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활 첫 한해 동안 거듭되는 실수를 통해 배운 교훈들이 이후의 삶에서 귀한 지침이 되어주고 있다.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유지되는 ‘아너 시스템(honor system)’이 지금은 편하지만 처음엔 생소했다. 대학원생을 동료 학자로 인정해주는 분위기도 내게는 어색했고, 자발적인 참여가 아니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막막한 자유도 낯설었다. 그러나,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려 애쓰면서, 좌충우돌 허점투성이의 말도 잘 못하는 이방인이 되어보고 나니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당신의 방법으로 사는 법을 조금씩 가르쳐주셨다. 생각할수록 참 감사한 일이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끊임없이 선택하고 계획하고 진행하고 책임져야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일상사에서도 학업에서도 그런 일들의 연속이다. 그 안에서 오는 유혹도 만만치 않다. 이메일로 시험 문제를 받거나 문제지를 받으면 각자의 연구실에서 답안을 작성하고, 약속 시간 안에 담당교수의 이메일 계정으로 화일을 보낸다. 우편함이나 교수연구실 문 밑으로 답안을 넣어도 된다. 내 발로 먼저 찾아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기말이 될 때까지 어느 누구도 무얼하고 있는지 간섭하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될 것 같은 좌절감도 맛보고, 그때마다 쉽게 가는 길이 자꾸만 눈에 보여 갈등도 한다. 시간관리에 소홀하다가 황급히 헤치우듯 써낸 페이퍼에는 본의 아닌 실수도 한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 한심해보여 낙망도 한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갈급한 마음에 눈물 뚝뚝 흘려가며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찬송을 부른다. 그렇게 긴 시간 배워온 영어인데 말하는 것도 글쓰는 것도 왜 이리 더디고 어색한가. 한국어가 세계공용어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하기까지 하다. 시간이 흘러 자기 연구분야에서 실력이 쌓이다보면 언어의 불편함에서 오는 의기소침한 마음이 극복 된다고 하지만, 당장은 큰 위로가 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꿈만 같다. 다른 나라 언어로 승부해야 하는 사회과학도들의 비애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낙망스런 현실에서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러지는 경험을 거듭거듭하며 나의 유학 첫해도 그렇게 훌쩍 지났다. 하지만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보화를 발견했던 것이다. 갑자기 이듬해에 우수한 학생이 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이 나와 함께하고 계시다는 사실때문에 마음이 평안해진 것이다. 먼 나라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유의 한계 상황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12:1)”셨을까? 주님 말고는 부빌 언덕이 없는 외로운 광야의 삶을 살아 보아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분량에 가까와 질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때에 하나님은 당신만을 전심으로 신뢰하는 법을 알게 하신다. 어디에서나 형통하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기준으로 사는 법도 배우게 하신다.


시험 답안이나 페이퍼를 쓸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성실성(authenticity)을 지키는 것이다. 학문적 정직성(academic honesty)에 대해 철저히 교육하지 않는 학문적 풍토에 길들여져 온 유학생들은 서구사회의 아카데미아에서 요구하는 기준을 종종 어기게 된다. 처음 주로 하는 실수는 자신의 문장으로 완전히 소화시키지도 못하고 다른 학자들의 아이디어를 여기저기 서툰 영어로 짜집기 하다가 끝나는 것이다. 그 다음엔, 읽을 때마다 인용할만한 아이디어들을 미리 꼼꼼하게 챙겨 놓지 않아서, 혹은 이 정도쯤이야 괜찮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에서 대충 마무리한 글들을 제출하게 된다. 이런 기억들은 상당히 오래 동안 부끄러움으로 남는다. 실제로, 글의 전거를 의심 받고 나서 마음의 상처가 남아 이후의 학업에 자신감을 잃는 이들도 보았다. 심한 경우, 적절한 인용 없이 표절한 답안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거나 학교를 옮기게 된 사례들도 있었다.


새로운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인간은 그 곳에서 통용되는 규칙을 습득한다. 내가 가진 생각과 주류의 생각이 달라보일 때 내가 바꿔야 한다는 것도 배운다. 그런데 그 규칙이란 것이 나라마다 사회마다 많이 다르다. 다른 나라 학생들과 이야기해보면 부정행위의 기준조차도 퍽 상이하다. 가는 곳마다 시대마다 달라지는 상대적인 가치관과 기준들을 묵상해보면 마치 움직이는 표적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의 삶은 혼란스럽게 moving target 을 따라다니며 살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시는가 성경 안에서 찾아보면 되기 때문이다.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롬13:1).” 사회의 법이 지적재산권을 존중하자고 한다면 철저히 따르는 것이 옳다.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빌2:14-15).” 당신의 자녀가 세상의 빛이 되길 원하시는 하나님은 그 어떤 원칙보다 뛰어난 기준을 우리에게 주셨다. 혼란 속에 있다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흔들림 없는 기준점(fixed point)을 말씀 안에서 찾아보자.


말씀은 우리 마음을 일분 일초도 쉼 없이 감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을 생각하라 하신다. 우리가 의식해야 할 것은 교수님들의 눈도, 교수님이 돌리는 소프트 웨어의 감시도, 경쟁하는 동료 학생들의 눈도 아니다. 내가 열심을 다하여 수고하고 있는 그 일이 하나님 앞에 모두 무익한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내면의 자아가 온갖 사회적 상과 벌들에 마음을 빼앗긴 채 노예처럼 길들여져 오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자. 불타는 시기 질투로 동생을 죽여 놓고 딴전을 피우고 있던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을 그분의 눈이 보고 계셨던 것 처럼, 여주인 사라의 학대로부터 도망하여 광야에 이르러 낙망하고 서있던 하갈을 그 눈이 보고 계셨던 것 처럼, 오늘 나의 모습을 그 눈이 보고 계신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 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 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139:7-10).” 다윗도 이렇게 하나님의 눈이 언제 어디서나 우릴 향하고 계시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그분의 눈은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 때문에 우리를 떠나지도 않으신다. 이토록 끈질기게 우리를 찾으시는 것은 하나뿐인 아들을 대신 내어 줄 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보디발의 아내로부터의 유혹을 물리친 요셉의 이야기에서 보다 실천적 지혜를 얻어보자.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 하리이까 (8-9절).” ‘꿈꾸는 사람’ 요셉이었지만, 현재의 삶 속에서 보여주는 그의 현명함과 순결함은 더욱 돋보인다. 사실 이런 결단은 굳이 하나님을 모른다 해도 도덕성이 투철하거나 자존심 강한 젊은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할 이도 있을 것이다. 자기의 의(self-righteousness)에 금이 가는 것이 정말 싫은 그 어떤 사람이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드러난 결과는 같아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근본 동기가 어디에 있었는지 놓치지 말고 따져보자. 누구보다 강한 책임감으로 자신의 본분을 다했던 성실한 젊은이 요셉. 그가 궁극적으로 지키고 싶었던 것은 자기 의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요셉의 시선은 그 어떤 공평한 저울보다 더 정확하신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다. “요셉이 시무하러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 (11절)” 보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고 사는 자였기에 거듭되는 시험에도 넘어지지 않았다. 은밀히 다가온 유혹 앞에서 요셉은 옷을 버려두고 헐레벌떡 달음질쳐 나갔다. 겉옷을 버려둔 채 가식없는 양심을 가지고 환난 날의 피할 바위이신 하나님께로 도망했기에 그는 더욱 안전하였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내 공간 안에서 글을 쓸 때 시험을 치를 때, 이 요셉의 모습을 기억하자. 우리가 속한 아카데미아에서 기존의 축적된 연구 결과들을 우리는 재량껏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양심을 눈감는 표절이나 부정직한 행위들은 분명 금지되어 있다. 학문을 하고 있다면, 학문적 정직성(academic honesty)을 순결한 혼인의 언약과 같이 여기자. 그리고 세상의 평가가 두려워 이 약속을 지키자는 것보다는 그 약속을 깨뜨리는 악한 행위로 “하나님께 득죄” 할 수 없다고 말했던 요셉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거룩하기 원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결하기 원해
  오직 주님 앞에서 순결하기 원해
  오직 주님 앞에서 아름답기 원해

  “내가 어떻게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범죄하리까?
  아무도 보는 없어도 결코 죄와 타협하지 않고
  자기를 지킨 젊은 요셉처럼 정결하게 살기 원해
  아무도 보는 없어도 거룩하게 살기 원해

  하나님의 이것이니 우리의 거룩함이라
  음란함 버리고 존귀함으로 주의 얼굴 보기 원해
  하나님의 바로 이것이니 뜻대로 살기 원해
  부정함 버리고 거룩함으로 주의 얼굴 보기 원해

 –강명식,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예수 믿는 학생으로서 지금 나의 삶은 어떠한가? 떨리는 마음으로 찬찬히 돌이켜 본다. 내 노력보다 큰 것을 탐하고 있었는지.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인 양 말하고 있었는지. 누구도 보아주지 않을 때 그 과정을 허수이 흘려 보내진 않았는지. 사회의 통제적 기준에 따라 급급한 노예의 삶을 살고 있진 않은지. 세상 윤리보다도 더욱 저급한 기준으로 살면서 작은 이익 앞에서 비굴해지지 말자. 눈에 보이는 여러 가지 상과 벌에 골몰할수록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희미해져 버릴 것이다. 빛의 자녀된 삶에도 이런 유혹의 그림자는 끊임없이 다가올 것이며, 이 땅을 떠나지 않는 한 그 사투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때마다 세상의 모든 윤리보다 탁월하신 주의 말씀에 매여 살아보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다 (시119:9).”


하루 분량의 삶만 고스란히 내놓고 말씀 앞에 비추어 보아도 입술의 고백과 실제 삶과의 간격은 너무나 크다. 다시 고쳐 살아볼 수도 없는 지나가버린 시간들이다. 그래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의 어려움을 내일의 영광으로 바꾸실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님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있음을 기억하자. 우리 대신 아들 예수를 죽이기까지 하신 분인데, 그가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그 일을 하며 우리 삶을 살아보자. 말씀의 준거가 우리의 삶 가운데로 통합되어 빛으로 드러나길 소망한다. 그 정직한 순간 순간이 모여 사회적 윤리와 도덕의 기준을 뛰어 넘고 하나님의 거룩으로 향해 나아가는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잠2:7)”는 하나님께서 결과는 책임지신다. 우리가 할 일은 매 분 초마다 우리의 흔들리는 마음과 생각을 요동치 않는 십자가 위에 못 박고 우리 삶을 예배로 드리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