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승] 약자를 위한 복음? 약자의 복음!

약자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위로나 격려는 오히려 그들에게 독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특히 젊은 그리스도인 가운데에, 약자를 향한 compassion을 가지고 그들을 섬기고 세워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그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생존경쟁에 몰두하고 있는 세상의 흐름에 대비시켜 보면 이들은 참 멋지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 소위 ‘개혁적’ 젊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는,
약자들 (사회적 약자 뿐 아니라, 정서적, 신체적, 영적, 경제적 약자들을 모두 포함)을 향해…
기운을 내, 우리가 함께 하고 있잖아, 저기 고지가 보이잖아… 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들을 자주 발견한다. (나도 매우 자주 그런 접근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진정한 약자들은,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으로부터 스스로 딛고 나올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 자체가 무겁고 힘들어서 주저앉아있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을 해볼 시도조차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이들에게,
힘을 내라, 꿈을 키워라, 비전을 봐라는 식의 선동은 오히려 그들에게서 소망을 빼앗아 가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약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은혜’이지,
인간이 제공해주는 ‘으쌰 으쌰'(너는 할 수 있어) 가 아니라는 것이 요즘 내가 많이 하는 생각이다.

그런의미에서,
은혜로만 살아가는 삶,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삶,
성령을 좇아 사는 삶은… 
정말 중요한 개념들인 것 같다.

약자를 위한 (인간적인) 복음은, 약자들을 배려하고 그들에게 힘을 주려고 노력하지만,
약자의 (하나님의) 복음은, 그들을 은혜에 잠기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 약자가 아니면서, 약자를 위한 (인간적인) 복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소위 ‘강남좌파’와 다를바 없는 것이 아닐까.

(갈라디아서 1장을 나름대로 연구해보면서…. 이런 묵상들을 해 보았는데, 나를 참 아프게 찌른다.)

KOSTA/USA-2009 집회를 기대하며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동민이는 대한민국 남자들이 군대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그저 군대에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 군대 이야기를 처음 해 주었던 동네 아저씨에게서 들은 군대는 사람이 지낼 만한 곳이 아니었다. 죽음의 위협을 느낄만한 고된 훈련, 아주 열악한 생활환경, 끊임없는 구타 등이 군 생활의 일상이었다. 그 허풍쟁이 아저씨가 해준 무용담은, 높은 절벽에서 병사들을 무작위로 떨어뜨려 살아남은 사람만 제대하게 했다든가, 정기적으로 산에 가서 곰이나 호랑이와 같은 야생짐승을 맨손으로 잡은 사람들이 진급하게 된다든가, 맨손으로 독사를 잡아 가죽을 벗기고 날로 먹도록 훈련을 받는 다든가 하는 살벌한 이야기들이었다. 그 아저씨는 큰 악의 없이 8살짜리 꼬마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꽤 나이가 들어서까지 군 복무에 대한 비합리적인 두려움은 동민에게서 사라지지 않았다.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라는 현재 상황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 당장 매우 급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진 두려움이 그저 8살짜리 꼬마의, 군 복무에 대하여 잘못된 두려움과 같은 것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은 잔인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8살 꼬마의 이야기로부터 우리가 배울 것은 없을까. 그 아이가 가진 두려움이 ‘실체’ 혹은 ‘진실’을 잘못 파악한 데서 기인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황과 비슷하지는 않을까.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한 ‘영적 실체’에 대한 바른 지식이 그들을 두려움으로부터 해방할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아닐까. 


세상에서의 어려움을 만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지한 질문들을 우리 자신에게 묻게 된다.


“우리에게 과연 안정(security)을 가져다주는 궁극적 실체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러한 질문들은 비그리스도인들과 얼마나 다를까? 


KOSTA-2009의 주제문의 일부를 다시 한번 읽어보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그러진 질서에 거스르는, 하늘의 가치를 가지고 이 땅을 살아내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그릇된 가치가 두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그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좌절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안전하다고, 또 많은 물질을 소유하면 평안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그릇된 사상에 우리는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또한, 소외된 자들을 무시하며, 효율을 위해 덜 중요해 보이는 사람들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속삭이는 유혹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세상을 살아낼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긍정하고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승리가 주어졌기에, 그를 통한 ‘평화’(Shalom)가 현실화되었기에 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려움과 두려움이, 허풍에 속은 8살짜리 꼬마가 가지는 수준의, 가벼운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세상이 갖지 못한 그 무엇이 있지 않은가. 우리 내부에서 찾을 수 없는 소망이 외부로부터 (extra nos) 주어져 있다고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하늘과 땅이 만났던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Shalom)를 주셨고, 그 평화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 용기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2,000여 년의 교회 역사 속에서 수많은 믿음의 선조가 바로 그 평화와 용기로 세상에 대하여 승리를 선포하지 않았던가. 


이런 맥락에서, 이번 KOSTA/USA-2009 집회를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소망한다. 


첫째, 참된 평화(Shalom)을 만들어낼 근거가 우리 안에 없음을 가슴 시리도록 깨닫게 되기 원한다. 우리 스스로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없음을, 어떤 이들이 이야기하는 것 같이 우리가 노력해서 세상의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없음을 발견하기 원한다. 우리 안에 소망의 근거가 없다는 간절한 목마름 속에서, 그 평화의 근본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아오게 되기 원한다. 


둘째, 예수의 평화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 더 깊이 이해하는 일이 있기 원한다. 이 세상이 잃어버렸던, 그러나 예수께서 이루신 일로 인해 우리가 그 안에 거할 수 있게 된 평화가 무엇인지 알게 되기 원한다. 마치 참된 보석 앞에서 모조품이 빛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참된 예수의 평화를 보게 될 때, 우리가 의지하고자 했던 거짓 평안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그 평화의 감격에 흠뻑 적시길 원한다. 세상이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평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평화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깊이 깨닫고 그 안에서 함께 모여 우리 모든 힘을 다해 함께 주님을 찬양하는 일이 있기 원한다. 그 큰일을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에 눈물 흘리며 감사하길 원한다. 우리가 흘리는 감사의 눈물과 함께, 우리가 기대고자 했던 거짓된 안정에 대한 환상도 함께 씻겨져 나가게 될 것이다. 


넷째, 내 삶, 내 가정, 내 결혼, 내 진로, 내 꿈, 내 소유, 내 직업 등에 매달려 자기중심적 삶을 살고 있던 천박한 모습에서 벗어나, 세상에 주신 예수의 평화라는 거대담론(Meta-Narrative)에 우리 자신을 헌신하게 되길 원한다. 내가 주인공이 되는 삶의 이야기에 생명력이 없음을 발견하고, 이제는 예수의 평화라는 새로운 이야기전개(Storyline) 안에서 나를 발견하게 되길 원한다. 그런 과정을 거칠 때에야 비로소 세상을 향한 참된 용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상을 향한 놀라운 용기를 가질 근거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음을 발견하고 그 용기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로 헌신하게 되기 원한다. 우리를 둘러싼 여러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하면 생존할 수 있을까 하는 수준의 삶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 깨닫고 그렇게 살기로 결단하는 일들이 있기 원한다. 그리고 세상이 그렇게도 목말라하는 평화와 용기가 바로 예수 안에 있음을, 우리의 삶을 통해 밝히 드러내겠노라고 함께 목청 높여 선언하는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지난 24년간 KOSTA/USA를 통해서 일하셨던 주님의 신실하심에 기대어, “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가 선포되고 선언될 천국 잔치를 기대해본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33, 표준새번역)

[권오승] KOSTA/USA-2008 연차 수양회를 기대하며

KOSTA/USA-2008 연차 수양회를 기대하며

 

권오승

 

그렇다면, 이 땅에서 치열하게 살면서도 이 땅의 가치를 초월해서
영원을 갈망하며 살고
, 한편 초월적인 가치를 가지고 살면서도 이 땅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균형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 비복음적 세상의 흐름 속에서 삶의 방식에 대한
그 길을 찾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해답을 누구에게서 찾을 수 있을까?

 

거시적 관점에서의
헌신은 옛날 얘기
?

 

한 달 남짓 전에 미국 서부의 어느 지역에 사는 한 동역자가 직장일로 필자가 있는 동네를
찾았다
. 함께 식사를 나누고 저녁 시간을 보내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요즘 젊은 학생 세대에게 하나님 나라와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헌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제는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 서정적인 신앙만이 강조되고 있는 요즘의 추세 속에서 신앙도, 헌신도 모두 개인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함께 그러한 현실에 깊이 동의하며
안타까워했다
.

 

그 저녁의 대화 이후 필자의 머릿속에 맴도는 질문이 있었다. 그것은, 정말 이제 그러한 세대는 지나갔는가 하는 것이다. 이 세대는 함께 부를 노래도, 함께 외칠 구호도, 함께
흔들 깃발도 잃어버린 그런 세대가 되어 버린 것인가
. 그리고 이제는 다시 이 세대를 움직일 그 무엇은 개인적,
서정적 신앙 이외에 대안이 없는가.

 

미래의 꿈은 정규직?

 

얼마 전 본 한국의 어느 TV 드라마에서 본,
대학을 가기 싫어하는 어떤 고등학생과 그 학생에게 대학을 가야 하는 이유를 설득하는 부모의 대화가 생각난다.
학생이 대학을 왜 가야 하느냐는 질문에 부모는 대학을 가서 네 꿈을 펼쳐야 하지 않겠느냐는 논리로 설득하려 했다.
그러자 그 학생은 느닷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째 취업 준비생으로 있는, 옆에
있던 삼촌에게 미래의 원대한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 그러자 그 취업 준비생 삼촌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자신의 꿈은
정규직이라고 답했다. 그 고등학생은 바로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나더러 대학졸업 후 장래 희망을 정규직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

 

대화를 더 극적으로 그리고자 과장을 사용했다고 이야기할 사람도 있겠다.
그러나 캠퍼스와 지역교회에서 만나는 학생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 학생들의 꿈도 이러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 좋은 배우자 만나고, 좋은 직장 잡고,
좋은 교회에서 좋은 신앙생활 하는 것. 여러 가지 다른 형태의 꿈을 이야기하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결국은 그 꿈이 정규직인 것이다. 경제적 안정을 확보하는 일,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는 일
, 사회적 인정을 추구하는 일들은 따지고 보면 장래희망을 정규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의 약간 세련된
표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

 

물론 정규직이 되거나,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좋은 직장을 잡고, 좋은 교회에서 좋은 신앙생활을 하는 일이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 때문에 그것을 얻고자 하느냐, 그것을 얻고자 하는 뒤에 숨어
있는 동인
(motivation)과 세계관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잃어버릴 수 없는 꿈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헌신을 이야기할 수 없는 세대가 정말 되었다고 한다 하더라도,
과연 그럼 이제는 그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헌신을 언급하는 일 자체를 포기해야 할까? 하나님과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을 서정적, 개인적 영역에만 제한시킨 채 그 관점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만을 추구해야 할 것인가
? 절대 그럴 수 없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자 했을 때 처음 이야기했던 것
,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선포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인 하나님 나라는 우리 신앙의 핵심이 아닌가
. 그 핵심가치를 위해 지난 2000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헌신, 희생하였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가치를 붙들지 않았던가.

 

그리고 삶과 신앙의 현장에서 만나는 젊은 학생들에게서, 바로 그들의 삶 전체를 꿰뚫어 통합할 수 있는 가치에 대한 목마름을 여전히 볼 수 있지 않은가. 20세기에 만났던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삶과 인생을 던질 수 있는
그 무엇에 대한 간절함이 있지 않은가
. 하나님 나라는, 포기할 수도
타협할 수도 없는 우리 모두의 궁극적 꿈이자 희망이 아닌가
. 문제는 하나님 나라와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 헌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 하나님 나라와 같은 핵심 가치가 더는 이야기되지 않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KOSTA/USA-2008 집회에서는

 

이러한 맥락에서 KOSTA/USA-2008 집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기대해 본다
.

 

첫째, 삶을 의미 있고 아름답게 통합하여 살아갈
가치가 우리 안에 있지 않음을 깊이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 우리가 이미 가진 삶의 길에 대한 내용이 얼마나
심하게 비뚤어져 있는가 하는 내용을 보며 함께 애통해하는 일들이 있기 원한다
.

 

둘째,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삶의 길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있기를 기대한다
.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우리 안의 거짓되고 어그러진 가치관들이
상대적으로 더 초라하게 드러날 것이고 하나님 나라를 통해 제시된 궁극적 삶의 가치들을 우리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목마름이 우리 안에 생길 것이다
.

 

셋째, 하나님 나라를 통해 제시되는 삶의 길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들이 있기 원한다
. 아직 그 가치 자체를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궁극적 삶의 길을 내 것으로 새롭게 받아들이게 되고
, 이미 그 가치를 알고 있으나 삶 속에서 통합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제 삶을 지배하는 원리로서 새롭게 정리하고 결단하는 일들이 있기 원한다
. 유일한 삶의 바른길,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변화가 있기 원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하는
세대에서 유일한 삶의 바른길을 선포하고 전하는 일들에 많은 이들이 함께 헌신하기 원한다
. 세상이 그토록 목말라
보고 싶어 하는 올바른 삶의 길을 우리의 삶으로 살아내고
, 이제 우리에게 함께 부를 노래가,
함께 외칠 구호가, 함께 흔들 깃발이 있음을 선언하기를 원한다.

 

KOSTA/USA-2008 집회를 통해 큰 감동을 하고, 집회가 성황리에 마쳐지는 것은 분명히 이 집회를 준비하고 참석하는 모두가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집회를 통해 부어주실 큰 은혜에 대한 기대 이상으로
, KOSTA/USA-2008 집회 이후 하나님께서 미국
내 한인 청년 학생 디아스포라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가는지
, 그로 말미암아 바로 이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선포되고 확장될 것인지 하는 것에 대한 기대가 우리를 흥분시킨다
.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 그 길을 보게 하시고, 그 길을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허락하시며, 그 길을 살아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소서.

인터뷰 – 2008 KOSTA 주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한다

2008 KOSTA의 주제가 ‘The Way to Live: Thy Kingdom Come, 이 시대에 바른 길로 – 주의 나라 임하옵시며’로 결정되었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표현이지만, 결코 담아내지 쉽지 않은 내용인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선택한 이유와 이를 통해 2008 코스타를 통해 기대하는 바 등을 미주코스타 권오승 총무와의 인터뷰를 통해 알아보았다.

1.2008 KOSTA 주제를 간략하게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KOSTA 2008의 주제는 “이 시대를 바른 길로 ? 주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The Way To Live ? Thy Kingdom Come)” 입니다.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이야 말로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에 담고 살아가야할 궁극적 가치이자 삶의 원리가 된다는 것을 담고자 택한 주제입니다.


2.이번 주제를 선정할 수 밖에 없었던 현대의 시대상이랄까요? 코스탄을 비롯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실적 문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요즘 청년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현실 속에서 빠지기 쉬운 두가지 큰 오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세속화입니다. 신앙은 자신의 정서적인 영역에만 가두어둔채 성공과 정복의 이념으로 혹은 생존과 번영의 몸부림으로 삶의 나머지를 채우는 자세입니다. 자신의 꿈은 늘 “비전”이라는 말로 포장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는 하지만 이땅 너머의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자꾸만 세속화되는 청년들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기보다는 세상이 제공하는 편리와 안락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두번째는 이원론적 삶의 자세 입니다. 종교생활의 영역에만 하나님께서 계신 것으로 생각하고 나머지는 속된 것으로 여겨 등한시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잘못된 종교적 신념때문이 그렇게 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경우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두려워서 기독교를 정서적 도피처로 삼기도 하는 모습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 두가지가 교묘하게 결함되거나 적절하게 배합된 형태의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KOSTA에서는, 과연 이 세대의 청년들이 처한 이 문제를 어떻게 바르게 지적하고 올바른 길을 제시할 수 있을것인가 하는 고민들을 해 왔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세속화나 이원론의 문제들을 꼬집에서 비판하고 우리의 잘못된 모습들을 고쳐나가는 접근도 가능할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자각이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렇다면 “올바른 삶의 길”일까. 그것을 KOSTA에서는,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에서 그 해결점을 찾으려 해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이땅에 임했고 (already),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not yet)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이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 답게 우리가 살아 낼 수 있다면 이원론적 도피로 부터 우리를 바로 잡을 수 있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우리 안에 품고 산다면 세속화된 모습을 벗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3. 이번 주제가 예년 코스타의 주제였던 ‘Entrusted Reconciler’나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등과 어떤 연결 선상에 있는지요?


KOSTA가 시작한지 20주년이 되었던 지난 2005년, “Korean Student Diaspora”라는 주제는 KOSTA가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소 자민족중심적인(ethno-centric) 민족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우리가 우리의 한국인됨을 다시 생각해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더 넒은 영역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후 “Entrusted Reconciler”,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등의 주제는 모두 바로 그러한 Korean Student Diaspora로서의 삶의 살아내기 위한 몸부림의 차원에서 등장한 주제들이었습니다. 2008년의 주제도 역시 그러한 연장선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한글 번역이 ‘이 시대에 바른길로 – 주의 나라가 임하시오며’입니다. ‘이 시대를 바른길로’도 아니고, ‘이 시대가 바른길로’로 아닌 ‘이 시대에 바른길로’라는 어귀를 선택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이 시대에 바른길로”라고 한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른 길로 살아가야 한다는 부르심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시대를 바른 길로”, 혹은 “이 시대가 바른길로” 라고 쓴다면 그것은 ‘이 시대를 바른 길로 이끌자’ 라거나 ‘이 시대가 바른길로 살도록 섬기자’는 식의 강조가 이루어 질텐데, 우선 이 시대에 바른길로 살도록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더 근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5. 주제문을 보면, 이번 하나님 나라의 통치영역이 상당히 개인적인 부분으로 제한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코스타를 통해 기대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영역은 어느정도가 되나요?


하나님 나라는 분명 개인적인 영역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2008년 KOSTA 주제에서는, 다소 개인적인 부분에 많은 강조를 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다루고자 하는 주제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방식’에 근거한 ‘가치관의 변화’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다루기 위해 더 기초적인 면을 다져야 한다고 볼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KOSTA 2008을 통해서 선포되길 원하는 하나님 나라의 영역이 개인적인 영역에만 제한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권오승] 2006 KOSTA/USA를 기대하며

이코스타 2006년 6/7월호

시대정신이 더욱 절망적으로 되어 가는 이 때에,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편견, 편가름, 이기주의, 개인주의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지금의 시대를 살아 갈 수록 참 소망과 화해에 대한 목마름은 더욱 간절해지는데, 우리가 이러한 수렁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을 과연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셨던 일에 주목하게 된다. 스스로가 하나님께 드리는 화목제물이 되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시고, 동시에 우리 안에 있는 막힌 담들을 헐어버리신 주님의 모습에서 가슴벅찬 소망을 발견한다. (KOSTA/USA-2006 주제문에서)


작년 20주년을 맞았던 KOSTA/USA는 “Korean Student Diaspora” 라는 새로운 파라다임(paradigm)을제시한바 있다.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지난 20년동안 KOSTA/USA는 복음, 민족,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라는 세가지 핵심 가치(core value)로 미국내 한국 학생들을 섬겨왔다. 이제 새롭게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면서 하나님께서 KOSTA/USA를 통해서, 미국내의 한국 학생들을 통해서 어떠한 일들을 하기시 원하시는지 그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자 고민하며 도출해 낸, 새로운 화두였다.


2005년 KOSTA/USA에서는 시카고와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두개의 연례 수양회 (annual conference) 뿐 아니라, 코스타 집회의 조장 훈련 프로그램인 jjKOSTA, 웹진(webzine) eKOSTA 등 다양한 사역을 통해서 그 내용들을 나누고 선포하고 고민하였다. 지난 1년 동안 하나님께서 드러내어 보여주셨던 것들은 참 가슴 벅찬 것이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공부하러 와서, 학업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가 조국 교회와 사회를 섬긴다는 기존의 섬김의 凋응?뛰어넘어, 현재 미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Korean Student Diaspora 들이 조국과 미국, 선교지 혹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어느 곳이든지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내는 나그네 (sojourner)로서 살아간다는 새로운 정체성(identity)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를 통해서 우리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과 우리의 사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부르심을 향하여 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 부르심을 성취하는데 가장 큰 장애는 어떤 것일까. 어쩌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러한 질문들이 다시 던져졌고, KOSTA/USA를 섬기는 사람들은 그것이 화목케 하는 것 (reconciliation) 이라는 생각을 구체화 하게 되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았을때 우리의 모습은 결코 건강하지만은 않았다. 이기적 배타적 본성에 빠져 타민족에 대한 멸시와 배척, 이데올로기적 편가름, 관용과 사랑을 상실한채 화석화되어버린 우리의 신앙, 기득권에 안주하는 혹은 기득권만을 추구하는 성공주의등은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십자가에서 희생하시며 우리고자 했던 화목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번 KOSTA/USA-2006 집회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은혜를 부어주시길 소망한다.


첫째, 우리에게 화목의 근원이 될만한 그 어떤 것도 있지 않음을 발견하고 애통해하는 눈물이 있기를 바란다. 세상의 성공주의 배금주의적 가치관에 오염되어 있는, 철저하게 이기적이 되어버린 우리의 신앙의 천박함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 망가진 모습을 보며 함께 가슴을 치는 일들이 있기를 바란다. 이 일은, 우리의 적나라한 현재의 모습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찢으시면서까지 그리스도께서 이루고자 하셨던 화목의 모습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하는 것을 조명할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를 화복하게 하기위해 하나님께서 치루셔야 했던 값(cost)가 얼마나 큰 것이었나 하는 것, 얼마나 하나님께서는 그 화목을 이루기 간절히 원하셨던가/원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할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둘째, 우리가 화목케하는 사람(reconciler)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 전제되어야함을 실제적, 구체적으로 깨닫기 원한다. 우리안에 존재하지 않는 화목의 근거를 찾아 헤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치루신 그 위대한 사역앞에 철저히 우리 자신이 엎드려져야 할 것이다. 혹시 아직 그 화목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다 성취된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바로 그 화목의 장으로 나아올 수 있음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매년 수많은 귀한 청년-학생들을 그리스도께 이끌어오는데 하나님께서 이 집회를 사용해 오셨듯이, 금년에도 바로 그런 은혜를 부어주시길 기도한다. 단 한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수 많은 자원과 물자를 사용해서 그 사람을 위해 이 사랑의 메시지를 외칠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셋째, 우리가 화목하지 못하고 쌓아왔던 많은 벽들을 발견하기 바란다. 작게는 우리 가족, 친구등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형성된 벽들로 부터 크게는 우리가 타민족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편견과 오해, 다른 정치적 사상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정죄등에 이르기 까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 많은 벽들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길 소망한다. 특별히 디아스포라로 살고 있는 우리 유학생들과 이민청년-학생들이 특별히 가지고 있는 벽들을 발견함과 동시에, 우리를 타문화에 흩으신 하나님의 뜻이 이러한 벽들을 허물기 위함이 아닌지를 묻는 시간이 되기 원한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화목에의 사명이 하나님의 간절한 소망임을 깨닫고 그 앞에 헌신하는 일들이 있기 기도한다. 아직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나아가기로 결단하는 모임이 되기 원한다. 하나님께서 이 집회를 통해서 발견하게 하신 우리 안의 벽들을 가슴아파하며, 그것들을 허물기로 결심하는 일들이 있기 원한다. 그리고 이 화목의 메시지를 듣지 못한 전 세계의 수 많은 사람들에게 이 화목의 메시지를 전하기위한 헌신이 있기를 원한다.


우리의 준비가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으면, 이 집회에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난 21년간 신실하게 코스타를 통해서 청년-학생들을 불러모으시고 일깨워오신 하나님을 바라보자. 그리고 금년에 또다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을 깨닫고 그 앞에 순종하는 또 한번의 축복의 잔치를 기대하며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