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훈] 패자(敗者)들의 종교

이코스타 2002년 1월호

지난 봄 초 신문에 실렸던 기사를 떠올리며, 오늘날 기독교가 받는 도전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언론계의 빅 스타 부부라고 불리던 테드 터너와 제인 폰다의 이혼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세계적인 뉴스 전문방송사의 사장과 은막계의 대모와의 결혼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었고, 예상보다 오래(?) 지속되던 그들의 결혼생활은 환상적인 커플로서 찬사와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그런 그들이 10년 만에 돌아서는데는 많은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저의 눈길을 끈 대목은 터너 사장이 부인 제인과의 이혼 사유 중 종교적인 갈등도 한 요인이었다고 고백한 부분이었습니다. 자신의 아내와 같이 강하고 힘있는 여인이 패자들의 종교에 빠져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이 크리스천으로 거듭 났다고 선언하는 부인을 보며 아연실색했다는 것이니, 패자들의 종교란 바로 기독교를 지적하는 말이었겠지요. 언론계의 황제라고 자타의 인정을 받는, 세상의 힘과 권위를 자랑하는 한 남자의 눈에 비친 기독교는 깨지고 상처 입은 패자들의 우울한 집단으로 보였나 봅니다. 아마 그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을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하고 나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이니까요.


그러면 그가 생각하는 승자들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부인 제인 폰다는 이혼 사유의 한 가지로서 그의 어린애와 같은 집착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혼자 있는 일에 늘 불안해하고 외로워하는 그가 잠시도 곁을 떠나지 못하게 징징거리는 아이와 같이 그녀를 피곤하게 했다는 것이었지요. 양방의 불만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구축했다고 믿는 자신감에 가득찬 사람,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사람, 스스로 높은 자 되어 신이 필요하지 않은 그는 왜 그다지 허전하고 외로웠던 걸까요? 돈과 명예와 권력과 추종자들이 언제나 풍족했을 터인데 말입니다.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것을 가지고도 충족되지 않는 무엇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가진 거라곤 빈곤한 상황과 허약한 몸, 그다지 인정받을 만한 무엇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 말씀 하나 붙잡고 기쁨과 풍만함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지요. 아무도 비켜 갈 수 없는 죽음이라는 명제 앞에서조차 어이없을 정도로 담대한 패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승자(勝者)는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합니다. 아마 나약한 자들의 감상주의라고 비웃거나 집단 최면이나 보상 심리에 빠진 상태라고 분석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자주 부드러운 마음 상태나 태도를 나약한 것으로 오해하거나, 강팍하고 독단적인 마음과 태도를 강한 것으로 착각하곤 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강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나 존중심보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우거나 공적 가치관을 위해 달려가는 모습이 우리 사회에서 강한 자로 인정받는 일이 종종 있곤 합니다. 게다가 타인의 아픔이나 결여 상태는 외면하고 자신의 입신양명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멋진(?)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고, 사회적인 모범상으로 까지 부각되는지요. 이웃의 아픔 때문에 애통해하고 그릇된 사회의 흐름 때문에 절망하는 모습은, 또한 자신의 이웃과 보이지 않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은 너무나 감상적이고 나약한 사람들의 자기 연민에 불과한 걸까요? 화 나는 일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참고 용서하는 태도는 비겁한 태도이며, 이웃을 위해 내 몸을 걸고 보호하고 사랑하는 일, 오래도록 기다리는 일은 과연 누구나 할 수 있는 시시한 행위인지 자문해 봅니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데도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는 일에만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에게 돌을 던지고 침을 뱉으며 조롱과 모욕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고백하던 그. 그들의 어리석음과 도저히 벗겨낼 수 없는 두꺼운 아집과 죄성을 부수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부숴 버린 그는 과연 완전한 패배자였던 걸까요? 사랑은 사람을 강하게 합니다. 모든 어머니는 강하다는 표현의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어머니는 힘이 세고 권력과 명예를 가졌기 때문인가요? 자식에게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다 줄 수 있기에, 결코 포기하지 않고 참고 기다리는 믿음이 있기에 어머니는 강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자신의 피로 우리 안의 어둡고 더러운 것들을 씻어 주시기까지 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우리의 사망과 바꾸기 위해 값 없이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이보다 강함을 아직 이 세상에서 찾아 볼 수는 없다고 믿습니다.


세상에서 스스로 승자라고 자부하는 사람에게도 어느 한 순간 비켜갈 수 없는 절망과 슬픔이 엄습할 때가 있을 겁니다. 주변의 그 많던 사람 중에 진정한 친구를 찾을 수 없어서 배신감에 젖고 외로움에 지칠 때가 있을 겁니다. 막을 수 없는 시간, 젊음도 건강도 어느새 멀어져 가고, 물질과 명예는 늘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때 허망하고 억울해서 잠을 이룰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자존심 때문에 드러내지 못하는 외로움과 서글픔을 아무도 알아 주지 않고, 고통 중에 위로해 주는 이가 없을 때, 간혹 누군가 손을 잡아 주길 간절히 바라게 될 지도 모르지요.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병이 들어도 절망하지 않고 배신을 당해도 분노하지 않을 만큼 진정한 강함을 바랄 때 그분을 생각한다면, 당신의 이름을 불러 주실 겁니다. 사랑하는 심령으로 항상 눈물이 가득한 당신은 분명 패자가 아닙니다. 그분의 부르심을 받아 죽음의 숲에서 빛의 벌판으로 자유롭게 들어선 당신은 이미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서 유리하는 별들'(유다1:13)이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유다1:24) 되었습니다.


내적 혁명의 무거운 지진을 극복하는 진정한 승리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할렐루야!

[이시훈] 백설 공주 이야기 1

이코스타 2001년 12월호

백설 공주의 계모인 왕비는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아내를 잃은 왕이 마음을 빼앗길 정도로 아름다워서 주변의 이목이나 만류를 물리치고 맞아들인 여인이었을 겁니다. 처음 그녀가 왕실에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기도 하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전(前) 왕비의 기품 있는 모습과 온화한 인품과 비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공주를 돌보기보다는 자신에게 모든 관심과 시간을 쏟고 있는 왕비에 대해서, 그녀에게 온통 빠져있는 왕의 지나친 사랑에 대해서 사람들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 떠도는 계모에 대한 온갖 속설과 선입견들, 나쁜 계모들에 대한 무수한 사례들이 다 그녀의 몫이 되어 갔습니다. 왕의 잘못된 정치적 판단이나 인격적인 불찰도 그녀의 탓으로 돌려지기까지 했습니다. 악의적으로 조작된 그녀의 과거에 대한 그럴싸한 증거들과 부도덕한 루머들이 사람들의 호기심과 무료함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소문과 위증의 폭력으로 그녀의 행복은 박살 나 버렸습니다. 왕은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도, 신뢰하지도 않았습니다. 왕에겐 지켜야할 체면과 자존심이 한 여인의 상처를 위로하는 것보다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불행을 통해서 은밀한 즐거움을 맛보았습니다. 평범한 신분의 여인이 왕의 총애를 받는다는 건 얼마나 배 아픈 일이었는지, 그녀의 눈부신 아름다움은 얼마나 큰 질투의 대상이었는지. 타인의 행복은 결코 나의 기쁨의 원천이 아닌 것을 사람들은 깨달았겠지만, 타인의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자신의 가엾음을 깨닫지는 못 했나봅니다.


왕비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밝고 쾌활하던 성격은 우울하고 의심 많은 성격으로,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던 성품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조소하는 시각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그녀의 가장 큰 절망은 사랑 받지 못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각은 그녀에게 죽음과도 같은 어둠이었습니다.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자신, 누구의 관심과 염려스런 눈빛도 받지 못 하는 자신, 그리고 아무도 믿지 못 하는 자신.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어서 달팽이처럼 단단한 껍질 속에서 웅크리고 살아가는 여인의 마음에는 증오와 분노, 슬픔의 깊은 웅덩이가 패였습니다. 그녀의 유일한 대화 상대는 거울이었습니다. 거울은 또 하나의 자아, 그녀의 내면을 표출해 놓은 장치였을 겁니다. 거울조차도 이제는 그녀에게 아름답다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이제 스스로에게도 배반 당했습니다. 스스로를 사랑할 능력조차 상실한 거지요.


어느새 아름다운 숙녀로 자란 공주의 아름다움은 그녀의 모든 증오와 질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전에 그토록 혐오하던 인간의 질투심과 사악한 마음이 바로 그녀 자신의 성품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카인이 아벨을 질투한 것처럼,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질투한 것처럼, 공주를 지켜야 할 자가 그를 치는 자로 변해 버렸습니다. 질투와 경쟁심에 눈이 멀어 버린 겁니다.


사울이 다윗을 향해 정녕 죽이리라고 다짐했듯이 그녀도 총명하고 아름다운 존재, 모든 존귀와 사랑의 대상인 공주를 향해 광적인 분노를 품었습니다. 질투는 모든 죄악의 씨앗이 됩니다. 질투는 스스로를 찢고 상대를 상처 입히는 커다란 가시와도 같은 것입니다. 왕비는 공주를 질투했습니다. 사랑 받는 존재를 질투했고 아름다움이 인정받는 것을 무엇보다 더 질투했습니다. 카인은 인정받지 못함에 분노했습니다.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는 인간의 기본 욕망의 하나일 만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왕도 시민들도 거울조차도 그녀의 아름다움과 순수함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질투는 절망의 음습한 그늘에서 자라나는 독버섯과 같은 것입니다. 완전히 깨지고 절망한 그녀가 세상을 질투하고 분노하고 증오하며 결국 흉악한 마녀의 모습이 되어 버리는 것처럼, 우리 안의 죄성은 스스로 파멸의 길로 치달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능력이 그다지 충분해 보이지 않습니다. 거울을 붙잡고 아무리 수 없이 되물어도 거울은 흔한 위로의 말 한 마디도 건네주지 않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정녕 나는 나를 사랑하느냐, 정녕 나는 아름다우냐.” 이 물음은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일까요? 아무에게도 기댈 수도 없는 절대 절명의 외로움과 절망의 부르짖음에 누군가 대답해 준다면 당신의 아픔은 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요? 모두가 나를 비웃고 멸시해도 누군가 나를 위해 목숨마저 바칠 정도로 사랑한다면 자괴감에 시달리던 자아는 빛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남들에게 인정 받을 만한 것이 많지 않아도, 무한히 쏟아지는 사랑을 받고 있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얼마나 아름답다고 말하십니까 –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아가2:15)라고 고백하며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합한 아름다움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우리의 육신이 완전하지 못해도 이목구비가 바르지 못해도 그분은 우리의 아름다움에 도취해 눈을 떼지 못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 나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그의 사랑으로 나를 침묵하게 하시며 나로 인해 노래 부르며 즐거워하시는(스바냐3:17) 분입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절박한지, 해산하는 여인 같이 부르짖으며 나를 찾겠다고(이사야 42:14) 하시는 하나님의 뜨거움을 느껴 보십시오.


이 세상의 나는 것들과 땅에 기는 것들과 바다의 모든 것들과 산천초목을 다 주시겠다고 누리고 정복하라고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짝사랑을 받아 들인다면, 무엇에 상처받고 무엇을 질투할까요.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 사랑받는 존재라고 깨닫는 순간 부서진 자아는 더 단단한 형태로 회복될 것입니다. 나는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소중한 존재, 유일한 존재이며, 당연히 사랑 받아야 할 대상이며 넘치게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인정받고 있습니다.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든든한 품 안에서 기쁨과 평강을 누리시길….

[이시훈]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이코스타 2001년 11월호

소설가 서영은씨의 초기 작품 중에 한 여인의 감정에 대한 묘사가 뛰어난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제목은 잊었지만 내용이나 서술이 기억에 남는 그런 작품입니다. 주인공은 별로 자신감이 없는 수수한 여인, 다른 이의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하며, 스스로를 가꾸지도 않는 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어느날 사랑에 빠집니다. 축복 받을 수 없는 형태의 사랑이었지만,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힘겹고 지고지순하게, 어쩌면 목숨을 건듯이 처절하게 그 사랑을 지켜 나갑니다. 자기를 이용만 하려 하는 남자에게 그토록 성실하게, 사회적 지탄도 외면하며 사랑에 매달립니다.


중요한 것은 그 여자의 변화입니다. 평소처럼 부스스한 차림으로 시장에 가려던 그녀는 아, 우연히 그를 마주치면, 하는 생각에 다시 들어와 단장을 하고 나가지요. 장에서 물건 값을 깍으려다 그가 보면, 하면서 너그럽게 행상 노인에게 값을 치릅니다. 그녀의 모든 행동과 차림새에 그를 떠올리며 점점 나은 여인의 모습이 되어 갑니다. 언제나 그녀의 내부에는 그가 의식되어지기 때문에 그녀는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고, 그녀가 치르는 헌신적인 사랑이 기쁨이 됩니다. 그녀에게 사랑은 강한 구속이며, 삶을 지탱하는 끈이 되어 갑니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의욕의 원천이 되어 줍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속성, 이기심 때문에 그 사랑은 짓밟히게 되어 버리지요. 소설에서는 표현되지 않은 뒷부분이 그리 아름답지 않은 것이었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누구나 한번쯤 경험했을 사랑의 구속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직접적이지 않고 강제적이지도 않은 이 구속감! 사랑의 기대감 같은 것. 혼자 있을 때에도 수 없이 자신에게 말을 걸며 자신을 되돌아 보게하는 이 구속감을 힘겹게 생각하거나 불행하게 받아 들이는 사람은 아마 없겠지요.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생기찬 모습을 보면 말입니다. 얼마 전 먼 곳을 여행하면서 고속도로를 달리며 재미있는 경험을 했습니다. 막 달리던 차들이 갑자기 속도를 줄이고 얌전하게 달리다가, 조금 지나면 다시 마구 속도를 내며 이리 저리 주행선을 바꿔 댑니다. 바로 레이져 감시 탐지기를 전후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감시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시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무심한 것일까 하는….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존재를 얼마나 자주 망각하고 있는지, 나를 사랑의 기대감으로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구속에 대하여 얼마나 자유(?)로운지. 보이지도 않는 그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그분의 현존을 그렇게도 확신하면서도 실제로는 아무 거리낌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모순.


아무도 보는 이 없이 홀로 그와 대면하고 있는 고요한 순간, 나는 마치 벌거벗은 아이와 같은 데도 감추려 하는 것이 많고 심지어 속이려 하고…. 지금 이곳에서 그가 나를 보고 있다면, 나는 분명 다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더 온유하고 단정하고 밝아지려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그가 귀 기울이고 있다면, 성내고 비판하고 있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을 겁니다. 내 마음 속에 일어나는 온갖 사악한 생각과 행위의 그릇됨이 부끄러워 차마 계속 죄를 저지를 수 없겠지요. 내가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그를 찾듯이 순간 순간 그를 발견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하는 열망을 품어야 하겠지요. 나의 한 없는 사랑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며 그 또한 무한한 사랑을 내게 주기를 약속하였기에 나는 기쁨의 구속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이고 인위적인 감시망 보다 내 안에 있는 빛을 두려워 하며, 그 빛에 이끌려 밝은 곳으로 가는 아름다운 영혼. 바로 이 순간 나를 변화시키며 아름다운 우정을 쌓기를 바라시는 그분, 끊임 없이 대화를 나누기를 원하시며, 아무도 없는 고요함 속에서 내 존재의 중심이 되시는 그분, 내가 만난 그분을 나는 사모합니다. 그 사랑의 간절함으로 그를 찾고 부르며, 내가 나 아닌 아름다운 존재로 거듭 나길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