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 김두화 목사

이 세미나는 2002 KOSTA/USA에서 뉴저지 지구촌교회 김두화 목사의 ‘기독입문 – 교회’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우리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면 무엇보다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생활에서 실질적인 삶에 부딪칩니다. 왜 교회생활이 그처럼 중요한 것인지 생각하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듭난 크리스챤은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으며 그것은 교회이며 한 가족이고 더 이상 손이 아니고 외인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교회관이 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이 왜 중요한가, 어떻게 하면 건강한 교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교회생활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에는 out of 클레아는 called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복음을 듣고 믿어 새로운 공동체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게 된 공동체를 교회라고 합니다. 이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증거하러 나가는 공동체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고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아 그리스도에 속한 백성들의 공동체를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러냄을 받았고 속하였습니다.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천국의 시민으로 성도라고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칼빈이 “교회를 어머니로 받들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자격이 없다”라고 했죠. 이 세상은 바벨론 문화, 바벨론 정신입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전에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사탄의 자녀였습니다. 이 세상을 요람으로, 이것이 모든 것인 것처럼, 세상의 끝인 것처럼 살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머니이고 사탄이 아버지입니다. 이에 비해 구원을 얻으면 교회는 어머니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교회에 대해서 바른 시각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교회 건물이 교회는 아닙니다. 예배당, 장소이죠. 저희 교회는 강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는데, 이것은 학교 건물이죠, 이 자체가 교회가 아니에요. 초대교회는 주로 내 집에 있는 교회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둘째 교파가 아닙니다. 성경은 교파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침례교 목사인데, 우리가 폐교파주의로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각 교파가 기여하고 있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본질적인 것은 공통적인 것이지만 비본질적인 분야는 다양성을 인정해야할 것같습니다. 예를 들어 침례가 더 성경적이라고 저는 생각하지만 그것이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장로교,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지요, 그것이 우리의 신앙에 도움을 주는 점이 있습니다. 한편 웨슬리안처럼 인간에게도 자유의지를 주셨다, 인격적인 책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함께 균형을 이룰 때 신앙이 균형을 이루겠습니다. 서로 기여하는 것입니다. 서로 배워서 주님의 몸을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교파자체가 교회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교회는 의식은 아닙니다. 세례, 꼭 교회에서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찬을 꼭 교회에서만 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믿는 자들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두 유형을 생각해보면, 우주적 교회와 지역교회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구원받은 자들인데, 이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공동체, 비가시적인 공동체, 무형교회입니다. 지역교회는 불완전하지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누구나 올 수 있습니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불완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민교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 갈등, 불완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잘 보면 그렇죠. 우주적 교회는 승리한 교회입니다. 지역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에요. 영적 전쟁을 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상처받고 상처 입히고 넘어지고 그런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지역교회를 통해서 우주적 교회를 확장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교회의 기초, 마태복음 16장1 3절입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합니다. 이 믿음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이 반석을 베드로를 가르킨다고 주장하는데, 헬라어 원어를 보면 다른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작은 돌, 남성을 표현하는 단어가 쓰이고 반석은 큰 돌, 중성을 표현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다른 것이죠. 내용에서도 다음 사건에 베드로를 책망하는 표현이 나오죠. 이 전후 맥락을 볼 때도 반석을 베드로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신앙의 고백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후서에서 비슷한 표현을 쓰는데요, 베드로전서2장 4절,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와, 머릿돌이 되고, 반석이 되었다,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반석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반석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이 주님께서 직접 세운, 그 반석이라는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주님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 하에서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로마서 등등은 지역교회에 보낸 편지죠. 일반서신이 있고 목회서신이 있습니다. 이 성경을 집으로 그려보면 가장 아래 반석이 사복음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위에 교회가 서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중요성입니다. 첫째 성경이 지역교회를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일꾼 된 것을 중요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세례를 받고, 교회의 멤버쉽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많은 미국교회는 신앙고백하고 세례나 침례를 받은 후에 교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로컬의 이름을 갖고 많은 서신이 로컬 교회에 보내진 것이며, 교회의 일꾼이라는 표현 등, 성경은 교회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둘째 교회는 성도들의 인격 형성에 중요한 장입니다. 혼자 신앙생활하면 성도의 인격이 향상될 수 없습니다. 삶의 변화, 인격의 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이 12명의 제자를 부르시고 함께 지내시며 교제하면서 제자들을 빚으신 것이죠. 서로 맞지 않은 사람들을 묶어서 같이 지내면서 고쳐져 가는 것이지요. 교회 안에서 우리의 인격을 빚고 계신 것입니다. 교회는 다른 배경을 갖고 모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만 있고 서로 용납해야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기 위해서 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4절, 서로 돌아보아라,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사역의 중심기관입니다.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교, 복음전파와 사랑의 실천입니다. 복음전파는 다른 기관이 대신할 수 없지요. 교회에 있어서 선교는 가장 중요한 미션입니다. 교회의 생명이 선교입니다. 주님이 성육신의 연장을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교회가 이제 그 역할을 해야합니다. 교회를 통해서 선교나 구제를 해야 좋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면 자신이 드러나고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파라처치는 지역교회를 지원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에 중심은 지역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가정과 불가분의 관계인 유기체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삶에 가정과 교회에 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처럼 가정과 교회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첫째로 지역교회는 교제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교제하였다라고 나오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교제하였습니다. 에베소서 3장, 성령의 하나되게 함을 힘써 지켜라, 말씀과 성령의 사역에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교회에 분파, 갈등을 만드는 일은 그 자체가 죄입니다. 자기 사람 만들고 끼리끼리 지내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죄입니다. 화평과 일치가 교회의 핵심입니다. 다양성 속에 unity, 연합 일치입니다. uniformity가 아니고 다양성 속에 연합입니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개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두번째 지역교회는 가족입니다. 교회는 사업체가 아닙니다. 비즈니스가 아닙니다. 모이는 분들 하나하나 구령하고 캐어하고 평신도 목자들로서 셀 사역하고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0절, 믿음의 가족이라고 표현합니다. 히브리서 2장 10절, 형제로 서로 부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3장 33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서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몸된 교회, 골로새서는 주님의 머리되심을 강조합니다. 영적 은사는 교회를 세우는데 써야 합니다. 교회는 유기적인 구조를 가져야 합니다. 사역 중심입니다. 교회 성도들이 모두 사역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 은사에 근거하여 기능하는 유기적 구조이며 서로가 상관된 지체입니다. 마지막으로 지역교회는 양무리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아침에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함께 식사하며 교제하셨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발견하고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때 주님은 양을 먹이라라고 부탁합니다.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평신도, 목사 모두 목자입니다. 교회는 양무리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양, 우리 밖에 있는 양 모두 쳐야 합니다. 교회는 목자들에 의해서 전도되고 양육되고 성숙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최영기]’공동체성은 교회의 본질입니다’

1. 목사님의 소개와, 하시고 계신 사역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원래 목사였던 사람은 아니고, Ohio State University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Silicon Valley에 있는 회사에서 1977 85년까지 근무하다가, 41살에 신학교에 가서, 44살에 늦은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93년에 지금의 휴스턴 서울 침례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고요. 저는 예수님을 대학원 때 영접했는데, 그 때 성경을 읽어가면서 갖게 된 갈등 중의 하나는 현재의 교회와 성경에 나타난 교회가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은 가정 같았는데, 현재의 교회는 왜 그렇지 못할까 하는 고민을 하던 중에, 그 이유가 초대교회는 가정에서 모이는 가정교회라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브루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사람들의 집에서 모이는 가정 냠맙눼募? 겁니다. 그렇게 해서,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에 부임하여 23 개의 목장(개별 가정 교회의 명칭)으로 가정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목장 숫자가 약 130개 됩니다. 분가가 자주 있어서 정확한 숫자는 잘 기억을 못하겠습니다.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증가가 기신자의 수평 이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불신자 전도에 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작년도 저희 교회에서 새롭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침례를 받은 사람이 영어 장년부와 중고등부를 합쳐서 약 280명입니다. 한 주에 약 5명 꼴로 침례를 받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2000년도 인구 조사 통계에 의하면, 이곳 휴스턴의 한인 인구가 10,300명이라는 데 한국 사람이 가주나 뉴욕처럼 많이 않은 곳에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놀랄만한 일이라고 주위 목회자님들이 말씀해 주십니다.



가정교회에 관해서 배우고 싶으신 목회자들을 위해서, 화요일부터 주일까지 5박 6일 간의 세미나를 열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은 공부를 가르쳐서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을 보여주고 나눔으로써 제자를 만들어 가는 겁니다. 성경공부를 통해 제자를 만드는 일이 2 3년간은 효과적일 수 있지만, 그 이후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죠. 그래서 가정교회에서는, 부부 싸움했던 얘기, 화났던 얘기들을 솔직히 나누고, 그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갔는지는 함께 나누면서 제자가 되어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세미나에서도 보고 배우는 원칙이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들은 목자의 집에서 민박을 하면서 보고 배울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처음 예수님을 믿는 분들을 위한 성경 공부인 ‘생명의 삶’을 속성으로 가르쳐 드리고요, 목자들의 간증을 들려드림으로써 이론이 아닌, 살아 있는 현장을 소개하려 하고 있습니다. 가정 교회 사역에 있어서, 예배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세미나에 참석하시 분들이 주일 예배에 꼭 참석하고 가시도록 하고 있습니다.



2. 가정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통한 제자 양육이 아닌, 삶을 통한 양육을 지향하신다면, 성경공부 교육은 따로 진행이 되는지요?



그렇습니다. 매주 화요일에 “삶 공부”라고 이름을 붙여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은 분들을 위한 ‘생명의 삶, 다음 과정인 13주‘새로운 삶’, 다음 과정 13주‘경건의 삶’이 같은 날 동시에 제공됩니다. 이 밖에도, ‘부부의 삶’, ‘부모의 삶’, ‘교사의 삶’등 실제적인 삶에 도움이 되는 코스가 제공됩니다. 이 모든 과정들은 가르침의 은사가 있는 평신도에 의해 진행되고 있고요. 그리고 ‘쎌 교회 지침서’를 저술하신 랄프 네이버 목사님이 쓰신 6주 짜리 “매일 영적 성장 가이드’를 우리가 번역해서 사용했었는데 최근에 정식으로 NCD에서 출판했습니다. 이것과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교재로 해서 가정 교회 차원에서 1대 1로 교육시킵니다.



매주 금요일에는 가정 교회 모임인 목장모임이 있고요, 주일에는 목장의 리더인 목자들의 모임인 ‘초원모임’이 있습니다. 초원모임도 원칙적으로는 목장모임과 동일하게 진행되지만, 목장모임이 나눔과 교제가 주제라면, 초원모임은 목양이 주제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삶을 나누고 보이면서 제자를 만들어가는 것이 목장모임의 목표이기 때문에, 12명이 넘으면 반드시 분가하도록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규모가 너무 커져서 진정한 삶을 나눈다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저희 교회에서 목자가 수료해야 할 삶 공부 5 과목을 다 수료하지 못한 사람을 대행 목자라고 불러서 목장을 책임지도록 하는데 이들 중에는, 빠른 경우엔, 예수를 영접한지 7개월 만에 대행목자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좀 빠르겠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목자는 가르치는 리더가 아니라 섬기는 리더이기 때문에 가능하고요, 또 삶을 보여주면서 양육하는 것이기에, ‘전에 본 대로만 하라’로 권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지요. 그러다가 힘든 일이 생기면, ‘초원모임’을 통해 묻고 함께 기도할 수 있기에, 7개월이라는 신앙경력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귀납법적인 성경공부는, 주일 예배 설교를 통해 이루어 집니다. 많은 교회들이 교인 전체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이 시간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아쉽습니다. 주일 예배에서도 새로 믿은 분들이 적응하기 쉽게 배려하려고 하는데, 예를 들면, 성경은 표준 새번역을 사용함으로써 개역성경의 어려움으로 인해 오는 거리감을 없애려고 하고있고요, 찬송도 같은 것을 반복해서 부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새로 오신 분들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지 않고요, 설교도 가능한대로 교회용어가 아닌 평상어를 사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미 믿는 분이 우리 교회를 방문하면 다른 교회에 가서 섬기시라고 하고 등록을 허락지 않는데요, 이것 또한 새로 오시는 분들이 더 쉽게 적응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3. 왜 현대교회가 이토록 공동체성이 상실되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사실, 교회에 공동체성이 상실되었다고 하기보다는, 교회의 본질이 흐려졌다고 하는 편이 나을 듯 싶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3위 하나님께서 공동체셨고,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아담-하와의 셋이서 하나되는 가정을 공동체로 세우셨고, 그리고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라는 공동체를 세우셨지요.



현대 교회는 너무도 개인 신앙을 강조한 나머지 공동체성에 대한 의식이 상실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문제를 ‘기독교가 불교화 한다’고 하곤 하지요.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가 너무도 중요합니다만, 그것만을 강조함으로써 함께 하는 신앙을 무시하면 문제가 됩니다. 전통적인 교회의 경우에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서 공동체성의 상실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현재 가정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 중에서도, 가정교회를 또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생각해서 실패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기존 교회에서의 구역은 교회 내의 하나의 조직이요, 또 하나의 프로그램일 뿐이지만, 가정교회는 그 자체가 local church이고, 그 가정교회가 모인 것이 휴스턴 서울 침례교회인데 말입니다.



다시 말해, 공동체성이 상실된 교회는 원론적으로 볼 때,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4. 공동체성이 회복된 ideal한 교회의 모습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세상에 ideal한 교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도 벌써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어떤 형태의 모습이 이상적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교회의 바른 모습의 기준은 형태라기 보다는 spirit입니다.



첫째는, ‘영혼을 구원해서 제자를 만든다’는 생각을 가지고, 영혼 구원에 집중하여 삶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만들어 가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마태복음 28장의 Great commission이라고 할 수 있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에서, 실제로 명령형은 ‘제자를 삼아라’뿐 입니다. 다시 말해, 영혼 구원해서 제자를 삼는다는 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둘째는, ‘기쁨’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일이 기쁨이 되어야 하고, 교회에 가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저희 교회라고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없겠습니까 만은, 많은 경우에 ‘이 교회에 있어서 참 행복합니다’라는 고백을 들을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5. 그렇다면, 그런 spirit을 가진 교회가 되기 위해, 현재 애쓰시고 계신 일들이 있으시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저희 교회가 지난 10년간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지역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일해왔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10년간은 세계선교를 향해가고, 그 다음 10년은 지역사회 봉사를 위해 가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느낌이라고 말씀 드린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늘 Vision과 leadership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컴플렉스가 있어 왔습니다. 교회의 미래 계획이라던가, 비젼이 뭐냐고 물어오면, 별로 할 말이 없었고, 리더십에 관해서도 내게 특별한 리더십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었거든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비전이 아니라, ‘순종’뿐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들은 음성에 순종하다 보니 가정 교회가 성공적으로 정착이 되었고, 가정 교회를 통하여 지역 사회 영혼 구원에 집중하다보니, 타지역의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도 신경이 쓰여서, 작년에는 12팀이  단기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사실 저희 교회에는 장기 기획위원회같은 모임도 없습니다.



6.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 위해, 정말 힘든 문제 혹은 장애물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요?



(1) 목회자의 의식구조가 문제입니다. 가정교회 세미나를 들으러 오시는 목사님들을 보면, 가정교회를 교회를 부흥시키는 테크닉정도로 생각하거나, 조직의 일부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대부분 가정교회 사역이 실패하게 됩니다. 가정교회를 도입해서 성공하시는 분들의 경우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나도 예전부터 같은 생각을 가져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몰라서, 혹은 기회가 없어서 못했다’고 하시는 분들이고, 둘째는, ‘이것 밖에는 길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하시는 분들입니다. 이렇게 의식 구조가, 기존 교회가 가진 틀을 깨야만 진정한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진정한 공동체를 향해 가다 보면, 목회자들 스스로가 포기해야 할 부분이 참 많거든요.



(2) 교회 지도자들의 저항입니다. 장로나 안수집사님 같은 분들이, 가정교회를 받아들이다 보면, 다스리는 위치에서 섬기는 자리로 옮겨가야 하는 것이, 받아들이기에 힘드신 경우가 꽤 있습니다.



(3) 성도들 스스로가 변화하는 것을 꺼려 하는 경우입니다. 가정교회를 하다 보면, 삶을 서로 오픈하고 나누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삶이 노출 되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있고요, 또 기존의 교회 전통이 편해서 변화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4) 기존의 프로그램을 그대로 두고, 가정교회 같은 공동체를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진행하려는 하는 경우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공동체성은 본질의 문제이지,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7. 성경적인 공동체를 가꾸어 가고픈, 유학생을 비롯한 젊은이들에게 꼭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까?


소속된 교회에서 목사님만 이해해 주신다면, 청년부는 가정교회로 전환하기에 참 좋은 모임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는데 주의하실 부분은, 청년들이 지적인 것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지적인 성향때문에 모임이 자꾸만 지성화만 추구하게 되기 쉬운데, 이런 성향을 극복해서, 섬김의 공동체로 전환되어야 하고, 가르쳐서가 아니라 삶으로 보여줌으로써 제자를 만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젊은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듣는 것보다는 말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있고, 사고보다는 느낌 중심으로 살며, dogma보다는 관계성 중심으로 산다고 들 하는데, 이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성향으로 인해서 젊은이들이 가정교회에 더 잘 맞을 수도 있다는 말이죠. 어른들은 젊은 세대가 commitment가 없다고들 생각하지만, 사실 어른들 기준의 그런 헌신의 모습이 없을 뿐, ‘이거다’싶으면 더 없는 commitment가 나오기 마련이죠. 기존 교회 내에 가정교회의 모임이 없다고 하더라도, 교회의 양해만 있다면, 청년부 내에서 그런 공동체를 시도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최영기]설교 듣는 것이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던 대학시절, 주일날 설교 직전에 예배당에 들어가서 축도 끝나기 전에 살짝 도망쳐 나오던 기억이 납니다. 이러면서도 별로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예배의 다른 순서들은 설교를 위한 장식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가는 목적은 설교 들으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설교만 놓치지 않으면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분들을 보면 옛날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쓴웃음이 나옵니다.


설교가 예배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은 종교개혁의 결과입니다. 로마 카톨릭 예배에서는 예식과 성례가 예배의 전부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성도들이 말씀에 무지하게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말씀에 관한 성도들의 무지를 깨려다보니 말씀 선포가 예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설교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설교와 더불어 기도, 찬송, 찬양, 헌금 등이 다 중요합니다. 설교만이 아니라 모든 순서가 다 예배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설교 외의 다른 순서들은 설교에서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나 액세서리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드릴 때에는 예배 순서 하나 하나에 정성을 담아야합니다. 찬송할 때에는 진심으로 해야하고, 기도할 때에는 믿음으로 해야하며, 헌금할 때에는 감사와 기쁨으로 해야합니다.


저는 주일 새벽이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광고를 포함한 예배 순서 하나 하나를 꼽아가며 기도합니다. 예배 순서마다 성령님의 도우심과 임재하심이 같이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예배를 위하여 기도하는 약 50명의 기도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배 10-20분전에 본당에 나와서 예배 순서를 하나하나 꼽아가면서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교회를 방문하시는 분들이 예배가 은혜롭다고 평가해 주십니다.


예배에서 은혜를 받기 원하면 교회당에 일찍 나와서 마음 준비를 하고 임해야합니다. 이때에 예배 순서를 꼽아가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기도가 예배를 은혜롭게 만들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이 예배에 은혜를 받게 만들어줍니다.



[최영기] 성경책을 선물할 때

안 믿는 분들에게 성경책을 사서 선물하는 것이 좋은 전도 방법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선물할 때에는 어떤 책을 먼저 읽는 것이 좋을지 설명해 주어야합니다. 설명이 없으면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천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선물 받고 질려서 서가에 처박아둘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선물 준 분의 성의를 생각하여 읽기 시작하는 분이 있다 할지라도 끝내지를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통 책을 읽듯이 성경 맨 앞에 실려있는 창세기부터 읽기 시작하면 신앙적인 해답이 얻어지기보다는 의문이 더 생기기 때문입니다. 가까스로 창세기를 끝낸다 할지라도 출애굽기나 레위기에 달하면 낯선 용어, 낯선 풍습과 규례들에 질려서 더 이상 읽는 것을 포기할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선물할 때에 구약부터 말고 신약부터 읽으라고 권합니다. 신약도 마태복음부터 말고 요한복음부터 읽으시라고 권합니다. 마태복음부터 시작하면 책을 펼치자마자 예수님의 족보가 등장하기 때문에 질려서 읽기를 포기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을 먼저 읽으라고 하는 이유는 주제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이해하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요한복음을 끝내면 그 다음에 나오는 사도행전을 읽으라고 권합니다. 사도행전에는 120명으로 시작된 기독교가 어떻게 로마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는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리가 아니라 사건이 기록되어있기 때문에 안 믿는 분들에게도 흥미로울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끝내면 다음에 나오는 로마서를 읽을 것을 권합니다. 로마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체계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여기까지 끝내고 나서 성경을 더 읽기를 원하면 예수님에 관하여 좀 더 알 수 있도록 누가복음을 읽으라고 합니다. 그것이 끝나면 로마서 다음에 나오는 편지서들을 요한 계시록 전까지 읽을 것을 권합니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은 신약의 나머지 부분을 두 세 번 읽은 후에 읽으라고 권합니다. 이처럼 신약을 두세 번 읽으신 후에 비로소 구약에 도전할 것을 권합니다.


성경은 현대말로 번역된 표준 새번역 판을 선물합니다. 개역 성경은 연속 사극에서조차도 등장하지 않는 옛날 말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이 성경책을 열어보고는 질려서 읽을 엄두조차 못 낼테니 말입니다.

[최영기] 영적인 핸디캡을 극복하려면

부자들이 들으면 어떻게 느낄지 모르지만 저는 부자들을 보면 측은함을 느낍니다. 신앙적인 핸디캡을 지닌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에서 부는 핸디캡이 될 수 있습니다. 부자들에게는 믿음이 생기기가 힘이 듭니다. 자신만만하기 때문에 비록 대상이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의지한다는 것이 힘이 듭니다. 또 돈이 있으니까 하고 싶은 것은 하고 갖고 싶은 것은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마태복음 19장 24절)”


부자 가운데에서도 부모님이나 아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진정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부를 축적하거나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엄청난 정신력을 쏟아야합니다. 영적인 일에 신경을 쓸만한 마음의 여유를 갖기가 힘이 듭니다. 주일 설교를 듣는 목적도 대부분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 잠시 머리를 쉬고 마음의 평안을 찾자는 것이지 설교를 듣고 삶을 바꾸자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이면서도 신앙생활을 잘 하시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적입니다. 부자가 천국 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을 때에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마태 19:26). 구원받은 부자는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의 산물입니다.


신체적인 핸디캡을 가진 장애자들 가운데에는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서는 보통 사람들보다 몇 배되는 노력을 쏟아야합니다.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부자는 “부”라는 핸디캡을 안고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신앙 성장을 위하여 보통 사람보다 몇 배 되는 노력을 기울여야합니다. 새벽 예배를 빠지지 않는다든지 정직한 십일조를 해서 자신을 채찍질 해야합니다.


신앙 생활의 핸디캡은 물질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지식도 핸디캡이 될 수 있습니다. 아는 것이 많아서 예수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 지식이 많아서 누구의 설교를 들어도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eKOSTA 독자들 가운데에는 아마 물질적인 핸디캡보다는 지적인 핸디캡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지적인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노력하여야 합니다.


지적인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 중의 하나가 순종과 섬김입니다. 신앙 선배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성경에 분명히 어긋나지 않는 한 반론을 제기하는 대신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신앙 후배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말로 가르치려는 대신에 몸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지식이 아니라 순종과 섬김이 예수님을 닮게 만드는 통로입니다. 순종과 섬김이 예수님 삶의 가장 큰 특징이기 때문입니다(빌 2:5-8; 마 2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