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봉]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주일과 일상(2)

이코스타 2005년 2월

목사님 안녕하세요. 목사님의 책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를 읽고 감명을 받았던 평범한 크리스쳔 대학생입니다. 물질과 쾌락을 쫓는 이 세태 속에서도 꾸준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제 친구가 요즘 들어 큰 고민에 빠져있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저도 신앙을 가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려움이 많이 있어 이렇게 목사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친구는 교회에서 여러 사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주로 음악사역을 하는데요. 주일엔 거의 종일 교회에서 지낸답니다. 그는 자신의 그런 직분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정말 열심을 다해 왔구요. 그런데, 얼마 후에 그의 절친한 친구가 주일에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조금 먼 곳이어서 예배를 드리고 가거나 혹은 그곳을 다녀와서 오후예배를 드리는 것도 안될 것 같습니다. 다행인 것은 그 날 그의 사역을 대신해줄 분이 계시다는 것인데….



여전히, 그래도 되는 것인지 정말 고민이 됩니다. 그는 주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교회에서 맡은 직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그는 절친한 친구의 결혼식에 가서 친구를 마구 축하해 주고 싶어합니다. 목사님,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요. 정말로 성경적 가치관에 따른 결정을 내려야 할텐데,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어느 방문자의 질문이다. 주일 성수에 대한 의식이 희미해진 미국 교회에서 씨름하는 나로서는 질문을 올린 청년과 그의 친구가 모두 귀해 보인다. 이렇게 뜨거운 열정이 있기에 한국 교회에는 아직도 희망이 있어 보인다. 동시에, 이 질문은 주일 성수에 대한 한국 교회의 율법적 사고 방식을 선명하게 부각시켜 준다. ‘주일자신이 속해있는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주일 성수의 세 가지 조건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셋 중 하나의 조건이라도 어기는 상황이 생기면 위에서 토로한 것과 같은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이것이 과연 필요한 고민인가? 이제 신약으로 눈을 돌려 이 문제를 더 논해 보도록 하자.



천하가 성전이요 만사가 제사다!


사실을 말하자면, 예수님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유대교인이었다! 그분의 어렸을 적의 행적에 대한 궁금증이 많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분이 경건한 유대교 가정에서 유대교 교육을 받고 유대교인으로서의 영성 생활을 실천하며 성장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는 확고한 증거가 없는 한, 이 사실을 의심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나사렛 방문 이야기를 전하면서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4:16)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보듯, 유대교인으로서 안식일마다 회당에 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며, 예수님은 여기에서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안식일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에 대해 예수님은 다른 유대교인들과 의견을 달리했다. 달라도 매우 심하게! 복음서들은 이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전해 준다.


그 중 하나가 밀 추수에 관한 논쟁‘(12:1-8//2:23-28//6:1-5)이다. 예수님 일행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아마도 예배를 위해 회당으로 가는 중이었을 것이다. 이 때 제자들은 허기를 면하기 위해 밀 이삭을 따서 손으로 비벼 껍질을 제거한 다음 씹어 먹었다. 당시의 규정에 따르면, 이것은 추수와 탈곡에 해당하는, ‘금지된 노동이었다. 이 행동이 바리새인들의 눈에 띄었고, 그들이 예수님께 이의를 제기한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두 가지의 예로 답변을 하신다.


첫 번째 예는 다윗이 전투 중에 시장할 때 회막 지성소에 드려졌던 진설병을 가져다 병사들을 먹인 사건(삼상 21:1-6)이다.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했던 것은, 다윗의 행동이 율법에 저촉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신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비벼 먹은 것은 율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성전에 드려진 떡은 제사장만이 먹게 되어 있었다(24:5-9). 그렇다면 왜 다윗의 행동이 율법에 저촉되지 않았던가이것은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사람다윗, 사무엘을 통해 기름을 부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신‘(삼상 13:14) 다윗의 신분과 관련이 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았으므로 안식일에 제사장에게만 허락된 일을 해도 율법에 저촉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히브리어로 메시야‘)로서 자신에게도 같은 권한이 주어졌다고 믿으셨다.


두 번째로 그분은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제사를 위해 분주히 일하는 것을 예로 드신다. 당시 율법은 안식일에 집에서 회당까지 오고가는 거리 이상을 걷지 못하도록 그리고 회당의 성경 두루마리를 나르는 정도 이상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 규정에 의한다면, 안식일에 성전 업무를 볼 차례가 된 제사장들은 율법을 어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두고 안식일 율법을 어겼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식일을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28:9-10). 본질상 그들의 노동은 수고로운 노동이 아니었다. 그것처럼, 예수님은 자신과 제자들이 밀 이삭을 비벼 먹은 것이 율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신다. 이 주장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을 주목하라! 예수님은 지금의 시간을 안식일로, 지금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을 제사장으로, 당신이 일하고 계신 현장을 성전으로 그리고 당신이 하시는 일을 제사로 비유하고 계시다. 지금 걷고 있는 밀밭이 성전이며, 밀 이삭을 비벼 먹는 행동이 제사라는 것이다!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진정한 의미의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런 다음, 그분은 두 가지의 혁명적인 선언을 하신다. 하나는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에 있느니라‘(12:6)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12:8)는 선언이다. 이 두 말씀에서 드러나듯,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의 권위에 구속되지 않는 존재임을 분명히 아셨다. 오히려 율법 규정을 폐기하거나 수정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으셨다. 그것은 제사장이나 예언자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권한이다. 가장 위대한 계시자였던 모세도 꿈꾸지 못했던 엄청난 권한이다.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다고 믿었던 권한, 그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예수님은 믿었다. 이 발언은 유대교인들에게는 이단적이요 신성 모독적이요 악마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권한을 넘보는 사탄적 음모!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분에게는 하나님과 같아지겠다는 불순한 의도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께 절대 순종한 결과 그런 권한이 주어졌다고 믿었다. 그것이 결국 유대교가 그분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던 거침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대중적 율법 이해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성전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고 안식일 준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순서를 뒤집어 놓으신다. 성전도 안식일도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마가복음 저자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2:27)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뒤이어 나오는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28)는 말씀은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바꿔 쓸 수도 있다. ‘인자에 해당하는 아람어 바 에나쉬‘(bar enash)사람‘, ‘그 사람,’ ‘나 같은 사람 혹은 등의 의미로 사용되던 관용어였다. 이렇게 풀면, 이 말씀은 안식일이 사람들의 참된 삶을 위해 마련된 것이라는 뜻이 된다. 성서학자들은 여기서 바 에나쉬인자로 번역해야 옳은지 아니면 사람으로 번역해야 옳은지를 두고 논쟁해 왔지만, 나는 두 가지 뜻이 모두 있었을 것으로 여긴다.


이것은 회당 안에서 벌어진 연속된 사건에서 더 잘 드러난다. 밀밭을 지나 회당에 들어가시자 사람들이 손이 마비된 사람을 빌미로 예수님께 논쟁을 걸어온다(12:9-14//3:1-6//6:6-11). 안식일 규정에 의하면,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그냥 두면 죽을지 모르는 심한 경우에만 치료를 허락했다. 따라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것은 율법에 저촉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12:12)고 말씀하시면서 그 병자를 고쳐 주신다. 여기서 으로 번역된 말(‘칼로스)이로운 혹은 도움이 되는이라는 뜻이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또 다른 말씀, ‘그러면 열 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13:16)는 말씀도 같은 의미를 품고 있다. 안식일은 모든 사람 혹은 모든 생명을 구속된 상태에서 풀어줌으로 이롭게 하도록 마련된 것이다! 모든 일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이로운 일을 하도록 마련된 날! 이 일화에 대한 분석 끝에 페르디난드 한(Ferdinand Hahn)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선의의 표현으로 이해되기를 원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과 전통에 직면하여 그분은 종말론적인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참된 뜻을 드러내셨다.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신 결과다 1) 



네 하는 일의 의미를 안다면



그렇다면 예수님은 안식일과 평일의 차이를 부정하셨는가? 예수님의 행동을 이런 차원에서 파악하는 것은 그분의 진의를 무시하는 처사다. 그분은 거룩한 시간과 거룩하지 않은 시간을 나누는 데서 희망을 보시지 않았다. 오히려 삶의 태도를 달리하고 삶의 목적을 달리하는 데서 희망을 찾았다. 예수께서 안식일 율법을 표면적으로 위반하면서까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 뜻의 핵심을 다음의 유명한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11:28-30).


 


유대교적인 배경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이 말씀이 율법에 관한 것임을 금새 알아차릴 것이다. 유대교에서 멍에는 곧 율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까다로운 율법 규정을 지키느라 지친 사람들을 가리킨다. 율법은 참된 쉼으로 인도하는 매개체인 셈인데, 그것이 왜곡되어 오히려 참된 쉼을 방해하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잘못된 율법 준수는 외적으로는 인생사를 더 고단하게 만들고 내적으로는 영혼을 더욱 황폐하게 만드는 법니다. 예수님은 그 멍에를 벗어놓고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초청하신다. 당신의 멍에는 쉽고 가벼워 참된 쉼을 제공해 줄 것이란다. 여기서 말하는 참된 쉼은 일을 멈추는 쉼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삶을 가리킨다. 동일한 일을 하더라도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하면 그 일을 통해 안식과 위로와 평강과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의 초청은 안식일로의 부름이 아니라 안식의 삶에로의 부름이었다. 옛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며 열망했던 그 메누하가 예수님을 따라 삶의 태도를 바꿈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삶의 태도를 예수님은 회개믿음으로 요약하셨다. 회개란 하나님께로 방향 전환하는 것을 가리키고, 믿음이란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과정을 가리킨다. 불행하게도, 율법 준수는 자주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을 방해한다. 그것들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그것에 매어 있는 한, 하나님은 관심 밖에 있게 된다. 그것을 벗어나 살아 계신 하나님께 얼굴을 돌리고 그분과의 살아있는 관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의 멍에요, 그렇게 사는 것이 예수님의 삶이다. 그 삶을 살아갈 때 종말에 누리도록 예정되어 있던 하나님의 메누하를 지금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있어 모든 날은 동일해진다. 그 사람은 언제나모든 일모든 생명에게 이롭도록 행하면서 하루 하루를 충만하게 살아간다. 그 삶은 결코 생명을 고갈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일할수록 생명력이 더 충만해진다.


월터 윙크(Walter Wink)는 베자 사본 누가복음 64절에 첨가되어 있는 한 구절을 소개해 준다. 그 사본에는 다윗의 진설병 이야기 끝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같은 날에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어떤 사람을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안다면 당신은 복된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을 모른다면 당신은 불행한 사람이요 율법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월터 윙크는 이 구절이 예수님이 실제로 한 말씀이 아닐 가능성은 높지만 그 사상만큼은 예수님의 의도와 일치한다고 믿는다 2)



. 위의 논의의 빛에서 볼 때, 틀림없는 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시야로 세상을 보시고 새로운 태도로 인생을 사셨다. 안식일 즉 참된 안식의 날은 이미 와 있다! 천국이 이미 와 있는 것처럼! 이 새로운 세상에서는 천하가 모두 성전이고, 무슨 일이든 제사로 드려질 수 있었고, 그렇게 사는 사람은 모두 제사장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거룩한 시간과 거룩하지 않은 시간의 구분이 있을 수 없고, 거룩한 장소와 거룩하지 않은 장소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 있어 이 땅은 이미 천국이고, 이 삶은 메누하이며, 이생은 곧 영생이 된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매일 안식일을 범하고 있는 셈이며, 어딜 가나 성소를 모독하게 되고, 무엇을 하든 인생을 허비하게 된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하루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던 일벌레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분의 외형은 그렇게 보였다. 그렇게 오해할만한 말씀을 남기신 바도 있다. 그분이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 가에서 한 병자를 고치셨을 때 유대인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비판하자, 그분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 뒤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반응(18)을 보면, 그들이 예수님께 분노한 것은 안식일을 범했다는 데에만 있지 않았다. 더 큰 이유는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말씀에 담긴 뜻을 알아챘다. 한 인간으로서 김히 안식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있다니! 수고로운 노동을 하다가 인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감히 하나님의 메누하를 넘보다니! 안식일에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을 고치실 때 하신 말씀에도 같은 뜻이 담겨 있다. 그분은 말씀하신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9:4). 이 말씀에 유대인들은 분개한다. ‘네가 하나님이냐?


이 말씀들은 예수님의 일이 고된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칠일에 창조하셨다는 메누하의 사역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설사 그분이 끊임없이 일했다 하더라도 그 일은 자신의 목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소진시키는, 언젠가 멈추어야 할 일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의 일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할 거룩한 일, 모든 존재를 이롭게 하는 일이었다. 그 일이 하나님의 존재의 속성이다. 그분은 스스로 존재하여 모든 존재를 이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것이 안식 중에 하시는 그분의 일이다. 이 일에 예수님께서 참여하신 것이고, 그 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6:31)를 염려하며 동분서주하는 일로부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6:33) 작은 일에 정성을 다하는 삶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이 일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1:2) 인생이 아니라 다 이루었다(19:30)고 말하고 갈 수 있는 인생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삶의 태도를 위해 일을 멈추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인생을 축하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복을 나누는 안식의 시간(‘사밧)은 필수 불가결의 요소다. 탈무드는 증언한다.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이스라엘을 지켰다!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은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정신을 지켜 준 것은 그들이 생명은 걸고 안식일을 지켰기 때문에,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안식일의 정신을 지켰기 때문이다. 안식일 정신을 지키기 위해 안식일의 외형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 주기적으로 외적 활동을 멈추고 전혀 다른 일에 전념하는 것이 안식일의 외형이다. 이 외형이 정신을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없이 정신을 지킨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안식일 준수가 십계명의 하나로써 천명되었다.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에 관한 세 개의 계명과 이웃에 관한 여섯 개의 계명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이것도 매우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이웃과의 관계로 이어지는 통로가 안식일 준수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삶의 방식은 안식일의 외형과 정신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물론, 그분은 당시 유대인들이 하던 대로 안식일 제도를 지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안식의 시간을 지키고 안식의 정신을 지키는 일에는 누구보다 철저하고 진실하셨다. 그분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분은 매 순간 그리고 매일 안식을 실천하셨다. 사람들이끊임없이 찾아와 그분을 뵈려 했고 그분도 요청이 있는 한 정성을 다해 그들을 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일상은 결코 한가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시간을 구별하여 하나님과 함께 머무는 시간을 그분은 잊지 않았다. 그것은 메누하(안식)의 삶을 지속하기 위한 매일 매일의 사밧(안식 시간)이었다. 밤이 되면 깊은 산으로 혹은 한적한 강변으로 가서 머무셨고, 이른 아침에도 그렇게 하셨다. 자고 나면 사라지고 없는 선생님을 찾으러 다니는 것이 제자들의 매일의 첫 일과였다.



그분은 사람들이 모여 당신의 말씀을 듣고 눈이 열리는 것을 볼 때마다 잔치를 베풀고 삶을 축하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을 먹보요 술꾼이라고 비난했다 3)



. 그분의 삶의 태도는 생산적인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며 세월을 죽이는 한량처럼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분은 그것을 소명으로 여기셨다. 축제를 모르는 세상에 축제를 회복하는 것! 마르바 던(Marva Dawn)잠시 진행되고 마는 안식일 축제는 우리가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축제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4)



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예수님이 자주 베푸셨던 잔치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그분은 개인적으로 단순하고 검소하고 가난하게 사셨으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자주 잔치를 베푸심으로써 인간 삶의 본질에 대해 눈뜨게 하셨다. 그 잔치는 흥청망청 소비하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그분 자신이 폭식을 즐기는 분도 아니었고, 그분의 동류들이 그럴만한 돈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조촐한 식탁에서 나누는 의미 깊은 교제가 그분의 잔치의 특징이었을 것이다. 잔치를 베푸는 그 시간이 곧 안식일이었고 그 잔치가 곧 안식일 예배였다. 실제로 그분은 공생애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갈릴리 회당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더 이상 안식일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분이 돌아다니며 베풀던 잔치는 안식의 정신을 거부하고 배척하던 회당의 안식일 예배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었던 것이다.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하거늘




기독교 세계 내에 안식의 중요성을 일깨우는데 큰 공헌을 한 마르바 던은 아주 의미 깊은 용어 하나를 만들어냈다. ‘사회적 안식(social rest)이라는 말이다) 위의 책, p. 88. 이 책은 주일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서 안식일 정신과 실천을 부정적으로 취급해 오던 개신교 세계에 의미 심장한 변화를 일으켰다.



.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social unrest’라는 표현은 흔하게 볼 수 있지만, ‘social rest’라는 말은 거의 볼 수 없다. 마르바 던은 안식의 정신이 개인적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사회의 모든 차원에 깊이 스며들어 질적인 변화를 일구어내도록 되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억지같이 보이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훌륭한 저자는 이렇듯 말 한마디로 독자들의 의식을 활짝 열어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안식일 정신은 내면에서부터 시작하여 외면으로, 위로부터 시작하여 아래로,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여 사회로, 은밀한 곳으로부터 공개적인 장소로, 조용한 시간으로부터 분주한 시간으로 연장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예언자들은 이 점을 잊지 않았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키는 안식일과 축일 제사를 하나님께서 혐오하신다고 대언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1:15-17).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59:3-4).


아무리 자주 멈추어 메누하를 축하하고 나눈다 해도 개인의 내적 경험으로 그치고 만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사치일 뿐이며 하나님께는 가증한 일이다. 그런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바다. 아니, 개인적 경험으로 끝나고 말았다면 진정한 메누하를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율법적으로 안식일 규정을 지키고 말았다는 뜻이다. 안식일의 형식을 통해 진정한 안식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복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갈 수 있도록 뭔가 하고 싶은 열망에 이끌린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모든 일을 모든 생명에게 이롭도록 섬기는 변화가 일어난다. 그 섬김의 삶이 사회적인 안식을 끌어온다. 이 땅에 요순 시대에 있었다는 태평성대가 온다 해도 그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할 수 있는 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이 땅에 이루도록 노력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지 권한이다.


공적 사역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은 당신의 사역이 옛 이사야가 예언했던 그 희년의 사건들을 일어나게 할 것이라고 공언하신다(4:18-21). 당신의 사역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에서 해방되고 포로들이 속박에서 벗어나고 눈 먼 사람들이 보게 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선언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고 말씀하신다. 이것만을 두고 보면 사회 혁명을 하겠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시작하시는 사역이 개인의 변화로부터 시작하지만 결국은 사회정치적인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비전을 천명하신 것이다. 그분의 사역 기간 동안 대대적인 사회정치적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지난 역사를 돌아 볼 때 그분의 삶과 가르침은 이 세상을 가장 의미 깊게 변화시켜 놓았음을 발견한다. 때로 그분의 가르침을 오해하여 무력으로 사회를 개조시키려는 실수를 반복하기도 했지만, 그분의 정신을 제대로 알고 따른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는 이룰 수 없는 참된 변화를 만들어 내는데 공헌했다.


여기까지 가야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안식일에 대한 이 모든 논의는 한가한 탁상공론이 되고 안식일 정신을 진지하게 실천하려는 모든 노력은 여유 있고 한가한 사람이 누리는 사치가 되어 버린다. 안식일 정신은 인간 삶의 본질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그 본질에 늘 성실하도록 이끌려는 하나님의 배려다. 가난하든 부하든, 한가하든 분주하든, 배웠든 못 배웠든, 이 정신은 참된 인생을 일구는 데 있어 필요 불가결의 요소다.


이 글의 서두에서 나는 어느 독자로부터 받은 질문 하나를 소개했다. 이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안식일의 정신을 충분히 소개하지 못한 상태에서 구체적인 응답을 주기에 주저되었다. 하지만 이 글을 여기까지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그 친구는 다른 사람에게 찬양 인도를 맡기고 친구의 결혼식에 참여해도 주일 성수를 위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동의할 것이다. 다만, 친구 결혼식에 참여하는 일을 예배처럼 섬기려는 마음 자세가 준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놀러 가는 것이 되면 주일을 범하는 것이다. 물론, 찬양 인도를 선택했다 해도 공명심으로 혹은 제 잘난 맛으로 그 일을 한다면 그것도 역시 주일을 범하는 것이다. 그 친구가 어떤 일을 선택하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선택한 그 일을 통해 메누하를 경험하도록 정성스럽게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로서는 아래와 같이 답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 신앙을 실제 생활 속에서 실천할 경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별하여 그대로 행하면 쉬울 것 같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성격에 반하는 것입니다. 기본 정신이 무엇인지를 이해한 다음 매일 매일의 상황 속에서 정직하게 선택하고 결단해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주일 성수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주일에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나누어 곧이곧대로 지키면 수월할 것 같습니다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일 성수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맞는 결단을 해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결단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충분히 상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편의대로 합리화시킬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번에 그 친구 분이 내린 결정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한번으로 심판 받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걸음마를 통해 온전한 걸음을 걷기까지 기다리시는 분이지, 한번 넘어졌다고 와서 때리는 분이 아닙니다. 이번에 고민하고 결정을 하시면, 그 결정이 어떤 것이든 앞으로의 신앙적 결정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두 분의 신실한 마음에 찬사를 보냅니다. 하나님께서 두 분의 영혼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하며 살얼음판 걷듯 행동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 안에서 밝게 뛰어 노시기 바랍니다.





(1) Ferdinand Hahn, The Worship of the Early Church, p. 15.


(2) Walter Wink, The Human Being: Jesus and the Enigma of the Son of the Man (Fortress, 2002), p. 72.


(3)먹보요 술꾼이라는 별명은 어느 정도 사실을 담고 있는 동시에 거짓도 담고 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진 별명이 다 그렇듯이! 이 별명에 담긴 진실은 잔치가 그분의 공적 사역의 중요한 요소였다는 사실이다. 다른 한 편, 이 별명은 그분이 폭식과 폭음을 즐겼다는 인상을 주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이 이 별명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의도했던 점이다.


(4) Marva Dawn, Keeping the Sabbath Wholly (Eerdmans, 1989), p. 153.

복음과 상황 양희송 실장




ekosta: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자신의 소개를 간단하게 해주시겠습니까?프로파일에 보면 온누리 교회 대학부 회장, 잡지 전하세 예수에서도 일하셨고, 올네이션 경배와 찬양에서도 일하셨는데, 일반인들이 보기에 성향이 좀 다른 공동체에 있으셨는데, 두 공동체를 연결하는 고리가 있으신 건지 생각이 바뀌신 것인지요?


양희송: 지 금은 복음과 상황 편집장을 맡고 있고 학원복음화 협의회에서 캠퍼스 사역연구회 연구실장을 맡고 있고9월부터 복음과 상황에만 전념할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래 학부 전공은 전자공학인데, 지금은 문서사역, 기독교 문화사역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고, 전공을 많이 떠나있기 때문에 그점에 모범은 안되겠지만 지금 크리스챤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복음주의, 문화에 대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 양한 단체를 거쳐갔기 때문에 당신의 정체가 뭐냐 궁금해하시는 분도 있고, 상반된 듯한 두 종류의 단체나 영역 속에 갈등없이 사는 것처럼 보여서 저 사람?대단하게 일관된 사람이거나 정말 정신없이 사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시는 것같애요. (웃음)


대 학 입학 하면서 다녔던 교회가 온누리교회에요. 개척 이듬해 아파트 모델하우스에서 200명 모이던 때인데요, 그때 두란노 경배와 찬양이 기타와 피아노 놓고 시작한 때에요. 그 교회가 이제 몇 만명 수준이 되는 것을 직접 보았고, 경배와 찬양도 초창기에 3년 정도 대학부 다니면서 헌신자로 모임을 섬겼었죠. 그러고 나서 대학시절에 기독인연합운동, 서울대에서 서기연이라고 있었는데, 연합 찬양운동인 뜨인돌이 91년도에 만들어졌는데요. 거기에 몸담고 있었던 사람들은 경배와 찬양 운동의 첫번째 혜택을 받고 있었던 찬양 리더들인데, 그것 이상의 뭔가가 필요하다, 우리가 직접 만든 노래, 찬양이 필요하다. 메세지가 한국의 상황과 고백에 맞는 기독운동을 하자 이런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경배와 찬양과 놓고서 흔히 대립구도로 이해를 하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니고 경배와 찬양운동을 계승하면서 한 단계 더 나가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죠.


온 누리교회를 10년 정도 다니고 나서, 온누리 교회에서는 오래 다닌 사람들은 나가라고 하거든요. 대형교회에 있었던 기간은 있을 만큼 있었다 생각이 들었고, 예수마을 교회라고 봉천동 YWCA에서 예배드리는 작은 교회에서 섬기고 있습니다. 밖에서 보면 대형교회와 작은 개척교회가 대비가 되는 것이지만 저로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습니다. 내부적인 모순이나 갈등없이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복 음과 상황은 99년부터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 다시 95년도에 서기연에서 잡지를 내겠다고 하는 계획이 있었는데, 계간지로 3년도 만들었습니다. 창간해서 폐간까지 했고, 그 계간지가 끝날 무렵 99년부터 복상 편집위원으로 요청을 받았고 영국으로 신학 유학를 떠났다가 3년반 공부했었고 돌아와서 학복협에서 일하다가 복상에서 금년도부터 편집위원 겸 편집장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ekosta:학복협부터 시작해서 매우 다양한 운동에 참여하신 것같은데요.


양희송: 학복협이 처음 시작된 때는 교회에서 참여했고 선교한국이나 학복협을 계속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2003년부터 간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표면적으로 다양해보이지만 연합운동, 문화, 복음주의 운동이라는 그림에서 본다면 다양해보이지만 그 안에서 통일된 것이었습니다.   ekosta: 실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실장님의 사역에 뜨인돌이 중심에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양희송: 지 금의 복음과 상황이 내걸고 있는 복음의 빛으로 역사와 사회를 조명한다는 기치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양쪽 날개로 하는 복음주의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인데, 시작할 때 있었던 경배와 찬양의 장점이라면 전도, 선교에 강점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는 뭔가 결핍된 것이 있다 그 필요를 감당하기 위해 시작된 운동이 뜨인돌 운동이겠습니다. 예배 전도를 생각하면서 한국 역사, 현실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그렇게 노래하려고 노력했죠. 그렇게 하려면 공부를 해야합니다. 신학적인 오리엔테이션도 필요하죠. 한국교회사에 대해서도 공부해야하고 한국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공부도 해야하고. 뜨인돌은 노래 운동이기 때문에 결과물은 공연아니면 노래해야되잖아요. 그래서 또하나의 창의력이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에 훈련이 요구되었어요. 어떻게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 복음주의적 가치들과 이부분을 내부적인 모순이나 갈등없이 긴장은 필요하지만 신앙적으로 모순이 되지 않고 통합적인 시각에서 풀어내가 위한 훈련을 뜨인돌에서 많이 한 셈이고 지금 복음과 상황에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 런 훈련이 없었다면 복음과 상황이라는 잡지가 분리되는 시각에서 또 하나의 편향이 되는, 복음주의 독자들을 설득할 수 없는 이런 길을 걷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같은 경우는 복음에서 확장해왔기 때문에 뜨인돌의 경험이 지금 복상의 방향이나 스펙트럼을 잡는 데는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ekosta: 코스타의 주 참여자들, 20대 후반 30대 초반은 90년대 학원복음화협의회을 많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복음, 민족, 역사 집회도 있고요. 사실 그 이후에는 학복협의 활동이 그다지 활발하지 못한 느낌이 드는데요, 2003년에 직접 참여하면서 느끼시는 학복협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양희송: 일단 학복협 일은 공식적으로 일년 반밖에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적인 견해는 말하기 어렵겠지만, 학복협이 출범할 때부터 학생으로 학복협을 지켜보아왔기 때문에 흐름은 말할 수 있을 것같애요.


초 창기 학복협은 없던 연합운동을 만들어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형집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기도 했고 효과도 있었죠. 초창기 3년에서 5년 지난 상황에서는 이런 방식의 대형집회가 최선인가 하는 평가를 했고 집회 포멧이나 방향성에 변화를 해나가면서 여러가지를 실험했죠. 대형집회를 갖고 일을 하는 것은 더이상 요구되지 않다고 내부적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연합단체가 일을 많이 하면 지역교회와 학생선교단체 고생을 하게되요. 일은 최소로 줄이고 ,대형집회를 줄였고 수면아래에 있는 인프라를 만드는데 주력했던 것 같아요. 영국 유학을 갔다 와서 내부에서 보니까 학복협이 행정적으로 상당히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연합운동에 상당히 긍정적이고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연 합운동가가 전면에 나서면 그 연합운동의 위기가 생깁니다.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연합운동에서는 운동하는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많아서 멤버쉽단체들이 불편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학복협은 그런 면에서 비교적 일찍부터 멤버쉽에 도움을 준다, 학생선교단체들이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써포트하는 방향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일년 내내 필요한 사역들이 수시로 돌고 있고 일반대중을 위한 대형집회는 아니지만 선교단체 간사들을 위한 세미나, 컨퍼런스 등은 자주 열리고 리더쉽들이 매월 모여서 조찬모임 가지면서 사안들에 대해서 의논하고 있습니다. 개별단체들이 다 일하고 있지만 옛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연합의식을 갖고 동역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이런 점이 높이 평가받아야하고 학복협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학복협의 사역이 긍정적이고 성취도도 상당히 높고 봅니다. 펀드레이징을 통해 재정지원이나 간사훈련을 위한 트래이닝을 위한 프로그램, 인프라도 갖추었습니다.


작 년부터 시작한 것이 친구초청 에반제리칼 페스티발인데 이 집회는 연합사역으로 멤버쉽단체와 동역하는데, 더 플레이같은 뮤지컬도 들어가 있고, 서울에서 3회째하고 있는데, 굉장히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수적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왔고, 불신자들을 위한 새로운 컨셉의 전도집회로서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개별단체들이 친구초청을 하고 사후에 양육할 수 있게 되어서 기존의 전도집회의 맹점을 보안하게되었습니다. 연합단체가 내용을 충실히 준비하고 친구초청과 사후관리는 멤버쉽단체가 집중하는 좋은 모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전체적으로 이제 조금 성숙한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봅니다. 학복협은 조용히 뒤로 물러 서서 멤버쉽을 도와주고 써포트해주는 연합단체가 되는 단계라고 봅니다.


ekosta: 인터넷 카페로 복음주의 클럽을 운영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양희송: 제 가 인터넷 카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영국에 있을 때인데요, 외국에 있으면 다들 외롭고 고립됨을 느끼잖아요. 국내 흐름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릴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요. 후배가 사이월드를 소개해주어서 관심을 두고 있는 복음주의라는 이름으로 클럽을 개설했습니다.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내용의 글을 올리거나 안부 주고 받는 모임으로 사용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700명 이상 가입했고 1000명도 금방이겠다 싶습니다. 그 사이트는 기본적으로 복음주의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인데요. 이번에 제가 하는 강의, 복음주의의 마지막부분의 결론은 그러면 한국의 복음주의는 뭔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 리나라에서 복음주의를 말하는 그룹의 한계는 역사적 복음주의를 논하긴 하지만 실제 그래서 어쨋단 말이냐 이부분에 대해서 보다 치열하고 실용적인 진취적인 몸짓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이트에는 복음주의의 뿌리도 살펴보고 의미를 찾고자 하지만 현재 이슈에 대한 글들이 많이 올라와요. 이런 것들에 대한 갑론을박이 많이 올라오고, 관심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다른 곳에 이런 현실문제를 토론할 오픈된 공간이 없는 것같습니다. 자신들이 생각은 하고 있지만 교회 안에서 토론을 공유할 자리가 없으니까 이곳을 알음알음해서 찾아온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온라인 클럽의 특성상 모든 사람들이 활발히 활동하지는 않지만, 이런 공간이 잘 활용된다면 한국사회의 문제를 고민하고 소통하는 장이 될 것같습니다.


처음에는 소박한 것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코스타에 소개되면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것같애요. 1000명째 되는 사람에게 선물을 드려야겠는데요. (웃음)


ekosta: 복음과 상황에 대해서 질문드리겠는데요, 복음과 상황은 한국 복음주의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는데요, 새롭게 편집을 맡으시면서 어떤 방향을 구상하고 계신지요.


양희송: 복 음과 상황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잡지거든요. 복음주의권 기독청년들이 한국사회가 질문을 하는 것을 정직하게 답하기 위해서 만든 중요한 결실이라고 봅니다. 80년대 치열하던 시절에 고군분투하면서 만든 노력이 잡지로 결실을 맺었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 고민을 담아내는 한 매체를 비로소 갖게 된다는 의미인데요. 그동안 복상의 역사를 보면 좌충우돌하는 측면도 있었고, 복상자체도 미숙했을수도 있겠고, 한국교회가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인 점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굉장히 뜻이 있는 잡지고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죠. 김진홍 목사님, 홍정길 목사님, 이만열 교수님, 손봉호 교수님들이 공동 발행인으로 도움을 주셨고 또 여러 많은 분들이 참여하셨고 서재석 부장님같은 경우는 9년 이상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셨죠. 잡지가 그동안 많이 어려웠기 때문에 잡지가 죽는다 만다 하는 시기가 여러번 있었죠. 많은 분들이 몸으로 떼우다시피 고생하셨기 때문에 복상이 이제까지 살아왔고, 그동안 수고하신 분들의 역할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잡 지는 굉장히 많은 재정투자가 필요한 매체에요. 단행본은 계속해서 팔리지만 잡지는 유효기간이 한달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책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재정적 부담이 매우 큰 영역입니다. 그래서 잡지는 재정적으로 안정적으로 가기 힘든 구조를 갖고 있어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재정적인 서포트를 하셨는데 아직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지 못했죠. 그러다 보니까 일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부담이 실렸습니다. 올해 학복협의 이승장 목사님이 발행인으로 인수를 받으셨습니다. 저도 그때 같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한편 사회가 그동안 많이 변했습니다. 복상이 과거보다 더 세련되 지면을 가져보자. 변화된 세대의 독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그런 시도를 하고요. 지면을 섹션화시켜서 기사들을 정리하여 쟁점과 문화, 스토리 등을 구분했습니다. 컨텍스트를 명확히 주니까 독자들이 잡지의 칼라에 대해서 이해를 더 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잡지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복상은 기본적으로 목회자를 위한 잡지는 아니라는 점이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많이 보고 참조를 하지만 목회자를 생각하고 만든 잡지는 아닙니다. 근래 목회자와 평신도 그룹에 대해 조사해보면 목회자 그룹과 평신도 그룹의 인식이 차이가 매우 크게 나타납니다. 목회자들은 매우 보수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평신도들은 훨씬 중도적인 입장을 보여줍니다.


이 것은 목회자들의 의견이 교회내의 평신도들의 입장을 잘 반영하거나 대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회자들의 의견과 평신도들의 생각이 토론되는 장이 필요한데요, 평신도들이 동의할 수 있고 대표할 수 있는 보이스를 낼 수 있는 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평신도들의 의견들이 표현되지 못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 것같습니다.


그 런 면에서 복상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자리에 있다고 생각이 들고요.여러분들이 생각을 모아가야겠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복음주의가 신앙의 뿌리고, 그 스펙트럼이 확장됨으로써 많은 이슈를 다루어야하겠고 복상이 그 과정에 도움을 주는 것이 복상이 해야할 일이라 생각이 듭니다.


ekosta: 독자들이 주로 어떤 분들이신가요?


양희송: 정 기구독자들은 20, 30대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내용이나 논조에 대해서 동의하고 공유하는 그룹은 30대와 40대 그룹입니다. 20대는 예전에 당연시 했던 토대나 기초가 다른 그룹인 것같습니다. 복상이 전혀 새로운 독자들은 맞이하고 있는 시간인 것같습니다. 복상이 전제하고 있는 내용에 익숙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고 있는 세대입니다. 복상은 30, 40대와 호흡하고 새로운 세대를 견인하는 그런 잡지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학생들 전반적으로 책을 안 읽는 경향이 있고, 교회에선 개인의 신앙적인 고민외에 다른 압력이 적으니까 사회문제에 대한 고민이 아무래도 적게 되겠죠.


복상이 세계관 논쟁에 대해서 다룬 적이 있는데, 그것을 이해하며 좇아온 사람들은 세계관 공부를 한 사람들이었는데, 젊은 독자들은 세계관 자체가 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어요. 논쟁을 풀어서 진행했어야 옳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ekosta: 코스타와의 인연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고, 코스탄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해주십시요.


양희송: 복 음과 상황은 코스타와 직접적인 관련을 짓지는 못하겠지만, 복상과 관련된 분들이 곳곳에 계십니다. 김진홍 목사님, 홍정길 목사님 공동발행인이셨고, 성인경 목사님 전편집위원장이셨고, 간사님들 중 많은 분들은 필진이셨고, 뭐 이렇습니다. 간접적으로 많은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복상을 통해서 교류한 관계성이 있습니다. 과거에 서재석부장님은 코스타를 통해서 필진들도 발굴하고 독자들도 만나기도 했었죠.


해 외에 있으면 한국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잖아요. 뜻밖에 자리에서 복상과 연결된 분들을 만나게되는데, 이번에도 그런분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10년 이상씩 구독한 독자들도 나오더라구요. 복상의 가치에 동의하시는 분들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감사드리고, 저희들도 복음주의권의 고민을 담는 더 포괄적이고 세련되게 잡지도 만들고 내용도 복음주의에 더 충실한 매체를 만들고 싶고 코스타를 만드시는 분들도 이곳에서 자신들의 고민이 도움을 받고 복상이 자극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고요.


해외에서 읽는 매체가 많지 않지만 복상을 가까이 두고 한국에 대해서 관심갖고 예수님 믿고 어떻게 살아야겠는지 고민하는 과정에 가까이에 두고 보는 매체가 되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습니다.


ekosta: 인터뷰에 임해주셔서 감사드리고 내년에는 가족들과 함께 만나뵐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