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1년 11월호

글을 시작하면서


쑥스럽지만 내 개인적인 얘기를 함으로써 글을 시작하려 한다. 내게는 현재 아들이 하나 있다. 결혼하기 전부터, 좀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미래에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으면 짓게 될 이름을 미리 생각해 놓았었다. 딸일지 아들일지를 그 당시로서는 모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성별에 관계 없이 어울릴 수 있는 이름을 생각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우리”이다. 내 아이에게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우리”(us)라는 개념을 심어 주기 위해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이다. 그 아기가 자라서 지금은 일곱 살이 되었고, 교회 공동체를 잘 섬기고 있다. 현재 내 아내는 뱃 속에 또 하나의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데, 아내와 고심 끝에 이번에는 이런 이름을 지으려고 한다. 딸이면 “하나”(1)로, 아들이면 “원”(one)으로.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과는 많이 동떨어진 현대의 이기적, 개인적 사회를 살면서 조금이라도 주님 뜻을 이룩하고자 하는 마음의 간절한 소원으로 인해, 이렇게까지 하고자 하는 목회자의 심정을 여러분께서 알아 주셨으면 해서 이렇게 서두를 시작한다.


유언은 귀중한 것


유언이란 언제나 귀중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행하신 마지막 유언에 해당하는 말씀이 무엇일까? 몇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대제사장의 기도”이다. 그런데 이 기도 중 마지막 부분이야말로 유언 중의 유언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내용이 구분된다.


1)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하나이듯이 믿는 무리들이 하나가 되어야 함.
2) 성도가 하나가 될 때 하나님 안에 있게 됨.
3) 그런 하나됨을 통하여 세상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게 됨.


하나되신 삼위일체 하나님


위와 같은 기도의 내용은 매우 중요한 점을 우리들에게 시사한다.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됨”이며, 이를 가리켜 우리는 “삼위일체”라 한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표현하실 때 “우리”라는 단어를 쓰고 계신다(창1:26, 창3:22, 창11:7 등등).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할 때는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대부분이지만,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표현하실 때는 “우리”라는 복수적 연합(plural unity)의 표현을 많이 하시는 것이다. 이는 삼위일체를 표현하는 중요한 구절이 된다. 그리고 그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라고 표현하심으로 공동체, 하나됨의 모습을 전달해 주신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됨, 연합을 좋아하는 분이시다. 각자의 개성과 차이가 다른 무리들을 그냥 무리 지음이 아닌, 진정한 연합, 즉 갈등과 차이를 극복하고 소화해 냄으로 진정한 평화의 공동체를 이룩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하나되심에 대한 소망인 것이다(참조. 로마서5:1, 8).


그러나 하나님의 하나됨은 통합이나 균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을 보아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각각 다른 역할이 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심으로 구속의 사역을 감당하셨고, 성자 하나님은 구속 사역 후 성령 하나님이 인도와 보호의 역할을 하실 수 있도록 “내가 떠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요16:7)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이는 실로 다양성을 포용하는 연합(Unity in Variety)이라는 진정한 하나됨을 실제로 보여 주신 것이다. 이렇게 하나됨을 이룬 공동체 안에 있는 각 개체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그보다 먼저 자기 자신, 자아에 대해서도 소중한 자아관을 갖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각자가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그 개체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건강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모시는 길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됨을 이룩”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 “안”이라는 말은 “in”과 “among”, 둘 다로 해석할 수 있다. 개인의 심령 안에 천국이 있기도 하지만, 믿는 성도 개개인이 모여서 하나됨의 공동체를 이룩할 때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성도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지표로는 내적, 외적인 두 가지의 길이 있다. 곧, 구원받은 성도는 내적으로는 “평안”을 이루어야 하며, 외적으로는 “하나됨의 공동체”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관계적으로 하나됨이 부족할 때 구원의 감격과 능력은 약해진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가 개교회주의를 표방하면서 보편교회(Universal Church) 개념에 헌신하지 않게 되면, 참다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맛보지 못하게 됨으로써 구원의 감격을 많이 상실한, 약한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전도의 문을 막지 말라


반대로 성도가 하나됨을 이룩하고 개 교회가 모여 보편교회의 하나됨을 이룩하게 될 때, 그 속에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건설되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쉽게 떠나는 이유는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별다른 차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민 목회를 연구하는 분들의 말에 의하면, 이민 가정에서 자라난 2세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을 들어가면서 그들의 90퍼센트 이상이 교회를 떠난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교회에 남았던 나머지 10퍼센트마저도, 대학을 졸업한 뒤 직장에 들어가면서 그들 중의 90퍼센트가 또 교회를 떠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교회를 떠나는 가장 주된 이유는 교회 내에서 분열의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이고, 1세와 2세의 갈등과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교회가 하나됨을 이룩하지 못할 때 교회 자체가 전도의 문을 막게 된다는 심각한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은 곧 하나됨의 공동체를 통해 천국을 보게 될 때이기 때문이다.


시너지(synergy) 효과라는 말이 있다. 말 한 필과 또 다른 말 한 필로 하여금 함께 물건을 끌게 하면, 두 필에 해당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네 필에 해당하는 힘을 발휘한다는 말이다. 성경에서도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 한다고 했고, 두 사람이 함께 누울 때 더 따뜻해질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이러한 하나됨의 명령과 능력을 의지하면서 내가 섬기고 있는 지역인 앤아버에서 일어나고 있는 연합 운동을 살펴 보면서, 연합에 대한 몇가지 실제적 원리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참된 연합은 각자가 하나님께 나아올 때 이룩되는 것


주민 1천명, 학생 7백여 명으로 한인 인구가 대략 1,700여 명 정도로 추산되는 앤아버 지역에는 10여 개의 한인교회와 약 300여 개의 미국 교회가 있다. 미시간 대학(University of Michigan)이 있는 대학도시 지역이므로, 비교적 각 교회마다 청년의 숫자가 타 지역에 비해 많은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3년 전, 몇몇 청년들의 제안으로 각 교회 청년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는 모임을 갖기로 했다. 격주로 토요일마다 오전 9시에 모여서 한 시간 반 정도를 찬양과 기도 시간으로 가졌다. 처음에는 다른 교회 사람들과의 만남을 어색해 하는 모습도 있었고, 또 약간의 경쟁심(?)같은 것도 있었고, 모임이 잘 되니까 더 많은 연합 행사와 발전적 프로그램을 갖자는 제안도 나왔다. 그리고 찬양과 기도보다는 그 시간 후 잠시 갖는 토론 시간에 사람들이 더 많은 신경을 쓰는 듯 하기도 했다. 결국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의한 하나됨 보다는 인간의 생각과 자랑, 주장에 더 많이 마음을 쓰는 쪽으로 기울게 됐고, 당연히 처음에 뜨겁게 타오르는 모습이 금방 식어지게 되고 말았다. 이 때, 몇 명의 신실하게 섬기는 분들이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의 모임은 찬양과 기도”만” 하는 모임으로 하자고. 찬양과 기도로 뜨거워진 마음들을 함께 모아 각자의 교회에 가서 잘 섬기도록 하자고. 이 제안 이후로 토론과 회의도 짧게, 다른 교회 사람들이 몇 명 나오는가 등에 신경을 쓰지 않고, 1시간 이상을 찬양과 기도하는 일에 집중하였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다 나오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묶어지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3년 전에 시작된 이 연합 찬양기도(Unity Praise and Prayer) 모임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그리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왔기 때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런 하나됨이 있게 되자, 그 결과가 풍성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일년에 2-3차례, 앤아버 전(全) 한인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합 찬양과 기도 집회를 열 수 있게 되었으며, 해마다 9월이 되면 신입생들이 많이 오는 앤아버 지역에 각 교회를 소개하는 연합 안내지를 함께 내게도 되었다. 또 이러한 연합의 불길은 인근 지역인 디트로이트 지역에도 일어나게 되었고, 이제는 앤아버와 디트로이트 지역이 다양성과 연합이라는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모여서 찬양과 기도하는 것은 가장 “소극적”인 자세일 것 같지만, 가장 “큰” 일을 낳게 된다. 하나님으로 가득 차기 때문이다.


희생 없이는 이룩될 수 없는 하나됨


외적으로 보기에 하나됨은 매우 아름다운 모습이고, 힘을 합하기에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그냥 이룩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만 한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화해하시고 우리와 부모-자녀의 관계, 즉 가족과 같은 하나됨을 이룩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감행하셨다. 이러한 원리는 인간의 모습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희생 없이는 결코 하나됨이 이룩될 수 없다.


앤아버 지역에서는 부흥 집회나 특별 세미나, 수련회 등이 각 교회 별로 열릴 때, 타 교회 교인들이나 청년들도 많이 참석하곤 한다. 타 교회에 교인을 빼앗길까봐 이웃 교회 부흥회 광고도 잘 안 하는 이민 교회들이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앤아버의 상황은 다르다. 그냥 참석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힘껏 돕는 모습이 많다. 예를 들어, 찬양팀이 약한 교회는 찬양팀이 좀더 안정된 교회에서 나와 찬양팀 봉사를 하기도 하고, 포스터나 팜플렛을 제작하는 것과도 같은 재능 봉사를 하기도 하고, 그렇지도 못한 경우는 타 교회 집회에 열심히 참석하여 몸으로 봉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희생은 서로에게 감동과 교육(교훈)을 주게 되었고, 결국은 지역 전체로 변화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하나됨이란 그냥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됨 만큼 귀한 것도 없다. 그 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 내가 희생할 때, 나는 “우리”라는 공동체의 천국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됨 = 놀라운 결과를 낳게 하는 삶의 기초 법칙


뉴튼의 만유인력에 관한 법칙 발견은 떨어진 사과를 손에 갖게 된 기쁨만을 준 것이 아니라 그 법칙 하나로 엄청난 과학의 발전을 가져 오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서의 “연합” 혹은 “하나됨”에 대한 법칙은 엄청난 결과를 낳게 하는 삶의 기초 법칙이 된다. 즉, 그 속에 놀라운 보화의 잠재력이 담긴 보물 지도와도 같은 것이 바로 하나됨의 법칙인 것이다.


앤아버 지역에서 청년 연합이 찬양과 기도로 이루어진 후의 각 교회 청년회를 살펴 보았다. 놀라운 것은 각 교회마다 청년들의 모임이 훨씬 더 활발해졌고 부흥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 진리를 우리가 깨닫게 된 것이다. 이 하나됨은 기초 법칙이므로 다른 다양성의 영역에도 적용되는 능력이 있다. 곧, 한인 청년들의 하나됨은 각 교회 안에서 1세와 2세, 한어권과 영어권의 하나됨의 노력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청소년들의 연합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한인교회와 미국교회 간의 하나됨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 한인교회의 목사님은 교회 건물이 없어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하나됨의 발전적 적용 차원으로 미국교회 목사님들의 기도 모임을 참석하다가 기도 제목을 나누던 중 미국교회 건물을 기적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현재 그 교회는 건물을 함께 사용할 뿐만 아니라, 형제교회처럼 한미(韓美) 간에 연합예배도 자주 드리고, 성경공부 프로그램도 함께 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됨은 앤아버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들의 연합운동으로 발전하여 인종, 언어에 구별없이 2001년 4월에는 종려주일 저녁에 대학의 컨벤션 센터(convention center)를 빌려서 약 2천 5백여명이 함께 모여서 연합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 이후 지역 목회자들의 계속적인 연합 기도를 통해 언젠가는 미식축구로 유명한 미시간 대학의 Stadium(10만 명 이상을 수용하는 대학 축구 경기장으로는 가장 최대의 규모)에서 앤아버 전 크리스천들이 정기적으로 모여서 찬양과 기도를 함께 드리는 그 날을 “같은” 비전으로 공유하고 있다. 나는 성도들이 모여서 함께 찬양과 기도하는 한, 이 비전이 언젠가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질 것을.


글을 마치면서


영향력을 끼치는 성도(Contagious Christian)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성도는 소금과 빛이고, 이 두 가지의 속성을 볼 때 소금과 빛된 성도가 갖는 의미는 “영향력”을 의미한다. 성도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도 개개인은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각 성도 속에 하나님으로 충만할 때야 비로소 세상은 그 성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변화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각 성도가 서로 따로 떨어져서 이러한 변화를 이루기를 원치 아니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나가 되어서 통일성과 다양성을 가지고 사역하셨듯이, 우리들도 그렇게 하나됨으로 사역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미국에는 현재 약 4천 개 이상의 이민 교회가 있다. 각 주마다 있는 대학도시 교회들에는 수 많은 유학생 교회가 있다. 나는 코스탄들의 이 시대적 사명 중의 하나는 바로 각 코스탄들이 섬기는 교회 현장, 사역 현장에서 이 하나됨에 헌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각 주마다, 대학 도시마다 코스탄들의 헌신과 희생에 의해서 이런 하나됨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면 그 자체가 진정한 전도, 진정한 천국 건설이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청개구리도 어머니 개구리의 마지막 유언에만은 순종했다. 청개구리보다 못한 성도가 되기 보다는,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고 희생으로 헌신함으로 하나됨의 천국 맛을 보시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하나됨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유언과도 같은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고 따를 때 그 결과가 놀라웁게 역사하리라 믿는다. 하나됨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 중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