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식] 진로 선택 이야기 하나 : 이 길이냐 저 길이냐

어느 젊은 기독인의 초상


진로 선택 이야기 하나 : 이 길이냐 저 길이냐


지난달에는 한동대 정시 면접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대학’으로 널리 알려진 우리 학교에서는 면접하러 온 지원자들로부터 “하나님의 대학”,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 등 일반인에게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는 용어들을 듣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학대학이 아닌 일반 종합대학으로서는 매우 특이한 분위기라 할 수 있지요.


그 날 우리 팀에는 생명윤리에 관심이 많은 교수님 한 분, 연극연출과 번역으로 유명한 교수님 한 분, 그리고 제가 면접위원을 맡았습니다. 면접위원 세 명이 오전과 오후에 각각 20여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판에 박힌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다 보면, 오후에는 ‘모든 것이 귀찮다’ 싶을 정도로 심한 피로가 몰려듭니다. 그런 피로감 속에 면접이 거의 끝나갈 즈음, 한 학생이 면접실로 들어왔습니다. 약간의 두려움이 감춰진 생기 있는 얼굴은 여느 학생들과 다름이 없었지만, 이 친구는 유난히 더 떨고 있었고, “한동대에 왜 지원하게 되었습니까?”라는 첫 질문에 대한 답부터 상당히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보통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의 대학이라서” 아니면 “무전공 입학제도가 좋아서” 둘 중 하나입니다. 거의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은 “저는 사실 한동대에 들어오려고 생각해 본 적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학생은 이미 다른 대학에 합격한 상태였고, 언젠가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능시험이 끝난 후 어머니로부터 “하나님의 대학 한동에 가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유를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본인은 한동대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마음에 드는 대학에 이미 합격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머니의 말씀을 그냥 흘려들었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자꾸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친구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1) 한동대에 원서를 넣지 않으려고 시간을 끌다가 마감일 12시를 넘어 그냥 한 번 한동대에 접속해 보았더니, 아직도 인터넷 접수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게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마음이 들어 할 수 없이 원서를 넣게 되었습니다. (2) 그 이후에도 한동대를 잊어버리려고 노력했고, 면접하러 올 교통편도 마땅치 않아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면접 전 날 저녁, 아는 분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 한동대로 자동차를 태워주겠다고 했습니다. (3) 이 두 가지 일을 겪고 나니 한동대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내가 거역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한동대로 면접을 보러 왔습니다.”


거의 울기 직전인 학생의 모습을 보면서 위기를 느낀 것은 저 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세 명의 교수들은 그 때부터 면접을 뒤로 미룬 채,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학교를 선택하도록 하지 않으신다. 학생이 가고 싶어하는 다른 대학도 한동대 못지 않게 좋은 대학이며, 그곳에 가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다”는 설득을 시작했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학생은 눈물을 흘렸고, 들어올 때에 비해 훨씬 안정된 모습으로 면접장을 떠났습니다. 그 학생이 최종적으로 한동대를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위의 (1)(2)(3)번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았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물론 (1)(2)(3)번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진로를 열어주시는 경우도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움을 통해 우리의 길을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따지고 보면 젊은이들의 인생에 진로선택 이상의 큰 고민도 없습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지, 어느 길이 욕심의 노예가 되는 것인지… 고민은 끝이 없습니다. 열심히 기도해 보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보지만, 의외로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실 때가 많으십니다. 명확하게 “너는 ○○(교사, 목사, 변호사, 의사, 목수, 사업가, 회사원….)이 되라”고 말씀해 주시면 좋으련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침묵과 그 뜻의 불명확성 속에서 고민하다 보면, 위의 학생처럼 이상한 느낌 또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저 역시 이런 불명확성 속에서 지금까지 많은 진로선택을 해 왔습니다. 그 중에는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저는 이번 호와 다음 호에서 제가 지금까지 해온 여러 진로선택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과정에서 배운 것들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진로선택’하면 제일 먼저 사법시험에 실패했던 대학 4학년 때가 생각납니다. 그 때 부딪혔던 고민은 간단했습니다. ‘목회자가 될 것이냐, 법률가가 될 것이냐.’ 저는 오랜 세월 교회를 다니면서도 다행히(?) 한 번도 ‘서원’이란 것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법시험에 낙방하고 나니 제일 먼저 ‘목사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고등학교시절 수업시간에 어느 선생님과 오간 대화 한 토막도 떠올랐습니다. 그 때 저를 무척 아껴주셨던 선생님께서는 지나는 말로 “김두식, 너도 서울 법대 갈 거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은 하나같이 서울 법대로 목표를 정했던 시절이었으니 선생님께서 ‘너도 뻔하지?’라고 시큰둥하게 물어보신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아니요. 저는 목사가 될 겁니다!”라는 엉뚱한 대답을 던져 선생님의 허를 찔렀습니다. 그냥 “예”라고는 말하기 싫어 무조건 삐딱하게 답변했던 것이지요. 그 대답이 신기하게 생각되셨던지, 그 때부터 선생님은 저를 “김 목사”로 부르셨습니다. 인권 변호사가 뭔지도 모르면서 인권 변호사가 되겠다고 법대에 진학한 이후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이 대화가 하필 고시 떨어지고 나서 다시 생각난 것도 묘한 일이었습니다.


동시에 ‘원래 목사가 되어야 할 사람이 자기 욕심 때문에 고시 공부를 시작한 것 아닌가?’하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습니다. 고민 끝에 찾은 곳이 강원도 태백의 예수원이었지요. 예수원에 2박 3일을 머무는 동안 당시 부원장이었던 주 예레미아 신부님과 함께 기도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신부님은 저에게 “준비하던 공부를 계속하라”는 대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거기에 힘을 얻어 산에서 내려온 뒤의 이야기는 이미 지난달에 적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주 신부님께서 저에게 무척 지혜로운 조언을 주셨던 것 같습니다. ‘목사’라는 새로운 길은 현재의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선택의 범위 안에 들어온 도피성 상상에 불과했습니다. 마음의 90퍼센트 정도는 한 번 더 시험에 도전해 보는 쪽으로 방향 잡혀 있었습니다. 결국 제게 필요했던 것은 진로에 관한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따뜻한 위로였던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저의 이런 마음을 읽으신 신부님께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저에게 대언의 형식을 띤 위로의 말씀을 던지셨던 게 분명합니다. 저는 그 때 제가 목사의 길을 선택하지 않도록 선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었다면, 한국 교계나 저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었을 것이 분명한 까닭입니다.


시험이나 사업에 실패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저와 같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단순히 공부량이 부족해서 시험에 떨어져도, 예수 잘 믿는 형제자매들은 거의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내게 목사나 선교사가 되라고 길을 막으시는 것 아닌가’라는 고민에 빠집니다. 이런 고민이 심해지다 보면, 평소에 안 들리던 하나님의 음성도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대개 “주의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저도 그 비슷한 하나님의 음성을 몇 번 들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저는 그 때 이미 “주의 종이 되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결코 “목사가 되어라”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목사도, 변호사도, 교사도, 회사원도, 다른 어떤 직업도,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주의 종의 길’임을 알고 있었기에, 덮어놓고 신학교로 가는 오류를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원론적 세계관은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불필요한 목사님들을 양산해 낼 수 있는 취약한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목회자가 된 ‘주의 종들’은 자칫하면 하나님을 ‘일할 사람을 억지로 구하고자 그 사람을 실패에 빠뜨리는 사악한 신’으로 만들어 버리기 쉽습니다.


이야기가 좀 옆으로 샙니다만, 성도들 중에는 의외로 ‘인간만도 훨씬 못한 괴팍하고 무서운 하나님’을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 하나님은 성도가 주일 성수를 제대로 안 하면 교통사고를 당하게 하고, 십일조를 제대로 안 내면 사업이 쫄딱 망하게 하며, 이른바 ‘주의 종’인 목사님을 비방하기라도 하면 불치병에 걸리게도 하는 이상한 분입니다. 저는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자녀가 비뚤어진 길로 갈 때, 눈물과 사랑으로 기도하며 자녀가 돌아오기를 인내로 기다립니다. 결코 교통사고, 부도, 불치병 등을 겪도록 함으로써 자녀가 돌아오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최소한 내 육신의 아버지가 베푼 사랑보다 더 높고 크다’는 확신이 제 신앙의 뿌리가 되었음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이상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전파하는 주의 종들’에게 당장 벼락(!)을 치지 않으시는 것만 보아도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넓고 큰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거짓 복음을 전하는 이른바 ‘주의 종들’까지도 인내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당하는 불행에 대한 해석은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런 해석들을 통해 살아갈 힘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던 어린이를 사망하게 한 교통사고를 내어 교도소에 들어간 성도가 성경말씀을 묵상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불신앙을 반성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주일성수하는 성도로 새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주신 고난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결국 하나님은 A성도가 성수주일 하도록 만들기 위해, B라는 어린아이를 죽이는 가혹한 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해석이 어떤 한계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목사의 길이든, 변호사의 길이든 그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면 그게 ‘주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종에 따라 주의 종 여부를 결정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제가 첫 고민을 통해 얻은 교훈이었습니다. 시험이나 사업에 실패했을 때는 그 시험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지 여부를 일차적으로 검토해 보고, 자신이 최선을 다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실패의 원인을 찾은 후 다시 도전하거나, 다른 진로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다른 진로를 찾는 과정에서 혹시 “주의 종이 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해도 너무 쉽게 목회자의 길을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이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주의 종이 되라”는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이 음성을 목회자가 되라는 뜻으로 잘못 해석한다면, 한국 교회는 정말 큰 재난을 만나게 됩니다. 신도는 없고 목회자만 있는 교회만 넘쳐나게 될 테니까요.


두 번째로 어려운 선택에 마주친 것은 군법무관으로 3년간의 의무 복무가 끝나 갈 때였습니다. 사법연수원 시절, 저는 판검사를 거치지 않고 변호사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판검사 되는데 목숨을 건 연수생들의 분위기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던 데다가, 이왕이면 남들이 기피하는 직종으로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일찍이 이런 마음을 먹은 탓에 사법연수원 2년간은 다른 누구보다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요. 진로를 결정짓는 연수원 2년차 시험을 목전에 둔 시기에 아내를 처음 만났고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연애의 시간도 가졌습니다. 법원 시보, 변호사 시보 등으로 일하며 비교적 시간 여유가 있을 때는 대학 후배들을 모아 신앙서적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이런 편안한 마음으로 연수원 2년을 보냈기 때문에 좋은 친구들과 선후배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습니다. 특히 서울대 첫 직선 총학생회장을 지내며 감옥까지 다녀온 후 고시 3과에 합격한 L형과의 만남은 저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내수동교회 출신인 L형은 가끔 신앙이 오락가락해 보일 때가 있기는 했어도, 그 마음 깊은 곳에 본질적인 순수성을 간직한 신앙인이었습니다. 형식화된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많이 불편해하던 L형이었지만, 억지로 팔을 붙잡고 연수원 신우회 모임에 가자고 하면 못이기는 척 웃으면서 따라나서곤 했습니다. 가급적 술 먹는 모임에는 가지 못하도록 제가 억지로 붙들고 있기도 했는데, 하도 옆에서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늘어놓다 보니 나중에는 저를 ‘수호천사’로 부르기도 했지요. 신우회 모임에 L형을 끌고 다닌 대신에, 저는 기회가 될 때마다 각종 사회문제에 대한 형의 탁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비범한 사람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흔치 않은 기회였습니다. 사법연수원 마칠 때쯤에는 형과 의기투합하여 함께 변호사 일을 해보자는 약속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그 때, ‘L형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내 인생을 한 번 맡겨 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늘 듬직하고 신중했고, 지혜로움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무엇보다 욕심 없이 순수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군 미필자로 사법시험에 합격했던 저는 먼저 군대부터 다녀와야 했습니다. 사법연수원을 마치면서 저는 영천의 제3사관학교에서 장교 훈련을 받아야 했고, L형은 제3세계 국가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판검사, 변호사의 길 대신 세계여행을 떠난 L형의 선택은, 늘 공부 안하고 노는 것처럼 보였던 그가 이번에도 선두에 속하는 성적으로 연수원을 수료했다는 전설과 함께, 연수원에 큰 화젯거리를 남겼습니다.


군법무관 3년은 제대 후를 준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저는 “L형과 함께 변호사하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별다른 준비 없이 세월을 보냈습니다. 마침 딸 희수가 태어났고, 갑작스럽게 늘어난 가사노동의 부담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많지 않았습니다. 강원도와 대구에서 군법무관으로 일해야 했기 때문에 서울에 갈 기회도 찾기 어려웠습니다(이 시기에 저의 책 <칼을 쳐서 보습을>의 단초가 된 여호와의 증인들도 처음 만났습니다). 아내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도 저에게는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훌쩍 3년이 지나가 있었습니다.


세상일이 인간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3년 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L형은 워낙 살기 어려운 나라들만 골라 돌아다닌 덕분에 몸이 약해져 여행을 중단하고 얼마간의 휴식기간을 가진 뒤 귀국하여 조그만 로펌을 만들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법조계가 너무 복잡하고 재미없는 동네임을 깨닫고, 고시 특강으로 학생들을 만나고 생계를 해결하는 새로운 진로를 개척했지요. 처음의 약속대로 저와 함께 변호사를 하기는 어렵게 된 셈이었습니다. 저도 군법무관 생활을 하면서 법조계의 어두운 뒷모습을 알아가던 시절이라 그런 결정을 내린 L형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L형과의 만남을 통해 저는 굳이 남과 똑같은 결정을 내릴 필요는 없다는 가르침을 받았고, 나중에 남과 다른 선택을 할 때마다 L형의 사는 모습에서 큰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군을 제대할 시간이 다가오면서 진로를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내내 한국 사회의 높은 벽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손꼽히는 대형 로펌이든, 이른바 ‘운동권’ 변호사들이 모인 조그만 로펌이든 한결같이 공개 채용 대신 ‘알음알음을 통한 사람 찾기’ 방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알려진 로펌이 서울대 출신만을 뽑는다는 사실은 공개된 비밀에 속했습니다. 서너 손가락 안에 드는 로펌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돈을 많이 버는데 목표를 둔 변호사는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로펌의 파트너였던 잘 믿는 기독 변호사님 한 분은 “로펌에서 일하는 것도 국익과 공익을 위하는 길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저에게는 별로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수입은 적어도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로펌에 합류하고 싶은 열망이 강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로펌들은 운동권 선후배 관계로 연결된 저의 동기생들이 일찍부터 빈 자리를 채운 뒤였습니다. 기독변호사 운동이 태동되고 있기는 했지만 젊은 신참 변호사를 맞아들일 역량을 갖춘 사무실은 전무했습니다. 결국 변호사가 되기 위해 남아있는 길은 독자적으로 개업하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개업하기에는 돈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었지요. 마음으로는 동네 어귀에 부동산중개소처럼 변호사 사무실을 차려놓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용기도 경험도 부족했습니다. 변호사 개업을 하면 의뢰인들에게 직접 돈을 받아가며 살아야 한다는 것도 저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차마 의뢰인들에게 “수임료는 얼마입니다. 사무장에게 내고 가주세요”라고 말할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때 정면으로 도전하지 못하는 저의 태도를 보면, 이 연재물의 제목도 ‘어느 겁 많은 기독인의 초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저런 길이 다 막혀 있다고 느껴지는 답답한 상황에서 저는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은 모두 판사 또는 검사로 임용을 받기 위해 서류 접수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판검사 임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법시험과 사법연수원에서 받은 성적이었습니다. 성적이 가장 좋은 그룹은 판사를 지망했고, 그 다음 그룹은 검사를 지망했습니다. 판사들은 성적에 따라 서울-수원-대전 등의 순서로 발령을 받게 되어 있었고, 검사들 역시 성적에 따라 서울-부산-대구 등의 순서로 발령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판사로 가장 순위가 밀리는 사람들과 서울권의 검사들이 보통 비슷한 성적대를 형성했습니다. 지원을 앞두고는 치열한 눈치작전도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성적 때문에 바로 변호사로 나가야 하는 친구들은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가끔 판검사를 포기하고 대형 로펌을 택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런 그룹은 절대적으로 소수였습니다.


관심 밖으로 생각하고 한 번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았던 저의 연수원 수료성적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게 된 것도 이 때였습니다. 제 성적은 중간을 약간 웃도는 성적으로, 판사를 하려면 지방으로 내려가야 하고, 검사를 하려면 서울 근무가 가능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나마 하나님의 은혜로 합격한 사법시험 성적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유지된 등수였습니다. 대학원을 막 시작했던 아내는 아기를 키우기 위해 1년간 휴학했다가 다시 복학하기 위해 준비중이었습니다. 딸아이를 키워주기로 하신 아버지께서는 판사로 지망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연좌제가 폐지되었다 해도 검찰 쪽은 좀 어려울 거라는 소문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복잡한 선택의 기로에서 저는 일단 검찰에 지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1) 큰외삼촌 문제로 인한 임용 탈락의 가능성이 남아 있었으므로 임용에서 탈락되면 가벼운 마음으로 거리의 변호사를 택하겠다는 생각과 (2) 아내가 미국으로 떠난 이후 저라도 서울에서 딸아이 옆에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결심의 주된 동기였습니다. (3) 군법무관으로 일하는 동안 비리 수사가 번번이 좌절되는 것을 경험하며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었던 ‘제대로 수사 한 번 해 보고 싶다’는 의지가 발동된 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좋게 말하면 ‘제대로 수사 한 번 해 보고 싶다’였지만,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무시당하지 않고 일해보고 싶다’는 편에 가까웠을 겁니다. 제 인생의 여러 선택 중 가장 인간적 동기가 강했던 결정이었습니다.


큰외삼촌 문제를 하나님의 뜻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삼아보겠다는 괘씸한 동기를 가지고 지원한 검사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97년 봄과 여름의 6개월은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선 무엇보다 권력을 가진 국가조직이 운용되는 과정을 내부에서 지켜보는 기회가 되었고, 대전과 의정부의 법조비리 사건이 터지기 직전의 생활화된 부패 관행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 3시간 정도만 자면서 사람을 잡으러 다니기도 했고 덕분에 일 잘하는 검사 소리도 들었습니다. 초임 검사가 좀처럼 하기 어려운 일을 벌여놓고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가장 강력한 수사수단을 활용해 볼 기회도 가져보았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경험하고 느꼈던 많은 것들과 검사직을 사임하게 된 구체적인 이야기는 지면에 담기에 적절치 않은 것 같아 생략합니다. “아내가 미국 유학 중이었고, 딸아이를 키워주시던 부모님께서 너무 연로하셨기 때문에 아내를 돕기 위해 검사직을 그만 두고 미국으로 떠난다”는 것이 저의 공식적인 사임 이유였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만은 적어놓겠습니다. 당시 묵상하고 있던 성경말씀은 열왕기상이었는데, 마침 17장을 읽던 날에 사표를 냈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미국으로 떠나 초기에 많이 고생할 때에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그릿 시냇가의 엘리야 이야기는 우리 부부가 힘과 용기를 되찾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검사를 그만 둘 때에는 참 재미있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제가 사표를 낸 다음날, 검찰청 내의 신우회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제가 사임했다는 것이 알려졌지요. 모임을 마치고 나오는데, 몇 명의 일반직 직원들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평소 안면은 있었지만 이름도 잘 모르던 분들이었습니다. 한 분이 입을 열었습니다. “김 검사님. 참 신기한 일이 있었어요. 신우회에 참석하는 우리 일반직 아줌마들 몇 명이 어제 점심식사를 같이 했거든요. 그런데 ○○○씨가 그 자리에서 전 날 밤의 꿈 이야기를 했어요. 글쎄 김 검사님이 자기 꿈에 나오더라지 뭐예요. 그런데 꿈 속의 김 검사님이 어딘가 멀리 떠나시더래요. 그리고 얼마 후 돌아오시는데 글쎄 세상에서 볼 수 없는, 하늘에서 온 것이 너무나 분명한, 오색 영롱한 음식들을 잔뜩 그릇에 담아서 들고 오시더랍니다. 우리가 어제 그 이야기를 듣고 유부녀가 딴 남자 꿈을 꾸었다면서 한바탕 웃었거든요. 그런데 오늘에야 김 검사님께서 사표 내셨다는 소식을 들었지 뭡니까? 어디 가시든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그 분들은 제가 미국으로 가기 위해 사표를 냈다는 사실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저는 하나님의 장난스러우심에 미소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려운 선택을 하고 우리 나라를 떠나려는 저를 위로할 방법을 억지로 찾아보다, 결국 이런 방법까지 동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그 꿈이 무슨 의미가 있든지 간에 저는 이 자매님의 꿈을 통해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적을 때마다 제가 굉장히 이상한 신비주의자로 비칠까봐 조심스럽습니다만, 저도 가벼운 마음으로 적은 것이니 읽는 분들도 가볍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어쨌든 검사직 선택과 그 사임을 경험하면서 저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동기로 선택한 직업이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직업을 통해 여전히 우리에게 복 주려 하신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진로를 선택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 또는 두 개의 선택 가능성을 놓고 갈등합니다.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서면 괜히 한 쪽은 하나님의 뜻인 것 같고, 다른 쪽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선택을 하면 한없는 복을 받을 것 같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로 점철된 좌절의 인생을 살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도원을 찾아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길은 ‘오직 하나’일 것이므로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어 보지만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이 정도 되면 표적을 구하게도 되지요. 제가 “하나님, 큰외삼촌 때문에 검사 임용이 안 될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검사에 임용된다면 그게 하나님의 뜻인 줄 알겠습니다. 만약 임용이 안 된다면 거리의 변호사로 나서겠습니다”라고 기도한 것이 그 예입니다. 이런 때는 사사기 6장에 나오는 기드온 이야기가 많이 인용됩니다. 기드온의 경우처럼 표적을 구하는 이에게 하나님께서는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저는 검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에서 2년 동안 아기를 키우면서 새로운 깨달음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머물며 인터넷을 통해 우리 신문들을 읽어볼 때마다, 저는 저와 함께 검찰청에서 근무하던 검사들이 유난히 잘 나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검사장 승진이 좌절되어 실의에 차 있던 지청장은 정권교체로 인해 청와대에 입성하여 상종가를 치고 있었고, 직속상관이던 부장 검사와 다른 동료검사들도 검찰 내 꽃 보직들을 찾아가며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저는 ‘하나님께서는 내가 검사를 택했든, 변호사를 택했든 양쪽 길 모두에 복 주실 작정을 하고 계셨을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검사로 남았다면 검사로서 잘 커가도록 모든 준비를 해 놓으셨고, 검사를 그만 두고 집에서 애를 키우는 동안에는 또 그걸 통해 성장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해 놓으셨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로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 직업이냐 저 직업이냐가 아니라 ‘오직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내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삶을 사는 것’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법률가로서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간에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찾은 것이 됩니다. 반면에 제가 이 말씀에 반하여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아무리 좋은 직업을 선택했다 해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런 새로운 발견은 저에게 큰 자유를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근거 없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국 검사직 선택 여부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복 주실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그것이 선한 동기에 기초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아마도 검사직 선택보다, 그걸 그만두는 쪽이 동기 면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했던 것 같습니다. 너무 범위가 적은 결단이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아내와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더 이상 악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검사를 그만 두었고, 하나님께서 그런 작은 헌신도 선하게 보셨던 것 같습니다. 검사를 그만둔 이후, 저는 보다 모험적인 인생에 뛰어들어 삶을 즐기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저 감사드리는 것 말고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지요.


진 로선택을 눈앞에 두고, 이 길인지 저 길인지 고민중인 분들에게 저의 이야기가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길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헌신하기를 바라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우리 자신을 내어주기를 원하시지만, 우리에게 그런 헌신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헌신의 길에 나설 때까지 충분히 기다릴 줄 아는 분이십니다. ‘이 길에도, 저 길에도’ 모두 복 내릴 준비를 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걸 알고 나면, 진로선택은 고민과 고통의 시간이 아니라 즐거운 축제의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2002년 9월부터 월간지 <복음과 상황>과 eKOSTA가 기사 제휴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역사와 사회를 조명하는” 복음주의 정론지 <복음과 상황>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복음과 상황> 홈페이지 (http://www.goscon.co.kr) 나 이메일 goscon@chollian.net 로하시기 바랍니다.


[김두식] 사법시험 이야기

어느 젊은 기독인의 초상


사법시험 이야기


얼마 전 <다니엘 학습법> 열풍을 비판하는 글이 <뉴스앤조이>에 올라왔습니다. 서울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김동환 전도사님의 책이 이처럼 큰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 자체가 결국 한국 기독교의 상향성 또는 업적주의를 보여주는 것 아니냐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도 기독교 서점을 갈 때마다 베스트셀러 분야를 장식하고 있는 그 책을 보았지만, 제가 다시 대학에 진학해야 하는 형편이 아니기 때문에(?) 사서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뉴스앤조이>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다니엘 학습법>의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는 “완벽한 프로그램 하에 10분 단위까지 계산해 가며 학창생활을 하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김동환 전도사님과는 달리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어디에서도 완벽한 프로그램 아래 10분 단위로 계산하며 살지 못했던 저는, 시험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주 많이 당황스럽습니다. 세속적으로 표현하자면 시험 때마다 운이 좋은 편이었고, 기독교적 표현을 빌자면 시험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 저에게 언제나 특별한 은혜를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다 알고 계신 것처럼, 예수 믿는다고 모두 서울대를 나와, 성공한 벤처 기업가, 판사, 검사, 의사, 교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무슨 요술 방망이가 아니니까요. 예수만 믿으면 마음에 드는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선전하는 교회 지도자가 있다면 교회를 때려치우고 차라리 입시학원을 열어야 할 겁니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고시에 합격하고 좋은 직장을 잡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진짜로 의미 있는 은혜란 나 같은 죄인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실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 세속적 성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전제 위에서 저의 부끄러운 고시 합격 이야기를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식의 글은 아무리 조심해도 결국 자기 자랑이 되기 쉽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법시험이 제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까닭에 그냥 빼먹고 넘어갈 수가 없네요.


1989년과 1990년은 저에게 여러 모로 절망적인 시기였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변호사가 되겠다고 준비를 시작했던 사법시험은 대학을 졸업하도록 1차에도 붙지 못했습니다. 특히 4학년 때(1989년) 도전했던 시험에서는 총 320문제 중 단 1개 차이로 실패의 쓴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저에게 등을 돌린 것 같은 느낌, 시험에 떨어져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차가운 벌판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그 추운 느낌을 알고 있을 겁니다. 모두들 “저 자식은 별 능력도 없는 것이 사법시험을 하겠다고 폼을 잡는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떨어지는 것을 보니 돌대가리가 틀림없어”라고 손가락질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법시험 한답시고 대학 4년 동안 외국어 공부라고는 해 본 적이 없으니, 고시 떨어지면 회사 취직도 어려울 것이 뻔했습니다. “내년에는 꼭 붙을 것”이라는 주변의 위로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시험에 떨어져본 경험은 그것이 대학입시이든 사법시험이든 입사시험이든지 간에 인간을 성숙시키는 좋은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군대 연기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무지막지한 공부를 몇 년이고 계속할 마음이 없었던 저는, 졸업 직후의 1차 시험에도 떨어지면 그냥 고시를 집어치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하면 혹시 1차 시험에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응시하게 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그 불씨를 아예 제거하기 위해 대학원을 포기하기로 한 것입니다(대학원에 진학하지 않으면 졸업 후의 1차 불합격과 동시에 군에 입대해야 했습니다). 제 인생에 가끔씩 써먹던 ‘벼랑 끝 전술’을 이때도 한 번 구사해 본 것이었습니다. 다행히도 1990년 6월, 1차 시험에 합격했고, 1년 동안 입영을 연기할 수 있었습니다.


1차에 합격하고 막 2차 준비를 시작할 무렵, 오랫동안 사귀어오던 여자친구가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이성교제가 절단 나는 것 역시 성숙의 좋은 계기가 되지요. 요즘처럼 먹고사는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실연의 문제는 남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본인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유명한 영화 “유로파 유로파(Europa Europa, 1991년 칸느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습니다)”의 원작이 된 솔로몬 페렐(Solomon Perel)의 자서전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유태인임을 숨긴 채 소련의 소년단, 독일군 통역관, 히틀러유겐트(히틀러 소년단) 등을 두루 거친 뒤 고향으로 돌아온 솔로몬이 전해 듣게 되는 한 친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의 체스 친구였던 예르지크는 독일 점령하의 게토(유태인 집단거주지)에서 유태 공산당 지도자로 영웅적 투쟁을 벌인 끝에 소련군에 의한 해방을 맞이합니다. 예르지크가 나치 하의 게토에서 겪은 고통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수용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은 그의 생명력은 그가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를 보여주지요. 그런데 유태인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그는 한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고 그 아가씨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자,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져 자살로 삶을 마감합니다. 어찌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나치 하에서 영웅적인 투쟁을 벌인 끝에 생존한 사람이 겨우 여자 문제로 자살을 하다니요. 그러나 그럴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실연은 젊은이들에게 그만큼 심각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실연을 통해 인간은 성숙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힐 수 있는 것이지요. 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실연을 통해 인간적으로 많이 성숙한 건 감사한 일이었지만, 두 달 정도를 책 한 권 읽을 수 없는 공황상태 속에서 허송하게 되었거든요. 그러고 나니 어느새 겨울의 문턱이었고 2차 시험은 8개월 앞으로 다가와 있었습니다.


겨울바람과 함께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공부를 시작했으나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저의 인생에 그 때만큼 열심히 공부한 때도 없었을 겁니다. 12월호에 잠깐 이야기했었지요? 1986년 여름 UBF에서 예수님을 만났다가 가을에 그 분과 이별한 친구가 있다구요. 바로 그 친구와 함께 고려대 대학원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 그저 하루 종일 교과서를 읽고 밑줄치고 이해하고 외우고, 또 읽고 또 밑줄치고 외우는, 그런 단조로운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남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고, 같이 2차 시험을 준비하던 동료들과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모의시험을 쳐보아도 결과는 늘 꼴찌였습니다. 스터디 그룹 모임시간에도 워낙 아는 것이 없어 언제나 멍청하게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가끔 논쟁에 끼어 들어봐야 결론은 늘 제가 틀렸다는 쪽으로 났습니다. 남들이 잘 안보는 교수님들의 교과서만을 택해 공부한 탓에(남들이 좋다고 추천하는 교과서들은 도대체 저의 체질에 맞지 않았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늘 남들과 달랐고, 그렇다고 저의 논리로 남들을 설득할 실력도 없었습니다.


시험이 한 달쯤 앞으로 다가왔을 때부터는 모두들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포기하는 친구들도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즈음(1991년 6월 중순), 옆자리에서 공부하던 친구가 저에게 행정법에 대한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너 혹시 이 문제에 대해 설명 좀 해 줄 수 있냐?” 그런데 그 때가 시험을 겨우 보름 앞둔 시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저의 머리 속에는 친구가 질문한 문제와 관련된 지식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공부량의 절대부족을 절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미안하다. 전혀 모르겠다. 그게 도대체 뭐냐? 나는 그 용어도 모르겠는데…”라고 제가 대답하자 친구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이거 이번에 나올 가능성이 높은 아주 중요한 거야. 그런데 아직도 이걸 모르면 어떻게 하냐? 집에 가서 책 좀 찾아보고 내일 같이 이야기해 보자”고 말했습니다. 저의 부족함을 보충해 주려는 고마운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시험 보름을 앞두고도 처음 들어보는 법률용어가 있다는 사실에 저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8개월 최선을 다했지만, 역시 절대적인 공부량의 부족은 어쩔 수가 없구나. 어차피 떨어질 시험인데 이쯤해서 그만 두자. 내 실력으로는 사법시험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그 대화가 오간 직후,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가방을 쌌습니다. 그냥 집으로 가서 쉬고 싶었습니다. 시험을 눈앞에 두고 한나절이 천금같던 시기였습니다. 저의 심상찮은 변화를 눈치 챈 친구는 “야, 공부 좀 더하다 가. 너 왜 그러냐?”하면서 저를 붙잡았으나 저의 머리 속에는 정말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오늘은 집에서 쉬려고.” 가방을 들고 도서관을 나와 학교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아름다운 교정이었습니다. 봄을 보내고 여름을 맞이하고 있던 교정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석조건물들과 만발한 꽃들의 조화로 한 폭의 그림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저에게는 어울리는 않는 낯선 그림들이었습니다. 집을 향해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서울역 앞 고가도로를 지날 때부터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왕 사법시험은 틀린 거고…. 빨리 군대를 가야겠다. 일단 군대를 가고 나면 결국 법조계와는 완전히 안녕이지만 어쩌겠나, 처음부터 내 길이 아니었던 것을.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공연한 욕심을 부렸나 보다. 실력이 없는 거야 어쩔 수 없지…’


줄줄 흐르는 눈물을 애써 감추며 제1한강교를 지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소리를 정확히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한데 그렇다고 내가 내는 것은 아닌 소리, 소리라기보다는 오히려 영상에 가까운 것 같은 느낌, 어쨌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마음의 소리였습니다. 저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네가 믿고 있는 것은 너 자신이냐? 아니면 나냐?”


그 순간 저는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 내가 그동안 예수 믿는다고 떠들고 다녔는데, 과연 내가 믿고 의지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서 내가 지금 절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차피 나 혼자 힘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아니다. 그리고 이까짓 시험 안 붙는다고 내 인생이 망하는 것도 아니다. 내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그 깨달음을 얻는 순간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 날 밤은 집에 가서 여전히 마음속에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던 그 소리를 깊이 묵상했고, 다음날부터는 다시 학교에 나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안정된 상태에서 시험 전날까지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 음성은 이후에도 제가 불가능한 일에 부딪힐 때마다 마치 중요한 삶의 원칙처럼 저를 일깨우는 기억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사법시험 2차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렇습니다. 2차 시험은 논술식으로 하루에 두 과목씩 총 여덟 과목을 평가합니다. 한 과목당 50점짜리 큰 문제가 하나, 25점짜리 작은 문제가 두 개 출제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니, 모두 합하면 약 24문제가 되는 셈이었지요. 각 과목 100점이 만점이지만, 평균으로 보아 65점 정도만 되면 수석을 할 수 있고, 55점 정도만 되면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사법시험 2차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보다도 공부해야 할 범위가 엄청나게 넓다는 데 있습니다. 민법 한 과목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가장 기본적인 교과서들만 해도 모두 합치면 3,000페이지가 넘습니다. 교과서들의 내용도 날로 깊이를 더하고 있어서 하루가 다르게 두꺼워지고 있습니다. 워낙 책이 두껍다 보니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쯤이면 처음 읽었던 부분은 모두 잊어버리게 되지요. 그래서 고시공부를 흔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 표현합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엄청난 범위 중에서 실제로 시험에 출제되는 것은 겨우 30-40페이지에 불과하다는데 있지요. 인간의 머리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엄청난 범위를 다 외울 수는 없고, 어차피 이해하고 잘 정리하고 최소한의 것만을 암기해야 하는데, 하필 자기가 간과한 부분에서 문제가 나오면 실패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법시험은 이른바 ‘운’도 많이 작용하는 시험입니다. 물론 공부를 전혀 안 한 사람이 시험에 붙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상당한 준비를 마친 사람 중에서 누가 과연 그 좁은 관문을 통과하느냐를 결정하는 데는 운도 많이 작용한다는 의미이지요.


여덟 과목 중 제가 가장 자신 있어 한 것은 형법이었습니다. 법대기독학생회 지도교수로 모시며 많은 영향을 받았던 김일수 교수님의 전공이 형법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형법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었지요. 그 다음으로는 헌법이 자신 있었고, 아마 그 다음이 민법 정도 되었을 겁니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저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2차 시험 공부할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고, 그 결과 2차 시험에만 포함되어 있는 행정법,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등의 과목은 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은 횟수가 3회 정도밖에 안되었습니다. 가장 자신 없는 과목은 민사소송법이었습니다. 시험 마지막까지도 저는 도대체 민사소송법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시험 보름 전에 저를 절망시켰던 행정법도 비슷했습니다.


1991년 7월 마침내 시험 날이 되었습니다. 사법시험 2차 시험 현장의 모습은 조선시대 과거장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시험장에 들어가면 둘둘 말린 전지가 한 장 칠판에 붙어있고 그 속에 시험문제가 적혀 있습니다. 시험 시작종이 울리는 순간, 말려있던 종이가 쫙 펼쳐지고, 그 때부터 2시간동안 거기 적혀 있는 논제들을 정신없이 적어나가면 됩니다. 말려있던 종이가 펼쳐지기 전까지는 피 말리는 긴장감이 교실에 넘쳐나고 종이가 펼쳐지는 순간 교실에는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 “됐어”라고 자신 있게 소리치는 학생도 있고(이상하게도 이런 학생들 중에 낙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너무 좋아하다가 논점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 까닭입니다), 자기가 준비하지 않은 엉뚱한 논제에 넋을 잃는 수험생도 있습니다. 그 때의 긴장은 정말 인생에서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2차 시험 응시 첫날, 국민윤리나 헌법은 누구나 다 아는 평범한 주제가 나왔기 때문에 특별히 잘 쓰는 사람도 없고 못쓰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첫날 시험을 끝내고 출발은 그런 대로 괜찮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그래도 둘째 날과 셋째 날 과목들이 모두 자신 없는 것들뿐이라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들은 둘째 날 시험부터 일어났습니다. 행정법부터 시작해서 두루마리가 펼쳐지는 순간마다 저는 저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신기할 정도로 제가 시험 직전에 마지막으로 점검한 부분에서 문제들이 출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민사소송법은 제가 시험 준비기간 동안에 한번도 제대로 이해해 본 적이 없는 부분에서 큰 문제가 출제되었는데, 그것도 역시 시험 바로 직전에 제가 화장실에서 읽고 들어간 내용이었습니다. 아마 시험 직전에 읽지 않았더라면, 두 페이지도 제대로 적지 못했을 문제였습니다(보통 큰 문제는 여덟 페이지 정도 적어야 합니다). 나중에 들으니 아버지께서 매일 시험시작 30분전에 학교 교장실 문을 걸어 잠근 채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제가 다른 것은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우리 아들이 지금 보고 있는 바로 그 부분이 시험에 나오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다운 순진한 기도였고, 저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 ‘큰 문제는 직전에 본 것’이, ‘작은 문제는 원래 잘 아는 것’이 나오다 보니, 셋째 날 시험이 끝나고 난 후에는 합격을 자신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의 형법은 제가 가장 자신 있어 하던 과목이었고, 형사소송법도 다른 과목들에 비해서 위험부담이 적은 과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시험이 저의 힘으로 붙게 된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하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날의 형법은 예상했던 것과 여러 모로 달랐습니다. 문제 뜬 것을 보고 자신만만하게 답안지를 채운 다음 여유 있게 시험장을 나섰습니다만, 쉬는 시간에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제가 논점을 완전히 잘못 잡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정작 적어야할 논점에 대해서는 한 줄도 적지 못했던 것이지요. ‘오, 하나님, 저를 이렇게 실패하게 만드실 거라면 어제까지는 왜 그렇게 저를 도와 주셨습니까’라는 한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사법시험에는 과락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단 한 과목이라도 40점 이하의 점수가 나오면 무조건 떨어지게 되어 있답니다. 따라서 나머지 일곱 과목을 아무리 잘 쳤다 하더라도 형법 한 과목이 40점 밑으로 나오면 설사 나머지 점수를 합산한 것이 수석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그냥 떨어지는 것입니다. 오후의 마지막 형사소송법 시험을 뭘 적었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때우고 나서 시험장을 터벅터벅 걸어 나오자니 제 입에서는 한숨만 흘러나왔습니다.


바로 그 때, 저는 다시 한번 저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지난 번 것보다 한결 간단했습니다.


“너는 내 것이라.”


마치 선언과 같은 짤막한 문장이었습니다. 언젠가 들어보았으나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음성이었습니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감격이 몰려왔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왜 이렇게 이런 소리가 자주 들리나. 혹시 내가 마음속으로 혼자 상상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의심도 생겼지요.


그런데 그 날 밤에는 더 재미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사법시험 끝나는 날이 금요일이었기에, 저는 감사 기도를 드리러 교회 철야기도 모임에 나갔습니다. 나흘 동안 거의 한 잠도 자지 못했기 때문에 거의 제 정신이 아닌 상태였는데 어떻게 철야기도 나갈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신기합니다. 어쨌든 그 날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서니, 부목사님께서 막 설교를 시작하시는 중이었습니다. 본문은 이사야 43장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의심 많은 저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설교 내용은 잘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너는 내 것이라”라는 말씀에서만 눈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낮에 들었던 것과 똑같은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이 신기한 현상을 그저 우연이라 생각할 수도 있고, 고시 공부라고 하는 비정상적인 관문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이상심리라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날 들은 음성이 하나님의 것이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강원도 홍천의 예수전도단 전도학교에 이어 또 한 번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철야기도 이후 저는 이사야 43장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의 배경은 물론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국가를 향한 것이었지만, 저에게는 ‘물 가운데로, 불 가운데로’라는 말씀이 더하고 뺄 것 없이 제 인생을 향한 위로의 말씀이라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제 글을 읽어 오신 분이라면 제 삶에 영향을 준 몇 가지 사건들이 하필 물이나 불과 관련되어 있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시험 발표까지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은 학교에서 예수전도단 신입생 후배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그 후배들이 “결과가 어찌될 것 같으세요?”라고 물어보면 “붙으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고, 떨어지면 실력 없어 떨어진 것이니 별로 걱정 안 해”라고 담담하게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시험 붙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어차피 이미 하나님의 것이 된 사람인데 그까짓 시험에 떨어진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하는 배짱도 있었기 때문에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함께 성경공부를 했던 신입생 가운데 고환경, 권대식 두 후배는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로펌에서 일하고 있고, 윤유덕은 보험회사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런 저를 옆에서 지켜보던 1년 후배 류기인은 벌써 몇 년째 검사로 일하고 있지요. 선교단체 출신들 치고는 비교적 특이한 길을 걷는 무리들이 생기게 된 셈입니다.


그 해 가을 사법시험 합격자 명단에는 제 이름이 있었습니다. 성적도 아주 우수한 편에 속했습니다. 실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결과였습니다. 각 과목의 성적은 그 좋은 결과가 제 실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제가 가장 자신 없어하던 과목부터 시작해서 평소실력과는 완전히 역순으로 점수가 나왔던 것입니다. 가장 자신 없던 민사소송법과 행정법에서는 70점이 넘는 경이로운 점수를 얻었고, 가장 자신 있어 하던 형법은 47점으로 간신히 과락을 넘겼습니다. 형법 과락자가 너무 많아 형법 점수를 전체적으로 10점씩 올려주었다는 뒷이야기가 수험가 주변에 흘러나온 것을 보면 원래 저의 점수는 37점으로 과락에 해당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 시험결과 앞에서 정말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4학년 때 아까운 점수로 1차에 실패하도록 내버려두신 하나님의 사랑도 뒤늦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4학년 때 1차에 실패했기 때문에 그 해 가을 동안 헌법, 민법, 형법의 기초를 충실히 다질 수 있었고, 덕분에 2차 수험기간이 너무나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했던 것입니다(참고로 4학년 때 1차에 합격했던 저의 동기들은 다음해 모두 2차 시험에 낙방했습니다. 그해 1차에 합격했더라면 저도 아마 그 대열에 동참했을 겁니다)


저는 그런 기적적인 과정을 통해 사법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다니니까, “실력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돌아다니면 어떻게 하냐? 변호사 영업에 지장 있잖아”라고 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실인 것을 어쩌겠습니까? 제 인생에는 그보다 더 큰 기적도 많았지만, 오늘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사법시험 이야기를 한 번 해 보았습니다. 물론 저의 글을 읽고 하나님이 그저 기도하면 시험이나 붙게 해 주는 그런 분으로 오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할 수 있는 분이신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제가 느낀 점 몇 가지를 나눠보겠습니다.


첫째는 ‘은혜’에 관한 것입니다.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저는, 그 메시지에 알게 모르게 담겨 있는 인과응보의 논리에 놀랄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의 믿음도 하나님 앞의 어떤 ‘행위’로 해석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이 있어야 축복이 뒤따른다는 논리가 그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은혜는 그 누구의 행위보다 앞선 것이며 거기에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무리 믿음으로 부르심에 순종했다 해도, 그 순종보다 앞선 것이 부르심과 은혜였습니다. 부르심이 시작되었을 때 이미 축복은 시작된 것이고, 왜 하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건 그저 은혜일뿐입니다. 저는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는 원래 그런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저에게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왜 여러분에게도 그런 음성을 들려주고 계신지 설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왜 나를 부르시고 복 주시면서, 내 친구에게 그런 은혜를 부어주시지 않는지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걸 자꾸 설명하려고 하고, 그건 “김두식에게 이러저러한 믿음과 선행과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라 해석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엇나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저런 은혜를 부어주신 것은 결코 제가 남보다 하나님을 잘 믿었거나 정직하거나 신실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먼저 저를 사랑하셨고, 제 필요를 아셨고, 그걸 채워주신 것일 뿐, 제 쪽에서 원인을 찾을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둘째로, 어떤 시험이든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력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당사자조차도 자신의 실력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거대해 보이는 시험 앞에 지레 겁을 먹고 시험장에 가기도 전에 싸움을 포기합니다. 저도 아마 시험 보름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분명히 시험을 포기했을 겁니다. 시험을 포기하고자 하는 기독인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웃기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아무리 여러분이 지금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 부분에서 문제가 안 나오면 그만’이라는 사실입니다. 시험을 준비하다보면 왠지 내가 잘 모르는 그 부분에서만 문제가 나올 것처럼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확률적으로도 그건 진실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되,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전 날의 기도를 잊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시험 합격 전 날 저는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판검사, 변호사 아무 것도 안 해도 좋으니, 제발 시험만 붙게 해 주세요. 고시 공부하는 동안 저의 인생은 마치 벌레와도 같았습니다. 이제 인간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니 시험 좀 붙게 해 주세요. 하나님께서 만약 저를 시험에 붙여주신다면 저는 앞으로 평생 동안, 저하고 함께 시험을 쳤지만 합격하지 못한 다른 친구들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만큼의 평균적 부와 명예만을 누리며 살겠습니다. 시험에 붙더라도 마치 시험에 붙지 않은 것과 같은 마음자세로 살겠습니다.” 이런 기도를 올리게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시험에 붙게 되더라도 어차피 제 실력이 아닌 순전한 은혜로 붙게 된 것일 텐데, 그 추가적 열매를 제가 다 누리고 사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제가 잊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은 이 결심 하나였습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둘 때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았지만, 저는 그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노력으로 얻은 열매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제가 그 결심을 지킬 수 있도록 잘 인도해 주신 것 같습니다. 최소한 경제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대학 동창들 중 사법시험에 실패해서 다른 직장에 진출한 사람들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저보다 많은 수입을 올리며 살고 있으니까요.^^


사실 살아오는 동안 누구나 한 번쯤은 ‘그 전 날’의 경험을 갖기 마련입니다. 대학 합격자 발표 전 날, 입사시험 합격자 발표 전 날, 사랑을 고백하기 전 날, 중병 진단 결과를 알기 전 날 등등. 그 때마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저런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과를 알게 되어 환호성을 지르게 되지요. 동시에 ‘그 전 날’의 결심들은 눈 녹듯이 잊어버리게 마련입니다. 일단 하나의 관문을 뛰어넘고 나면 그 모든 것이 다 자기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착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장 법조계라는 하나의 분야를 생각해 봐도 그렇습니다. 법조계에 진출한 사람들 모두, 아니 기독교인으로 법조계에 진출한 사람들만이라도 ‘그 전 날’의 기도와 결심을 잊지 않았다면 우리 법조계가 이렇게 이상한 모습이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렵지만 ‘그 전 날’의 기도와 결심을 잊지 않는 게 저나 여러분들이 행복을 누리며 사는 지름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기 껏 시험 하나에 합격한 이야기를 너무 길게 적었군요. 미숙한 제가 누려온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작은 경험이, 지금 절망 가운데 있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긴 제 부족한 글 솜씨를 생각하면, 제 글을 읽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이나 안 생기면, 그 자체로 은혜겠지만 말이지요.


(*편집자 주) 2002년 9월부터 월간지 <복음과 상황>과 eKOSTA가 기사 제휴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역사와 사회를 조명하는” 복음주의 정론지 <복음과 상황>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복음과 상황> 홈페이지 (http://www.goscon.co.kr) 나 이메일 goscon@chollian.net 로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