곧 들이 닥치고 하던 일을 빼앗기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인과 계수할 날이 다가오자 그가 취한 행동은 자신이 관리하던 채무자들을 불러 그들의 빚을 탕감해주는 일이었다. 주인의 재산을 더욱 감소시키는 일이었지만 그로인해 채무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실직이후의 자신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런데 이 옳지 않은 행동을 한 청지기가 지혜롭다고 주인에게 칭찬을 받는다. 이 같은 행동을 한 청지기를 빗대어 이 세대의 아들이 오히려 자기 세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주인은 자신의 재산이 불법적으로 줄어든 데에는 큰 관심이 없는 통 큰 주인임에 틀림없다. 이 부자 주인은 누구인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모든 부요의 원천이신 하나님이다.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지혜롭다고 칭찬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그는 자신의 죄를 신속히 인정하였다. 자신이 주인의 재물을 맡은 청지기로서 제대로 직분을 감당하지 못했음을 알고 그것을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끝없는 자기 합리화와 책임 회피에 빠지는 대다수의 사람들에 비해 그는 확실히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둘째, 그는 주인이 곧 들이닥칠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 자신의 행한 일들, 곧 지나간 삶에 대한 계수가 시작되고 자신은 청지기 직에서 쫓겨날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이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을 직시하는 종말론적 인식이기도 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 앞에 임박한 최후의 순간을 깨닫지 못한 채 어리석은 삶을 끝없이 경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이는 지극히 지혜로운 판단이었다. 셋째, 그는 자기에게 남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은혜를 베풀었다. 그동안 자신이 아끼던 재물을 사용하여 자신과 관계를 맺던 채무자들, 곧 빚에 허덕이며 살아가던 가난한 자들에게 물질적 혜택을 베풂으로서 자신의 실직 이후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이는 윤리적으로 보면 반드시 옳은 행동은 아니었다. 주인의 채무를 자신의 장래 이득을 챙기기 위해 임의로 탕감해주는 일은 결코 바른 행동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같은 행동은 타락한 세상, 곧 이 세대에 있어서는 있음직한 일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청지기의 약삭빠른 행동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주인이 지적한 점은 바로 이점이었다. 이 세대의 옳지 못한 청지기도 깨닫는 지혜를 소위 영생을 소유했다고 하는 빛의 아들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질책이기도 하다. 이 옳지 못한 청지기가 깨달았던 세 가지 지혜를 보고 배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인은 놀라운 주문을 우리에게 한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이 말씀을 바로 깨닫기 위해 좀 더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이 비유에 등장한 옳지 않은 청지기는 과연 누구인가? 이는 단순히 이 세대를 살아가는 윤리적으로 타락한 경영인 또는 부도가 임박한 사업가인가? 우리와는 무관한 사람인가? 크리스천인 우리, 거룩한 빛의 아들로 자처하는 우리들은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를 국외자의 신분으로 그저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옳지 않은 청지기, 그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옳지 않은 청지기들이다. 에덴동산에서 위임되었던 청지기 직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위대한 자연(nature)세계를 맡아 그것을 경작(cultivate)하여 아름다운 문화(culture)로 만들어 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다스리며 지키도록 맡겨두신 하나님의 소유물, 물질세계를 우리는 바로 지키지 못하고 사단에게 내어주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에 손길을 내밀었던 그 순간 전 인류가 함께 욕망의 손을 뻗혔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어 범죄한 그 순간 우리도 그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어느 신학자의 통찰력은 과연 옳다. 우리는 함께 범죄한 자요 청지기의 권력을 남용한 자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많은 물질들을 지금도 계속해서 허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보고는 영적인 인테넷 사이트(www.heaven.God/behavior)를 통해 속속 실시간으로 하나님께 들어가고 있으며 행위를 적은 책에 빠짐없이 기록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옳지 않은 청지기가 깨달았던 세 가지 지혜에 대해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주인의 재물을 끝없이 낭비하는 죄를 짓고 사는 옳지 않은 청지기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과 그 사실이 드러날 마지막 순간 임박했다는 종말론적 인식과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이야기이다.
제자들의 윤리적 판단을 유도하기 위한 주님의 요청,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은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취했던 그 행동을 하라는 것이었다. 네가 가진 재물을 나누어서 빚진 자들을 탕감해 주라는 것이다. 타락한 세상에서 어차피 재물은 불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의 탐심이 물질을 우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재물에는 이미 불의한 영이 깃들어 있다. 아무리 너희가 깨끗하려고 해도 너희는 물질에 대한 우상 숭배를 멈출 수 없고,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청지기직을 감당할 수는 없다. 끝없이 무질서를 창출하는 열역학 제 2 법칙의 무서운 심연과도 같이, 타락한 이 세상에서는 너는 결코 의로운 청지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네가 영원한 처소로 들어가 큰일을 맡을 때까지는 말이다. 어차피 나는 너에게 작은 것을 기대하고 있다. 네가 맡은 내 소유를 허비하지 않을 수는 없을지라도 비록 불의한 그 재물을 사용하여 내가 원하는 일을 해라. 네 주변의 너보다 더 많은 빚을 지고 허덕이며 살아가는 채무자들에게 그 빚을 탕감해 주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세상에서 너에게 기대하고 있는 청지기로서의 지극히 작은 일이다. 만일 네가 이 작은 명령하나도 충성되게 이행치 못한다면 나중에 천국에서 어떻게 더 큰 일을 맡을 수 있겠는가? 네가 남의 것을 관리하는 것조차 제대로 못해낸다면 어떻게 네 스스로 네 소유를 관리토록 큰일을 맡겠는가? (천국에서의 소유는 청지기 소유가 아니라 자기 소유임을 암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 열 고을 차지할 권세를 주겠다 하는 누가복음 19장의 약속이나 열 달란트 남긴 종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고 하는 마태복음 25장의 비유를 통해 천국에서는 상급과 함께 해야 할 일들이 주어질 것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러나 그 일은 타락한 인간이 행하는 고통스런 노동(labor)이 아니라 주인의 즐거움에 함께 참예하는 기쁨의 일(creative work)이요 예수와 더불어 왕 노릇 하는 특권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 너희의 재물에 대한 우상 숭배를 버리고 청지기의 본분으로 돌아가라. 청지기는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네 주인이 누구냐? 재물이냐 아니면 하나님이냐? 하인이 결코 두 주인을 함께 섬기지 못하나니 이제 너는 네 주인을 결정하라.
이 말을 엿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곧 그 화살이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을 직감했다. 그들은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부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돈이 많았을 뿐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곧바로 자기 방어에 들어갔으며 예수를 비웃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더구나 그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라는 예수의 말을 비웃었던 또 다른 근거는 구약에 나타난 선지자들이 대부분 부유한 삶을 살았던 지배계층이었고, 물질적 부가 곧 하나님으로부터 온 축복의 증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그들 나름대로의 지배논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강령을 가르치고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옳게 보이는 행동들을 하고 있었으나 예수는 그들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썩은 무덤과 같은 탐욕과 교만을 지적하며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이미 알고 계심을 질타한다. 그리고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 즉 구약의 가르침으로 하나님 나라가 지탱되어오던 이스라엘의 역사가 세례 요한을 마지막으로 종말을 고하고 이제 새로운 전환기가 도래했음을 천명한다. 이스라엘의 족장과 선지자, 왕과 율법사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끌려오던, 상대적으로 부유한 지배계층에 의한 집단적이고 국가적인 개념의 하나님 나라의 윤리가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철저히 개인적이고 피지배계층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 선포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구약의 율법이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의 복음을 통해 감추어졌던 것이 완전하게 드러나고 완성될 뿐이다. “너희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틈새를 만들어 교묘히 범하는 간음죄가 그 실례이다. 너희가 아내와 이혼할 때 이혼증서를 내주라는 율법을 이용하여 음행한 연고도 없는 아내를 버리기 위해 이혼증서를 주어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재혼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너희는 율법을 이용하여 너희 배를 채우고 자신의 악행을 감추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가증이 여기시는 것일 뿐이다.” 바리새인들을 응대하는 예수의 논리에는 빈틈이 없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결정타를 날린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한 부자가 있다. 날마다 값비싼 옷으로 치장하고 호화로운 음식으로 연회를 베풀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 집 문 앞에 누워 있는 헌데를 앓는 병자 거지 나사로를 그는 매일 오가며 바라본다.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로 연명하는 비참한 신세의 사람이다. 심지어는 개들조차 나사로를 위로하여 아픈 곳을 핥아주나 부자는 무관심했다.
마침내 나사로는 죽어 천국에 올라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이 대목을 주의하라.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긍지로 삼는 바리새인들을 다분히 의식한 표현이다.) 부자도 죽어서도 화려한 장례식을 치렀다. 그러나 부자는 음부에 들어가 고통을 받게 된다. 음부의 화염과 불꽃 가운데 극심한 갈증으로 신음하던 그는 아브라함과 그 품에 안긴 나사로를 보게 된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한다. 나사로를 보내어 자신의 혀끝에 물 한 모금을 적셔달라는 것이다. 여전히 이 부자는 교만하다. 자기 집 문 앞에 누워있던 나사로를 응당 자신을 위해 기꺼이 음부까지 심부름을 할 정도의 하인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대답은 냉정하다. 그 부자가 받는 고통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서 받는 위로와 대비된다. 가난한 자에게 들어간 복음으로 인해 천국이 나사로의 소유가 된 것처럼 부자인 너는 너의 교만으로 인해 세상에서 온갖 연락을 즐기면서도 네 문 앞에 누워있던 거지 한 사람에게도 은혜를 베풀 줄 몰랐으니 네가 지금 받는 그 고통을 감수하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 음부와 천국 사이는 더 이상 서로 건널 수 없는 큰 심연이 가로막혀 있음으로 가고자 해도 갈 방도가 없음을 냉철히 알려준다.
그러자 이 부자는 두 번째 간청을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이 고통을 감수할지라도 아직도 죽음 후에 닥칠 음부의 고통을 모르고 나와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 내 다섯 형제들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그 사실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이 간청은 부자가 음부에서 겪고 있는 고통의 크기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더욱 실감케 한다. 그러나 이 부탁 역시 아브라함은 거절한다. 왜냐하면 이미 음부의 고통에 대해 부자와 그 형제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와 증거하면 그들이 들을 것이라는 부자의 간절한 요청도 거절당하고 만다. 왜냐하면 교만한 자들에게는 죽은 자의 부활로도 그 마음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사건이나 예수의 부활 역시 바리새인들의 교만한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부자는 이름이 없다. 왜냐하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의 이름은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질 의미 없는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족보에 올라가고 더러는 화강암 비석위에 새겨지며 혹은 인간의 역사 속에 아무리 화려하게 남아있을지라도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는 순간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으로 되고 만다. 음부에는 이름이 없다.
부자는 기회를 상실했다. 그는 자신의 재물로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은혜를 더하셔서 그에게 그것을 날마다 기억할 수 있도록 그의 대문 앞에 거지 나사로를 배치해 두었다. 부자는 마땅히 나사로에게 선처를 베풀어야만 했다. 그의 고통을 한 인간으로써 함께 아파하고 위로하며 상처를 싸매어줄 수 있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는 선처를 베풀기에 충분한 재물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선한 양심을 우리 모두에게 이미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겨 두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청지기가 마땅히 행해야할 직분이었다.
부자는 착각했다. 그 소유가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했다. 뿐만 아니라 그 소유가 마치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그렇게 날마다 살았다. 그 속에서 그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해 무관심했고 냉정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음부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곳은 하나님으로부터 무관심과 냉정함을 받는 곳이다. 아니 하나님의 관심이 사라진 영역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바로 부자들이 가야할 종착역인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를 통해 문득 떠오르는 의문은 마치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것이 가난한 자를 돕는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오해되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렇다. 우리의 포도원 주인은 우리가 행한 바 일의 크기에 의해 우리를 천국에 들여놓지 않는다. 그것은 마태복음 20장의 데나리온의 비유에서 밝히 설명했듯이 오직 전적인 포도원 주인의 주권에서 나오는 은혜의 약속이요 선물이다. 천국의 조건은 오직 예수요 오직 믿음뿐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히려 구원의 조건에 다른 어떤 행위를 추가하려는 모든 노력들이 이단 사상으로 끝을 맺고 있음에 대해 우리는 각별히 주의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는 행위의 문제가 존재 근거를 상실하게 되는가? 기독교에서 윤리적 행위가 설 땅은 어디인가?
우리는 두 가지 방정식을 이해해야만 한다. 첫 번째 방정식은 우리를 미혹하는 가짜 구원의 방정식이다.
믿음(faith) + 행위(work) → 구원(salvation)
이와 같이 주장하고 말하는 모든 종교나 사상은 기독교와 무관한 이단 사상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도 반드시 크리스천의 선한 행위와 윤리적 삶에 대해 가르친다. 아니 그 어떤 종교보다도 윤리적 실천성이 강한 종교가 기독교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기 몸을 던져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며 사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행위는 어디서 나타나는가? 그것을 바른 방정식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믿음(faith) → 구원(salvation) + 행위(work)
만일 온전한 크리스천이 예수를 믿는 바른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렀다면 그는 반드시 선한 행위로 자신을 던져 이웃을 위해 살아가게 되어있다. 그렇지 못한 크리스천이 있다면 어쩌면 그의 믿음을 의심해야 한다. 그가 지닌 믿음은 예수를 주로 믿고 시인하며 고백하는 순전한 믿음이 아니라 회칠한 무덤처럼 외식하며 살아가던 바리새인의 가짜 믿음, 강도만난 이웃의 고통을 보면서도 외면하고 지나가는 레위인과 제사장의 자기를 위한 종교적 행위에 불과할지 모른다. 거지 나사로를 외면했던 이 부자가 음부에 들어가야 했던 것은 그의 믿음이 가짜였기 때문이다.
(3)
우리 시대의 거지 나사로는 누구인가? 내 대문 앞에 누워 있는 거지. 바로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고통 받는 이웃. 굶주림과 상처에 신음하는 북한에 있는 내 형제들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나사로를 도울 수 있는 충분한 기회와 시간을 주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를 도울만한 충분한 물질적 축복을 주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물질로 날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호화스런 음식으로 내 배를 채우면서도 그들을 돕는 데는 인색하다. 그 인색함은 믿지 않는 자들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믿는 크리스천들의 인색함이 더 완고하다. 그들은 그 무명의 부자처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스스로 믿고 행동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예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외면하고 비웃었던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이다.
가난한 사회를 회생시키기 위해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길은 교육의 길이다. 우리 스스로가 개화기에 그와 같은 혜택과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이다. 수많은 외국 선교사들의 헌신을 통해 연세대학, 이화대학, 숭실대학과 같은 교육 기관이 세워져서 지난 세기 얼마나 많은 인재들을 배양했는가? 아무 희망 없이 완고히 닫혀있던 조선 반도가 마침내 문이 열리고 새로운 지식과 문물을 받아들이고 교육의 열기가 일어나며, 그 저력을 바탕으로 경제성장의 기틀을 마련하여 결국 오늘의 풍요로운 물질을 누리게 된 것도 모두 그 은혜를 입은 결과들이다. 자신들이 가진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기 위해 머나먼 태평양을 건너 우리를 찾아왔던 그들처럼, 이제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부요를 나누어야 한다.
평양과기대를 통해 청년들을 가르침으로 북한의 형제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경제적 회생의 길을 주고자 하는데 그것을 위해 믿는 자들의 마음을 호소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다. 얼마 전 평양과기대 프로젝트를 설명하기 위해 한국으로 출장을 다니며 여러 교회를 순방했다.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데도 작고 가난한 교회들은 큰 감동을 받으며 어떻게든 돕고자 하는데, 오히려 마음이 부요한 대형 교회는 그렇지 않다. 서울의 한 대형 교회의 당회에서 수십 명의 장로들 앞에서 평양과기대 프로젝트를 설명하다가 채 말도 꺼내기 전에 큰 반발과 비웃음을 받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북한은 우리의 주적인데, 왜 그들을 도와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보수적 질문 앞에서 애써 답변을 하다가 마치 예수님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받아야했던 비웃음과 핍박이 떠올랐다.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에게는 이미 충분한 가르침이 있다. 율법과 선지자가 있을 뿐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위해 우리를 찾아와서 모든 것을 가르치신 예수의 복음이 있다.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이미 우리의 행할 바를 명확하게 가르치신 예수의 말씀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것을 통하여 귀 있는 자들은 천국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모두 옳지 않은 청지기이며 한편 부자이기도 하다. 우리가 나누어야 할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떡들이다. 그것을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이다. 천국이 임박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네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눅 16:9)”
그러나 더러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않는 무리들도 있으리라. 이 또한 주의 말씀이요, 부자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