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명이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하다는 것! 그것이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당신은 진심으로 그렇다고 믿고 있는가? 생명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돈 때문에 부모가 자식에게 총을 쏘아 죽이고 강물에 던져 죽이는 이 기막힌 세상에서 어떻게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가? 한 쪽에서는 OECD 가입국임을 내세우며 기독교의 기형적(?) 급성장으로 세계적인 초대형교회가 즐비하고 세계선교의 중심국가가 되었다고 자랑하는 나라가, 다른 한쪽에서는 교통사고 사망률 세계 1위, 세계적인 낙태 왕국, 고아 수출국으로 오명을 떨치며 생명가치를 우습게 만드는 아이러니가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온 우주와 한 생명…… 과연 어느 것의 가치가 더 큰 것인가? 광대무변한 엄청난 우주 속에 한 점 티끌만도 못한 지구라는 작은 별 안의 한 귀퉁이에 살고 있는 ‘나’ 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은 것인지… 그와 같은 상념 속에 빠져들게 되면 한 생명이란 정말 보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20세기 우주론의 가장 큰 논쟁거리 중 하나였던 대폭발 이론(Big Bang theory)과 정상상태 가설(Steady State Theory) 사이의 치열한 공방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을 대표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대폭발 이론은 물질(物質)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自然)”이 아니라 시공간의 시작과 더불어 “창조(創造)”된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대폭발 이론이 우주의 시작점이 존재한다는 가정 속에서 성서적 창조(創造)에 대한 단서와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면, 정상상태 이론은 우주가 영원 전부터 아무런 이유 없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자연적 입장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끝없이 순환하는 영겁의 시간 속에서 정상상태로 그저 존재해 왔다고 생각하는 우주에 대한 자연적 개념을 송두리째 뒤흔들며 등장한 것이 대폭발이론이다. 그 효시는 1929년 허블(Edwin P. Hubble)이 천체망원경으로 행성간의 적색편이 (赤色偏移)(1) 현상을 발견함으로써 제기된 우주 팽창설에서 찾을 수 있다. 대폭발이론은 그 후 1940년 가모프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기되어 우주가 시간과 공간도 없는 절대 무(無)의 한 점에서 마치 폭발하듯이 엄청난 에너지로 팽창하며 물질을 생성시켰다는 가설을 함축하게 된다. 이 논쟁은 1965년 미국의 전파 기술자 펜지아스와 윌슨이 우연히 발견한 우주배경 복사선(2)에 의해 대폭발이론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되며 두 사람은 엉겁결에 노벨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는다.


우주(즉 시간, 공간, 물질)가 시작되었다는 생각은 광대무변하다고 생각되어온 고전적인 우주관에 여러 가지 혼란을 안겨준다. 시공의 시작과 팽창, 그 안에 흩어져 있는 행성들 사이의 끝없이 멀어지는 간격들, 빛의 속도로 팽창하는 우주의 끝, 그리고 그 경계, 우주의 크기, 우주의 나이 등등 이상한 생각들이 끝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대폭발이론에 근거하여 현재 모든 행성간에 멀어지고 있는 속도를 역산하여 계산한 우주의 최대 나이는 200억 년으로 추정되고 있고, 우주의 크기는 200억 광년이며 그에 따른 우주의 크기는 2,000조 Km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 무려 1,000억 개의 은하와 각 은하마다 다시 1,000억 개의 별들이 존재한다고 우주 천문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1022 개의 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은 숫자이다. 그래서 자고로 도무지 셀 수 없이 많은 숫자를 가리킬 때 밤하늘의 별보다 많다고 표현하곤 했다.


그러나 상대론의 세계는 우리들이 지닌 절대적 우주에 대한 고정관념이 많은 착각과 오해를 지닌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빛이 있으라” 하는 그 말씀의 선포와 함께 섬광과 같이 터져 나와 빛의 속도로 퍼져가던 태초의 신비 속으로 접근해 가면, 시간은 정지하고 공간은 한 점으로 축소되며 물질은 무한의 에너지로 변하게 된다. 도대체 그 상황 속에서 시간의 길고 짧음(長短)이나 공간의 크고 작음(大小)이나 물질의 많고 적음(多少)이 무슨 의미를 지니게 되는가?


우리는 착각하고 있다. 우리 손에 쥘 수 있는 흑연 한 덩어리 12g 속에 온 우주의 별의 숫자보다도 더 많은 6.02×1023개의 원자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 하나의 원자 속에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소우주가 존재하고 있다. 큰 빌딩을 짓는 설계도면 보다 최신의 반도체 칩 안에 숨어있는 고도의 지식과 설계가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것임을 생각한다면, 생명이 없는 무생물적 거대 우주를 만드는 설계보다도 한 생명을 만드는 설계의 지식이 훨씬 더 복잡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절대 가치는 우리 인간의 눈에 비치는 물리적 크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의 가치는 같은 피조물인 인간의 판단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창조주의 지식과 지혜에 의해 결정된다. 자연과학과 신앙의 세계는 모두 경이(wonder)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 아인슈타인의 말은 자연의 신비로움 앞에 절대자의 존재를 느끼며 겸손할 수밖에 없는 대과학자의 진실한 고백이었다.


하나님의 저울에 온 우주와 한 생명을 달아 비교해 보면, 우리 인간의 눈에는 거대해 보이는 우주도 한 생명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는 도무지 못 미치는 왜소하고 가벼운 것임을 알게 된다.


* 물질의 가치에 대하여 성경은 긍정적으로 말한다. 영적인 세계만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영지주의자나 불교도처럼 물질을 악하다고 반대하거나 물질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여 무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오직 물질이 곧 존재 그 자체라고 생각하며 우상시하는 유물론자처럼 물질을 과대평가하지도 않는다. 성경은 물질에 대하여 균형 잡힌 시각으로 가르치고 있다. 물질은 반드시 있어야하는 것이기에 물질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경제 원리를 신구약 성경이 모두 다루고 있다. 물질 역시 선하신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기에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물질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셔서 아름답게 사용하도록 허락하신 것이기에 그 존재 목적 자체가 선한 것이고 또 그 안에 합당한 가치가 담겨있다. 단지 타락한 인간이 피조물인 물질을 마치 하나님처럼 숭배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뿐이다.


물질 가치를 우상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물질 의존 심리가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 물질이 그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기에 물질이 없으면 존재의 불안감에 휩싸인다. 물질이 곧 구원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돈이 하나님이요 예금 통장이 곧 구세주요 그 속에 들어있는 잔고의 높낮이가 바로 충만함과 능력을 가져다주는 성령에 해당한다. 통장의 잔고가 늘어나면 그들은 안심한다. 그러나 통장이 가벼워질수록 그들은 존재의 위협을 느낀다. 모든 일상사가 카드결재에 의해 진행되고 속속 현금이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현대인에게 은행 잔고에 의해 심리적 안정감이 좌우되는 이 증상(banking balance symptom)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크리스천들에게도 이 증상은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입으로는 예수를 주(主)로 인정하고 또 “주님 사랑해요…”를 목놓아 외치며 찬양할 지라도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참 주인은 여전히 물질에 불과하다. 물질의 노예로 전락한 현대인들…


예수는 자신을 따르던 배고픈 무리들을 불쌍히 여겨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그들을 먹인다. 오병이어에는 단순한 육신의 떡을 공급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 기적의 이면에는 물질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창조주의 신성을 나타냄으로서 물질의 노예로 살아가는 백성들을 구속(救贖)하여 해방시키고자 하는 메시아적 소망이 있었다. 과연 오병이어의 기적은 로마의 압제와 굶주림 속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메시아의 소망을 다시 일깨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은 이 사람이야말로 자신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줄 경제적 메시아로 로마의 통치로부터 조국을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하게 된다. 그들이 곧바로 취한 행동은 예수를 잡아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것을 단호히 거절하고 몸을 피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본심이 오병이어의 기적 속에 나타난 표적으로서의 참 메시아로서 예수를 발견하고 깨달은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떡의 속박(束縛)에서 벗어난 자들에게 나타나는 자유함과 하나님을 진정 경배하고 찬양하고자하는 예배자의 마음보다는 오히려 예수를 언제든지 자신의 배를 채워줄 수 있는 은행 통장이나 현금지급기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물질 우상 숭배의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어제 먹은 떡을 상기하며 또 다시 예수를 찾아 나선 무리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 마침내 반대편 가버나움에서 예수와 제자들을 만난다. 반갑게 달려오는 그 무리들을 향해 예수는 단호한 어조로 질책하며 말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한복음 6장 26절)”


현대의 기독교가 물질주의 우상 숭배에 빠지면서 예수를 자신이 원하는 축복을 가져다주는 도깨비 방망이 정도로 전락시키는 기복신앙이 얼마나 팽배해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 질책은 주식과 부동산 시세를 따라 표류하는 오늘날의 표면적 크리스천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이다. 그 당시 갈릴리 호숫가의 유대 백성들처럼, 곤고한 일상의 삶 속에서 물질을 찾아 건강을 찾아 더 나은 행복을 찾아 예수를 향해 몰려드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진정 찾아 헤매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은 예수를 통해 메시아의 표적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떡 한 조각의 꿈을 꾸고 있는가?


예수는 그들을 향해 도전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한복음 6장 27절)” 네 육신을 위한 일, 썩어질 것들을 위한 일을 위해 쫓아다니지 말고 영원한 것을 위해 일하라는 것이다. 뜻밖의 질책에 당황한 무리들은 예수를 향해 반문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말하는 썩지 않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쩌면 스스로 열심 있다고 자부하는 오늘날의 크리스천에게도 동일하게 떠오르는 질문일 수 있다. 내 일상적인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 일만을 하는 전담 사역자로 나가는 것입니까? 선교지로 내 삶의 거처를 옮기는 것입니까? 구제 사업을 위한 큰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는 다시 한번 그들에게 파격적인 대답을 던진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 6:29)” 그 어떤 일보다 앞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내신 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자신을 믿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일은 그 후에 따라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생명의 떡(the bread of life)으로서 소개한다. 하늘에서 내린 참 떡 예수… 세상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온 떡 예수… 그리고 자신을 먹으라고 말한다. 참 생명의 떡 예수를 먹으라는 것이다.


물질가치가 생명가치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 김동호 목사의 설교는 논리적 설득력을 지니면서도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단순 명료함을 지닌 것이 특징이다. 그 점에서 한국 교회가 자랑할 만한 탁월한 설교가 중 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가치관(value system)의 전환에 대해 그가 설교한 내용 중 특히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다. 작은 가치에 묶여 있는 사람은 더 큰 가치를 깨달아 소유할 때에야 비로소 작은 것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백 원짜리 동전을 꼭 쥐고 안 놓으려는 어린아이는 아무리 만 원짜리 지폐를 주고 바꾸려 해도 그 손을 펼치지 않는다. 그가 백 원을 버릴 수 있기 위해서는 만원의 가치를 먼저 깨달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30, 40대 명예퇴직자가 늘어나면서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인생 역전을 꿈꾸는 사람들이 생겼다. 로또(Lotto) 복권이 유행하면서 한탕으로 인생역전을 꿈꾸는 사람들이 더 늘었다. 평생을 벌어도 도저히 가질 수 없는 물질을 단숨에 얻어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는 욕망… 그와 같은 욕망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나방처럼 자신의 인생을 헛된 도박과 사행심리에 내던져 자신과 가정을 파괴하고 파멸의 길로 들어섰는지 모를 일이다. 오늘밤도 라스베가스의 밤은 불야성을 이룰 것이며, 세계 도처의 도박장과 마작판과 경마장과 각종 투기 전에서는 물질의 노예로 전락한 비참한 인간들의 비극적 인생극장이 연출되고 있다. 단지 그들뿐이겠는가? 물질에게 예속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많은 크리스천도 포함되어 있다. ‘양수집병’이라는 말이 있다. 욕심을 내어 떡을 두 손에 쥐고 놓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 현대인들이 움켜진 두 손에는 썩어질 육신의 떡이 있다. 그들을 그 사망의 늪에서 구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생명의 떡을 먼저 발견하는 일이다. 그 가치를 깨달아 알고 그것을 취하여 먹는 것이다.


30살에 만난 예수,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떡을 발견하여 그 엄청난 가치를 깨달아 알게 된 사건, 그것은 내가 쫓아가던 인생의 방향과 구도를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고 말았다. 세상의 떡을 쫓아 어떻게든 남보다 더 좋은 학력과 더 낳은 자리와 더 많은 월급을 받기 위해 치달아 가던 내 인생이 충격적인 그의 말에 멈추어 서고 말았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그리고 그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내 인생역전을 꿈꾸며 수많은 날들을 고민하며 기도했다. 인생의 모드(mode)를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는 작업에는 적어도 두 가지 단계가 필요했다. 첫째는 내 손에 있는 떡을 놓는 일과 둘째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 떡을 붙드는 일이었다. 내 손에 이미 있는 떡을 놓는 일조차 결코 쉬운 결단은 아니었다. 그것은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아직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미래를 향해 생명의 떡을 붙드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용기를 넘어선 믿음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다. 내가 이미 소유한 것을 내놓은 것은 용기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만, 아직 내가 소유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야말로 믿음을 필요로 한다.


내가 예수를 믿고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예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의 가치였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자 중에서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다.(요 6:39)”라고 하신 그의 말씀처럼, 나는 나를 보내신 그의 뜻 가운데 내 인생을 새로 발견코자 했다. 그 당시 내 삶의 초점은 교회 고등부와 부부성경공부와 그리고 직장 성경공부를 통하여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안타까움에 가득 차 있었고, 잃어버린 한 영혼을 살리는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한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훈련과정, 그 가운데 나타난 비전이 중국과 북한, 그리고 연변과기대에 대한 환상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차 내가 만날 중국과 북한의 청년들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이었다. 그 무렵 새벽마다 기도하는 가운데 나는 아직 한번도 가본 일 없는 중국의 만주 벌판을 헤매고 다녔고, 신기하게도 한번도 본 일도 없는 조선족 청년들의 영혼을 향한 눈물의 기도가 터져 나왔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떡 안에 감추어진 생명의 가치를 붙드는 일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직장을 그만두고 불확실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이국 땅 중국을 향해 내 사랑하는 가족을 이끌고 들어간 사건은 확실히 내 인생의 방향성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사건이 되고 말았다. 직장 선후배, 부모형제, 일가 친척들, 교회 어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단한 그 사건을 두고, 그 당시 우리 가족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혹은 측은한 눈으로 더러는 그 용기와 믿음을 가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이 공존했다. “당신 나이가 지금 몇인데, 낼 모래면 40이 될 사람이 이제 직장을 그만둔단 말이냐?” “노후 대책을 생각해 보았느냐?” “예수를 믿어도 정도껏 믿어야지. 정신 나갔냐?” “왜 죄 없는 어린것을 데리고 가 고생을 시키려고 하느냐?” (그 당시 그토록 말리던 사람들이 10년이 지난 지금은 모두 우리 가족의 결단과 선택이 옳았음을 인정하고, 더러 친구들 중에는 만나면 그 당시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는가 하고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생긴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감사할 일이다.) 아무튼, 우겨 쌈을 당하는 그 답답함과 어두움 속에서도 우리는 생명의 떡 되신 예수, 딱딱한 무교병을 씹으면서 묵묵히 한 발자국씩 홍해바다를 향해 걸어갔던 것이다.


한 생명의 가치가 온 우주보다도 크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기에 예수를 따르던 열두 제자들은 늘 책망을 받았다. 수가성에서 배가 고파 행로에 지쳐 주저앉았던 예수는 절망 속에 살아가던 한 여인 사마리아 여인을 혼신을 다해 구원한다. 생명을 얻은 기쁨으로 가지고 왔던 물동이를 팽개치고 마을로 뛰어가는 그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예수의 마음에는 기쁨이 충만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알 길 없는 제자들은 마을에서 구해온 떡을 예수께 드리면서 잡수시도록 권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 제자들을 묵묵히 바라보며 그 떡을 거절한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 4:32)” 제자들은 수군거리며 그 사이 누가 다른 양식을 갖다 드렸는가 하고 의아해한다. 제자들은 온 우주보다도 더 귀한 한 생명을 구한 전도자의 마음을 몰랐다. 생명 가운데 찾아오는 영적인 배부름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예수의 이 표현이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고 믿는다. 사실 예수는 그 순간 배가 불러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는 육신적으로는 배가 고파 있었으나, 수가성 여인의 구원받은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육신의 배고픔은 우주의 경계 바깥으로 멀리 밀려나고 말았다. 도무지 음식을 먹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내가 처음 중국서 첫 제자를 얻었던 날, 나 역시 동일한 체험을 했다. 너무나 기쁘고 배가 불러서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기가 싫었다. 이 경험이 있어야 한다. 온 우주를 바꾸어도 줄 수 없는 한 생명의 가치를 깨닫는 경험. 이것이 우리들의 가치관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생명가치를 물질가치와 맞바꾸는 일. 그 가치역전이 곧 참된 인생역전이다.



(1) 우주가 팽창할 때 나타나는 도플러효과로 인해, 중력이 큰 별에서 나오는 빛의 스펙트럼이 파장이 긴 붉은 색 쪽으로 몰리는 현상.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에딩턴 경에 의해 일식 현상 시 나타나는 적색 편이 현상이 관찰되어 일반상대성 이론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2) 공간의 모든 방향으로부터 같은 강도로 들어오는 전파. 파장 0.1 mm 20 cm에서 관측되는 마이크로( 0.01 %)파로 그 높은 등방성(等方性)으로 미루어, 어느 특정한 천체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우주 생성 시 대폭발에 의해 발생했던 빛의 흔적이 우주공간에 충만된 전파로 남아 배경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