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태]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은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해온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표현이지만, 막상 하나님 나라 대하여 설명하고자 하면 그다지 쉽지 않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마도 하나님 나라라는 짧은 표현 안에 담겨져 있는 의미가 너무 커서, 오히려 짧은 글로써 표현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역시도 같은 어려움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만, eKOSTA에서 앞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게 하나님 나라 내용 기초라고 있는 부분을 겸손한 마음으로 함께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어원과 개념

하나님 나라는 신약성경에서 100 이상 언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개념을 알지 못하고는 복음서를 이해할 없다고 이야기될 정도로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다른 유대교 문학에 하나님 나라라는 문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 예수께서 제시한 개념은 당시의 선지자나 교사들이 강조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었던 같습니다.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성경의 다른 책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문구가 비교적 적게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그들의 가르침의 중심에는 하나님 나라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 나라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는 Βασιλεία το Θεο – Basileia tou Theou 입니다. 중에서 나라에 해당하는 Basileia라는 단어는 당시 유대인에게 어떻게 이해되고 있었을까요? 많은 성경학자는 단어가 영역, 영토와 같은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통치, 왕권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데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도 비슷합니다. 바실레이아의 어원인 히브리어 단어 말쿠트 (malkuth) 구약성경에서 200 이상 등장하는데, 역시 다윗이나 솔로몬과 같은 왕과 관련하여 단어가 사용될 때에는 통치권, 왕권, 지배 등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예수의 가르침의 일차적 대상이었던 유대인은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통치권, 하나님의 왕권 등으로 이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 특히 한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죽음 이후에 가게 되는 공간으로 생각하고 있을까요? 아마 그것은 마태복음에서 하나님 나라가 하늘 나라로 완곡하게 표현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어에서 나라라는 단어가 주는 영역적 개념이 하늘이라는 공간과 결합되어서 원어와는 다른 개념이 형성된 같습니다. 하지만 마태가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선호했던 이유는 마태복음의 주된 독자층이었던 유대인이 하나님을 직접 호칭하는 것을 꺼리고 하늘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했던 데에 있습니다. 하늘 나라라는 표현으로써 마태가 하나님 나라를 의도했다는 사실은 공관복음서를 대조해 보면 쉽게 있습니다. (아래에 예를 하나 첨부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생각할 때에 공간적인 개념이 아닌 추상적인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통치 혹은 왕권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19:14 –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늘 나라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마가복음 10:14 –그러나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노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누가복음 18:16 –그러자 예수께서 아기들을 가까이에 부르시고,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 이런 사람의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그리고 긴장관계

현대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나라를 미래에 가게 공간적 개념으로 잘못 이해한다는 사실은 조금 전에 언급하였습니다. 이러한 오해가 빚어진 또다른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에 실제로 미래적인 개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적잖은 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겨자씨 비유 ( 13:31-33) 에서는 미래에 더욱 강력하게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또한 추수 관련 비유 ( 13:24-30, 36-43) 에서는 현재의 모습과 미래에 벌어질 심판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비슷하게 처녀의 비유 ( 25:1-13) 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날이 미래의 알지 못하는 시점임을 보여주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은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미래의 때를 준비하는 삶이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미래적인 개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땅에 첫번째로 오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현재적인 개념 역시 존재합니다. 예수 자신의 가르침 다수가 이러한 개념을 직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 17:20, 12:28). 또한 현재 과거 시제로 각각 표현된 보화와 진주의 비유 ( 13:44-46)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얻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잔치 비유 ( 14:15-24) 잔치로 비유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펼쳐졌음을 암시합니다. 예수께서 펼치신 기적 역시도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사탄의 통치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심을 선포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은 때로는 모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동안 많은 신학자들이 가지 중에 하나만을 인정하였습니다. Albert Schweitzer, Johannes Weiss, Rudolph Bultmann, Norman Perrin 등과 같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가 비록 매우 임박했다고는 하지만 전적으로 미래적인 관점에서 쓰여졌다고 주장하였고, 반대로 C. H. Dodd 등의 신학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 가운데에서 완전히 드러났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가지의 개념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통합될 있다는 견해를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는 ‘already, but not yet’이라는 문구로서 가지의 긴장을 표현하려는 노력이 바로 그것인데, 이러한 진영에는 Joachim Jeremias, Oscar Cullmann, H. N. Ridderbos, G. E. Ladd 등의 학자들이 있습니다. 특히 Cullmann 경우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예로 들면서, 예수의 초림을 D-Day, 재림을 V-Day 비유합니다. 예수의 초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그러했듯이 결과적으로 이미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온 사건이고, 예수의 재림은 전쟁을 비로소 결정짓는 종전 선포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하게 도래하는 사건이라고 비교적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예수의 초림이 승리 자체가 아닌 가능성 정도로 남는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고, 그러한 이유로 Ridderbos Ladd 같은 학자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의 관계가 아주 체계적으로 설명될 수는 없고 역동적으로 발견되어야 함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사이의 긴장관계는 가지를 이원론적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이 한계를 갖는다는 점에서 아직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는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지 성격을 돌아보고 관계를 묵상해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같습니다. 이유는 우리 각자가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견해가 결국은 우리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삶의 터전 가운데 임하게 하는 삶을 것인지,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면서 살아갈 것인지, 사이의 조화를 어떻게 찾아나갈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우리의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질문들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비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가지는 하나님 나라가 직접적으로 정의된 적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는 관념적이거나 논리적인 접근이 아니라, 일상의 단어와 현상을 이용하여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도 이해할 있도록 선포되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의 대부분은 비유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마태복음 전체의 ¼ 정도가 비유였고, 마태복음 안에 무려 50개가 넘는 비유가 등장한다는 사실은 그러한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의도를 따라서 비유를 이해하는 것은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과정이라고 있습니다. 실제로 비유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앞으로 쓰여질 또다른 글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합시다.

다만 가지 질문을 던진다면, 예수는 논리적인 접근이 아닌 비유를 통하여 가르치신 것일까요? 아마도  예수께서는 특정한 의도를 갖고 그렇게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복음 13:10-17 –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여쭈었다. “어찌하여, 그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다. 가진 사람은 받아서 차고 남을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한다.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백성의 마음은 무디어지고, 귀는 듣지 못하고, 눈은 감겼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그들이 다시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염려된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지금 보고 있으니 복이 있으며, 너희의 귀는 지금 듣고 있으니 복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싶어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을 듣고 싶어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 

말씀을 통하여 보면 하나님 나라는 어떠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으며, 반대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만은 공개되어 있음을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 나라의 은닉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비밀이 공개되어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다음 단락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다루어보도록 합시다.

 

하나님 나라와 공동체

예수 그의 제자들의 사역의 일차적인 대상은 유대인이었던 같습니다. 10:5-6에는 열두 제자를 파송하면서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팽배해 있던 유대인의 분파주의적 운동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차별없이 부르고 있으시다는 사실입니다. 산상수훈의 도입부를 형성하는 4:23-25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당시의 다른 운동과는 달리 지역적 차별 없이 모든 유대인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초청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사역대상이 이스라엘만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조금 성급하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에는 이방인을 향한 사역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 28:19, 8:10-12), 또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결국 예수의 가르침을 거부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대한 특권을 스스로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자기를 거부하는 유대인 대신에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을 부르시는데, 백성들은 열두 제자를 비롯한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로의 초대가 너무나 은혜임을 깨닫고, 자기의 소유 목숨을 포함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름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두 제자가 특별히 세워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열두 지파로 구성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기초가 열두 지파였듯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기초는 열두 제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 명이었던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6:18-19 –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반석 위에다가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여기서 반석은 물론 베드로를 의미하지만, 많은 성경학자들은 베드로가 했던 예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의미한다고 해석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고백은 베드로 뿐만이 아닌 다른 제자들에게도 공유되는 것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는 베드로로 대표되는 열두 제자를 기반으로 하여 자신의 교회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고,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공동체로서 사용하고자 하셨다는 결론을 내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개인적인 영역에서 적용해보려는 시도는 매우 바람직하고 필요한 과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개인적인 영역으로만 제한하는 것은 예수의 원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비슷하게 하나님 나라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영역에서 적용해보려는 시도 역시도 매우 바람직하고 필요한 과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자신이 속한 공동체 정도만으로 제한하는 역시도 예수의 원래 의도는 아니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관심은 개인 혹은 분파주의를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공동체 전체에 맞추어져 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 참고도서
양용의, <하나님 나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성서유니온선교회, 2005

[이정희, 김진태] 몇 권의 책으로 살펴 본 물질주의의 위협

이코스타 2007년 4월호

로날드 사이더의 책들 (김진태)


예레미야 35장에는 성경 전체를 통털어 딱 한번 등장하기 때문에 성경을 여러번 통독했어도 무심코 지나칠 수 있을 만한 족속인 레갑 족속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약간은 특이하게 전개되는 예레미야 35장의 이야기 가운데에서, 결론적으로 레갑 족속은 하나님의 칭찬을 듣고, 불순종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순종의 모델과 같은 존재로 세움받는다. 레갑 족속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술을 마시지 말라는 요나답의 명령을 순종한 데에 있었다. 당대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권하는 포도주를 거절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텐데도 그들은 자기 조상이었던 요나답의 명령에 신실했다. 성경 어디에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술을 마시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구절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레갑 족속이나 혹은 세례 요한과 같이 술을 평생 마시지 않으며 더 높은 기준을 세운 사람들은 성경에 종종 등장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셨다. 이것은 비단 술만으로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거룩한 기준을 세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귀하게 보시고 높이신다는 사실은 수많은 믿음의 조상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로날드 사이더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심이 많은 저자이다. 진정한 신앙은 삶의 변화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그는 야고보서의 신앙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교적 최근인 2005년에 쓰여진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Conscience)‘에서 그는 소위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과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비록 미국의 통계자료이기는 하지만, 이혼, 인종차별의 문제를 넘어서 가정폭력마저도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한국 그리스도인의 상황이 그리 나을 것 같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그는 이와 같은 현상이 교회가 복음을 전적으로 강조하지 않은 채 값싼 은혜만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생겼다고 진단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상대주의, 물질주의, 개인주의와 같은 대중문화의 흐름에 동화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교회의 회복, 보다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중심되심을 강조하는 반대중문화적인 공동체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보다 10년 정도 전에 쓰여진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 (Genuine Christianity)‘에서도 로날드 사이더의 어조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너져 있음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성경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의도가 강한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에 비해서,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는 보다 구체적인 원칙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 책에서 그는 11가지 원칙을 통해 개인, 가정, 교회, 사회 등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영역에서 어떻게 균형잡힌 신앙을 가질 수 있으며, 그 신앙이 또한 어떻게 드러나야 할지를 고민하며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달라야 함을 강조한 저자는 사실 로날드 사이더 이외에도 많이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비슷한 점을 강조한 또다른 저자들과 로날드 사이더를 다시금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사회정의를 향한 그의 관심이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에서도 드러났듯이, 그는 균형잡힌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연스럽게 사회정의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정의의 여러 가지 측면 중에서 로날드 사이더가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는 경제적인 정의, 즉 가난의 문제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1977년의 저작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에서 그는 전세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훨씬 부유한 서구사회와 그 안의 그리스도인, 가난에 대한 성경적 관점, 그리고 현대 사회에 만연한 경제적 불평등의 구조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물질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물질주의 세계관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에 오히려 더 명확히 드러나 있다.


At the same time, a new kind of materialism has taken root. Historic Christianity had been profoundly materialistic. The created world is good. God wants us to create wealth and delight in the bounty of the material world. But historic Christianity also placed firm boundaries on this materialism. Nothing, not even the whole material world, matters as much as one’s relationship with God. The Sabbath reminded people that once every seven days we should forget productive work and focus especially on worship of God. Happiness comes first of all not from material things, but from tight relationships with God and neighbor, and then thirdly from a generous sufficiency of material things. (From p. 88 of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Conscience’)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에서 로날드 사이더가 제안하고 있는 서구사회의 그리스도인의 책임 및 실천사항은 이 세계의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물질주의에 맞서기 위한 좋은 대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첫번째로 누진 십일조를 제안한다. 소득의 10%를 내는 십일조와는 달리, 소득이 많아질 수록 더욱 많은 부분을 후하게 나누자는 원리이다. 안타깝게도, 서구사회가 더 부유해진 지난 30여년동안 그리스도인이 나눈 소득의 평균은 3%에서 2.5% 정도로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인 나눔은 실천의 첫걸음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로날드 사이더는 개인적인 소위 ‘주머니의 회심’으로부터 더 나아가서, 공동체적으로도 가난한 자들을 향한 재정적 나눔과 자원봉사의 시간을 점차적으로 늘려나가는 동시에 정부 차원에서의 비슷한 프로그램을 늘려나가기 위한 청원을 할 것을 제안한다. 한 단계 더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인이 개인적인 차원과 교회공동체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이 세계를 보다 공평하게 만들 수 있는 사회적인 해결책에도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사회적인 관심의 일부는 최근에 그가 함께 편집한 ‘Toward an Evangelical Public Policy‘와 같은 책에 반영되기도 하였다.


다른 세계관에 비해서 물질주의는 한국교회를 이미 더욱 강하게 침투한 것으로 보인다. 70-80년대의 기복주의 신앙은 그 시작에 불과한 듯 하다. 현재에도 사회적/경제적으로 성공한 그리스도인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교회 안에서 더욱 주목받고 심지어 신앙의 모델로서 추켜세워지는 모습을 너무나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결과로 세상의 성공을 통해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젊은 그리스도인의 모습 역시도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성공을 추구하기 이전에 주님을 위해 거룩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젊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그만큼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로날드 사이더의 메시지는 우리 각자와 공동체에게 큰 도전을 던져준다. 당신의 삶은 비그리스도인의 삶과 비교하여 어떤 거룩한 차이점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하신 부유함을 당신은 얼마나 거룩하게 사용하고 있는가?


Jacque Ellul, “뒤틀려진 기독교, The Subversion of Christianity”, 1986 (이정희)


기독교의 왜곡은 나쁜 의도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모으고 성경에 노출시키고 기독교 종교 의식에 참여하도록 의도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이며 바람직한 것인가? 자크 엘룰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오히려 교회에 해로운 것이었다. 3세기에서부터 시작되어 현재에까지 계속되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의 왜곡은 교회 지도자들의 권력, 도덕적 우위, 혼합주의 등에 대한 유혹에 철저하지 못한 태도로 제도 교회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것은 신약 성서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며 교회에 성공을 위해 그 자신의 중심 메시지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항상 나쁜 의도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성경의 메시지의 뒤틀림은 그 자체로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변화된 복음은 기본적으로 세상 속에 우리 자신을 그대로 두는 것과 똑 같은 것이었다.


교회가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공동체로서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는데서 벗어나 원래의 복음의 메시지에 충실해야한다. 세상의 질서에 거스르는 것은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복음이 능력을 갖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조건인 것이다.


Tom Wright, “Simply Christian”, 2006 (이정희)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자유주의 진영이나 복음주의 진영를 막론하고 기독교 공동체 전체에 커져가고 있다. 한편 하나의 산업이 된 예수를 둘러싼 이야기가 그럴듯한 상품으로 미디어를 타고 진실을 호도하고 있어 신자와 비신자에게 혼란을 야기하고 있고 다른 한편 굳어져 가고 있는 현대의 교회의 갱신은 역시 교회의 기초인 역사적 예수, 나사렛 예수가 제공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복음주의권의 학문적 선봉에 서있는 Tom Wright의 신앙 입문서 Simply Christian은 저자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 성과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다른 책과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2부에서 제시되고 있는 God, Israel, Jesus and the coming of God’s kingdom 등의 주제가 역사적 사실이 최대로 복원된 상태에서 그를 둘러싼 다양한 견해들이 충돌하고 그 의미가 확인되는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역사에 계시된 하나님의 약속을 현재화하여 자신의 삶 자체로 보여주고 있다는 해석을 광범위한 증거로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나라의 기본전제는 자기 부인과 좁은 길로 감이다. 세상의 질서로서 강함과 부유함과 명예로움은 멀리해야하는 가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