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3년 9월호

글을 시작하며


해마다 이맘 때 즈음이면 많은 유학 새내기들이 저마다 가슴에 나름대로의 꿈을 품고 각 나라로 흩어져 간다. 대부분 각자의 전공을 좀 더 갈고 닦아서 각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이리라. 게다가 크리스천 학도들에게 있어서 유학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유학을 통해 세상의 견문을 넓히고 영적으로 더욱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도 10여 년 전에 미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던 경험이 있다. 유학생활 동안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학문과 인생에 대해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다. 필자의 부족한 경험을 통해 유학 새내기들이 혹시라도 필자와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좀 더 나은 길을 걸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시작한다.


기독교인의 영적인 생활


당시 속칭 열성적인 (?) 크리스천으로서 필자에게는 어떻게 하면 유학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있었다. 이것은 다분히 교회생활과 전도를 염두에 둔 영적인 생활과 관계된 것이었다. 유학을 떠날 때 가졌던 신앙과 학문의 조화라는 화두가 내면에서 정리되기 전에 다시 한국에서 익숙해져 있었던 신앙생활의 습관과 함께 유학생활에 들어서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러한 생활이 어쩌면 필자에게 필연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영성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각자의 세계관이 허락하는 범주 내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며, 설령 세계관이 제대로 정립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세계관이 제대로 소화되어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또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특히 이국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영적인 생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개신 교회 내에서 좀 열성 있는 그리스도인에게‘’’‘영적이다’ 는 말은 대부분 세상일에 신경을 덜 쓰고 교회 생활에 열심을 내며 전도하고 기도하고 명상하는 어떤 것이라고 이해되곤 한다. 세상을 이해할 때 다분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품게 만들고 마치 벗어버려야 할 어떤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기독교 신앙의 근거인 성경은 우리가 생활하고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려져 있는 세상에 대해 결코 부정적이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하시고 그 사랑하신 정도가 자신의 외아들을 주실 만큼이라고 한다 (요 3:16).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그의 공생애 전 삼십 여 년을 목수의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사람들의 삶에 필요한 일을 하셨던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우리의 많은 신앙의 선배들도 세상에서 필요한 일을 열심히 성실히 했었던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괴리가 생겨난 것일까? 그것은 다분히 성경 적이지 않은 이교 적인 사고가 우리의 사고에 침투해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초대 교회 시절에 많은 문제를 일으켰던 영지주의를 비롯한 희랍철학 등의 이분법적인 세계관이 바로 그것이다. 육체적인 일들을 세상 적인 것이라고 하고 정신적인 것들을 영적인 것이라고 하는 사고에서 생겨난 이교 적인 것들이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직업에도 선호가 분명하게 생겨났다. 학자, 성직자, 관리자 등 육체적인 일과 거리가 먼 직업을 더 영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직업들에는 보다 많은 부와 명예가 따르도록 세상의 구조가 짜여져 버린 데 있다. 따라서 이분법적인 영성이해는 성서적이지도 못하고 오히려 교묘하게 인간의 욕심을 충족시켜 주는 이교 적인 것이며 우리가 만들어 낸 무서운 우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이 부정하는 세상은 바로 죄 그 자체인 우리의 교만과 욕심에 기반을 두고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 등에서 생겨나는 산물들이다. 성경에서는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그 역할은 오직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의 기쁨과 천국의 소망으로만 이루어 낼 수 있는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으로 하나님이 지으시고 좋았더라고 하셨던 세상이 얼마나 중요하면 이러한 역할을 우리에게 주셨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흔히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영적이라고 하면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며 구제를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성경을 열심히 읽고 기도를 열심히 하며 전도에 총력을 기울이는 행위 그 자체가 영적이거나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경고하시는 대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를 하고 구제를 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아마도 그것이 죄가 되거나 교만으로 연결되기 때문은 아닐까? 참으로 영적인 것은 성경을 읽고 그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길에 대한 뜻을 분명히 하여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뜻대로 변해가도록 하는 과정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겸손을 배우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해 가며 날마다 회개의 걸음걸이를 연습하고 다시 한 번 순종을 각오해야만 한다. 흔히 우리가 훈련되어 온 틀에 박힌 전도의 행위를 통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신의 백성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자신을 감동시키시고 그러한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여서 세상 속에서 이기적인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찾아가는 적극적인 전도를 통해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실패도 성공도 없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극한 정성으로 다루시며 당신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있을 뿐이다.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해 내려는 노력을 함에 앞서서 삶의 여정을 통한 하나님의 거룩을 경험해 보고 그 속에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손길을 느끼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 치우치지 않는 걸음걸이가 중요하다.


학문, 영적인 예배


그렇다면 유학생에게 있어서 어떤 것이 영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유학생이라고 하여 일반 그리스도인보다 특별히 중요한 다른 삶이 있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유학생들에게는 좀 다른 무엇이 있다. 그것은 바로 유학을 통해 각자의 분야에서 실력 있는 전문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자칫 위에서 지적한 치우친 세계관에 의해 성과 속에 대한 그릇된 구분으로 인해 섣불리 열정적인 종교생활에 휩싸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있어서 종교에 열심을 내게 될 때 그 종교는 한 사람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 종교가 바르고 치우치지 않는 가르침을 제공하면 좋으나 많은 종교가 의식에 빠지고 종교행위에 그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성경을 통해 한 가지 분명해지는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예배라는 영역일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배는 교회당에서 성직자에 의한 일정한 의식을 행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심지어는 더 이상은 피 흘리는 제사가 필요 없게 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인 현재에도 제사로서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그러한 현상은 바로 목사를 성직자로 그리고 신약의 레위 족속으로 이해하고 있는 데서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목사를 레위 지파로 이해하는 것은 다분히 우리의 예배가 구약 적인 의미의 특정한 제사장을 중심으로만 드려지는 중요한 의식임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초대 교회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던 속칭 평신도 (성경 적인 용어가 아님)의 세례문제나 설교문제가 현대에 와서는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현대 교회의 예배가 의식 중심의 중세교회의 전통을 벗는 표시로서 설교중심으로 변모하면서 전문적인 설교가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형식적인 예배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구원받은 백성에게 있어서 진정한 예배란 무엇일까? 로마서 12장 초반부와 성경전체가 말하는 참 예배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일상의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예배가 종교적인 의식의 집행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상식적인 일일 수밖에 없다. 즉 우리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일들이 우리가 성심으로 드려야 할 예배가 아니라면 우리 주류 기독교는 어느 새 한쪽으로 치우친 이단종파의 하나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우리 유학생들이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해외로 나가 공부하는 목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유학을 통해서만 학문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님을 명시해 둔다). 요즘 우리가 하는 학문의 영역과 그 내용을 보면 우리 인간의 삶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래된 학문부터 신흥학문까지 모두 다 인간의 정신부터 실제적인 삶의 대부분을 다루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학문은 단지 세상에서 일정한 삶의 수준을 유지하고 흔히 말하는 거룩한 일인 전도의 도구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그리스도인이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 내야 할 바로 그 현장이다. 죄에 빠져있는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당신이 친히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모델이 구약 적인 의미에서 최상의 예배였다면, 이제 예수께서 드리신 제사와 예배의 본을 따라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고난과 눈물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가 하고 있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학문을 함에 있어서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기준과 방법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학문은 일정한 가치관과 그 가치관에 근거한 가정과 그 가정을 입증하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문의 시작은 기존에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입각한 질문에 기반을 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 일반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심각하게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삶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통해 우리의 사고를 정리하고 우리 행위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형성된 세계관으로 하는 일련의 학문행위를 통해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세상 속에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모든 영역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자 정체성이 아닐까?


균형 있는 그리스도인 전문가 되기


필자는 아직도 스스로 질문해 볼 때 균형 있는 그리스도인 전문가가 된 것 같지 않아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난감함을 느끼곤 한다. 돌이켜 보건대 이렇게 된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늦게나마 깨닫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필자는 후배들에게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간의 무력함과 하나님의 철저한 인도하심과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으니 많은 것을 얻었음이 분명하다. 필자의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인 전문가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생각해 보고 싶다.


첫째는 개인 성경공부 이다. 그리스도인은 성경공부를 통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 인간의 현주소와 책임을 분명히 알아낼 수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알 수도 있으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의 성공과 실패의 역사를 아우르면서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에게서 벗어난 백성들이 유일하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분명히 보여주고, 구원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각자의 영역에서 치우치지 않는 학문의 연구를 통해 각 분야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밝혀내려면 심도 깊은 개인 성경공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구원을 얻은 존재들임을 분명하게 증명해 주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생각과 행동의 준거가 되는 유일한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혹 우리는 깊이 있는 성경공부를 하는 것에 대해 무언가 모를 벽을 느끼곤 한다. 예를 들어 성경공부를 제사 드리는 행위로 이해하여 특별히 교육받은 몇몇이 해야한다는 이해는 아주 무서운 생각이다. 즉 성직자들만이 해야할 것이라고 치부하거나 조금 양보해서 그들이 공부한 것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물론 성경을 많이 공부한 사람들에게 성경을 배우는 것이 전혀 잘못이 아니라고 인정하지만, 어쩐지 우리에게는 성경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의 거의 대부분이 성직자 (목사, 신부 등)들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주위에 성경공부를 꽤나 하는 성도들이 있으면 목회자가 되거나 목회자가 되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이는 성경공부 자체를 신성시하며 일반 성도들에게서 멀어지게 하려는 교묘한 사탄의 전략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이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만인제사장의 정신과도 많이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균형 잡힌 시간 관리이다. 필자는 일반적으로 비슷한 분야의 다른 사람들 보다 학위를 좀 늦게 마친 편이다. 물론 논문을 빨리 써서 졸업하는 것이 균형 있는 전문가가 되었다는 증명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여러 면을 고려해 볼 때, 필자에게 있어서 늦은 졸업은 전문가가 되기 위해 써야할 시간을 제대로 할애하지 못했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 이렇데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들라면 시간관리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즉 시간 사용의 우선순위 설정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유학을 떠날 때 먹었던 마음과는 달리 유학초기부터 한국에서의 습관대로 교회생활에 대단한 열심을 내게 되었다. 한 문제가 생기면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고 그 문제에 매달려서 어떻게든 해결하려는 성격과 맞물리면서, 그리고 열심 있는 젊은 형제를 신앙이 좋다고 칭찬하는 교회의 분위기에 휩싸이면서 균형을 잃었던 것 같다. 코스웍을 마치고 나서 조금은 자유로웠던 상당한 시간을 전공공부에 투자하기보다는 청년회를 포함한 교회봉사와 성경공부, 당시 생활비의 일부를 지원 받았던 한글학교와 아르바이트에 썼다. 그리고 논문을 시작할 즈음에 시작된 이성교제는 또 한 차례 필자의 연약함을 절실히 확인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셔서 조금 늦게 졸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졸업 후에 직장을 구해야 하는 실제적인 문제에 부딪치면서 균형 잡힌 전문가가 되지 못한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경험을 통해 한 가지 생각되는 것은 바로 시간의 우선순위를 성경 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필자처럼 일명 종교적인 영역에 지나치게 시간을 많이 들이는 것을 조절하여서 전공공부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면 한다. 그러나 반대로 지나치게 전공 공부에만 시간을 투자하게 되면 방향성을 상실하게 되어 그리스도인으로서 건전한 양심이 무뎌져서 균형 잡힌 질문을 잃게되고 하나님의 원리와 반대되는 편에서 열심히 일을 하게 될 가능성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이론만을 연구하거나 실험실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은 사회의 실체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서 시간을 투자하면 좋을 것 같다. 시간 나는 대로 산과 들과 강과 바다에 나가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또 가족이나 생각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미국 일주 여행을 실행해 보는 것도 유학 생활 동안 누릴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


실제적으로 시간을 관리하는 연습을 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즉 한달, 육 개월, 일년, 이년, 오 년, 십 년, 십 오 년, 이십 년 이상의 계획을 기도하면서 짜고 그에 맞는 시간표를 작성해 보았으면 한다. 혼자서도 좋고 신앙생활을 함께 하는 친구들과도 좋을 것 같다. 실제로 시간표를 짜다보면 시간이 많이 부족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 번 짠 시간표에 연연해하지 말고 수시로 점검하여 현실에 맞게 시간표를 수정해 가도 좋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하루 시간을 계획할 때 15분 단위나 30분 단위로 시간을 끊어서 짧은 시간에 집중하는 훈련을 하면 더 없이 좋을 것이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도와 함께 내일 시간표를 짜고 잠자리에 들면 다음 날 허둥대지 않고 차분히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는 그의 좌우명의 하나로 일일일생 (一日一生) 즉 하루를 일평생으로 여길 만큼 긴장감 있게 하루를 대했다고 한다.


셋째로 좋은 이웃 관계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러나 그 신앙을 키워가고 가꾸어 가는 것은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어갈 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학문도 신앙 실천의 영역으로 생각할 때 개인적인 영역이라고만 하기에는 어색한 면이 많다. 자고로 좋은 생각은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생겨난다. 학문도 좋은 이웃이 많이 있을 때 질문이 건전해 지고 문제를 분석하는 면이나 해결하는 면에서 균형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만은 아니다. 따라서 좋은 이웃관계를 그리스도인 학자 그룹 안에서 만들어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물론 그리스도인인 아닌 학자나 전문가들과의 관계를 무시하자는 말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논의와 토론의 장을 넓혀서 생각해야한다. 그러한 토론의 장으로 인해 학문과 전공의 네트워크 (이웃관계)가 형성되고 장차 그 관계가 발전하여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전공분야에서 관심 있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면서 계속적인 토론을 하고 방향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주위의 몇몇 형제 자매들과 (결혼한 가정을 포함하여)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서 참 교회의 모습을 체험해 보길 권한다. 유학생활은 많이 외롭고 지치고 힘든 과정이기에 서로 돕고 위로하고 권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렇게 서로 보듬고 끌어주다 보면 자연스럽게 진한 사랑이 생겨나게 된다. 필자의 작은 경험이긴 하지만 필라델피아에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작은 밥상공동체는 필자가 어려운 과정을 이겨나가는 데에 큰 힘이 되었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식구들에게도?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학교에 있을 때 학문적인 친구를 많이 사귀지 못한 것이다.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 (교회친구, 학교친구, 주위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좋은 이웃들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넷째로 건강한 경제생활이다. 필자의 유학 생활 중에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것은 경제생활을 혼자 해결하는 것이었다. 처음 일년 여의 학비를 지원 받는 조건으로 택한 유학생활은 생활비와 학비를 해결하는 데에 많은 비중을 두게 되었다. 전공이 사회과학 분야이고 사양학문이라서 공부하는 중에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학교 아르바이트와 기타 조교 및 강사 생활 등을 통해 경제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공부에 신경을 쓰기가 힘들 때도 있었다. 모두 시간관리가 잘못 되었던 때문이지만?학교에서 강사를 하기 전까지 약 4년 동안은 아주 힘든 기간이었다. 유학 초기부터 경제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무조건 선택한 유학으로 인해 빚어진 어려움이었다. 어려웠지만 경제생활에 있어서는 그래도 빚을 지지 않고 그런 대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까마귀를 통해 엘리야를 먹이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한 사람에게도 임했기 때문인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어려운 경제생활을 무난히 넘긴 이유를 필자 편에서 한 가지 찾자면 바로 가능한 생활비용을 줄이고 예산을 초과해서 생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카드 빚을 쓰지 않고 예산의 범위에서 생활규모를 정하는 것은 백 번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유학생활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모든 의욕을 상실하게 결국 유학을 포기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될 수 있기 때문에 백 번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혹시 석사를 마치고 박사를 지원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경우, 이러한 경제적인 면을 잘 고려하여 학교를 선택하길 바라고 싶다.


글을 맺으며


지금까지 필자의 부족한 유학생활을 통해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 전문가가 되기 위한 몇 가지 중요한 면을 살펴보았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중심으로 세계관을 정립하여 건강한 생활을 누려야 한다. 학문의 영역에서 참 예배를 드리기로 결심한 그리스도인 유학생들에게는 무엇보다 균형 잡힌 세계관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심도 깊게 연구해야 하며 성경을 통해 가치관이 정립되고 다른 학문적인 질문들이 성경 적인 세계관으로 소화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되려면 각자의 학문적인 영역도 전문적인 수준에 도달해야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고, 성경에 정통하게 될 때 그에 대한 균형 잡힌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 분야이거나 자연과학 분야이거나 사회과학 분야이거나 공학 분야이거나 예술 분야이거나 기타 실용학문이거나 할 것 없이 성경에 기반을 둘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질문과 대답의 준거를 얻게 될 것이다. 또한 만인제사장의 정신을 학문 세계에 구현하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각 전공분야에 실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될 수 있길 희망해 본다. 실제적으로 균형 잡힌 시간관리와 경제생활로 장차 직업의 현장에 들어 갈 때를 대비한 훈련은 물론, 유학생활 자체를 잘 마무리 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나라는 늘 하나님의 은혜를 갈급 해하는 부족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확인하곤 한다. 힘든 유학생활을 통해 그 하나님의 은혜를 맘껏 경험하여서 평생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학문의 세계와 직업의 현장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담당해 가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