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1년 10월호


들어가는 말


9월 11일 아침 CNN News를 통하여 뉴욕 맨하탄 세계무역센터(WTC)의 쌍둥이 빌딩이 항공기를 이용한 테러의 공격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내가 지금 착각의 환영을 보고 있구나 생각하였다. 일상처럼 사랑하는 가족들과 아침 인사를 나누고 일터로 향하는 사람이 테러 공격으로 곧 죽게 될 줄을 누군들 알 수 있었을까? 이미 무너진 빌딩 더미 밑에 살아있을 지도 모른다는 실날 같은 희망을 걸고, 무너진 잿더미 주위를 서성거리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애타게 찾던 수많은 사람들의 애절한 상황은 차마 눈물 없이 볼 수가 없었다. 미국이 자랑하는 경제적 힘의 상징같은 세계무역센터와 군사력의 힘을 자랑하는 미 국방성 본부 (Pentagon)에 대한 극적인 테러 공격에, 미국의 조직적이던 정치와 경제가 잠시 멈춘 듯이 보였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이 민족, 종교, 국가와 정치의 이해 관계로 바쁘게 움직인 몇주 간이었다.


이미 지난 91년 걸프전쟁에서 미국과 세계의 부산한 움직임을 이미 본터이지만, 특히 금번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조직적인 테러와 미국의 대응을 보는 나의 마음은 심히 착잡하다. 테러 공격 이후에 제일 먼저 모든 미국민(정치인이나 종교인 할 것 없이)들이 보인 것은,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보호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기도의 모습이었다. 모든 공영방송에서조차 “God Bless America”를 수 없이 보여주며, 미국과 세계를 위하여 함께 기도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미 교회마다 예배와 기도회의 참석 인원이 테러 이전의 참석 인원의 3-5배로 증가하였다고 보도되고 있다.


많은 아랍계 모슬렘인 및 아랍계 유학생들이 본 테러에 가담되었다고 보도되면서, 유색 이민자를 보는 미국의 눈이 달라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물론 지난 2차 세계대전 당시 진주만 공격시에 일본계 미국 이민자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감금하였던 과거의 실수와 아픔을 되살리며, 선량한 아랍계 이민자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수 많은 목소리와 캠페인이 있긴 하다. 하지만 최근 은연 중에 아랍계를 향한 적대적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많은 인종차별사건이 보도되고 있어서 걱정이다.


나는 미국의 이민자로서 내 자녀와 후손이 길이 살아야 할 이 미국땅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축복하심이 넘치기를 누구보다도 간구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만일 금번 테러사건이 동양계 테러조직에 의해 저질러졌다면, 동양계 이민자나 또는 유학생도 지금 아랍계 이민자들이 겪고 있는 비슷한 갈등을 겪게 될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이것이 바로 이민자의 고뇌인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동양계 유학생을 보는 눈들이 틀림 없이 곱지 않았을 것이며, 실제적인 불이익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학업 중단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동양인이 백인 중심의 이질적인 문화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의 가정은, 바로 “세계 속의 한국인”을 정의할 수 있는 좋은 출발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지금 유학생이 반수 이상인 한인교회를 섬기고 있기에, 섬기는 교회는 아직 자체 예배당 건물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형제자매된 미국의 형제자매들이 세운 예배당을 함께 사용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다. 조심스럽긴 하지만, 한국 음식 냄새가 좋다고 넉살을 떠는 미국 형제자매들의 깊고 넓은 사랑의 마음은 우리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니, 감사하기가 그지 없다. 미국인과 한국인이 함께 어울려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주 안에서 형제자매의 참 사랑을 나누는 모습은, 본 컬럼에서 다루고자 하는 “한국 크리스천 이민자의 정체성 (Identity)”을 잘 정의해 줄 수있는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이 보는 한국인


세계는 좁아졌다. 어떤 민족이든 혼자서만 고립되어 살 수 없게 되었다. “세계 속에서의 한국인”은 누구인가의 질문은 세계 속에서의 한국인의 정체성을 정의해 준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최근에 미국테러의 주범이요, 국제적인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조직을 조종하고 있다고 보는 ‘우사마 빈 라든'(Usama Bin Laden)을 숨겨주고 테러를 지원함으로써,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중동의 “아프칸”이라는 나라는 세계 속에서 한 민족과 국가의 실체와 정체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실례를 제공하고 있다.


아프칸 국민은 그들의 이슬람 형제국에서 조차 인준 받지 못하고 있는 ‘탈리반'(Taliban)이라는 정권의 지도하에 산악을 누비며 구소련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낸, 어찌 보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민족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저들은 미국의 전쟁의 선포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데, 실은 이제 더 파괴될 것도 남아 있지 않는 국가의 형편이니, 미사일 공격을 할테면 하라고 도리어 엄포를 놓고 있다. 또 미국과 다국적군이 지상군을 파견한다고 해도 소련을 물리친 게릴라 산악전에 그들은 상당히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아프칸을 침공하였던 구소련군 사령관은 최근 CNN과의 인터뷰에서, 특수 훈련과 인내로 특별히 훈련된 군인이 아니면 결코 산악 게릴라전에 달인이 된 아프칸을 이겨낼 수 없을 것이라고 조언하였다. 실제로 월남전을 거울 삼는 미국은, 어려운 산악 게릴라전에 빠져 들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든, 아마도 아프칸인이 보는 아프칸인의 정체성은 이슬람 종교로 무장된 “전쟁과 투쟁의 민족”이 될 수도 있겠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한국인이 보는 한국인의 특징적인 정체성은 한반도에서 오천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 명맥을 유지한 “은근과 끈기의 민족”이라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실제 현대의 한국인에게서 “은근과 끈기”라는 덕목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데 있다. 도리어 “신속과 성급함”이 모든 한국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적인 모습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 많은 나라와 민족이 명멸하는 세계사 속에서 토끼 모양의 한반도에 한국민족이 그렇게 오래도록 보존되며,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요, 역사 속에서의 “은근과 끈기있게 살아남은 민족”이라고 자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람의 개인 성향과 현재의 문화가 어떠하든, 또 반도의 지정학적인 특성이 어떻든 간에, “은근과 끈기로 살아남음”의 역사성은 지속되어 왔고, 또 유구히 지속될 것이다. 그래서 한국사람은 유난히 이 역사성 속에서의 “은근과 끈기”를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분명히 이것은 자랑이요 또 자랑할 만한 정체성이다.


세계가 보는 한국인


한편으론 아프칸인이 아프칸을 보는 정체성이 아닌, 세계가 보는 아프칸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끊임 없는 내전, 종교 전쟁, 구 소련과의 지루한 전쟁, 테러로 인한 세계와의 전쟁 등으로, 오직 종교의 극단주의로 달려가는 호전적인 민족으로 비춰지고 있다. 아프칸 부족간의 내전으로 전쟁의 포화가 끊이지 않고, 전쟁 난민이 접경국에 몰려들며, 끝 없는 피난민 텐트촌에서 서방 연합국이 보내주는 식량 원조로 생활을 연명하는 비참한 민족이라고 비춰지고 있다. 천막 속에서 땟국이 흐르는 모습으로 빵 덩어리를 씹고 있는 천진스런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면,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어찌 보면,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고 살아온 우리 세대들이 이미 잊어버렸을 법한 1950년 한국전쟁의 모습과 비슷한 모습이 아니겠는가? 미국에서 방영되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한 “Mash”를 보면서, 한국전쟁에서 보여주는 한국인의 참혹한 모습에 때론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하는 느낌은 나만이 갖는 아픈 느낌일까? 지금도 우리의 동족인 북한은 세계인의 눈에 가장 폐쇄적인 독재국가로 지목되고 있다. 가끔 미국친구들이 내가 북한에서 왔는지 또는 남한에서 왔는지를 질문 하면, 당혹스럽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하다. 저들이 보기에는 내가 그저 한반도에서 온 한국계 이민자일 따름이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나이 많으신 미국인들을 만나면, 대게 언제 한국이 통일될 것이냐고 묻는다.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동족이 분단된 국가라는 불명예를 지워버릴 수 없음에 때론 부끄럽고 또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세계의 사람들이 보는 한국사람의 이미지는 열심히 일하는 부지런한 민족, 전쟁의 참화를 딛고 경제부강의 기적을 이룬 민족, 그러나 성질이 급한 민족, 분리를 좋아하는 민족, 그리고 준법정신이 다소 결여된 민족 등 복합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불행하게도, 미국에서 한국계 이민자를 보는 눈도 위에 말한 한국사람의 이미지와 별 차이 없이 평가되고 있다. 세계가 한마당으로 좁혀지는 이 시대에 이러한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는 우리 모두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세계 도처에서 새로운 환경에 “은근과 끈기”로 가장 잘 적응하는 데에는 한국사람이 “최우수”라고 한다. 각국 이민자들의 통계를 보면, 오랜 이민 역사를 갖은 중국이 제일 많은 이민자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러 많은 나라에 이민자가 분포되어 살고 있는 것은 한국사람이 세계에서 단연 수위라고 한다. 구 한말의 하와이 사탕수수밭 이민에서부터 시작된 짧은 이민역사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의 가장 추운 곳에서부터 아프리카와 남미의 가장 더운 곳에까지, 한국은 이민자가 살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도 한국사람의 신체구조는 무려 화씨 170도, 곧 화씨 영하 50도에서 영상 120까지 달하는 온도 변화에 적응하며 살 수 있는, 세계 속에서 유일한 민족인 듯 싶다. 극심한 자연 환경에 적응하며, 돈을 버는 것은 한국인이 단연 세계 최고일 것이다. 열사의 아랍국가들의 사막을 누비며 건축 사업을 성공시킨 것도 한국인이요, 또 빙해인 북해의 해저 유전을 뚫고 있는 것도 의지의 한국인이다.


문제는 돈 버는 데에는 으뜸이지만, 이민자로서 그곳의 “문화”에 적응하며 사는 것에는 낙제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사는” 문화에 훈련이 안된 탓이다. “더불어 삶”은 세계 속에서의 한국인이 극복해야 할 숙제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들에 대한 각 대학의 평가는 퍽 고무적이다. 거의 모든 교수들이 한국 유학생들을 성실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책임감이 있으며, 정직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질의 문화 속에 살면서 자신의 문화를 다시 바르게 바라보며, 평가할 수 있는 유학생들은 세계 속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장 잘 정의하고, 세워야 할 주인공인 셈이다.


그리스도안에서의 한국인


한국인이 보는 한국인과 세계가 보는 한국인의 정체성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국인은 누구인가의 정체성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고자 한다.


한국민족의 역사를 보면,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에 남을 만한 역사의 주역을 감당한 기록이 별로 많지 않다. 구라파에서 한창 종교 개혁이 진행되고 근세 문명이 싹트고 있을 무렵에도, 조선 반도는 이조 왕조의 개국 이후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기에 바쁜 즈음이었다. 불행하게도, 한국사람은 거의 이조 왕조의 말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의 들을 수도 또 들어 본적도 없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으셨겠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후에 무려 1900년 가까이나 구원의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던 우리 조상들에 대한 아쉬움과 연민을 지을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미국을 통하여 조선 말기에 한국에 전파되고, 이제 100년이 넘어 흘렀다. 100년 전에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아펜젤러”가 한국에 처음 도착한 후에 기록한 기도문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 “주님, 지금은 조선땅 어디를 보아도 어둠과 절망 뿐이오나, 언젠가 이들이 저희들처럼 당신을 구주로 고백하는 날이 올 것임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나이다.” 조선의 복음화를 위하여 목숨을 던졌던 수 많은 선교사들이 절망 속에서도 믿음으로 드렸던 기도는 이제 분명히 응답이 된 셈이다.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이후에 한국은 변하였다. 일제의 식민지와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이 한국민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사상 유례 없이 적극적이도록 자극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심을 우매한 우리로서는 측량할 길이 없다. 어떠한 경로를 거쳤든 간에, 남한 인구의 30-40%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한국의 근대사에서 꼽을 수 있는 가장 큰 변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복음의 전파와 이에 따른 의식의 변화는 한민족이 세계 역사 속에 주인공으로 떠오르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근세 한국은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복음의 축복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 부강하여졌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계 온 열방에 전파하는 복음 전파의 주역으로 등장하였다고 본다. 한국이 당장 해결해야 할 수 많은 경제, 정치, 종교적인 문제가 국내외적으로 산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크리스천은 세계 복음 전파의 소명을 맡은 자랑스런 민족이 되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언제 중국이 한국인에게 배워보겠다고 찾아온 적이 있었으며, 원방에서 한국사람의 경제 원리와 신앙의 열심을 배워보겠다고 열방들이 찾아온 적이 있었는가?


세계 각국에서 이민자와 유학생들이 미국에 와 있지만,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민족은 오직 한국사람들 뿐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수 많은 유학생들이 아시아, 중동, 남미 및 유럽에서 미국에 와 있지만, 모이면 성경 공부하고 예배드리면서 유학 생활을 시작하고 마치는 유학생들은 오직 한국 유학생들 뿐 아닌가?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 민족이 바로 하나님 역사에 주인이 되는 것처럼, 나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믿음 안에서 살기로 오늘도 애쓰고 힘쓰는 크리스천 한국 유학생들이 세계 속의 역사의 주인이 되라고 기도하고 있다. 우리가 이름도 잘 기억할 수 없는 수 많은 국가에 한국의 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나가있다. 특별히 복음의 불모지인 모슬렘 국가 및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한국 선교사들의 복음사역의 열매는 세계 선교사에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풍성하다. 보라. 5000년의 한국민족의 역사 중에서 이제 세계사에 남을 만한 하나님이 쓰시는 역사의 주역으로 한국인이 떠오르지 않고 있는가?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 때문이 아니겠는가?


19세기 중엽에 미국에서 일어난 복음주의 운동의 영향과 결과로 19세기 말에 수 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선교사로 헌신하며, 세계 복음화를 위하여 아시아로, 아프리카로, 중동으로 나갔던 것이다. 이때 바로 한국에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되었으며, 그들의 눈물 어린 기도와 헌신이 지금 한국 땅과 세계에서 복음의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 한국의 젊은이들을 세계 복음화의 도구로 쓰시기 위하여 부르고 계시며, 이 사명을 잘 감당할 때에 진정한 예수 안에서의 한국 크리스천의 정체성이 바로 확립될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한국사람을 세계의 가장 많은 나라에 이민자와 유학생으로 흩어 놓으셨으며,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예배케 하셨다고 본다. 이 사명을 바로 보고 감당할 때에,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세계 속에서의 한국인의 역할과 정체성을 바로 확립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가졌던 것과 같은 민족 정체성의 확립이요, 민족 사랑의 참 길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미국에 유학온 유능한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자기의 인생만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주관하시고 운행하시는 역사의 바퀴 속에서 한국민족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생각할 수 있기를 바라며,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 크리스천 이민자의 정체성


이민 생활을 시작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 나름대로 이민자로서 살아야하는 동기와 목적이 있다. 요사이는 한국의 좁은 취업문과 자녀 교육 때문에 미국에 이민자로 남기로 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개인의 이민 동기와 목적은 서로 다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민자로서의 올바른 정체성을 갖지 못하면, 곧 이민 생활은 실패하게 되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국제적인 미아로 남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특별히 한국 이민자들의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의 결여는 이미 세계 도처에서 수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이미 남미의 여러 국가에서 수 많은 한국이민자들이 열심히 일한 탓에 사업과 교육에서는 성공적이지만, 돈을 벌면 돈 가지고 떠나는 철새 이민자라는 불명예스런 평가를 면치 못하고 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이들 거의 모두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을 섬기는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득이한 상황이 분명히 있을 것이지만, 애당초 이민의 목적이나 이민자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탓만은 분명하다. 결국 이민하여 사는 땅이 하나님 아버지의 땅이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에 따라 별처럼 많은 후손에게 물려줄 약속된 땅이라는 아브라함의 이민 철학과 크리스천 이민자의 정체성이 결여된 탓이다.


미국에서 사는 이민자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대학에서 평생을 봉직하면서 가르친 한국계 미국대학 교수도 이러한 이민자의 정체성의 결여로 고민하며 방황하는 것을 보았다. 이리하여 미국에 살면서도 미국이 어떻게 움직이고 변화되고 있으며 미국의 이민자로서 미국에 무엇을 기여할 것인가라는 기본적인 이민 양심의 소리에는 별 관심이 없다. USA Today 와 NY Times 같은 미국 주요 신문은 별로 읽지 않으면서, 한국에서 발행되어 미국에 늦게 배달되는 한국신문들은 거의 빼놓지 않고 읽는다. 이래서 한국 대통령이 지금 누구와 정치적인 타협을 하고, 또 차기 개각은 언제쯤일 거라는 한국소식에는 정통하지만, 정작 본인과 그의 자손이 살게 될 미국 땅에서 일어나는 일은 잘 모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계 이민자의 가게에 왜 번번히 강도들이 출현하여 총질을 해 대는지, 이 땅의 주인이 될 이민 2세들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또 관심도 없다. 이러하니 LA 폭동 사태 같은 경우에도 바로 대처하지 못하였고, 그래서 그 상처와 후유증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런 점에서는 한국 유학생들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이민자의 정체성의 결여는 평신도만의 문제가 아니요, 한인 이민교회를 담당하고 있는 많은 한인 목회자에게도 공통된 현상이다. 한국에서 발행되는 크리스천 신문과 Webzine에 설교를 보내고 컬럼을 쓰는데는 열심이지만, 정작 자기들 양떼인 이민자들의 아픔은 잘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며, 또 이민자들이 사는 나라에서 어떻게 더불어 살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것인가에 대한 이민 신학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아쉬움이 있다.


아브라함은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12:1-2)는 말씀을 좇아서 이민을 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 나타난 이민사,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이민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약속의 말씀이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이니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후사로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이면 어느 곳이든 당당히 누리고 살 권리가 있지 않은가? 다만, 내가 사는 땅이 어느 곳이든 그곳을 복음의 영광이 가득 차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보내심을 입은 자요 또 흩어진 자들이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이니, 우리가 보내심을 받은 그 땅(이민자가 사는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천 이민자의 정체성이라고 나는 본다. 세계 복음화의 교두보에 한민족을 세우시고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민을 재촉하셨고, 또 우리를 세계 각국에 흩으셨다면, 또한 이것이 바로 한국 크리스천 이민자의 정체성이 될 것이다. 크리스천 이민자의 정체성은 이런 점에서 선교사의 정체성과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으며, 또 혼동이 없기 바란다. 여러분의 가슴 속에 이런 크리스천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되어 간다면, 이미 주님의 인도하에 미국 유학생활의 시작을 통하여 이민생활의 첫발을 잘 내디뎠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 크리스천 이민자로서 본 나의 생각과 정체성이 이제 막 유학생활을 시작한 사랑하는 형제자매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다시 한번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의 칼럼의 주제가 “미국이나 제 3국 이민을 고려하거나 또는 해외 취업을 고려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쓰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다음 칼럼에서는 미국이민을 고려하는 유학생에게 유학생활 중에 필요한 준비와 훈련에 대하여 쓰기로 하겠다.


* 원래 이 글은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 컬럼에 실리는 글이지만, 이달의 초점 주제에 부합하는 글이어서 자리를 옮겨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