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태복음 5장 3절)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누가복음 6장 20절)
(Blessed are you poor, for yours is the kingdom of God)

(1)



평양과기대 프로젝트는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민족회복 운동이다. 깊은 수렁에 빠져있는 북한 사람들에게 스스로 일어서기 위한 자생력을 주기 위함이요, 장차 한 민족으로서 우리와 함께 일할 동북아 시대의 인재를 키우는 대학을 짓자는 것이다.



평양과기대를 위한 모금 운동을 벌이려고 세계 여러 곳을 방문하며 물질 후원을 호소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돈에 대한 관심이 점점 생기게 되었다. 돈버는 일과 무관하게 지난 10년을 살아오던 사람이 갑자기 어떻게 돈을 모아야할 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북한의 굶주리는 동족들을 향한 사랑을 호소하는 것이었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결국은 그동안 돈을 쓰기만 하던 삶에서 돈을 모으는 삶의 방식으로의 일종의 방향 전환(?)을 하게 된 셈이다. 아울러 다른 사람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이끌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았던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뜻밖의 후원자들을 통해 감격스런 헌금을 받는 일도 생겼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자신의 떡을 지키려는 이기적인 마음들을 녹여서 다른 사람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과정 속에서 돈을 둘러싼 어려운 문제들이 얼마나 산적해 있는지도 조금씩 체감하게 되었다. 한국의 정치경제계에는 어마어마한 천문학적 액수의 정치자금이 불법적으로 오가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산적한 물질적 부가 이렇듯 좋은 일, 의미 있는 일을 하는 데에는 좀처럼 쓰이기가 쉽지 않음도 깨달았다. 다시금 돌이켜 돈의 문제, 물질의 문제, 떡의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었다. 돈과 부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취급해야하는지에 대하여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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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구원과 개인 구원의 문제는 성경에서 다루는 두 가지 중심축이지만, 각 교단과 신학자들 사이의 끊임없는 논쟁과 시각의 불일치를 낳는 핵심 쟁점이기도 하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회복을 통해 구원을 이루는 영적 복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쪽과, 현실 사회의 왜곡된 정치 경제적 상황으로부터 소외된 민중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사회 복음을 더 중시하는 다른 한 쪽이 팽팽히 맞서 있는 것이다. 과연 성경은 서로 섞일 수 없는 복음의 두 가지 다른 요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일까? 이 두 진영 사이에는 도무지 타협할 수 없는 평행선이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들 모두 결국은 떡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배고픈 자에게 떡을 주자는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우리가 가진 우리가 더 받은 물질적 부와 우리가 먼저 받은 영적 풍성함을 나누어주자는 그런 이야기이다. 결국 다 같이 잘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자는 같은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우리를 지으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육체와 영혼으로 창조하셨기에 우리에게는 육체의 떡과 영혼의 떡이 함께 필요하다. 우리는 그 어느 하나도 경시하거나 도외시할 수 없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그 두 가지 떡을 함께 주어야만 한다.



지난 18, 19세기 산업혁명을 통해 발명된 수많은 기계들은 사람의 육체노동을 대치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킴으로써 우리 인간의 먹는 문제, 떡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획기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육체노동에서 소외된 인간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통한 부의 편중화라는 사회 현상 속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더 심각한 경제문제를 양산하게 되었다. 인간이 창출해 내는 부가가치는 육체노동에서 정신노동의 산물로 급격하게 전환되었고, 지난 20세기를 휩쓸었던 전자/반도체 혁명에 의해 인간의 지식과 감성이 상품으로 전환되는 시기가 도래하였다. 지식 사회와 감성 사회를 거치면서 인간의 문화 활동이 삶의 중심부로 옮겨지게 되었다. 먹는 문제 즉, 입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우리의 눈과 귀가 또 다른 욕구를 발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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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회가 안고 있는 고민은 더 이상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의 문제이다. 사회 일각의 부유층은 물질적 부가 넘쳐나서 온갖 사치를 일삼으며 성인병과 비만에 시달리고 있는가 하면, 소외된 빈민 계층에서는 TV 드라마 속의 화려한 장면들을 물끄러미 넘겨다보며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는 어려움 속에서 더 큰 상대적 박탈감에 허덕이고 있다. 세계화 정보화의 영향으로 지구촌의 소식이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세상 속에서 이 문제는 한 국가 내에서 뿐 아니라 국가간에서도 마찬가지로 부각되고 있다. 가난한 나라와 부자 나라 사이의 간격은 날이 갈수록 더 벌어지고 있는데, 부자 나라는 공룡처럼 비대해지며 더욱 자신의 체중 늘이기에 사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헨리 조지가 예언한 진보사회 속에서의 빈곤 현상이 가일층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1)



이는 영적인 부요와 가난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나라는 복음이 넘쳐나서 식상한 가운데 영적 불감증에 빠져 있는가 하면, 이웃 나라에는 평생 복음을 한번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부의 분배, 즉 떡의 분배는 성경의 최대 관심사다. 구약에서부터 복음서와 서신서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항상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말도록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타락한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도무지 피면하기 어려운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인간의 타락상은 어떤 도덕 철학과 정치 제도와 경제 시스템을 동원하여도 만민이 함께 잘 사는 지상 낙원을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을 지나 온 역사는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는 마치 거역할 수 없는 엔트로피의 법칙, 열역학 제 2 법칙처럼 우리를 따라다닌다.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던 예수의 예언은 적중하였다.(14:7) 가난이라는 질병은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불치병으로 역사를 통해 입증되었으며, 그 가난의 정도는 시대를 따라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는 떡을 나누는 삶에 대한 강한 도덕적 책임이 부과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크리스천들은 항상 가난한 자에게 눈길을 돌리며 그들에게 떡을 들고 나아가도록 부름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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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복음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선포된다. 예수는 자신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나사렛 성전에서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을 낭독함으로 자신의 사명을 천명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9)>



복음의 대상인 가난한 자들……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가난이 무엇인지부터 먼저 이해해야 한다.



첫째, 가난은 영적인 궁핍 상태를 나타낸다.



둘째, 가난은 물질적 궁핍 상태를 나타낸다.



성경이 말하는 가난은 영적, 육적 가난을 총칭하고 있다. 예수는 이 총체적 가난을 치유하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이다. 가난의 문제를 예수가 얼마나 중요시 했는지 하는 점은 그의 공생애 기간 가르침을 집약한 설교로서 잘 알려진 산상수훈의 첫 말씀(누가복음에서는 평지 설교라고 알려진……)이 바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천국 선포였음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예수의 가르침의 제일성(第一聲)이 바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외침이었던 것이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예수에게는 모든 사역의 초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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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태복음의 산상설교가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한 선포인데 비해 누가복음의 평지 설교는 보다 직설적으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던지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여기에는 예수의 관심사가 영적, 육적인 가난을 모두 포괄하고 있음이 암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복음의 대상을 어느 한쪽에 지우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세심한 배려가 깔려있다. 실제로 영적 복음만을 중시하는 보수 근본주의자들에게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이 더 인기가 있고, 사회 복음을 중시하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누가복음이 더 인기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이 주로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을 향한 영적 윤리적 가르침으로 알려진 것에 반하여, 누가복음의 가르침은 배고픈 무리들을 향한 복음이요 사회정의를 일깨우는 직접적인 설교의 성격이 더 강하다.(마태복음에서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3인칭으로 묘사하고 있는 데 비하여, 누가복음에서는 천국이 너희 것임이라고 2인칭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유의해 보라.) 그러나 복음의 총체성은 그 어느 한 쪽도 무시할 수 없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가난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결핍상황을 통칭하는 말이다. 가난이란 하나님께서 창조 시 사람에게 주시기로 작정하셨던 그 아름다운 환경, 보시기에 완전했던 에덴의 풍요에서 벗어난 모든 조건을 지칭한다. 타락의 순간……. 실낙원의 순간, 인간에게 엄습한 전면적(全面的)인 결핍 상태가 곧 가난인 것이다. 모든 부요의 근원이요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그 순간, 우리는 영적 가난, 육체적 가난, 사회적 가난, 환경적/생태적 가난에 직면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인간의 역사에는 영적, 육적 배고픔과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의 기나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은 전 인류가 가난한 자가 되었다. 영적, 육적인 궁핍함 속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웅크리고 있는 자들……. 그들을 살리기 위해 예수가 왔던 것이다.



예수는 전 인류 앞에 서서 엄숙히 선언한다. 나는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노라. 가난한 자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자신의 가난함을 인정하고 복음을 받으라. 그리할 때, 너희는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 놀라운 선언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산상수훈의 팔복 중 나머지 칠복은 가난한 자들에게 임할 천국의 복에 대해 부연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가난의 총체성은 사람들에게 세 가지 국면으로 나타난다.



첫째, 포로된 자



둘째, 눈먼 자



셋째, 눌린 자



이것은 선악과에서 나타난 세 가지 죄악상을 그대로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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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음직 하고> : 우상 숭배와 탐심에 사로잡힌 자들



<보암직 하고> : 명예욕에 눈먼 자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 권력욕에 억압된 자들




, 돈과 명예와 권력욕에 묶인 노예 상태로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에게 참 자유를 선포하고 영적인 눈을 새로 뜨게 하기 위해 예수가 온 것이다. 그때 비로소 천국이 임하게 된다. 구약시대에 천국도래의 표상으로 주어졌던 희년, 은혜의 해처럼……. 모든 억압된 자들과 노예들이 해방되고 빼앗겼던 토지가 다시 원 주인을 찾아 되돌아가는 것, 이 희년이야말로 오직 은혜로 임하는 기쁜 소식이요 가난한 자들에게 임하는 천국이었던 것이다.(2)



이것이 장차 우리가 소유할 종말론적 천국의 작은 모형이었고, 지금도 복음이 임하는 곳마다 벌어지고 있는 현세적 천국이기도 하다.



 


(3)



평양과기대를 위해 뛰어다니던 지난겨울 두 달간, 강남의 한 커피샾에서 코스타 강사로 알게 된 P목사님을 우연히 만났다. 뜻밖의 만남에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교제하는 가운데 갑자기 주일 말씀 부탁을 받게 되었다. 상가 2층의 자그마한 교회였지만, 성도들이 뜨겁고 목사님과 한 마음이 되어있는 아름다운 교회에서 메시지를 전하니 말씀이 살아 역사함을 느꼈다. 평양과기대를 위해 특별 헌금까지 해 주시는 그 교회 성도님들께 감사한 마음을 남기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려는데, 어느 아주머니께서 급히 달려오더니 하얀 봉투를 전해주었다. 아마도 예배시간에 돈이 없어서 급히 돈을 구해 오신 모양이었다. 그분이 가시자 옆에 있던 목사님께서 저 여 집사님은 목욕탕에서 때밀이를 하시는 분이예요라고 조용히 일러주셨다. 봉투 안에는 빳빳한 새 돈 60만원이 곱게 들어있었다. 그 돈을 바라보는 내 마음에는 형언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생각이 아픔처럼 밀려들었다. 생활비 전부를 연보궤에 넣었던 과부의 두 렙돈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들의 헌신은 언제나 아름답다. 그들은 가난하기에 천국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 많은 부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동족의 굶주림 앞에서 외면하는 그들이 진정 예수의 제자들인가? 한국 사회의 부유층으로 올라갈수록 크리스천의 비율이 높아진다고 하는데……. 그들이 믿는 예수는 어떤 예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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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복음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선포된다. 이 말은 가난한 자들이야말로 복음의 수혜자요,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심령이 가난하여 도무지 의지할 데가 없는 자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며 오직 하늘의 은총만을 기다리는 그들에게는 복음의 말씀이 힘 있게 역사한다. 이들은 복음의 정적(靜的) 수혜자들이다. 복음을 받을만한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공급되는 생명의 떡과 육신의 떡은 그들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킨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복음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선물이라는 말에는 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유한 자는 가난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또 부자란 누구인가? 부자에도 역시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첫째, 영적인 부자 : 종교인, 지식인, 도덕철학자, 대학교수 등등……. 뿐만 아니라 선교사나 자선사업가라 할지라도 스스로 선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 , 교만한 사람들이다.



둘째, 육적인 부자 : 백만장자, 억만장자, 복부인, 대기업 사장 등등……. 뿐만 아니라 동네 구멍가게 주인이라 할지라도 물질을 우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 탐심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들은 천국을 소유할 수 없다. 아니 불가능하다. 얼마나 어려운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더 어렵다고 예수는 비유로 말하고 있다.



예수의 이 말에 제자들은 놀라고 낙심한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하고 반문한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던 사람들도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예수는 그들을 향해 단호하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고 말하는 것이다.(7:21-3) 너희는 하나님 뜻을 행하기 위함이 아니라 네 뜻을 위해 그 일들을 했노라. 그리고 이르기를,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6:24)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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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재물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예수는 도전하고 있다. 그들의 천국행을 가로막고 있는 우상을 먼저 제거하라는 요청인 것이다. 그 요청을 바리새인과 부자 청년은 거절하였다. 그러나 마태와 삭개오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베드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복음의 동적(動的) 수혜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비록 교만하고 탐심에 가득 차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예수를 만나는 순간 그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부()를 복음을 위해 기꺼이 던져버린 사람들이다. 결국 예수의 제자도는 자신이 지닌 것들을 던져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Give)’는 한 단어로 압축된다.



주기 위해 온 사람 예수, 자신의 모든 것, 온 몸과 살과 피를 던져 생명을 살린 사람 예수……. 그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단호하게 같은 인생을 살도록 요청한다. 떡의 인생, 떡을 던지는 인생, 가난한 자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는 그런 인생을 살라는 것이다.



누가복음 620-38절에는 어떻게 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주는 것의 미학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첫째, 그 대상을 제한하지 말라. 우리에게 떡을 받아야할 가난한 자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우리를 미워하며 모욕하며 핍박하고 더러는 우리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가는 원수들일 수도 있다. 그들을 향해 선대하고 사랑을 베풀며 축복하고 대접하라는 것이다. 기가 막힌 말이 아닐 수 없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 떡을 주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요 죄인들도 그리하는데 그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느냐고 반문까지 하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 아버지가 그리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 그의 자비하심 같이 우리도 그렇게 자비하라는 요청이다.



둘째, 주되 돌려받을 생각을 말고 그냥 주라. 아울러 보상과 칭찬을 받을 생각조차 말라고 경계하고 있다. 사람에게 칭찬 받을 생각을 아예 버리라는 말이다. 그리해야 하늘의 보상과 칭찬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셋째, 주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며, 정죄하지 말고, 모든 것을 용서한 후에 주라는 것이다. 그리할 때 참 베품이 이루어진다. 비판과 정죄와 용서치 못하는 마음을 지닌 채 주는 것은 위선이요 거짓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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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주되 마음껏 후하게 담아 주라.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주라고 명하고 있다. 줄때 헤아리는 마음으로 인색하게 굴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그 헤아리는 그 헤아림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후한 상급을 원한다면 그만큼 후하게 베풀라는 것이다.




그렇게 주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조금씩 가난해진다. 그리고 복음의 정수와 핵심을 배워가게 된다. 예수를 통해 나타난 베품의 미학, 다 주어버림, 철저히 가난해지는 삶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그리할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저들은 진정 예수의 제자들이다 라고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기적을 보게 될 것이다.(3)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에게는 가능한 일이었기에……. 다 주어버리고 마침내 가난해진 제자들을 향해 예수는 이렇게 위로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18:29-30)’



주의 제자된 우리들이, 오늘날 영적, 육적 가난으로 굶주려 죽어가는 북한 땅을 바라보며 묵상해야할 말씀은 예수가 공생애를 앞두고 가난한 자들에게 선포했던 바로 그 가난의 복음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9)>



가난의 복음은, 가난한 자와 가난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 모두에게 복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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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보와 빈곤>, 헨리 죠지, 무실(1989)



(2) <토지와 경제정의>, 대천덕, 홍성사(2003)



(3)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김영봉, IVP(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