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1, 2004 | 삶과 신앙/이시훈의 살며 생각하며
이코스타 2004년 5월호
바이올린 경연대회를 하루 앞둔 딸아이가 열심히 연습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기특한 마음에 음료수를 들고 방에 들어가니 딸아이는 찬송가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딸아이가 고등부 찬양팀에 가입한 이후로 우리 집에는 늘 그 애가 연주하는 찬양이 흐르고 있어서 무척 감사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피아노나 바이올린 선율에 노래를 따라 부르다 보면 긴장했거나 예민했던 신경이 부드러워지고 마음이 따듯해지는 경험을 자주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날은 바로 대회 전날이라서 저는 어느 부모나 그렇듯이 잔소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회 출전곡을 더 열심히 연습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지적을 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딸아이는 주일날 연주할 찬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저는 그날 딸아이와 모처럼 긴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우리가 흔히 범하는 오류와 편협한 사고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상을 수여하는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말할 때 많은 크리스쳔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표현을 합니다. 자신이 이룩한 성과라고 자만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에 대한 감사로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자랑스러운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좋은 것, 귀한 것을 구했을 때, 남들 보다 앞서게 되었을 때 그 모든 소중함과 기쁨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귀한 의미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가끔 저는 선뜻 동감할 수 없는,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한 느낌에 빠지곤 합니다. 과연 우리가 빛나는 자리에서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불쑥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재능도 없고 그다지 뛰어난 점도 없어서 남의 주목을 받기는커녕 어느 자리에서나, 있는지 없는지 구별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 모든 것이 평균적인 기준에 못 미쳐서 열등감을 느끼거나 소외 당하는 사람들, 병들거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 가난과 무지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일이 없는 것일까요? 세상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어둠의 존재들인 걸까요? 하나님의 전존재가 영광 그 자체임이 확실하다면, 아름답고 뛰어난 존재만이 그 영광의 한 부분을 반사하고 있는 걸까요?
주변의 모든 부모님들이나 제 자신을 살펴보면,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받아 오거나 무언가 재능을 발휘해서 상을 받거나 남들에게 칭찬 받을 때 기쁨과 보람을 느낍니다. 자랑스러움과 기대감으로 벅차기도 하지요. 그러나 제 경우 가장 행복하고 오래가는 기쁨은 아이들의 사랑을 확신하고 교감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비록 아이가 조금 부족할지라도, 말썽을 부릴지라도, 남들에게 칭찬 받지 못할지라도 자식을 미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아프거나 장애가 있어서 생활을 힘들게 할지라도 다만 같은 공기를 마시며 함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감사하고 그 존재가 귀한 것이 모든 부모의 사랑일 것입니다. 자식 앞에서 모든 부모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는 강함과 한없이 양보하고 용서하는 약함을 동시에 보여 줍니다. 그 모든 힘은 ‘나의 피와 살을 나눈 나의 존재의 일부!’에 대한 끝없는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할 때,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할 때 더욱 깊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하나 자랑할 것도 칭찬받을 것도 없는 존재이지만, 그 얼굴을 바라볼 때 내게 반사되는 빛이야말로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있는 이대로의 모습, 내 삶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의 오묘함과 살아가는 일들의 질서와 모든 관계와 모든 느낌들의 총체적인 주권이 내게도 있다는 것, 하나님의 형상과 속성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느낄 때, 어느 한 순간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찬양은 하나님의 공평하신 사랑에 대한 감사와 살아있음에 대한 기쁨, 그 영광을 나누는 감격의 표현인 것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주어진 상황과 시간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값진 선물이기에 어느 한 순간도 헛되이 보내려하지 않고, 매 순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주어진 순간을 진심으로 즐기고 충만하려는 것이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있음의 모든 행위와 느낌들이 우리의 찬양이고, 모든 순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딸아이와 이야기하면서 찬송가를 연주하는 것 만이 찬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곡을 연주하던, 그 연주 실력의 깊이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연주는 모두 찬양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크고 아름다운 나무에 활짝 핀 꽃들 만이 아니라 발에 밟히는 잡초들도 바람이 불면 소리를 내며 자기 몫의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길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기뻐하시지만 그 성과의 크고 작음을 견주어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 무조건의 사랑을 주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는 목소리에 영광의 빛을 비추어 주시는 공평하심과 자비하심을 찬양합니다.
Apr 1, 2004 | 삶과 신앙/이시훈의 살며 생각하며
이코스타 2004년 4월호
06년 6월 6일 밤에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났다. 전 세계는 핵폭탄에 의해 가루가 되었고 핵미사일이 태양의 중심을 타격했다. 지구는 완전한 어둠과 추위 속에 빠져버렸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은 까미유가 잠든 사이에 일어났다. 그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세상은 암흑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이제 그가 어둠 속을 헤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오직 그의 손에 있는 검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상한 소리를 내거나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괴물들이 지구를 점령했기 때문에 까미유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검을 내리치며 거리를 다닐 수밖에 없다. 자신을 공격하려는 괴물들을 먼저 공격하는 법을 익혀가면서 그는 자신을 지켜갔다. 어느 날 아침 몇 명의 강도들이 그를 공격해서 난투를 벌였지만, 결국 그는 납치당하여 낯선 곳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곳에서 에테르 냄새를 풍기는 한 사람이 그에게 말한다.
삼차 대전은 일어나지 않았고 태양도 지지 않았으며 다만 까미유가 시력을 잃었을 뿐임을.
그가 싸웠던 괴물들은 그가 차에 치거나 건물에 부딪치지 않도록 도우려는 손길들이었으며
그의 검은 양로원에서 준 지팡이였음을 설명해준다.
위의 내용은 프랑스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암흑’이라는 짧은 소설을 요약한 것입니다. 짧은 내용 속에 함축된 의미에 동감을 하게 됩니다. 주인공 까미유는 아마도 늘 핵전쟁에 대해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늘 그의 생각을 차지하고 있어서 언젠가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헛된 믿음을 갖게 했고, 그가 시력을 잃은 밤, 꿈속에서 전쟁을 경험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환상을 실제로 일어난 일로 믿은 그에게 세상은 암흑이 되어 버렸습니다. 살아가는 일에 대해 늘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걱정, 근심을 쉬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그에게서 보입니다. 때로 그 걱정, 근심은 구체적이지도 않고 어떤 확실한 근거도 없이 우리를 덮치고 스스로 만든 그물 속에 갇히게 만듭니다.
자신의 내면의 빛을 지워버린 것을 세상에 빛이 사라졌다고 공포에 떠는 모습.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만나는 괴물의 실체는 자신이 만들어 낸 공포와 죄의 형상일 것입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내면의 등불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지, 오해와 편견 때문에 사랑의 손길을 뿌리치며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봅니다. 세상의 어둠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 그가 휘두르는 검은 자신을 지키기 보다는 상처 입히는 도구가 되어버리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더 강한 검을 구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명예의 검, 권력의 검, 물질의 검을 구하여 휘두를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빛은 점점 더 흐려져만 가고, 어느 날 갑자기 그 빛이 완전히 소멸되어 버려 우리는 빛의 존재 자체를 망각하곤 합니다. 내 안에 환한 불이 켜 있을 때 세상의 모든 것을 분명하게 바라 볼 수 있습니다. 불의와 정의로움, 선함과 그릇됨, 진실과 미혹의 분별도, 아름다움을 구하는 식견도 눈과 마음이 밝고 맑을 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따스하고 밝은 불빛은 다른 사람들과 한 사회에 영향력을 미칩니다. 근심보다는 희망을, 불안보다는 평강을, 다툼보다는 이해와 화해를, 인내와 온유의 밝은 빛이 넓게 퍼져나가 다른 이들의 가슴에도 환한 등불 하나를 켜주는 시대를 꿈꾸어 봅니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정결하지 못한 모든 것들이 밝은 햇살 앞에 그대로 드러나듯이, 우리 안의 부정한 것들도 빛의 씻김을 받으면 더욱 아름다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자신이 투명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듯이, 자신의 안에 빛을 가진 자는 타인의 내부에서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처음 지음 받은 모습의 본질에 더욱 가까이 갈수록, 우리를 지으신 분의 성품을 알아갈 수록 그 빛은 선명하고 강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빛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 그 길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고난의 훈련의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어둠에 익숙한 눈이 처음 빛을 바라볼 때 느끼는 통증과 혼란의 과정을 통해서 눈은 서서히 빛에 더 친숙함을 느끼게 되며, 이제는 감출 수 없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단단히 자신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손에 물리적인 힘을 발휘하는 검이 아니라, 어둠을 물리치는 말씀의 검을 주셨습니다. 나와 세상의 어둠을, 불의함을, 거짓됨을 잘라내는 검을 꼭 잡고 이 거칠고 오염된 세상을 걸을 때, 우리에게 더 이상 적은 없고 오직 사랑해야 할 이웃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서로 내민 손길이 서로에게 등불이 되고 지팡이가 되어주는 세상에서 빛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Mar 1, 2004 | 삶과 신앙/이시훈의 살며 생각하며
이코스타 2004년 3월호
연극에서 배우가 자신이 맡은 인물에 대해서 분석하고 연구하는 일은 대부분 상상력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사람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어떤 감정을 가졌을까, 그가 성장한 배경, 현재의 환경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심지어 그 인물의 외모, 성격, 가족, 친구 관계, 신앙, 특이한 버릇… 모든 것을 세밀하게 생각하고 그 연극에서 요구되는 인물과 가장 적합한 한 인물의 인격을 창조해내는 것이 배우의 몫입니다.
현실에서 연극의 한 부분을 이용하다 보면 실제적인 도움을 얻을 때가 많습니다. 연극을 통해서 인간관계로 인한 갈등을 해결하거나 경미한 정신, 심리 질환에도 치료효과가 상당히 있는 것을 봅니다. 연극 속의 인물에게 감정 이입을 하고 자신과 동일화하려고 노력하듯이, 일상 속에서도 타인에 대해 내가 그의 역할이 되어보는 것은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지름길이 될 것 같습니다. 내가 바로 그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 타인을 이해하는데 가장 적합한 방법이기 때문이지요.
그룹 성경 공부를 할 때 저는 가끔 연극적인 방법을 이용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건을 극화해서 각 사람에게 역을 맡기거나, 대화하는 장면을 대사 읽듯이 감정을 살려 읽어보라고 권하곤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아무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시키는데, 가장 솔직하고 미화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설명이나 간증, 지식적인 주석 보다 가끔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보고 참 감사를 드리게 될 때가 있습니다.
얼마전 청소년들과 이성간의 교제와 결혼에 대한 공부를 하다가 창세기를 읽게 된 경험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2장18-25절까지를 즉흥적으로 연기해보라고 했을 때 학생들은 아무 어려움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풍족한 자연을 즐기는 아담이 종일 아름다운 벌판을 거닐며 시간을 보낸다. 아담이 지나치는 곳마다 새로운 식물과 동물을 만난다.
아담 : 내가 너를 장미라고 부르겠다. 너는 장미가 되어 향기와 예쁜 꽃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라. 내가 너를 사슴이라 부르겠다. 너를 호랑이라 부르겠다. …..
이것을 말하고 난 학생은 자신감에 넘쳤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말 커다란 권위를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종일 먹고 즐기고 다니던 아담이 어두워지자 주변을 둘러본다)
아담 : 하나님, 다 좋은데요, 무지 심심하거든요. 누가 같이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혼자 많은 일들을 하려니 힘들어요. 생각도 잘 안 떠올라서 누가 도와 주었으면 좋겠어요.
(아담이 잠든 사이에 하나님의 그의 갈비뼈를 가지고 이브를 만드시고, 아침에 일어난 아담은 아름다운 이브를 발견한다)
아담 : 앗 ! 당신은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요 !
내게 와주어서 너무나 고맙소 (몹시 기쁘고 감격하여 펄쩍 뛰면서 춤을 춘다)
이브 : 나는 당신을 돕고 함께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우리는 두 몸이지만 하나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번성하라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아담 : 우리는 한 몸이기 때문에 숨기는 것이 없어야하고 서로 부끄러운 일이 없어야 해요.
그 날의 공부는 스스로 깨닫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서로의 존재를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기쁘고 감사한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과, 서로 돕고 의지하는 관계를 맺고 서로 존중해야한다는 것을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한 가정에서 가장의 권위, 세상을 향한 우리의 사명, 남녀의 역할에 대해 어렴풋이 정리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학습과 토론을 통해 분명한 가치관을 정립하기까지 확실한 기초 작업을 한 셈이지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짧은 삶도 어쩌면 하나님이 기획하신 커다란 연극 무대에서 한 배역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결코 우연함이 없는 완벽한 대본과 연출에 따라 자신이 맡은 인물을 최선을 다해서 표현하는 것 말입니다. 언제 등장해서 무대 어느 쪽에 서야하고 언제 퇴장해야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연출가의 몫일 뿐입니다. 무대 위에서 주인공이 되어 각광을 받거나 조연이나 단역을 맡거나, 영웅이 되거나 악당이 되거나 상관없이 그 연극이 완성되고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필요하지 않은 역은 없습니다. 아름다운 인물도 추한 인물도, 완벽한 성품과 지혜를 가진 인물도 어리석은 인물도, 부자도 걸인도 우리의 커다란 드라마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만 합니다. 훌륭한 배우는 더 근사하고 멋진 역할을 하게 해달라고 청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들! 이 기피하는 역할을 완벽하게 표현한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주셨건 하나님의 무대에 초대받았다는 것이 가장 감사한 일이 아닐까요?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신을 통해서 연출가의 의도와 목표가 잘 표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배우야말로 트로피를 손에 쥐고 웃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겠지요. 연출가의 마음과 배우의 마음이 일치할 때의 기쁨은 서로가 늘 가까이 있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눌 때, 가능한 것 같습니다. 어떤 역을 맡았는가 보다는 얼마나 아름답고 진지하게 나의 역을 감당했는지를 연출가는 눈여겨보실 것입니다.
Feb 1, 2004 | 삶과 신앙/이시훈의 살며 생각하며
이코스타 2004년 2월호
해마다 새해가 되면 지난 일들을 돌아보며 한 해의 소망이나 계획을 나름대로 열심히 세우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리라 다짐을 하곤 합니다. 해마다 비슷한 결심을 하였건만 얼마나 성실히 계획을 실천했는지 반성하는 일도 언제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작년 이맘때쯤 가족들, 친구들과 서로의 계획을 나누었던 일들을 기억하면서 마음 아픈 일 한 가지가 떠오릅니다. 제게 엄격한 스승이면서 따뜻한 친구로서의 역할을 함께 해주시던 선생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시인으로서는 대 선배이시고, 신앙적으로는 멘토의 역을 기꺼이 감당해 주시던 그 선생님으로부터 작년 설날에 긴 편지를 받았었습니다. 여러 가지 개인적인 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과 후배에게 거는 기대와 지침, 한국 문학에 대한 본인의 소명, 개인의 비전과 세계관등… 그동안 늘 나누었던 가치관을 느낄 수 있는 참으로 가치 있는 글이었고 선생님의 자상한 인품을 느낄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저는 그 긴 글 속에서 제가 지킬 수 있는 몇 가지를 흔쾌히 약속하였습니다! 성실한 습작생활과 독서 생활, 신앙의 훈련 글을 쓰는 자세와 소명 등… 선생님도 여러 가지 약속을 제게 하셨습니다. 가령 맛있고 멋진 식당을 발견했으니 귀국하면 점심이라도 나누자는 등의 사소하고 재미있는 약속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그런 글을 보내신 이후 두어 달 만에 선생님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평소에 워낙 건강하시던 분이라 본인이나 주변 누구도 병이 그리 깊은 줄 모르고 지냈던 것이었지요. 한동안 저는 우울하고 믿어지지 않는 마음에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지냈습니다. 다음에 귀국하면 다시 뵙고 인사를 나눌 것도 같고 편지를 드리면 답장을 주실 것도 같은 착각을 아직도 하곤 합니다. 그리고 다시 새해를 맞아 여러 분들께 카드를 보내면서 선생님께도 카드를 써보았습니다. 그렇게 다양하고 확신에 차있던 모든 계획들과 소망과 약속들을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지나간 한 해에 대해서, 부치지도 못하는 긴 편지를 써 보았습니다.
지난 늦여름 어떤 자매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말기 암으로 투병 중이던 그녀의 모습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습니다. 항암 치료로 이미 머리칼을 다 잃었고 창백한 피부는 심한 부종으로 혈관이 다 비칠 정도로 얇아져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성실하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온 그녀이기에 그 모습은 더욱 안쓰럽게 보였습니다. 앉아있기도 힘든 상태에 있던 그녀가 힘겨운 식사를 마치고 나서 산책을 하고 싶다고 여러 번 부탁을 하였기에 무리가 되는 줄 알면서도 부축을 하여 집을 나섰습니다. 산책이라고 해야 기껏 집 주변을 간신히 서성거리는 정도였지만 그 짧은 시간이 무척이나 긴 여행길처럼 느껴졌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온 힘을 실어야하는 힘든 상태에서도 그녀의 얼굴에 번져나가던 미소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집 앞의 뜰을 처음 바라보는 것처럼 경이에 가득 차 오르던 눈빛과 탄성도…
옆 집 뜰에 핀 봉숭아꽃을 보다가 내년 봄 자신의 뜰에도 심고 싶다며 씨를 받던 손길과 자두 만한 배 열매를 바라보며 과연 저 배를 먹을 수 있을까하고 묻던 일들이 영상처럼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다음 여름에 봉숭아 꽃 물을 제 손톱에 들여 주겠다는 약속과 다음 주에 만나면 조금 더 멀리 산책을 나가보자는 약속조차 우리는 지키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 주변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며, 사진을 찍듯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바라보던 눈길과 아직 다하지 못한 일들,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말하던 떨리던 목소리가 뚜렷하게 기억나는데도 그 사소한 약속을 지킬 만큼의 시간은 허락되지 못했습니다.
몇 해전 강도를 만나 짧은 순간 동안에 죽음과 삶의 경계를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예고도 없이 우연한 길에서 우연하게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것, 단 몇 초안에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는 경험은 제게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게 하였습니다. 제가 세운 인생의 계획이나 목표라는 것이 물위에 쓴 글자나 바람에 세운 집처럼 허망한 것임을 느꼈을 때 무척 참담하고 외로웠습니다. 그 이후 저는 항상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순간은 단 한번뿐이라는 것, 바람에 실려온 꽃향기처럼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순간을 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영원’이라는 것은 시간의 구속과 한계를 벗어난,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개념이며 연! 속되는 순간, 연속되는 현재가 영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순간을 살고 있기에 영원을 살수 있다는 역설적인 생각으로 범위를 넓혀도 봅니다.
게으름이나 고의적으로 지키지 못한 약속만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지킬 수 없었던 약속들을 기억하면 사람의 신념이나 맹세는 그다지 믿을만한 것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한번의 오류도 없이 신실하게 지켜지는 약속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긴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구원의 약속은 어제도 오늘 이 순간에 지켜지고 있고, 내일에도 영원토록 지켜질 가장 확실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무슨 일들을 해야 할 지 생각하다가 그만 하루를 보내버릴 것 같습니다. 아직 갚지 못한 청구서와 누군가에게 진 빚을 기억하려 할 것이고,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여러 곳을 찾으며 정다운 얼굴들을 한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애쓰겠지요. 지난 일기들을 정리하며 용서해야 할 일들과 용서 받아야할 일들을 떠올리고 이 세상에 용서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이라는 상상은 마음을 한없이 초조하게 만들기도 하고 한없이 너그럽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아직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모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족과 이웃들을 향해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값지고 향기로운 말들이 넘쳐나는지, 지켜야할 귀한 것들과 무한한 축복을 마음껏 누리고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아직도 무거운 삶의 짐들을 벗어버리고 가볍고 자유롭게 한 순간 순간을 호흡하고 싶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확실하게 지켜질 약속을 기다리며 생의 슬픔을 지우고 싶습니다.
오늘을 마지막처럼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보다 가치 있고 진지한 의미를 갖게 되고, 신실하고 사랑이 넘치는 인격을 갖게 되며 진정한 소망의 빛을 기다리게 될 것 같습니다.
Jan 1, 2004 | 삶과 신앙/이시훈의 살며 생각하며
이코스타 2004년 1월호
도자기 하나를 굽기까지 여러 과정이 필요합니다. 먼저 흙을 부드럽게 만들기도 하고 안에 기포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손으로 주무르고 두드리며 다져 줍니다. 그리고 모양을 내기에 적당한 수분을 더해주며 물레를 돌리며 형태를 잡아갑니다. 이 때 너무 건조한 흙은 단단해서 기포를 없애기가 힘들고 너무 습한 흙은 모양이 잘 변형되기 때문에 적당함을 유지하면서 작업하는 요령을 터득해야합니다. 물레를 돌리기 전에 어떤 그릇을 빚을 것인가 계획을 가지고 시작할 때도 있지만 무작정 시작하고서 마음가는 데로 손 가는 데로 만들기도 합니다. 마치 즉흥연주를 하듯이 그 때의 기분이나 흙의 기초 작업이 되가는 정도에 따라 계획 없이 만드는 과정은 미지의 완성품을 기대하게 하는 즐거움을 줍니다 .
어떤 때는 머릿속에 완성된 그릇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스케치까지 해놓고 시작하지만 중간에 실수를 하기도 하고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서 중간에 전혀 다른 모양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릇을 빚는 과정 외에도 건조, 다듬기, 문양 넣기, 초벌구이, 유약 채색, 재벌구이의 여러 과정과 긴 시간을 걸쳐서 비로소 하나의 완성된 도자기가 탄생됩니다. 이중 어느 과정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결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굽는 과정에서 균열이 일어나기도 하고 유약이 골고루 입혀지지 않거나 예상과 다른 색을 나타내기도 하고… 한 과정 과정마다 최선을 다하고 신중하지 않으면 결과는 너무나 정직하게 드러나 버립니다 .
모든 과정이 다 그렇게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하고 어려운 것은 물레를 돌릴 때 흙의 중심을 잡는 일입니다. 빠른 속도의 전기 물레를 돌리다 보면 조금만 중심이 기울어져 있어도 흙이 밀려 나가기도 하고, 억지로 계속 만든다 해도 그릇의 균형이 맞지 않게 되어 버립니다. 간신히 마무리지어 놓아도 그릇의 두께가 고르지 않게 어느 한쪽 면이 두껍거나 입구가 너무 넓어지게 되어 흉한 모양이 되거나, 바닥이 기울어지는 불안정한 그릇이 되어버립니다. 수분의 정도는 조절할 수도 있고 물레의 속도나 건조 정도도 조절이 가능한 것이며 채색이 맘에 안 들면 다시 칠을 할 기회도 있습니다만, 중심이 잘못 잡힌 그릇은 나중에 어떤 노력과 재주를 부려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높이가 좀 있는 그릇을 만들려면 더욱 중심의 정확성이 요구됩니다. 높고 커다란 그릇을 아름답게 균형 잡히게 만드는 가장 필요조건은 정확한 중심점을 찾는 것입니다.
중심만 확실하게 잡히면 그 이후의 과정, 즉 모양을 내는 과정은 그야말로 일사천리가 됩니다. 그런데 도자기를 만들 때마다 가장 힘들고 좀처럼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중심 잡는 일입니다. 경험이 있으신 분은 아마 빙그레 웃으시며 동감하실 것입니다. 이 문제는 살아가는 모든 과정에도 역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너무 건조하지 않게, 너무 습하지 않게 적당하게 부드러운 흙을 만지듯이, 마음의 상태도 너무 강퍅하지 않게, 너무 감상적이지 않게 온화하고 적응력 있는 상태로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모든 판단에 있어서도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함을 지키는 일이나, 요즘 같이 기존의 윤리나 도덕개념이 파괴되는 시대에 가치관을 정립하는 일은 스스로 늘 혼란을 일으킬 정도로 어렵고 민감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럴싸한 이론으로 위장한 거짓 진리가 만연하고, 인간보다는 물질이 가치를 더 부여받는 이 혼란한 시대, 빠르게 변하는 각종 이론의 충돌과 지나친 인본주의의 주장으로 모든 것이 무가치하거나 모든 것이 수용되는 극단적 모순이 공존하는 이 시대에 현기증을 느끼곤 합니다. 어디에 내 삶의 중심을 세울 것인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는 중심을 잡고 다양한 삶의 현장에 적응할 것인가, 바로 그것이 해결의 열쇠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살면서 실패도 하고 뜻하지 않은 곤경을 겪으며 계획과 꿈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될지라도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라는 중심점이 확실하다면 좌절과 포기 없는 성실한 삶을 살게 되겠지요. 자전거를 탈 때 중심을 지키기 위해 부지런히 페달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듯이 말입니다.
중심을 잡는 일이 어느 순간 예리한 직감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와 경험을 통해서 서서히 중심점에 다가가는 것일 것입니다. 감정의 통제에서 번번이 실패하고 어떤 판단 앞에서 망설이고 이리 저리 휩쓸릴 때마다 제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어떤 철학이나 이념도 확실한 중심을 잡아주지 못하고 공허한 사념의 고민을 갖게 하곤 했습니다. 물론 그러한 고민은 지적인, 정신적인 성숙을 하게 해주는 가르침을 주었기에 귀한 것이지만, 실제적인 삶의 지혜나 영적인 깨달음이나 성숙한 자아를 갖게 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말씀에 조금씩 다가가고 매일의 큐티를 통해서 말씀을 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면서 어디에서 중심점을 찾아야 할 지 조금이나마 깨달아 가는 것 같습니다. 새해에는 그 중심에 조금 더 가까이 가기를, 매일 매일의 삶이 확실한 중심에서 빚어지는 아름다운 그릇으로 변해 가는 모두의 모습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