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은] 나는 그녀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그녀는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제게는 북녘에서 온 친구가 있습니다. 그녀는 저와 동갑내기 친구이며 중국 주재 한국영사관내 보호시설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벌써 6년이라는 세월 동안 서로를 친구로, 선생님으로 부르며 지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다르게 생각하면서 부릅니다. 그녀는 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꼭 부릅니다. 제가 그녀에게 이름을 불러도 된다고 했지만, 어떻게 그러냐며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1주일에 한번씩은 꼭 만나 편안하게 밥을 먹으면서 학교생활에 대한 어려움, 한국에서 살면서 겪는 스트레스를 수다로 풀어냅니다. 
그녀와의 만남은 정말 특이했습니다. 제가 탈북민 상담을 10년 동안 하면서 이런 만남은 손에 꼽을 만 합니다. 그녀는 활동성 결핵으로 중국 주재 탈북민 보호기관에서 거의 1여 년 동안 독방에서 생활했습니다. 배달되는 음식을 혼자 먹으면서 혼자 생각하고 책보고 기도하고 성경을 보면서 다른 탈북민 또는 사람들의 왕래 없이 외롭게 지냈습니다. 제가 그곳 기관에 상담심리사로 파견 되었을 때 직원들은 그녀를 내담자 명단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저 또한 그녀의 병명을 듣고 상담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1주일 동안 기관에 체류하면서 계획된 상담을 모두 마친 후 자투리 시간을 잠시 내어 몇 권의 책을 들고 그녀를 방문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책만 전해주고 빨리 나오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제가 상상했던 환자의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이 그 당사자라고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1년 동안 활동성 결핵으로 1평 남짓 되는 공간에서 말상대도 없이 오락거리도 없이 누워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병자 특유의 절망감도 없었고, 외로운 기색도 없었으며 오히려 영사관의 다른 탈북민들과 비교할 수 없는 자유자의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그녀에게 책을 건네 주며 ‘힘내세요, 쾌차하세요.’라고 말하는 제가 어색할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멀리 서울에서 저희를 위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결핵이라서 안됐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녀와 함께 잠시 기도만 하고 방을 나와 담당직원에게 물었습니다. ‘정말 활동성 결핵이 맞느냐? 굉장히 밝더라.’고 말입니다. 제 경험으로 보호기관에서 오랫동안 격리생활을 하는 탈북민들은 대부분 신경이 예민하고 우울하며 불안하며 타인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특히, 몸이 아픈 탈북민의 경우,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줄 것과 조속한 한국 송환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녀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 어떻게 환하게 웃을 수 있는지, 평안할 수 있는지 저는 의아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저는 일상생활로 인해 그녀는 차츰 흐릿해졌습니다. 1년이 채 되지 않는 어느 늦은 가을 날, 저는 충남 공주의 기독학생회 수련회에 우연히 가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가게 된 길이기 때문에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낯익은 얼굴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저는 용기를 내어 ‘혹시 저를 아세요? 낯이 익네요.’라고 하자 ‘처음 뵙는데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또 다시 ‘혹시 탈북민 아니세요? 어디서 뵌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중국 보호시설에서 잠시 만난 그녀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늘 그랬듯이 낯이 익은 탈북민과 인사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놀란 그녀는 중국 보호시설에서 저를 만났으며 제가 도착하기 전날 저에 대한 간증을 했다고 하며 반겨주었습니다. 저 또한 그 사실에 놀라며 그녀와의 재회를 기뻐했습니다. 보호시설에서 그녀는 병든 몸으로 낯선 남한 땅에서 적응할 수 있을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너무나 선명한 꿈을 꾸었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꿈을 도대체 해몽할 수 없어 또 다시 꿈을 해석해 달라고 기도하던 참에 저에게 책을 받았고 그 책 표지의 그림이 꿈에서 본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 책을 단번에 읽었으며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계획하신 한국 땅에서의 삶과 길을 열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후 몇 개월이 흘러 학교에서 그녀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저는 제가 다니고 있는 학교여서 더욱 놀랐습니다. 실례되는 말이지만, 나이 많은 그녀가 우리 대학에 입학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인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받으며 기뻐하는 모습은 저를 두 번 아니 세 번 놀라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학생회관에서 많은 젋은 신입생들 틈에서 그녀를 발견했다는 놀라움과 또 동문으로 만났다는 것… 사실 우리는 중국 보호시설이나 공주의 수련회 장소에서 서로의 연락처를 나누지 않았고 그저 만나고 헤어졌을 뿐이며 다시 만나자는 인사는 했지만 이렇게 절묘하게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맺어준 인연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약속을 하던 우연찮게 만나던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꼭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역사와 세계사를 아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 36세의 나이에 Y대학 역사학부에 입학했습니다. 그녀와 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북한을 떠날 당시의 이야기, 한국 생활의 어려움, 학교 생활의 어려움, 경제적인 어려움, 언어의 어려움 등…
그녀는 북한 두만강을 넘어오면서 함께 강을 넘던 어머니를 그 강에서 잃었으며 중국에서 10여 년 동안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중국에 거주하는 이모님 댁을 찾아 왔으나 어머니께서 자기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죄책감에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중국에서 의지하고 마음을 기댈 곳은 아무 곳도 없었으며 오로지 새로 알게 된 하나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누구도 반겨주는 이 없을 때, 안전한 다른 곳으로 숨어야 할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오직 하나님만이 그녀의 피난처요 등불이요 안식처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낯선 한국 땅에서 독신으로 살면서 공부하고 일하며 봉사하며 하루에 서너 시간의 쪽 잠을 자면서도 그 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감당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린 학생들과 학교생활을 하다 보면 교우라기 보다는 이모뻘이 되는 자신이 때로는 어이없고 낙심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또한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다른 사람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돈도 없고 나이 든 자신의 현실을 바라볼 때 지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1년에 한 번씩 고향의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보내주고, 주위 어려운 친구들에게 학비의 일부를 남 몰래 후원하고, 아르바이트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가며 다시 웃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 꿈을 기억하고 약속하셨다는 그 믿음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 그녀는 Y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함께 입학했던 남한 친구들과 졸업가운을 입고 졸업식을 대하는 그녀의 감회는 어떨까요? 졸업식을 축하해줄 부모님, 형제들은 없지만 그녀와 늘 함께 하신 하나님의 기쁨은 얼마나 크실까요? 상상만 해도 뿌듯하고 대견하고 그런 친구가 제 친구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그 친구는 저를 선생님으로 만났기 때문에 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 친구야 말로 제 선생님입니다. 힘든 상처가 있어 아프다고 힘들다고 넋두리를 할만한 그녀지만 ‘그래도 감사하다.’라고 웃으며 말하는 그 친구야 말로 제 선생님입니다. 
“친구야 난 네가 내 친구라서 정말 고맙고 좋다. 우리 진짜 친구하자, 딱친구!.”
주) 딱친구는 북한 말로 서로 속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를 뜻합니다.  

[유시은] 북한이탈주민의 여정과 외상(Trauma)

세 번째 원고에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북한이탈주민들의 고향 땅에 대한 소개와 남한 입국 현황을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북한이탈주민들이 남한에 입국하기까지의 여정과 외상 경험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의 입국 경로는 시기 및 정치 사회적인 이슈에 따라 변화하였습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의 제3국 체류 실태는 조사 기관에 따라 다양합니다. 아직까지 제3국 북한이탈주민 규모에 대한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으나 유관 기관에서는 대략 2~3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2003)은 10만 여명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들이 은둔, 도피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우며 따라서 이러한 편차가 나타납니다. 
본문에서는 제3국 체류 규모를 논하기 보다는 북한이탈주민들의 입국 여정과 그 과정에서의 외상 경험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이 안정된 국가로 입국하기 까지의 여정은 <그림 1>과 같습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이 남북한의 군사분계선의 육해로을 넘어 오는 경우는 극히 소수이며 제3국을 통해 입국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들은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인 함경북도를 경유하여 연변에 도착하게 됩니다. 북한과 중국의 국경 인접 지역은 자강도, 양강도, 평안북도가 있으나 조선족 사회의 유입요인으로 인하여 함경북도 출신이 북한이탈주민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2007년 이전에는 중국 공민증을 위조하거나 재중 한국 영사관 및 국제학교 등에 진입하여 신변보호를 받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중국 당국의 한국 출국이 늦어지면서 베트남 및 캄보디아 등을 경유하여 태국을 통하여 한국으로 입국하는 사례가 많아졌습니다. 이들이 한국으로 오기까지 목숨을 걸고 3-4개 이상의 국경을 넘습니다. 이 과정에서 혼자 올 수 없기 때문에 브로커의 도움을 받게 되며, 대체로 브로커 비용은 한국 입국 이후 지불하게 되며 300만원에서 1,000만원 선까지 다양합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은 북한 사회, 탈북하는 과정, 중국 및 제3국 체류과정에서 많은 외상을 경험합니다. 이때 외상 경험이라 함은 개인의 생활 및 신체적 보전에 심각한 위협을 주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외상 사건은 개인뿐만 아니라 자녀, 배우자, 친척, 친구들에 대한 위협을 포함합니다. 즉, 심각한 상처, 죽음을 목격하거나 죽을 뻔한 경험을 하였는지가 이에 해당합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의 외상 사건은 크게 북한 및 제3국 체류 기간 동안 겪은 것으로 구분합니다. 실제로 북한이탈주민들은 북한에서 생활하면서 이미 정신적 충격을 경험한 경우가 많고, 탈북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중요한 사안입니다. 또한 한국 입국 이후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이 받았던 외상 충격이 계속적으로 재경험되기 때문에 초기 예방 및 치료가 중요합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이 경험한 외상은 수년이 지난 과거 사건이지만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쳐 일상생활, 직장생활, 가정생활까지 지장을 주게 됩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이 북한 내에서 가장 많이 경험한 외상은 가족, 친지, 가까운 이웃 중에 굶어 죽는 것을 목격하거나 소식을 듣는 것으로, 817명(68.1%)에 해당됩니다. 다음으로 추위나 식량 부족으로 인한 생명의 위협(58.2%), 가족과의 생이별(56.2%), 아는 사람의 공개 처형을 직접 목격함(42.8%) 순입니다. 탈북 여성의 경우 북한에서 원치 않는 결혼을 했거나 인신매매를 당함, 심한 성적 모욕이나 강간을 당했다는 경우가 남성에 비하여 유의하게 많았습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이 탈북 과정에서 가장 많이 경험한 외상 사건은 가족과의 생이별(46.8%)이었고 체포나 강제 북송의 경험이 있거나, 거의 그럴 뻔한 위험에 처한 경우(45.5%), 총격이나 추격을 받은 경험(27.5%), 예상치 못한 배신 경험(25.1%), 강제 결혼이나 인신매매 경험(22.8%), 수용소, 교화소나 감옥에 간 경험(21.8%) 순입니다. 특히 여성의 경우 10여명 중 3명 가량이 원하지 않는 강제 결혼을 했거나 인신매매를 당하였습니다. 

외상 경험으로 인해 심리적인 증상이 생기는 것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합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의 정의는 강간, 심한 폭행, 자연재해(홍수, 지진, 폭풍), 뜻밖의 재해(자동차 사고, 비행기 추락, 대형 화재, 해상 사고), 인공 재해(폭격, 고문, 수용소, 인질) 등 생명의 위협 및 정신적 충격으로 심리적·신체적인 증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외상후 스트레스 유병율은 연구에 따라 다릅니다. 강성록(2000)은 27.37%, 홍창형 등(2004)은 29.5%, 윤여상 등(2007)은 26.15%, 서주연(2006)은 45.1%, 국경없는 의사회(2005)는 18.2%, 김병창 등(2010)은 8.7%로 보고하였습니다. 이러한 유병율 차이는 연구대상자의 크기와 집단 특징, 진단 도구, 거주기간 등이 원인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북한이탈주민들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해외 난민과 달리 남한거주 기간이 장기화될수록 자연 치유된다는 사실입니다(조영아, 김연희, 유시은, 2009; 홍창형, 2005)<그림 2>. 

이러한 결과는 북한이탈주민들의 외상 후 성장 및 회복력(탄력성)이 강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정착 초기가 그들의 삶의 방향을 정하는 시기이니 만큼 초기 예방 및 치료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북한이탈주민들의 탈북 여정과 외상 경험을 정리하니,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학자로서 그들의 경험을 짧은 도표와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지만, 그들의 삶은 결코 짧지도 간단하지도 않습니다.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고 말하고 싶지 않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고통의 순간 순간이기에 경험하지 못한 저로서 언급한다는 것이 죄스럽기만 합니다. 
상담 후 내담자인 북한이탈주민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결코 저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요. 그렇습니다. 그때는 그 말씀이 다소 서운했지만, 이제는 “그렇습니다. 저는 모르지만 그 때 그 자리에서 주님은 당신과 그 고통을 모두 당하시고 함께 하셨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유시은] 첫 만남: 북녘 땅

누구나 의미 있는 사람과의 첫만남은 오랫 동안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그가 어디에서 누구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지금 형편이 어떤지 알게 되면 더욱 관계가 깊어지고 마음에 담게 되며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만난 북한이탈주민과의 첫만남은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온성 아이입니다. 온성 아이를 만난 건 경기도 안성시 하나원이었습니다. 저는 하나원 상담심리사 면접 후 양지바른 곳에서 혼자 앉아 있는 꼬마 아이를 만났습니다. 그 아이는 신문지 안에 끼어 온 광고지를 아주 귀중한 듯 이리 저리 만져보고 곱게 접어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남한의 여느 아이라면 휴지통에 버렸을만한 광고지를 그 아이는 조심스럽게 만져보고 햇빛에 비춰보며 누가 가져갈세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살피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신기해서 “너 어디에서 왔니?”라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공손하면서도 경계하듯 “온성에서 왔는데요?”라고 했습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아이의 모습과 억양이 낯설기만 했고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기에 다시 물었습니다. “뭐 언성이라고?” 그 아이는 “아니오. 온성이요.” 라고 대답하고 저 대신 광고지에 눈을 돌렸습니다. 
이렇듯, 저는 북한이탈주민과 북녘 땅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저를 선택하셔서 전적으로 의지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심으신 북한이탈주민들에 대한 마음을 북녘 땅을 보면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제가 말씀 드린 온성 땅에서 온 그 아이, 지금은 얼마나 자라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언젠가 가야 할 그 온성 땅이 어디인지, 북녘의 시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북한이탈주민들은 어디에서 살았는지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온성군은 함경북도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반도의 최북단에 있는 동네입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마주하고 있으며 중국과의 국경선 길이는 105km입니다. 함경북도는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식량 배급이 가장 먼저 중지된 곳이기도 합니다.  90% 이상이 산간으로 이루어져있어서, 식량난 이후 대부분의 산간을 개간하여 김일성 유적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산이 황토 빛 민둥산입니다. 
북녘의 정식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며 수도는 평양특별시이며 9개 도로 나뉩니다. 평양은 서울에서 육로로 1시간 30분 정도 차를 타고 달리면 도착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입니다. 중국 국경과 인접해있는 곳은 함경북도, 양강도, 자강도, 평안북도입니다. 대한민국과 인접한 곳은 강원도, 황해남도, 황해북도 입니다. 강원도에 있는 개성직할시는 2005년부터 개성공단이 가동되고 있으며 현재 46,284명의 북녘 근로자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즉, 남녘의 산업 기술과 북녘의 인력이 협력하는 장이 되고 있습니다. 황해도는 북녘 땅에서 평야가 가장 많은 곳입니다. 경지율이 북녘에서 가장 높은 약 14%를 차지하고 있어 황해도민을 ‘띵해도’라고 부를 정도로 성품이 느긋하고 인심이 후합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군사분계선을 넘지 않는 한 대한민국으로 올 수 없고 중국 국경으로 이동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탈북하는 사례는 5% 정도 수준입니다.  

아래 표는 북한이탈주민들의 출신 지역과 탈북 동기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당부하고자 하는 것은 이 표를 보면서 그들의 고향과 생활 환경을 위해 중보해주셨으면 합니다. 많은 북녘주민들이 생활고와 가족 해체로 인해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기아로 가족이 죽거나 헤어져야 하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 헤어진 가족이 다시 만났다고 하더라도 그간의 삶을 공유할 수 없으며 마음과 몸이 떨어져 있었던 상처로 인해 또 다른 불행을 경험하게 됩니다.  

북녘 출신지역별 유형(2009.10 기준)

탈북 동기별 유형(2009. 10 기준) 

 

저와 함께 생활한 탈북 소녀의 이야기로 오늘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그 소녀는 8살 때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곡식을 구하기 위해 며칠 있다가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녀는 나이 어린 동생과 이모님댁에 맡겨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살아남기 힘든 ‘고난의 행군’시기이기 때문에 더부살이 하는 입은 천덕꾸러기 자체였습니다. 추운 겨울 그 소녀와 동생은 감자창고에서 잠을 자고 식사 때가 되어야 방어 들어가 풀 죽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늦은 밤 배가 너무 고픈 동생이 누나에게 썩은 감자를 가리키며 ‘누나 나 이거 하나 먹으면 안되나? 배가 너무 고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썩은 감자로 배를 채우려는 동생이 불쌍하지만 자존심이 상해 매몰차게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이모가 아침을 먹으라고 소리쳤지만 평소와 달리 동생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린 나이의 소녀는 죽음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동생에게 썩은 감자라도 실컷 먹일걸, 나 때문에 동생이 죽은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오는 날 그 소녀는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다시 만난 엄마에게도 그날 밤 일을 말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마구 울었습니다. 만약 엄마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속상해하시고 이모와 싸웠을 것이라고 걱정하면서 울었습니다. 지금 그 소녀의 나이는 16살, 한창 엄마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조잘거릴 철모를 소녀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엄마를 먼저 걱정하는 애 어른 소녀입니다.
기도해주십시오. 나이에 어울리는 건강한 사춘기를 경험할 수 있도록, 헤어진 그 시간 동안의 상처가 주님 안에서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도록, 이들의 눈물이 우리의 눈물이 되어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유시은 자매는 연세대에서 통일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Johns Hopkins Bloomberg School of Public Health에서 Post-doctor Fellow로 일하고 있다.


[유시은] 북한이탈주민, 그들은 어디에

안녕하세요. 두 번째 만남이네요. 오늘은 북한이탈주민들이 어느 곳에 얼마나 살고 계신지 서로 나누고자 합니다. 그 전에 9월 말에 저는 미국에 살고 있는 북한이탈주민들이 함께 모이는 수련회에 다녀왔습니다. 그 수련회는 북한이탈주민들에게는 Home coming day와도 같은 날입니다. 첫날 저녁 예배,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한 자로 말하면 무엇인지 아십니까?”예배에 참여한 우리들은 대답하지 못한 채 두리번거렸습니다. 답은 “바로 ‘나’입니다. 그러면 두 자로 말하면 무엇인지 아십니까? ‘또 나’입니다. 세 자로 말하면 ‘역시 나’입니다.”북한이탈주민들의 한 영혼 한 영혼을 귀히 여기시는 목사님의 이 말 한마디에 그곳에 모인 북한이탈주민들과 자원봉사자들의 마음이 일순간에 무장해제 되었습니다. 이렇게 귀한 북한이탈주민들은 한인 디아스포라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살고 계십니다. 
 
우선, 대한민국에 살고 계신 북한이탈주민들은 2011년 4월 까지 21,191명입니다(한국, 통일부, 2011년 10월 17일 검색, http://www.unikorea.go.kr). 분단 이후, 북한 주민은 매년 10명 내외로 남한에 입국하였습니다. 남한 입국에 성공한 북한이탈주민들은 1989년까지만 해도 600여명이었으나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김일성 사망과 북한의 경제난 등 체제위기가 고조된 1990년대 이후 높은 증가세를 보여 현재 이만 명 시대가 되었습니다. 성별에 따른 현황을 살펴보면, 2001년까지 남성이 여성에 비하여 월등히 많았으나 2002년부터 여성이 급증하였습니다. 현재, 북한이탈여성들은 전체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림 1> 북한이탈주민 입국인원 현황 

북한이탈여성이 남성에 비하여 월등히 많은 이유는 남성은 직장에 소속되어있어야 하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에 비하여 이동할 수 있는 여지가 많습니다. 또한 인근 국가인 중국 동북 3성 지역의 농촌총각 문제도 북한 여성을 유입하는 원인이었습니다. 2003년 유엔난민기구(UNHCR)의 자료에 의하면 중국내 북한이탈여성이 10만 여명이라고 발표된 것도 그 근거를 제시합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의 입국 연령을 살펴보면, 30대가 32%, 20대는 27%로 가장 많습니다. 19세 이하 청소년층은 16%로 2001년 북한이탈여성이 증가하면서 가족 구성원이 점차 늘었습니다. 이에 남한 정부는 남성 위주의 정착지원에서 가족 중심 및 청소년•여성 정착 지원으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의 남한 입국 증가와 더불어 2004년 미국의 북한인권법이 통과하면서, 북한이탈주민의 다국적, 다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한인 디아스포라가 거주하는 많은 나라에 북한이탈주민들이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유엔난민기구(2010)는 북한 출신의 난민이나 망명 신청자가 전 세계적으로 1천명여명이 넘는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국가

영국

네덜

란드

호주

미국

캐나다

노르

웨이

러시아

덴마크

스웨덴

아일

랜드

스위스

키르기스스탄

이스

라엘

소계

인원

581

146

32

25

25

23

14

14

9

8

6

4

3

2

917

) 유엔난민기구. 2010. 자료

) 독일, 미국, 캐나다의 경우 영주권을 취득한 탈북자는 통계에서 제외됨. 한겨레신문 인용. www.hani.co.kr, 2010 9 12 검색

 

또한 제 3국에서 난민 지위자 및 망명 신청을 하고 있는 북한이탈주민 또한 매년 그 숫자가 늘어나 2010년에는 1,194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표 2>. 

년도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인원

67

72

330

349

412

403

502

842

1,097

1,010

1,194

) 유엔난민최고대표사무소(UNHCR,
2010).
한겨레신문 인용.
www.hani.co.kr, 2010
9 12 검색

주변의 많은 분들은 제게 북한이탈주민들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하시며 어디에 얼마나 살고 계시는지 궁금해 하십니다. 돕고 싶지만 북한이탈주민들을 만날 수 없어서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북한이탈주민들을 직접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들은 여러분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족과 늘 함께 하지 못하더라도 항상 마음에 두고 기도하면 눈앞에 선하듯이 말입니다.  

 
얼마 전, 시카고 수련회에서 만나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된 자매가 제게 전화 한 통화를 했습니다. 이틀 동안 같은 방에서 생활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중보하지 못한 것 같아 헤어지면서, 그 자매에게 기도제목이 있으면 전화하라고 했는데 그 말을 마음에 두었나 봅니다. 그 자매는 남편의 형님이 북한을 탈북하기 위해 준비 중이며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했습니다. 생사를 위한 일에 기도로 동참할 수 있어서 감사했으며 이런 귀한 기도제목을 허물없이 나누어준 그 자매가 고마웠습니다.

 
새로운 터전에 정착하게 된 탈북 형제자매들은 참 자유와 정착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탈북 했으나 북한에서의 교육과 사상•문화에 매어 참 자유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새로운 땅에 정착하고 싶지만 사회문화적인 차이와 언어적 어려움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디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그 이름도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들을 위해 진정으로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기도하는 심령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더 깊이 교제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통로입니다. 

유시은 자매는 연세대에서 통일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Johns Hopkins Bloomberg School of Public Health에서 Post-doctor Fellow로 일하고 있다.

[유시은] 북한이탈주민,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만남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동역자로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 거룩하고 축복된 영적 전쟁에 여러분을 초대하며 함께 동역하게 되어 반갑슴니다. 저는 북한이탈주민 덕분에 통일학 박사 학위를 받은 유시은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북한이탈주민과의 만남’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이탈주민들이 어디에 얼마나 어떻게 살고 계신지 모릅니다. 저 또한 10년 전에는 북한이탈주민이 제 주변에 살고 계신지 몰랐습니다. 저는 상담사에 대한 비젼을 품고 낮에는 대학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밤에는 대학원에서 상담교육 석사과정을 공부했습니다. 졸업 후 상담 연수를 마쳤을 때 한 지인의 소개로 통일부 하나원에 상담심리사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북한이탈주민과 북한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하나원이 고아원인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능력도 없으며 준비도 없으며 마음도 없었던 저를 하나원이라는 나무에 접붙이셔서 북한이탈주민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하나원 입사 직후 제 몸무게는 10kg 정도나 빠졌습니다. 하루 하루 어떻게 이들을 만나 상담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세상 경험이 없고 미혼이며 젊은 여성인 제가 그들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지 지금도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합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은 사선을 넘어 중국 땅에서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그 불모의 땅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입니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경험한 북한이탈주민들의 눈에 저는 그저 아무 것도 모르고 어려움도 겪지 않은 젊은 남한 여성에 불과했습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은 저와 개인 상담을 마칠 즈음 “제 얘기가 소설같겠지요.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릅니다.”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이 남한에 입국하기 전까지의 모진 여정을 제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소설 속 주인공처럼 갖은 역경 속에서 오뚝이처럼 일어선 사람들이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의 순간을 이겨낸 사람들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아무 것도 모르는 제게 이런 분들을 왜 주셨나요?저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를 제발 다른 곳으로 옮겨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도무지 저를 하나원에 보내셔서 북한이탈주민들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몰랐고 제게 환난을 주시는 것 같아 원망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그 기도에 하나님은 “네가 97년도에 북한을 위해 기도한 것을 내가 기억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며칠 후 하나님은 제게 꿈을 보여주셨습니다. 끝없는 해안가를 누군가 저를 엎고 걷고 있었으며 날카로운 화살이 계속 저희를 향해 날라 왔습니다. 그 화살은 제 살갗을 스치갈 때 아팠지만 제게 큰 상처를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때 저를 엎고 계신 그분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너는 내 등에 업혀 있으니 다만 네게 스쳐지나갈 뿐이다. 모든 화살은 내가 다 맞을 것이다.’ 이 꿈이 있기 전까지 저 혼자 모든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원망했습니다. 기도를 하여도 하나님은 아무 대답도 없고 저를 도와주시지 않으며 다만 저 혼자 모든 화살을 맞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저를 혼자 두지 않으셨습니다. 제게 북한이탈주민들이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깨닫게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대학에서 편안하게 일하던 제게 상담이라는 비전을 주시고 북한이탈주민들을 만나게 하시면서 저는 민족을 품게 되었고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긍휼함을 아주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이 아니었더라면 하나님의 눈물과 심장 떨리는 아픔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들에게 각각의 부르심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교제하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사람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제 부르심은 북한과 북한이탈주민을 향한 것이며 그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오늘도 저를 일깨우며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자 달려갑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북한에 대한 사랑을 여러분에게 품게 하시고 부르십니까. 그 부르심에 아멘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죽게 하셔서 새생명을 주신 것처럼 우리 또한 북한 땅을 위해 여러분을 내어 드리십시오. 아멘으로 화답하셨습니까.북한과 북한이탈주민들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기도는 북한 땅을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북한 땅을 살리며 그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생명의 길입니다. 기도하고 계십니까. 마음과 물질로 헌신해주십시오. 북한과 북한이탈주민들은 여러분 가까이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채워주시는 것처럼 여러분 또한 북한주민과 북한이탈주민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습니다.
다음 글에는 여러분들이 함께 중보하며 사랑을 나눌 북한이탈주민들이 어디에 얼마나 살고 계신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유시은 자매는 연세대에서 통일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Johns Hopkins Bloomberg School of Public Health에서 Post-doctor Fellow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