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7년 11월호


“세상이 이해 못하고 우리를 조롱하여도 ”


2008 KOSTA/USA 컨퍼런스에서 거의 매일 부르다시피 했던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의 찬양 가사 중의 일부이다. 난 집회 기간 내내 이 가사를 묵상하다시피 하며 많은 생각을 했다. ‘과연 우리의 어떤 부분을 세상이 이해 못하고 조롱하고 있을까?’


예상보다 많이 길어진 유학생활을 마치고, 미국의 작은 회사를 다니게 되면서 바뀌게 된 몇가지 중에서 특징적인 한가지는, 사람들을 통해 듣게 되는 관심사의 변화다. 학생 시절에는, 각종 시험에 대한 이야기, 연구에 대한 이야기, 또 진로에 대한 염려가 주된 주제였다면, 졸업 이후에 듣는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돈’에 관한 내용이 아닌가 싶다. 최근에는 조금 주춤한다고는 하지만, 한때 미국의 부동산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집을 사고 파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마나 놀랬었는지 모른다. 그들이 교회를 열심히 출석하는 사람들일찌라도 말이다. 지금은 이율이 낮으니까 집을 사기에 좋은 때라는 둥, 이 지역은 투자 가치가 있으니까 지금 사면 좋다는 둥… 아무튼 집을 사고 파는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 나누는 것 자체가 무슨 문제는 아니겠지만, 모인 사람들이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모두가 그 부동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1. 돈은 정말 가치 중립일까?


몇년전 한국 기독교 내에서 청부론-청빈론 논쟁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 논쟁을 지켜보면서 계속 할 수 밖에 없었던 고민이 바로 ‘크리스천이 진정 부자로 살 수 있는가’였고, 그 질문의 기저에는 ‘돈은 정말 가치 중립일까?’라는 좀 더 기본적인 의문이 있었다. 만일 돈 그 자체가 가치 중립이라면 깨끗하게 벌어서 깨끗하게 쓰는 크리스천 부자가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겠고, 만일 중립적이지 못하다면 크리스천으로써 부자가 되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문제가 있을 테니까. 그 이후 성경공부를 통해서, 또 성경적인 경제관에 관한 책들을 통해서 현재까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세상의 제도나 시스템들과 마찬가지로 물질도 원래는 선하게 창조되었다. 하지만, 그 물질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타락했고, 또 그 물질은 구원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결국 재물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현재는 본래의 모습을 잃고 타락했을 뿐만 아니라 인격성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재물에 대해 인격적인 신의 개념을 빌어 말씀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시 말해, 재물이 그 원래의 속성, 즉 타락하기 전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면 크리스천이 부를 추구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물이 철저히 타락했을 뿐 아니라,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속성까지 포함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부를 추구하는 것이 타당할까라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다.


2. 내가 가진 경제관은 세상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기독교 역사에는 가난을 신앙의 큰 덕목으로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가난하려고 노력하고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해 죄의식마저 느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현대는 어떤가? 현대를 사는 우리 크리스천들, 더욱이 미국이라는 경제대국에서 사는 우리들 가운데 ‘가난’을 미덕으로 삼고 추구하며 사는 크리스천을 찾아보기란 정말이지 너무 어렵지 않은가?


물론 가난하게 산다고 좋은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대의 미국이나 한국의 크리스찬을 향해 ‘왜 크리스천은 물질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나? 크리스천도 부자가 될 수 있다’라고 정당화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 아닐까?


사실, 진정한 문제는 현대 미국과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이 가진 물질에 대한 생각이 세상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 아닐까? 직장을 구하는 기준이 연봉을 비롯한 조건이다. 어떻게든 집을 사고 집값이 오르면 기뻐하고 집값이 떨어지면 절망한다. 그렇게 버는 것이 일하지 않고 벌어들이는 불로소득이며 그로 인해 세상 누군가는 열심히 일하고도 소득을 얻지 못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고민은 접어둔지 오래다. 투자한 주식으로 돈이 벌리면 기쁘고 떨어지면 절망한다. 근데 그것이 정말 바른 것일까에 대한 고민은 없다. 내 경제의 여유분 중에서 적당한 액수를 교회나 자선단체에 기부한다. 그리고 나중에 세금혜택을 받는다. 그저 남들이 그렇게 하듯이 말이다. 나름대로의 노후대책을 세운다. 그것이 어떤 형태가 되는 말이다.


교회는 건물과 행사에 집중하는 상업주의 기독교의 전형이 된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작은 목회는 늘 실패한 것으로 간주왔다. 작은 회사는 늘 실패한 것이듯이…


도대체 세상은 우리의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의 어떤 점을 조롱할까?


3. 나는 진정 누구를 의지하나?


최근 사무엘서를 읽으면서, 사울의 이야기가 계속 눈에 들어온다. 전쟁에 임하기 전, 칠일 후에 오겠다던 사무엘을 기다리가 결국 마지막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자신이 제사를 드렸던 사울. 이 사울은 정말로 하나님을 믿기는 한걸까? 사울 뿐 아니라, 구약에 나타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은 건 맞나? 사울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거부한 흔적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들은 늘 애굽에서 자신들을 불러내 온 야훼 하나님을 믿었다. 또한 그 하나님의 심판을 믿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 관련한 농사와 자식번성에 대해서는 하나님보다는 바알을 의지했다. 하나님은 그런 일상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여기는 듯 하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믿었다고 해서, 일상 생활 속의 신을 따로 숭배하는 모습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성경은 그런 모습을 우상숭배라고 정죄하며, 바람난 아내의 모습으로 비난한다. 분명 하나님이 있다고는 믿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다른 무언가에 지배당하며 사는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믿는 걸까? 하나님을 세상의 창조자로 인정하며, 또 지금고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으로 인정하는데, 나의 미래는 내가 투자한 집과 주식, 그리고 저금통장에 의존하고 있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믿는 걸까?


4. 존재한다고 선은 아니다.


대학부 시절 기독교 윤리를 공부하면서 함께했던 형제 자매들과 자주했던 표현이 기억난다. ‘존재한다고 선은 아니다.’ 낙태가 행해지고 있다고 선한 것은 아니며, 전쟁이 존재한다고 선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것 중의 한가지가 있다면, 남들이 다 그렇게 하고 있고, 또 그 일이 딱히 위법이 아닌 경우에는 선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남들이 정당하게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 또 그 돈을 집이나 주식에 투자해서 늘려 나가고, 그리고 그렇게 노후를 보장받기 위해 애쓰며 산다고 그것이 쉽게 선으로만 간주될 수 없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을 생각해 보자. 나의 삶을 하나님께만 의존하며, 가난한 자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며, 또한 형제 자매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는 삶. 그래서 그럼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시는 삶. 그래서 세상은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를 조롱하지만, 결코 돌아서지 않은 삶.


아주 솔직히 말하면, 이런 삶이 성경적이라고 깨닫고 나서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정말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고 조롱하는 그런 삶을 살아 낼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한걸음을 함께 할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함꼐 그 길을 걸어가고 싶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며,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분을 따라 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