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3월호

청년사역을 할 때 가장 힘든 것은 고난 받고 있는 학생과의 만남입니다. 왜냐하면 고난 앞에서는 훌륭한 이론도 설득력있는 논리도 아무 가치가 없기 때문 입니다.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마치 거룩함 앞에 서 있는 것과도 같이 엄숙하게 다가 옵니다. 이는 고난의 깊이가 거룩함의 높이와 마치 흡사하게 우리들에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1.고난의 의미와 시작


“고난”은 “고통”을 유발시키는 “상황”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고통은 고난이 우리의 영혼에 “접수”되는 “아픔”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바로 왜 우리 영혼에 이 아픔이 접수되어야 하는 것과 또 그 아픔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첫 고통의 체험은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먹은 후 그들이 “벗었음” 을 알고 나뭇잎으로 엮어 옷을 만드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벗었음이 하나님께 노출되는 상태 입니다. 벗었음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풀이할 수 있겠지만 본질적 관점에서는 창조와 인류의 조화의 파괴를 의미하며, 이에 따라 인류와 창조의 사이에 “겹”이 있어야만 파괴된 상태가 부분적/일시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겹을 우리는 “가죽옷”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뒤 동산을 걷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 숨은 행위는 고통의 극도를 달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파괴로 구멍이 난 상태, 즉 창조의 질서 앞에서 노출되어 버린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즉 창조의 주관 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증폭된 고통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류는 그런 노출의 고통과 더불어 창조질서의 파괴 (distortion), 이에 따른 육신의 파괴로 고통에 휘어 싸임을 받게 됩니다. 땅은 가시덤굴을 낳고 해산의 고통이 있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만 이 세상에서 살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비롯되는 “모든” 결과가 우리들의 영혼을 “아프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고난은 인류의 노출된 상태에서부터 비롯되는 정신적 고통과 물질세계 질서의 distortion에서 비롯되는 육체적 고통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관계없이 결국에는 모든 고난은 한 영혼에게 느껴지는 아픔으로 집중되어 버립니다. 고난이란 어느 정도 객관성의 측도로 설명되어질 수 있지만 한 영혼에게 체험되어지는 아픔의 정도는 지극히 주관적이며 그 깊이를 타인은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매우 흡사한 고난을 경험했다 할지라도 고통의 정도는 각자 다를수가 있습니다. 한 영혼에게 느껴지는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저주입니다.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대신 세상을 택했기 때문에 오는 죄의 결과입니다. 세상은 피조물이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고난의 최종은 죽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그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의 죽음이 아닌 영원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겪는 고난 가운데는 이 세상에서의 죽음보다 더 아픈 고통들이 있기 때문 입니다. 우리들의 영혼을 파괴하는 고통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보다 더 아픈 것은 영혼의 완전 파괴를 의미하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영원한 결별입니다. 우리는 죄의 결과로 서로에게 고난을 주고 또 파괴된 창조의 질서로 말미암아 끝없이 고난을 계속 받으며 허무함 속에 살아가고 있다가 영원한 죽음을 맛보게 되는 운명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해답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로 있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기억하셨다고 출애굽기 2:23-25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담이 죄를 짖는 순간부터 이미 예비해 두셨던 구원의 길을 선포하신 것과 같이 우리에게 향하신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인간이 비록 죄의 길을 선택하여 모든 것을 더럽게 타락시켜 버렸지만 하나님은 결코 포기 하지 않으시고 인간이 남기고 가는 흔적마다 다시 만지어 선으로 변화시키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바로 인간의 영혼을 죽이는 죽음과 고난도 정면 대면하여 생명과 거룩함으로 승화시켜 주심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해답은 2가지로 표현 됩니다. 첫째는 창조질서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구원의 손길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만 그 분리된 상태가 고통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바로 우리가 비정상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모든 사람들에게 성화의 도구로,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오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사울 왕이 타락한 후 그 마음이 심히 괴로웠지만 그 고난이 결코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지식으로 승화시켜주지 못했으며 그의 마음을 더 강팍하게 하였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도 이와 같습니다. 그 반면 다윗과 같은 자는 고난이 그를 의의 길로 지켜주었고 요셉과 다니엘도 고난이 그들을 성화시켜 줄수 있었던 유일한 도구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류의 죽음과 고난의 핵심에 직접 파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고난과 죽음을 먼저 겪은 후 심판자의 자리에 서게 됐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 2:10). 예수님의 성육신은 자신의 영혼에 고난의 흔적을 충분히 담고 (1)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이 거쳐야 할 모든 과정을 이수한 온전한 인간으로 죽을수 있었던 것이며 또한 (2) 부활하심으로 영혼에 있던 고난의 흔적을 승화시켜 이제는 고난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으로 우리들의 영혼을 살리는 도구가 되게 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구약에 살던 의인들의 성화도 가능케 해 주었습니다. 고난 없는 그리스도는, 만약 그가 다른 쉬운 방법으로 죽음에 도달할수 있었다 할지라도, 참 성육신이 될 수 없습니다. 성육신은 바로 고난이 영혼에 주는 고통을 체험할 때 비로서 참 성육신이 이루어 지기 때문 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참 순종도 바로 고난가운데서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5:7). 즉 순종이 고난을 수반하지 않았다면 순종의 참 의미에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죽음까지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비로서 영광의 면류관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히2:9).


그렇다면 예수님의 고난은 단순히 예수님 스스로의 온전함을 이루시기 위한 고난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창조질서와 구원의 모든 총체적인 연결성 가운데 온전함을 이루시기 위한 고난은 하나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온전함이 불온전함 가운데 거할 때 생기는 자연 현상이었습니다. 빛을 발할 때 어두움이 이를 묵인할 수 없는 것처럼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묵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를 죽였습니다. 더 나아가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계속 증폭되는 미움과 다툼을 자신의 몸에 지니고 이를 더 이상 타인에게 전달하지 않음으로 증폭시키지 않고 자신안에 품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사53:10-11). 예수님의 고난은 구원 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공중의 권세잡은자가 휘두르는 무기였습니다. 바로 그 무기를 제공해 준 자들은 우리 자신들입니다.


3. 우리의 응답


우리들에게 고난은 4가지 방법으로 다가 옵니다. 첫째는 창조질서의 파고로 말미암은 불행 들입니다 (육신의 병, 자연 기후로 말미암은 인명피해등). 둘째는 인간의 죄성에서 비롯되는 제 삼자의 공격 (aggression)입니다 (누명, 험담, 살인, 구타, 강도 등). 셋째는 우리들의 창조질서의 무시에서부터 오는 결과입니다 (영: 말씀 거역으로 말미암는 결과와 육체적 세계의 질서무시로부터 말미암는 결과 등). 네 번째는 처음에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결여에서부터 오는 정신적/심리적 공포이며 모든 고난의 근원입니다. 특히 땅의 저주는 끝없이 우리들을 의식주의 문제로 한 순간도 편히 쉬게 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무의미에 대한 공포, 시간허비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inadequacy of being 등등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존재를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무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과 죽음을 정복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고난에 대한 해결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번째의 고난은 자신들에게 의탁된 땅을 제대로 정복함으로 다스리라고 말씀하시며 두번째 종류의 고난은 용서하는 자세(개인적 차원)와 의를 이루려는 자세 (사회적 차원)로 임하시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들에게 세번째 종류의 고난에서는 이제 성숙을 통하여 자라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엇보다도 위의 세가지는 이 마지막 네 번째 고난의 극복 없이는 이룰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존재의 의미와 존재에 대한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공중의 권세잡은이가 다스리는 육체가운데 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 자체가 우리들에게 고난을 순식간에 없애주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는 고난을 동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며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어두움은 빛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계시록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나라”와 “고난”의 동역자라고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계1:9).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난을 각오하고 적극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할 자세를 가지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딤후1:8).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고난이 올 때 이를 담대히 묵묵히 맞이하며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죽음의 독이 묻은 침이 우리들을 찌를 때 바로 그 침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들을 세우고 우리들의 성화의 거름이 되도록 바꾸어 놓으신 하나님 자신을 체험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롬5:3). 무엇보다도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고귀한 지식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는 그분의 은혜의 깊이만큼 체험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은혜의 깊이는 우리들의 영혼에 새겨지는 고통의 깊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바로 고난의 깊이이며 우리 영혼의 깊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고난은 성화를 의미합니다. 고난의 이유에 관계없이 또 그 고난의 이유를 우리의 이성으로 절대 설명할수 없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이제 고난은 하나님을 아는 고귀한 지식의 깊이로 들어가게 하는 은혜의 도구 입니다. 그런데 이런 거룩함은 이 세상의 안락함이 있는 성문 안에서는 찾을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아직도 저주이기 때문 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성문 밖, 세상의 영광과 명예가 없는 지역, 외롭고 버려진 곳에 임할 때만이 얻어질수 있는 거룩함 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히브리서를 통해 우리도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