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J KOSTA 현장 스케치

[vc_row][vc_column width=”1/2″][vc_single_image image=”5306″ align=”center” img_size=”full”][vc_single_image image=”5307″ align=”center” img_size=”full”][vc_single_image image=”5308″ align=”center” img_size=”full”][vc_single_image image=”5314″ align=”center” img_size=”full”][vc_single_image image=”5316″ align=”center” img_size=”full”][/vc_column][vc_column width=”1/2″][vc_column_text]jj KOSTA 첫째 날, 이영길 교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가장 약해지고 낮아지신 모습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점검해보도록 권면하셨습니다. 믿는자의 삶은 위기와 약해짐의 연속임에도 불구하고 연약해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돌이켜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모두 이루었다(It is finished)”라는 마지막 말씀을 통해 죽음으로 밖에 해결될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죄값이 모두 지불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약해짐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신 예수님이 이루신 승리로부터 삶을 살아갈 것을 권면하며 조원들을 섬길 때에도 연약한 모습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이 사용하실 것이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이어진 저녁말씀에서 이일형 박사님은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연약함과 온전함을 주제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먼저, 인간은 존재자체가 스스로는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며, 고린도후서 12장 9절의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구절에서 완전한 능력(perfected power)이란 하나님의 능력이 이뤄지기 위해 필요한 온전한 능력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연약한 존재인 인간이 완전한 능력으로 온전해지는 것은 우리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스스로 살 수 없다고 주님께 고백하며 그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릴 때 가능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욕망(passion)을 내려 놓고 주님께 삶의 시선을 두었을 때 하나님께서 일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시선을 하나님께 돌릴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주님의 완전한 능력을 드러내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간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일형 박사님은 모든 과정 가운데 주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있을 것이라고 전하며, 코스탄들에게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위해인생을 드리는 삶으로 초대하셨습니다.

jj KOSTA 둘째 날은 장영균 형제의 간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유학생활을 통해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게 되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교회 안에서 성장해가면서 삶이 변화되는 놀라운 일들을 함께 나눴습니다. 이어서 황지성 박사님은 <위기의 시대의 제자도>라는 제목을 가지고 디모데후서 2장 1-5절의 본문으로 삶속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그리스도와 제자의 모습은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하며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받은 고난의 필연성에 대해 존스토트의 ‘제자도’ 책을 소개하며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회심을 통해 새로운 자아를 갖는 것이며 새로운 세계관으로 안목을 갖고,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의 삶은 순종이며(마 28:19-20) 순종의 비밀은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바울은 그것이 바로 은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응답이라고 했습니다. 제자의 성숙은 성품과 관계, 사역의 연관성 속에서 이뤄지는 것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주셨고, 마지막으로 조선시대에 성서조선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김교신 선생의 삶을 소개하며 100년이 지난 지금 앞으로 100년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코스탄들이 되기를 소망하시며 말씀을 마치셨습니다.

조장들은 지역별 모임을 마친 후 폐회 예배에서 장범 장로님이 베드로전서 3장 15절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함이며,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전하며 조원들을 섬기는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고 권면하면서 모든 순서를 마쳤습니다.[/vc_column_text][/vc_column][/vc_row]

약함의 의미 (주제 기획기사1)

약함이란 무엇인가? 약함과 고통은 피하고 싶은 것으로 하나님께서 바르게 만드신 것을 뒤틀어 버리고, 지혜로 창조하신 모든 것을 휘어 버리며, 아름다운 모든 것을 흩트려 버리는 것 같아 보인다. 우리는 어리석음 때문에 타락한 세상에 그저 살고 있기 때문에 약하고 고통당한다. 한편, 연약함은 성경에서 중요한 이미지이다. 성경의 진리의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이 약함과 어리석음에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복음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약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참된 기독교인은 자신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깊이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성경 전반에는 약함이 하나님의 주된 방법임을 보여주는 다양한 증거들이 존재한다. 고난받는 메시아의 약함과, 외부로부터 구원자가 필요하게 만드는 우리의 죄성에 기인하는 약함, 세상 권세들에 대한 우리의 상대적 약함, 그리고 우리가 우선적으로 약자를 환영해야 한다고 말하는 공동체적인 우선순위가 있다.

우리는 약하고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 때로 의로움을 위해, 가끔 연약함으로, 또 세상의 부 조리로 인해 고통과 약함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올바른 기독교인의 삶은 고통과 약함의 의미를 깨닫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약함과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저 약함을 무엇인가의 수단으로 바라볼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잘 알 수 있으며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 자신에 대해 절망할 때,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 앞에 벌거벗고 고통받게 될 때, 자신의 의를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하나님을 우리의 구주로 인식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다. 오직 약함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되므로 가난과 약함을 선택한 신앙적 결단을 기뻐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형통케 해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오늘의 어려운 시기를 견딘다.

두 번째 관점은 하나님의 질서와 원칙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투쟁하면서 발생하는 하나님으로 인해 약함의 입장에 서게 된다는 설명이다. 원칙을 지키면서 겪게 되는 약함에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종종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원칙을 지키려고 할 때 약함이 찾아온다. 세상의 조직적인 악의 제도와 불의한 사람들로 인해 때로는 옳은 일을 정의로운 방법으로 수행하려는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이길 수 없는 싸움으로 보이고 그런 일을 시도하는 것은 약함의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럴지라도 그 약함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지켰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어 갖게 되는 영생의 기쁨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약함을 가지고 선한 싸움에 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약함이라는 것을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하는 목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약함으로 아파하고 고통당할 때 그 자리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를 약함으로부터 건져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약함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아파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약함의 자리, 바로 그곳이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장소이다. 약함을 벗어나 강해질 때를 위해서 견뎌야 하는 임시적인 고통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추구하고 누려야 하는 축복의 자리가 고통과 연약함과 낮아짐의 자리라는 것이다.

약함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용서의 마음과 온유의 마음, 더 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게 해준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이 계획한 원래의 성숙한 사람으로 바꾸어준다. 또한 세상의 질서 때문에 겪게 되는 약함은 그것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삶으로서의 설교가 되며, 삶으로서의 예배가 되기 때문에 영광의 모습으로 우리를 바꾸게 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강함과 번영과 형통함에서는 절대로 만날 수 없는 하나님을 약함을 통해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슬픔과 고통의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며 약함을 위한 장소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주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과 약함에도 불구하고 또는 이를 이겨내면 얻게 될 강함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소중한 약함을 선택하였으므로 기뻐하는 것이다.

KOSTA/USA 2014 Chicago Conference를 기대하며

[vc_row][vc_column width=”1/2″][vc_single_image image=”5279″ align=”center” img_size=”medium”][vc_single_image image=”5280″ align=”center” img_size=”medium”][/vc_column][vc_column width=”1/2″][vc_column_text]

출퇴근하는 길에 이용하는 I-90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목격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교통사고는 3년 전 2011년 7월에 일어난 14중 추돌사고였습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자마자 길게 늘어선 차들의 행렬 가운데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머물러 있었습니다. 출근 시간에 쫓기고 있었던 차들이 정체를 피하기 위해 갓길과 잔디밭까지 넘어서 출구로 빠져나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사고로 Rachel Beckwith 라는 9살 소녀 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Rachel은 생일을 맞아 선물 대신 저개발 국가에서 실행되고 있던 정수 프로젝트에 기부할 300불을 모금하고 있었습니다. 300불은 15명의 사람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금액이었는데, 아쉽게도 본인이 목표로 했던 것보다 80불이 모자란 220불을 모금했습니다. 사고 뉴스와 함께 Rachel의 사연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Rachel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금에 참여하여 훨씬 더 많은 금액을 기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올해 4월 15일, 어김없이 I-90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출근을 하려던 길이었습니다. 마침 고속도로가 무척 정체되어 있어서 어쩌면 사고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재빨리 우회하는 국도를 이용하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 한국에서 벌어진 세월호 사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이 구조되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고, 무책임한 개인과 조직을 향한 분노로 변해가면서 문득 9살 소녀의 죽음이 그 순간에는 불편함으로 다가갔을 갓길 운전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고속도로에서 누군가 겪었을지 모르는 비극이 저에게도 불편함에 불과했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저 역시 3년 전 갓길 운전자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우리는 모두 약함을 경험하는 존재입니다. 인생의 절정을 맞고 있는 순간에도 우리 안에 내재된 연약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어렵고 힘든 고난의 순간에는 상황이 주는 압박감이 우리의 약함을 더 깊이 자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소망을 발견하는 곳은 누군가의 약함을 불편해 하는 사람이 아니라, 약함 가운데에서 또 다른 약자를 생각하고 보듬고 돕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도, Rachel 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Rachel이 죽음을 맞이한 그 자리에는 이제 Rachel의 교회 친구들이 심어놓은 조그마한 십자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소망의 원천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약함을 경험하고 짊어지시고, 부활을 통해 궁극적인 소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는 모습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 안에 내재된 약함을 포장하거나 감추려하는 대신 정직하게 그 약함을 받아들이고, 약함 가운데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비밀스러운 능력을 더 깊이 깨닫고 경험할 수 있기 원합니다. 약자를 위해 오신 그리스도의 삶과 시선이 우리의 삶과 시선이 되어, 약자들과 함께 우리의 삶을 나누는 가운데 이전에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기쁨을 경험하는 계기가 마련되는 KOSTA/USA Chicago Conference가 되기를 깊이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김진태 총무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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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KOSTA/USA 환영사

[vc_row][vc_column width=”1/3″][vc_single_image image=”5248″ align=”left” img_size=”medium”][vc_column_text]이동원 목사 (KOSTA 국제 이사장)[/vc_column_text][/vc_column][vc_column width=”2/3″][vc_column_text]인생의 보편적 진실은 가면입니다. 우리는 모두 가면을 쓰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약하면서도 강한 척 하는 그런 가면 말입니다. 인격을 뜻하는 persona가 가면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죄인인 우리는 모두 연기에 익숙한 삶을 삽니다. 가면을 인격으로 확신하는 삶을 삽니다. 인생의 진지한 변화는 가면을 벗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대면하는 용기는 가장 큰 용기입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자리 그 자리야말로 변화의 지성소가 될 것입니다. 2014 코스타가 그런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강함의 가면을 벗고 약함을 인정하는 자리 말입니다.

신앙의 선배 바울이 그런 자리에 섰습니다. 내가 약할 때 그가 나의 강함이라는 그의 고백이 2014 코스탄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한민족 디아스포라 700만 시대를 맞이하는 이 때 한인 유학생과 디아스포라 청년들의 변화로 말미암아 주님의 강함을 드러내는 영의 축제를 기대합니다. 우리의 약함, 주님의 강함이십니다.

함께 약함의 자리에서 주를 바라보는 동역자, 이동원 목사 드림[/vc_column_text][vc_column_text][/vc_column_text][vc_separator icon=”circle”][/vc_column][/vc_row][vc_row parallax_bg_width=”110″ parallax_speed=”normal”][vc_column width=”2/3″][vc_column_text]우리가 사는 세상은 ‘힘(power)’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다스리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정글법칙에 의해 세상이 돌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들 대부분은 돈의 힘, 신분의 힘, 학벌의 힘, 무기의 힘, 권력의 힘 등, 각종 힘을 소유한 강자(强者)가 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돈을 버는 목적도, 공부를 하는 이유도, 사회적 신분을 확보하려는 노력들도 모두가 힘을 가진 강자가 되려는 치열한 몸부림들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주는 힘은 진정한 힘이 아닙니다. 모두가 한시적이며 제한 적인 가짜 힘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인간은 흔히 생각하듯 강한 존재도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최첨단 과학문명을 자랑하는 현대인들 이지만, 작은 천재(天災)나 인재(人災)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아무 힘을 쓰지 못하는 모습이 그 역력한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힘을 가져보겠다고 헛된 몸부림을 치고 있고, 조금만 힘을 가진 듯 하면 휘둘러 과시하려 하는 어리석고 교만한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KOSTA/USA 2014의 주제는 “우리의 약함, 주님의 능력” 입니다. 선포되는 메시지들을 통해서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약함의 본질을 바로 이해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겸손하고 진실하게 자신의 약함을 인 정하고 진정한 힘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만나는 시간이 될 것입 니다. 만왕의 왕이면서도 섬김을 받는 왕이 아닌 섬기는 종으로 오신 주님 의 참 능력을 체험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나 자신이 쌓아가는 헛된 바 벨타워의 가짜 파워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보여주신 십자가의 참 능력 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I will boast all the more gladly about my weaknesses, so that Christ’s power may rest on me)” (고후 12:9)

KOSTA/USA 에 오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환영합니다. 매년 코스타를 통해서 풍성한 말씀의 잔치를 펼쳐주신 하나님께서 올해도 변함없는 은혜와 합당한 도전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항상 충성스러운 헌신 으로 코스타를 섬기시는 모든 코스탄 여러분들을 특별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

김태권 목사 드림[/vc_column_text][/vc_column][vc_column width=”1/3″][vc_single_image image=”5249″ align=”left” img_size=”medium”][vc_column_text]김태권 목사 (KOSTA/USA 2014 준비위원장)[/vc_column_text][/vc_column][/vc_row]

[이유정] 비상(飛翔)하라

한 젊은이가 우연히 검독수리 둥지를 발견했다. 심술궂은 그는 검독수리 둥지에서 알을 하나 꺼내 뇌조[footnote]들꿩과(Tetraonidae) 뇌조속(Lagopus)에 속한 뇌조는 날지 못하는 새이다.[/footnote] 둥지로 옮겨 놓았다. 알에서 부화한 뒤 이 독수리는 뇌조 새끼들과 함께 자랐다. 자신을 뇌조로 여기고 행동했다. 뇌조처럼 꼬꼬댁 소리 지르고, 벌레를 찾아 흙속을 뒤적였다. 날개에 비해 몸집이 비대한 뇌조는 몇 미터 이상은 높이 날아오를 수 없는 까닭에 새끼 독수리 역시 그 이상 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 덧 힘차고 당당한 몸집으로 성장한 검독수리는 여느 때처럼 뇌조들과 함께 흙더미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때 한 그림자가 이들 위를 쏜살같이 지나갔다. 모두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창공 위에 검은 형체가 바람을 가르고 미끄러지듯 치솟고 있었다. “아! 정말 멋진 새로구나!” 검독수리가 탄성을 질렀다. “저건 독수리야!” 옆에 이던 뇌조가 알려주었다. “검독수리라고 부르지! 저 새가 바로 하늘의 왕이야! 저 독수리와 겨룰 수 있는 새는 없지.” 뇌조는 고개를 떨구며 한 마디 덧붙였다. “꿈도 꾸지 마, 너는 결코 저런 새가 될 수 없으니까.”
 
이들은 다시 흙더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이후 이 검독수리는 두 번 다시 하늘을 치솟는 독수리의 비상을 본 적이 없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 검독수리는 평상시 뇌조가 뛰어오르는 높이 이상 결코 날아보지 못하고 그렇게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footnote]드와이트 에드워드, 내면의 혁명 (서울: 좋은씨앗, 2005), p. 17-18. 아메리칸 인디언들 사이에 전해오는 옛이야기[/footnote]
  
우리는 태어나면서 저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놀라운 계획을 갖고 태어난다.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그렸던 지위는 ‘왕의 가문’이다. 피조물을 지배하고, 관리하고,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사명을 주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그러나 어느 날 사단은 우리를 뱀의 둥지에 옮겨 놓았다. 그리고 우리의 지위를 망각하게 만들었다. 땅에 붙어서 땅의 것들만 꿈꾸도록 길들였다. 옆에 붙어서 평생 우리 귀에 대고 말한다. “꿈도 꾸지 마, 너는 결코 왕의 가문이 될 수 없으니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왕의 자녀의 신분을 모르고 마치 뇌조 나라의 검독수리처럼 그렇게 평생 흙더미만 뒤지며 죽어간다. 자신의 가치를 모르고 영적 거지로 산다. 그래서 인생의 좌표를 잃고 엉뚱한 쓰레기 더미에서 삶을 허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을 쓰레기 더미에서 하나님으로 향할 때 우리의 눈은 하늘의 좌표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원래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였는지 깨닫게 된다.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는 쓰레기 더미에서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고 살았는지 놀라게 된다.
 
검독수리도 자신의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진짜 검독수리가 바람을 가르듯 창공으로 치솟는 모습을 보았을 때이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옆의 뇌조들이 단번에 그의 기를 꺾었다. “꿈도 꾸지 마, 너는 결코 저런 새가 될 수 없으니까.”
 
세상은 경쟁사회이다. 높이 오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짓밟아야 산다. 자신이 못 오르면 다른 사람도 못 오르게 짓밟는다. 이것이 죄로 물든 이기적인 인간관계이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경쟁에서 짓밟힌 사람들, 자신을 인생의 낙오자로 여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실재로 교회는 물론 집회나 세미나, 대학의 현장에서 삶에 지치고, 자신감을 잃은 분들, 미래를 불안해하는 사람들, 비전은커녕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우리의 이웃을 많이 만난다. 가정이 깨지면서 부부 관계가 무너지고, 자녀들의 마음이 찢기고, 피멍든 모습도 흔해졌다. 잘못하다간 저 뇌조 나라 검독수리처럼 지저분한 흙더미만 뒤적거리며 단 한 번도 뇌조 이상을 날 생각도 못하고 그렇게 생을 마무리할 수도 있다.
 
예배는 비상(飛翔)의 현장이다. 과거에 그 어떤 시궁창에 빠져 살았던지 상관없다. 예배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망각한 채 비대한 몸짓으로 벌레나 잡아먹던 우리가 일어나 하늘을 날게 되는 인생역전의 현장이다. 우리가 오직 하나님을 기대하고 바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독수리처럼 바람을 가르고 창공을 향해 치솟게 하신다. “청소년이라도 피곤하고 지치며 건장한 청년이라도 넘어지고 자빠지나, 오직 여호와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는 새 힘을 얻어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갈 것이요 달려가도 지치지 않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_사 40:30,31, 현대인의 성경 
  
잭 헤이포드의 말처럼 예배는 하나님의 왕국과 능력이 교회 전체에 임하고 교회를 통해서 세상으로 확장되는 것이다.[footnote]잭 헤이포드, 경배 (서울: 조이선교회 출판부, 2002), p. 32[/footnote] 예배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회복은 인간의 상식을 뒤엎는다. 그 힘은 하나님 왕국의 권위에서 흘러나온다. 그 회복은 생물학적 나이나 육체적 힘으로 비교할 수 없다. 인간의 차원과 시야를 초월한다. 하늘로 비상할 때 이 땅에서 경험한 모든 수준을 일시에 뒤엎는다. 뇌조의 고정관념을 타파한다. 전혀 새로운 시야, 그러나 태초에 이미 우리 안에 있었던 관점을 회복한다. 하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왕의 시각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의 지혜로 행동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벧전 2:9 상반절)
  
그래서 우리는 예배 때마다 흘러넘치는 왕국의 권위로 왕 같은 제사장의 정체성을 회복한다. 왕의 지위를 되찾고 ‘거룩한 나라’를 꿈꾼다. 제사장의 신분을 되찾아 ‘하나님께 소유된 백성’을 섬기고 다스릴 사랑을 충만케 채운다.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계 5:10)
  
이제 예배의 자리에서 회복된 왕국의 권위를 갖고 뇌조 나라의 잃어버린 제왕들을 향해 파송된다. 그 나라를 다스리되 세상의 힘, 폭력과 돈, 권력이 아닌 천국의 사랑, 섬김, 비폭력과 평화라는 새로운 권위로 다스린다. 자신이 죽고 남을 살리는 제사장의 권위로 다스린다. 그곳에서 만난 잃어버린 영혼들을 다시 예배의 자리로 초대한다. 저들이 또 다른 왕의 가문에 참예할 수 있도록. 
이유정 / 한빛지구촌교회 예배디렉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오직 주 만이’ 작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