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종] ‘테러리즘’ 다시 보기

김연종 교수의 문화 탐구


‘테러리즘’ 다시 보기

오늘 텔레비전 뉴스는 뉴욕 세계무역센터(WTC) 빌딩 붕괴 현장에서 열린 ‘9.11 테러’희생자 추도식을 보여 주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슬픔을 가누지 못했고 그 장면을 보는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제는 빌딩 피폭시 현장에 출동했던 911 소방대원의 생전의 모습들이 하나씩 소개되고 있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 그것도 예고 없이 죽는다는 것은 가족은 물론 그를 알았던 주위 사람들을 참으로 황망하게 한다. 911 테러로 죽은 사람들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슴 아픈 사연을 가졌을까 생각하면 다시금 가슴이 아려온다. 그런데 오늘 텔레비전을 보다가 나는 아프가니스탄의 파괴 현장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가슴 아픈 사연들이 있겠다 싶어졌다. 그러다가 미국 사람의 슬픔은 크고 애절한 반면, 사막의 한가운데서 먼지더미에 파묻혀 버린 가난한 사람들의 슬픔에는 무감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내게 미국인은 나와 같은 사람 같고 그래서 그들의 슬픔은 쉽게 동감이 되면서도, 왜 아프간이나 아랍 사람들의 슬픔은 가슴에 와 닿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가 세상을 미국의 눈으로 보고 미국의 입장에서 보아 온 것은 자그마치 50여 년에 이른다. 그 동안 미국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혈맹이어서 그들의 이야기는 어떤 의심조차 없이 당연히 받아들여 온 것 같다. 더구나 세계인의 눈과 귀가 되는 언론의 대부분을 미국인이 차지하고 있어 미국의 눈과 입이 우리의 눈과 귀가 되어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911 사태만 하더라도 우리는 미국의 CNN을 통해 테러의 잔인함에 분노하고 슬퍼했으며 아랍인에 대한 맹목적 적개심을 키워왔던 것 같다. 왜 테러가 일어났는지, 아랍인들은 왜 그토록 미국에 분노하는지를 냉철하게 따져볼 겨를도 없이 그저 흥분만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우리는 다른 세계, 다른 시각을 만날 수 있다. 주지하듯 테러리즘은 폭탄을 지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무모한 살상행위 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이즘’, 즉 ‘주의’이다. 가령 우리가 맑시즘이나, 휴머니즘, 시오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테러리즘은 양심이나 신념에 기초하여 나름 대로의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무슬림들이 선택한 삶과 저항의 방식인 것이다.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테러리즘은 이슬람이란 종교와 자기 희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정신은 오히려 성결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왜 아랍인들은 테러리즘을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되었을까. 그것은 서구 세계에 의한 오랜 식민의 경험과 최근 한 세기 동안의 미국에 대한 적대감의 누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아랍계 내부의 경제적 빈곤과 좌절도 커다란 몫을 했다. 유럽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는 이슬람인을 동물 취급하며 적대적으로 대했으며 미국은 자신의 이익 때문에 아랍을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여기지만 이슬람 종교와 문화, 사람은 존중하지 않았다. 미국은 자유와 인권을 내걸었지만 중동의 부패한 독재 정권을 지지하고 민중을 외면했으며,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부패한 정권을 지지하고 군대까지 보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에서 미국은 항상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의 편을 들었으며 아랍의 이익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미국이 테러리즘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이다. 미국은 자꾸만 테러리즘을 문화적 충돌이나 종교적 전쟁이 아니라 빈 라덴 등 극소수 테러 조직의 무력 행위로 축소시키려 하지만 실제 전쟁은 이슬람과의 전쟁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그것은 테러리즘의 근본을 애써 주목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성전(지하드)을 준비하고 전사를 모으는 일에는 수 백 수 천의 젊은이들이 줄을 선다고 한다. 어제는 1만 여 명의 파키스탄 의용군이 소총과 흉기를 들고 아프간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형제 자매가 죽어가는데 우리가 몰라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테러리즘의 실체가 있다.

신앙과 민족과 적개심에 뿌리를 둔 테러리즘을 군사적 보복 공격으로 근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빈 라덴이 사라진다 해도 그와 같은 극단주의자들이 끝도 없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이 행사하고 있는 또 다른 폭력은 테러를 더욱 부추길 뿐이다. 테러리즘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배양한 문제 상황을 어떻게든지 개선해야 한다. 911 사태는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를 통해 미국에 보낸 경고의 메시지이다. 거대한 제국, 미국이 제3세계 민족들의 권리와 생명을 함부로 유린해온 폭력과 억압의 체제를 청산하라는 것이다. 911 사태를 통해서도 그 메시지가 아직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테러가 계속될지 모른다. 테러리즘은 단순히 누구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테러 행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테러리즘의 배후에는 이슬람 민중의 절박한 생존 현실이 놓여 있는 것이다. 자살 테러를 재미 삼아 하는 사람은 결코 없다. 하긴 누가 전쟁을 원하며 죽음를 바라겠는가. 살고 싶은 욕망, 가족과 평화롭게 지내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근본 의식이 아닌가.

지금 세계는 전쟁 중이지만 우리조차 전쟁을 바라 보거나 즐기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 나의 일이 아니라고,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고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텔레비전을 보고 있지는 않는지. 파괴의 현장에서 불안에 떨고 굶주리며 스러져 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가 귀한 생명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기독교인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아랍인을 적대시하고 미국을 편들고 이스라엘을 지지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진정한 사랑은 어떤 종교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를 받아 들이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미국과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바로 이러한 ‘공존’의 방법이다. 전쟁이 신념을 포기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김연종] 공주와 왕자

김연종 교수의 문화 탐구


공주와 왕자

요즘 젊은이들의 이미지는 당당하고 자신있고 개성있다는 것이다. 과거 세대와 달리 주눅들지 않고 제 할말하고 산다고 한다. 하긴 TV에 나오는 여자아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이쁘다’는 것을 부끄러움없이 말한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마음껏 속내를 비추이는 그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문화가 참 많이 바뀌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하지만 요즘 이토록 당당한 ‘공주’와 ‘왕자’가 많은 이유는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기 때문이라는 비판에 이르면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소위 가상청중(imaginary audience)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과대망상적 착각 징후군’은 자신이 마치 무대 위의 배우나 공주가 되는 것 같이 살지만 실제는 오히려 타인중심으로 사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당당한 왕자와 공주는 별로 없고 오히려 자신의 존재 가치조차 확신이 없는 허약한 세대가 바로 젊은이들이라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실체일까.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약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학생들은 별다른 망설임 없이 대답들을 내어놓았다. 게으르다, 끈기가 부족하다, 낯가림이 심한 편이다, 유머감각이 부족하다… 등등. 다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이나 약점에 대해서 상당히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또 다른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럼 자신의 장점, 아니 내가 생각하는 나의 좋은 점은 무엇인가?” 흥미롭게도 이번엔 대다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스스로의 장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여태껏 한번도 자신의 장점에 대해서는 깊이있게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우리도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장점은 무엇인지? 아니면, 좀더 단순하게 “나는 나를 좋아하는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이 질문에 자신있게 “물론”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자신에 대한 존중감 (self-esteem)이 상당히 높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존중감이 높은 사람은 대부분 건강한 자아상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의 장점보다는 약점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만족스러운 측면보다는 고쳐야 할 측면에 대해 더 민감한 편이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이러한 태도가 겸손이라고 명명되기도 하지만 실상은 자신에 대한 낮은 자존감의 표현인 경우가 많다 (미국사회에서의 침묵은 결코 겸손이 아님을 독자들은 알고있으리라). 겸손에 가리워진 낮은 자존감, 이것은 심하면 “나는 내가 싫다”라는 극단적인 감정의 간접표현일 수도 있다.

파멜라 버틀러 (Pamela Butler)라는 심리학자는 사람들이 낮은 자존감을 갖는 것은 일반적으로 ‘자기파괴적 믿음 (self-destructive beliefs)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자기파괴적 믿음은 우리의 생각 속에 만연해있는 몇 가지 강박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 강박관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완벽하고자하는 강박’이다. 일이든, 학업이든, 신앙이든, 운동이든, 외모든 사람들은 가능하면 완벽을 추구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능력 이상의 수준을 기대하게 되고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늘 닥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각종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성공한 사람들, 최고 수준의 사람들이 자신의 기대치가 되고 당연히 나는 늘 불완전한 인간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엄격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란 말처럼 난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만족치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두 번째는 ‘빨리 이루고자 하는 강박’이다. 주어진 시간보다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이루려는 욕심은 느리게만 보이는 나 자신을 게으르다고 타박하게 되고 더욱 초조함에 빠져들게 만든다. 이러한 강박은 때로 정해진 시간의 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두려움이 되어 자신을 책망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 4년, 석사 2년, 박사 3년 등으로 시간표를 정하고 이를 맞추지 못하면 무능하거나 큰일이 날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그러나 시간은 빠르다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알맞은 때가 중요한 법이다.

세 번째로 ‘강하고자 하는 강박’을 들 수 있다. 약한 것은 부끄러움이고 강한 것은 아름답다는 잘못된 신념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스스로 학대하게 했는지. 난 남자이기 때문에 강해야 한다고 배웠고 그러한 강박에 때로 과장된 행동은 물론 가식된 행위를 해야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넷째는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한 경향이 있다. 그대의 기쁨을 위해 나의 기쁨을 희생한다는 것이다. 부모님은 물론 특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경우 주님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때로 자신을 옭아매는 덫이 되는 경우를 보게된다. 하지만 이것이 곧 나의 존재의 가치나 의미, 리듬을 파괴하는데 까지 이르게 되면 그건 이미 정도를 지나쳐 위험한 지경이 된다.

다섯째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이다. 단 한번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최선을 만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잘못된 결과를 얻게되었을 때, 내가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자책한다. 가령 밤을 새운다고 하고 한두 시간을 자게될 때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 등이다. 결코 잠을 자지 않았어야 했고 나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극단의 기대로 자신을 채찍질하다 보면 나의 발걸음은 언제나 느리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모든 이의 소원이 최선을 다해보고 싶다는 것일까.

자기존재가치에 대한 잘못된 신념들은 우리가 넘어야 할 벽이다. 실수없이, 빨리, 최선을 다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용서도하고 여유도 부리고 한순간 한순간을 감사하며 즐기면서 살 필요가 있는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의외로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나란 사람은 타인에 비해 모자란 것도 많고 부족한 것도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때문에 늘 피곤하고 자기 외에 주변의 사람들조차 숨막히게 하는 경우가 많음을 보게된다. 자기 존재에 대해 만족이 없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못하게되는 것은 물론 주변의 사람들조차 사랑할 수 없다. 자기 자신에게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 존재에 대한 만족이 없을 때 사람들은 자신을 학대하거나 다른 것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 한다.

하지만 나의 존재가치는 이미 지불한 예수님의 몸값을 말하고, 나의 존재의미는 나의 기쁨이 곧 그분의 기쁨이라는 사실에 있다. 다시 말해 예수님 만큼 나의 존재가 가치있다는 것이고 내 삶에 대한 내 스스로의 만족이 그분의 기쁨이라는 것이다. 자기 존재에 대한 불만족을 넘어 부정에 이르는 많은 젊은이를 보면서 그리고 이를 부추기는 수많은 문화상품들을 보면서 이 사회에 사랑이 있을까 자문하게 된다.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적 사고가 없는 사람에게서 남을 사랑하고 사회를 밝히 비추는 일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긍정적 자아상을 갖는 일은 한 사람의 삶을 바꾸는 일일 뿐 아니라 그의 이웃을 바꾸고 이 사회를 바꾸는 근간이 되는 일임을 다시금 새겨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