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젊은 기독인의 초상


진로 선택 이야기 하나 : 이 길이냐 저 길이냐


지난달에는 한동대 정시 면접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대학’으로 널리 알려진 우리 학교에서는 면접하러 온 지원자들로부터 “하나님의 대학”,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 등 일반인에게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는 용어들을 듣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학대학이 아닌 일반 종합대학으로서는 매우 특이한 분위기라 할 수 있지요.


그 날 우리 팀에는 생명윤리에 관심이 많은 교수님 한 분, 연극연출과 번역으로 유명한 교수님 한 분, 그리고 제가 면접위원을 맡았습니다. 면접위원 세 명이 오전과 오후에 각각 20여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판에 박힌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다 보면, 오후에는 ‘모든 것이 귀찮다’ 싶을 정도로 심한 피로가 몰려듭니다. 그런 피로감 속에 면접이 거의 끝나갈 즈음, 한 학생이 면접실로 들어왔습니다. 약간의 두려움이 감춰진 생기 있는 얼굴은 여느 학생들과 다름이 없었지만, 이 친구는 유난히 더 떨고 있었고, “한동대에 왜 지원하게 되었습니까?”라는 첫 질문에 대한 답부터 상당히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보통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의 대학이라서” 아니면 “무전공 입학제도가 좋아서” 둘 중 하나입니다. 거의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은 “저는 사실 한동대에 들어오려고 생각해 본 적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학생은 이미 다른 대학에 합격한 상태였고, 언젠가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능시험이 끝난 후 어머니로부터 “하나님의 대학 한동에 가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유를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본인은 한동대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마음에 드는 대학에 이미 합격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머니의 말씀을 그냥 흘려들었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자꾸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친구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1) 한동대에 원서를 넣지 않으려고 시간을 끌다가 마감일 12시를 넘어 그냥 한 번 한동대에 접속해 보았더니, 아직도 인터넷 접수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게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마음이 들어 할 수 없이 원서를 넣게 되었습니다. (2) 그 이후에도 한동대를 잊어버리려고 노력했고, 면접하러 올 교통편도 마땅치 않아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면접 전 날 저녁, 아는 분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 한동대로 자동차를 태워주겠다고 했습니다. (3) 이 두 가지 일을 겪고 나니 한동대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내가 거역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한동대로 면접을 보러 왔습니다.”


거의 울기 직전인 학생의 모습을 보면서 위기를 느낀 것은 저 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세 명의 교수들은 그 때부터 면접을 뒤로 미룬 채,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학교를 선택하도록 하지 않으신다. 학생이 가고 싶어하는 다른 대학도 한동대 못지 않게 좋은 대학이며, 그곳에 가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다”는 설득을 시작했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학생은 눈물을 흘렸고, 들어올 때에 비해 훨씬 안정된 모습으로 면접장을 떠났습니다. 그 학생이 최종적으로 한동대를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위의 (1)(2)(3)번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았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물론 (1)(2)(3)번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진로를 열어주시는 경우도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움을 통해 우리의 길을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따지고 보면 젊은이들의 인생에 진로선택 이상의 큰 고민도 없습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지, 어느 길이 욕심의 노예가 되는 것인지… 고민은 끝이 없습니다. 열심히 기도해 보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보지만, 의외로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실 때가 많으십니다. 명확하게 “너는 ○○(교사, 목사, 변호사, 의사, 목수, 사업가, 회사원….)이 되라”고 말씀해 주시면 좋으련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침묵과 그 뜻의 불명확성 속에서 고민하다 보면, 위의 학생처럼 이상한 느낌 또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저 역시 이런 불명확성 속에서 지금까지 많은 진로선택을 해 왔습니다. 그 중에는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저는 이번 호와 다음 호에서 제가 지금까지 해온 여러 진로선택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과정에서 배운 것들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진로선택’하면 제일 먼저 사법시험에 실패했던 대학 4학년 때가 생각납니다. 그 때 부딪혔던 고민은 간단했습니다. ‘목회자가 될 것이냐, 법률가가 될 것이냐.’ 저는 오랜 세월 교회를 다니면서도 다행히(?) 한 번도 ‘서원’이란 것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법시험에 낙방하고 나니 제일 먼저 ‘목사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고등학교시절 수업시간에 어느 선생님과 오간 대화 한 토막도 떠올랐습니다. 그 때 저를 무척 아껴주셨던 선생님께서는 지나는 말로 “김두식, 너도 서울 법대 갈 거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은 하나같이 서울 법대로 목표를 정했던 시절이었으니 선생님께서 ‘너도 뻔하지?’라고 시큰둥하게 물어보신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아니요. 저는 목사가 될 겁니다!”라는 엉뚱한 대답을 던져 선생님의 허를 찔렀습니다. 그냥 “예”라고는 말하기 싫어 무조건 삐딱하게 답변했던 것이지요. 그 대답이 신기하게 생각되셨던지, 그 때부터 선생님은 저를 “김 목사”로 부르셨습니다. 인권 변호사가 뭔지도 모르면서 인권 변호사가 되겠다고 법대에 진학한 이후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이 대화가 하필 고시 떨어지고 나서 다시 생각난 것도 묘한 일이었습니다.


동시에 ‘원래 목사가 되어야 할 사람이 자기 욕심 때문에 고시 공부를 시작한 것 아닌가?’하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습니다. 고민 끝에 찾은 곳이 강원도 태백의 예수원이었지요. 예수원에 2박 3일을 머무는 동안 당시 부원장이었던 주 예레미아 신부님과 함께 기도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신부님은 저에게 “준비하던 공부를 계속하라”는 대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거기에 힘을 얻어 산에서 내려온 뒤의 이야기는 이미 지난달에 적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주 신부님께서 저에게 무척 지혜로운 조언을 주셨던 것 같습니다. ‘목사’라는 새로운 길은 현재의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선택의 범위 안에 들어온 도피성 상상에 불과했습니다. 마음의 90퍼센트 정도는 한 번 더 시험에 도전해 보는 쪽으로 방향 잡혀 있었습니다. 결국 제게 필요했던 것은 진로에 관한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따뜻한 위로였던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저의 이런 마음을 읽으신 신부님께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저에게 대언의 형식을 띤 위로의 말씀을 던지셨던 게 분명합니다. 저는 그 때 제가 목사의 길을 선택하지 않도록 선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었다면, 한국 교계나 저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었을 것이 분명한 까닭입니다.


시험이나 사업에 실패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저와 같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단순히 공부량이 부족해서 시험에 떨어져도, 예수 잘 믿는 형제자매들은 거의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내게 목사나 선교사가 되라고 길을 막으시는 것 아닌가’라는 고민에 빠집니다. 이런 고민이 심해지다 보면, 평소에 안 들리던 하나님의 음성도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대개 “주의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저도 그 비슷한 하나님의 음성을 몇 번 들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저는 그 때 이미 “주의 종이 되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결코 “목사가 되어라”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목사도, 변호사도, 교사도, 회사원도, 다른 어떤 직업도,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주의 종의 길’임을 알고 있었기에, 덮어놓고 신학교로 가는 오류를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원론적 세계관은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불필요한 목사님들을 양산해 낼 수 있는 취약한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목회자가 된 ‘주의 종들’은 자칫하면 하나님을 ‘일할 사람을 억지로 구하고자 그 사람을 실패에 빠뜨리는 사악한 신’으로 만들어 버리기 쉽습니다.


이야기가 좀 옆으로 샙니다만, 성도들 중에는 의외로 ‘인간만도 훨씬 못한 괴팍하고 무서운 하나님’을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 하나님은 성도가 주일 성수를 제대로 안 하면 교통사고를 당하게 하고, 십일조를 제대로 안 내면 사업이 쫄딱 망하게 하며, 이른바 ‘주의 종’인 목사님을 비방하기라도 하면 불치병에 걸리게도 하는 이상한 분입니다. 저는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자녀가 비뚤어진 길로 갈 때, 눈물과 사랑으로 기도하며 자녀가 돌아오기를 인내로 기다립니다. 결코 교통사고, 부도, 불치병 등을 겪도록 함으로써 자녀가 돌아오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최소한 내 육신의 아버지가 베푼 사랑보다 더 높고 크다’는 확신이 제 신앙의 뿌리가 되었음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이상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전파하는 주의 종들’에게 당장 벼락(!)을 치지 않으시는 것만 보아도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넓고 큰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거짓 복음을 전하는 이른바 ‘주의 종들’까지도 인내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당하는 불행에 대한 해석은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런 해석들을 통해 살아갈 힘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던 어린이를 사망하게 한 교통사고를 내어 교도소에 들어간 성도가 성경말씀을 묵상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불신앙을 반성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주일성수하는 성도로 새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주신 고난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결국 하나님은 A성도가 성수주일 하도록 만들기 위해, B라는 어린아이를 죽이는 가혹한 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해석이 어떤 한계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목사의 길이든, 변호사의 길이든 그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면 그게 ‘주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종에 따라 주의 종 여부를 결정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제가 첫 고민을 통해 얻은 교훈이었습니다. 시험이나 사업에 실패했을 때는 그 시험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지 여부를 일차적으로 검토해 보고, 자신이 최선을 다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실패의 원인을 찾은 후 다시 도전하거나, 다른 진로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다른 진로를 찾는 과정에서 혹시 “주의 종이 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해도 너무 쉽게 목회자의 길을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이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주의 종이 되라”는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이 음성을 목회자가 되라는 뜻으로 잘못 해석한다면, 한국 교회는 정말 큰 재난을 만나게 됩니다. 신도는 없고 목회자만 있는 교회만 넘쳐나게 될 테니까요.


두 번째로 어려운 선택에 마주친 것은 군법무관으로 3년간의 의무 복무가 끝나 갈 때였습니다. 사법연수원 시절, 저는 판검사를 거치지 않고 변호사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판검사 되는데 목숨을 건 연수생들의 분위기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던 데다가, 이왕이면 남들이 기피하는 직종으로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일찍이 이런 마음을 먹은 탓에 사법연수원 2년간은 다른 누구보다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요. 진로를 결정짓는 연수원 2년차 시험을 목전에 둔 시기에 아내를 처음 만났고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연애의 시간도 가졌습니다. 법원 시보, 변호사 시보 등으로 일하며 비교적 시간 여유가 있을 때는 대학 후배들을 모아 신앙서적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이런 편안한 마음으로 연수원 2년을 보냈기 때문에 좋은 친구들과 선후배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습니다. 특히 서울대 첫 직선 총학생회장을 지내며 감옥까지 다녀온 후 고시 3과에 합격한 L형과의 만남은 저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내수동교회 출신인 L형은 가끔 신앙이 오락가락해 보일 때가 있기는 했어도, 그 마음 깊은 곳에 본질적인 순수성을 간직한 신앙인이었습니다. 형식화된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많이 불편해하던 L형이었지만, 억지로 팔을 붙잡고 연수원 신우회 모임에 가자고 하면 못이기는 척 웃으면서 따라나서곤 했습니다. 가급적 술 먹는 모임에는 가지 못하도록 제가 억지로 붙들고 있기도 했는데, 하도 옆에서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늘어놓다 보니 나중에는 저를 ‘수호천사’로 부르기도 했지요. 신우회 모임에 L형을 끌고 다닌 대신에, 저는 기회가 될 때마다 각종 사회문제에 대한 형의 탁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비범한 사람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흔치 않은 기회였습니다. 사법연수원 마칠 때쯤에는 형과 의기투합하여 함께 변호사 일을 해보자는 약속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그 때, ‘L형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내 인생을 한 번 맡겨 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늘 듬직하고 신중했고, 지혜로움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무엇보다 욕심 없이 순수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군 미필자로 사법시험에 합격했던 저는 먼저 군대부터 다녀와야 했습니다. 사법연수원을 마치면서 저는 영천의 제3사관학교에서 장교 훈련을 받아야 했고, L형은 제3세계 국가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판검사, 변호사의 길 대신 세계여행을 떠난 L형의 선택은, 늘 공부 안하고 노는 것처럼 보였던 그가 이번에도 선두에 속하는 성적으로 연수원을 수료했다는 전설과 함께, 연수원에 큰 화젯거리를 남겼습니다.


군법무관 3년은 제대 후를 준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저는 “L형과 함께 변호사하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별다른 준비 없이 세월을 보냈습니다. 마침 딸 희수가 태어났고, 갑작스럽게 늘어난 가사노동의 부담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많지 않았습니다. 강원도와 대구에서 군법무관으로 일해야 했기 때문에 서울에 갈 기회도 찾기 어려웠습니다(이 시기에 저의 책 <칼을 쳐서 보습을>의 단초가 된 여호와의 증인들도 처음 만났습니다). 아내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도 저에게는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훌쩍 3년이 지나가 있었습니다.


세상일이 인간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3년 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L형은 워낙 살기 어려운 나라들만 골라 돌아다닌 덕분에 몸이 약해져 여행을 중단하고 얼마간의 휴식기간을 가진 뒤 귀국하여 조그만 로펌을 만들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법조계가 너무 복잡하고 재미없는 동네임을 깨닫고, 고시 특강으로 학생들을 만나고 생계를 해결하는 새로운 진로를 개척했지요. 처음의 약속대로 저와 함께 변호사를 하기는 어렵게 된 셈이었습니다. 저도 군법무관 생활을 하면서 법조계의 어두운 뒷모습을 알아가던 시절이라 그런 결정을 내린 L형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L형과의 만남을 통해 저는 굳이 남과 똑같은 결정을 내릴 필요는 없다는 가르침을 받았고, 나중에 남과 다른 선택을 할 때마다 L형의 사는 모습에서 큰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군을 제대할 시간이 다가오면서 진로를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내내 한국 사회의 높은 벽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손꼽히는 대형 로펌이든, 이른바 ‘운동권’ 변호사들이 모인 조그만 로펌이든 한결같이 공개 채용 대신 ‘알음알음을 통한 사람 찾기’ 방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알려진 로펌이 서울대 출신만을 뽑는다는 사실은 공개된 비밀에 속했습니다. 서너 손가락 안에 드는 로펌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돈을 많이 버는데 목표를 둔 변호사는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로펌의 파트너였던 잘 믿는 기독 변호사님 한 분은 “로펌에서 일하는 것도 국익과 공익을 위하는 길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저에게는 별로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수입은 적어도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로펌에 합류하고 싶은 열망이 강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로펌들은 운동권 선후배 관계로 연결된 저의 동기생들이 일찍부터 빈 자리를 채운 뒤였습니다. 기독변호사 운동이 태동되고 있기는 했지만 젊은 신참 변호사를 맞아들일 역량을 갖춘 사무실은 전무했습니다. 결국 변호사가 되기 위해 남아있는 길은 독자적으로 개업하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개업하기에는 돈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었지요. 마음으로는 동네 어귀에 부동산중개소처럼 변호사 사무실을 차려놓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용기도 경험도 부족했습니다. 변호사 개업을 하면 의뢰인들에게 직접 돈을 받아가며 살아야 한다는 것도 저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차마 의뢰인들에게 “수임료는 얼마입니다. 사무장에게 내고 가주세요”라고 말할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때 정면으로 도전하지 못하는 저의 태도를 보면, 이 연재물의 제목도 ‘어느 겁 많은 기독인의 초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저런 길이 다 막혀 있다고 느껴지는 답답한 상황에서 저는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은 모두 판사 또는 검사로 임용을 받기 위해 서류 접수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판검사 임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법시험과 사법연수원에서 받은 성적이었습니다. 성적이 가장 좋은 그룹은 판사를 지망했고, 그 다음 그룹은 검사를 지망했습니다. 판사들은 성적에 따라 서울-수원-대전 등의 순서로 발령을 받게 되어 있었고, 검사들 역시 성적에 따라 서울-부산-대구 등의 순서로 발령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판사로 가장 순위가 밀리는 사람들과 서울권의 검사들이 보통 비슷한 성적대를 형성했습니다. 지원을 앞두고는 치열한 눈치작전도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성적 때문에 바로 변호사로 나가야 하는 친구들은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가끔 판검사를 포기하고 대형 로펌을 택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런 그룹은 절대적으로 소수였습니다.


관심 밖으로 생각하고 한 번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았던 저의 연수원 수료성적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게 된 것도 이 때였습니다. 제 성적은 중간을 약간 웃도는 성적으로, 판사를 하려면 지방으로 내려가야 하고, 검사를 하려면 서울 근무가 가능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나마 하나님의 은혜로 합격한 사법시험 성적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유지된 등수였습니다. 대학원을 막 시작했던 아내는 아기를 키우기 위해 1년간 휴학했다가 다시 복학하기 위해 준비중이었습니다. 딸아이를 키워주기로 하신 아버지께서는 판사로 지망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연좌제가 폐지되었다 해도 검찰 쪽은 좀 어려울 거라는 소문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복잡한 선택의 기로에서 저는 일단 검찰에 지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1) 큰외삼촌 문제로 인한 임용 탈락의 가능성이 남아 있었으므로 임용에서 탈락되면 가벼운 마음으로 거리의 변호사를 택하겠다는 생각과 (2) 아내가 미국으로 떠난 이후 저라도 서울에서 딸아이 옆에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결심의 주된 동기였습니다. (3) 군법무관으로 일하는 동안 비리 수사가 번번이 좌절되는 것을 경험하며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었던 ‘제대로 수사 한 번 해 보고 싶다’는 의지가 발동된 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좋게 말하면 ‘제대로 수사 한 번 해 보고 싶다’였지만,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무시당하지 않고 일해보고 싶다’는 편에 가까웠을 겁니다. 제 인생의 여러 선택 중 가장 인간적 동기가 강했던 결정이었습니다.


큰외삼촌 문제를 하나님의 뜻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삼아보겠다는 괘씸한 동기를 가지고 지원한 검사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97년 봄과 여름의 6개월은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선 무엇보다 권력을 가진 국가조직이 운용되는 과정을 내부에서 지켜보는 기회가 되었고, 대전과 의정부의 법조비리 사건이 터지기 직전의 생활화된 부패 관행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 3시간 정도만 자면서 사람을 잡으러 다니기도 했고 덕분에 일 잘하는 검사 소리도 들었습니다. 초임 검사가 좀처럼 하기 어려운 일을 벌여놓고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가장 강력한 수사수단을 활용해 볼 기회도 가져보았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경험하고 느꼈던 많은 것들과 검사직을 사임하게 된 구체적인 이야기는 지면에 담기에 적절치 않은 것 같아 생략합니다. “아내가 미국 유학 중이었고, 딸아이를 키워주시던 부모님께서 너무 연로하셨기 때문에 아내를 돕기 위해 검사직을 그만 두고 미국으로 떠난다”는 것이 저의 공식적인 사임 이유였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만은 적어놓겠습니다. 당시 묵상하고 있던 성경말씀은 열왕기상이었는데, 마침 17장을 읽던 날에 사표를 냈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미국으로 떠나 초기에 많이 고생할 때에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그릿 시냇가의 엘리야 이야기는 우리 부부가 힘과 용기를 되찾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검사를 그만 둘 때에는 참 재미있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제가 사표를 낸 다음날, 검찰청 내의 신우회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제가 사임했다는 것이 알려졌지요. 모임을 마치고 나오는데, 몇 명의 일반직 직원들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평소 안면은 있었지만 이름도 잘 모르던 분들이었습니다. 한 분이 입을 열었습니다. “김 검사님. 참 신기한 일이 있었어요. 신우회에 참석하는 우리 일반직 아줌마들 몇 명이 어제 점심식사를 같이 했거든요. 그런데 ○○○씨가 그 자리에서 전 날 밤의 꿈 이야기를 했어요. 글쎄 김 검사님이 자기 꿈에 나오더라지 뭐예요. 그런데 꿈 속의 김 검사님이 어딘가 멀리 떠나시더래요. 그리고 얼마 후 돌아오시는데 글쎄 세상에서 볼 수 없는, 하늘에서 온 것이 너무나 분명한, 오색 영롱한 음식들을 잔뜩 그릇에 담아서 들고 오시더랍니다. 우리가 어제 그 이야기를 듣고 유부녀가 딴 남자 꿈을 꾸었다면서 한바탕 웃었거든요. 그런데 오늘에야 김 검사님께서 사표 내셨다는 소식을 들었지 뭡니까? 어디 가시든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그 분들은 제가 미국으로 가기 위해 사표를 냈다는 사실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저는 하나님의 장난스러우심에 미소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려운 선택을 하고 우리 나라를 떠나려는 저를 위로할 방법을 억지로 찾아보다, 결국 이런 방법까지 동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그 꿈이 무슨 의미가 있든지 간에 저는 이 자매님의 꿈을 통해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적을 때마다 제가 굉장히 이상한 신비주의자로 비칠까봐 조심스럽습니다만, 저도 가벼운 마음으로 적은 것이니 읽는 분들도 가볍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어쨌든 검사직 선택과 그 사임을 경험하면서 저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동기로 선택한 직업이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직업을 통해 여전히 우리에게 복 주려 하신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진로를 선택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 또는 두 개의 선택 가능성을 놓고 갈등합니다.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서면 괜히 한 쪽은 하나님의 뜻인 것 같고, 다른 쪽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선택을 하면 한없는 복을 받을 것 같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로 점철된 좌절의 인생을 살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도원을 찾아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길은 ‘오직 하나’일 것이므로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어 보지만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이 정도 되면 표적을 구하게도 되지요. 제가 “하나님, 큰외삼촌 때문에 검사 임용이 안 될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검사에 임용된다면 그게 하나님의 뜻인 줄 알겠습니다. 만약 임용이 안 된다면 거리의 변호사로 나서겠습니다”라고 기도한 것이 그 예입니다. 이런 때는 사사기 6장에 나오는 기드온 이야기가 많이 인용됩니다. 기드온의 경우처럼 표적을 구하는 이에게 하나님께서는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저는 검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에서 2년 동안 아기를 키우면서 새로운 깨달음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머물며 인터넷을 통해 우리 신문들을 읽어볼 때마다, 저는 저와 함께 검찰청에서 근무하던 검사들이 유난히 잘 나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검사장 승진이 좌절되어 실의에 차 있던 지청장은 정권교체로 인해 청와대에 입성하여 상종가를 치고 있었고, 직속상관이던 부장 검사와 다른 동료검사들도 검찰 내 꽃 보직들을 찾아가며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저는 ‘하나님께서는 내가 검사를 택했든, 변호사를 택했든 양쪽 길 모두에 복 주실 작정을 하고 계셨을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검사로 남았다면 검사로서 잘 커가도록 모든 준비를 해 놓으셨고, 검사를 그만 두고 집에서 애를 키우는 동안에는 또 그걸 통해 성장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해 놓으셨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로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 직업이냐 저 직업이냐가 아니라 ‘오직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내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삶을 사는 것’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법률가로서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간에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찾은 것이 됩니다. 반면에 제가 이 말씀에 반하여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아무리 좋은 직업을 선택했다 해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런 새로운 발견은 저에게 큰 자유를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근거 없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국 검사직 선택 여부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복 주실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그것이 선한 동기에 기초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아마도 검사직 선택보다, 그걸 그만두는 쪽이 동기 면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했던 것 같습니다. 너무 범위가 적은 결단이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아내와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더 이상 악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검사를 그만 두었고, 하나님께서 그런 작은 헌신도 선하게 보셨던 것 같습니다. 검사를 그만둔 이후, 저는 보다 모험적인 인생에 뛰어들어 삶을 즐기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저 감사드리는 것 말고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지요.


진 로선택을 눈앞에 두고, 이 길인지 저 길인지 고민중인 분들에게 저의 이야기가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길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헌신하기를 바라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우리 자신을 내어주기를 원하시지만, 우리에게 그런 헌신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헌신의 길에 나설 때까지 충분히 기다릴 줄 아는 분이십니다. ‘이 길에도, 저 길에도’ 모두 복 내릴 준비를 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걸 알고 나면, 진로선택은 고민과 고통의 시간이 아니라 즐거운 축제의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2002년 9월부터 월간지 <복음과 상황>과 eKOSTA가 기사 제휴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역사와 사회를 조명하는” 복음주의 정론지 <복음과 상황>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복음과 상황> 홈페이지 (http://www.goscon.co.kr) 나 이메일 goscon@chollian.net 로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