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미운오리새끼 신드롬에 걸린 그리스도인

이코스타 2002년 1월호

미운 오리새끼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백조인 자신의 정체성(identity)를 알지 못한채, 자신의 외모에 대해 낙망하다가 언젠가 백조가 된다는 동화이다. 어릴적, 이 동화를 읽으며 미운 오리새끼가 스스로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했던 기억들이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수년간 예수님을 부인하다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을 가끔 본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 경험하는 주위의 ‘선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눈에 천사와 같이 보이기 십상이다. 도무지 옛 부대에 담을 수 없는 끓어오르는 거룩에의 열망을 가졌으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거룩한 것인지 잘 모르는 탓에 좌충우돌 주변의 선배 그리스도인들을 따라하면서 ‘크리스천 문화’와 ‘교회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져 간다.


그러다가 언젠가, 주변의 ‘선배’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성품과 삶의 기준들이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삶의 기준이나 성품의 기준과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이들은 깊은 혼란에 빠진다. 그럴 때 보통 이들이 듣게 되는 ‘충고’는 ‘사람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시험받지 말라’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진정으로 사람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시험을 받는 것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충고가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에 대한 기준을 낮추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경우 각종 수뢰, 비리 사건이 터질 때 마다 연루된 것으로 나오는 집사, 장로들. 자신 부부의 포르노 테이프를 판매하다가 적발된 목사 부부. 자신의 아들에게 담임 목사직을 승계하는 제왕적 ‘당회장’들. 미국에서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목사들의 성적 부정 문제.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인임을 밝히면서도 전혀 비복음적인 대내외 정책을 펴는 미국의 정치인들.


지나치게 먼 곳(?)에서 예를 들어 피부와 와 닿질 않는가?


그렇다면 이런 것들은 어떤가.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면서도 포르노 사이트를 기웃거리는 어느 성경공부 조장, 매일 아침 QT를 하면서도 직장, 승진, 성공 등 개인의 이익(interest)이 걸린 일이라면 복음과 무관하게 눈을 반짝이며 달려드는 어느 집사님, 매일 아침 ‘주여, 주여’ 하면서 새벽기도를 하지만 자신 자녀의 음악대학 입학을 위해서는 입시 담당관 교수에서 돈 봉투를 내미는 한 권사님, 자기 자녀의 결혼 상대로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재정적 안정성을 복음적 가치보다 우선에 두며 심지어는 택일을 위해 점집에 찾아가는 장로님.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저 ‘사람의 연약함’에만 탓을 할 것인가. “남들도 다 그러는데” “성경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선 어쩔수 없지” “우리교회 장로님들도 그러는데” 라며 초신자들에게 한수 가르칠 것인가.


분명 성경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예(example)라면 충분히 그들의 삶을 완전히 뒤집을 합당한 근거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으로 삶의 기준을 삼는 사람들을 찾기가 의외로(!) 그리스도인 가운데에서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와 같이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로서 우리와 같은 복음을 믿었던 사람들의 예를 찾아보자.


박해가 아주 심했던 것으로 알려진 로마시대. ‘고문을 당하며 죽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주라 고백하며, 부서져 너덜거리는 육체가 영과 분리되려 하는 때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 것 보다 더 영광스럽고 축복받는 일이 어디 있으랴!’ 라며 당당하게 순교하였던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복음을 믿는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었다.
명문 휘튼대학을 졸업한 후 젊은 나이에 에쿠아도르의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이 지킬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긴 짐 엘리옷도 우리와 같은 성경을 읽었던 사람이었다.
잠깐의 타협으로 신앙의 양심을 조금만 양보하면 될 것을 꿋꿋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은 우리와 같이 한국말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을 죽인 사람들 양아들로 삼은 ‘새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랑을 보여주신 손양원 목사님도 우리와 똑같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사람들이었다.


이제, 우리 주변에서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들을 편만하게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부정을 저지르는 직장의 사업 방침에 반대하다가 왕따를 당한 회사원, 자신의 연구업적을 부풀리지 않고 정직하게 이야기했다가 교수 임용에 탈락한 포스트 닥(post-doc), 미국 최고의 학교에서 입학허가(admission)을 받고도 비자 서류를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작성했다가 비자를 거부당해 유학을 포기한 학생 등등…


언제까지 우리들은 하늘의 별들과 같은 믿음의 선조들을, 그저 하늘을 나는 멋진 백조를 바라보는 미운 오리 새끼가 되어 바라보아야만 할 것인가. 언제까지 우리가 끊을 수 있는 죄의 고리들을 ‘인간의 연약함’이라는 핑계 뒤에 감추어두고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라고 하신 명백한 명령을 언제까지 ‘아직은 부족합니다’는 거짓된 겸손으로 가려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