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은] 톰 라이트 – 1

서평 Part 1
<그리스도인의 미덕 > 톰 라이트 
<After You Believe: Why Christian Character Matters>  N. T. Wright

서평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부끄러운 사실을 자백해야 겠다. 우선,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배경지식으로서 톰 라이트의 신학사상에 대하여 무척 무지한 상황에서,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고민과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질문과의 우연한 일치에 힘입어 이 책을 만나고 읽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톰 라이트의 심중을 깊이있게 이해하고 있는 독자라면 나의 책읽기가 그가 제시하는 큰 그림의 핵심을 용케 비껴가고 나의 개인적인 관심사에 근거하여 편식하고 있음에 불편해할 수도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내 수준에서 쉽게, 바로 적용가능한 단답형으로 찾아내는데 몰입되어있는 것은 순전히 나의 미성숙의 소치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집중력이 없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르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이처럼, 쓸 자격이 없는 자가 용감하게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냉면 요리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맛난 냉면 한 그릇의 행복을 나눌 수있지 않을까라는 소박한 마음에서임을 양해해 주시기를.
  

문제 제기 – James의 고민 
James는 20대의 청년이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갔고, ‘요한복음3장16절’의 역사가 그에게 일어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 그리스도의 놀라운 십자가 희생과 사랑, 그리고 천국에서의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의 약속에 대해서 배웠다. 기도와 예배의 생활을 하며 성경을 읽는다. 이전의 나쁜 습관을 버리고, 잘 하지는 못하고 어색하기 그지 없지만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한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이 그를 괴롭혔다. 
What am I here for now? What happens after I believe?
이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답변 – 즉  전임목회자, 선교사, 교사나 의사와 같이 특정한 Christian service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 은 그에게 만족스러운 해답이 되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James는 computer science의 박사과정을 마무리하는 중이고 앞으로의 진로 또한 전도유망하지만, 위에 나열된 career는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도대체, after we believe 와 before we finally die and go to heaven사이의 시간동안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그저 시간을 보내며 “죽어서 천국에 가는 날”을 기다릴 뿐인가? 컴퓨터 공학자로서 James의 지식과 삶의 기회들은 이러한 “영적인” 문제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인가? 도대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What being a Christian is all about?)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고 저자는 1장에서 밝히고 있다.
James의 질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있는가라는 질문으로 rephrase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겪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후자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우리는 어떻게 알 수있는가?  
 
Christian Character, the Transformation
Faith와 final salvation사이의 bridge, 그리스도인됨(being a Christian)의 의미를 규명해줄 이 bridge를 저자는 character라고 제시한다. Christian character를 핵심개념으로 붙잡고 character란 무엇이며, 어떻게 character가 형성되는가에 대한 논의를 Aristotle의 접근법과 비교대조하면서 저자는 논증을 진행해나간다.  Aristotle이 인간의 character의 이상, 목표와 구현에 대해서 무엇을 설파했는지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이 틀을 이해하는데에 약간의 노동이 필요했고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마저 불가능하다. 그러나, Aristotle의 철학에 대한 내용을 건너뛰어도 저자의 메시지를 파악하는데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So, let’s continue.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어떻게 do와 don’t를 분별할 수있는지에 대한 기준으로 우리는 통상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하나는 도덕률(rules)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spontaneous self-discovery)이다. 전자는 말 그대로  일련의 규칙들을 지키는 것이고, 후자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 마음을 만족케 하는 것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규칙들은 우리가 속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회가 부여하는 규칙들에 각자의 신앙과 가정배경, 개인의 양심에 따라 더하거나 감해지는 과정을 통해 구성된다. 하지만, 이 규칙들은 많은 부분 context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시공간과 개인의 uniqueness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후자의 ‘True to yourself’식의 접근법이 우리 시대에 매우 호소력있게 다가오는 것 같다. 자기 마음에 원하고 좋으면 그것이 옳은 것이 되는 이 자기 중심적 사고는, 사회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잠식되고 객체화되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개인의 선택과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는 자못 바람직한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로 인해 삶의  guidelines이 없이 제 멋대로 사는 방종마저 허용되는 문화와 체계를 형성하는게 기여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도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지 않았는데 자신에게 부여된 마음에 내키지 않는 어떤 rules를 지키도록 권면을 받는 일에 불편해한다. 구약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내쳐두고, 예수님의 새 계명을 붙잡고 간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 새 계명에 따라 산다는 것이 율법을 지켜서 의를 이루어가는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이며, 어떻게 이 새 계명을 지키면서 살 수있는지를 잘 모르는 무지함 가운데 있는 것이 솔직한 진단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위의 두 가지 접근법의 한계를 뛰어넘으면서 동시에 통합 완성하는 새로운 차원의 길을 제시해주는데, 그것이 바로 Christian virtues(그리스도인의 미덕)를 습득함을 통한 the transformation of character(인격의 변화)인 것이다. 
 
저자는 “믿은 이후after you believe” 그리스도인의 최종목표는,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의 인격(character)에 회복reflect하고 worship과 mission을 감당하는 authentic/genuine한 인간이 되는 것이며, 이 과정의 핵심은 the transformation of character라고 말한다. 죄로 물든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으로 새롭게 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인의 미덕이 의식적이고 반복적인 선택과 연습/훈련practice을 통해서 우리의 second nature로 자리잡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골프선수에게는 골프근육이 발달하고, violinist는 악기연주를 위한 최적의 체형을 갖추게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Christian virtues가 편안하게 자신 안에서 발현되도록 지속적인 옳은 선택의 훈련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용서하고 사랑하고 인내하는 일이 무척 ‘부자연’스럽고 ‘나답지’않게 느껴지지만, 이러한 연습이 반복되다보면 이러한 미덕이 ‘나의 일부처럼 편안하게’ 자리잡게 될 것이다. 이동원 목사님께서 쓰신,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이라는 책 제목이 떠오른다. 철야기도와 오랜 고민과 이를 악무는 결단이 없이도 새 계명에 합한 선택과 행동을 하고, 겸손과 온유, 평강과 희락, 자비과 긍휼, 오래 참음과 절제, 충성이 죄된 품성을 밀어내고 대신 나의 character가  되는 일, 그것이 being a Christian의 의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감의 의미인 것이다. 
 
Anticipating the Kingdom of God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Christian character를 develop한다는 것은, 이미 임했고 곧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기대anticipate”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language와 그 백성으로서의 삶의 방식을 미리 배우고 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anticipate”이란,  일어날 일에 대하여 단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해서 지금 무언가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외야수가 공이 어디로 날아올 지를 “예상”하고 공이 떨어질 장소에 “미리 가있는 것”처럼 말이다. 외야수의 예상은 틀릴 수 있다. 공이 다른 곳에 떨어질 수도 있고 본인이 잡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anticipate”하는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임하고 반드시 우리에게 임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고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 백성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한 분명한 증거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은 “천국이 가까왔다”로 시작하여 “나를 따르라”로 귀결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바로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자들이 서 있어야 할 자리인 것이다. (chapter 2)
 
A Royal Priesthood, rulers and priests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 우리가 서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우리가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저자의 관점, 즉 already but not yet의 개념으로 조명해볼 때 단순히 개인적인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차원을 뛰어넘는 역사적이고 공동체적인 소명을 내포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receiver에 그치지 않고 agent로 부르심을 받았다. 저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방식을 창조세계와의 관계가운데서 “a royal priesthood”로 정의한다. 하나님 나라된 백성의 vocation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영광과 통치를 모든 창조세계에 exercise/reflect하고(“rulers”),  온 창조세계의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priests”) 것이다. 저자는 worship과 stewardship을,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의 소명으로 요약한 뒤,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이 소명의 현재적인 구현은 거룩holiness과 기도prayer라고 제시한다. (chapter 3)
 
Jesus’s Call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현재적 삶을 풀어내어도, 여전히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의 질문이 남는다. 저자는 일관되게 그 답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강조하고 있다. How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follow me였으며, 그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을 이해하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있는가에 대한 시작이요 완성이면서 또한 확증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율법대신 다른 어떤 계명을 우리에게 얹어주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과 완전한 인간 존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moral example이 되신다고 하면, 통상적으로 이해하듯 타이거 우즈의 스윙 비디오를 보고 초보자도 그렇게 따라할 수있다는 의미이기 보다는, 새로운 morality를 제시해주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fullness of human life는 그 전까지의 율법과 도덕의 세계에서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새로운 경지였다. 결국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new creation을 개시하심으로써 인간이 본래의 창조의 모습, 즉 완전하고 충만한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창조세계 가운데 royal priesthood로서의 인간이 어떤 것인지를 그의 존재와 삶과 사역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다. 즉, 우리가 Christian virtue를 practice함을 통해서 우리의 second nature로 만들어나갈 때 우리가 궁극적으로 다다르게 될 지향점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chapter 4).  
 
저자는 바울의 서신서들을 통찰하면서 이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moral effort를 필요로 하는 일임을 강조해준다. 즉, 옷장에서 적절한 옷을 골라서 입는 일이 mind를 통한 “through thinking”에 의한 것인 것처럼 (옷이 저절로 옷장에서 튀어나와 내 몸에 입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sinful character를 벗고(put off), Christian character를 입는(put on)하는 것은 생각없이 충동적으로 혹은 자동반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변화를 받음”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것인 반면, 구원 이후의 삶, 예수 그리스도같은 완전한 존재로 지어져가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책임이요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현재화하는 소명적 여정인 것이다. (chapter 5)
 
소결
완성될 그리고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격을 오늘 연습하고 나의 second nature로 빚어가는 moral effort가,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님께서 그의 사심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져오신 새 창조 새 언약, 새 생명의 증거sign라는 관점은, 은혜로 얻은 구원 이후 그리스도인의 미덕이, “reward나 payment”를 받으려고 우리가 해야 할 일 즉 “rules of conduct”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줌으로,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겪는 혼란, 결국 예수님의 새 계명은 또다른 율법이 아닌가라는 부담,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거룩함사이의 도덕적 긴장을 해소해주었다.  
이제, 보다 실제적인 연관 질문들을 고민할 차례다. 이와 같이 Christian virtue를 생각함에 있어서 ‘성령의 열매’ 혹은 ‘gifts of Spirit’의 자리는 무엇일까? 또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연습/획득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는 context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일까? 바울은 왜 수많은 미덕중에서 ‘믿음, 소망, 사랑’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저자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미덕이 나의 인격이 될 수있는가라는 점에 있어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러한 존재라는 점과, 성령님의 역할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6장부터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서평 Part 2에 계속) 

[신자은] 회심

<회심>  짐 월리스, IVP

<The Call to Conversion: Why Faith is Always Personal But Never Private> Jim Wallis

 
이 책은 IVP에서 2008년에 한국어로 번역 출간했고, 영문판은 2005년에 출간되었지만, 원래는 1981년에 쓰여진 책이다. 1981년이면 필자가 초등학교 1학년일 때이니, 30년의 세월을 견뎌낸 ‘고전’의 재발견이다.   

이 책이 한 세대 전에 쓰여졌음을 감안할 때, 현 시대의 세상과 교회를 조명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제자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최초의 부르심”으로 이끌어내는데 이보다 더 명료하고 시의적절할 수는 없다는 점은 경이롭기만 하다. 동시에, 이미 한 세대 전에 제시되었고 예견되었던 도전과 경고에 대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무심하였고 무지하셨고 또 무방비상태로 지난 30년을 지나왔고, 그래서 이 책의 엄중한 지적앞에서 변명할 여지가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서있는가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기에, 좋은 책을 만난 기쁨이 철저한 고통으로 다가오는 독서였다.

이 책의 영문 원제목은 저자가 ‘그리스도인의 회심(conversion)’에 대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매우 분명하게 담아낸다. 즉, 그리스도인의 회심은 ‘개인적personal이고 인격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한 개인에게 일어났을 때 필연적으로  ‘사적인private’ 영역을 넘어서는 역사적인 현실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회심의 본질을 저자는 ‘역사 속의 회심 conversion-in-history’라고 명명한다. 저자는 ‘공적인 생활과 개인적 신앙’간의 유리 혹은 이원화의 결과, ‘신앙이 역사로부터 갈라져 나옴’으로 인해 오늘날의 교회가 어려움에 처해있다고 진단한다.

회심은, ‘어디인가로부터 돌아서는 회개’에서 ‘어디인가를 향해 나아가는 신앙’으로 나아간다. ‘어디인가로부터’의 영적 특징은 죄이며, ‘어디로’의 본질은 구원이며 하나님 나라이다. 회심이 하나님없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것이라면, 회심을 통해 ‘그리스도인’,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identity를 부여받은 사람은, 그가 속한 역사의 현실을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질서에 따라 새롭게 정의하고 그 질서에 따라 살게 된다. 결국, ‘회심’은 존재의 새로와짐과 삶의 새로와짐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기에, 반드시 역사적인 현상으로서 관찰되지 않을 수 없다. 한 사람이 죄와 우상과 자기 중심성이라는 구조에서 ‘회심하여’ 구원과 하나님 그리고 이웃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면, 가난과 불의, 불평등과 부조리, 분쟁과 환경파괴의 문제에 대하여 이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반응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초기 교회와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회심’은 이렇게 역사적인 사안이었다. 세상은 그들을 ‘특정한 삶의 형태, 분별 가능한 생활방식을 따르는 사람들’, 즉 그들이 믿고 전파하는 복음을 “실제로 사는” 사람들로 인식했다. ‘회심’이 갖는 이러한 역사성은, ‘(회심을 통해 떠나온)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이 (회심을 통해서 속하게 된) 하나님 나라의 그것과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무형의 진리가 ‘새로운 방식의 삶’이라는 모습으로 incarnation된다는 관점에서 역사의 일부이지만, 시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고 동일하게 작용하는 복음의 능력이기에 역사를 뛰어넘어 영원으로 향한다.

저자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하여 세상이 알고 있는 바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세상의 관찰사이의 불일치, 결여된 연관성으로 인해서 복음 전도의 능력이 상실되었다고 지적하고, 이것을 “배반” (2장의 title)이라고 부른다. ‘예수가 구원자시다, 예수가 주인이시다’라는 구호와 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가시적인 사례가 개인과 역사속에서 실종되었을 때, 우리는 더이상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세대가 되었고, 우리의 질문은 ‘예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해주실까?’로 천착되었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임하는 새로운 질서가 아니라, 세상의 질서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등에 업는’ 방식으로 우상화되었다.

저자는, 1장과 2장에서 회심의 역사성, 하나님 나라와의 연관성 그리고 회심의 사회적 의미,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이 세대의 배반에 대한 일반론을 토대로, 가난, 전쟁, 교회, 예배에 대한 3장에서 6장까지의 각론을 통해 ‘회심’의 구체적인 영역을 제시한다.  

‘회심’을 통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의 부르심은 개인적이고 철저히 수동적이며 따라서 ‘생명을 얻는 사건’이지만(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므로), 그 부르심의 결과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된 한 개인에게 주어진 역사적 소명은 생명을 건 전투가 아닐 수 없다. ‘회심’이 세상의 불의와 불완전을 드러내기 때문에 세상은 ‘회심’을 싫어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으로 이 회심을 살아내라고 권면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이미 성취되었고 또한 성취될 승리에 대한 확신없이, 우리의 삶을 통째로 건 ‘회심’의 길을 세상을 거슬러 걸어가기는 어렵다. 

‘회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승리를 그 원동력으로 삼는다면, 그리스도인이 사는 회심의 삶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적대적이고 극단적이고 급진적이고 기존의 질서와 체계를 어지럽히며 또한 어리석은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인가.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 분의 가르침과 삶에 대한 당대의 반응이었고, 그 분을 따랐던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에 대한 세상의 태도였다. 21세기라는 역사를 소명으로 부여받은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회심’를 다시 배우고 ‘회심’을 살기 위해 모든 위험과 비용을 감수하기를 각오해야 하는 이유다.  

책을 덮으며, 이 ‘회심’의 길을, 삶으로 실재하는 믿음의 삶을 사는 누군가를 만나고픈 그리움과 나는 이 분명한 부르심앞에서 얼마나 생명을 쏟아붓고 있는지, 어떤 비용을 치르고 있는지에 대한 부끄러움이 교차했다. ‘역사 속의 회심’이 겨우 이제 내 안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성경적 회심의 목표는 역사와 별개로 영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그 폭발적인 힘과 함께 세상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회심은 개인에게서 시작하지만 세상을 위한 것이다” (1장 부르심, p41)

[코스타 보이스 – 2008 서평] 영화평

오늘 코스타 보이스 서평에서는 최근에 발표된 영화 중에 기독교적 세계관을 반영한 몇 가지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설득력있게 영상으로 소개한 영화들은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고 기독교적 메시지에 관심을 가진 주위사람들에게 복음을 자연스럽게 소개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읽을 수 있는 기독교 영화평은 http://www.umc.org/site/c.lwL4KnN1LtH/b.2285817/k.644B/Movie_Review_Archive.htm 에서, 추천 기독교 영화와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http://artsandfaith.com/t100/에서 참고할 수 있다.

Dogville
기독교적인 세계관의 가장 기초는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죄의 영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일부의 사람들, 악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이 아니고 어떤 때에 선한 의도와 행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사실이다. Dogville은 이 죄의 문제를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Dog과 달리 죄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있는 반면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없다. 영화는 외부적인 갈등에서 벗어나 있는 평화로워 보이는 작은 마을의 순박한 사람들의 매일매일의 삶 속에도 죄가 깊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연극 같은 삶을 통해 자기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사람들에게 죄와 구원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Children of Men
예수가 태어났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동화 같은 이야기로 비쳐지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식민지와 피식민지 간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점점 심해지는 식민정권의 억압정책으로 강제로 호구조사에 응하는 여정에서 인간이 누울 수 있는 가장 낮은 곳,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은 너무나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힘의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으나 이러한 모든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가장 약해보이는 생명의 아기였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있었던 일을 현실에 비추어 재구성하고 있어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밀양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제시하는 영화. 예수님에 대한 오해처럼 하나님에 대한 오해도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들에게 퍼져있는 것 같다. 예수님 속에 계시된 하나님은 낮아진 곳을 향하고 있던 ‘숨어계신 하나님’이셨다. 이 영화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신에 대한 이미지, 곧 힘과 영광의 실체가 기독교적인 생각이 아님을 생각해볼 수 있다. 빈 곳과 초라한 곳, 약한 곳과 병든 곳, 낮은 곳과 조용한 곳에 비치고 있는 햇볓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우리들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김영봉의 책 <숨어계신 하나님>은 이 영화를 바탕으로 기독교인들이 고민해볼 만한 문제 몇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소그룹에서 함께 읽고 나누면 많은 유익이 있을 것이다.

Cider House Rules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문학으로 형상화한 John Irving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주인공인 Homer의 가출과 귀환은 성서의 탕자의 비유를 모티프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야기의 아버지처럼 Dr. Larch는 강요하지도 않고 아들의 결정을 들어주지만 끝까지 자신의 사랑의 끈을 놓지 않고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모습을 통해서 결국 어떤 규칙도 그 근본이 사랑일 때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힘에 근거한 규칙은 사랑에 기반한 규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주제의식이 자연스레 예수님의 삶과 공명하고 있다. 결국 한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깊이있는 사랑이라는 주제의식을 잔잔한 영상과 함께 표현하고 있다.

Amazing Grace
영국의 노예무역제도 폐지 200주년 기념작. 노예무역폐지를 성경적 소명으로 받아들인 William Wilberforce의 생애를 그린 작품이다. 윌버포스가 당시 노예제도의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노예무역 폐지운동을 벌이던 감리교회 공동체와 함께 인내심을 갖고 끝내 노예무역금지 법안을 통과시키는 긴 여정을 그리고 있다. 개인적인 소명과 공동체적인 비전 안에 기독교적 비전을 꾸준히 추구해간 한 인물의 생애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코스타 보이스 – 2008 서평] 세계관, 윤리, 진로, 직업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거의 누구나 관심있는 주제이다.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앞을 쉽게 내다보기 힘든 불투명한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더욱 호소력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복음의 시각으로 세상의 다양한 현상들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그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데에 도움이 될 책을 소개해 본다.

알버트 월터스, <창조, 타락, 구속>, IVP
리차드 미들턴,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살림출판사
이승구,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SFC

기독교인으로서 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 문제에 대하여 정확히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세 책은 기독교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큰 틀을 제공하는 교과서적인 책들이다. <창조, 타락, 구속>은 세상의 창조, 죄에 의한 타락,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에 의한 새로운 사회의 창조라는 주제를 교과서적으로 잘 설명해주는 입문서이고,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은 그런 주제를 좀더 확장하여 포스트모더니즘 등 현대의 사조와 비교, 대조한 책이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는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틀을 좀더 심층적으로 검토하여 대안적인 틀에 검토해보는 책이다. 세계관 문제를 좀더 지성적으로 정리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좋은 책이 될 것 같다.

리처드 헤이스, <신약의 윤리적 비전>, IVP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슈들을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은 정치, 이혼과 재혼, 동성애, 반유대주의와 인종갈등, 낙태 등의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 그런 문제에 어떤 견해를 갖기 전에 성경에서 다양한 문제에 대한 원칙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책의 전반부에서 논의하듯이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연구할 때 바울서신, 복음서, 계시록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세윤, <하나님이 만드신 여성>, 두란노
<The IVP Women’s Bible Commentary>, IVP

복음주의권에서 성적 차별의 문제, 여성성과 남성성의 역할 문제, 여성성의 의미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는 몇 가지 시각 가운데 성적 차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면, 그에 대한 의미있는 문제제기와 성경적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여성>은 교회 안에 있는 가부장적인 문화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좀더 바람직한 공동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The IVP Women’s Bible Commentary>는 여성 저술가들에 의해 여성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신구약에 대한 각 권 주석을 시도한 책이다. 본문 중 이슈가 될만한 70여 가지 주제에 대해서 논의하는 에세이도 포함되어 있다.

제임스 패커, 캐롤린 나이스트롬, <하나님의 인도>, 생명의말씀사
우리는 매일같이 삶 속에서 내리는 모든 결정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외부의 징후를 통해 확인해야만 안도감을 느끼고, 각자의 지혜와 분별력을 외면하는 경우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무시한다든지, 혹은 지나친 신비주의를 용납하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하면서 시편 23편에 등장하는 선한 목자로서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돕는다. 보다 실용적인 지침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직업을 선택하거나 진로를 결정할 때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코스타 보이스 – 2008 서평] 이성교제, 결혼, 가정

기독교적 결혼관의 핵심은 결혼을 언약 관계로 보라는 것이다. 일반인들의 시각이 계약으로서의 결혼이라면 기독교인들은 언약으로서의 결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상호 이익을 위한 계약이 아닌 하나님과 함께 맺는 언약으로서 무조건적인 사랑과 수용의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교제와 결혼, 그리고 가정생활에 대해서 고민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독교적인 이성관, 결혼관을 이해하는 일일 것이다. 이번호 코스타 서평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바탕한 이성교제, 결혼에 대한 몇 가지 책을 소개해 본다.

마이크 메이슨, <결혼 그 신비로움의 비밀>, 도서출판 바울서신
Mike Mason, <The Mystery of Marriage> Multnomah Books, 2005

저자는 결혼의 본질에 대해, otherness, love, intimacy, vows, sex, submission and death의 주제로 깊이 묵상하고 있다. 간단한 몇 개의 문장으로 정리할 수 없는 깊은 내용을 제시하면서 통찰력 있는 문장으로 결혼의 신비를 제시하고 있다. 기독교 저술상인 Gold Medallion Award winner이며 20주년 기념판이 재판되었다. 매우 아름다운 문장이어서 서문에도 나오듯이 커플들이 서로 읽고 읽어주면 매우 큰 유익이 있을 것이다. 번역본을 구하기 어렵고, 영어본은 쉽게 구할 수 있다.

조은숙, <우리들의 거듭난 결혼 이야기>, IVP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기독교인이나 일반인이나 모두 겪고 있는 부부사이의 문제를 진솔하게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신앙에 대한 지나친(?) 확신으로 문제를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선교단체 커플이 실패한 결혼생활을 다시 변화시켜 나가는 이야기이다. 결혼생활에 문제를 갖고 있는 많은 부부들에게 해결방식은 다를 수 있지만 이런 나눔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마지막 장의 내용, 가정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섬김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부분은 다른 책에서 말하지 않는 중요한 주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데, 내용을 대폭 확장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도 있다. 만약 2편을 쓴다면 이 부분을 다양한 관점에서 다시 재구성하면 좋은 책이 나올 수 있으리라 본다.

로렌스 크랩, <결혼건축가>, 두란노서원
잭, 캐롤 메이홀 부부, <사랑 그 이상의 결혼>, 네비게이터 출판사

크랩의 <결혼건축가>는 결혼준비서로는 바이블에 해당될 정도로 결혼에 대한 기독교적 시각을 잘 제시하고 있다. <사랑 그 이상의 결혼>은 아주 표준적인 목차를 갖고 있는데, 시선을 끈 것은 ‘분명하게 말하기를 선택함’이라는 장이다. 의사소통에서 분명하게 말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계속 상기시키기 위해 교과서로 생각하고 구입했다. 말하고 표현하고 설명하주고 하는 데에 어려움을 많이 느끼는 많은 남자들이 말하지 않고 상대방이 스스로 알아주기를 바라는 데 반해, 여성들은 답답함을 많이 느낀다. 특히 표현하기보다는 참고 개인보다는 전체를 생각할 것을 교육받은 한국의 남자들은 의사소통에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그런 경우가 빈번하고 심하다. 부부간의 의사소통을 위해 그것을 서로 도와주어야 한다.

추위현, <생애의 반려자>, 5장 독신이냐 결혼이냐, IVP
Albert Hsu, <Singles at the Crossroads>, IVP

추위현의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독신의 문제는 만혼이 늘어가고 있는 요즘 더 의미있는 글이 아닌가 싶다. 독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형제나 자매를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가, 또 그들이 어떤 삶의 방식을 추구해야 하는지 실제적인 조언을 하고 있다. Hsu의 <Singles at the Crossroads>는 그 부제인 A Fresh Perspective on Christian Singleness와 같이 독신에 대해 신학적으로 검토하면서, 독신에 대한 그간의 잘못된 관점, 특히나 독신은 불완전하다는 생각을 재조명한다. 저자는 독신들도 공동체를 형성하면 하나님이 계획하신 완전함에 다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독신으로 살기를 고려하고 있거나 독신의 기간이 길어지고 있는 사람들 및 소그룹에서 함께 보기를 추천한다.

전경일, <맞벌이 부부로 산다는 것>, 다산북스
나성숙, <북어국>, 디자인하우스
결혼, 연애, 가정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주제이고 많은 책들이 시중에 나와있다. 그중 두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맞벌이 부부로 산다는 것>에서는 한국에서 맞벌이부부로 사는 어려움과 애환이 깊이 느껴진다. 굉장히 우울해지지만 고통과 갈등 속에서 힘을 내서 사는 한 부부의 모습 속에서 희망도 읽을 수 있다. <북어국>은 신문기자인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아내의 글모음이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상대방의 존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겠다.

한편 기독교 서적 중에 언약에 도달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너무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이 언약에 대한 고민과 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신중하게 생각하고 묵상해야 하는 점들을 살펴보고, 그 이후에 언약이므로 그 언약에 충실하기 위한 자기 희생을 말하는 것이 순서인 것 같다. 그리고 한국적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특수한 이야기, 결혼 과정, 고부갈등, 가정에서 남녀의 역할의 문제 등을 포함하는 것도 좋겠다. 그런 책들의 출현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