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소외된 이웃을 섬기는 그리스도인 / 박지연

이코스타 2003년 2월호


eKOSTA 이대에서 특수 교육학 학부 과정을 공부 하시고 교편 생활을 하셨는데, 학교 생활 후의 여정과 장애 아이들과 함께 한 삶에서 느낀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박지연 정신지체, 정서장애, 자폐성장애 등을 가지고 있는 유아들을 가르쳤는데요, 재미있고도 고민스런 시간이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겠지요. 대학 다니는 중에도 많은 자원봉사나 실습을 했지만, 그렇게 full-time으로 현장에서만 있어보게 된 것이 참 좋았어요. 아이들과 구르고 뛰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도 신났고요. 장애라는 특징을 가졌다 해도, 그 이전에 모두 “어린이”들이었기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호흡하고 아이들이 자라가는 것을 보는 게 참 좋았습니다.


“고민스런” 시간이었다고 말한 의미는, 그런 와중에도 ‘과연 내가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끊임없는 자문의 시간이었다는 뜻입니다. 아이마다 워낙 다양한 장애의 특성을 가지고 있고 학습특성도 달라서 아무리 좋은 교재나 방법도 모두에게 다 좋은 건 아니었고, 더구나 우리 아이들은 교육의 결과들이 서서히 나타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성과가 보이기 시작할 때까지는 조바심이 많이 났던 것 같아요. 돌아보면, 좀 더 오랜 시간 현장에서 배웠어도 좋았겠다 는 생각을 합니다. 길지 않은 교직생활기간을 가지고 이런 지면에서 길게 이야기 하는 것이, 오랜 기간 현장에서 수고하시는 선생님들에게 죄송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eKOSTA 교직 생활을 하시다가 미국 유학을 결정하셨는데, 구체적으로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다면 말씀해 주시고 특수 교육의 여러 분야 중에서 어떤 분야에 대해 학위를 받으셨는지요?


박지연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서 공부를 더 해보자는 생각을 한 것이었습니다., 꼭 외국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특수교육 쪽의 학위를 국내에서 하기가 지금보다는 훨씬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국으로 가게 된 거였습니다. 제가 공부한 분야는 장애인 가족지원과 장애아동 행동 지원입니다.


eKOSTA 한국에서 교직 생활을 하시다가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박 교수님께서 미국의 특수 교육과 장애인들의 현실에 대해서 느끼신 점이 많을 것 같은데, 어떠셨어요?


박지연 일단 일반인들의 인식이 무척 다르다 는 게 피부로 느껴졌지요. 한국에선 현장학습 갈 때 아이들 데리고 전철을 타거나 길을 걸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심히(?) 쳐다봐 주거든요. 혀를 차는 소리도 많이 들리 구요. 미국에선 참 다정하게 인사하고 지나가요. 장애아들이라서 특별히 더 친절하게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지나가는 아이들을 예뻐 하며 아는 척 하는 그 정도만큼만요. 그런 사회분위기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고, 미국의 정책과 교육방법을 단시일 내에 급히 도입하는 것으로는 얻을 수 없는 부러운 부분이었지요. 특수교육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와는 달리 특수학교를 찾아보기가 무척 힘들고, 대부분의 장애 아동들이 일반학교를 다니고 있으며, 그 아이들을 위해 수많은 전문가들이 정기적인 회의를 통해 협력하고 있는 체제가 마련되어 있다는 점 등이 놀라웠지요. 공교육이 끝난 후의 직업재활, 독립 주거 등에 있어서도 아직 국내에서는 생각도 못해본 형태들이 시도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eKOSTA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한국에 특별히 돌아가신 이유가 있다면? 그리고 지금 이대에서 특수 교육학의 어떤 분야들을 가르치세요?


박지연 저는 바울의 “빚진 자” 개념에 많이 동감합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자신을 구원하시고 부르셨기 때문에 자신은 이방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바울처럼, 저도 저를 장애인을 가르치고 돌보는(즉, 무언가를 “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장애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특수교육을 통해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제 삶이 생명력을 가지게 된 것을 생각하면 정말 큰 빚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그 빚을 갚을 대상이 꼭 한국의 장애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고, 국제기구나 제 3세계의 장애인을 위해서도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2001년 겨울 이대에 지원을 하면서 이 결과를 통해 어디서 일할지 알려주시기를 기도하고 그 결과에 따르기로 한 것 뿐입니다.


현재 이대에서 가르치는 분야는 무척 많습니다(아직 막내니까요^^). 하지만 주된 분야는 정서 및 행동 장애입니다. 그 외에 응용행동분석, 특수교육연구, 특수교육과 컴퓨터, 현장실습, 특수교육의 이해 등도 강의하지요.


eKOSTA 미국 유학을 마치고 처음 이대에서 강의하시면서 미래의 특수 교사들을 양성하시고 계신데요, 미국에 비해 한국 대학의 특수 교육학과 프로그램과 특수교사 채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지연 두 체제가 무척 다르기 때문에 단순한 비교를 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고요, 우리나라의 특수교사는 주로 학부에서 특수교육을 공부하고 임용고사를 통해 공립학교에 임용되거나 또는 소정의 과정(면접 등)을 통해 사립학교나 기관에서 일하게 되는데 반해, 미국에서는(물론 미국에서도 학부부터 특수교육을 하여 특수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만) 많은 학생들이 일반교육학 계통을 학부에서 하고 5년차 과정 또는 대학원 과정으로 특수교육을 공부해서 특수교사가 되기 때문에 일반아동의 발달에 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장애아동을 가르치게 되는 점이 좋은 것 같아요. 일반학급에 통합되어 있는 장애아동을 위해 일반교사를 지원함에 있어서도 특수교사가 더 많은 교육연수와 현장경험을 가지고 있음이 인정되니까 일반학급 교사들이 그 점을 존중하는 면도 있는 것 같고요. 우리나라의 경우, 갓 졸업해서 임용고사를 마친 젊은 특수 교사들이 자신보다 훨씬 경력이 많은 일반 교사들에게 통합지원을 하는 것이 그리 쉽지가 않거든요.


eKOSTA 코스타 사역 중에 전공 및 관심별 모임에 장애인 사역이 있습니다. 장애인들 역시 똑 같이 하나님의 형상 대로 지어 졌기 때문에 복음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한국 교회들이 갖고 있는 장애인 선교의 문제점이 있다면?


박지연 장애인 선교는 무척 광범위한 개념이라 제 수준에서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하긴 어려울 것 같고요(게다가 아직 귀국한지 1년이 안된 처지에서, 국내 장애인 선교의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여기서는 장애아동에 대한 선교에 국한해서 이야기 해볼까 해요. 10년 전 제가 주일학교를 할 때는 장애아동을 위한 예배가 있는 것만해도 매우 대단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많은 교회들이 장애아동 부서를 가지고 있어요. 양적으로는 엄청난 성장을 한 셈이지요. 이제 질적으로 변화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분리된 장애아동 주일학교가 아니라 일반 주일학교에 통합을 해야 한다는 거죠. 이미 있는 장애아동 부서를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그 부서는 장애아동이 비 장애아동과 함께 예배를 드릴 때 필요한 것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면 됩니다. 교사도 1:1로 배정해서 사전교육을 시키고, 공과책도 장애아동의 특성에 맞게 수정하고, 주일학교 예배실 내에 장애인 편의시설도 설치하고 하는 등의 일들을 맡는 거지요. 최근에는 한국에서 실험적으로 통합을 추구하고 있는 교회들도 생겨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만, 계속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eKOSTA 코스타가 소외된 이웃인 장애인들을 섬기는 일을 돕는데 있는데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박지연 유학생의 처지에서 소외된 이웃이라든가 장애인들을 돕기 위해 당장 action을 취하는 것이 그리 용이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코스타에서 매일 또는 매주 front page를 update할 때마다 한국이나 미국의 일간지에 나온 장애 또는 장애인 관련기사 중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것 하나씩을 실어서 (토론 방을 개설할 수도 있겠지요) 이코스타를 방문하는 사람들마다 장애와 관련된 이슈를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하면 어떨까 합니다. 직접 몸으로 나가서 부딪히는 적극적인 행동은 아니지만, 결국 한국사회로 돌아오든 미국에서 활동하게 되든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코스타 형제 자매들이 장애인에 대한 이해와 장애에 대한 사회의 반응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대로 정립하고 있다면 그 무엇으로도 얻기 어려운 “사회인식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 질 수 있을 테니까요.


eKOSTA 마지막으로 이건 개인적인 질문인데요, 지금 현재 남편 되시는 김 두식 교수님과 주말 부부로 지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두 분이 떨어져 지내시는데 자녀 교육 및 가정 생활은 어떻게 하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박지연 주말부부라고 해도 목요일 저녁이면 포항에서 서울로 오고요, 주일 저녁에 다시 내려 가기 때문에 크게 떨어져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게다가 전화, 이메일, 핸드폰문자 등으로 늘 이야기를 주고 받으니까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날그날 알 수 있고 집안 일도 그 때 그 때 의논합니다. 물론 서울이 되든 포항이 되든 함께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저희 부부는 이대와 한동대 모두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맡기신 사역지라 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주일에 나흘 정도 떨어져 있는 것이나 차비와 전화 비를 다른 가정보다 좀 더 많이 쓰는 것 정도는 별로 큰 어려움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젊은이들이 떼를 지어 모여있는 황금어장에 보내주신 것으로 무척 감사하니까요^^

[황지성] 낮아지신 예수, 섬기는 그리스도인

이코스타 2001년 12월호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의 삶의 관심은 분명히 달라졌다. 그동안 나를 위해 살았던 삶으로부터 돌이켜, 이제는 주님을 위해, 그리고 주님이 사랑하시고 섬기시기 원하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고 싶은 열망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야 한다. 좋은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지도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떻게…?


적지 않은 숫자의 Tele-Evangelist들이 그 메시지의 내용 때문에 종종 비난을 받아왔던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비판들 중의 하나는, 설교가들의 메시지들이 가끔 매우 치우친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을 이야기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삶이란 많은 경우에 고통과 좌절일 수 있고 잘 믿는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소위 성공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 한국 사회에서도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성공지향적인 가치관과 그러한 삶의 태도를 비판하는 소리가 심심치 않게 불거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 비판적인 소리들이 나오게 된 뒷 배경에는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리더십에 대한 서로 상반되는 입장들이 충돌하고있는 것을 보게된다. 그 한 편의 소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속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서야한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편의 소리는, 진정한 리더십이란 지위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향력에 의해 드러나므로 그 사람이 처한 지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견해이다. 어찌 되었든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에는 서로 공감을 하지만 그 영향력을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는 심각한 견해차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흔히 조직 내에서 리더의 영향력이 행사되는 방법을 이야기할 때 두 가지 상반되는 유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리더십은 그 사람의 조직 내에서의 지위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는 “positional” leadership이며 둘째로는 지위에 상관 없이 영향력에 따라 결정된다는 “influential” 혹은 “functional” leadership 이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다른 견해의 충돌은 이 각각의 입장을 극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초래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삶의 정황을 둘러보면 리더십이 행사되는 데에 있어서 이 각 양상이 부정적으로 표출되는 예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건전한 영향력은 고사하고 조직에 적지 않은 해를 끼치는 사람이 리더의 자리(position)에 앉아 있는 경우나, 혹은 좋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단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 위치(position)에 서지 못해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소위 구조적인 모순이 극대화된 경우가 그 구체적인 예들이다. 그렇다면, 가장 바람직한 경우는 이러한 “functional leader”가 그의 “positional leadership”의 위치에 서는 경우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은, 이 각각 다른 견해들의 기본 전제로서의 세속에서의 조직의 모습, 즉 “leader”들과 “leadee”들로 구성된 보편적인 공동체의 모습 자체가,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창조 질서로부터 매우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세속 조직의 사명의 기본 목표는 어떤 “목표”나 “일”을 성취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그 조직의 사명을 가장 잘 이루어낼 수 있는 사람을 리더의 위치에 세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속에서는 사람들의 역량을 비교와 경쟁을 통해 평가하여 리더를 결정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취하는 입장이라고 해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전제에서는 조직 내의 사람들의 ‘관계’보다는 ‘사명의 성취’를 극단적으로 중요시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경우 현재의 조직의 사람들과는 전혀 친밀함의 관계가 없던 사람들을 리더십의 위치로 “모셔오기”도 서슴치 않는다. 이와 같은 행태들은 많은 경우 조직 내에 심각한 갈등들을 초래하게 된다. 심지어는 교회 공동체나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사명의 성취’만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나머지, 공동체 안의 ‘관계지향’적인 노력들이 무시되는 경우들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안에서의 리더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신명기 17장 14절-20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왕권 국가의 기반을 닦을 때에 필요한 지침들을 지도자 모세를 통해 주신다. 주목할 것은, 그 “왕”을 세우려는 생각 자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주변의 가나안 족속들의 조직을 보고 배운 것에 근거한다는 것이다(14절). 하나님은 정말로 백성에게 친밀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다가 오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세속 조직의 요구 대한 요청을 들어 주시리라는 허락과 함께, 주의할 일, 즉, 왕을 세우는 방법과 그 왕이 어떠한 삶의 기본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 가에 대한 지침을 주고 계신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리더십의 원리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씀을 통해 찾을 수 있는 원리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리더는 공동체의 하나됨을 경험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리더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은 공동체 안에서의 “다른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의 정립”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관계는 마치 피를 나눈 가족 형제와 같은 “하나됨”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리더는 공동체 지체들의 모든 삶의 정황들, 고통과 아픔과 기쁨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 즉, 네 형제 가운데에서 세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15절). 그렇다면 리더가 공동체를 위해 기도할 때에도 결코 “저들을 위해….”라기보다는 “우리를 위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많은 선지자들이 자기 백성에 대해 가졌던 기본 자세이며(예: 이사야53:6)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셨던 중보자의 자세인 것이다.


두 번째 원리는, 리더가 내리는 모든 결정에 대한 기본 원리에는 절대적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왕이 된 자가 병마를 많이 두지 말라고 말씀하신다(16절). 이 말씀에는 다분히, 리더는 하나님의 주시는 능력을 의지할 것이지 결코 자신의 능력을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하나님의 경계가 들어있다. 그런데 이 말씀의 끝에 굳이 병마를 많이 구하기 위해 애굽땅으로 돌아가지 말 것을 강조하신다. 더불어서, 그 이유는, 이미 하나님께서 전에 이 백성들에게 주신 명령, 즉 애굽땅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명령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결정들은 더 큰 기본 원리의 테두리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원리이다. 리더는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안목으로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안목은 분명하고 일관성이 있는 절대적 가치 기준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그 가치 기준이란 말씀의 원리인 동시에 기도를 통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셋째로 볼 수 있는 원리는, 리더는 죄의 예방에 대한 전술이 탁월해야한다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죄에 빠지지 않도록 모든 미혹하는 요소들을 미리, 체계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왕이 된 자는 “많은 아내를 두지 말 것”과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을 명령하신다 (17절).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의 마음이 미혹되어진다고 경계하신다.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사단의 전략에 말려들지 않도록 유혹의 자리를 피하고, 유혹의 시간을 갖지 않고, 유혹의 대상에서 충분히 떨어져 있어야한다. 세상에서 보기 드문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도 이 예방의 전략에 철저하지 않을 때에 너무도 쉽게 넘어지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넷째 원리는, 리더는 말씀을 일생동안 배워야한다는 것이다. 왕이 된 자는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워야 한다고 명령하신다(18-19절).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율법서,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제사장앞에서 왕은 자기 손으로 필사해야한다(18절).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손으로 한 자 한 자 필사해가는, 말씀앞에서 낮아진 리더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여주시는 원리는, 리더는 행동과 더불어 중심으로 섬기는 자이어야한다는 것이다. 생각은 비록 겸손하게 되지 않더라도 그 겉으로 표현하는 태도가 겸손해야 한다는 정도의 겸손이 아니다. 그의 마음 자체가 그 형제위에 교만하지 않을 것을 말씀하신다 (that his “heart” may not be lifted up above his countrymen that his heart may not be lifted up above his countrymen 20절). 다시 말하면, 겉의 태도는 물론이거니와 그 속마음까지도 겸손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되려면 섬기는 리더의 내면에서 혁명이 일어나야한다. 바로 이 말씀이 지적하시듯이, 그 내적 혁명은 살아있는 말씀과 이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영혼을 변화시키시는 성령님의 혁명으로서만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19-20절).


우리 모두가 공감하다시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은 그의 공생애동안 섬기는 리더로서의 완전한 모범을 사시었다. 사실 주님의 세상에 오셔서 섬기신 모습은 “positional leadership”도, “influential leadership”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주님은 유력한 지도자의 “지위”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세속적 조직력”을 갖고 섬기시지 않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주님은 자신의 “비천한” 사회적 신분을 인정하시면서 단순히 “영향력”만을 행사하신 분도 아니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능욕을 감수하시면서까지 자신의 목숨을 범죄한 세상을 위해 다 내어주셨다. 인간의 죄악된 삶의 정황가운데에 들어오셨던, “leadership of living-together”의 모범을 보이신 분이시다. 그것은 세속의 어떠한 위치로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어떤 영향력만으로 할 수 있는 섬김의 모습정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목숨까지 주시는 사랑, 즉 가장 낮아지신 섬김의 자리, 그 섬기셔야 할 사람들의 상황안에 오시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섬김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고 주님은 더 낮은 자리에 서시는 그 모습이었다. 예를 들어, 주님의 그 수많은 섬김의 모습가운데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도마를 향한 섬김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친히 나타나셨을 때에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주님을 보지 못했던 그는 나중에,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했다. 며칠후, 주님께서 이 도마에게 찾아오셨다. 그리고 도마가 말한 그대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에는 못자국과 창자국이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부활의 몸은 영광의 몸이 될 것을 우리 주님은 약속하셨다. 그러기에 모든 연약함과 눈물이 없는 영광의 몸이 될 것을 우리는 감격으로 믿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몸은 다르다. 그 몸에는 못자국과 창자국이 그대로 있다. 그 몸에 그 상처들을 그대로 갖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도마의 연약한 믿음을 세우시기 위해서였다고 믿는다.


험악하고 사랑이 식어진 이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가나안의 정복되지 않은 나라들속에 섞여사는 하나님의 백성들같다. 그러나 오래 전, 한 백성공동체를 택하셔서 가나안 땅의 족속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증거하기를 원하신다. 이 세상,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죽음으로 내어주신 이 세상의 영혼들을 주님께로 돌이키기위해 그리고 그들이 더 성숙한 자리로 들어가도록 하기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섬기는 리더들이 구름과같이 일어나기를 소원하며, 나 또한 그렇게 되기를 훈련하며 또한 행동할 때이다.

[박수경] 개인 영성의 개혁, 사랑의 섬김으로

이코스타 2001년 2월호


개인 영성의 개혁, 사랑의 섬김으로


최근 한국교회의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다. 크리스천 유학생으로서 아마도 누구나 한번쯤은 그러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지적된 원인에 대해 공감을 표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의 외침에 동조하기도 하였음직하다. 그러나 개혁의 목소리가 ‘한국교회’라는 대표성을 지닌 ‘집단’에게만 향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라고 하신 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이룬다는 말씀을 상기할 때, 현재 미국내에서 신앙생활을 하고있는 우리 크리스천 유학생에게로 향한 ‘개혁’의 목소리에도 민감하게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개혁’의 사전적 정의가 ‘현존하는 체제를 새롭게 고치는 것’이라고 할 때 크리스천 유학생으로서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묙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다면 그에 비추어 각자 자신에게서 ‘무엇이 어떻게 고쳐져야 하는가’에 대한 자문자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제시되는, 서로 다른 신앙적 배경을 가지고 유학생활을 시작한 김 아무개군과 조 아무개군의 이야기를 통해 크리스천 유학생으로서 추구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한번 짚어보기로 하자.


김군은 한국에서 학부시절(1991년)부터 교내 기독동아리 회장 역임, 선교단체 활동, 교회 내의 봉사 등을 통해 체계적인 제자훈련을 받아왔고, 97년 초 처음 유학생활을 시작할 때 부터 그가 속한 교회에서 바로 유학생그룹을 양육하는 일을 의뢰받았다. 유학 첫학기부터 준비해야 했던 박사과정 자격시험과 새로운 지도교수 하에서 수행해야 할 연구과제 등에 대한 부담과 ‘시간’이라는 물리적인 헌신과 사랑의 수고를 전제로 하는 지역교회 섬기기를 어떻게 잘 조화시키느냐로 고민하던 김군은 유학생그룹 성경공부에의 참여시기를 박사과정 자격시험이 끝나는 첫학기 이후로 보류하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박사과정 자격시험에서의 실패는 그에겐 커다란 충격이었고,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을 자신의 첫 성경공부 참여일로 잡았던 김군은 그간 계획해 왔던 믿는 형제자매들과의 말씀을 통한 모든 교제로부터 고립되고자 하는 강한 유혹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는 그가 속한 성경공부 그룹 내의 동료들을 통해 위로와 평안을 주셨고, 이후 그들을 양육하는 섬김의 기회를 주셨다. 같은 시기에 또다른 성경공부에서 김군으로 양육도 받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은 이사야 55장 9절-11절,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니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고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에 내게 동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일에 형통하리라”로, 그가 마지막 자격시험을 앞두고 그 시험에 떨어지면 바로 귀국하여 입대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혹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 모든 길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평안함을 가지고 시험준비를 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믿음 안에서 말씀을 배우고 삷과 신앙을 공유했던 성경공부 동기들로부터의 격려와 중보기도로 풍성해진 믿음의 반석 위에, 학문적 목표를 추구하며 평안 가운데 치를 수 있었던 두번째 자격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김군은 이후로도 꾸준히 섬기는 교회의 성경공부 리더로서, 지역교회 연합 기도모임의 코디네이터로 섬기고 있다. 그는 자신이 양육받으면서 키워왔던 영성이 또한 주변의 형제자매들을 양육함으로 성장되어왔음을 언급하면서 크리스천 유학생으로서 ‘섬김의 실천’을 통한 ‘믿음성장’의 필요성을 재차 강조하였다.


또다른 경우로, 한국에서 모태신앙이기는 하나 습관적인 ‘교회생활’을 해 오던 조군의 경우는 유학생활 초기에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었다. 그러던 그에게 하나님과의 개인적 만남을 갖게 한 것은 당시 청년부 리더의 사랑과 헌신, 섬김에 근거한 말씀의 가르침이었다. 매주 토요일 저녁 두시간여의 성경공부를 통한 단순한 ‘말씀의 전달’에서 그치지 않고 주중에도 계속되었던 청년부 리더의 관심어린 전화연락과 눈물의 중보기도를 통해 이루어진 ‘사랑의 섬김’으로 인하여, 그의 ‘생명력을 지닌 말씀의 선포’는 조군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번은 조군이 발목을 삐어서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쉬고 있던 것을 우연히 알게 된 리더가 점심 휴식시간을 통해 파스를 사가지고 와서 직접 그의 발목에 붙여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조군은 제자들의 발을 씻긴 예수님의 섬김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러한 모습을 통해 말씀 안에서 감동되어 그간 형식적이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게 되었고 영성을 성장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청년부회장으로 섬기는 기회가 왔을 때 그가 가장 염두에 둔 것은 그가 받은 사랑의 섬김을 동일하게 청년부 형제자매들에게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경우와 같이 그들의 영혼이 변화될 수 있도록 쓰임을 받고자 하는 것이었다.


‘섬김을 받던 위치’에서 ‘섬기는 위치’로의 전환은 그에게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사랑의 수고에 대한 대가를 가르쳐 주는 계기가 되었고, 그 스스로가 지난 수년간 외면해 왔던, 그를 양육하고자 애썼던 많은 리더들의 섬김과 중보기도를 기억나게 하여 회개하고 감사하게 만들었다. 또 그러한 사랑의 수고에 영성과 기도가 반석이 되지 않는다면 그 수고는 단지 소모적이고 열매가 없는 섬김이 됨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다음과 같은 경험을 나누었다. 한번은 청년부원들을 모아 식사를 대접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하나님만을 나타낼 수 있도록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보다 동료들로부터 좋은 리더로의 평가를 받고자 하는 자기 의가 앞섬으로 인해 식사준비에 대한 부담으로만 마음이 집중되어 정작 사랑의 나눔과 영혼을 돌보는 일에 미흡함을 남긴 아쉬운 모임이 되었다고 한다. 청년부 리더로부터 ‘사랑의 섬김’이라는 본을 받아, 섬기는 자의 위치에서 청년부 형제자매들을 대상으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조군 스스로가 그 마음 안에 영혼에 대한 사랑의 강도가 자라가고 영적으로 성숙해 감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는 이러한 변화는 ‘섬김의 실천’을 통하지 않았으면 얻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취재를 마치면서 시작이 전혀 달라 보이는 두 형제의 경험을 통해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두 형제 모두 믿음 안에 있는 주변 형제자매들의 섬기는 손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과의 관계를 성장시켜 갔고 결국은 다시 또다른 형제자매를 사랑으로 섬기는 헌신을 통해 더욱 풍성하게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약 2:17)라는 말씀을 통해서도 나타나듯, 이를 실천이 있는 살아있는 믿음을 우리로 하여금 유학생활중에 훈련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한다면, 크리스천 유학생으로서 한시적 유학기간 동안 변화받고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준비되기 위한 필수훈련은 사랑의 섬김을 직접 실천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그리고 이를 통해 변화되는 것은 ‘내가 섬기는 그 사람’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포함된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지성적인 크리스천 유학생으로서 코스타와 같은 말씀의 잔치에서 폭포수같이 부어주셨던 은혜를 어떻게 일년 내내 간직하고 오히려 더 풍성하게 이루어갈 수 있는 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크리스천 유학생을 향한 ‘개혁’의 목소리에 스스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