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정]사랑하는 청년들에게

이코스타 2004년 1월호

매번 무엇인가를 해야할 때면 똑같이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것은 내가 과연 이런 일을 할 준비나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입니다. 하지만 늘 들려오는 대답은 너는 아직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필요하니 하거라. 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부터 나눌 내용이 필요했던 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고린도전서 3장 6 7절)


지난 여름에 졸업하기 직전까지 저는 박사과정 학생으로 있으면서 캠퍼스에서 소그룹 성경공부를 인도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소그룹 성경공부 인도자로서 그리고 유학생으로서 배운 것들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말씀 듣는 지체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를 통해 흘러가게 되므로, 하나님께 말씀을 받는 자로써 은혜를 받고 또한 그 받은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우선, 소그룹 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조금 더 알게되었습니다. 성경공부 인도자로서 가장 감사했던 경험은 성경공부 식구들이 마음을 열고 삶의 자세한 내용까지 믿고 나누어 준다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 그 일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의견을 나누며 시간을 함께 하면서, 때로는 뻔히 보이는 실수를 반복하는 식구들을 보면서 속상해하고 만류도 해보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갈 때, 나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나는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내게 요청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나를 찾으면, 언제든지 만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나라에게, 나는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 하고 말하였다( 이사야65장1절)…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며, 그들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내가 들어주겠다(24절) 표준새번역


마음속에 아픔과 고통을 가진 식구들과 대화할 때, 때로는 그 마음에 제가 들어간 것과 같은 타 들어가는 아픔과 슬픔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그 마음에 힘든 것을 없애주고 싶은 마음을 경험하면서 또한 우리의 아픔과 고통보다 더 아파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장 3 4절) 개역한글


영접하지 않는 형제/자매를 볼 때는 마음에 그리움을 또한 경험하게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영접하지 않고 있는 그들을 얼마나 그리워하시는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살게 하신 그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 (야고보서 4장 5절)


언젠가 기도하면서 같은 기도내용을 계속 반복하는 저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다음순간 하나님께서 혹시 들어주시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초조함이 그 내면에 있는 것을 발견하곤,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하는 분에게 같은 것을 부탁했다면, 그 분에게 능력이 있고 그 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면 나의 소망을 들어 주실까? 대답은 들어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통하여서 깨달은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완전한 신뢰가 부족하다는 것이었고 그 날 이후에는 감히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우리의 고통을 아시며, 우리를 그리워하십니다. 말씀을 전하시며 귀한 영혼을 품고 기도하시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피부로 느끼실 수 있습니다.


둘째로, 맡겨주신 학업이나 일을 하면서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가라 시면 가고, 서라 시면 서서 잠잠히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 가라 하실 때 부족함을 핑계로 주저하거나 고민하지 말고 하나님께 그 결과를 맡기고 벼랑끝으로 몸을 던지십시오. 그러면 그 벼랑끝에서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품을 경험하실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주저하거나 고민하는 시간이 너무 많아 감당할 수 있는 일들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서라 하실 때, 마음이 아무리 급해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때(카이로스)를 기다리십시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시편 37장 5절 7) 개역한글


부지런히 움직이는 자동차 바퀴가 멀리 가거나 아니면 땅을 깊이 파는 것과 마찬가지로, 때로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하셔서 우리 삶의 영역을 넓히시기를 원하지만, 때로는 잠잠히 기다리라고 명하셔서 우리 삶의 깊이를 더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두가 우리의 순종을 필요로 하며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사무엘상 15장 22절) 개역한글


그러면 가라 하시는 것과 서라 하시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이 생깁니다.


너무나 명백하게도 우선 말씀을 매일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언젠가 들었던 만나에 관한 말씀 중에,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루 먹을 분량의 만나 만을 허락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한 은혜도 하루분량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은혜를 받으시기 위해서 매일 말씀을 읽으십시오 라는 말씀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더불어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날 주신 말씀을 묵상함으로 마음에 새기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암송하십시오. 그래서 그 말씀이 필요할 때, 떠오를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기도를 통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할 수 있도록 깨어있으셔야 합니다. 당연하게도 말씀묵상과 기도의 과정은 완성이라는 것이 없어서 늘 계속되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는 우리가 세상의 framework과 하나님 나라의 framework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우리가 시험을 시험으로 이해하고 극복해나가는 데에도 근본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런 모든 상황에서 더욱더 감사한 것은 우리가 살면서 어쩌다 순종에 실패하고 시험에 걸려 넘어질 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우리의 삶의 목표를 고정한다면,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승리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힘들고 슬픔과 고난이 찾아왔어도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 은혜로, 이 모든 고난이 곧 사라질 것입니다. 고난의 때에는 가까이에서 동행해주시는 하나님을 느끼므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고난이 없을 때에는 그 것을 또한 감사하고 기뻐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세상 속에서 복의 근원이 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5:15)



[김보경]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이코스타 2003년 11월호

첫 학기



처음 미국에 유학 와서 짧은 여름방학동안 랭귀지 코스를 듣고 토플을 본뒤 가을학기에 파트타임으로 대학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첫 학기 첫 수업…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영어를 많이 안써도 되는 물리와 수학을 신청했는데 물리 첫 수업을 듣고 나오면서 근심에 쌓였습니다. 교수의 강의가 거의 안 들렸기 때문입니다.  더운 여름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어렵게 대학에 들어왔는데 첫 수업을 받고 나오면서 드는 생각이 “F 받게 생겼군… 첫 학기부터 쫒겨날 것 같은데… 만약 내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다면 정말 그건 하나님이 내게 기적을 베푸신 때문일거야” 였습니다.



그 때 저보다 유학 2년 먼저 온 선배와 우연히 같은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저 선배는 2년 먼저 왔으니까 수업이 잘 들렸겠지… 저 선배랑 그룹스터디라도 해야지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선배에게 찾아가 학생회관에서 만나 함께 공부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저녁에 학생회관에 온 선배는 책가방을 열더니 교과서가 아닌 성경책을 꺼냈습니다. 그 때까지 성경은 교회에서만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저에겐 책가방에서 나오는 성경책이 참 생소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늘 교회에서 예배가 있었나보지?’ 라고 생각하면서 “왠 성경책이에요?” 라고 묻는 제게 선배는 “같이 보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라면서 갈라디아서 2장을 폈습니다. 18절 부터 20절까지 한 절씩 돌아가면서 읽자고 하는 선배의 말에 어색해 하면서 한절 한절 읽어 내려갔습니다. 



마지막 구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를 읽고 나서 선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지난 2년 동안 유학생활을 해보니까 참 힘들고 특히 주위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이 사는 사람들은 많이 방탕한 길로 빠지더라. 너는 이제 처음 유학생활을 시작하고 아직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 말씀처럼 믿음 안에서 유학생활 잘 시작하라고 이 말씀을 주고 싶었어”



산 앞에서



그렇게 시작한 저의 유학생활은 선배의 말처럼 한 학기도 맘 편히 시작한 적이 없던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매 학기 시작할 때마다 시편 121편을 떠올리며 “산처럼 느껴지는 이번 학기지만 또 그 산을 향해 눈을 듭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라고 금식기도로 시작했던 기억이 납니다.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갈까’ 라는 생각도 많이 했었습니다.



공부의 어려움도 그랬지만 한창 청년의 때에 한국 사람이 별로 없는 곳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느끼는 외로움도 컸던 것 같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고등학교 동창들이 ‘미팅했다, 엠티갔다, 축제 기간이었다, 동아리 활동이 재밌다, 남자친구 생겼다, 남자친구 군대갔다, 남자친구랑 헤어졌다’ 는 평범한 한국 대학생의 삶을 전해올 때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곤 했습니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은 말 그대로 벽처럼 느껴졌습니다. 한국에선 하고 싶은 말 다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살았는데 언어의 벽 앞에 처절히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느낀 적도 많았습니다. 김치 냄새가 나니까 주 중에는 김치 먹으면 안된다는 것도 처음엔 “왜 남의 나라 음식을 가지고 뭐라고 그러지” 라며 기분이 나빴지만 어느 날 부턴인가 수업을 받으러 갈 때 향수를 뿌리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왜 내가 이 곳 남의 나라까지 와서 공부해야 하는가… 왜 단지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이렇게 주눅들어야 하는가.” 어쩌다 제가 이 곳에서 이방인이라는 것이 피부로 느껴질 때면 수없이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입니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스스로에게 물어도 답이 안나오면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귀에 들리게 음성으로 말씀해 주시면 좋은데 아무리 때를 쓰고 졸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성경공부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성경을 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는 습관도 제대로 안되어 있어서 막상 말씀을 보고 싶어도 어디를 봐야할 지 몰라 대강 중간을 폈습니다. 그러면 늘 이사야나 시편이 나왔습니다. 처음엔 한 두 절 읽다가 전혀 이해가 되지 않고 하나님이 나에게 뭐라고 하시는지 느껴지지 않아 그냥 덮었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제게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말씀인데도 그 말씀을 또 보고 싶고, 더 알고 싶은 갈급함을 주셨습니다. 얼마 후에는 아무렇게나 편 말씀이 별 감동이 없으면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나올 때까지 계속 읽게 되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42:5>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이사야 12:2>



그렇게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생길 때 마다 손으로 직접 적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영어단어를 외우는데 쓰려고 구입했던 3×5 인덱스 카드에 한절 한절 적어나갔습니다.  처음엔 한 두장 되던 것이 시간이 갈 수록 고무줄로 묶어야 할 정도로 많이 쌓여갔습니다. 말씀이 조금씩 달게 느껴졌고 나중엔 성경을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절 또는 한 장씩만 보던 말씀이 성경 한권 한권 보게 되고 나중엔 성경 전체를 읽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보며 제가 왜 이 곳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며 공부를 해야 하는 지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원했던 “목소리”가 아니라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말씀들을 통해, 예수님이 문둥병자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시는 말씀들을 통해, 바울이 교회들에게 쓴 편지들을 통해, 그리고 요한이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을 쓴 것을 통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 것처럼, 그래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었던 것처럼 저도 본토 친척 아비의 집, 너무나 익숙하고 편해서 하나님 없이 살아도 별 불편을 모르던 곳을 떠나 이 먼 미국까지 와서야 이 세상은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 사람들 속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다 문득 문득 느끼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저는 나그네요, 이방인이었습니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 앞에서 느낀 것처럼 제가 할 줄 알고 익숙하다고 여기던 것들이 모두 아무것도 아니었고 저는 아무에게 아무 것도 내놓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발견한 저의 정체성은 은혜 없이는 못사는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연약한 자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지명하여 부르시고 “너는 내 것이라” 인치신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였습니다.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였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지 않으면 끊임없이 나를 짓누르는 외로움과 열등감과 무기력함을 다른 것으로 채우기 위해 공허만이 가득한 세상의 것을 향해 허덕이며 달려갈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자였습니다.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시간이 흘러 하나님의 은혜로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고 이제는 제가 선배가 되었습니다. 이제 막 유학생활을 시작한 교회 후배가 어느 날 전화를 했습니다. 평소에 별로 말이 없던 후배가 전화해서 얼마 전에 있었던 청년회 월례회에 못가서 죄송하다고 합니다. ‘내가 그렇게 무섭게 보였나?’ 싶어서 “뭐가 죄송하다는 거야? 괜찮아, 사정이 있으면 못 올 수도 있지” 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의외로 부드럽게 받아줘서 마음이 놓였는지 “언니, 고마워요” 라면서 조금 마음을 열고 고민을 얘기합니다.



“언니, 저는 사실요, 빨리 마치고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그래서 이번학기에 19학점 듣거든요. 3년 만에 마칠려고요. 저는 여기가 너무 싫어요. 교회봉사는 해도 청년회 활동 같은 것 하기 싫고요. 시간 낭비 같아서요.”



솔직하게 말을 해주니 고마웠지만 한편으론 안타까웠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기회를 그저 통과해야 할 관문, 필요악으로 여기는 것이… 빨리 해치우려는 그 3년이라는 시간은 한 사람의 영혼의 변화되고 훈련 받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랬기 때문에…



후배에게 참 안타까운 마음으로 유학생활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또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복된 시간인지 얘기했습니다.



마치 첫 학기에 어떻게 하면 성적을 잘 받을까 생각하며 그룹스터디를 제안한 제게 성경책을 들고 나타나 “그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유학생활을 하라고 했던 그 선배의 그런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 통화 이후 제 말 때문이 아니라 그 후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후배가 조금씩 마음을 열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감사했었습니다.



복 있는 자



복 있는 사람, 성경에서 말하는 복된 자는 출세가도를 달리는 자도 아니요, 외모가 출중한 자도 아니요, 재주가 뛰어난 자도 아니요, 머리가 좋은 자도 아니요, 부유한 자도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송이 꿀보다 말씀이 더 달다고 고백할 수 있는 자,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며 혼자서는 세상을 살 수 없다고 부르짖는 자,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라 나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있다고 나그네의 삶을 고백하는 자,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라”며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아는 자였습니다.



그러기에 유학생활은 내 삶의 성공을 위해, 남들도 다하니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치뤄야 할 관문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가 복되고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영어가 안 되서 열등감에 쌓인다 해도, 견딜 수 없는 외로움으로 눈물이 난다 해도, 보이지 않는 미래로 인해 불안에 휩싸여 있다 해도, 물 위에 기름처럼 겉도는 이방인의 삶이 서럽게 느껴진다 해도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1-39). 우리는 그 분의 것이기 때문에…



조금 무시당하고, 아파하고, 좌절하고, 실패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나는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위해 또 왜 살아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면 내가 처한 고난의 자리는 사실 놀라운 복이 넘치는 감사의 자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학생활은 복된 것이고 힘들게 유학생활을 하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나는 복된 자입니다.



젊음을 주께 바치라



힘들고 지치는 유학생활



언어도 생활방식도 다른 낯선 환경 속에 적응하는 것만도 벅찬데 학업이라는 무거운 짐과 외로움과 고독이라는 큰 벽이 우리 앞에서 우리를 짓누르며 힘들게 합니다



때로는 너무 힘들고 지쳐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고, 삶의 목적조차 불투명해져 방향을 잃고 헤메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힘겨워 하며 아파할 때 우리 마음 한 켠에서 애타게 우릴 부르시는 분이 계십니다.



당신과 저를 사랑한다고 애타게 외치시는 예수님



이제 귀를 열어 그 분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이제 눈을 들어 그 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분과의 만남을 통해 당신의 삶의 목적과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 재 확인해 보십시오.



당신을 이 분과의 만남에 초대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대학 3학년 때 섬기는 교회에서 유학생을 위한 집회 “젊음을 주께 바치라”를 준비할 때 쓴 초대의 글입니다.)



[이일형]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까?

캠퍼스 사역 Q&A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까?


신명기8:3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을 낮추시고 굶주리게 한 후 만나를 먹게 하신 이유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가르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고 기록합니다.


우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보기 위해서 중요한 필요 조건인 것 같습니다. 낮아지고 굶주릴 때 자신의 생존을 위한 기본조건이 결여되기 때문에 그때 비로소 전혀 의식하지 못하던 이 세상의 본질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당연시 여기던 일들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세상이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창조되었음을 알게(믿게) 됩니다.


먼저 생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명은 피조물에게 있어서는 창조의 틀(framework) 안에서만이 설명될 수 있는 개념 입니다. 우리가 현존하고 있는 창조의 틀 안에서 원래 창조될 때 define된 기능을 발휘할 때 “생명이 있다” 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은 원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원인/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바로 그 원인이 하나님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1:30; 2:7).


모든 생명체는 미리 규정된 범위 안에서 활동을 합니다. 사자는 하늘을 날수 없고 참새는 얼룩말을 잡아 먹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바로 하나님께서 식물과 동물들을 각각 그 종류대로 창조(define) 하셨다고 설명하심으로 각각 창조 안에서의 주어진 활동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창1장).


생명이 창조의 틀 안에서 설명될 수 있듯이 생명의 유지도 창조의 틀에 의존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창조 안에서 음식을 섭취하고 신진대사를 함으로 생명을 유지합니다. 창조의 틀에서부터 자신에게 필요한 물질을 섭취하며 생존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창조과정을 설명하면서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의 질서를 만드시고, 기본 틀을 잡으시고 (이사야48:13) 마지막으로 그 틀 안에서 생명체들을 만드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1장). 이는 생명체가 창조 안에서만 존재하는 피조물의 제한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욥 38장).


창조의 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생각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또 같은 말씀이 모든 생명체의 생명을 공급하는 근원입니다 (요1:3-4). 그러므로 창조의 틀은 바로 하나님의 생각의 표현이자 곧 말씀의 작품입니다. 창조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즉 의지의 표현으로 지금도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1:3). 그러므로 모든 생명체는 바로 하나님의 뜻의 계속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호흡하고 의식이 있다는 자체로 생명이 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사람의 창조의 틀에서의 그 창조의 목적에 합당한 역할을 이행할 때 비로소 그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세계 안에서 단순하게 호흡하고 의식이 있어도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에 생명이 의미하는 것은 원래의 생명의 뜻이 아니라 육신의 세계 안에서 국한된 생명의 개념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육신의 세계 안에서 만의 생활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세계는 창조의 틀의 subset 입니다. 그러므로 원래 창조의 틀에 맞게 규정된 인간이 subset에 국한되어 생활할 경우 창조의 틀의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육신의 세계 안에 국한된 의식이 창조의 틀 안으로 팽창하고 그 창조의 틀에 의해 규정된 생활을 하게될 경우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 창조의 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히11:1).


창조의 틀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고 있을 때 참 생명이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세계는 잠시 있다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육신의 세계에 육신이 제한을 받고 살고 있지만 참 생명을 얻은 사람은 육신의 세계가 없어질 때 같이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우리의 뜻이 하나님께 전달되는 것입니다. 서로의 교통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이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까지 전달되는 것입니다.


참 생명은 말씀을 통하여 유지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을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을 거절했음으로 육신의 세계에 국한되어 버린 인간의 의식수준에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이 세상에 없어지고 사단이 제시해 주는 세상의 형상이 인간의 의식을 점령해 버렸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이 되셔서 인간의 육신의 세계 안에 표현되셨습니다 (요1:14). 그리고 자신이 바로 하나님께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 이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길을 가르쳐 주는 분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진리”, 즉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붙어 있는 사람들은 말씀을 공급받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 안에서 자신을 다시 찾게 되는 것입니다 (빌3:9). 즉 육신의 세계 안에서 자신의 identity를 이해하고 있다가 그리스도 안에서는 창조의 틀 안에서 자신의 참된 identity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육신의 세계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육신의 음식을 계속 섭취함으로 우리의 육신을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제 원래의 창조의 틀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whole being이 음식을 섭취해야 합니다. 바로 창조의 틀의 음식은 창조의 틀을 유지하는 근원이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한 번 진리를 받아들임으로 창조의 틀에서의 생활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의 놀라운 보화를 질그릇에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후4:7).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함으로 매일 나아가야 합니다 (히4:16).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의식 안에 들어와 우리의 삶의 영역이 눈에 보이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틀에 의하여 지배될 때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까지도 온전히 지배하여 온전하게 표현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생명이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