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훈] 편지

이코스타 2002년 9월호

나는 사랑에 빠졌답니다.


그는 나를 위해 창밖 가득 꽃과 나무를


심어 놓았습니다.


나뭇잎이 반짝일 때 마다 그의 웃음을


꽃잎이 흔들릴 때 마다 그의 미소를


떠올립니다.


바람으로 내게 다가와 수많은 이야기들을


속삭이는 그도 사랑에 빠진 것 같습니다.


나를 보기 위해 햇살이 되어버린 그


나를 지키기 위해 별이 되어버린 그.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참으로 오래 기다렸건만


성내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에 넘쳐 달려온 그의 따스한 품을 기억합니다.


그는 조용히 흐르는 강물입니다.


그의 앞에 앉아 나를 들여다 봅니다.


그리고 나의 손과 발을, 혀와 눈을 닦습니다.


아무리 씻어도 사라지지 않는 얼룩을 그에게


보여주었을 때


그는 하염없는 눈물로 그것을 지워 주었습니다.


나는 사랑에 빠졌답니다.


생의 어느 한 순간에도 그를 잊지 않고


생의 작고 작은 부분에서도 그를 느낍니다.


하늘 가득 노을이 물든 저녁


떠나가는 철새들의 무리를 바라 보다가


문득 외로워져 돌아보면


언제나 그가 가까이 다가와 노래를 들려 줍니다.



낡은 외투처럼 남루하고 무거운 삶을 끌고 가던


지난날 그를 만난 곳은 뜨거운 사막이었으나


그는 내게 별이 쏟아지는 사막을 보여 주었습니다.


언제나 걷던 길에서


언제나 만나던 사람들에게서


언제나 하던 일들에서


볼 수 없었던, 들을 수 없었던, 느낄 수 없었던


그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내안에 들어 옵니다.


용서할 수 없던, 참을 수 없던, 견딜 수 없던


그 모든 것들이 내 안에서 떠나버렸습니다.


나는 사랑에 빠졌답니다.


그도 사랑에 빠졌답니다.


세상은 온통 빛나고 있습니다.

[이시훈] 열망

이코스타 2002년 8월호

월드컵 잔치가 끝난 지 벌써 3주 째 접어들고 있지만 그 열기가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음을 느낍니다. 붉은 셔츠를 입은 사람들을 아직도 길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고, 각종 매스컴에서 감격의 순간들을 반복하여 재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잊을 수 없는 감격과 희열,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우리 사회에 흔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지난 역사와 현재의 사회상을 반추해 볼 때, 우리 민족이 얼마나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어 왔는지 가슴 아플 때가 많습니다. 이번 월드컵 경기를 통해 우리가 가슴 속 깊이 묻고 있던 회한과 상처들의 많은 부분들이 치유되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가치관과 생각, 모든 이해 관계를 뛰어넘는, 하나로 일치하는 마음과 정신의 힘을 느낄 수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오랫동안 우리를 불행하게 하던 패배의식을 극복하게 하였습니다. 작은 힘들이 모여 커다란 하나가 되는 놀라운 체험. 그 어느 때 공권력을 동원하여도 모을 수 없었던 단결된 모습이 자율적인 의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더욱 값지게 느껴집니다. 시청 앞거리와 온 거리를 가득 메운 거리 응원의 물결과 각 가정에서 직장에서 열렬한 응원을 보내던 마음들. 저는 그것이 바로 하나로 모아진 기도의 힘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룹 중보기도의 모범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지요. 온전히 하나로 마음을 모아 진정한 열망을 표현하는 것. 모든 상처와 아픔을 다 드러내고 이제 무언가를 위해 진지하게 나아가길 원하고 구할 때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자애를 경험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외세의 침략과 민족 간의 전쟁으로 찢기고 상처받은 척박한 작은 땅의 슬픈 역사를 돌이켜 볼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 민족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들에겐 꿀과 젖이 흐르는 땅에 대한 꿈이 있었고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고난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겠지요. 그동안 우리 사회에 과연 온 민족이 한 마음으로 지향하는 그 무엇이 있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 모두가 이룩해야 할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푯대를 가슴 속에 담아 본 적이 있었는지, 타오르는 열망으로 가슴이 설레고 뜨거워져 본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저는 거리를 메운 인파들의 함성이 찬양과 기도로 바뀌는 날이 오기를 꿈꿉니다. 우리 사회에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정직하고 성실한 정치인들이 많아지기를, 모든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고 아끼며 신의를 지키는 관계를 맺기를, 아프고 지친 이웃이 내 가족이 되는 열린 사회가 되기를, 주님이 주신 계명이 실천되는 세상,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그 날을 꿈꾸며 기다립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전도의 열망이, 복음의 육화(肉化)에 대한 사명의 열망이 뿌리내리길 기도합니다. 우리 사회와 역사를 향해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의 강에서 모두가 생수를 구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세계를 향해 넘치는 축복을 되돌리는 샘물 같은 역할을 우리가 감히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견딜 수 없는 기쁜 소식을 전하며 춤추고 노래하는 축제가 월드컵 경기장에서의 열광처럼 우리를 사로잡기를 기도합니다.

[이시훈] 백설공주 이야기 2

이코스타 2002년 6/7월호

백설 공주의 왕실에서의 삶은 어쩌면 무척 외롭고 고립된 생활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곁에는 늘 자상한 유모가 있고 작은 일 조차도 다 거들어 주는 시종들이 있었겠지요.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움과 총명함을 칭송하는 많은 사람들의 호의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아버지의 다정함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가득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봅니다. 무엇보다 그녀와 새 왕비를 비교하는 사람들의 호기심과 새엄마의 광기 어린 질투심은 어린 공주의 마음에 커다란 가시로 자리하고 있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그 누구보다 고립되어 있고, 마음 한편에 언제나 깊은 그늘이 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모든 환경이 열악하기만 숲 속에서의 생활이 처음부터 순조롭고 즐거웠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청결하지 못한 주변 환경, 비좁고 불편한 집안, 거친 잠자리, 형편없는 음식과 의복…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부족한 생활은 그녀를 절망하게 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왕실에서 특별한 잔치가 있을 때나 볼 수 있었던 어릿광대 같은 난쟁이들이 일곱 명씩이나…. 맙소사! 어린 공주가 느꼈을 막막한 절망과 공포를 상상해 보십시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동물들의 울음, 귀귀스런 바람 소리. 도무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익살스런 얼굴의 난쟁이들, 이제 스스로 먹을 것을 해결해야하고 생존해야한다는 엄청난 부담.. 동화 속에 그려진 즐겁고 아름다운 숲 속의 생활이 결코 처음부터 가능한 것은 아니었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난장이들은 사회적으로 어떤 존재들이었을까요? 그들은 어릿광대의 역활을 강요당하며 살아가는 천민 계급에 속한 자들이었고, 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 받는 계층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스스로 사회를 등지고 숲 속 깊은 곳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서로 도우며 살아갑니다. 매우 작은 형태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들의 공동체 생활에 어느날 예쁘고 총명한 천사와 같은 공주가 끼어 들게 되면서 우리들의 동화는 꿈과 같은 드라마를 엮게 되는 거지요.


소외된 자들과의 공동체적인 삶은 공주를 변화시켰을 겁니다. 더 이상 절망에만 기대어 있을 수 없이 바쁜 생활이 시작된 겁니다. 광대로만 보이던 난쟁이들과 협력해서 더 나은 생활 환경을 이룩해 나가는 동안 그들을 동등한 인격체로서 재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왕실에서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던 모든 것들을 스스로 구하는 능동적인 자세로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난쟁이들과의 따뜻한 관계와 한 가족으로서 동행하는 삶 속에서 소외된 이웃을 향한 사랑을 배우고 의식의 전환을 갖게되었습니다. 비록 우스꽝스러운 외모를 하고 있을지라도 그들도 자신과 같은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존재, 사고하는 존재, 그 안에 하나님의 동일한 숨결을 간직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공주는 매우 성숙한 의식을 갖게 되었고 무엇 보다 소중한 사랑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왕실의 공주라는 위치를 잃은 것은 커다란 상실로 보입니다. 그러나 공주가 내적으로 얻은 변화와 성숙의 의미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것입니다. 받기보다는 베푸는 생활, 사랑을 주고 받는 삶, 실천하는 삶의 의미를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고 성숙한 인격을 가졌다해도 우리는 유혹 앞에 나약한 존재입니다. 공주의 앞에 나타난 마녀의 유혹은 얼마나 달콤한 것이었는지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한 탐스러운 사과를 아무 의심 없이 베어먹은 공주는 영원한 잠 속에 빠져듭니다. 영원한 잠이란 의식의 무방비를 의미합니다. 잃어버린 자아, 사랑의 부재, 관계의 단절, 죄에 대한 불감증… 이러한 것들이 완전한 어둠, 영원한 잠으로 상징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내재한 죄성으로 인해 영원히 잠들 수밖에 없던 우리에게 거룩한 입맞춤으로 우리를 깨워 주시는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날 때 우리의 존재는 거룩함을 회복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백설 공주는 드디어 왕자님의 손을 잡고 영원한 왕국을 향해 걸어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치렵니다. 혹, 당신은 잠자는 공주님이십니까? 이미 왕자님의 키스를 받았음에도 눈치 채지 못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 전서 13 : 11)

[이시훈] 고백

이코스타 2002년 5월호


” 향나무처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제 몸을 찍어넘기는 도끼날에
향을 흠뻑 묻혀주는 향나무처럼
그렇게 막무가내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 최 문자 “고백”


한 시인의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자신을 상처 입히고 괴롭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자신의 향기를 남겨 주고 싶은 소망. 그러나 그렇게까지 아름답지 못한 자신의 한계를 반성하는 일은 원망하고 비난하는 일보다 몇 배나 더 힘든 일 같습니다. 흔히 말하듯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공식이 만연한 시대에 우린 살고 있습니다. 자존심이 긁히는 일은 도저히 참을 수 없고, 손해 보는 일도 절대 용납 할 수 없는 것이 현명한 사람의 자세로까지 비춰지기도 합니다. 친절함, 배려하는 마음, 양보하는 마음이 미덕으로 인정받기보다는 조금 어리숙하거나 힘없는 자의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까지 전락되어 버리거나, 사회적으로 적응력이 부족한 태도로 보여지는 현실이니까요. 누군가에게 받은 은혜는 받은 만큼 돌려주고, 받은 상처나 모욕은 배로 갚아줄 때 속이 후련한 것이 보편적인 속성이 아닌지요.


우리는 개인적인 관계에서 비난당하거나 손해를 입거나 배신을 당한 크고 작은 경험들을 가지며 살아갑니다. 그러한 일들은 우리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불신감이나 냉정한 인간관계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받은 아픔만큼 되돌려 주어도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또 다른 종류의 상처를 더할 뿐이지요. 역사를 돌아볼 때 보복으로 인한 결과는 인류에게 재앙과 반복되는 악의 근거를 제공했고, 승자는 없이 패자만을 남게 했습니다. 개인이건 한 사회건 누군가 보복의 고리를 끊음으로써 공멸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내가 참고 양보해야하지 라는 질문이 내부에서 자신을 흔들겠지요.


향나무를 찍는 도끼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든든하고 아름다운 한 그루의 나무가 잘리우는 것은 안타까운 일임에 분명하지만, 그 아픔을 통해 나무는 훌륭한 가구가 되어 쓰임을 받기도 하고 악기가 되어 영혼을 매혹시키는 소리를 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를 찍어 내리는 고난이 우리의 자아를 더욱 성숙시키고, 이 세상에 더욱 필요하고 유익한 인격의 존재로 단련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면 고난을 받아들이는 자세도 바뀌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지켜준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였고, 잘못도 없는 자신을 죽이려고 달겨드는 사울로부터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도액을 향해 복수의 칼을 휘두르지 않았고, 사울에게는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의 모습을 우리는 다윗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욕 당하셨고 의심 받으셨고 거듭거듭 배신 당하셨지만, 더 큰사랑을 되돌려 주셨고 자신을 내주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의 몸에 그리스도의 향이 흠뻑 묻혀져 있습니까?. 주님의 보혈의 흔적과 향이 우리의 영혼에 스며들어 있음을 믿는 것이 제 사랑의 고백입니다.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마태 복음 6:39-40

[이시훈] 친구를 위하여

이코스타 2002년 4월호

드라큐라 백작은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좁고 어두운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수 백년 동안의 고독과 처절하게 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그리워했습니다.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과 사랑 받고 싶은 갈망에 피가 타는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격렬한 갈증은 그에게 참을 수 없는 굶주림이었습니다. 그의 사랑의 방식은 사랑하는 사람과 완전한 하나가 되기 위해 서로 같아지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선택한 사람은 피의 공유와 더불어 동류의 흡혈귀로 바뀌게 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 시켜가며 존재의 동일성을 획득하는 것이 그의 사랑의 길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나르시스의 기질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솔직한 본능의 하나입니다. 부족하고 거짓되고 스스로 용납하기 어려운 속성을 가진 자신이 못마땅하고 괴로울지라도,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는 힘이 생을 이끌고 가는 견인차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자신과 비슷한 취향, 환경, 가치관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곤 합니다. 게다가 내적인 기질이나 목표가 비슷한 사람에겐 쉽게 친근감을 느끼고 다가가게 됩니다. 우정이라는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 반드시 시간의 길이에 비례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겠지요.


처음엔 자신과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 대상을 찾고 친밀감을 느끼던 우리는 점차 가까워질수록 상대에게 자신과 같아지기를 요구하고 기대하게 됩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스승은 제자에게, 친구에게, 연인에게 자신의 가치관과 생활관을 그들에게 적용하기를 강요하게도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흔히 믿고 있기에 상대가 상처받고 있는지 점검할 이유를 느끼지 않은 채 맹목의 사랑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비단 개인적인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진 단체들간이나 세대간의 갈등, 인종간, 국가간의 갈등에서도 이러한 가치관의 강요는 나의 것만이 옳고 아름답다는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타인의 개성과 독특성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을 갖기란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나누고, 아름다운 것들을 함께 즐기고, 생각과 감정을 공감하고 싶은 욕망도 사랑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나와는 생각도 다르고 취향이나 표현 방법도 다르며 살아가는 배경도 완전히 다른 사람을 친구로 인정하기란 얼마나 힘든 일 인지요. 상반된 가치관과 생활관의 차이로 의견이 대립되고 그것이 확대되어 미움과 분노로 변하기조차 합니다. 사소한 이해관계로 어제의 벗이 오늘의 적이 되기도 합니다. 나와 다른 개성은 눈에 거슬리게 보여지기도 하고, 다른 습관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나와 일치하지 못하는 상대가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현대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깡은 학생들에게 “그대는 넷을 셀 줄 아는 인간인가?”라는 선문답 같은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여기서 묻는 넷은 정신분석에서 흔히 차용하는 숫자 상징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는 넷의 범위는 우리가 접하는 세계의 범위, 즉 관계의 범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자아의 삼 요소인 주체(subject), 대상(object), 에고(ego)에다가 타자(other)가 포함된 세계에 살고 있는가하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나의 관심의 대상이 아닌 이웃들이 포함된 세계에서 산다는 것은 매우 커다란 의미를 지닙니다. 나보다 지식 수준이 낮거나 지능 수준이 낮다고 무시하거나 사회적 지위나 환경이 나와 걸맞지 않는다고 외면해온 이웃들, 가치관이 너무 다르고 취향이 천박하다고 멀리해온 사람들 마저 나의 울타리 안에 받아들이는 열린 자아를 갖는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을 극복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을 사랑하거나 용납할 수 있단 말이지? 하며 자문할 때, 내 안에 울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너의 그릇됨과 어리석음과 교만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의 부족함이 가득한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더욱 귀하게 여긴다. 나는 언제나 너의 말에 귀 기울이고 같이 아파하고 받아주는 친구이길 원한다.” 보기에 그럴듯한 명예를 가진 친구를 갖고싶은 속된 욕망과 비슷한 부류에서 친구를 찾는 폐쇄적인 마음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소외 받는 이웃들, 삶의 다양한 고난에 상처받고 신음하는 이웃들을 셀 줄 아는 사랑은 훈련이나 결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선하신 존재로 인해 변화 받을 때 나의 이기적인 본성도 변하게 됩니다. 드라큐라 백작의 그 어둡고 좁은 관은 그의 자아 세계를 의미합니다. 단절된 관계 속에서 외로움에 지치고 병든 자아, 일직선상의 사랑은 그를 구원할 수 없는 길고 긴 고독의 시간에 가두고 마는 것입니다. 관계의 고리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열린 삶, 누구나 나의 친구가 되어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기를, 넷을 셀 줄 아는 성숙함을 갖게 되길 원합니다. 내가 내민 손에 누군가 손을 마주치며 지나가는 일, 혼자서 박수치는 방법도 터득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한복음 15:13-14

[이시훈] 향기

이코스타 2002년 2월호

독일의 작가 파트린느 쥐스킨스의 ‘향수’라는 작품을 읽고 나면, 괴기할 정도의 광기를 느끼면서 동시에 강렬한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중세 시대가 배경인 이 소설의 주인공의 꿈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혹적인 향수를 만드는 것입니다. 비천하고 사랑 받지 못하는 추한 자신을 볼 때마다 스스로에 대한 혐오에 빠지며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결한 존재들의 미덕을 열망하게 됩니다. 결국 가장 사랑스럽고 순수하고 고결한 소녀들을 25명이나 살인하여 그들의 머리카락에서 얻어낸 체액으로 향수를 제조한다는 엽기적인 내용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악마적인 발상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매력을 느끼고 공감을 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얻고자하는 최상의 선과 미는 인간을 통해 얻어진다는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그르누이는 왜소하고 추한 외모 때문에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그 천한 직업(가죽 세공)을 인해 경멸 당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그는 길을 떠나 새로운 일에 몰두하게 되는데, 그의 천부적으로 뛰어난 후각은 향수제조업에 더 할 나위 없는 재능과 힘이 되어 줍니다. 비참한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존재들, 천진난만하고 발랄하며 아름답고 상냥한,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이 머물고 사랑스런 눈길을 받는 소녀들이 그가 열망을 품는 대상이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기형적으로 몸에서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악취조차도) 자신을 견딜 수 없어합니다. 향기를 발하는 존재가 되고 싶어서 그가 만든 엄청난 향수를 뿌렸을 때, 그가 살인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환호하고 사랑과 찬사를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것이 자신의 본질적인 냄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다른 종류의 냄새를 자신에게 뿌리게 됩니다. 인간의 추악한 본성들, 곧 탐욕, 분노, 이기심, 질투, 음모, 온갖 사악한 본성들을 혼합해 만든 향수를 뿌리자 사람들이 달겨들어 그를 죽이고 맙니다. 자신의 실존이 악취의 근거임을 깨달은 그가 스스로 파멸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겉으로 보여 주는 모습과 실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최인훈 선생의 ‘가면고’ 라는 작품에서 주인공인 왕이 거리를 지나가다 아름답고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얼굴들을 보면 그 얼굴 가죽을 벗겨내는 장면을 떠올려 봅니다. 무수한 얼굴들을 자신의 얼굴 위에 씌여 봤지만 모든 얼굴들은 다 녹아 내려 버리고 결국 자신의 얼굴에서 그 수많았던 얼굴들을 발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향수를 뿌리고 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상냥함과 친절함, 고상함과 인자함의 향수를 뿌리고 우아한 말투와 경건한 몸짓을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대단한 향수도 영원히 지속되며 나의 실존의 향기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에 여전히 시기와 분노가 끓고 있는데, 조롱과 멸시의 감정이 고개를 내미는데 짐짓 사랑과 격려의 말을 늘어 놓는다면 이 위선은 스스로 금새 싫증나고 지치게 만드는 싸구려 향수와도 같은 것입니다. 생전 처음 받아 보는 사랑과 칭찬 앞에서 그르누이가 더욱 절망하고 비참함을 느끼게 된 것처럼, 맘에 들어 덧씌운 얼굴이 금새 녹아버려 낙담하는 왕의 심정처럼, 가식적이고 인위적인 향수의 힘은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할 뿐입니다.


평화를 위장한 평화가 시대를 다스릴 때 사람들은 숨 막힐 듯한 구속을 느끼며, 경건을 위장한 경건은 고인 웅덩이의 물처럼 언젠가는 악취를 발하게 됩니다. 위정자들의 구호나 미래에 대한 회색 청사진을 보며 희망을 강요 당하는 우울한 시대에도, 비록 고통스런 선택일지라도 진실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역사는 용기를 주는 것 같습니다.


나의 실존을 직시할 수 있을 때 나는 허위와 가식을 벗어나 거듭나고자 하는 열망을 품게 됩니다. 나는 위악한 존재이며 동시에 선한 목적을 가진 존재이고, 내게는 악취를 지울 수 있는 의지와 지혜가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나는 세상에 향기를 더하는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나는 세상에 빛을 더하라는 소명을 받은 존재입니다. 거짓됨을 드러내고 더러움과 죄악을 드러내어 빛의 세례로 정결해 지기를 원하는 이의 권유를 받은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사랑은 흉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과리와 같은 것처럼(고전13:1), 공허한 모든 행위와 삶은 헛되고 헛된 허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사랑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사랑은 무취 담담한 우리를 향기 나는 존재로 변화시켜,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주게 만듭니다. 사랑은 공허한 삶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나의 향기는 이웃을 감화시키며 우리의 향기는 시대를 변화시키는 힘을 발합니다. 사랑은 진실을 구하며 진리를 따르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인위적인 향수가 아니라 우리의 인격과 전 생애가 향기를 품는 존재가 되길 간구 합니다. 완전히 깨어진 질그릇처럼 다시 빚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즐거움과 기쁨의 미소가 절로 입가에 머무는 삶 속에서 온유함과 인내를 드러내는 인격들이 이루는 소망의 세상, 진정한 평화와 정의가 성취되는 사회를 꿈꾸어 봅니다. 우리 하나 하나의 존재가 꽃나무처럼 그윽한 향기를 품는 그런 날을 기다리는 일이 저의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